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차성철은 최근 들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차설아의 병실에 긴급 신고 버튼을 설치해 주었다. 버튼만 누르면 병원의 긴급 벨이 울리면서 차성철이 배치한 보디가드가 병실로 달려올 것이다.차설아는 성도윤과 같이 있는 것이 좋아서 차성철한테 아무 일도 없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성도윤을 향한 마음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선을 지키지 못했다. 성도윤은 차설아를 떠보다가 결국 그 선을 넘어왔다.“나는 그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게 행복할 뿐이야. 그래서 당신의 입도 닦아준 건데 싫으면 얘기해. 내일 밤부터 다시 오지 않을게. 케이크를 사던 가게의 파티시에를 스카우트해서 매일 케이크를 만들게 했지만 이제는 필요 없겠지...”성도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을 이었다.“내일 메뉴는 헤이즐넛 케이크라고 했어. 아쉽지만...”“잠시만요!”차설아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차설아가 제일 기대하던 메뉴가 바로 헤이즐넛 케이크였기에 성도윤을 내쫓을 수 없었다.“파티시에도 일하느라 고생했는데 어떻게 함부로 자르겠어요. 내일도 와주면 고맙겠지만 앞으로는 뭐가 묻어도 도와주지 말아요. 손은 멀쩡하니까 내가 직접 닦을게요.”“그래. 당신이 이토록 애원하니 한 번 고려해 볼게.”성도윤은 피식 웃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눈빛은 여우처럼 교활하기 그지없었다.“휴...”차설아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후회하기 시작했다. 성도윤은 예전처럼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차설아를 부드럽게 다가가면 마음을 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맛있는 케이크로 경계심을 무너뜨렸다.성도윤의 존재가 습관 되어갈 때쯤 차설아는 이미 함정에 빠진 것이다.성도윤은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의 성과는 그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웠다.“이제는 병실로 돌아갈 테니 푹 쉬어. 내일 밤에도 올 테니까 기다려. 잘자.”차설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했다. 머릿속은 두 사람이 뜨겁게 키스를 퍼붓던 화면으로 가득 차서 얼굴이 화끈
일주일 뒤, 병원에서 정밀 검사 결과를 알려주었다. 차설아의 허리가 심하게 다친 건 맞지만 치료를 제때 받고 푹 쉬어서 생각보다 빨리 나았다. 그러기에 반신불수가 될 거라는 의심을 거두어도 되었다.그 소식을 알게 된 뭇사람들은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복 받은 사람들은 내가 딱 알아본다고 했잖아. 우리 설아가 복 받아서 빨리 나은 거야.”배경윤은 차설아를 끌어안고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배경윤은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해서 살이 많이 빠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배경윤이 다친 줄 알 것이다.“앞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는 운동은 절대 하면 안 돼! 암벽 등반, 등산은 절대 안 되고 계단을 오를 때는 꼭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해.”차성철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말했다. 한 번 큰 사고를 당했기에 차설아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더 신경 쓰고 싶었다.“성철 형,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 붙어있으면서 스파크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할게요.”선우시원은 차설아를 힐끗 쳐다보면서 사뭇 엄숙하게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한 달 정도 입원하면 거의 다 나을 거래. 병실에만 있어서 답답하겠지만 참아. 오빠가 병원에 퇴원 신청을 하면 예정일보다 더 빨리 퇴원해서 집에 데려갈 거야. 간병인을 미리 알아보았으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차성철은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울상을 지었다.“그러지 않아도 돼.”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나는 병원에 있는 게 좋아. VIP 병실이라 편하게 지낼 수 있잖아. 미리 퇴원 신청을 하지 않아도 돼. 귀찮고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설아야, 너를 위해서라면 귀찮은 일도 다 해줄 수 있어. 너는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퇴원 예정일을 앞당기는 건 복잡한 절차도 아니야.”차성철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다.“오빠가 다 해놓을 테니 그날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자. 설아야, 오빠 믿지?”“아...”차설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차설아가
차설아는 해바라기 꽃을 바라보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옛 친구가 보낸 선물이야.”“어느 친구가 보낸 거야? 너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친구라면 내가 아는 사람일 텐데 말이야.”배경윤은 해바라기 꽃의 내음을 맡으면서 싱글벙글 웃었다.“네가 아는 사람이야.”차설아를 고개를 끄덕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 갑자기 불안해 난 선우시원이 그 꽃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급히 물었다.“설마 나도 아는 사람이야?”“네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확신하지는 못하겠어.”차설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선우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럼 적어도 성도윤은 아니라는 거네? 누가 꽃을 보냈는지 몰라도 참 좋은 친구인 것 같아. 성도윤만 아니면 돼.”“왜 성도윤만 아니면 된다는 건데?”차설아는 선우시원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성도윤이 보낸 것이 아니라면 누가 보냈든 상관없어. 나의 라이벌은 성도윤 한 명뿐이잖아.”차설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평소에는 총명해 보였던 선우시원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해서 의외였다.만약 선우시원이 밤마다 성도윤이 찾아와서 차설아한테 디저트를 먹여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댈 것이다.“누가 보낸 선물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설아가 좋아하는 꽃을 보냈으니 좋은 사람 같아.”배경윤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차설아를 관심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이 전생에 차설아의 엄마였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내 얘기는 그만하고 네 얘기나 해줘. 어떻게 되었어?”차설아는 배경윤이 걱정되어 계속해서 물었다.“그 사람이랑 화해한 거야? 나 때문에 괜히 너도 그 사람이랑 싸운 건 아니지?”“내가 그놈이랑 싸울 게 뭐가 있다고 그래. 더 이상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야.”배경윤은 다른 사람의 말을 할 때면 신이 났다가 자신의 감정사를 얘기하려고 하면 잔뜩 긴장했다. 배경윤은 말을 버벅거렸다.“나는
“누가 네 전 여자 친구라는 거야? 나는 너랑 모르는 사이야. 친한 척하지 마!”배경윤은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사도현한테 아주 실망했기에 다정하게 인사할 수가 없었다.“경윤아, 아무리 그래도 같은 침대에서 자던 사이였는데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모르는 사이야.”사도현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일부러 장난을 쳤다. 배경윤이 차갑게 구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놀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숙이고는 배경윤과 눈을 마주쳤다.“다 잊어버려서 그런 거라면 이해할게. 내가 몇 번이고 너한테 말해주면 되거든.”“뭐, 뭐 어떻게 말해줄 건데?”배경윤은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사도현을 피하려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나의 전 여자 친구는 내가 벽에 밀치고 키스하는 걸 제일 좋아했어.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다시 알려줄 수도 있어.”사도현은 천천히 배경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배경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사도현, 너는 정말 나쁜 놈이야!”배경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민망해서 사도현의 뺨을 후려갈기려고 했다. 이때 사도현이 배경윤의 손목을 잡더니 품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속삭였다.“이제는 우리가 친한 사이였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겠어?”“나는...”배경윤은 거칠게 뛰는 심장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인정할 수 없어.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야.”“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잖아.”사도현은 배경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손끝으로 배경윤의 코를 쓰다듬었다.배경윤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고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사도현이 미웠지만 제일 미운 건 자신이었다. 사도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우스웠다.사도현이 적극적으로 들이대면 배경윤은 반격하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배경윤은 사랑의 싸움에서 사도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도현이 잡아당기면 끌려가고 밀
반대로 사도현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는 배경윤을 쳐다보았다.“급한 일도 없잖아.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커피나 마시면 얼마나 좋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기도 해.”“사도현, 너는 정말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너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바빠.”배경윤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사도현이 끌어당기면 질질 끌려갔고 기세로 사도현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뻔뻔스러운 사도현을 어쩌지 못하기에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내가 왜 할 일이 없겠어? 너를 만나는 게 나한테는 가장 중요한 일이야.”사도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배경윤을 바라보았다.“이 멍청한 놈!”배경윤은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면서 욕했다. 사도현이 능글맞은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사도현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말했다.“듣기로는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결정했다더라? 진찬영이랑 커플로 연기하는 대본도 받았지?”“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아니야.”배경윤이 부정하자 사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나랑 찬영 오빠는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커플이야. 그런 대본 따위 필요 없어.”“배경윤!”사도현은 배경윤의 도발에 휘말린 듯한 느낌을 받아서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사도현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왜? 내가 기뻐하니까 오히려 화가 나?”배경윤은 늘 싸움에서 기세에 눌렸지만 사도현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이번에 드디어 이기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배경윤은 신이 나서 환하게 웃었다.“내가 화가 나서 쓰러져야 네 속이 시원하지? 그런 거야?”사도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커플이라면 싸울 때도 있을 거야. 작은 다툼은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면 이건 상대의 마음에 칼을 꽂는 거나 마찬가지야.”“이게 커플 사이에 싸우는 거로 보여?”배경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피식 웃었다.“내가 네 여자 친구라는 거야, 아니면
배경윤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진찬영을 바라보았다.“찬영 오빠!”그러고는 진찬영 쪽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길 맞은편에 서 있는 진찬영은 누구보다도 더 멋있어 보였다. 길을 건너던 배경윤은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조심해요!”진찬영은 잔뜩 긴장한 채 달려갔고 배경윤을 와락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를 간신히 피했고 같이 바닥에 넘어졌다. 누가 보아도 애틋한 커플인 것 같았다. 시간이 갑자기 멈춘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배경윤은 진찬영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전류가 온몸을 뚫고 흐르는 듯한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배경윤과 진찬영은 한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고 머쓱하게 웃었다.“찬영 오빠, 정말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까지 다칠 뻔했어요.”배경윤은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횡설수설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좋아하는 연예인 앞에서 배경윤은 수줍은 소녀가 된 것 같았다.“내가 길을 건넜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예요. 전부 제 탓이에요.”진찬영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늘색 셔츠에 카키색 청바지를 입은 진찬영은 특유의 분위기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타고난 매력이었다.길을 걷고 있어도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여자도 진찬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길 건너에서 걸어오는 배경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결국 사과해야 할 사람은 진찬영이었다.“곧 커플로 촬영할 사이인데 편하게 말 놓아도 돼요. 제가 오빠보다 어리잖아요.”진찬영이 진지하게 사과하자 배경윤은 마음이 불편해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아, 그러네요. 나의 여자 친구, 앞으로 잘 부탁해요.”진찬영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애틋하게 쳐다보았다. 진찬영의 행동 하나가 배경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흠! 얼른 회사로 가요. 장 감독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요.”말을 마친 배경윤은 뒤돌아
소식이 퍼지자 인터넷은 며칠 동안 떠들썩했고 팬들을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나와 현장 사진을 찍으러 갈 준비를 했다. 소식이 뜨자마자 바로 달려나갈 수 있게.오늘은 원래 진찬영과 배경윤의 계약식이 일정이 있는 날이었다. 별빛 엔터테인먼트도 준비 태세를 보였다. 그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소속사 임원진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배경윤과 진찬영이 별빛 엔터의 문턱을 넘는 순간 여기저기서 종이 폭죽을 터트리며 환호했다.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예비부부를 축하해주는 것처럼 두 사람을 반겼다.“찬영아, 경윤 씨. 이렇게 두 사람이 우리 회사로 온 걸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자자, 거두절미하고 우리 얼른 회의실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하죠!”장윤태 감독은 한시라도 더 빨리 계약하고 싶었기에 두 사람을 바로 회의실로 안내했다.회의실엔 두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전부 이번 연애 프로그램의 또 다른 출연자들이었다. 직업도 다르고 나이도 다른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전부 외모가 빼어나다는 것이다. 길가면 무조건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 정도로 말이다. “세상에, 진창영 배우님! 정말 잘생기셨어요. 티브이에서도 그렇고 실물도 정말 똑같이 잘생기셨어요!”인기 배우 소수민이 일어나며 열정적으로 인사를 했다.다른 두 여자 중 한 명은 명문대를 다니는 4학년 장유빈이었고, 남은 한 명은 인테리어 디자이너 양이나였다.두 사람은 열정적인 소수민과 달리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두 눈에 진찬영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저기요. 아직 촬영 시작도 안 했거든요? 벌써 그렇게 티를 내시면 어떡해요. 명한 씨, 저희 둘은 들러리가 확정이겠네요!”스포티하게 입은 남자가 단정한 기품이 흘러넘치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운동복 차림의 남자는 지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수영 선수 하늘이었고 단정한 모습의 남자는 유명한 보험계리사 백호연이었다.“늘이 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들러리가 확정이라
장윤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긴장한 듯 손을 접었다 폈다 반복하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감독님, 무슨 일이에요?”배경윤도 따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들도 분위기를 읽어내고 궁금한 얼굴로 장윤태를 보았다.“우리 프로그램에 변동이 생길 것 같네요. 원래 계획은 남자 세 명 여자 네 명으로 촬영하려고 했는데 지금 갑자기 합류하게 된 출연자가 있어서 남자 넷, 여자 넷으로 가야 할 것 같네요.”장윤태는 주먹을 쥐며 책상을 내리쳤다. 표정이 아주 심각했다.“어머, 그럼 잘된 일이잖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모두가 짝이 있게 되는 거잖아요! 그럼 더 재밌을 것 같은데요?”소수민은 눈을 깜빡이며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맞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쪽수도 맞아서 누구 한 명 외로워지는 사람은 없잖아요.”다른 출연자들도 맞장구를 쳤다.“그렇긴 하지만 이번에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조금 특별한 분이라서요. 그 사람이 오기만 하면 정상적으로 촬영을 할 수 없을까 봐 조금 걱정이네요.”장윤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대체 누가 투입되기에 촬영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거예요?”하늘이 다소 건방진 어투로 말했다.“제가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이 꽤나 돼요. 대통령이든 세계에 손꼽을만한 재벌이든 전부 만나 대화를 나눠봤죠. 그런데 긴급 투입되는 사람이 누구기에 감독님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거죠? 말해 보세요. 저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겠어요!”장윤태를 보고 있던 배경윤은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그들의 촬영을 방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건... 제가 말하기 어렵네요. 곧 도착한다고 하니 다들 알게 될 거예요.”장윤태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운명의 심판을 기다리듯 얼굴엔 절망이 가득했다.“자자, 도착하셨다고 하니 다들 기쁘게 환영해주자고요!”별빛 엔터의 홍보팀 팀장이 흥분하며 그들에게 소식을 전했다.그
“그게...”차설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그녀는 특히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임신 테스트기도 다 믿으면 안 돼요. 이게 호르몬과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남자의 에스트로겐 수치가 너무 높으면 임신 반응이 나올 때도 있거든요.”박성훈이 차설아를 대신해 설명했다.비록 이 설명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성도윤 같은 남자에게는 충분히 먹힐 만했다.역시나 성도윤은 그 말을 믿었고 얼굴에 실망한 감정이 가득했다.“정말 그럴 수도 있나요?”“그래. 혈액 수치가 가장 정확한 증거야. 혈액 검사 결과, 차설아 씨는 정말로 임신하지 않았어.”박성훈이 성도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위로했다.“괜찮아, 두 사람 아직 젊으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을 거야.”“미안해요, 도윤 씨. 나도 사실 두 줄이 나와서 임신한 줄 알았어요. 괜히 실망하게 해서 미안해요.”차설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도윤에게 사과했다.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실망한 기분도 잠시, 그는 차설아를 서둘러 달랬다.“바보야, 내가 미안해. 다 내가 부족해서야. 약속할게 이제부터 매일 밤 더 열심히 할 거야.”“엣헴!”박성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이 두 사람 또 닭살 돋게 하네. 매일 밤 열심히 한다고? 뭘? 이러다 어떻게 열심히 하는지까지 말할 기세군.’“형, 목이 마르면 거실에 나가서 커피나 좀 마시세요. 이제 검사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성도윤이 직설적으로 내뱉었다.“설아 씨가 임신 안 됐다고 하자마자 바로 나를 쫓아내려고 하네? 아침에 그 애타게 부탁하던 모습 성도윤은 어디 갔지? 이제 다시 나를 모셔 오기 힘들 텐데.”박성훈이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팔불출에는 정말 약이 없군.’“그럼 형은 그냥 여기 있어요. 내 능력으로 한 달 안에 아린이가 반드시 아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성도윤이 조금 유치하게 말했다. 아무리 도도하고 성숙한 남자라도 사랑 앞에서는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차설아가 남자의 팔을 잡고 말렸다.
“잘됐네요. 마침 딱 배고팠는데!”차설아는 피곤하고 정신이 흐릿했지만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성도윤을 반겼다.성도윤이 사 온 케이크는 차설아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주인은 분점을 열 계획도 없고 배달도 하지 않으며 매일 일정 수량만 판매했다.그래서 정말 오래 기다려야 하고 운이 좋아야만 살 수 있었다.가게 주인의 기분도 들쑥날쑥해서 기분이 좋을 때는 많이 팔지만 기분이 나쁘면 그날은 일찍 가게 문을 닫기 일쑤였다.단순히 줄을 서서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도 있지만 케이크를 사기 위해 기다린 사람들의 수고와 정성도 들어 있었다.차설아는 숟가락으로 케이크 한 조각을 떠서 입에 넣었다. 그 부드럽고 차가운 질감에 그녀는 감동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맛없어?”차설아의 표정을 보고 성도윤이 이마를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아니요. 너무 맛있어서... 이제 다시 이런 케이크를 못 먹으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요.”“바보, 그런 말을 왜 해? 앞으로 당신이 원하면 매일 사다 줄게.”성도윤이 차설아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약속했다.“좋아요, 그럼 매일 먹고 싶어요. 당신이 매일 사다줘요...”차설아는 입술에 크림을 묻힌 채 남자에게 물었다.“그런데 매일 줄 서서 사 오느라 면 당신이 힘들지 않을까요?”“걱정 붙들어 매, 당신이 질리지만 않는다면 매일 가서 사 올 수 있어. 정 안 되면 내가 그 가게 주인을 찾아서 배워서 매일 내가 직접 만들어서 줄게...”성도윤은 차설아의 입가를 닦아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니야?”“어, 뭐가요?”차설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녀는 그의 관찰력이 이렇게 예리할 줄 몰랐다.“분명히 뭔가 있어.”성도윤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는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지만 참으면서 기다렸다.그러다 차설아가 케이크를 먹으며 그런 말을 하자 분명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걸 확신했다.“역시 당신 눈을 피할 수는 없네요. 사실,
박성훈은 비관적인 차설아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몇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자신감 넘치고 자유롭고 시원시원한 여자였다.그런데 지금은 눈을 잃고 독에 중독되어 마치 시들어버린 꽃처럼 처량해 보였다.“설아 씨, 제가 살아있는 허준 선생처럼 신통한 의사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최선을 다해 당신을 치료할 것이고 당신의 눈도 적합한 이식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는 법입니다.”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차설아를 위로했다.물론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지금까지 성공 사례가 많지 않지만 의학 역사 속에서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과거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자신도 연구를 거듭하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고마워요, 박 선생님. 그 말 한마디가 저한테 용기를 주네요.”차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박성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말했다.“해독을 할 수 있든 없든, 그리고 제 눈이 다시 보이든 아니든,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사실을 도윤 씨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아 주세요. 도윤 씨가 지금 너무 지쳐 있어요. 더 이상 그이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말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박성훈은 차설아의 성도윤을 향한 깊은 감정에 감탄했다.이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먼저 걱정하는 차설아를 보면서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졌다.“제 아이도 지킬 수 없겠죠?”차설아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박성훈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맞아요. 아이는 지킬 수 없습니다.”그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설아 씨가 현재 중금속 중독 상태고 해독을 위해 강한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이 약들은 태아의 성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쳐요. 제 의견으로는 아직 초기일 때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그럴 줄 알았어
박성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수도 없고...’하지만 그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혈액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차설아의 여러 혈액 수치에서 이상이 발견되었고 그녀의 지금 상태로 본 결과, 박성훈은 차설아가 중금속 중독에 걸렸다고 판단했다.중금속 중독은 쉽게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신체의 각 기관을 쇠약하게 만들고 신경을 마비시키는 증상이었다.초기에는 극심한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경과 장기가 손상되며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게 되고 이러한 증상은 그야말로 생지옥과도 같았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박성훈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우선 잔인한 진실을 감추기로 결정했다.“어쨌든 걱정 마세요. 저희가 반드시 치료해 드릴 겁니다.”그렇게 말은 했지만, 사실 중금속 중독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투여된 독의 종류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적절한 치료법을 적용할 수 있었고 그러려면 독을 투여한 사람이 어떤 중금속 원소를 사용했는지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지금부터 최근 식사 내용을 정확히 말해 주세요. 혹시 식사 외에도 평소 드시지 않던 걸 섭취한 적 있나요?”박성훈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저 중독된 거죠?”차설아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되레 되물었다.“어떤 독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어요?”“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초기 판단으로는 중금속 중독일 가능성이 큽니다.”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숨김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이런 경우, 환자와 의사가 완전히 솔직하게 소통해야만 치료에 도움이 되기에 아무리 잔인한 현실일지라도 그녀가 사실을 알아야 했다.“중금속 중독...”차설아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몸이 서서히 차가워지며 절망감이 엄습했다.그녀는 예전에 비슷한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한 명문대 여학생이 룸메이트의 질투로
“무슨 일인데요?”박성훈이 갑자기 진지해지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뭘 알아내든 상관없어요. 도윤 씨한테는 좋은 얘기만 해주세요. 안 좋은 결과는 절대 말하지 마시고요.”차설아가 간결하게 자신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그녀는 방금 전에 애써 성도윤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이유가,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거짓말을 유지하려면 박성훈의 협조가 필요했다.“하...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박성훈은 차설아가 이런 부탁을 할 것이라는 걸 예상했지만 그녀를 보며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그런 상태에서 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을 걱정하며 그가 조금이라도 슬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두 사람 서로를 진짜로 사랑하나 보네...’“걱정 말아요. 내가 분위기 못 읽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걸 얘기할지 잘 알고 있어요.”박성훈이 차설아를 안심시키듯 말했다.“그리고 설아 씨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가 신의 손을 가진 명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의술은 좀 하는 편이니까 저희 말대로만 따르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단순히 임신 초기에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요.”“정말 그런 거였으면 좋겠네요.”차설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하지만 검사 결과가 결코 좋을 리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녀를 해칠 작정이었고 가볍게 봐줄 리가 없었다.만약 배경윤이 조금만 늦게 알아차렸더라면 지금쯤 그녀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지금 당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좋은 상태는 아닐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다.검사 결과를 살피던 그의 표정은 한층 무거워졌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어때요, 박 선생님?”차설아는 몽롱한 상태에서 거의 잠들 뻔했지만 억지로 정신을 붙잡고는 줄곧 침묵하고 있는 박성훈에게 물었다.“뭐라고 말해야
성도윤은 자책감에 사로잡혀 당장이라도 할복이라도 할 기세였고 박성훈은 그런 그를 진정시키려 일부러 괜찮을 거라고 말한 것이었다.하지만 사실, 차설아의 심장 박동은 이상했고 거의 보름 동안 지속된 무기력함과 과도한 졸음까지 고려했을 때, 그녀의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 원인은 단순히 임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박성훈은 어렴풋이 감이 왔다.하지만 지금 당장 혈액 검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괜히 성도윤에게 불안감을 주면 그가 차설아에 대한 과보호 수준을 고려할 때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정상이면 다행이야.”성도윤은 박성훈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며 마치 온 세상의 짐이 내려간 듯 안도했다.“들었지, 당신 괜찮대. 그냥 임신해서 피곤한 것뿐이래. 내가 괜히 겁먹고 난리 친 거야. 미안해. 내가 이런 경험이 없다 보니까 괜히 걱정했네.”성도윤은 기뻐하며 차설아를 꼭 끌어안았다.그리고 그녀의 배를 손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야, 꼬맹이. 엄마 너무 힘들게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봤지? 만약 엄마를 더 힘들게 하면, 네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 아빠가 먼저 너 혼쭐낼 거야!”차설아는 그의 유치한 농담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만 해요. 진짜 왜 이렇게 점잖지 못해요?”“하아, 두 사람 오늘 너무 닭살 커플인 거 아니야?”옆에서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박성훈이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거의 ‘고문 수준’의 애정 행각이었다.그때, 차설아가 성도윤을 바라보며 갑자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윤 씨, 나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어요. 지금 가서 사 올 수 있어요?”“지금?”성도윤은 순간 당황했다.그는 케이크를 사 오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혈액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라 결과를 확인한 후에 움직이고 싶었다.“네. 지금 당장이요. 지금 먹고 싶다고요.”차설아가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박성훈은 처음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어주고 있었지만 곧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잠깐만!”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성도윤을 바라보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왼쪽 아래로 2~3cm 정도 더 옮겨 봐.”성도윤도 덩달아 긴장해졌다.그는 박성훈의 지시대로 청진기를 차설아의 심장 왼쪽 아래 3cm 지점으로 옮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뭔가 이상한 점 있나요?”“...”박성훈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청진기에 집중했다.한참 후에야 그는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은 확실하게 들리는 건 없어. 혈액 검사 결과까지 봐야 정확하게 알 거야.”차설아는 처음부터 차분하게 검사를 받으며 잘 협조하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리고 박성훈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검사는 여기까지만 할까요? 박 선생님도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살펴보셔서 피곤할 테고 저도 피를 너무 많이 뽑아서 그런지 좀 지치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는 게 어때요?”사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하지만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괜히 성도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현이를 통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그 사람의 정체만 밝혀지면 직접 해결할 생각이었다.“온 지 얼마 안 돼서 피곤하지는 않은데요? 게다가 그냥 검사 결과만 보면 되는 거라 괜찮아요.”박성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택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한 거라곤 심장 소리 한 번 들은 게 전부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제가 피곤해서 그래요. 그리고 오늘 꼭 검사를 다 마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차설아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했고 명확한 거절의 의미였다.더 이상 검사에 협조할 생각이 없는 듯한 그녀를 보면서 박성훈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그리고 잠시 고
박성훈은 말을 마치고 청진기를 꺼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차설아의 옷 안으로 넣으려 했다.“잠깐!”성도윤이 그 장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재빠르게 박성훈의 손을 붙잡고 제지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청진하고 있지 그럼 내가 뭐 하는 걸로 보여?”박성훈이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해요.”성도윤이 단호하게 청진기를 낚아채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 아내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요. 이런 건 내가 직접 할 테니까, 형은 듣기만 해요.”박성훈이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 성도윤이 되물었다.“왜, 문제 있어요?”“문제라기보단... 좀 오버 아니야?”“어디가 오버에요? 형이 직접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누가 알아? 검사하는 동안 실수로 엉뚱한 곳이라도 건드릴지.’보통 때는 몰라도 지금처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하아... 역시 소설에서만 보던 ‘집착광공’이 실존하는구나.”박성훈이 이마를 짚으며 감탄했다.자신이 가끔 보던 ‘재벌 남주’ 소설들이 그냥 창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현실이 오히려 소설보다 더 과장되어 있었다.“헛소리 말고 어디에 대야 하는지만 알려 줘요.”성도윤이 청진기를 들고 박성훈을 노려보았다.“음... 왼쪽 쇄골 중앙선과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 경계에 대면 돼.”성도윤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박성훈은 그냥 순순히 위치를 알려 주었다.“잠시만요.”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청진기를 차설아의 잠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그러더니 여기저기 더듬으며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쯧쯧.”박성훈은 청진기를 끼고 있었기에 성도윤이 어떻게 검사하고 있는지 소리로 다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감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결국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어휴, 성도윤이니까 참는 거지.’그가 속으로 체념하는 사이, 성도윤이 한참 동안 위치를 못 찾자 결국 한마디 내뱉었다.“이 정도도 못 견디면 나중에 내진 검사할 때는 난리 나겠네?”“뭐요?”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촉각과 후각이 무척 예민했다.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공간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예전엔 책 냄새가 가득하던 방이 이제는 소독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조명도 더 밝고 뜨거워진 느낌이었다.이제 차설아는 자신의 모든 걸 성도윤에게 맡긴 상태였다.그가 정말로 해부라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당신 상상력 정말 대단한데? 우리 애도 나중에 소설가 체질이었으면 좋겠다.”성도윤은 차설아의 넘치는 상상력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차설아 씨, 지금 혈액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하거든요.”간호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하세요. 어차피 지금 나는 도마 위 생선이라 목숨은 이미 여러분들 손에 있으니까요.”차설아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며 팔을 내밀었다.곧이어, 조용한 방 안에 사각사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늘이 그녀의 정맥을 찔렀다.“살살 좀 해 주세요.”성도윤은 차설아의 살짝 찡그린 얼굴과 연달아 뽑혀 나오는 혈액을 보며 속이 상해 간호사에게 신신당부했다.그때, 앞쪽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성 대표님의 아내 사랑이 참 넘치시네요. 난 조용히 보조만 하려고 온 건데 이렇게까지 과한 애정 행각을 볼 줄은 몰랐어요. 좀 자제하세요.”그 말투를 보아하니 성도윤이 말했던 ‘대단한 의사’가 틀림없었다.차설아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순간 놀란 듯 말했다.“이 목소리... 어쩐지 익숙한데요?”“당연하지. 우리랑 꽤 인연이 깊은 사람이거든.”성도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설마... 이분...”차설아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외쳤다.“박 선생님?”“하하하. 나를 이렇게 빨리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요? 이걸로 승부는 끝났네요.”“도윤아, 나중에 밥 한 끼 사.”박성훈은 호탕하게 웃으며 차설아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 무척이나 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