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못 할 것 같아? 날 우습게 보지 마.”차설아의 눈빛에 살기가 돌더니 손에 힘을 주어 성도윤의 목을 꽉 잡았다. 몇 년 동안 무술을 익혔던 차설아가 성도윤을 목 졸라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날 죽일 용기도 없는 것 같은데? 당신 겨우 이 정도였어?”성도윤은 일말의 두려움 없이 온몸을 차설아에게 맡겼고 차설아가 죽여주기를 바라는 표정을 지었다.“그래. 당신이 죽고 싶다면 내가 직접 죽여줘야지.”차설아는 이를 꽉 문 채 온 힘을 다해 성도윤의 목을 졸랐다.“윽!”성도윤의 얼굴은 삽시에 빨갛게 달아올랐고 이마와 목에 핏줄이 서렸다. 성도윤은 숨이 막혀서 곧 죽기 직전이었다.“당, 당신 손에 죽는다면... 여한이 없을 거야. 어서 죽여줘...”성도윤은 고통을 참으면서 겨우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하자 입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목을 조금만 더 꽉 잡는다면 이 세상에 더 이상 성도윤이란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차설아는 성도윤을 차마 죽이지 못했다. 차설아가 손을 놓자 소파에 내팽개쳐진 성도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당신을 죽이면 내 손이 더러워질 테니 오늘은 봐줄게. 당신이 밑바닥까지 떨어지게 해줄 테니 딱 기다려. 난 당신처럼 더러운 수를 쓰는 사람이 아니야.”말을 마친 차설아는 뒤돌아 나갔다.“차...”성도윤은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차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의식을 잃었다.“도윤아, 얼른 일어나봐! 도윤아!”누군가가 성도윤을 다급히 흔들어 깨웠다. 성도윤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다. 목에 붕대를 감고 며칠 동안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었다.“며칠이나 지났지?”성도윤은 입술이 텄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차설아가 힘껏 목 조르는 바람에 성대도 어느 정도 손상을 입었다. 성도윤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두 날째 누워있었어. 아주머니랑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서은아는 성도윤의 손을 꼭 잡고는 눈물을 흘렸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지경이 된 거야!
성도윤의 말을 듣던 서은아는 피식 웃더니 팔짱을 꼈다. 은색 반지를 병실 침대에 두고 온 뒤로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었다.“맞아. 그 반지는 내가 일부러 차성철 침대맡에 두고 온 거야. 너랑 차설아 그년을 갈라놓으려고 그랬어! 날 욕하든 때리든 상관없어. 난 절대 후회하지 않을 테니 네 마음대로 해.”서은아는 두 눈을 감은 채 성도윤이 결정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넌 정말 무서운 여자야. 내가 알던 네가 아닌 것 같아.”성도윤은 서은아가 단번에 인정할 줄 꿈에도 몰랐다. 서은아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이 여자에게 벌을 주어야 하나? 옛 추억을 떠올리면 절대 그럴 수 없어. 은아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하지만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서 괴로워. 은아가 어쩌다가 이런 짓을 벌인 걸까?’“난 그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고 너만 사랑해. 그러니까 네가 한 짓들은 아무 의미도 없어. 네가 그럴수록 난 점점 네가 싫어져.”성도윤은 침을 넘길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허약해진 몸 때문에 제대로 일어날 수도 없어서 가슴 한편이 답답하기만 했다.“뭐? 나만 사랑한다고?”서은아는 깔깔 웃더니 말을 이었다.“도윤아, 내가 그 말에 속을 것 같아? 우리 서로 솔직해지자. 네가 마음에 누구를 담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어. 나도 이러기는 싫었지만 네가 지금껏 나를 봐주지도 않았고 날 안으려고 하지도 않았어. 내가 보고 싶다고 말해도 너는 날 밀어내기만 했잖아. 나를 거절하고 만나러 간 건 그년이었어!”서은아가 손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난 너의 약혼녀고 우리 곧 결혼해. 그런데 그년이랑 빌붙어서 병원에서 밤을 새워? 너답지 않게 한낱 의사랑 바다낚시나 하면서 그년을 도와줬잖아. 그런데도 그년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게 네가 날 사랑하는 방식이야?”서은아는 그동안 꾹 참았던 것들을 전부 쏟아냈다. 갑자기 들이닥친 홍수처럼 성도윤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내가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년이랑
비록 뇌수술로 성도윤이 기억을 잃게 한 건 잔인했지만 차설아의 자리를 꿰찬 덕에 성도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은아는 갑자기 태도가 뒤바뀐 성도윤을 바라보면서 수술 효과가 사라진 게 아닌지 의심했다.“지난 일을 들먹이면서 화제를 돌리지 마. 나는 내가 누구를 신경 쓰고 보고 싶어 하는지 잘 알아. 그리고 그 사람은 네가 아니야.”성도윤은 서은아에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다. 독한 말로 상처받을 수도 있었지만 성도윤은 더 이상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눈앞의 여자는 성도윤의 이상형이 아니었지만 기억나는 순간에 서은아가 함께했다.“내가 아니라면 누군데? 말해! 말해보라고!”서은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울먹이며 말했다.“차설아야? 또 차설아 그년이야? 너는 그년을 본 순간부터 영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굴더니 결국 날 버리기로 한 거구나. 너를 너무 사랑해서 내가 그런 짓까지 벌였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 없어? 나도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저지른 짓이 결국 나 때문이라면 내가 전부 책임져야 해. 차성철을 죽이려고 한 사람은 너지만 내가 모두 짊어지고 갈게. 차설아는 이 상황에서도 날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어.”성도윤이 차설아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서은아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서은아가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져도 약혼자인 성도윤은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손에 죽을 각오까지 했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도 반응하는 몸과는 달리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차설아, 당신은 착해 빠졌어!’“도윤아, 지금 뭐라고 했어? 너를 이렇게 만든 게 차설아라고?”삼계탕을 들고 들어오던 소영금은 마침 성도윤과 서은아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깜짝 놀란 소영금은 그릇을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 서은아는 소영금의 팔을 붙잡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아주머니, 도윤을 제발 말려주세요! 그 여자가 하마터면 도윤을 죽일 뻔했는데 그 여자 때문에 혼약을 파기하겠대요. 도
성도윤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인과응보라는 말 모르세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그런 벌을 받는 거라고요. 차설아가 절 살려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성도윤은 소영금한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모진 말을 내뱉었다.“도윤아, 그년이 무슨 약을 먹였기에 이러는 거야! 넌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소영금은 한숨을 내쉬더니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네가 미치든 말든 상관없어. 너랑 은아는 계획대로 그날에 결혼할 거고 절대 취소할 수 없을 거야. 너희 두 사람 사주가 그렇게 좋대. 너랑 은아가 결혼하면 두 가문이 승승장구할 것이고 나쁜 기운을 막아주어서 잘 될 일만 남았대.”사실 소영금은 성도윤과 서은아의 사주를 본 것이 아니라 성도윤과 차설아의 사주를 보았던 것이다. 소영금은 과감하고 똑똑하고 책임감 있는 차설아를 더 마음에 들어 했지만 차설아와 성도윤이 그동안 많은 일을 겪으면서 서로에게 상처만 주었다.그래서 미신이라고 생각하던 사주를 보러 가게 되었다. 작년 초에 차설아가 해안시를 떠나고 성도윤이 의식을 되찾자 소영금은 구척산에 가서 차설아와 성도윤의 사주를 보게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의 사주는 강한 기운이 서로 부딪히기만 했다.오행의 상생상극을 가리키던 사주는 두 사람이 헤어지면 각자 사업이 잘되고 하는 일이 좋은 결과를 맺지만 서로 사랑하면 파멸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했다.소영금은 성도윤과 차설아가 함께 지냈던 날들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같이 있기만 하면 한쪽이 사고가 나거나 사업에 문제가 생겼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미신에 집착하면 안 되지만 소영금은 큰아들을 잃은 엄마로서 혼자 남은 작은 아들마저 잃기 싫었다. 소영금은 악역을 자처했고 성도윤을 지키려고 했다.“엄마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내가 이러는 건 전부 널 위해서야! 은아랑 너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라서 이성적인 감정이 들지 않을 수는 있지만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은 보낼 수 있단다. 엄마 말대로 하겠다고 어서 약속해. 네 아버지도 연
소영금은 성도윤을 노려보면서 말했다.“감히 혼약을 파기했다가는 내 손으로 직접 죽일 거야!”한편, 다른 병원.차성철은 회복하고 나서 붕대를 푸는 날이 되었다. 차설아는 달이와 원이, 민이 이모를 데리고 병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달이와 원이는 신이 났는지 들뜬 채로 차설아의 팔을 흔들면서 계속 물었다.“삼촌 얼굴에 있는 흉터가 다 지워진 거예요?”“그럼 삼촌은 엄청나게 잘생긴 거잖아요!”“우리 아빠보다 더 잘생겨지는 건 아니겠죠?”“삼촌한테 곧 여자 친구가 생길 수도 있겠네요?”차설아는 지칠 줄 모르고 떠들어대는 아이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면서 말했다.“조용히 해. 삼촌이 회복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쉬어야 하는데 너희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쉬지 못하잖아.”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차성철은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괜찮아. 아이들 목소리라도 들으니까 마음이 편안해. 우리 아이들만 있으면 아픈 게 다 나을 것 같아.”달이가 차성철 곁으로 다가가더니 작은 손으로 차성철의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삼촌, 연애 몇 번이나 해봤어요?”“흠!”차설아는 달이의 질문에 어이가 없어서 뜯어말렸다.“버릇없이 그런 질문하는 거 아니야. 삼촌은 어른인데 예의를 갖춰야지.”차성철 앞에서 연애에 관한 얘기는 금기어나 마찬가지였기에 아이들이 섣불리 질문했다가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었다. 달이는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물었다.“어른이면 연애할 수 없는 거예요? 저는 삼촌처럼 멋진 남자한테 여자 친구가 엄청 많을 줄 알았어요.”“아니거든! 너 아직 잘 모르는구나?”원이가 나서면서 시크하게 말했다.“우리 삼촌은 연애한 적이 한 번도 없을걸! 여자 친구가 한 명도 없었을 거야.”차설아는 한숨을 내쉬었다.‘얘들아, 제발 그만해! 너희 삼촌이 자정 살인마라고! 자정 살인마의 심기를 건드리면서도 좋다고 깔깔 웃는 사람은 너희들밖에 없을 거야.’차설아가 걱정한 것과 달리 연애에 관한 말만 나오면 예민하게 굴던 차성철은 이상할 만큼 덤덤했다. 게다가
차성철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여자 친구는 없지만 잊을 수 없는 여자는 있어.”두 아이는 잊을 수 없는 여자라는 존대가 한 남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로지 차설아만이 차성철이 말하는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기에 잔뜩 긴장한 채 침만 삼키고 있었다.“오빠, 정말...”차설아는 차성철을 바라보면서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이때 민이 이모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환하게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자, 속상했던 일은 다 잊고 좋은 것만 생각해요. 도련님이 큰 시련을 딛고 다시 깨어나셨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만약 잊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해 보세요. 그래도 안 된다면 다른 여자를 만나봐도 되죠. 도련님처럼 멋진 남자한테 반해서 구애하는 여자도 많을 테니깐요.”“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요.”차성철은 덤덤하게 말했다. 붕대를 감은 얼굴에 눈 한쪽만 드러나 있었다. 그 눈은 차설아처럼 눈물과 상처를 머금었지만 강인함이 돋보였다.“이모, 아이들을 데리고 이 앞에 있는 공원에 가보세요. 오빠랑 단둘이 할 얘기가 있어서요.”차설아의 말에 민이 이모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그러고는 차설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더니 조심스럽게 귓속말했다.“아가씨, 도련님이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것 같아요. 아가씨가 도련님을 위로해 줘요.”“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얘기해 볼게요.”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민이 이모와 두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민이 이모뿐만 아니라 차설아도 차성철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었다.차성철은 의식을 되찾은 뒤로 성격이 완전히 변했다. 예전에는 거만하고 안하무인이던 차성철이 이제는 비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비감에 휩싸여있었다.의사한테 물어봤지만 큰 병을 앓고 다시 깨어난 환자들은 호르몬의 변화로 잠시 이상하게 행동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건 푹 쉬고 가족과 함께하면서 하루를 즐겁게
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생각에 잠겼다.“영원히 마주칠 수 없는 사람이라...”그 사람이 송지아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성철이 흥분할 수도 있었기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내 얘기는 이쯤하고 네 말이나 들어볼까?”차성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웃어 보이면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나의 수술을 맡은 신경외과 의사가 박성훈이라면서? 그 의사가 성도윤의 부탁을 받고 왔다던데, 이 은혜는 네가 갚아야 하는 거야? 아니면 내가 갚아야 하는 거야?”사과를 깎던 손이 떨리더니 칼이 손가락에 스쳤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차성철은 깜짝 놀라서 손을 뻗었고 어쩔 줄 몰라 했다.“설아야, 괜찮아? 봐봐!”마음이 급해 난 차성철이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자 차설아는 차성철을 밀치고는 티슈로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살짝 스친 것 갖고 뭘 그렇게 오버해? 오빠 동생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말을 마친 차설아는 사과를 계속 깎았고 작은 조각으로 썰어서 그릇에 담았다. 그러고는 포크로 사과 한 점을 찍어 차성철한테 먹여주었다.“오빠, 얼른 먹어봐. 달고 맛있는 사과야.”차성철은 고분고분 말을 듣더니 사과를 먹으면서 물었다.“화제 돌리지 말고 대답해. 성도윤이 우리를 도와준 건 어떻게 갚아야 할까?”“그럴 필요 없다고!”차설아가 이를 부득부득 갈더니 차갑게 말했다.“그건 성도윤이 응당 해야 할 일이야. 그동안 우리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그놈을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자비를 베푼 거야.”“뭘 또 그렇게 얘기해. 무서우니까 표정 풀어.”차성철은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예전의 일을 떠올리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성도윤과 오랫동안 싸우면서 우리 두 사람은 서로에게 상처만 주었어. 퉁친 셈이긴 하지만 설득하기 어려운 의사에게 부탁해서 나의 수술을 맡겼다는 건 성도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야. 예전의 일에 연연하면서 은혜도 모르는 놈이 되긴 싫어.”“오, 오빠. 왜 그놈 편을 들고 그래?”차설아는 차성철의 뒤바뀐 태도에 당황했다.“수술 전에는 다 나아서
차설아는 그제야 차성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챘다.“오빠, 그게 무슨...”차성철은 차설아와 성도윤이 다시 화해하고 만나보라는 뜻이었다. 예전의 차설아였다면 고민해 보겠지만 많은 일을 겪고 난 지금은 성도윤과 엮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첫 번째 이유는 성도윤이 음모가 많고 교활하고 차성철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성도윤과 성씨 가문 사람들이 성도윤을 여러 번 죽이려고 했던 차설아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차설아는 뉴스를 잘 보지 않는 편이었지만 최근 기사는 온통 성도윤에 관한 것이었다.“성대 그룹 대표 습격 받아 응급실행, 대표의 운명은?”시선을 끄는 기사 제목들은 성도윤이 하마터면 또 차설아의 손에 죽을 뻔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꺼운 벽이 세워져 있어서 옛정으로 그 벽을 부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게다가 성도윤은 차설아를 잊었기에 옛정이라는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설아야, 부담 갖지 말고 사랑한다면 다시 만나봐. 나처럼 체면이 구겨질까 봐 고민하지 말고 일단 얘기해. 난 바보처럼 시작도 못 해봤잖아.”차성철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분위기는 삽시에 가라앉았다.“죽기 전까지도 날 미워한 여자야. 나의 가슴팍에 칼을 꽂으면서 나를 용서했는지도 모른 채 떠나보냈어.”“오빠, 사실 있잖아...”차설아는 마음 아파하는 차성철을 바라보면서 송지아가 살아있다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송지아는 지금 차성철과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하지만 차설아가 입을 떼기도 전에 의료진들이 줄지어 병실로 들어왔다.“자, 환자분의 붕대를 풀겠습니다.”차성철의 주치의가 차설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네, 잘 부탁드릴게요!”차설아는 잔뜩 긴장한 채 뒤로 물러났다. 설레기도 하면서 걱정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배경윤과 바람도 병실로 들어왔고 민이 이모는 달이와 원이를 데리고 들어왔다.큰 병실은 사람으로 가득 찼고 모두 이 기쁜 순간을 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차성철 씨, 수술이 잘 되었고 회복했으니 걱정하지 마
“꼬마야,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부모님은 어디에 계셔? 당장 돌아가.”키가 훤칠한 보디가드는 무기를 들고 인상을 찌푸린 채 원이를 노려보았다. 소영금은 병실과 엘리베이터 앞, 병원 내부 곳곳에 보디가드를 배정해 두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많은 인력을 투입한 것이다. 원이는 순리롭게 병원 내부로 들어갔지만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멈춰 섰다.“성도윤이 저의 보호자예요. 얼른 만나게 해주세요. 믿지 못하겠으면 저를 데리고 가주세요.”원이는 덩치가 몇십 배 더 큰 보디가드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네 장난에 내가 속을 줄 알아? 감히 성대 그룹의 성도윤 대표님을 만나려고 해? 꼬마야, 장난칠 거면 집으로 돌아가.”보디가드는 원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경계하더니 말을 이었다.“이제는 어린아이까지 동원해서 대표님을 해치려고 하는구나.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누구의 지시를 받고 여기까지 온 거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죽여줄게.”보디가드는 어느 가문에서 성씨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고는 원이의 어깨를 꽉 붙잡고 허공에 들어 올렸다.“어떤 무기를 갖고 왔는지 당장 말해! 내놓으란 말이야! 이번에는 독약인가?”“이것 좀 놓으세요. 나를 괴롭힌 걸 엄마가 알게 되면 당신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이 손 놓으라고요.”원이는 허공에서 발버둥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생겨도 늘 침착하던 원이는 일을 크게 벌이기 위해 일부러 소란을 피웠다.성도윤이 원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조용히 하지 못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여줄 수도 있어. 그 입 당장 다물어! 어린놈이 목소리는 왜 이렇게 큰 거야?”보디가드는 다른 환자들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원이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고 심장이 벌렁거렸다.‘보디가드 경력만 10년이 넘는데 꼬맹이 때문에 벌벌 떠는 꼴이라니... 우스운 모습을 보였어.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하지만 이미 늦가을로 접어든 시기라 쌀쌀해진 날씨와 빨리 지는 해 때문에 이 시간에는 산책로에 사람도 거의 없었다.그런 길을 원이를 데리고 걷던 서은아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늦추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꼬맹이, 넌 왜 혼자 온 거야? 엄마는? 너 혼자 나가는 데 걱정도 안 해?”“엄마가 사라져서 엄마 좀 찾아달라고 유전학적 아빠 찾아온 거예요.”성도윤이 병원에 입원해있다는 것도 차설아가 성진의 별장에 있다는 걸 알아낸 원이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그 먼 산까지 가서 엄마를 데려오는 건 비현실적일 것 같아 자신의 지원군을 얻기 위해 성도윤이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온 것이다.“그런데 네 엄마 아빠는 이미 헤어진 사이잖아. 네 아빠가 엄마를 찾아줄 이유는 없는데 자꾸 이런 일로 아빠 귀찮게 하면...”“당신이 뭔데 의무가 있다 없다 에요, 우리 아빠도 아니면서. 그쪽이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내가 네 아빠랑 무슨 사인지 너도 잘 알잖아.”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원이를 내려다보던 서은아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져 갔다.“난 네 아빠랑 곧 결혼할 사람이야. 네 아빠는 네 엄마를 버리고 나랑 결혼하기로 했다고. 그런데도 내가 상관없는 사람이야?”“내연녀라는 말을 뭐 그렇게 거창하게 해요? 아줌마 입으로도 직접 말했잖아요, 곧 결혼할 사이라고. 그럼 아직은 상관없는 사람 맞네요.”어른들보다 더 분명한 사리로 서은아를 상대한 원이는 여전히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물론 원이도 제 엄마를 버린 아빠를 뼛속 깊이 원망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연녀 앞에서만은 밀릴 수가 없었다.아빠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이상, 엄마에 관한 일을 책임질 사람은 여전히 아빠였다.“넌 이렇게 똑똑하고 용감한데... 네 엄마는 너무 바보 같아. 이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지도 모르고 이렇게 널 혼자 내보냈으니 말이야. 가장 복잡한 게 인간의 마음인데, 오늘 날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 내가 친절히 가르쳐줄게.”말을 마친 서은아는 순간 눈을 번뜩이더니 원이의 어깨를 잡고 그를
잘생긴 원이의 얼굴을 한참 뜯어보던 간호사는 성도윤과 묘하게 닮은듯한 이목구비에 가십거리를 알아낸 듯 익살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아, 너 대표님 아들이지?! 엄청 똑같게 생겼다!”성도윤의 아들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던 원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애어른 같은 말투로 말했다.“저는 그분 아들이 아니에요. 그분도 제 아빠가 아니시고요. 그냥 유전자로 엮여있는 것뿐이에요.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 아빠는 세상에 없잖아요?”“어...”원이의 말에 간호사가 어쩔 줄 몰라 할 때 서씨 집안에서 보내온 영양제를 잔뜩 챙겨 들고 성도윤을 보러 온 서은아가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성도윤이 깨어났다는 소식만 들었지 그가 차설아를 기억해냈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게 전혀 없었기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병실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소영금이 앞뒤로 경호원만 열댓 명을 붙여놓은 탓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고 있던 와중에 간호사와 얘기 중이던 원이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그제야 방법이 떠오른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아이에게로 다가가 물었다.“꼬마야, 너 나 알아?”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은아를 힐끗 본 원이는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알죠, 내 유전학적 아빠한테 들러붙는 여우 아줌마잖아요!”그 말에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던 서은아는 주먹만 꼭 쥐며 말했다.“날 안다니 다행이네, 그럼 잘됐다. 너 아빠 보러 가고 싶은 거지? 아줌마랑 같이 가자.”“싫어요.”똑똑한 원이는 서은아가 이상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채고는 단칼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여우 아줌마는 나 갖다 팔 수도 있는 사람이잖아요. 나한테서 떨어져요!”그 말에 서은아는 당장이라도 아이의 뺨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공공장소라 안간힘을 쓰며 참아냈다.“간호사 누나, 나 빨리 유전학적 아빠한테 데려다주세요.”서은아에게 한마디 하고 난 원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고개를 들고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그래, 나 따라와 아가야.”그런데
드디어 한시름 놓은 차설아가 묻자 달이는 천진한 표정으로 답했다.“그야 오빠가 괜히 어른들 걱정시킨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걱정할 걸 알았으면 혼자 나가질 말았어야지.”차설아는 화낼 새도 없이 김정민을 향해 말했다.“이모, 얼른 원이한테 연락해서 어딨는지 물어봐 줘요.”“전화하고 있는데... 안 받아요.”“위치추적은 돼요?”“워치가 꺼져있어서 그것도 안 돼요.”“괜찮아요, 저한테 방법이 있으니까 노트북 좀 줘보세요.”달이랑 원이를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해 차설아는 전에 아이들의 워치에 위치추적 어플을 깔아둔 적이 있었다. 그건 핸드폰이 꺼졌거나 배터리가 없을 때도 위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어플이었기에 차설아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마지막 로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화면에 원이 위치가 뜰 텐데, 보여요?”“내, 보여요!”눈을 감고도 키보드를 치는 차설아에 놀란 것도 잠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그녀에 김정민은 다급히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지금... 재원 병원에 있다고 나오는데요?”“병원이요?”원이의 코딩기술 정도라면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기에 지금쯤 성진의 별장에 있을 거라 예상했던 차설아는 뜬금없는 위치에 미간을 찌푸렸다.어쩌다가... 재원 병원까지 간 거지?---한편 재원 병원 앞에 서서 몇 번이나 병원 이름을 읽어보던 원이는 틀림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작지만 당찬 아이가 씩씩하게 걸어들어오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지나치던 간호사 하나가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말을 걸어왔다.“아가야, 너 혼자 온 거야? 부모님은 어디 계셔?”“사람 좀 찾으러 왔는데요.”원이는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예쁜 누나, 혹시 성도윤이라는 환자분 어느 병실에 입원해있는지 아세요?”“성 대표님 찾아온 거야?”간호사는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웃으며 알려주었다.“그럼 사람 잘 찾았네. 대표님 며칠 전에 뇌수술 마치고 입원해계신 데 내가 담당
“오빠는 볼일 있다고 나갔는데 민이 이모가 오빠 걱정된다고 아까 찾으러 나갔어요.”제 오빠가 집 밖을 나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라 달이는 차분하게 엄마의 질문에 답했다.달이한테 오빠는 자신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천재였기에 그녀는 오빠가 매일 같이 나가도 한 번도 걱정한 적이 없었다.“뭐? 또 어디 간 거야?”하지만 엄마인 차설아는 잠깐이라도 한눈만 팔면 그 틈을 타 밖으로 나가버리는 원이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이 상황에 나가서 아이를 찾을 수도 없었기에 초조해하고 있는데 그때 김정민이 집으로 들어왔다.“아가씨, 오셨어요? 원이 도련님이 또 집을 나가셨어요! 어떡해요? 동네를 한 바퀴 다 돌았는데 어딨는지도 모르겠고...”밥을 하는 사이에 나가버린 원이 때문에 김정민은 아직도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원이가 나가기 전에 무슨 이상한 말을 했다거나 요즘 이상한 행동을 했다거나 한 적은 없었어요?”“별말은 하지 않고 그냥 몰래 나간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아가씨가 영상통화 안 해준다고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난 것 같다면서 구하러 가겠다는 말을 한 적은 있어요. 저는 그냥 애니메이션 보고하는 말인 줄 알고 별로 신경을 안 썼었고요.”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차설아 김정민은 한숨을 앞세우며 답했다.“다 제 불찰이에요. 원이 도련님은 지능이 남달라서 보통 아이처럼 대하면 안 됐던 건데... 구하러 간다는 말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때부터 계획하고 있었을지도 몰라요...”손을 휘적이며 김정민에게로 다가간 차설아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이모 잘못 아니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따지면 제 잘못이죠. 제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모두를 걱정시켰어요.”차설아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과 달라 이상하다고 느낀 김정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자세히 보며 물었다.“아가씨, 이 밤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계세요?”“그냥 산 타다가 눈을 좀 다쳐서 시력이 안 좋아졌어요. 병원 가봤는데
“어릴 때부터 지내던 곳이라 이곳 구조는 이미 몸에 익었어요.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니까 걱정 마요.”자신이 정말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또 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기에 차설아는 웃으며 말했다.“그, 그럼 조심하세요.”“네, 이제 그만 가봐요.”현이를 향해 손을 저어주던 차설아는 그녀가 떠났음을 확인하고서야 난간을 더듬으며 현관문을 찾아 비밀번호를 입력했다.전부터 감지력과 관찰력이 뛰어났던 차설아는 현이에게 한 말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집안으로 정확히 걸어가 문을 열고 오랜만에 익숙한 아이들의 이름을 소리높이 외쳐봤다.“원아, 달아!”“엄마!”차설아의 부름에 2층에 있던 달이는 서둘러 1층으로 뛰어가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엄마! 왜 이제야 왔어요! 너무 보고 싶었다고요.”자신에게 애교를 부려오는 예쁜 딸의 머리를 쓰다듬던 차설아는 웃으며 물었다.“엄마 없을 때 떼 안 쓰고 잘 있었어?”“당연하죠. 나 이제 은하수 어떻게 그리는지도 아는데, 얼른 가요! 내가 보여줄게요!”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인 달이는 엄마의 이상함도 눈치채지 못하고 신나서 방방 뛰며 차설아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차설아는 몇 번이나 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서도 달이를 놀래키지 않으려 힘겹게 아이의 방까지 걸어갔다.발 빠르게 며칠 전에 그렸던 그림들을 꺼내온 달이는 칭찬을 바라는듯한 얼굴로 환히 웃어 보였다.“엄마, 이거 내가 그린 은하수예요. 반고흐 할아버지 거랑 비슷하죠? 오빠는 내가 그린 게 더 예쁘다고도 했어요!”“예쁘지, 너무 예쁘다. 우리 달이는 진짜 그림 천잰가 봐.”아무것도 볼 수 없던 차설아는 선글라스를 낀 채로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도, 아이들이 그린 거, 만든 거 그 어느 것 하나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점차 저릿해졌다.“엄마는 저녁에 왜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요? 내가 여기에 색깔도 여러 개 섞어놨는데, 선글라스 끼고 있으면 잘 안 보이지 않아요?”천진난만
박서영의 말에 별 의심 없이 약을 받아 마신 성진은 눈이 아픔에도 박서영이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그렇게 점차 의식이 흐려져 가던 성진이 쓰러질 때, 박서영은 수화기 너머의 현이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현아, 빨리 차설아 씨 모셔와!”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눈을 푹 쉬게 하라는 의미에서 수면제의 효과도 같이 내는 약이었는데 그래서 잠시 기절한 것뿐이었다.떠나기 전 성진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다던 차설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박서영이 때마침 성진에게 약을 건넨 것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현이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차설아가 박서영을 향해 물었다.“어때요? 시력은 회복한 거예요? 배척반응은 없고요?”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아 선글라스를 낀 탓인지 차설아는 전보다도 더 도도해 보여 전혀 실명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강인해 보이려고 애쓸수록 현이와 박서영은 점점 더 마음이 아팠고 그들의 죄책감도 깊어져 갔다.“회복은 잘 됐는데 오랜만에 눈을 뜨는 거라 눈이 아플 수는 있대요...”침대에 기절한 채 누워있는 성진을 보던 박서영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문제가 하나 생기긴 했는데... 도련님이 워낙 똑똑하셔서 눈만 보고도 차설아 씨 눈이란 걸 알아차리신 것 같아요. 저한테 당장 대학생 찾아오라고 하셔서 급한 대로 일단 약부터 먹인 거예요. 이 약 아니었으면 오늘 진짜 경을 쳤을 거예요.”“그건 내가 미리 대처하라고 했었잖아요. 나랑 눈 비슷한 대학생 찾아두라고. 아직 못 찾은 거예요?”“아니요, 찾긴 찾았는데... 그러면 또 수많은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그럴 거면 아예...”박서영은 자신이 내뱉는 말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도련님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앞으로 도련님더러 차설아 씨를 보살피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절대 안 돼요!”차설아는 역시나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진이 성격은 서영 씨가 나보다도 더 잘 알잖아요. 내가 눈을 준 걸 알게 되
하지만 성진은 차분하고도 사연 있어 보이는 이 두 눈이 자신의 평소 성격과는 너무나도 달라 적응이 되지 않은 건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너 아빠가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하고 뭐 하니? 귀까지 이식해줘야겠어?”“금방 깨어난 애한테 그만 좀 해요. 애가 죽을 때까지 몰아붙이기만 할 거예요?”그때 아들이라면 끔찍이 아끼던 단사란이 성진을 나무라는 성주원을 말리며 아들의 상태를 살폈다.갓 깨어난 아들과 몇 마디 나누던 그녀는 성진이 쉴 수 있게 사람들을 데리고 이내 밖으로 나가 버렸다.마침내 조용해진 주위에 박서영은 조심스레 성진에게로 다가가 말했다.“도련님, 괜찮으세요? 눈은 안 아프세요? 힘드시면 얼른 누워서 쉬세요.”“거울 줘.”“네?”“거울 달라고.”한층 어두워진 표정에 무거운 말투까지 더해지자 박서영은 잔뜩 긴장한 채로 큰 거울 하나를 성진에게 건넸다.거울을 받아든 성진은 빠르게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봤는데 그걸 보자마자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이 눈...”자신이 출구도 찾지 못하고 빠져서 허우적대던 너무나도 익숙한 그녀의 눈이 제 얼굴에 박혀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도련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오랜만에 본인 모습을 보는 거라 익숙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선생님이 그건 다 정상적인 반응이라고...”한숨을 쉬던 성진은 박서영의 말을 자르며 차갑게 물었다.“나한테 눈 기증해줬다던 그 여대생 어딨어, 내가 지금 봐야겠어.”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두 눈이 그녀의 눈과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성진은 제 생각인지 사실인지 아니면 그저 착각일 뿐인지 당장 확인해보고 싶었다.성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서영은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도련님, 그 여대생은 이미 해안시를 떠나서 지금 찾는 건 좀 힘들 것 같아요...”“뭐가 힘든데.”“지금 어딨는지만 알아내. 여기까지 오는 게 힘들다면 내가 가면 되니까. 바로 차 준비하라고 이르고.”“그... 그게...”강압적인 성진의 태도에 박서영은 어찌할 줄 몰라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
이튿날, 성진이 다시 눈을 뜨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그의 부모님과 박서영을 비롯한 성대 그룹의 이사진들이 그의 방안에 빼곡히 둘러서 있었다.“이제 붕대 풀 건데 준비되셨어요?”“네.”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가 진지하게 묻자 침대 끝에 걸터앉은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는 주먹을 말아쥐었다.그에게 있어서 눈을 뜬다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았기에 지금 그는 이 자리에 선 그 누구보다도 더 흥분하고 있었다.성진의 동의를 구하고 붕대를 풀던 의사는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덧붙었다.“오랜만에 빛을 보는 거라 처음에는 눈이 아프고 시야도 모호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다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너무 당황하지는 마세요. 강한 빛은 막아주는 안경을 따로 맞춰뒀으니까 계속 끼고 계시면 도움 될 거에요.”의사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마지막 한 겹 남았던 붕대가 아래로 흘러내렸고 마침내 성진은 제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의 인영을 볼 수 있게 되었다.“진아, 어때? 우리 보여?”“네, 엄마. 엄마가 보여요 이제.”눈물을 흘리는 엄마를 봐서 그런가,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던 성진은 자신이 전보다 더 부드럽고 온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오만방자한 게 디폴트 값이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제 아들의 변화를 눈치챈 성주원은 의사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내 아들이 눈을 뜬 것뿐인데 왜 성격도 바뀐 것 같죠? 다 큰 성인이 엄마를 보고 울리기나 하고, 전혀 남자답지 않잖아요 지금은!”“이것도 정상입니다...”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성주원에 의사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며 공손한 태도로 설명을 해주었다.“도련님이 기증받으신 게 여성분의 눈이라서 여성 특유의 세포나 DNA가 묻어있어요. 그래서 쉽게 공감하시는 걸 겁니다.”“어쩐지 저 눈은 우리 아들 눈빛이 아닌 것 같더라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기증자를 좀 더 골라볼 걸, 성도윤 그 자식이랑 경영권 싸움을 해야 하는 사내자식 눈이 저래서 어떡해. 웃음거리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