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차성철은 최근 들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는 차설아의 병실에 긴급 신고 버튼을 설치해 주었다. 버튼만 누르면 병원의 긴급 벨이 울리면서 차성철이 배치한 보디가드가 병실로 달려올 것이다.차설아는 성도윤과 같이 있는 것이 좋아서 차성철한테 아무 일도 없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성도윤을 향한 마음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선을 지키지 못했다. 성도윤은 차설아를 떠보다가 결국 그 선을 넘어왔다.“나는 그저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게 행복할 뿐이야. 그래서 당신의 입도 닦아준 건데 싫으면 얘기해. 내일 밤부터 다시 오지 않을게. 케이크를 사던 가게의 파티시에를 스카우트해서 매일 케이크를 만들게 했지만 이제는 필요 없겠지...”성도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말을 이었다.“내일 메뉴는 헤이즐넛 케이크라고 했어. 아쉽지만...”“잠시만요!”차설아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차설아가 제일 기대하던 메뉴가 바로 헤이즐넛 케이크였기에 성도윤을 내쫓을 수 없었다.“파티시에도 일하느라 고생했는데 어떻게 함부로 자르겠어요. 내일도 와주면 고맙겠지만 앞으로는 뭐가 묻어도 도와주지 말아요. 손은 멀쩡하니까 내가 직접 닦을게요.”“그래. 당신이 이토록 애원하니 한 번 고려해 볼게.”성도윤은 피식 웃으면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눈빛은 여우처럼 교활하기 그지없었다.“휴...”차설아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후회하기 시작했다. 성도윤은 예전처럼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차설아를 부드럽게 다가가면 마음을 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맛있는 케이크로 경계심을 무너뜨렸다.성도윤의 존재가 습관 되어갈 때쯤 차설아는 이미 함정에 빠진 것이다.성도윤은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의 성과는 그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웠다.“이제는 병실로 돌아갈 테니 푹 쉬어. 내일 밤에도 올 테니까 기다려. 잘자.”차설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자는 척했다. 머릿속은 두 사람이 뜨겁게 키스를 퍼붓던 화면으로 가득 차서 얼굴이 화끈
일주일 뒤, 병원에서 정밀 검사 결과를 알려주었다. 차설아의 허리가 심하게 다친 건 맞지만 치료를 제때 받고 푹 쉬어서 생각보다 빨리 나았다. 그러기에 반신불수가 될 거라는 의심을 거두어도 되었다.그 소식을 알게 된 뭇사람들은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복 받은 사람들은 내가 딱 알아본다고 했잖아. 우리 설아가 복 받아서 빨리 나은 거야.”배경윤은 차설아를 끌어안고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배경윤은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해서 살이 많이 빠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배경윤이 다친 줄 알 것이다.“앞으로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하는 운동은 절대 하면 안 돼! 암벽 등반, 등산은 절대 안 되고 계단을 오를 때는 꼭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해.”차성철은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하게 말했다. 한 번 큰 사고를 당했기에 차설아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더 신경 쓰고 싶었다.“성철 형,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 붙어있으면서 스파크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할게요.”선우시원은 차설아를 힐끗 쳐다보면서 사뭇 엄숙하게 말했다.“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한 달 정도 입원하면 거의 다 나을 거래. 병실에만 있어서 답답하겠지만 참아. 오빠가 병원에 퇴원 신청을 하면 예정일보다 더 빨리 퇴원해서 집에 데려갈 거야. 간병인을 미리 알아보았으니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차성철은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차설아를 바라보면서 울상을 지었다.“그러지 않아도 돼.”차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말을 이었다.“나는 병원에 있는 게 좋아. VIP 병실이라 편하게 지낼 수 있잖아. 미리 퇴원 신청을 하지 않아도 돼. 귀찮고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설아야, 너를 위해서라면 귀찮은 일도 다 해줄 수 있어. 너는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퇴원 예정일을 앞당기는 건 복잡한 절차도 아니야.”차성철은 차설아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다.“오빠가 다 해놓을 테니 그날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자. 설아야, 오빠 믿지?”“아...”차설아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차설아가
차설아는 해바라기 꽃을 바라보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옛 친구가 보낸 선물이야.”“어느 친구가 보낸 거야? 너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친구라면 내가 아는 사람일 텐데 말이야.”배경윤은 해바라기 꽃의 내음을 맡으면서 싱글벙글 웃었다.“네가 아는 사람이야.”차설아를 고개를 끄덕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때 갑자기 불안해 난 선우시원이 그 꽃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급히 물었다.“설마 나도 아는 사람이야?”“네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어. 하지만 확신하지는 못하겠어.”차설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선우시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그럼 적어도 성도윤은 아니라는 거네? 누가 꽃을 보냈는지 몰라도 참 좋은 친구인 것 같아. 성도윤만 아니면 돼.”“왜 성도윤만 아니면 된다는 건데?”차설아는 선우시원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성도윤이 보낸 것이 아니라면 누가 보냈든 상관없어. 나의 라이벌은 성도윤 한 명뿐이잖아.”차설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평소에는 총명해 보였던 선우시원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해서 의외였다.만약 선우시원이 밤마다 성도윤이 찾아와서 차설아한테 디저트를 먹여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댈 것이다.“누가 보낸 선물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설아가 좋아하는 꽃을 보냈으니 좋은 사람 같아.”배경윤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차설아를 관심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만족감을 느꼈다. 배경윤이 전생에 차설아의 엄마였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내 얘기는 그만하고 네 얘기나 해줘. 어떻게 되었어?”차설아는 배경윤이 걱정되어 계속해서 물었다.“그 사람이랑 화해한 거야? 나 때문에 괜히 너도 그 사람이랑 싸운 건 아니지?”“내가 그놈이랑 싸울 게 뭐가 있다고 그래. 더 이상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야.”배경윤은 다른 사람의 말을 할 때면 신이 났다가 자신의 감정사를 얘기하려고 하면 잔뜩 긴장했다. 배경윤은 말을 버벅거렸다.“나는
“누가 네 전 여자 친구라는 거야? 나는 너랑 모르는 사이야. 친한 척하지 마!”배경윤은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사도현한테 아주 실망했기에 다정하게 인사할 수가 없었다.“경윤아, 아무리 그래도 같은 침대에서 자던 사이였는데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우리가 어떻게 모르는 사이야.”사도현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일부러 장난을 쳤다. 배경윤이 차갑게 구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놀리고 싶었다.사도현은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숙이고는 배경윤과 눈을 마주쳤다.“다 잊어버려서 그런 거라면 이해할게. 내가 몇 번이고 너한테 말해주면 되거든.”“뭐, 뭐 어떻게 말해줄 건데?”배경윤은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사도현을 피하려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나의 전 여자 친구는 내가 벽에 밀치고 키스하는 걸 제일 좋아했어.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다시 알려줄 수도 있어.”사도현은 천천히 배경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배경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사도현, 너는 정말 나쁜 놈이야!”배경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민망해서 사도현의 뺨을 후려갈기려고 했다. 이때 사도현이 배경윤의 손목을 잡더니 품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속삭였다.“이제는 우리가 친한 사이였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겠어?”“나는...”배경윤은 거칠게 뛰는 심장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인정할 수 없어.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야.”“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잖아.”사도현은 배경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손끝으로 배경윤의 코를 쓰다듬었다.배경윤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고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사도현이 미웠지만 제일 미운 건 자신이었다. 사도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이 우스웠다.사도현이 적극적으로 들이대면 배경윤은 반격하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배경윤은 사랑의 싸움에서 사도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도현이 잡아당기면 끌려가고 밀
반대로 사도현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손으로 턱을 괴고는 배경윤을 쳐다보았다.“급한 일도 없잖아.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커피나 마시면 얼마나 좋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기도 해.”“사도현, 너는 정말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너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바빠.”배경윤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사도현이 끌어당기면 질질 끌려갔고 기세로 사도현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뻔뻔스러운 사도현을 어쩌지 못하기에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내가 왜 할 일이 없겠어? 너를 만나는 게 나한테는 가장 중요한 일이야.”사도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배경윤을 바라보았다.“이 멍청한 놈!”배경윤은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면서 욕했다. 사도현이 능글맞은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날이었다. 사도현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말했다.“듣기로는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결정했다더라? 진찬영이랑 커플로 연기하는 대본도 받았지?”“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아니야.”배경윤이 부정하자 사도현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배경윤은 놀라운 말을 내뱉었다.“나랑 찬영 오빠는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짜 커플이야. 그런 대본 따위 필요 없어.”“배경윤!”사도현은 배경윤의 도발에 휘말린 듯한 느낌을 받아서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사도현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왜? 내가 기뻐하니까 오히려 화가 나?”배경윤은 늘 싸움에서 기세에 눌렸지만 사도현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이번에 드디어 이기게 되었음을 직감했다. 배경윤은 신이 나서 환하게 웃었다.“내가 화가 나서 쓰러져야 네 속이 시원하지? 그런 거야?”사도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커플이라면 싸울 때도 있을 거야. 작은 다툼은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면 이건 상대의 마음에 칼을 꽂는 거나 마찬가지야.”“이게 커플 사이에 싸우는 거로 보여?”배경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피식 웃었다.“내가 네 여자 친구라는 거야, 아니면
배경윤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진찬영을 바라보았다.“찬영 오빠!”그러고는 진찬영 쪽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길 맞은편에 서 있는 진찬영은 누구보다도 더 멋있어 보였다. 길을 건너던 배경윤은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조심해요!”진찬영은 잔뜩 긴장한 채 달려갔고 배경윤을 와락 품에 안았다. 두 사람은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를 간신히 피했고 같이 바닥에 넘어졌다. 누가 보아도 애틋한 커플인 것 같았다. 시간이 갑자기 멈춘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배경윤은 진찬영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전류가 온몸을 뚫고 흐르는 듯한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배경윤과 진찬영은 한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고 머쓱하게 웃었다.“찬영 오빠, 정말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오빠까지 다칠 뻔했어요.”배경윤은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횡설수설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좋아하는 연예인 앞에서 배경윤은 수줍은 소녀가 된 것 같았다.“내가 길을 건넜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예요. 전부 제 탓이에요.”진찬영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늘색 셔츠에 카키색 청바지를 입은 진찬영은 특유의 분위기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타고난 매력이었다.길을 걷고 있어도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여자도 진찬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길 건너에서 걸어오는 배경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결국 사과해야 할 사람은 진찬영이었다.“곧 커플로 촬영할 사이인데 편하게 말 놓아도 돼요. 제가 오빠보다 어리잖아요.”진찬영이 진지하게 사과하자 배경윤은 마음이 불편해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아, 그러네요. 나의 여자 친구, 앞으로 잘 부탁해요.”진찬영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배경윤을 애틋하게 쳐다보았다. 진찬영의 행동 하나가 배경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흠! 얼른 회사로 가요. 장 감독님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요.”말을 마친 배경윤은 뒤돌아
소식이 퍼지자 인터넷은 며칠 동안 떠들썩했고 팬들을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나와 현장 사진을 찍으러 갈 준비를 했다. 소식이 뜨자마자 바로 달려나갈 수 있게.오늘은 원래 진찬영과 배경윤의 계약식이 일정이 있는 날이었다. 별빛 엔터테인먼트도 준비 태세를 보였다. 그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소속사 임원진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배경윤과 진찬영이 별빛 엔터의 문턱을 넘는 순간 여기저기서 종이 폭죽을 터트리며 환호했다.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예비부부를 축하해주는 것처럼 두 사람을 반겼다.“찬영아, 경윤 씨. 이렇게 두 사람이 우리 회사로 온 걸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자자, 거두절미하고 우리 얼른 회의실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하죠!”장윤태 감독은 한시라도 더 빨리 계약하고 싶었기에 두 사람을 바로 회의실로 안내했다.회의실엔 두 명의 남자와 세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전부 이번 연애 프로그램의 또 다른 출연자들이었다. 직업도 다르고 나이도 다른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전부 외모가 빼어나다는 것이다. 길가면 무조건 사람들의 시선이 쏠릴 정도로 말이다. “세상에, 진창영 배우님! 정말 잘생기셨어요. 티브이에서도 그렇고 실물도 정말 똑같이 잘생기셨어요!”인기 배우 소수민이 일어나며 열정적으로 인사를 했다.다른 두 여자 중 한 명은 명문대를 다니는 4학년 장유빈이었고, 남은 한 명은 인테리어 디자이너 양이나였다.두 사람은 열정적인 소수민과 달리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두 눈에 진찬영을 좋아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저기요. 아직 촬영 시작도 안 했거든요? 벌써 그렇게 티를 내시면 어떡해요. 명한 씨, 저희 둘은 들러리가 확정이겠네요!”스포티하게 입은 남자가 단정한 기품이 흘러넘치는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운동복 차림의 남자는 지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수영 선수 하늘이었고 단정한 모습의 남자는 유명한 보험계리사 백호연이었다.“늘이 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들러리가 확정이라
장윤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긴장한 듯 손을 접었다 폈다 반복하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감독님, 무슨 일이에요?”배경윤도 따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사람들도 분위기를 읽어내고 궁금한 얼굴로 장윤태를 보았다.“우리 프로그램에 변동이 생길 것 같네요. 원래 계획은 남자 세 명 여자 네 명으로 촬영하려고 했는데 지금 갑자기 합류하게 된 출연자가 있어서 남자 넷, 여자 넷으로 가야 할 것 같네요.”장윤태는 주먹을 쥐며 책상을 내리쳤다. 표정이 아주 심각했다.“어머, 그럼 잘된 일이잖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모두가 짝이 있게 되는 거잖아요! 그럼 더 재밌을 것 같은데요?”소수민은 눈을 깜빡이며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맞아요. 남자 넷, 여자 넷이면 쪽수도 맞아서 누구 한 명 외로워지는 사람은 없잖아요.”다른 출연자들도 맞장구를 쳤다.“그렇긴 하지만 이번에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조금 특별한 분이라서요. 그 사람이 오기만 하면 정상적으로 촬영을 할 수 없을까 봐 조금 걱정이네요.”장윤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대체 누가 투입되기에 촬영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거예요?”하늘이 다소 건방진 어투로 말했다.“제가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이 꽤나 돼요. 대통령이든 세계에 손꼽을만한 재벌이든 전부 만나 대화를 나눠봤죠. 그런데 긴급 투입되는 사람이 누구기에 감독님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거죠? 말해 보세요. 저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겠어요!”장윤태를 보고 있던 배경윤은 어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긴급 투입되는 출연자가 그들의 촬영을 방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건... 제가 말하기 어렵네요. 곧 도착한다고 하니 다들 알게 될 거예요.”장윤태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운명의 심판을 기다리듯 얼굴엔 절망이 가득했다.“자자, 도착하셨다고 하니 다들 기쁘게 환영해주자고요!”별빛 엔터의 홍보팀 팀장이 흥분하며 그들에게 소식을 전했다.그
보온 용기를 들고 들어온 서은아는 활짝 웃으며 성도윤에게로 다가섰다.“보신탕 끓여왔는데 이게 위에 좋대, 너 안 그래도 위 안 좋은데 얼른 마셔봐.”그녀가 뚜껑을 열자마자 향기로운 보신탕의 냄새가 확 풍겨오자 진무열은 감탄을 자아내기 시작했다.“와, 냄새 너무 좋은데요. 서씨 집안 아가씨로 살면서 요리는 언제 배우셨어요?”책상을 마주 앉아 계약서를 넘기던 성도윤은 눈길도 돌리지 않은 채 무미건조하게 말했다.“그렇게 좋으면 가져가서 마시던가.”“...”성도윤에게 보신탕을 덜어주려던 서은아는 매정한 남자의 말에 행동을 멈추었는데 진무열도 바보는 아닌지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가씨가 대표님 위해서 직접 만들어 오신 건데 제가 뭐라고 감히 그걸 마셔요, 저는 그냥 뜨거운 물 마실게요.”그 말에 빠르게 마음을 가다듬은 서은아가 진무열을 보며 웃었다.“많이 해와서 괜찮아요. 드실 거면 덜어드릴게요.”“말씀은 너무 감사하지만 그냥 장난이었어요. 대표님 요새 마침 속 안 좋으신데 대표님 다 드리세요. 앞으로 종종 해주시면 좋고요...”말을 하던 진무열은 갑자기 제 아내를 떠올리며 말했다.“대표님 이혼 전에는 사모님도 이런 보신탕 자주 해왔었는데 대표님만 드리는 게 아니라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마다 다 나눠줬었어요. 회사 복지라면서 곳곳에 놔두고 왔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아서 우렁각시라는 별명도 얻었죠.”“그... 그래요?”자신을 난처하게 하는 진무열의 말에 서은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대꾸했다.이렇게 눈치 빠르고 일 잘하는 사람이 성도윤 옆에 있으면 언젠가는 자신의 일을 방해할 게 분명했기에 서은아는 하루빨리 진무열부터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한편 일에 열중하며 진무열과 서은아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성도윤은 갑자기 들리는 ‘이혼’과 ‘사모님’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들며 물었다.“진 비서, 아까 이혼이라고 했어?”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캐묻기 시작했다.“내가 전에 결혼을 했었어? 그리고
전화를 끊은 차설아는 생각 없이 말만 내뱉는 제 입을 원망하기 시작했다.어릴 때부터 죽마고우로 지내오다가 이제야 사랑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을 응원은 못 할망정 저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으니, 혹시라도 그게 도화선이 되 둘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생길까 봐 차설아는 점점 두려워졌다.무슨 일이 있어도 남의 혼사는 깨는 게 아니라는데 이런 금기를 범했으니 재수 없는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한편 성도윤은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든 채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성대 그룹 대표 사무실에 앉아있던 그의 옆에는 진무열과 그가 불러온 해커도 함께 있었다.“찾았어?”“네, 찾았습니다.”성도윤이 전화를 할 때도 열심히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던 젊은 남자 하나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전화 신호가 잡히는 곳은 해안시에서 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수림입니다.”남자가 빠르게 좌표를 찍어주자 진무열은 그걸 인터넷에 검색해봤는데 이내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대표님, 이 별장... 성진 씨 별장인데 차설아 씨가 성진 씨랑 같이 있는 걸까요?”“나도 눈 있으니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함께 화면을 보고 있던 성도윤은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헛웃음을 흘렸다.“옛친구랑 이렇게 뜨거운 재회를 하는지도 모르고 내가 괜히 걱정했네.”“대표님, 진정하세요. 차설아 씨는 이제 자유의 몸인데 그분이 누굴 만나든 누구랑 데이트를 하든 그건 다 그분 자유죠. 이건 선 넘으시는 거예요.”기억을 잃은 탓에 많은 일들을 기억 못 하는 성도윤이지만 차설아에 대한 마음만큼은 뼛속 깊이 새겨져 있는지 그녀의 일이라면 성도윤은 늘 이성을 잃곤 했다.비서로서 그 모든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진무열은 가슴이 아파서 제 보스가 하루빨리 끝난 사이는 떨쳐버리고 새로운 인연과 함께 새 삶을 살길 바랐다.“아까 서은아 씨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몸도 아직 다 회복 못 하셨는데 야근부터 하신다고 걱정 많이 하셨어요. 지금 보신탕 가지고 오신대요.”서은아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진무열이
그에 차설아가 놀라워하고 있는데 그 순간 공교롭게도 성도윤에게서 또 전화가 걸려왔다.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차설아가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불쾌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성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이제야 전화를 받는 거야, 죽은 줄 알았잖아!”그에 핸드폰을 귀에서 뗀 차설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전화는 왜 한 거예요, 우리가 이 정도로 친한 사이였어요?”“하하, 아니지.”그녀의 말에 성도윤은 웃으며 비꼬기 시작했다.“그냥 하룻밤 잔 사이니까 이런 연락은 불필요한 거긴 하지.”남사스러운 말에 얼굴이 빨개진 차설아는 차갑게 대꾸했다.“용건 있으면 빨리 말하고 없으면 끊을게요.”“잠깐만!”끊는다는 말에 조급해진 성도윤이 소리치며 물었다.“너 지금 어디야? 누구랑 같이 있어? 거기 안전하긴 한 거야?”“내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랑 같이 있는지를 당신한테 보고할 이유는 없죠. 그래도 물어보니까 얘기는 하는데... 아주 안전해요. 그러니까 당신이랑 이딴 쓸데없는 통화도 하는 거겠죠?”차설아는 혹시나 성도윤이 의심할까 봐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대꾸했다.“진짜야?”하지만 성도윤은 조심성이 많고 예리한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나는 못 믿겠는데, 네가 영상통화를 건다면 몰라도.”“영상통화라니, 드디어 미친 거예요? 우리는 친구도 못 되는 사이인데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내가 뭐 하는지를 알고 싶어 해요?”“굳이 그걸 알자는 게 아니고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래.”표정을 잔뜩 굳힌 성도윤은 진지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마지막으로 한 번만 물을게. 지금 어디야, 혹시 내 도움 필요해?”“친구 집에 있어요. 친구랑 사이도 좋고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본인이나 잘 챙겨요.”성도윤의 관심 따위 매정하게 넘기면 그만이었겠지만 얼마 전 원이가 한 말이 떠오른 차설아는 걱정되는 마음에 한마디 덧붙였다.“그건 무슨 말이야? 뭘 알기라도 한 거야?”성도윤처럼 예민한 사람은 차설아가 흘리듯
“제가 그분이었으면 진작에 신분을 밝히고 감사 인사라도 받았겠죠. 뭐하러 성진 씨를 속이겠어요?”“그 사람은 나한테 감사 인사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청아 씨가 더... 그 사람 같은 거예요.”“착각하신 거예요. 저는 그분이 아니에요. 제가 눈을 내어주는 건 돈을 위해서인데 그분은 뭘 위해서 당신에게 눈을 내어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은...”자신의 커리어가 있고 아이도 있고 성도윤과 한평생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그녀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신 같은 병신을 구해줄 리가 없었기에 성진은 차설아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정말 헛된 꿈을 꾼 것만 같아 성진은 차설아의 손을 놓으며 차갑게 말했다.“그럼 이만 돌아가 보세요. 이틀 뒤에 뵙죠. 수술만 잘 끝나면 얼마를 원하든지 다 드릴게요, 그쪽이랑 가족분들 노후까지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감사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저도 든든하네요.”말을 마친 차설아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남자와 가슴을 부딪치고는 정원을 빠져나갔다.그때 아래에서 손을 가만두지 못하며 기다리고 있던 박서영이 내려오는 그녀를 보더니 빠르게 달려가며 물었다.“어때요, 안 들켰어요?”“들킬뻔했어요.”“그래서 어떻게 했어요?”“잘 넘어갔죠.”정원 쪽을 보며 한숨을 쉬던 차설아가 말을 이었다.“저 정도로 순정파일 줄 몰랐는데, 이젠 눈을 줄 수밖에 없게 됐네요. 안 돌려주면 발 뻗고 못 잘 것 같아요.”“잘 부탁드려요.”“다른 볼일 없으면 난 이만 지하실로 돌아갈게요. 밖에 돌아다니다가 들키면 곤란하잖아요.”차설아는 눈시울을 붉힌 채 말하는 박서영을 보면서도‘움직이는 기관창고’답게 담담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죄송해요...”그녀의 태연함 앞에서 박서영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전에는 차설아가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를 데려오려고 애썼는데... 제 도련님이 눈여겨 본 사람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이렇게 너그
갑자기 말을 거는 성진에 깜짝 놀란 차설아는 손을 빼려다 커피잔까지 엎어버리고 말았다.“죄송해요!”서둘러 종이로 커피를 닦아내기 시작한 차설아는 여전히 대학생의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그녀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성진은 그녀의 팔목을 잡아오며 물었다.“당신 도대체 누굽니까?”“저는 강청아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제 몸에 손대지 말아 주실래요? 저는 몸은 안 팔아요.”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만 했기에 차설아는 일부러 언짢은 척하며 성진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었다.“강청아라고요?”하지만 성진은 초점 잃은 두 눈을 하고 아주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아까 그 이름도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이름인가 보네요. 혹시... 제 오랜 친구예요?”“도대체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그 사람 같아요...”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성진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그 사람은 지금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텐데 나 같은 병신을 기억하진 못할 거에요.”“그런 말씀 마세요.”줄곧 침착하던 차설아는 성진이 자신을 병신이라 칭하는 걸 듣고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성진 씨가 그분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걸 보면 그분도 좋은 사람일 게 분명한데 혹시 알아요? 다른 사람이랑 행복한 인생을 보내는 게 아니라 언제나 성진 씨 걱정만 하고 있을지?”“내 걱정을 한다고요?”성진은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어 보였다.“나도 알 거 다 알아요. 그 사람이 날 걱정할 리가 없어요. 내 두 눈으로 그 사람을 반년이나 곁에 뒀으니 나는 그걸로 만족해요.”지난 반년을 떠올리던 성진의 우울하던 얼굴에 점차 온화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반년이라는 시간이 아주 짧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랑 같이 지내던 시간이라 나한테는 엄청 소중해요. 청아 씨가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 반년 동안 나는 우리가 부부가 된 것 같았어요.”성진은 추억을 회상하며 슬픔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나 아쉬운 건 내가 보지도 못하
담담히 말하는 차설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성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렇게 두려워하면서 왜 눈을 팔겠다고 한 거예요? 돈이 필요하면 다른 방법으로도 벌 수 있잖아요. 굳이 여생을 망치면서까지 벌 이유가 따로 있는 거예요?”“그건...”차설아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대꾸했다.“돈이 영혼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영혼이 갇히는 건 그저 심심할 뿐이지만 가난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더라고요.”“얼마가 필요한 거예요? 내가 그 돈 줄게요, 눈 안 팔아도 줄 수 있어요.”“네?”그냥 장난삼아 한 말인데 가난에 찌든 소녀를 구원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 성진에 차설아가 오히려 더 당황하며 물었다.“왜요, 너무 의외예요?”성진은 두 손을 맞잡으며 여전히 감정 없는 투로 말을 이어나갔다.“비도 맞아본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우산을 쥐여준다고 하잖아요. 실명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아니까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굳이 이 길은 가지 않았으면 해서요.”그 말에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던 차설아가 코를 매만지더니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듣던 거랑은 전혀 다른 분이셨었네요. 엄청 매정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인류애가 넘치시네요. 본인은 지옥을 사시면서 다른 사람은 그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어린 나이에 잘못된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해서 한 말이에요.”“잘못된 길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전 돈이 필요해서 눈을 파는 것뿐이에요.”“눈 안 팔아도 돈 준다니까요.”“그건 싫어요.”자꾸만 거절하는 성진에 차설아는 그가 자신이 누군지 알아챈 건가 싶어 조급해하며 말했다.“가난하다고 해서 동정받고 싶지는 않아요. 돈을 받았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죠. 저도 빚지는 걸 싫어해서 돈만 받으면 마음이 불편해요.”“빚지는 걸 싫어한 다라...”그 말을 들은 성진은 추억에 잠긴 듯 슬픈 얼굴을 하고 말했다.“내 친구도 청아 씨처럼 빚지는 걸 아주 싫어했는데 친구가 원한 건 아니었지만 나한
“왔어요.”차설아를 데리고 야외정원으로 온 박서영이 성진의 말에 답을 했다.박서영은 이미 차설아를 온전히 믿고 있었다.만약 도망을 가거나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면 진작에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눈을 성진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뜻이었기에 박서영도 더는 그녀를 경계하지 않고 그녀에게 자유를 주었다.“어디 계셔?”“바로 앞에 앉아계시니까 천천히 말씀들 나누세요.”기대에 찬 얼굴로 묻는 성진을 향해 박서영이 차분히 대답했다.야외정원에는 라운지 의자가 두 개 있고 그 사이에는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었는데 둘은 다과가 올려진 그 테이블을 사이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서영아, 넌 내려가 있어.”“도련님, 저는 그냥 없는 셈 치고 얘기하세요. 방해 안 할게요.”박서영은 차설아는 완전히 믿지만 혹시나 성진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까 봐 두려웠다.둘을 만나게 하는 것 자체가 아주 모험적인 일인데 만약 자신이 자리에 없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것이기에 박서영은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방해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야.”“난 내가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때 옆에 제삼자가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해.”“하지만...”“지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야?”차가운 표정을 한 성진을 보면서도 용기 내 말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더욱더 냉랭해진 태도라 박서영은 어쩔 수 없이 내려갔다.“알겠습니다, 그럼 차라도 가져올게요.”박서영은 내려가기 전에 차설아를 향해 부탁한다는 제스처를 취했는데 그녀가 알겠다는 듯 저를 향해 눈썹을 움직여주니 박서영은 한결 안심이 됐다.박서영이 나가고 넓은 정원에는 성진과 차설아만이 남게 되었다.가장 높은 곳에 위치 한 정원이라 협곡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볕을 그대로 받을 수 있던 그곳에는 부드러운 바람까지 살랑살랑 불어오고 있어 아주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이름이 뭐예요?”고개를 들고 바람을 느끼던 차설아는 들려오는 성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여한이 없다는 말까지 하는 차설아에 측은지심이 생겨난 박서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나도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은데 차설아 씨 말고는 도련님이랑 맞는 눈이 없어요. 그래서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부담 갖지 마요. 이건 내가 진이한테 빚진 거니까 내가 갚을 거라고 했잖아요.”“그럼 내일 오전 두 분 만나게 해드릴게요.”그 말에 박서영은 마음을 독하게 먹으려고 심호흡을 하며 방을 나섰고 그날 밤을 차설아는 뜬 눈으로 새우게 되었다.하지만 잠을 설친 건 성도윤도 마찬가지였다.차설아와 연락이 안 된다는 사도현의 말에 자신도 연락을 해봤지만 차설아는 줄곧 묵묵부답이었다.그래서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을 때 성도윤은 차설아가 올린 새 스토리를 확인하게 되었다.[내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어, 오직 너뿐이야.]해바라기를 안고 활짝 웃는 사진을 저런 문구와 함께 올렸는데 꽃을 사본 사람이라면 해바라기의 꽃말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진심이 가득한 그 스토리를 본 성도윤은 차설아가 자신에게 고백을 하나 싶었다.아무 소식 없다가 갑자기 저런 자신을 올리는 게 자신에게 무언가를 암시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 그는 순간 오만해졌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이유를 알고 싶어 처음으로 그녀의 스토리에 댓글을 달았다.“너 지금 어디야?”하지만 그는 한참을 기다려도 차설아에게서 답장을 받지는 못했다.이미 끝난 사이이니 연락을 할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아 답답했던 성도윤은 새벽 두 시에 비서에게 연락했다.“진무열, 차설아 현재 위치 알아보고 나한테 보내.”보스의 전화에 잠에서 깬 탓에 정신이 흐리멍텅했던 진무열은 눈을 비비며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보스, 저는 비서지 해커가 아닙니다. 스토리에 올린 사진 한 장 보고 위치를 어떻게 알아냅니까?”“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내일 아침 날 밝기 전까지 무조건 알아내.”말을 마친 성도윤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잠에 들었지만 새벽에 임무를 전달받은 진무열은 자신이 또 뭘 잘못했나 싶어 어리둥절하기만
박서영의 망설임을 보아낸 성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왜, 불편해?”“아니요, 불편한 게 아니라... 그분을 꼭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박서영은 원래 대충 아무 핑계나 대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아는 성진이라면 단칼에 거절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겨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 같아 거절 대신 저런 질문을 한 것이다.“당연히 봐야지.”“만약 그 사람이 정말 나한테 눈을 기증해준 사람이라면 나 대신 어두운 여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나한테 새로운 삶을 선사해준 그런 은인을 찾아보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자리 마련할게요...”주먹을 꼭 쥐고 말하는 성진의 의지가 강해 보이기도 했고 또 괜히 그에게 의심을 사고 싶지도 않아 박서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차설아와의 만남은 없을수록 좋겠지만 그래도 수술 전이니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내일 오전 열 시에 별장으로 모셔올 테니까 두 분 얘기 나누세요.”“그래, 수고했어.”처음으로 박서영을 대놓고 칭찬한 성진은 밤바람을 느끼며 내일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달을 향해 고개를 든 그가 깊은숨을 들이마시자 몸속에 갇혀있던 영혼이 움찔거리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 아름다운 별빛도 얼마 안 있으면 보겠네.”성진을 방으로 데려다준 박서영은 곧바로 지하실로 향했다.차설아는 그곳에 놓인 하얀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있었는데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도 표정만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수술을 받아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장기를 내어주기만을 기다리는 보관창고 같은 모습이었다.“아까 도련님이랑 달구경 좀 했어요. 3일 뒤에 수술하는 거 도련님도 동의하셨어요. 하지만 기증자가 차설아 씨라는 말은 못 했어요.”박서영의 말에 눈을 뜬 차설아가 천장을 보고 웃으며 담담히 답했다.“당연히 말 못 하겠죠. 그 사람이 알면 안 받으려고 할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 사람이니까 그때도 나 위해서 자기 눈을 성도윤한테 내어줬겠죠.”“그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