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도착하니 어느덧 새벽이었다.거실 한구석에는 그가 어제 가지고 온 캐리어가 아직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문득 강은하의 생각이 들었다. 지난 3년 동안 거의 해외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매번 돌아올 때마다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의 비위를 맞추었고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몸을 간신히 가누면서도 그녀는 들뜬 얼굴로 캐리어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늘 반짝였고 수줍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번에 돌아왔을 때,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부재중 전화를 확인해 보니 대부분 심태훈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고 그녀한테서 걸려 온 전화는 단 한 통도 없었다. 심태훈에게 전화를 거니 한참이 지나서야 전화가 연결되었다.“형, 나 지금 야근 중이야.”“강은하랑 같이?”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공장 쪽의 일이 급한 사안인 건 맞지만 처리하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응. 아직 공장이야.”그 말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까짓 일을 지금까지 처리하고 있단 말이야? 강은하는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심태훈은 이내 억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생각하던 제조업체의 실수가 아니야. 다른 업체를 찾으면 그만인 게 아니고 이건 처음부터 누군가 일부러 꾸민 일이라고. 첫 번째 물량이 제대로 발송되지 못하게 손을 쓴 거야. 형수가 아니었다면 아마 큰일이 났을지도 몰라.”해성시 현지에서 나는 전통 과일이 있는데 매년 해외로 4천억 정도의 고정 수출 사업이 있다. 올해는 그중 절반에 달하는 수출 사업을 한성 그룹 계열의 무역 회사가 맡게 된 것이다. 오늘 첫 번째 물량을 발송해야 하는 데 10만 개의 포장재가 표준에 부합되지 않고 디자이너는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다른 회사들도 자재가 부족하여 단기간에 교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잠시 후, 그가 공장에 도착하자마자 심태훈이 그를 껴안고 하소연했다. “형, 지금 산업단지 전체가 10만 개의 포장지에 라벨을 붙이고 있어. 나 태어나서 이런 고생은 또
오빠라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 남자를 진심으로 좋아했으니까. 아무리 쌀쌀맞게 대해도, 아무리 못 본 척 지나쳐도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행복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그녀의 자리는 없었다.그의 마음속에 있는 그 여자의 자리가 너무 커서 그는 그녀에게 서로를 알아갈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오랫동안 한 여자만 마음에 품고 있었다니, 요즘 세상에 정말 드문 일이긴 하다. 내가 남자 보는 눈은 있네. 그녀 또한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하길 바랐다. “브로치는 언제든지 가지러 와. 아니면 내가 가져다줘도 되고.”“알았어요.”그 말을 하는 순간 왠지 모르게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는 그녀도 자신을 아낌없이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한편, 긴급한 상황에서 홍수아 때문에 아들이 자리를 뜬 사실을 알고 박화영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며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홍수아 그 여자는 은하 반도 못 따라가. 진태 저놈이 제정신이 아닌 거지. 두 사람한테 만날 기회를 만들어줘야겠어. 은하같이 예쁘고 성격도 좋은 여자를 왜 못 본 척하냐고? 딱 봐도 우리 아들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인데.”“어머니, 이제 그만하세요. 은하랑은 잘 얘기 끝났습니다.”녹초가 된 심태훈을 부축하고 들어오던 서진태는 새벽 3시가 되도록 자지 않고 있는 부모님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무슨 얘기?”“며칠 있다가 이혼 신고 접수할 겁니다.”그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소파에 앉았다.“은하도 동의한 일이니?”박화영은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집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입니다. 어머님 소원대로 저희 이제 남매 사이입니다.”두 사람 사이에 이미 얘기가 끝난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꽃 같은 나이에 우리 집안으로 시집와서 3년 동안 너한테 온갖 무시를 당하며 지내왔어. 이렇게 이혼하는 거 너 정말 후회 안 해?”“네, 저 후회 안 합니다.”말문이 막혀버린 그녀는 더 이상 말을
그의 몸이 좋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 몸매, 옷을 입으면 그렇게 근사해 보였다.특히 저 군살 하나 없는 허리 라인...열기에 젖은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렜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와 하룻밤도 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녀는 얼굴이 붉어진 채 시선을 돌렸다. “어머님께서 부르세요.”돌아서려는데 뒤에서 싸늘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깐.”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그가 옷을 입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녀의 몸은 점점 굳어져 버렸다. 뒤로 가까이 다가가니 그녀는 귀가 점점 빨개지고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옥 같은 피부가 옅은 홍조를 띠고 있는 것이 무척 매력적이었다.“남자가 옷 벗고 있는 모습 본 적 없어?”말을 하면서 그가 그녀의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경계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왜... 이래요?”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그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내 얼굴에 뭐 묻었나?“아니야. 바로 내려갈게.”방금 그의 행동을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몸 좋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한편, 그녀는 두 사람이 남매가 되기로 한 후부터 두 사람 사이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거실로 내려가자 박화영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은하야, 우리의 고부 인연이 여기까지인가 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거라. 섭섭지 않게 해줄 것이니. 진태 명의로 되어있는 부동산과 주식들 너한테 반 넘겨줄게.”강은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아니에요. 저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거절하는 그녀의 모습에 박화영은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이혼할 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남자들은 네가 그런다고 고맙게 생각하지 않아. 멍청한 여자라고 생각할 뿐이지. 그러니까 네 몫은 똑바로 챙겨.”강은하도, 아래층으로 내려온 서진태도 말문이 막
강은하는 사람의 마음을 단번에 홀릴 정도로 예쁘게 생겼다. 늘 묶었던 머리를 풀어 어깨에 드리우니 청순미가 넘쳐흘렀다. 하얀 피부에 정교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녀가 조수석에서 파우더를 들고 콧등의 점을 가렸다. 새빨간 립스틱까니 바르니 청아하면서 도도해 보였다.그녀를 힐끔 쳐다보던 그가 한마디 물었다.“왜 가리는 거야?”한참을 멍하니 있던 그녀는 그가 가리키는 것이 콧등의 점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바보 같아 보여서요.”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스물여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회사 대표가 되었으니 사람들한테 어리석은 이미지를 주는 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콧등의 그 점은 그녀를 더욱 청순하고 매력이 넘치게 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오로지 운전에만 집중했다. 강은하도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차 안의 분위기는 그런대로 꽤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소캐팅을 하러 가는데 그가 데려다주고 있는 이 상황이 그녀는 왠지 모르게 찝찝하기만 했다. 사건의 발단은 오늘 식사를 하기 전 안서연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던 그녀의 전화를 박화영이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하우스클럽에서 젊은 친구들이랑 약속 잡았어. 성격도 좋고 잘생겼고. 너 같은 부잣집 아가씨가 데리고 놀기에는 완전 딱이야.”그 말에 강은하는 멍해졌다.주방에 있던 서씨 가문의 하인들은 깜짝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박화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알았다. 저녁 먹고 나서 진태한테 은하 데려다주라고 할게.”그녀의 차는 아직까지 공장에 주차되어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소개팅 자리까지 데려다주라는 박화영의 말에 서진태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혼을 결심했지만 마음에 둔 사람이 있으니 정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그를 보며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하우스클럽에 도착한 뒤,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차에서 내렸다.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바로 차에 시동을
하우스클럽에서 가장 큰 룸, 어두컴컴한 방안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교차되어 있었다. 강은하는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는 서진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빼어난 미모가 한눈에 들어온 게 아니라 희미한 불빛 속에서 모든 남자들의 옆에는 그들의 팔짱을 끼고 있는 아가씨들이 앉아 있었고 유독 서진태 그 사람 옆에만 텅 비어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 짙은 연기를 뿜어내는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 보였다. 아내로서 남편의 이런 철벽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아내한테 손끝 하나 대지 않는 남편을 보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질투가 났다. 그 순간, 그녀는 홍수아가 부러웠다. 한편, 강은하가 안으로 들어올 때, 그의 시선이 그녀의 허리에 닿았다. 회색 상의에 검은색 와이드 팬츠 차림을 한 그녀의 허리는 한 손에 잡힐 만큼 가늘어 보였다. “강 대표님, 어쩜 허리가 그렇게 가늘어요? 한 손에 잡고 들어 올릴 수도 있겠습니다.”북적북적한 룸에서 누군가 장난을 치면서 그녀를 향해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그녀는 그 사람을 힐끔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나중에 해볼래요? 진짜 들어 올릴 수 있는지.”말하는 사이, 서진태가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가까이 오니 그의 몸에서 은은한 나무 향과 담배 냄새가 풍겼다. 점점 더 다가오는 그를 보며 강은하는 이런 상황이 어색한 듯 연신 뒷걸음질 쳤다.“아직 이혼도 하지 않았는데 좀 자중하는 게 어때?”싸늘한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그가 룸 안의 일을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해명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재산 분할까지 협의가 된 마당에 더 이상의 해명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건 뭐 내로남불도 아니고. 홍수아와 떠들썩하게 만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데. 이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브로치가 아직 그의 손에 있으니까. 넘겨주기로 약속은 했지만 그를 화나게 하여 며칠을 끈다고 해도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알았어요. 당신한테 폐 끼치는 일 없게
따귀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룸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그때, 안서연이 한마디 툭 던졌다.“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서...”그녀가 일을 더 크게 만들까 봐 걱정되었던 심태훈은 한발 먼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정신이 번쩍 든 강은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오빠 맞아요. 핏줄은 섞이지 않았지만...”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고 더 이상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한편, 그런 형이 못마땅했던 심태훈은 더는 두 사람을 엮으려고 애를 쓰지 않았다. “이번 주 토요일에 서씨 가문에서 파티를 열 건데 솔로인 사람들은 모두 참석해.”그 말에 주성민은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진태 형, 형만 아니라면 내가 강은하 씨의 마음을 얻을 자신이 있거든요.”담배를 피우며 연기를 내뿜고 있던 그가 무뚝뚝한 얼굴로 물었다.“그래?”“그럼요.”말을 마친 그가 강은하의 옆으로 다가가 피식 웃었다.“은하 씨는 어떤 남자 좋아해요?”“그게...”“사람 무시하지 않은 남자, 뭐든 은하 기분에 맞춰주는 남자, 다정한 남자요.”안서연이 서진태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나 그거 잘하는데.”그녀의 말에 주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이 다시 흘러나오고 저쪽에서 뭐라고 했는지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강은하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주성민과 얘기를 나누며 식탁 위의 우유를 들어 마셨다. 화려한 불빛 속에 술잔이 오가는 사이에서 우유를 마시는 모습이 다소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한편, 강은하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얼굴이 점점 차가워지는 서진태를 보며 송우진이 입을 열었다.“이제야 예쁜 아내가 신경 쓰이나 봐?”그가 송우진을 힐끔 쳐다보았다.“그럴 리가 있겠어?”“그런데 왜 자꾸 쳐다봐?”...30분 후, 강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이때, 업무 효율이 높은 변호사가 서명할 서류가 있다며 내일 만나자
저녁 7시가 다 되어서야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미안. 급한 일이 생겼어.”차가운 그의 목소리에는 사과의 성의가 조금도 없었다. 약간 화가 났다. 나한테 마음이 없다고 해서 나한테 관심이 없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날 존중하지 않는 건지. 어떻게 오후 내내 그 상태로 날 내버려둘 수 있었던 건지...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내일 오전은요? 시간 돼요?”“외지에 와 있어. 월요일에 만나.”“월요일은 나도 시간 안 돼요.”그 말을 내뱉고 그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다음 날, 회사에 출근해서야 그녀는 어제 서진태가 나타나지 않았던 게 정말 홍수아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홍수아는 전임 회사 대표가 정해준 광고 모델이었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녀가 촬영장에 나오지 않자 마케팅 담당자는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알겠다고만 하고 안 오니 이 일을 어쩌면 좋죠?”비서는 홍수아의 인스타 계정에서 그녀가 지금 청주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스타에서 유명한 맛집, 두 사람이 같이 카메라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뼈마디가 뚜렷한 손으로 컵을 잡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사진에서 포착되었다. 오늘 아침에 업도르한 사진을 보니 통 큰 유리창 앞에 떠오르는 붉은 해와 남자의 뒷모습이 함께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을 가감 없이 과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3일만 더 지켜보죠. 그래도 여전히 협조 안 하면 그냥 모델 바꿔요.”...금요일 오후, 퇴근을 마친 강은하는 서씨 가문의 본가로 향했다.내일에 있을 파티에 대해 그녀와 상의할 것이 있다고 박화영이 부른 것이었다. 강은하는 박화영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도 알고 있고 자신과 서진태에게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잘되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이니까. 이혼까지 결정된 상황에서 이런 소개팅 파티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걸 동의한다면 정말 염치없는 사람이 아니겠나? 어찌 됐든 박화영
자신을 향해 눈치를 주는 박화영을 보며 그녀는 주성민을 이용해 서진태를 자극하고 싶어 하는 박화영의 뜻을 알아차렸다.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요. 유머러스한 사람인 것 같아요. 그 사람과 얘기하는 게 즐거웠어요.”그 모습을 보고 두 사람 사이에 전혀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은 박화영은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이혼 신고를 하는 걸 결국 동의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본가에서 자고 가라는 박화영 때문에 강은하는 어쩔 수 없이 남게 되었다. 잠들기 전에, 우유를 데워 박화영의 방으로 향했다.문 앞에 다가가니 안에서 박화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혼하는 거 허락할게. 그런데 말이다... 은하가 널 좋아해서 결혼을 강요하긴 했지만 그것 말고 은하가 너한테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도 한 적 있니?”“네가 외국에 있는 동안, 내가 몸이 안 좋을 때마다 늘 은하가 병원을 뛰어다니며 날 보살펴줬어. 그런데 어떻게 네가 은하한테 이리 못되게 굴어?”그 말에코끝이 찡해진 그녀는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하얀색 와이드 팬츠와 옅은 회색 루즈핏 니트 차림을 한 그녀, 콧등의 점이 선명히 드러나 세련돼 보이고 매력이 넘쳐흘렀다. 서진태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자리를 떴고 그녀도 아무 말 없이 방안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가 방문을 닫으며 물었다.“할 말 있어요?”“어머니 말이 맞아. 그동안 내가 너한테 못 할 짓한 거 같다. 앞으로는 잘할게.”“그래요.”기대는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요일 저녁, 서씨 가문의 별장 앞에서는 고급 차들로 줄을 지었고 엄청 시끌벅적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역시 주성민이었다. 엄청 큰 장미 꽃다발을 안고 그가 강은하를 찾아 헤맸다. “진태 형, 은하 씨는요?”오
송우진에게 묶여있는 강은하는 입에 수건까지 물고 있었는데 얼핏 봐도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다.옆에 선 고연석이 조급하게 물었다.“송 대표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빨리 우리 대표님 병원에 데려가야죠.”송우진이 다리를 꼰 채 일인용 소파에 앉아 턱을 괴고는 인내심 있게 고연석에게 설명했다.“강은하 씨랑 자보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없어요?”고연석이 미간을 찌푸렸다.“송 대표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강 대표님 아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이에요.”“그러니까요. 이렇게 묶어놓지 않으면 저렇게 매혹적인 소리를 내는데 우리가 버틸 수 있겠냐고요?”송우진이 턱을 괴고는 말을 이어갔다.“조금만 더 기다려봐요.”“뭐, 뭘 기다려요?”“남편이 오기를 기다려야죠. 뭐긴 뭐예요.”고연석이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흥분하며 물었다.“강 대표님 결혼하셨어요?”송우진이 귀찮다는 듯 대충 대답하더니 시간을 한번 확인하고는 눈물이 글썽해진 강은하를 바라봤다.‘서진태 제법인데. 참을성 좋네.’강은하는 지금 온몸에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간지러우면서도 뜨거워 눈에 뵈는 게 없었고 서진태라도 빨리 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게 10분을 더 기다린 송우진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었다.“말해.”예상외로 서진태는 기분이 매우 언짢아 보였다. 요즘 빈번하게 홍수아와 스캔들을 내는 서진태를 보며 심태훈은 서진태와 강은하가 완전히 쫑났다고 생각했다. 당황하지도 조급하지도 않은 태도를 보니 심태훈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내가 정말 방해한 것 같네?”송우진이 웃었다.“병원에 보내면 되지 나는 왜 연락한 거야?”송우진이 대답했다.“그래, 그러면 성민이한테 넘길게.”강은하는 온몸이 활활 불타오르는 것처럼 너무 힘들었다. 원래도 이성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송우진의 통화가 강은하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넣었다.‘이제 상관없다? 주성민 찾아라?’사실 서진태는 쉽게 성욕에 사로잡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혼까지 할 마당에 그녀를
강은하가 쓰러지자 서유미가 허리를 숙이고 한 번 더 불렀다.“강 대표님?”강은하가 아무 반응이 없자 서유미는 그제야 강은하의 얼굴을 들어 자세히 관찰했다. 서유미도 같은 여자였지만 세상에 이렇게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는 게 그저 감탄스러워 자꾸만 강은하의 얼굴에 눈길이 갔다.아름다운 미모와 굴곡진 몸매, 서유미는 고개를 돌려 50살이 넘어 배가 볼록하게 나온 김지환을 바라봤다. 저런 사람에게 바치기엔 너무 아까웠다.“꽉 잡아요. 카메라는 이미 잘 숨겨뒀어요. 나는 밖으로 나가서 고연석이 일 그르치지 못하게 지키고 있을 테니까.”서유미가 이렇게 말더니 밖으로 나가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걱정하지 마세요. 만족할 수 있게 잘 준비해 뒀어요.”서유미는 딱히 김지환을 걱정하지 않았다. 강은하가 이 바닥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김지환은 강은하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하지만 강은하는 아름다운 그 외모를 이용할 생각은 하지 않고 굳이 자기 손으로 모든 걸 얻어내려 했다. 게다가 한성 그룹 회장님이 예뻐한 덕에 감히 강은하를 어떻게 할 엄두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김지환은 강은하를 화장실에서 끄집어내더니 소파에 던져버렸다. 바지를 벗으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쓰러진’ 강은하도 마침 그때 눈을 뜨더니 김지환이 한눈판 틈을 타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를 가져갔다.“얼굴까지 찍으라고요?”도대체 강은하와 무슨 원수를 졌길래 이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했다. 얼굴이 나오게 찍으면 용산이 해성이 아니라 그 어디서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전화를 끊은 김지환은 잠깐 주저했다. 사실 그저 강은하를 따먹고 싶을 뿐 강은하를 바닥까지 끌어내릴 생각은 없었다. 결국 지시받은 대로 하지 않은 김지환이 몸을 돌린 사이 커다란 재떨이가 김지환의 얼굴에 떨어졌다.“이런 미친X이.”김지환은 강은하가 쓰러진 척했을 줄은 몰랐다. 재떨이에 제대로 맞은 김지환은 너무 아파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였다.강은하는 문 쪽으로 도망가지 않고 테이블로 뛰어갔다. 김지환이 강은하의 팔
서진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갑자기 입꼬리를 올렸다. 그 웃음은 진심에서 우러난 웃음이었고 설렘에 찬 웃음이었다.“일찍 자요. 먼저 올라갈게요.”서진태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거실에 혼자 남겨진 서진태는 여전히 반지만 만지작거렸다.남궁선은 늘 서진태가 진지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진지하게 그 아이를 찾아도 그 아이는 마치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이미 많은 노력을 했지만 여전히 그 아이를 찾기는 역부족이었다....이튿날, 강은하가 출근하려고 내려와 보니 서진태는 이미 가고 없었다. 설인숙은 서진태가 일찍 출근했다고 했다.보면 어색할 것 같았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하루 종일 바삐 돌아친 강은하가 퇴근하려는데 무역회사 책임자 고연석이 찾아왔다.“저번에 연남시로 출장 갔다가 오면서 우리 회사가 보낸 물량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잖아요. 그 부분은 일단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일단 그냥 내버려두시면 될 것 같아요. 서 대표님 오셨어요.”강은하가 미간을 주물렀다. 서유미는 아직도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사건의 원인은 간단했다. 한성 그룹 계열에서 한 무역 회사가 수출입 무역을 하는데 꽤 크고 전문적인 다제품 공급망을 가지고 있었다.서유미는 전략 파트너 진영민의 유통 업체였는데 동의도 없이 진영민의 브랜드 패키지를 도용해 제품을 만들어 판 것이다. 이익으로 맺어진 사이긴 했지만 두 사람은 관계가 괜찮은 편이었기에 서로 얼굴을 붉히기 싫었던 진영민이 먼저 강은하를 찾아와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사실 이 문제는 서유미가 잘못했기에 진영민이 고소하려고 마음먹으면 100퍼센트 승소할 수 있었다. 약이 잔뜩 오른 서유미는 화풀이할 데가 없어 계속 물량 공급에 문제가 있다고 둘러댔지만 강은하가 봐주려 하지 않자 바로 따지러 온 것이었다.“나 시간 없으니까 알아서 해결해요.”“김지환 씨가 만든 자리입니다.”김지환은 무역하는 사람 중에서도 명성이 꽤 자자한 사람이었다. 온라인 판매와 공구의 물살을 타지는 못했지만 그
주성민도 그제야 뭔가 눈치챈 듯 멍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가 서진태를 발견하고는 얼른 이렇게 불렀다.“형.”서진태가 시선을 화면 속 놀란 강은하의 얼굴에서 주성민에게로 옮기더니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사이 좋아 보인다?”주성민은 약간 민망했는지 괜찮다고 말했다. 통화를 이어가던 강은하가 얼른 통화를 내려 했다.“성민 씨, 그러면 일 봐요. 아까 질문한 건 다음에 알려줄게요. 끊어요.”주성민이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고개를 돌려 서진태를 바라봤다.“혹시 은하 씨랑 싸웠어요?”서진태가 고개를 저었다.“아니, 왜 그렇게 생각해?”“둘이 남매 같지는 않아서요.”“그래? 그러면 뭐 같은데? 부부?”주성민이 손사래를 쳤다.“그건 더 아니고요. 만약 은하 씨가 형 와이프였으면 형은 나보다 더 했을 것 같은데. 형이 은하 씨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 나 여러 번 봤어요. 클럽 그날 형도 은하 씨한테 반했죠?”“됐어. 그만해.”서진태가 주성민의 말을 잘라버렸다.“네가 뭘 알아.”서진태가 자리를 뜨려는데 주성민이 얼른 따라붙었다.“형, 그 남자가 누군지 알려준다고 했잖아요.”서진태는 선을 넘는 주성민을 보며 느긋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한 모금 길게 빨고는 물었다.“그 남자가 왜 그렇게 궁금한데?”“뭔가 은하 씨가 그 남자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지기지피 백전백승이라잖아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은하 씨 같은 여자를 기꺼이 버리는지 궁금해서요.”서진태는 말문이 막혔다.“이 일은 묻지 마. 강은하도 알려줄 때가 되면 알려주겠지.”서진태가 물었던 담배를 버리더니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주성민은 그런 서진태의 뒷모습을 보며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한편, 강은하는 지금 심장이 너무 벌렁거렸다. 아직 이혼하기 전이라 주성민과 페이스톡 하다가 들킨 게 살짝 민망했다. 서진태가 저열한 근성을 불태우며 다시 그녀를 괴롭힐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강은하는 잠들 엄두가 나지 않아 책을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기다리기로 했다. 돌아오면 도대체
일요일.강은하는 주성민과 식사하러 약속 장소로 나갔다. 안에 들어서자 주성민이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고마워요.”강은하가 꽃을 받아 들더니 주성민을 향해 웃어 보였다.“만날 때마다 이렇게 꽃을 주려는 건 아니죠?”“당연하죠. 이런 소소한 이벤트는 꼭 챙겨야 해요. 곧 남자 친구가 될 사람이잖아요.”주성민이 헤벌쭉 웃으며 이렇게 말했지만 강은하가 불편하지 않게 아직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조심스러워 보이는 주성민을 보며 강은하는 살짝 안쓰러웠다.“조금만 참으면 우리 손도 잡을 수 있어요.”이혼 절차만 밟으면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이 말에 주성민이 자기도 모르게 강은하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왜 이렇게 사랑스러워요?”예약한 룸에 들어가 보니 요리가 이미 테이블에 올라와 있었다. 강은하가 밥을 먹으면 주성민은 턱을 괸 채 강은하가 먹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성민 씨는 안 먹어요?”“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아서 그래요. 사실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나거든요.”주성민이 이렇게 말했다. 강은하가 그를 받아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은하 씨, 왜 나를 믿어준 거예요?”“왜 진심이라고 믿어준 거냐고요?”주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내가 믿어줄 수 있냐고 했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믿는다고 했잖아요. 우리 아빠였어도 믿긴 개뿔이라고 했을 텐데.”강은하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주성민을 바라봤다. 바람둥이라고 날 정도인데도 여자가 끊이지 않는 이유라면 아마도 잘생긴 얼굴일 것이다.“성민 씨, 전에 노란 머리였죠? 마주칠 때마다 늘 껄렁대면서 앞을 지나갔거든요. 하지만 나랑 바닷가 가서 갈매기 볼 때 까만색으로 염색했더라고요.”그래서 그런지 주성민은 예전보다 많이 차분해 보였다. 게다가 하얀 티셔츠에 갈색 슬랙스까지 받쳐입으니 핏도 살아 있었다.“내가 머리 염색한 것 때문에 믿었다고요?”강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것도 새로 출발한다는 의미니까요.”“여자를 홀리는 수
강은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말했다.“그 남자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우리가 헤어질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아요?”“진태 형이 전화해서 알려주던데요? 은하 씨에게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거라고 했어요.”하지만 주성민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치였다.“그 사람은 헤어지기 싫어하는데 진태 형이 대신 얘기해준 거예요? 그래서 결국 헤어지기로 한 거고? 내가 이해한 게 맞겠죠?”강은하는 순간 영혼이 가출했다.‘이사하라고 하더니 뭐지?’지금은 또 주성민의 입으로 이혼에 동의한다고 말하고 있다. 강은하는 서진태가 왜 갑자기 질리게 된 건지 궁금했지만 이내 그 궁금증이 풀렸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강은하와 생각했을 때도 재미없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홍수아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고작 하룻밤 같이 있었을 뿐인데 서진태의 생각을 바꿔놓았으니 말이다.강은하는 잠깐 마음이 불편했다가 이내 이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혼한다는 건 더는 서진태와 엮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기에 강은하는 너무 기뻤다.하지만 같이 앉아 있던 안정원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상처 주는 것도 참 가지가지네.”이건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 뭐 하자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녁에 실컷 즐겨놓고 낮에 차버린다니, 서진태 같은 쓰레기도 드물 것이다.“성민 씨가 좋은 남자죠. 우리 은하를 진심으로 아끼잖아요.”주성민은 강은하가 단둘이 밥 먹는 걸 난처해할까 봐 오늘도 안정원을 불렀다.“앞으로 연지 공주랑 밥 먹을 때 나 부르지 마요.”안정원은 주성민이 강은하를 기쁘게 해주길 진심으로 바랐다.“연지 공주도 성민 씨 언제 받아줄지 생각해 봐요.”사실 안정원은 강은하가 주성민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주면 주성민이 상처받을까 봐 두려웠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서진태가 보기 드물게 좋은 일을 한 것이다.“은하 씨, 나 받아줄 생각 있어요?”주성민은 아직도 어떻게 강은하를 대신해 그 개자식을 혼내줄지 생각하고 있다가 안정원의 말에 정신이 팔려 기대에
강은하는 무의식적으로 도망가려 했다. 서진태가 그런 강은하를 으스러지게 잡더니 그대로 테이블 위로 꾹 눌러서 눕혔다.강은하의 몸이 자기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고 눈물이 눈동자에 가득 차올랐다. 서진태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도대체 그녀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농락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서진태는 핸드폰을 테이블에 엎어놓았다. 강은하는 서진태에게 빚지는 게 싫어 아득바득 애를 썼지만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코끝이 찡해 난 강은하는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지만 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순간 서진태도 마음이 약해졌지만 긴 머리를 테이블에 축 늘어트린 채 반쯤 누워있는 강은하가 너무 매혹적이라 성욕이 온몸을 지배했다.서진태가 강은하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이렇게 말했다.“진심으로 대한다더니 고작 이거야? 너 이거 사기야.”서진태는 그런 강은하를 버려둔 채 옆에 놓인 가운을 입고 자리를 뜨려 했다. 강은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서진태가 등을 돌린 순간 강은하는 영락없이 몸을 파는 아가씨가 되고 말았다.강은하는 몸을 가릴 수 있는 게 없어 다리를 꼭 끌어안은 채 바닥에 꿇어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요?”서진태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핏기 하나 없는 강은하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왜 그러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강은하는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씁쓸하게 웃었다. 전에 그에게 약을 먹이고 억지로 잠자리를 가진 걸 이렇게 복수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도시락을 가져다줬다는 것에, 보기 드물게 그가 자세를 숙이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에, 입에 발린 소리 몇 마디 한 것에 바보같이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서진태에게 그녀는 늘 장난감 같은 존재였는데 말이다.서진태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은하를 보고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 옆에 있던 담요를 던져주고는 자리를 떠났다.저녁에 술을 조금 마신 서진태가 황재민이 데리러 오길 기다리며 길가에 서서 담배를 연거푸 몇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요?”강은하가 서진태의 허벅지에서 일어나 한 쪽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우스운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서진태도 딱히 급해하지 않고 느긋하게 담배를 한 대 물었다.“그러면 네가 나를 믿을 때쯤에 다시 토론할까?”강은하는 정말 당장이라도 서진태를 뻥 차버리고 싶었지만 그의 손에 들려있는 브로치만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숨을 길게 내쉬었다.“방법이 하나 있어요.”...심태훈이 가로수길 6번지로 향했다.연갈색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서진태의 목에 어제 할퀸 상처가 보였다.강은하가 팔짱을 앞으로 낀 채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분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했다.“이거 주성민에게 돌려줘.”심태훈이 브로치가 담긴 박스를 들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이거 그 브로치 아니야? 이걸 왜 주성민에게 줘?”“주라면 그냥 줘. 말이 그렇게 많아.”서진태가 차갑게 쏘아붙이자 심태훈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전화해 이리로 불러놓고 고작 한다는 말이 다 고친 브로치를 주성민에게 건네주라는 것이었다.“주성민에게 건네주고 형수님한테 전화하라고 해.”서진태는 형수님이라는 말에 힘을 줬다. 심태훈이 가고 서진태가 뭉게뭉게 피어오른 담배 연기 사이로 강은하를 바라봤다.강은하가 생각해 낸 방법은 참으로 묘했다. 서진태를 믿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심태훈에게 넘기겠다는 데도 동의하지 않았고 주성민만 믿었다.“이제 만족해?”서진태가 물었다.강은하의 길고도 촘촘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서진태에게 말했다.“아주 만족해요.”서진태가 코웃음을 치더니 강은하를 아래위로 훑어봤다.“이따가 나도 만족시켜 주길 바랄게.”강은하는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심태훈이 여기서 출발해 주성민에게로 가려면 적어도 반 시간이 필요했다. 두 사람은 그 시간 동안 서로 얼굴을 굳힌 채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신경전을 벌였다.얼마나 지났을까, 강은하의 핸드폰이
강은하는 소파에 기댄 서진태를 바라봤다. 19살에 봤을 때와 변함없이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30살이 된 서진태에게서 19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똑같이 웃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양아치 같았다.숨을 길게 들이마신 강은하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서진태는 강은하의 순종하는 태도에 두 손을 자연스럽게 옆으로 뻗은 채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강은하는 심플한 디자인을 즐겨 입었기에 오늘도 까만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하고 펑퍼짐한 바지를 입고 있어 그저 노말한 출근룩 같앗지만 왠지 모를 우아한 아우라가 느껴졌다.서진태는 눈을 살짝 찌푸린 채 그런 강은하를 바라봤다. 강은하가 앞으로 다가와 서자 서진태는 셔츠 단추를 두 개 풀었지만 그가 기대하던 장면은 펼쳐지지 않았다. 강은하는 그대로 서진태를 덮치더니 미친 듯이 할퀴고 때리기 시작했다.도대체 그녀를 뭐로 생각하는지 궁금했고 그런 서진태를 좋아하고 사랑한 자신이 너무 미웠다.갑자기 들이닥친 주먹에 서진태는 목을 할퀴고 말았다. 강은하가 싸움을 잘하는 건 아니었기에 서진태에게 바로 제압당해 허벅지 위에 갇히고 말았고 손도 뒤로 꺾여 어쩔 수 없이 서진태와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얍삽하기 그지없는 서진태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강은하의 손목을 꽉 잡고 있어 강은하는 어쩔 수 없이 서진태와 바짝 붙을 수밖에 없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놔요.”강은하가 언성을 높였지만 서진태는 전혀 언짢아하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 강은하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진짜 왜 그러는 거예요?”“강은하, 막무가내로 나온 것도 너고, 말을 듣지 않은 사람도 너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도 너야. 이사하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이사할 생각 없어 보이고 수아를 모델로 쓰라고 하니까 때리기나 하고. 나 이 정도면 나이스하지 않아? 손 다쳤다고 밥도 가져다주고 기회도 여러 번 줬는데 나 모른 척한 건 너야.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너 집으로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지.”강은하는 아무 말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