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재신은 그녀가 빠져나간 빈자리가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제 막 떠났는데 벌써 보고 싶어지니, 앞으로의 생활이 심히 걱정되었다.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양우빈이었다.반재신이 전화를 받자 양우빈이 말했다.“대표님, 노 회장이 대표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반재신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 시각 노 회장은 AM 그룹 로비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반재신을 찾고 있었다. 양우빈이 아무리 말려도 그는 반재신을 만나기 전까지 갈 수 없다며 떼를 썼다. 결국, 양우빈은 반재신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반재신이 로비에 나타나자 노 회장이 황급히 달려가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반 대표님,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하라는 건 모두 다 할 테니까 제발 합작을 취소하지만 말아 주세요.”AM 그룹은 서울 대부분 과학기술 산업과 건축업을 독점하고 있었다. 때문에 노 회장은 AM 그룹의 공급이 끊기면 더 이상 회사를 이끌어나갈 수 없게 된다.그의 애원에도 반재신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반재신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말했다.“노 회장님께서는 가장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AM 그룹에 기대 꿀을 빨 생각을 하셨습니까? 우리 AM 그룹이 그렇게 만만합니까?”노 회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는 그래도 반재신이 이익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이 지난번 파티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렀을 때도, 반재신이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그렇게 내쫓았을 거라고만 생각했다.설마 반재신이 여자 하나 때문에 회사 간의 이익 관계를 끊지 못할 거라고 자만했었다.야심이 있는 남자라면 누구나 이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여자는 단지 남자의 부속물이었다. 시집을 왔으면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키우는 게 당연했다. 절대 남자의 사업에 간섭해서는 안 되었다.그래서 지난번 일에 대해서 자신이 사과
반재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그때 양우빈이 문 앞에 나타났다.“대표님.”그가 건성으로 대답했다.“무슨 일이죠?”양우빈이 말했다.“재언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말을 마친 그가 옆으로 비켜서자 곧바로 반재언이 나타났다.사무실 안, 양우빈이 차를 가져와 그에게 건네준 후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반재언이 느긋하게 찻잔을 들며 말했다.“진예은은 영국으로 돌아갔어?”반재신이 ‘응’ 하고 짧게 답했다. 그러더니 입술만 달싹이며 좀처럼 말을 내뱉지 못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여기 우리 둘밖에 없는데.”반재언은 진작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가 피식 웃었다.반재신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영국으로 돌아간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전화 한 통 없어. 무슨 사고라도 난 건 아닌지 모르겠어.”반재언이 웃음을 터뜨렸다.“이제 4일밖에 안 됐는데 그렇게 걱정돼?”그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적어도 잘 도착했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잖아.”반재언이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어쩌면 정말로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지.”자신의 말에 안절부절못하는 반재신의 모습에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영국으로 가면 되잖아.”반재신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회사는…”“지금 네 정신은 온통 진예은한테 쏠려있잖아. 진예은도 걱정되고, 회사도 걱정되는데 무슨 일을 잘할 수 있겠어?”반재언이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천천히 이어서 말했다.“너 AM 그룹을 이어받은 뒤로 한 번도 제대로 휴식해 본 적 없잖아. 너랑 진예은이 함께 한 세월이 얼만데. 걔는 너를 위해 네 아이까지 낳아줬는데, 너는 진예은한테 응당한 명분도 주질 못했어. 며칠 전 희망이 한 달 기념 파티 때 일은, 어느 정도 네 책임도 있어.”진예은은 반재신의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현재 공개적인 연인 상태지, 실질적으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혼전임신을 한 진예은을 아무리 반씨 가문에서 이미 인정했다고
진예은의 아버지가 냉장고 문을 열고 뒤적거렸다. 그러나 곧바로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먹을 걸 사둔 지 너무 오래되어서. 일단 앉아있어. 내가 나가서 먹을 것 좀 사 올게. 저녁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진예은이 소파에 앉았다.“아무거나요. 전 다 돼요.”그녀의 아버지가 서둘러 외투를 챙겨 현관으로 나갔다.“그래. 내가 빨리 다녀올게.”진예은이 그를 불러 세웠다.“아버지.”그녀의 아버지가 흠칫 거리며 고개를 돌렸다.진예은이 말했다.“저랑 같이 가요.”마트에 도착한 부녀는 각종 채소와 먹을 것을 샀다. 진예은이 아버지와 함께 이렇게 외출을 했던 건 무척 오래전이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으로, 아버지가 그녀를 데리고 놀러 나갔을 때 그녀는 고작 네, 다섯 살 정도였다.눈 깜짝할 사이에 이십 년이나 흘러버린 것이다.당시 그 집안의 주도권은 어머니가 잡고 있었고, 아버지는 연약했었다. 그로 인하여 그녀와 아버지 사이의 감정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아버지 역시 어떻게 하면 딸과 잘 지낼 수 있을지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행동 하나하나가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행여 그녀에게 미움을 받을까, 진열대 앞에서 채소를 고르며, 계속하여 그녀에게 이건 어떤지, 또 저건 좋아하는지 꼬치꼬치 물었다.진예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떤 요리를 하실 줄 아시면 그걸로 고르시면 돼요. 전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어요.”장을 본 후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서둘러 저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문뜩 진예은은 소파 밑에 노란색 고양이 한 마리가 숨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손을 뻗어 고양이를 끄집어냈다. 자세히 살펴보니 고양이의 왼쪽 눈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어 실명되어 있었다.그녀는 고양이를 무릎 위에 앉힌 후 털을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발버둥치던 고양이가 진예은은 악의가 없음을 알아차리고 가만히 엎으려 움직이지 않았다.그녀의 아버지가 준비된 음식을
거실에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예은아… 난 그냥, 너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그가 천천히 이어서 말했다.“그리고 굳이 허튼 돈을 쓸 필요도 없었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으면 그걸로 배를 채우기만 하면 되는걸. 이것 봐. 이렇게 멀쩡하게 잘살고 있잖아.”진예은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진씨 집안에 돈이 떨어진 거예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여기 왔을 때부터 이상하다 생각했어요. 밖에 있어야 할 차가 없었어요. 차를 파셨어요? 그리고 이 집안에 바뀐 물건은 없는데, 어머니가 소장하셨던 도자기가 없어졌네요.”진예은은 텅 비어버린 도자기 진열대를 가리켰다.그녀의 어머니는 사치스러운 생활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특히 도자기를 자식처럼 아꼈기에 절대 스스로 팔지 않았을 것이다.그래서 이 모든 걸 종합하면 한 가지 결론밖에 없었다.어머니가 잡혀간 후 아버지는 그걸 모두 처분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고용인을 내보냈다.분명 요리를 할 줄 알면서 신선한 식재료를 사지 않았다. 냉장고에는 전부 오래되어 냄새나는 냉동 고기와 냉동식품, 며칠이나 지난듯해 보이는 음식들이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접시가 냉장고 바닥에 붙어 잘 떨어지지도 않았고, 음식 위로 하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그녀의 아버지는 입술만 달싹이며 좀처럼 말을 뱉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초췌했고 무력해 보였다.“미안하구나…”“그러니까 말씀해 보세요. 도대체 돈을 다 어디다 썼는데요!”소리를 지르며 다그치던 진예은은 문뜩 뭔가를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 어머니?”그녀의 아버지가 침묵했다. 침묵은 곧 긍정을 뜻했다.진예은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걸 느꼈다. 어머니가 연서를 데리고 그녀를 찾아왔을 때 왜 진작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그녀의 친모가 왜 연서를 데리고 서울에까지 찾아왔을까? 정말로 단순히 그녀를 협박하기 위해서?“예은아… 네 엄
그녀는 아버지가 어제 음식을 잔뜩 준비하고, 남은 걸 냉장고에 넣어둔 후, 두고두고 먹을 생각이었음을 진작 알아차렸었다.진예은이 돌아온 걸 발견한 그가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가 해명하며 말했다.“어젯밤에 한 거라 얼마 되지도 않았어. 버리기도 아깝고…”진예은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방금 사 온 아침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이제부터 먹을 만큼만 사시고, 될수록 하루를 넘기지 마세요.”그녀의 아버지가 대답했다.“알았어. 꼭 기억할게.”진예은은 싸늘하게 그의 말을 반박했다.“어차피 제가 없으면 기억하지 않으려 하시겠죠.”그녀의 아버지가 식탁으로 걸어와 의자를 끌어낸 후 자리에 앉았다.“다시 학교로 돌아가 대학원 시험을 치르는 거니?”그녀는 식빵을 꺼내 버터를 바르며 답했다.“네. 오늘에 바로 가려고요.”그녀의 아버지가 막 뭐라 말을 하려던 그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진예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나가볼게요.”문을 연 진예은은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녀는 순간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기다란 코트에 회색 목도리를 두른 반재신이 캐주얼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트렁크까지 들려있었다.찬 바람을 얼마나 오랫동안 맞았는지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그의 몸에서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진예은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반재신, 네가 왜…”“진예은, 너 휴대폰은 왜 꺼놨어.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건데!”그녀는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설마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원이 꺼져있어서 자신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예은아, 누가 온 거니…”뒤따라 나온 그녀의 아버지 역시 문 앞에 서 있는 반재신을 확인하고 놀라 굳어버렸다.진예은이 고개를 돌려 아버지에게 말했다.“먼저 아침 드세요.”“그래.”아버지도 차마 더 이상 묻지 못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아침을 마저 먹었다.진예은이 문을 비스듬히 닫은 후 차갑
진예은의 아버지는 더 이상 반박 못 하고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반재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뇌었다.“손님?”지금 자신이 그저 손님이라는 말인가?진예은이 허리를 숙이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아니면? 여기 우리 집이야. 그러니까 누구 말을 따라야겠어?”반재신이 이를 악물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 네 말에 따라야지.”“그렇지. 아이 착해 반재신.”진예은이 현금을 꺼내 그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이걸로 장 봐. 아껴 쓰고.”반재신은 어이가 없어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곧이어 진예은은 학교로 가버렸다. 반재신과 진예은의 아버지는 함께 장 보러 마트로 향했다. 하지만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성인 남자 둘이 즐겁게 대화를 나눌 리가 없었다. 어색한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반재신은 진찬과 진예은의 친모 때문에 진씨 가문 사람들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진예은의 아버지였기에 진예은을 봐서라도 외면하지는 않았다.“저기, 자네 이름이 뭔가?”그녀의 아버지가 먼저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질문했다. 딸이 집에 들인 손님인데 이름도 모르는 건 퍽 난감했다.그는 굳이 그녀의 아버지한테 잘 보일 생각이 없었다.“반재신입니다.”그녀의 아버지가 물었다.“우리 예은이와는 어떤 사인가?”반재신이 미간을 찌푸렸다. 진예은의 친모도 그와 진예은의 관계를 알고 있었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이 몰랐다고?반재신이 대답하지 않자 그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반재신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또한, 자기 딸이 곤란해지는 걸 원치 않았기에 굳이 반재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반재신은 잔뜩 위축된 진예은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자신이 나이 든 어른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가 콧등을 문지르며 대답했다.“아마 어르신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가 맞을 겁니다.”그녀의 아버지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그럼 두 사람은 지금 사귀는 사인가?”그가 “
반재언이 그와 악수하며 인사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왕 대표님.”왕 대표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도 이제 막 시작했습니다. 자, 제가 한 분씩 소개해 드리겠습니다.”왕 대표가 열정적으로 반재언을 몇몇 윗사람들에게 소개해 주었다.“여기 이분들은 모두 저희 DK 그룹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분들입니다. 이쪽은 문 사장님과 허 회장님, 그리고 이분은 정 회장님이십니다.”반재언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문 사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반 대표님과는 진작부터 만나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기백과 도량이 비범하십니다. 역시 반지훈 회장님의 아드님이시네요.”반재언이 겸손한 태도로 답했다.“과찬이십니다.”문 사장이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아쉬운 듯이 말했다.“참, 반재신 대표님이 만나는 사람만 없었다면 제 딸을 소개해 줬을 텐데 말입니다.”허 회장이 말했다.“반씨 가문에는 첫째 아드님도 계시잖아요. 틀림없이 반재신 대표님처럼 훌륭하신 분 아니겠습니까.”반재언은 테이블 위에서 술잔 하나를 들었다. 그는 그저 웃기만 할 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막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려던 반재언이 살짝 멈칫했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여자는 정민희였다.정 회장이 물었다.“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정민희가 아버지 곁에 나란히 서며 대답했다.“그냥 한 번 와봤어요.”반재언을 힐끗 바라본 그녀의 시선이 살짝 굳어졌다. 정 회장이 그녀에게 말했다.“여긴 반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셔. 지금 비즈니스에 관해 이야기 중이지.”반재언은 살짝 고개만 끄덕이고 천천히 술을 한 모금 마실 뿐,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정민희는 한참 동안이나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러다 정 회장이 그녀에게 뭐라 주의를 주자,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둘째 도련님과 첫째 도련님께서 너무 똑같이 생기셔서 순간 헷갈릴 뻔했네요.”그녀의 말에 문 사장이 흥미를 보
그가 싱긋 웃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정민희 씨만 개의치 않다면 저는 상관없습니다.”살짝 멈칫하던 그녀가 곧바로 웃으며 답했다.“당연히 개의치 않죠.”반재언이 고개를 숙이며 시간을 확인했다.“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정민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반재언이 떠난 후, 그녀의 눈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반재언은 열 시 반이 넘어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거실 불을 끄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살짝 열린 방문 사이로 새어 나온 불빛이 어둑한 벽면을 밝혀주었다.‘아직 안 자고 있었나?’반재언이 똑똑 문을 두드렸지만 그 어떤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 주인공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왔다.남우는 잠버릇이 고약했다. 기다란 다리 사이에는 돌돌 말린 이불이 껴있었고, 이불의 절반가량이 이미 침대 밑으로 축 처져있었다. 그녀는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잠잘 때마저 활동적인 그녀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자칫 속살이 보일 것 같았다.그가 입술을 악물며 턱에 힘을 실었다.‘지금 저 여자가 내 인내력 테스트를 하고 있는 건가?’최근 들어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인내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몸소 체감하는 중이었다.반재언이 침대 쪽으로 다가가 잠든 그녀의 얼굴을 향해 몸을 숙였다. 그는 양팔로 그녀의 몸을 가둔 채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그녀의 눈초리가 움찔거리는듯하더니 입술을 달싹거리기 시작했다.반재언이 조금 더 강하게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달콤한 단잠을 누군가가 자꾸만 방해하는 듯한 이상 야릿한 기분을 느낀 남우가 겨우 눈을 잡아 떴다. 그녀는 순간 너무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마셨다. 남우는 양손으로 힘껏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반재…”채 뱉지 못한 말이 또다시 그의 입술에 막혀버렸다.두 사람 모두 평소보다 한층 더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남우가 그의 어깨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린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