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이만이 서재로 들어왔다.“부르셨습니까, 도련님.”“내가 너한테 스파이가 있나 알아보라고 했었지. 그 일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긴 한 거야?”진찬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이만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는 진작 그의 물음에 답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도련님, 그 일이라면 이미 알아보았습니다. 다만 아직 확신이 부족합니다.”“도대체 무슨 확신!”진찬이 격분한 듯이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쓸어던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이만의 앞까지 걸어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도대체 누구야?”이만이 양옆으로 늘어뜨렸던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그가 답했다.“데이비 씨 쪽 사람입니다. 그자는 진작 한태군과 손을 잡고, 도련님께서 정 회장의 죽음으로 자신을 모함하려 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진찬의 손등에 검푸른 힘줄이 불끈 솟았다.“한태군이 어떻게 정 회장 죽음의 증거를 손에 쥐고 있을 수 있어. 그 일이라면 내가 너한테 직접 증거를 없애버리라고 명령했었잖아.”그가 이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너 날 배신한 거냐?”이만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도련님, 제가 도련님을 배신했다고 생각하십니까?”진찬이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그의 얼굴에서 그 어떤 증거를 찾아내려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진찬이 그를 놓아주며 돌아서더니 창문 앞으로 걸어가 멈춰 섰다.“이만, 난 너한테 어떤 사람이지.”이만이 시선을 내려뜨리더니 깊은숨을 들이마셨다.“도련님은 저의 은인이십니다.”“잘 알고 있다니 다행이야. 그럼 슬슬 나한테 보답할 때가 되지 않았어?”이만이 몸을 굳혔다.진찬이 고개를 돌리더니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나 대신 죄를 뒤집어써. 돈은 넉넉하게 줄게. 네가 출소한 후에도 난 여전히 너를 중히 쓸 거야.”이만이 떠나고, 진찬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빌리행 배 표 두 장 예약해 줘. 내일 당장 갈 거야. 그리고 이만은
부하가 답했다.“아마 내일 오전 아홉시쯤일 겁니다.”한편, 경찰서.야근하던 두 경찰이 이만을 취조실로 데리고 갔다. 한태군은 이미 안에 앉아있었다. 수갑을 찬 이만이 그의 맞은편 자리로 걸어가 앉았다.“어쩌면 당신 말이 맞을 수도 있겠죠.”한태군이 그를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그의 손가락이 톡톡 테이블을 두드렸다. “당신은 경찰이 제때에 당신을 체포한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겁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쯤 당신은 이미 시체가 되어있었을 테니까요.”그날 밤 두 사람은 거래를 했었다. 이만은 이번 일의 증인이 되어주고, 한태군은 그에게 매기의 안전을 약속했다. 이만은 공범이었다. 그는 진찬을 대신해 정 회장을 죽인 증거를 인멸했다. 진찬은 경찰의 수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든 자기 죄를 이만한테 뒤집어 씌울게 분명했다.그는 진찬이 자기의 판단을 믿을지언정, 절대 이만이 그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그가 안전해지려면 이만은 이 세계에서 사라져야 했다. 이만이 죽으면 증거는 자연스럽게 없어진다.진찬은 원래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이만을 없애버릴 계획이었으나, 경철이 진작 이만의 집 주위에 잠복해있었을 줄은 몰랐다. 앞만 보느라 뒤에서 바싹 쫓아오고 있던 적을 눈치채지 못한 격이었다. 그 덕분에 이만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매기는 무사한가요?”그가 물었다.한태군이 담담하게 답했다.“현재 진찬은 자기 코가 석자라 매기한테는 신경 쓰지도 못할 겁니다. 저희 쪽 사람이 이미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습니다. 그 점은 안심하세요.”이만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한태군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당신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비록 공범이긴 하나 직접 법정에 서서 증인이 되길 자처했으니 중한 벌은 받지 않을 겁니다. 변호사도 마련해 두었습니다. 이번 재판에서 당신은 최대한 가벼운 벌을 받게 될 겁니다. 매기는 당신이 형기를 다 채울 때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이만이
남자에게 머리채를 잡힌 레이린 정은 두피가 너무나 아팠다. 눈앞에 보이는 흉악한 남자의 얼굴에 그녀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소리쳤다.“내 아빠는 죽여놓고 넌 도망치려고? 내가 절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진찬, 너 같은 인간은 지옥에나 떨어져야 돼!”“내가 지옥에 떨어지면, 넌?”진찬이 그녀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더욱 가깝게 들이대며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정 씨 가문이 그런 최후를 맞이한 건, 다 네 손으로 직접 일구어낸 결과야. 너 정말 한태군이 진심으로 너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해? 걘 그냥 널 이용하는 것뿐이야. 잊지 마. 만약 내가 네 얼굴을 망가뜨리지 않았다면, 넌 진작 데이비 그놈한테 붙잡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냈을 거야.”레이린 정이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진찬이 얼굴을 옆으로 휙 돌렸다. 그가 숨을 길게 내쉬더니 곧장 그녀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그녀의 몸이 휙 하고 옆으로 꼬꾸라지더니 입가에서 피가 주르륵 새어 나왔다. 곧바로 그녀가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적어도 난 이제 당신의 진짜 얼굴을 알아. 데이비한테 붙잡힌대도 당신 곁에 있는 것보다 나았을 거야.”진찬이 그녀의 턱을 억세게 부여잡고 뭐라 막 말을 하려던 그때, 부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상황을 알렸다.“도련님, 차량 몇 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진찬이 그녀를 옆으로 밀어내더니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돌아섰다.“당장 사람들을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 사람이 적은 외진 곳으로 가야겠어.”진찬이 레이린 정을 억지로 차에 밀어 넣더니 곧바로 자신도 올라타고 차를 출발시켰다. 두 세대의 차가 부두의 서쪽 교외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그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차가 도착했다. 경찰들은 그들이 이미 떠난 것을 확인하고 서쪽과 남쪽 두 쪽으로 나뉘어 수색을 펼쳤다.새벽 네 시가 넘은 시각, 진찬이 탄 차가 외진 교외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백미러로 보니 자신들이 탄 차와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경찰차가 보였다. 그가 굳은 표정
만약 그가 욕심을 부리지 않고, 레이린 정이 강유이한테 손을 쓰는 걸 초기에 진작 말렸었다면 정 씨 가문도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 때에는 미리 그 일에 따를 후과도 생각하고 감당해야 한다. 그가 레이린 정을 이용하여 정 회장의 재산만 탐하려고 했다면 충분히 그 돈으로 정 씨 가문의 재기에 성공했을 것이다.하지만 진찬은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굳이 정 회장을 죽이고, 한태군과 데이비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으며, 심지어 강유이를 탐할 생각까지 했다.“이런 걸 자승자박이라고 하나. 기분이 어때요.”한태군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만약 당신이 레이린 정 씨를 데리고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쩌면 기회가 있었을 수도 있었죠.”진찬이 결국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곧바로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굳혔다.“난 한 평생을 이 빌어먹을 신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어. 똑같은 황손이지만 내 어머니가 정실의 소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줄곧 눈치만 보며 자랐어. 사람들은 나를 무시하거나 핍박했어.”“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나한테 너를 뛰어넘고 황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사상을 주입했지. 그분은 모든 희망을 나한테 거셨어. 난 그분의 기대를 짊어졌지만 그 기대는 항상 나를 무겁게 짓눌러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어. 그래도 어떡해. 그 사람은 내 어머니인데. 난 그분을 거역할 수 없었어.”“난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여자를 아내로 맞을 수조차 없었어. 그녀가 분만실에서 죽어갈 때마저도 곁에 있어주지 못했어. 어머니의 바람 때문에 나는 내 자식조차 인정할 수 없었단 말이야. 지난 몇 년을 비참하게 살았었는데 오늘 드디어 해방 받을 수 있게 되었네.”진찬이 팔을 구부려 레이린 정의 목을 잡고 그녀를 앞세운 뒤 자신은 그녀의 뒤에 서서 총구를 그녀의 목 동맥에 가져다 댔다.그가 한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테이프에 입이 틀어막힌 그녀가 끅끅 소리 내며 울었다. 그녀의 몸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한태
반재신이 빠르게 달려가 그녀의 어머니를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강한 힘에 그녀의 어머니가 몸을 휘청거리며 침대 옆으로 넘어졌다. 진예은이 침대에 엎드려 콜록거리며 서둘러 숨을 들이마셨다.진예은 어머니가 또 무슨 행패를 부릴까 걱정되었던 간호사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의 정신이 불안정해 보였다. 입으로는 계속하여 왜 그 애를 궁지로 몰았냐며, 왜 죽은 게 네가 아니라는 말만 중얼거렸다.진예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어머니의 눈에서 진찬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과 충격이 느껴졌다. 그 충격이 너무나 커서 살아갈 희망을 잃은 사람 같았다.진예은도 똑같이 어머니의 자식이었다. 하지만 진찬만이 어머니의 기쁨과 슬픔이었다.그렇다면 도대체 자신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난 걸까.“아주머니, 정말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강유이는 도무지 못 들어주겠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예은이도 아주머니 딸이에요. 진찬이 죽었다고 딸 목숨까지 빼앗을 생각이세요?”진예은 어머니는 영혼을 잃은 사람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한 것 같았다.“난 아들만 있으면 돼…”강유이가 막 뭐라고 말하려던 그때, 진예은이 말했다.“됐어. 그만해.”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남아있지 않았다.“더 말할 필요 없어.”그녀는 진작 담담하게 받아들였었다. 또한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해 줄 거라는 그 어떤 희망도 품지 않았다.강유이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이럴 거면 왜 예은이를 낳기를 선택했냐고, 낳았는데 왜 아껴주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진예은의 어머니는 간호사가 데리고 나갔다. 그녀는 병실을 나갈 때까지 단 한 번도 진예은을 돌아보지 않았다.병실 안에는 한참 동안 무거운 정적만 흘렀다.진예은이 덤덤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눈부신 햇살이 비치었다.“걱정할 필요 없어. 난 괜찮으니까. 조금 쉬면 다 괜찮아져.”강유이는 입술을 깨물었다.“그럼 푹 쉬고 있어.”그녀가 반재신을 돌아보며 말했다.“오빠, 우리 이
진예은의 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강유이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서서 가려고 하던 때에 그가 말을 꺼냈다.“예은이가 우리를 원망하는 걸 이해한다. 하지만 그 애는 찬이보다 자유로웠어. 그 애가 자유자재로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고, 아무 걱정 없이 살 수만 있다면 난 그걸로 안심할 수 있단다.”강유이가 그를 힐끗 바라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병원을 벗어났다.개교기념일 행사가 끝나고 어느새 보름이 훌쩍 지났다.강유이는 팀원들과 연극 공연 시험을 마치고 진예은을 찾으러 옆 교실로 향했다.바로 옆 교실에서는 재시험을 치르고 있었는데 이제 막 끝난 것 같았다. 재시험을 보는 학생들이 속속들이 빠져나오고, 뒤쪽에 진예은의 모습이 보였다. 강유이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녀가 다가오자 강유이가 물었다.“어떻게 됐어? 재 시험 합격했어?”“아마 한 번 더 시험을 치러야 할 것 같아.”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될 대로 되겠지. 꼭 연기자만이 내 유일한 출로가 아니잖아.”강유이가 그와 나란히 서서 걸어갔다.“그럼 넌 졸업하면 뭐 할 생각이야?”“글을 써서 그 판권을 팔 거야. 그리고 열심히 일해서 서른 살 전에 바다가 보이는 별장을 살 생각이야.”강유이가 놀라 되물었다.“그게 다야?”“아니면?”진예은이 씩 웃었다.“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서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지.”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연서는 이제 정말로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고아가 되어버렸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줄곧 진예은이 아이를 돌보았었다. 진예은은 이미 아이의 또 다른 부모나 마찬가지였다.만약 진예은마저 아이를 상관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정말로 천애 고아가 될 것이다.진예은은 지금껏 줄곧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며 살았었다. 지금도 그녀는 연서만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려 하지 않았다…강유이가 입술을 꼭 깨물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섰다.“예은아,
모히칸 컷 남자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소리 질렀다.“What?”반재신은 진작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그날 밤, 신턴 빌라.차량 한 대가 정원 밖에 주차되어 있었다. 한태군이 느긋하게 몸을 기울이며 고개를 숙여 손목시계를 확인했다.그때 총총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강유이가 그의 앞으로 달려오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오래 기다렸어?”그녀는 먹물을 머금은 것처럼 검은 파마머리를 높게 포니테일로 묶었고, 검정과 하양이 어우러진 민소매 A 라인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금속 체인으로 된 작은 크로스백에, 하얀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생기발랄하고 귀여운 느낌을 주었다.한태군이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예쁘게 차려입었네?”강유이가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너희 집에 가서 밥 먹는 건데, 좋은 인상을 남겨야지.”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처음 가는 것도 아니잖아.”“딱 한 번이었잖아. 그때랑은 다르지.”그녀가 콧방귀를 뀌었다. 지난번에는 그의 어머니의 퇴원 기념 파티였었고 사람도 많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를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는 거였으니 당연히 그 의미가 달랐다.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씨 저택에 도착했다. 강유이는 한태군의 뒤에 서서 거실로 들어섰다.그의 아버지와 한재욱이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두 아이가 들어서는 모습을 확인했다. 한재욱이 웃었다.“왔구나.”강유이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아저씨, 작은 아버지 그간 평안하셨어요.”한희운도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마침 아래층으로 내려오던 정연이 유이를 보고 따뜻하게 웃어주었다.“유이 왔구나.”그녀가 강유이 곁으로 다가오더니 한태군을 밀어내고 유이의 손을 잡았다.“저녁엔 뭘 먹을까. 아줌마한테 말해봐. 아줌마가 다 해 줄게.”강유이가 쑥스러운 듯이 말했다.“아주머니 저 편식 안 해요. 다 먹을 수 있어요.”“편식 안 한다니 얼마나 좋아. 태군이는 제 아빠 닮아서 김치를 싫어하거든.”한희운이 당황하
창가에는 자리가 두 개나 있었는데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는 식기가 세팅되어 있었고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음식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문제는 그 옆의 의자에까지 노트북 가방이 놓여있었던 것이다.누가 봐도 다른 사람이 앉지 못하도록 일부러 놓은 것이 분명했다.그녀가 뚜벅뚜벅 걸어가 식판을 내려놓았다.“뭐 이런 돼먹지 못한 사람이 다 있어?”진예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 쪽으로 다가오던 그림자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그녀의 앞에 음료수를 내려놓았다.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반재신이었다.반재신이 노트북 가방을 원래 그의 자리로 옮겨놓더니 멋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가 나이프를 들고 접시에 담긴 스테이크를 썰었다.진예은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변에 빈자리가 보이지 않았다.“이 자리 주인 있어?”그가 천천히 고기를 씹으며 넘기더니 머리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없어.”“그런데 왜 너 혼자서 두 사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난 다른 사람과 함께 밥 먹는 걸 즐기지 않아.”“……”반재신이 눈을 들고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문제 있어?”“없어.”진예은이 미소 지으며 다시 식판을 들었다.“그럼 식사마저 해. 방해하지 않을게.”그녀가 돌아서려는데 반재신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잠깐만.”그녀가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담담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앉아. 너한테 물어볼 거 있어.”진예은도 거절하지 않고 식판을 놓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물어봐.”반재신이 이 초간 침묵했다.“아직 생각 못 했어.”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지금 나랑 장난해?”그가 그녀를 힐끗 바라보더니 그녀의 물음에 전혀 다른 답을 꺼냈다.“밥 먹어.”진예은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그녀의 인상 속 반재신은 농담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녀는 그가 유이의 일 혹은 유이와 상관있는 일에 대해 물을 거라 생각했었다.반재신은 강유이 이외의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니까
”유이야.”조민과 소찬이 술잔을 들고 다가왔다.“오늘 너무 예쁘다!”강유이가 웃으며 말했다.“고마워요.”조민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이건 나와 소찬 씨가 축하의 의미로 권하는 거야. 너와 한태군이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래.”강유이가 그녀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혔다.“저도 선배와 소찬 씨의 앞날에 행복할 일만 가득하길 바랄게요.”곧이어 남우와 반재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의 뒤에는 진예은과 반재신 그리고 강성연과 반지훈까지 있었다.강성연이 유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오늘 우리 유이 너무 잘했어!”그녀가 미소 지었다.“진짜요?”반지훈이 말했다.“우리 딸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어. 넌 우리의 자랑이야.”강유이가 한 떨기 꽃처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한태군이 그들 쪽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전했다.“아버님, 어머니, 두 분께서 유이를 제가 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 올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네놈 운 좋은 줄 알아!”그가 술잔을 들고 한태군이 내민 잔에 부딪혔다.“앞으로 내 딸한테 정말 잘해줘야 해.”한태군이 강유이를 바라보았다.“걱정 마세요. 제 생에 여자는 오직 유이 한 사람뿐입니다.”강성연도 미소 지었다.여준우와 진예은의 아버지도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다. 그들과 함께 정연 여왕과 한희운도 다가왔다. 여준우가 말했다.“아직 의식 하나 남았지?”강유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남은 의식이 또 있어요?”그가 말했다.“베란다에서 하는 세기말 키스가 남았잖니. 너희 아직 그거 못했어.”한희운이 웃으며 말했다.“여준우 경, 어째 가족들보다 경이 더 조급해 하는 것 같습니다.”여준우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전설 속의 세기말 키스. 우리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오늘에서야 보게 되었군요.”그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터뜨렸다.남우가 의문스러운 듯이 물었다.“세기말 키스가 뭐야?”반재언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오래전 첫 번째
웨딩카가 지나가야 했기에 궁에서부터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 기타 차량은 통행을 금지 시켰다.강유이가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길에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그들 모두가 이 성대하고 엄청난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든 것이였다.그녀의 곁에 앉아있는 한태군은 네이비 더블 버튼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늠름해 보였다. 어깨에는 성 패트릭 훈장과 로열 빅토리아 훈장 등 여러 훈장이 달려있었다.그가 강유이의 손을 잡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에서 땀이 나는데?”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나 긴장돼.”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더니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내가 있잖아.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편하게 가져.”강유이의 시선이 그가 입은 제복으로 향했다.“이 옷 오빠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한태군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내 신부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성당에 도착하자 한태군은 강유이와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한희운과 함께 여준우, 진예은의 아버지 등 황실 성원들 그리고 내각 대신들까지 함께 성당 서쪽 문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는 광장에는 이미 수천 명의 초대 관객들이 몰려있었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도 웅장했다.여준우가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고, 결혼식도 전부 라이브로 방송되겠는데 유이 그 계집애 아마 지금쯤 우리보다 더 긴장하고 있겠죠?”진예은의 아버지가 그를 바라보았다.“하하. 내 눈에는 네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그가 웃으며 말했다.“황실 결혼식은 처음이라서요.”열한 시 반이 되자 정연 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랑 한태군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대표로 성당에서 각 귀빈들과 인사를 나눴다.남우가 반재언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저분이 바로 여왕 폐하셔? 엄청 예쁘시다. 나 실제로 처음 봐.”반재언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나도 처음 뵙는 거야.”“뭐?”남우가 깜짝 놀랐다.“그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어?”“재신이
”참 형수님은?”소찬이 묻자 반재언이 대답했다.“지금 아버님 모시고 돌아다니고 있어. 나도 이제 가야겠네. 두 사람 편히 쉬고 있어요.”반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소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와이프가 생기더니 변했어!”“하하. 당신은 뭐 재언 씨와 다른 것처럼 말하네요.”조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찬도 얼른 잔을 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잠깐만요. 왜 나 버리고 혼자 가요! 같이 가요.”강성연과 지윤이 룸에서 나와 걸어가다 마침 복도에서 반지훈과 희승과 마주쳤다. 희승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사모님.”강성연이 반지훈 앞에 멈춰 서자 반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는 잘 했어?”“그럼요. 근데 당신 오후에 아버님과 여씨 가문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반지훈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당신 기다리고 있었지. 가서 밥 먹자.”희승이 지윤의 곁에 나란히 서며 그들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사모님, 그럼 저희들은 먼저 아버님한테 가볼게요.”반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성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와 나란히 복도를 걸어갔다. 포근한 햇살이 통유리로 된 창문으로 들어와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한데 꼭 붙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이틀 후,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세기말 황실 결혼식 날이 다가왔다. 식은 아홉 시에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아침 일곱 시부터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궁에 도착해 있었다. 강유이는 커다란 메이크업 룸을 혼자 썼다. 네다섯 명의 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그녀를 위해 화장을 해주고 머리를 만져주었다.여덟 시가 되어서야 강유이는 드레스를 입을 수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드레스는 과한 보석과 레이스가 아닌 천연 실크 소재로 우아함을 극대화했다. 오프숄더 형 넥 라인으로 간단하지만 파격적인 미를 추가했고 소매는 칠부 정도 되었다.면사포 길이만 16피트 정도 되었는데 변두리가 레이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럼 나 결혼식 당일에 이 티아라 쓸래. 그러면 엄마의 디자인을 홍보해 줄 수도 있잖아.”한태군이 등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도 돼.”…반씨 가문 사람들은 결혼식 이틀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한태군이 안배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황실에서는 호텔을 통으로 빌려 결혼식 때문에 일부러 해외에서 온 귀빈들을 위한 장소로 마련했다.구씨 집안사람들과 육씨 집안사람들도 왔고, 남강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연예계에서 강유이와 친분을 유지했던 윤수아, 우영, 주계진, 임석진도 초대되었다. 조민과 소찬은 당연히 초청자 명단에 속해 있었다.강성연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그녀를 룸으로 안내했다. 룸 안에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삼촌.”헨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못 본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예전보다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다.강성연이 다가가 그와 포옹했다.“오셨어요.”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예전에 내가 네 결혼식도 참석 못 하고, 또 네 두 아들의 결혼식도 참석 못 했었잖니.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마침 영국에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이렇게 너를 만나러 왔단다.”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며 말했다.“와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몸은 좀 어떠세요?”그가 미소 지었다.“많이 괜찮아졌다. 지윤이와 희승이가 돌봐주고 있어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그때 지윤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왔다.강성연이 고개를 돌려 지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놀라던 그녀가 다음 순간 눈물을 글썽였다.“두 사람도 와줬네요.”지윤이 그녀한테 다가갔다.“유이가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와 희승 씨도 아버지 따라왔어요. 희승 씨는 지금 반 회장님과 같이 있어요.”헨리가 경호원에게 선물을 갖고 오라고 지시한 후 강성연에게 선물을 건넸다.“리비어가 올 수 없어서 참 안타까워했단다. 이건 걔가 너
한태군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웃었다.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온 도시가 화려한 네온사인에 둘러싸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강유이와 한태군은 저녁을 먹은 후 진원으로 돌아갔다.이제 막 샤워를 마친 탓에 강유이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자 한태군이 그녀의 손에서 타월을 가져가더니 대신 머리를 닦아주었다.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거울 속 남자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태군 오빠, 나 결혼식이 너무 기대가 돼.”“그래?”한태군이 부드러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나 역시 기대돼!”“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성스러운 결혼식장에 들어서다니!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그가 소리 내어 웃더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거 알아? 난 한평생 내가 꿈꿨던 모든 소원들을 이미 다 이뤘어.”강유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무슨 소원인데?”한태군이 여전히 그의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너와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우리 두 사람의 아이까지 만나게 된 거.”그녀가 멈칫거렸다. 따듯한 조명 아래 그녀의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설마 처음부터 다 꿍꿍이가 있었던 거야?”그가 대답했다.“어쩌면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난 너를 아내로 맞이할 줄 알았던 것 같아.”강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안았다.“나도 이번 생에는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한태군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뼛속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정말 영광이야.”…이틀 후, 한태군과 강유이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황실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었다. 화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모든 언론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패션 계와 주얼리 계의 최상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줄지어 강유이한테 전해졌다. 명품 맞춤 드레스와 결혼식 때 사용할 각종 보석들이 발 디딜 곳 없게 전시된 채 그녀가 고
그러자 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여행 좀 다녀오니까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어요.”안예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원하는 일이 다 잘 되길 바랄게.”그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월말이 되었다. 강유이 일행들의 여행도 어느새 끝이 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강성연과 반지훈은 정원 밖에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도착한 아이들이 차례대로 차에서 내렸다. 강유이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아빠, 엄마!”그녀가 두 사람을 동시에 끌어안았다.반지훈이 못 말린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렇게 안겨?”강유이가 눈초리를 휘며 대답했다.“엄마 아빠한테 저는 영원한 어린애죠.”강성연이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나머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재밌게 놀았으면 됐어. 이제 안으로 들어가야지.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모여 떠들썩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겠구나.”진예은과 남우는 집안으로 들어간 후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살폈다. 희망이는 두 남동생과 함께 있었다. 세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느껴졌다.아래층에서는 반재신 반재언 형제가 외출을 하고, 한태군이 거실에서 반지훈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아버님 이번 판은 제게 양보해 주십시오!”반지훈이 흰색 바둑알을 들고 판을 들여다보다 결심한 듯이 바둑알을 내려놓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게.”한태군이 웃으며 말했다.“다음번에는 제가 양보해 드리겠습니다.”반지훈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난 네 양보 따위 필요 없다.”주방에서 과일을 깎고 있던 강성연이 거실에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본 후 다시 커피를 타고 있는 강유이를 바라보았다.“이제 곧 결혼식을 올리겠구나. 엄마가 너를 위해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어.”강유이가 멈칫거리더니 강성연을 돌아보았다.“어떤 서프라이즈 선물이요?”“아직은 안 가르쳐 줄 건데?”강유이가 조금
한태군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두 사람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조민이 대답했다.“나랑 소찬 씨는 이곳에 온 지 좀 됐어. 유이가 인스타에 사진을 올려서 알았어. 너희들도 여기 왔다는걸.”강유이가 조민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리에 앉혔다.“그럼 우리랑 며칠 더 같이 놀아요.”소찬까지 자리에 착석한 후 반재언은 그에게 진예은과 강유이를 소개했다.“여기는 우리 제수씨인 진예은씨고, 이쪽은 내 동생 유이야.”“형 결혼식 때 봤었어.”소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형 동생이 내 와이프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면서? 와이프한테서 얘기 들었어.”조민이 그를 보며 말했다.“누구보고 와이프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하거든요?!”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약혼까지 다 했는데 다른 남자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유독 강유이만 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예요! 약혼이라니. 선배 약혼했어요?”조민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응, 너한테 말하는 걸 깜빡했어.”“너무해요.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을 수 있어요.”강유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민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조민이 그녀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그랬지.”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저 이제 선배랑 안 놀거예요.”조민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옆에 앉아있는 한태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빨리 네 와이프 좀 달래 봐.”한태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강유이도 그저 장난으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조민의 약혼 소식을 듣고 진심으로 기뻤다.적어도 이제 그녀는 자기만의 행복을 찾았다.…..한편, 서울 병원.민서율은 복도에서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있는 어머니는 많이 초췌해진 상태였다.“어머니, 몸은 좀 어떠
투호 판을 벌인 사장이 말했다.“오천 원에 세 번 던질 수 있어요.”“그렇게나 비싸요? 오천 원에 세 번밖에 던지지 못하다니!”진예은은 어쩐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투호 판 사장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저희가 여기서 제일 쌉니다. 다른 집에서는 만 원에 세 번 던지게 하는걸요.”강유이가 진예은을 잡아끌며 말했다.“오천 원에 하자. 사장님도 장사하는 게 어려우실 거 아니야. 우리 재미로 한 번 해보자.”결국 그녀는 사장에게 만 원을 건넸다.“기회는 총 여섯 번입니다.”사장이 화살 여섯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가지런히 놓인 여러 개의 항아리 옆에는 명중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선물이 놓여있었다. 강유이는 그중 팔찌가 갖고 싶었다. 비록 가짜겠지만 디자인이 예뻤다.그녀가 고심 끝에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화살은 항아리를 빗나가고 말았다.그 뒤로 연속 두 번 더 던졌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이제 화살은 세 개 밖에 남지 않았다.강유이의 자신 없는 모습을 본 남우가 그녀의 손에서 화살을 가져가며 말했다.“내가 할게요.”그녀가 팔찌 옆에 놓인 항아리로 화살을 던졌고, 화살은 단번에 항아리 안으로 들어갔다.성공이다!흥분한 강유이가 폴짝폴짝 뛰며 말했다.“새언니 정말 대단해요!”“훗. 이 정도쯤이야.”남우가 눈을 찡긋해 보이며 물었다.“또 어떤 게 갖고 싶어요?”강유이가 진예은에게 물었다.“예은아, 어떤 게 마음에 들어?”진예은이 선물을 살피다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머리핀이요. 저게 제일 예쁜 것 같애요.”남우가 다시 머리핀 옆에 있는 항아리를 향해 화살을 던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 머리핀을 명중했다.강유이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진짜 백발백중이네요. 새언니, 이제는 새언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남우가 턱을 쓰담으며 말했다.“그러면 저는…”그녀의 시선에 백옥 청자가 들어왔다.“저걸로 하죠.”그녀가 들고 있던 화살을 슝 던지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항아리 안으로 빨려
늦은 밤의 산속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평안한 야영장에는 오직 풀벌레 소리만 잔잔하게 들려왔다.텐트 밖 잔디 위에는 랜트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빛을 밝히고 있었다. 평온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강유이는 몸을 뒤척거리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한태군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품에 안았다.“잠이 안 와?”“응.”그녀가 그의 품에 가만히 기댔다.“태군 오빠, 나 화장실 가고 싶은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한태군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그럼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이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태군이 손전등을 들고 그녀와 함께 한참을 걸었다. 두 사람은 우거진 숲 앞에 도착했다. 강유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여기서 기다리고 있어.”한태군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그녀는 숲 안으로 들어갔지만 무서워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볼일을 본 후 강유이가 서둘러 달려와 그의 팔짱을 꼈다.“됐어.”한태군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텐트로 돌아가던 중 그녀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며 손으로 가리켰다.“저게 북두칠성인가?”한태군도 고개를 들었다.“응, 맞아.”강유이가 배시시 웃었다.“역시 산속이니까 별이 엄청 잘 보이는 것 같아.”“두 사람 밤늦게 자지도 않고 별구경 하는 거예요?”남우가 텐트 안에서 나오며 묻자 강유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새언니도 아직 안 잤어요?”“네. 아까 귀신 이야기한 것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겠잖아요…!”남우가 생수 한 병을 따서 마셨다.강유이와 한태군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새언니 설마 그런 이야기에 무서워해요?”남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산골짜기라고요! 보통 때와는 다르잖아요.”강유이가 포도 한 송이를 들며 말했다.“걱정 마요. 우리 큰오빠가 새언니를 지켜줄 거예요.”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한태군과 함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개를 돌린 남우는 그제야 두 사람이 들어가 버린 것을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