어둡고 칙칙한 골목, 어릴 적부터 서진태를 사랑한 강은하는 꼭 서진태와 결혼하겠다고 다짐했고 결혼 후 같이 여행을 다니며 낯선 곳에서 손을 잡고 키스하는 꿈을 꿨다.강은하가 제일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서진태가 조금만 부드럽게 나와도 금방 풀리는 게 너무나도 싫었다. 게다가 둘 사이에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많았다.강은하는 서진태를 역겨워하면서도 파도처럼 밀려오는 서진태의 키스에 점점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자 바로 고개를 돌렸다.어둠 속, 서진태가 강은하의 턱을 꽉 부여잡더니 이렇게 말했다.“나 홍수아랑 별거 없어. 앞으로 더 스캔들 날 일도 없고.”서진태는 결국 강은하가 묻기도 전에 직접 나서서 해명했다.벽에 기댄 강은하는 머리만 들어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을 바라볼 수 있었다. 서진태는 아직도 몸을 강은하에게 바짝 붙이고 서 있었다.“미쳤어?”멀리서 여행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여기를 지나쳐 민박으로 돌아가려는 듯 보였다.“뭐가 무서워서 그래?”서진태가 말했다.“길에서 우연히 만나서 아무렇게나 잠자리를 가지는 것도 아닌데. 우린 법으로 허용된 사이잖아.”서진태는 지금 막 욕구가 차오른 상태였다. 고개를 숙이면 강은하가 서진태의 옷을 입고 있는 게 보였는데 강은하에겐 너무 커서 작은 키가 아니었는데도 다소 왜소해 보였다. 서진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친밀한 느낌에 매우 만족했다.“이제 돌아가 봐야 해요.”강은하가 이렇게 말하자 서진태가 몸을 더 바짝 붙이더니 강은하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비밀번호 뭐야?”“뭐 하는 거예요?”강은하가 핸드폰을 뺏으려 하자 서진태가 잠깐 고민하더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기 생일을 입력했는데 바로 잠금이 풀렸다.순간 강은하는 마음 깊은 곳에 숨기고 싶었던 속내를 들킨 사람처럼 난감했다. 이성은 서진태와 이혼하고 남남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핸드폰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을 리가 없었다.“아직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가르쳐줘?”서진태의 목소리는 매우 덤덤했다.“알겠습니다.”황재민은 서진태의 말투에서 그냥 원칙대로 처리하라는 뜻을 알아차렸다. 사실 두 사람은 그저 ‘옥 패물’로 연관되어 있을 뿐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게다가 홍수아가 저번에 미풍 그룹에서 주제도 모르고 강은하를 모욕했으니 자원이 달리기 시작했다.전화를 끊은 서진태는 방으로 돌아갔다. 강은하는 옆으로 누워있었는데 머리카락이 얼굴로 흘러내려 서진태의 각도에서 보면 오뚝한 콧날이 보였다.서진태는 손가락으로 강은하의 볼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더니 단잠에 빠진 강은하의 얼굴과 몸에 남은 사랑의 흔적을 내려다봤다. 사랑을 나눌 때의 강은하는 참으로 아름다웠고 이런 생활도 그럭저럭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아직 사랑하지는 않지만 예쁘고 총명한 데다 유머러스한 와이프를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어제 춘정에서 고성으로 옮겨오며 반나절을 차로 이동해서 피곤했는지 핸드폰이 여러 번 울려도 강은하는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야 침대에서 일어났고 서진태가 보이지 않자 잠옷 가운을 걸치고 문을 열었다.안서연은 강은하를 보자마자 소파로 끌어다 앉히더니 핸드폰을 강은하에게 건네줬다.강은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다시금 검색어 순위에 오른 서진태의 기사를 확인했다. 하지만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뭔가 이상했다. 서진태가 품에 안고 물고 뜯는 여자가 다름 아닌 강은하였기 때문이다.순간 강은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사에 실린 사진은 어젯밤 두 사람이 골목에서 키스하는 모습을 몰래 찍은 것이었다. 다른 사진도 있었지만 다 뒷모습이었고 얼굴이 찍히지 않았다.강은하는 이 사진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네티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고성에서 서진태와 함께한 여자가 홍수가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이 기사는 인기가 매우 좋았다. 팬들은 두 사람의 인스타에 댓글을 남기며 두 사람의 공식적인 답변을 기다렸다.강은하는
홍수아의 전화를 받은 황재민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홍수아가 준 정보가 제한적이긴 했지만 황재민과 서진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홍수아가 준 정보에 따라 여러 곳을 찾아다녔지만 그때마다 별다른 소득 없이 돌아오곤 했다.서진태가 그 여자의 존재를 굳게 믿지만 않았다면 황재민은 홍수아가 준 정보가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몇 년 동안 소식이 없다가 자수하라고 하니까 소식이 생긴 거예요?”황재민이 차갑게 웃더니 더는 홍수아와 입씨름하기가 싫어 전화를 끊어버렸다.‘내가 바보인 줄 아나?’황재민이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지만 홍수아는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다. 이제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홍수아는 다시 자신감을 얻었다. 서진태가 몇 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찾아다닌 걸 봐서는 그 여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만 찾아준다면 홍수아는 여전히 연예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강은하는 다음날 안서연과 고성에서 승마를 즐기고 배를 타는가 하면 산으로 올라가 눈을 구경했고 서진태는 인내심 있게 동행하며 가끔 사진도 찍어줬다.안서연은 강은하에게 서진태가 정말 정직하게 결혼생활을 이어 나갈 생각이 있다고 해도 이혼할 것인지 물었고 강은하는 아직 모르겠다고 답했다.어릴 적부터 쌓아온 감정이라 꽤 깊었고 첫사랑이기도 했다. 예전이라면 정말 원하는 바를 이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서진태가 옆에서 있어도, 잘 보이려고 노력해도 덤덤했다.하루 종일 밖에서 돌아친 강은하와 안서연은 호텔로 돌아와 같이 별을 감상했고 호텔 사장은 자기가 직접 만든 와인을 두 사람에게 내어줬다. 맛이 좋긴 했지만 취기가 바로 올라왔다.강은하는 와인 두 잔을 마시고 소파에 나른하게 뻗어있었다. 일 처리를 마치고 돌아온 서진태는 강은하의 눈빛이 어딘가 몽롱한 걸 발견했다.안서연은 지금 서진태만 보면 짜증이 치밀어올라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강은하에게 인사하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
홍수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쳐든 채 서진태의 잘생긴 얼굴과 날렵한 턱선을 바라봤다. 정장을 입지 않고 까만 라운드넥 니트를 입은 서진태는 오늘따라 유난히 섹시해 보였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을 보고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말해. 미련한 것까지 자랑할 셈이야?”서진태가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 그 스케치를 그린 사람이 그가 찾던 그 여자만 아니었어도 서진태가 이렇게 달려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 여자 말을 못 해요.”서진태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홍수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연예계 생활을 오래 이어온 홍수아는 눈치를 살피는데 능했기에 서진태의 표정을 보고 맞게 추측했음을 알아챘고는 강씨 저택 바로 옆에 그 벙어리가 살고 있다고 말했다.황재민은 이 말을 듣자마자 그 여자가 누군지 알게 되면 강은하는 어떻게 될지 걱정했다.“진태 씨, 내가 그런 일을 저질렀는데 그 여자가 누군지 바로 알려주면 내 살길도 끊기는 거 아니겠어요?”“갑자기 머리 쓰니까 적응이 필요하네.”서진태가 말했다.“원하는 거 있으면 황 비서한테 말해.”서진태는 홍수아가 총명한 척하는 게 너무 싫었고 어설프게 그를 휘두르려 드는 것도 역겨워 얼른 차에 올라타더니 창문을 내리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해성의 새벽은 춘정과 고성의 날씨와는 달리 밤바람이 차가운 게 얼굴을 때렸다. 황재민이 얼굴을 굳히고 다가오자 서진태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재를 털어내더니 이렇게 말했다.“뭐래?”“조건이 적지는 않은데 거의 뭐 명예랑 관련된 일이라 처리하기 쉬워요. 하지만 사모님에게 약을 탄 건 대표님이 직접 처리해달라고 합니다.”“그래. 내가 처리하지.”서진태가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황재민은 입술을 뻐끔거리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올랐다.차에 시동이 걸리자 서진태는 반쯤 남은 담배를 밖으로 던지며 말해다.“양윤아와 주성민이 은하에게 약 탄 사람 찾고 있었지?”“네.”“일단 강은하 모르게 하고 내가 처리할게.”“네.”...강은하는 서진태가 떠난
“아참, 서유미 출국했던데요?”“언제요?”“한주 됐는데 아직 안 돌아오고 있어요.”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강은하가 진영민에게 확인해 보니 서유미가 운영하는 회사의 업무는 파트너가 도맡아서 하고 있었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통화가 되던 서유미가 오늘부터 전화가 안 된다는 걸 알아냈다.“괜찮아요. 일단 신경 쓰지 마요.”“그러면 배후를 찾는 단서가 끊기는데요.”양윤아는 그 배후를 찾아내지 못한 게 아직도 매우 찝찝했지만 강은하가 그런 양윤아를 보며 웃었다.“지금까지 별일 없이 잘 버텼잖아요. 앞으로 더 조심할게요.”약을 탔던 그날만 생각하면 양윤아는 가슴이 떨렸다.“그날 송 대표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강은하도 목이 메어왔다.“다행이죠. 정말 다행이에요.”양윤아는 언제나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는 강은하를 보며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마음 아파했다. 여자 혼자 밖에서 일하는데 보호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 불쌍했다.다음날, 잠깐 다른 일을 처리하고 회사로 들어가니 양윤아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소식이 전부 끊겼을뿐더러 전에 증인으로 찾아둔 웨이터도 더는 도와줄 수 없을 것 같다며 전화를 걸어왔어요.”강은하가 아무리 멍청하다 해도 누군가 일부러 배후를 숨겨주고 있다는 것쯤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걸터앉아 두 바퀴 정도 빙빙 돈 강은하는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 강은하가 입을 열려는데 여자 목소리가 들렸고 잠깐 멈칫하던 강은하가 이렇게 말했다.“미안해요. 좋은 시간 방해했네요.”“돌아왔어?”꽤 차분해 보이는 서진태의 목소리가 강은하가 살짝 놀랐다.“아니면 하던 일 마저 하고 다시 통화할래요?”강은하는 생각해 둔 말이 있었지만 갑자기 들려온 여자 목소리에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몰랐다.“무슨 생각하는 거야?”서진태의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홍수아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조금 멀어졌다. 이에 강은하는 두 사람이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넋을 놓고 있는데 서진태가 이렇게 말했다.“뭘
서진태는 이렇게 말하며 강은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은하는 갑자기 들이닥친 서진태의 부드러움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하긴 이제 26이니 사랑만 논하는 나이는 지난 것 같았다.기분이 좋은 서진태와는 달리 강은하의 텐션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녀는 까만 브이넥 스웨터에 같은 색감의 터틀넥을 맞춰 입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깔끔하면서도 노련해 보였고 살짝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옆에 앉아 있던 서진태가 강은하를 품으로 끌어당기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왜? 일이 잘 안돼?”서진태도 이제는 제법 모범 남편처럼 강은하의 기분을 달래고 고민을 해결해 주려 했다.“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이에요.”이 말에 놀란 서진태는 고개를 들어 들어올 때와 다름없이 그를 향해 웃어주는 어여쁜 와이프를 바라봤다. 다리에 앉히고 거리가 좁혀져서야 서진태는 강은하의 웃음이 눈동자까지 번지지는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데리러 가지 않아서 화난 거야?”서진태가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어요.”강은하가 이렇게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서진태가 강은하의 허리를 꽉 부여잡았고 부드러운 눈빛은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왜요? 안 들어가요?”강은하는 서진태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응.”“근데 도대체 왜 또 이러는 거야?”‘또‘라는 글자에 강은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서진태가 강은하에게 조금이라도 진심이었다면 ‘또’라는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강은하는 저녁 식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나 또… 이혼하고 싶어졌어요.”이 말에 서진태의 표정이 차갑게 굳더니 마지막 만찬으로 올라온 메뉴들을 쭉 살펴봤다. 강은하는 격식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고성에서 강은하는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얌전한 편이었고 서진태가 안으면 안겨 있었는데 그것이 최형준에게서 안서연을 빼내려는 수단일 뿐 진심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진태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서진태가 차가운 눈빛으로 강은하를 쏘아보더니 강은하를 테이블
강은하가 울먹거리자 보는 사람을 마음 아프게 했다. 코가 빨개지고 눈물이 눈동자를 가득 메워 그렁그렁했지만 애써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는 모습이 마치 부서지기 쉬운 도자기 인형 같았다.서진태가 손을 내밀어 강은하의 얼굴을 만지려는데 강은하가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이제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죠.”강은하는 이제 서진태가 연기해 낸 부드러움이 너무 역겨워서 더는 한 공간에 있기가 싫어 이혼 서류를 테이블에 던져둔 채 핸드폰만 가지고 나왔다.식당에서 나온 강은하는 갑자기 불어온 찬바람에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외투와 가방을 룸에 두고 나왔다는 걸 발견하고 나서야 강은하는 자기가 일부러 강한 척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사실 강은하는 너무 당황스럽고 난감했다. 자기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남자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강은하는 눈물범벅이 된 눈으로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차를 불렀다.손님과 식사하러 온 주성민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강은하를 발견했다. 얇은 옷만 걸치고 나온 강은하는 차분하고 도도하던 평소와는 달리 집을 찾지 못하는 아이처럼 무력해 보였다.주성민이 한숨을 내쉬더니 손님에게 몇 마디 건네고는 강은하를 향해 걸어가며 입고 있던 패딩을 벗었다. 주성민의 체온이 남아있는 패딩이 강은하의 어깨에 걸쳐지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강은하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오늘 영하 7도에요. 안 꾸며도 예쁘니까 이렇게 얇게 입고 다니지 마요. 그러다 얼어 죽을 수도 있어요.”주성민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강은하도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일단 입고 집에 가요. 오늘은 곁에 있어 줄 수 없을 것 같아요.”강은하는 다른 두 남자가 옆에서 주성민을 기다리는 걸 발견했다.“고마워요.”“나는 이만 갈게요.”강은하가 고개를 돌려보니 주성민이 식당 쪽으로 걸어가며 옆에 선 남자들과 대화하는 걸 보았다. 너무 얇게 입어서 그런지 주성민은 전체적으로 말라 보였다. 문 앞까지 간 주성
홍수아의 처지가 떳떳하지 못하다 해도 결국 문제의 근원은 남자에게 있다고 생각해 홍수아를 찾은 적이 없었다. 다만 홍수아가 자꾸만 건드리니 강은하도 홍수아와 ‘얘기’를 좀 나눠보고 싶었다.“차 마실래요? 커피 마실래요?”홍수아는 주인 행세 하나는 참 잘했다.“마실 건 필요 없어요. 오늘 이렇게 온건 분풀이 좀 하려고 왔어요.”홍수아는 잘못 들은 줄 알고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강은하에게 머리채를 잡혀 벽 쪽으로 나동그라졌다....서진태가 달려갔을 때 홍수아는 구석에 앉아 울고 있었는데 이마에 커다란 혹이 부어오른 데다가 얼굴은 귀싸대기를 맞아 온통 손자국으로 범벅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주인공인 강은하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채 억울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홍수아는 서진태를 보자마자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진태의 품에 쓰러졌다. 서진태는 미련하기 그지없는 홍수아를 멀리하고 싶었지만 강은하의 덤덤한 표정에 밀어내는 걸 포기하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너 어떻게 된 거야?”“홍수아 씨, 사랑하는 자기 왔으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한번 말해봐요.”강은하는 이제 서진태를 남편이 아닌 그저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서진태가 ‘또 왜 그래’라는 말을 내뱉은 순간부터 강은하는 서진태가 반성한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진심을 내어주기 싫어하는 사람이니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서진태는 강은하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를바 없는 낯선 사람이 되고 말았고 지금 누구를 안고 있든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홍수아가 울먹이며 강은하가 어떻게 귀싸대기를 내리쳤는지, 어떻게 머리채를 잡고 벽에 머리를 박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듣다가 짜증이 난 강은하가 이렇게 쏘아붙였다.“내가 왜 홍수아 씨를 때렸는지는 왜 말 안 해요?”사업을 하는 여자라 매서운 말투로 말하면 위압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화들짝 놀란 홍수아가 서진태의 품에 안겨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강은하가 그런 홍수아를 째려
서진태는 손을 들어 올려 강은하의 뒷목을 잡고 피하지 못하게 했다.이불이 툭 떨어지고 은은한 노란 조명 아래 예쁜 그녀의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팔을 뻗어 그녀를 품 안에 가두었다.강압적이면서도 다정한 키스였지만 금방 막 잠에서 깬 그녀에겐 적당한 키스였다.강은하는 더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어찌할 수 없었다...그동안 두 사람은 하루도 빠짐없이 싸워댔다. 그가 키스하려고 하면 그녀는 휙 피해버리기도 했다.그런데 지금 피하지 못하게 잡고 키스를 하니 서진태는 이성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그녀를 삼켜버릴 듯 입안을 헤집고 있었다.피할 수 없는 강은하는 점차 숨이 막혀왔고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방 안에는 은은한 조명뿐이었지만 그녀에겐 여전히 너무도 밝은 조명이었다.“제가 동의하지 않으면 억지로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요?”그녀는 그가 지난번 집에 있었을 때처럼 키스할까 봐 두려웠다.그의 키스에는 묘한 감정이 담겨 있었고 그녀가 착각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라고.그러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서진태였다. 그녀를 진심으로 아낄 리가 없지 않은가.서진태가 제일 잘하는 것은 연기였고 그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몸일 뿐이었다.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탐욕스럽게 그녀의 반응을 끌어냈다. 그녀가 작게 신음을 내가 그제야 그는 머리를 들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쓸어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약간의 어쩔 줄 모르는 수줍음이 남아 있어 매혹적이었다.“오늘 분위기가 아주 좋네.”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면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강은하는 그를 보며 말했다.“하지만 당신은 더럽잖아요.”...강은하는 예쁘고, 머리도 똑똑하고, 끈기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진태에게 그런 그녀의 장점들보다 분위기를 깨는 능력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서진태의 표정이 차가워지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 더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강은하도 똑같이 행동하면서 잠을 자려고 했지만 졸리
“아니요.”강은하는 단박에 거절하곤 어깨에 있는 그의 손을 쳐냈다.서진태는 품이 너른 니트를 입고 있었고 두 손은 소파에 내려놓은 채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눈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는 기분이 좋은 듯했다.한참 지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무슨 생각해? 내가 그렇게 짐승인 줄 아는 거야? 난 말했어. 네 동의가 없으면 하지 않겠다고. 그 약속을 지킬 거야.”그를 잠깐 오해했다는 생각에 강은하는 민망해졌다.“전 이만 잘 거니까 당신은 소파에서 자요.”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진태는 얼른 손목을 잡았다.“가자. 더 편하게 쉬게 해줄게.”강은하는 그가 어제 일로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더는 별다른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안 갈 거예요. 아무 데도 안 가고 잘 거예요.”“가자. 안 가면 널 안아서라도 데리고 갈 거야.”서진태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있었지만 강압적이었다.강은하는 이런 그가 너무도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서진태는 여자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에게 복종하길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진태 씨, 전 힘으로 진태 씨를 이길 수 없어요. 하지만 제 삶에 간섭하려는 생각은 접어두세요.”그는 목적을 이루지 않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결국 강은하는 마지못해 그의 뜻을 따랐다.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그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스파숍이었다.방 안에 은은한 노란 조명이 켜져 있어 긴장을 풀기에 좋았고 오렌지꽃 오일을 떨군 가습기가 뿜어내는 향기로운 기운에 그녀는 온몸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강은하는 옷을 벗고 푹신한 침대에 엎드리며 생각했다.‘이렇게 세심하게 준비한 걸 보니 예전에 홍수아한테도 똑같이 해줬겠지?'서진태가 방으로 들어왔을 때 마사지사가 들고 있던 오일을 강은하의 하얗고 보드라운 등에 발라주는 장면을 보았다. 이불은 그녀의 허리 아래까지 내려가 있었기에 예쁜 허리라인이 그대로 드러났다.그는 소파에 앉아 아주 다정하게 마사지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
사진을 서진태에게 전송한 후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송했다....최형준이 보낸 사진을 받았을 때 서진태는 협력 업체와 함께 식사하던 중이었다.강은하는 전에 그가 봤던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자연스럽게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빗줄기가 약한 탓인지 아니면 광선 탓인지 모르겠지만 강은하의 머리카락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지만 몸에서 느껴지는 피곤함 때문에 처연하면서도 연약해 보이기도 했다. 정말이지 보는 사람마저 안쓰러운 기분이 들게 했다.그는 사진 속 강은하의 얼굴을 한참 빤히 보았다. 아무런 영혼이 없는 공허한 눈빛을 짓던 어제가 떠올랐다.술을 한 모금 마시니 오늘따라 유난히도 쓰고 독한 것 같았다.“죄송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벌주로 석 잔을 마시고 갈 테니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볼게요. 내일 회사에서 뵙죠.”그가 있던 식당은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호텔 입구에서 차를 기다리는 강은하를 발견했다. 그녀는 우산을 쓰지 않고 보슬보슬 내리는 빗속에 서 있었다.어제부터 그녀는 주성민에게 문자를 보내 안부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보내는 것도, 보내지 않는 것도 이상해 계속 미루고 있었다.그 순간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녀는 호텔 안으로 우산을 가지러 간 양윤아가 돌아온 것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했다.“우산은 저 주시고 윤아 씨는 이만 올라가서 쉬어도 돼요. 그쪽은 저 혼자 가도 되니까요.”이승연이 비록 미풍과 협력하겠다고 하지 않았지만 다른 브랜드 책임자를 소개해 주었기에 그녀는 가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윤아 씨.”양윤아가 반응이 없자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서진태의 잘생겼지만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당신이 여긴...”그녀는 뒷말을 삼켜버렸다.서씨 가문의 셋째 아들인 서진태는 단순히 영화에 투자하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회사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업계에서 소문난 최상위에 있는 투자자였고 그가 투자만 했다면 대박을
홍수아의 계약 해지에 관한 기사는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강은하는 회사 업무를 보고 있었고 브랜드 사를 만나고 와도 아무런 진전이 없어 골치 아파하고 있었다.샤워를 마친 안서연은 소파에 앉아 책을 보다가 강은하의 앞으로 다가가 기웃댔다. 강은하가 아주 바빠 보이자 다시 책을 들어 읽었다.강은하는 그런 친구를 힐끗 보았다.“무슨 일 있어?”소파에 누워있던 안서연은 강은하의 목소리에 얼른 일어나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인데?”안서연은 빠르게 그녀의 앞으로 달려갔다.“자, 봐. 홍수아 이름이 아직도 인터넷에 도배되었어.”“도배되면 도배된 거지 그게 뭐라고.”“그냥... 서진태가 홍수아를 도와주지 않았잖아. 안 기뻐?”안서연의 말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내가 그런 일에 기뻐할 시간이 어디 있어. 난 바빠.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고.”안서연은 간단히 대답했다. 서진태에게 관심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니 마음이 놓였다.“일찍 방에 가서 쉬어. 내일 촬영이 있을 거야. 밤을 새우면 피부 상태도 안 좋게 나올 수 있거든.”안서연은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은하 책상에 가득한 명품 브랜드 리스트를 보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자신이 이 분야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안 그녀는 방해라도 하지 않기 위해 얌전히 방으로 들어갔다.집안이 드디어 조용해지자 강은하는 잠깐 멍을 때리게 되었다. 서진태가 홍수아를 애지중지하는 모습은 많이 보았다. 예전에 뜬 기사도 서진태는 두 시간 내에 전부 인터넷에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처리해버렸다.하지만 지금은 뜻밖에도 가만히 손 놓고 있었다.다만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제 그녀와는 더 이상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6시가 되자 강은하는 침대에서 일어난 뒤 짐을 정리했다. 출장 가야 했기 때문이다.안서연은 그런 그녀를 보니 안쓰러워 베개에 누운 채 말했다.“은하야, 내가 도와줄 건 없어?”그러자 강은하가 고개를 돌렸다.“네가 촬영을 잘해주면 날 도와주는 거야.
서진태는 성하시에 도착하자마자 서진우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나한테 99억 2천만 원을 줘. 숫자가 너무 길지? 그냥 100억을 주면 돼.”“알았어.”서진태는 바로 대답했다.“은하가 나한테 어떤 도움을 청하고 이 돈을 줬든지 물어보지도 않아? 이렇게 통쾌하게 준다고? 은하랑 이혼 안 할 생각인 거야?”서진우가 물었다.그러나 서진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강은하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하지만 강은하와 주성민이 웃고 떠들며 온천 리조트에서 나란히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니 이혼하기 싫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그는 강은하와 주성민에 관해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든 자신의 목적을 빠르게 달성할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망설임도 없이 웃고 떠드는 두 사람을 보며 절대 그렇게 놔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혼하지 않으면 그와 강은하의 관계는 말하기 힘들어질 정도가 되겠지만 곤란해질 사람도 그였다.“잊지 말고 입금해. 그럼 끊을게.”통화는 여기서 끝이 났다. 황재민에게 이 일을 시키자 황재민은 한숨을 내쉬었다.“왜 사모님께 말해주지 않으시는 겁니까?”서진태를 그를 보았다.“내가 뭘 설명해야 하는 거지?”“사모님을 찾아가서 설명하셔야죠. 이미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보셨잖아요. 그럼 만회하셔야죠.”황재민은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은하가 믿어줄 것 같아?”그 말에 황재민은 단답했다. 확실히 오늘 강은하가 화를 내는 모습은 그는 처음 보았다.더 의외였던 것은 서진태였다. 항상 무덤덤하던 사람이 오늘 강은하와 함께 있는 주성민을 보자마자 감정을 드러내며 충동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저녁이 되자 강은하는 퇴근했고 안서연은 이미 그녀의 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만들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자, 공주님. 수저 여기 있사옵니다.”강은하는 안서연의 말과 행동에 웃음이 터졌고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윤아 씨가 네 기분이 아주 안 좋다고 해서 내가 왔어. 무슨 일이
사무실로 돌아온 강은하는 양윤아에게 말했다.“조수호 씨에게 전해요. 제 이혼을 맡을 필요가 없다고요. 비용은 넉넉하게 주고 그동안 고생했다고 전해주세요.”“왜요?”양윤아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강은하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서진태가 그녀를 속여 가지고 있던 홍수아를 상대할 수 있는 증거를 빼앗아 갔다고 말했다. 그 말인즉슨 복사본이 없다던 주성민의 CCTV 영상도 따로 있다는 의미였다.그녀는 서진태가 이렇듯 비열하고 치졸한 사람일 줄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결혼하지도 않았을 거고 지금처럼 초라한 처지가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그가 이렇듯 그녀의 행복을 방해한다면 절대 그도 행복할 수 없게 만들겠다고 다짐한 그녀였다.“마케팅 부서로 가서 홍수아와 계약 해지한다고 알리세요. 회사 공식 계정으로 계약 해지에 관한 글도 올리고 새로운 광고 모델로 안서연으로 교체한다고 하세요.”“그렇게 하면... 홍수아의 팬들이 난리를 치지 않을까요?”양윤아는 회사의 평판이 걱정되었다.“홍수아는 지금 위험한 상태가 아니던가요?”강은하의 말에 양윤아는 바로 의미를 알아챘다.점심이 되자 강은하는 명품 브랜드 책임자를 만나 다시 미풍 플라자에 입점하고 싶다고 말했다.강민우가 살아 있었을 때 미풍 플라자는 해성시에서 인기 있는 쇼핑센터였지만 2년 동안 매년 400억의 손해를 보았고 입지도 점차 흔들리고 있어 많은 브랜드들이 떠나갔다.다른 사업 부문들도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고 특별히 뛰어난 사업은 없었다. 회사를 물려받은 뒤로 그녀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바로 브랜드 정리였다.명품 브랜드 L.S의 책임자 윤우연은 강은하를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났다.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강은하가 그와 8번이나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다.그가 아무리 거절을 해도 강은하는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찾아와 약속을 잡았기에 그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강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만 L.S가 원하는 건 만상입니다. 지금의 미풍 플라자는 만상에 비하면 훨씬 떨어졌죠.”최근 몇
오늘 영상을 보고 나서야 서진태는 만약 그녀의 머리가 똑똑하지 않았다면, 만약 운이 좋아 송우진을 만나게 된 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어떤 고통과 공포를 느꼈을지를 알게 되었다.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홍수아를 ‘처벌'하면 이 일을 가볍게 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부 그의 착각이었다. 고작 그의 처벌로 강은하 마음속에 남은 상처가 사라질 리가 없지 않은가. 이 일로 강은하가 그에게 느끼고 있던 자그마한 사랑의 감정도 전부 사라지게 되었다......주성민은 강은하의 가방을 들고 강은하와 함께 온천 리조트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서진태의 사나운 눈빛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강은하 앞으로 나서며 지켜주려고 했다.그런 그의 행동에 서진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주성민, 이리 와.”그러나 주성민은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어두워진 눈빛으로 그와 대치했다.“전 이미 말했어요. 대표님과 저는 더 이상 친한 형과 동생 사이가 아니라고요.”그랬으니 그가 서진태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그 말을 들은 서진태는 나직하게 웃었다.“넌 네 방식대로 강은하를 지켜주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하지만 지금까지 네가 한 게 뭐가 있지? 강은하에게 뒤처리를 맡기는 거? 주성민, 넌 강은하한테 한참 부족한 사람이야!”주성민을 이를 빠득 갈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가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만약 강은하가 아니었다면, 서진태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가 지금 이곳에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말이다.“그럼 당신은요? 남편으로서 제게 뭘 해줬죠?”강은하가 앞으로 나서며 웃는 얼굴로 서진태에게 물었다.“성민 씨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걸 최선을 다해줬어요. 전 성민 씨가 앞으로도 더 잘해줄 거라고 믿어요. 하지만... 대표님은요?”서진태는 차 문을 열고 내린 후 강은하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강은하는 바로 미간을 확 구겼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또 미친 거예요?”주성민이 앞으로 나서자 서진태는 강은하를 품에 가뒀다. 집착이 드
강은하는 양윤아에게 급한 일 처리하러 가라고 한 뒤 주성민과 아침을 먹었다.“은하 씨네 회사 구내식당 음식은 아주 맛있네요.”강은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를 묵묵히 보고만 있었다.주성민은 한숨을 내쉬었다.“앞으로 생각 좀 하고 움직여야겠어요.”“밥이나 드세요.”강은하는 이 일에 멋대로 끼어든 그에게 뭐라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10분 뒤 양윤아는 쇼핑백을 들고 나타났다.“식사 마쳤으면 샤워하러 가요.”주성민은 당황한 표정이었다.“샤, 샤워요?”‘그, 그래도 되는 건가?'강은하는 빨개진 주성민의 귀를 보곤 이마를 짚었다. 이런 사람이 정말로 여자를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이 맞는 걸까?양윤아는 나직하게 웃었다.“주 대표님, 금방 경찰서에서 나왔으니 그 기운을 씻어내셔야죠.”주성민은 살짝 헛기침하면서 머릿속에 든 생각을 지운 뒤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강은하는 사무실로 돌아가 녹음 파일과 영상을 양윤아에게 건넸다.양윤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이건...”“이걸 황재민 씨한테 주세요.”강은하는 서진태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그런 그녀의 생각과 달리 양윤아는 마음이 괴로웠다....양윤아가 녹음 파일과 영상을 황재민에게 건넸을 때 그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출장 준비하고 있던 서진태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으나 열어보게 되었다.식탁에 앉아 서로 인사를 나누던 모습과 강은하가 김지환에게 끌려가 소파에 던져지는 모습까지 전부 찍혔다.그는 강은하가 거실 테이블에 있던 재떨이를 들고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김지환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았다.“얼굴도 찍으라고?”김지환의 뺨을 맞은 강은하는 그대로 식탁에 부딪히며 넘어지게 되자 그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초라한 모습도 전부 찍혔다...짧은 몇 분의 영상이었지만 황재민은 잔뜩 긴장하면서 봤던지라 등줄기에 어느새 식은땀이 났다.“대표님...”“은하 지금 어디에 있지?”그의 입에서 흘러
강은하는 여기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이미 서진태와 이 지경이 된 이상 이런 행동을 해도 그녀는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처참한 기분만 들었다.서진태는 그녀의 표정이 보고 싶어져 고개를 들자 베개에 가만히 머리를 대고 누워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않는 그녀의 두 눈빛을 보고 말았다.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렇게까지 여자를 탐한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 사람'에게도 말이다...하지만 이미 너무도 늦어버렸고 강은하는 그의 손길이 불쾌하게 느껴졌다.서진태는 이불을 끌어당겨 그녀의 몸에 덮어준 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침대 끝에 앉았다.“은하야, 미안해.”그는 그녀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다. 단호하지 못한 자신에게 말이다.분명 그녀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그녀를 괴롭히고 처참하게 만들었다.강은하는 움직이지도 않았고 그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공허한 눈빛으로 커튼만 보았다.서진태는 시선을 떨구고 이불 밖으로 나온 그녀의 어깨를 보았다. 초라하게 이불 속으로 움츠러들었다.한숨을 내 쉰 그는 그녀의 곁으로 가 손끝으로 그녀의 머리를 쓸어넘겨 주었다. 코끝이 붉어진 모습을 보니 퍽 가련해 보였다.“앞으로 네가 원하지 않으면 방금처럼 억지로 하진 않을 거야.”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며 다정한 말을 하고 있었다.물론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그에게서 가장 원하는 대답은 이혼 서류에 사인해주겠다는 것임을. 이미 오래전에 그녀와의 결혼 생활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사인해주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는 아직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제 기분을 신경 쓰든 말든 전 아무래나 상관없어요.”서진태는 더는 말을 잇지 않았고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머리만 쓸어넘겨 주고 있었다.“오늘은 여기서 자.”강은하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간 서진태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모습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