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못 할 것 같아? 날 우습게 보지 마.”차설아의 눈빛에 살기가 돌더니 손에 힘을 주어 성도윤의 목을 꽉 잡았다. 몇 년 동안 무술을 익혔던 차설아가 성도윤을 목 졸라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날 죽일 용기도 없는 것 같은데? 당신 겨우 이 정도였어?”성도윤은 일말의 두려움 없이 온몸을 차설아에게 맡겼고 차설아가 죽여주기를 바라는 표정을 지었다.“그래. 당신이 죽고 싶다면 내가 직접 죽여줘야지.”차설아는 이를 꽉 문 채 온 힘을 다해 성도윤의 목을 졸랐다.“윽!”성도윤의 얼굴은 삽시에 빨갛게 달아올랐고 이마와 목에 핏줄이 서렸다. 성도윤은 숨이 막혀서 곧 죽기 직전이었다.“당, 당신 손에 죽는다면... 여한이 없을 거야. 어서 죽여줘...”성도윤은 고통을 참으면서 겨우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하자 입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목을 조금만 더 꽉 잡는다면 이 세상에 더 이상 성도윤이란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차설아는 성도윤을 차마 죽이지 못했다. 차설아가 손을 놓자 소파에 내팽개쳐진 성도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당신을 죽이면 내 손이 더러워질 테니 오늘은 봐줄게. 당신이 밑바닥까지 떨어지게 해줄 테니 딱 기다려. 난 당신처럼 더러운 수를 쓰는 사람이 아니야.”말을 마친 차설아는 뒤돌아 나갔다.“차...”성도윤은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차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의식을 잃었다.“도윤아, 얼른 일어나봐! 도윤아!”누군가가 성도윤을 다급히 흔들어 깨웠다. 성도윤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다. 목에 붕대를 감고 며칠 동안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었다.“며칠이나 지났지?”성도윤은 입술이 텄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차설아가 힘껏 목 조르는 바람에 성대도 어느 정도 손상을 입었다. 성도윤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두 날째 누워있었어. 아주머니랑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서은아는 성도윤의 손을 꼭 잡고는 눈물을 흘렸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지경이 된 거야!
성도윤의 말을 듣던 서은아는 피식 웃더니 팔짱을 꼈다. 은색 반지를 병실 침대에 두고 온 뒤로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었다.“맞아. 그 반지는 내가 일부러 차성철 침대맡에 두고 온 거야. 너랑 차설아 그년을 갈라놓으려고 그랬어! 날 욕하든 때리든 상관없어. 난 절대 후회하지 않을 테니 네 마음대로 해.”서은아는 두 눈을 감은 채 성도윤이 결정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넌 정말 무서운 여자야. 내가 알던 네가 아닌 것 같아.”성도윤은 서은아가 단번에 인정할 줄 꿈에도 몰랐다. 서은아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이 여자에게 벌을 주어야 하나? 옛 추억을 떠올리면 절대 그럴 수 없어. 은아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하지만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서 괴로워. 은아가 어쩌다가 이런 짓을 벌인 걸까?’“난 그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고 너만 사랑해. 그러니까 네가 한 짓들은 아무 의미도 없어. 네가 그럴수록 난 점점 네가 싫어져.”성도윤은 침을 넘길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허약해진 몸 때문에 제대로 일어날 수도 없어서 가슴 한편이 답답하기만 했다.“뭐? 나만 사랑한다고?”서은아는 깔깔 웃더니 말을 이었다.“도윤아, 내가 그 말에 속을 것 같아? 우리 서로 솔직해지자. 네가 마음에 누구를 담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어. 나도 이러기는 싫었지만 네가 지금껏 나를 봐주지도 않았고 날 안으려고 하지도 않았어. 내가 보고 싶다고 말해도 너는 날 밀어내기만 했잖아. 나를 거절하고 만나러 간 건 그년이었어!”서은아가 손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난 너의 약혼녀고 우리 곧 결혼해. 그런데 그년이랑 빌붙어서 병원에서 밤을 새워? 너답지 않게 한낱 의사랑 바다낚시나 하면서 그년을 도와줬잖아. 그런데도 그년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게 네가 날 사랑하는 방식이야?”서은아는 그동안 꾹 참았던 것들을 전부 쏟아냈다. 갑자기 들이닥친 홍수처럼 성도윤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내가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년이랑
비록 뇌수술로 성도윤이 기억을 잃게 한 건 잔인했지만 차설아의 자리를 꿰찬 덕에 성도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은아는 갑자기 태도가 뒤바뀐 성도윤을 바라보면서 수술 효과가 사라진 게 아닌지 의심했다.“지난 일을 들먹이면서 화제를 돌리지 마. 나는 내가 누구를 신경 쓰고 보고 싶어 하는지 잘 알아. 그리고 그 사람은 네가 아니야.”성도윤은 서은아에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다. 독한 말로 상처받을 수도 있었지만 성도윤은 더 이상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눈앞의 여자는 성도윤의 이상형이 아니었지만 기억나는 순간에 서은아가 함께했다.“내가 아니라면 누군데? 말해! 말해보라고!”서은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울먹이며 말했다.“차설아야? 또 차설아 그년이야? 너는 그년을 본 순간부터 영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굴더니 결국 날 버리기로 한 거구나. 너를 너무 사랑해서 내가 그런 짓까지 벌였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 없어? 나도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저지른 짓이 결국 나 때문이라면 내가 전부 책임져야 해. 차성철을 죽이려고 한 사람은 너지만 내가 모두 짊어지고 갈게. 차설아는 이 상황에서도 날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어.”성도윤이 차설아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서은아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서은아가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져도 약혼자인 성도윤은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손에 죽을 각오까지 했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도 반응하는 몸과는 달리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차설아, 당신은 착해 빠졌어!’“도윤아, 지금 뭐라고 했어? 너를 이렇게 만든 게 차설아라고?”삼계탕을 들고 들어오던 소영금은 마침 성도윤과 서은아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깜짝 놀란 소영금은 그릇을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 서은아는 소영금의 팔을 붙잡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아주머니, 도윤을 제발 말려주세요! 그 여자가 하마터면 도윤을 죽일 뻔했는데 그 여자 때문에 혼약을 파기하겠대요. 도
성도윤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인과응보라는 말 모르세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그런 벌을 받는 거라고요. 차설아가 절 살려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성도윤은 소영금한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모진 말을 내뱉었다.“도윤아, 그년이 무슨 약을 먹였기에 이러는 거야! 넌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소영금은 한숨을 내쉬더니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네가 미치든 말든 상관없어. 너랑 은아는 계획대로 그날에 결혼할 거고 절대 취소할 수 없을 거야. 너희 두 사람 사주가 그렇게 좋대. 너랑 은아가 결혼하면 두 가문이 승승장구할 것이고 나쁜 기운을 막아주어서 잘 될 일만 남았대.”사실 소영금은 성도윤과 서은아의 사주를 본 것이 아니라 성도윤과 차설아의 사주를 보았던 것이다. 소영금은 과감하고 똑똑하고 책임감 있는 차설아를 더 마음에 들어 했지만 차설아와 성도윤이 그동안 많은 일을 겪으면서 서로에게 상처만 주었다.그래서 미신이라고 생각하던 사주를 보러 가게 되었다. 작년 초에 차설아가 해안시를 떠나고 성도윤이 의식을 되찾자 소영금은 구척산에 가서 차설아와 성도윤의 사주를 보게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의 사주는 강한 기운이 서로 부딪히기만 했다.오행의 상생상극을 가리키던 사주는 두 사람이 헤어지면 각자 사업이 잘되고 하는 일이 좋은 결과를 맺지만 서로 사랑하면 파멸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했다.소영금은 성도윤과 차설아가 함께 지냈던 날들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같이 있기만 하면 한쪽이 사고가 나거나 사업에 문제가 생겼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미신에 집착하면 안 되지만 소영금은 큰아들을 잃은 엄마로서 혼자 남은 작은 아들마저 잃기 싫었다. 소영금은 악역을 자처했고 성도윤을 지키려고 했다.“엄마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내가 이러는 건 전부 널 위해서야! 은아랑 너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라서 이성적인 감정이 들지 않을 수는 있지만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은 보낼 수 있단다. 엄마 말대로 하겠다고 어서 약속해. 네 아버지도 연
“차설아, 우리 이혼해.”등 뒤에서 성도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 차설아는 스테이크를 굽고 있었다.지글거리는 뜨거운 기름이 얼굴에 튀었지만,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우리는 명의상 부부일 뿐 정은 없잖아. 이제 4년이란 시간도 채웠으니, 이쯤에서 끝내자.”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소외감이 느껴졌다.차설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드디어 이날이 왔군.’4년 전 차씨 집안이 파산당하면서 그녀의 부모님은 부담감에 못 이겨 아파트에서 뛰어내렸고, 결국 차설아는 홀로 모든 뒤처리를 감당하게 되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와 성도윤의 할아버지는 함께 전쟁을 치른 전우였고, 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성도윤의 할아버지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차설아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 눈에 밟히던 사람이 바로 어린 손녀딸이기에 성도윤의 할아버지한테 잘 좀 챙겨달라고 신신당부했다.그래서 이런 유명무실한 혼인을 치르게 된 것이다.다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고, 성도윤한테 푹 빠졌다.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라는 역할만 충실히 이행한다면 언젠간 그의 마음을 얻을 거로 믿었다.하지만 이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너한테 보상으로 800억이랑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를 줄게. 이건 이혼 신고서야. 별다른 문제 없다면 사인해.”성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설아에게 서류 더미를 건넸다. 대수롭지 않은 그의 태도는 마치 이혼마저 하나의 사업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차설아는 서류를 건네받아 일련의 숫자를 내려다보았다.4년에 800억이라...성씨 집안은 역시나 씀씀이가 달랐다.“꼭 해야겠어?”차설아는 서류를 내려놓고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그녀가 4년 동안 사랑한 남자는 조각 같은 외모에 훤칠한 몸매를 가졌는데, 매사에 진지하고 끊고 맺음이 분명했다. 그는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닿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응.”성도윤의 싸늘한 음성에는 일말의 망
어쩐지 성도윤이 오늘 밤에 나가라고 하더니, 새로운 애인을 집에 빨리 들이기 위해서일 줄이야!아까 고작 이런 남자 때문에 가슴 아파한 자신을 떠올리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임채원은 도도하게 차설아 앞으로 걸어가 거만한 말투로 쌀쌀맞게 말했다.“당신이 차설아야? 아직도 안 갔어? 도윤이가 가라고 하지 않았나? 여태껏 미적거리며 버티고 있었던 거야? 뻔뻔스럽기도 하네.”차설아는 그녀의 도발 따위 가뿐히 무시하고 계속해서 땅바닥에 널브러진 짐을 챙겼다.“이봐, 당신 귀먹었어? 내 말 안 들려?”“미안, 못 들었어.”차설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개가 멍멍 짖는 소리만 들렸거든.”“감히 나한테 욕한 거야?!”“내가 언제 욕했어? 본인이 직접 인정하는데 나라고 별수 있나?”말을 마친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길을 막는 임채원을 향해 고개를 까닥했다.“비켜줄래? 사람이 지나가면 개도 눈치껏 피해준다고.”“이...!”임채원은 화가 나서 발발 동동 굴렀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전설 속 성씨 집안 둘째 며느리는 동네북으로 소문났을 텐데, 입이 이토록 거침없을 줄이야!이를 본 도우미가 쪼르르 달려가 아첨하기 급급했다.“채원 양, 화 푸세요. 집에서 쫓겨난 여자 때문에 몸이라도 상하면 본인만 손해잖아요. 앞으로 이 별장의 안주인은 채원 양이라고요, 저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죠. 둘째 도련님의 부탁대로 채원 양이 지낼 방을 마련했으니 지금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도우미의 말이 기분이 풀어진 임채원은 차설아를 공기 취급한 채 도우미를 따라 별장으로 들어갔다.매서운 찬바람이 불어닥치는 밖에 또다시 차설아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눈앞의 웅장한 저택을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이곳에서 4년이란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엔 이처럼 초라한 결말을 마주하니, 정말 아이러니했다!“안녕!”차설아는 심호흡을 크게 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그날 밤 도심으로 올라온 그녀는 원룸을 계약했다.비록 방이 크지는
다음날.9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차설아는 8시 30분부터 구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녀는 일찍 도착한 건 물론 화장까지 정성껏 했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빨간색 롱드레스를 입고 그동안 풀어헤쳤던 머리카락마저 높게 묶어 백조처럼 길고 하얀 목덜미를 훤히 드러냈다.멀리서 보면 여신이 따로 없었고, 우아하면서도 시크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하지만 그날 밤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열이 살짝 난 탓에 컨디션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9시 정각이 되자, 은색 부가티 베이런이 지상 주차장으로 천천히 들어섰다.성도윤은 싸늘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설아를 발견하자 그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내 알 수 없는 불쾌감이 몰려왔다.“꽤 적극적이네?”성도윤은 무심한 표정으로 차설아를 스쳐 지나가 기다란 다리로 접수창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별난 놈이야.’차설아는 듬직하면서도 어딘가 쌀쌀맞아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몰래 생각했다.‘뒤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줄 알았네! 자기도 급하게 가면서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이혼 신고는 생각보다 빨리 처리되었다. 사인하고 날인하는 데 10분도 안 걸렸다.“새로 도입된 법에 따르면 이혼하고 나서 한 달 동안 숙려기간이 있는데, 등록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이혼을 원치 않은 사람이 있다면 둘 중에서 아무나 접수증을 들고 와서 취소해도 돼요.”구청 직원은 말을 마치고 이혼 접수증 2부를 각각 나눠줬다.매일 매일 이혼을 접수하면서 울고불고 심지어 현장에서 싸우기는 별의별 상황을 다 접했지만, 이렇게 무덤덤하게 처리하는 부부는 처음 본다.게다가 남자는 키도 크고 잘생기고, 여자는 날씬하고 예쁘기만 한데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어쩌다 이혼까지 하게 되었단 말인가?차설아는 접수증을 건네받아 빼곡히 적힌 내용을 들여다보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이혼할 때 숙려기간이 있으면서 결혼하기 전에는 왜 없대? 만약 혼인 신고할 때 숙려기간이 있다면...”성도윤의 얼굴이 어두워지더
대체 무슨 낯짝으로 이리 당당하단 말이지?차설아는 모든 게 어이가 없었다.그동안 성도윤은 속세를 벗어난 선비처럼 남녀관계에 관심이 없고, 여자를 돌같이 볼 줄 알았는데 결국 소리소문없이 시한폭탄을 터뜨렸다.애인을 집에 들이는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가지다니?순간 정신이 번쩍 든 차설아는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슬픔마저 말끔히 사라졌다.“그러니까 지금 불륜이란 말이지?”성도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임채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차설아 씨, 이게 다 제 탓이에요. 화풀이하고 싶으면 저한테 해요!”이 여자가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피해자 코스프레를 제대로 보여주네?“그래?”차설아는 당장이라도 뺨을 때릴 기세로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임채원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깜짝 놀라 성도윤의 등 뒤로 쏙 숨었다.“자기한테 화풀이하라더니 왜 숨는데?”차설아는 그대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작작 좀 해, 난 나름 소양 있는 사람이라 내연녀와 개싸움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둘이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데 방해하기는커녕 그 소원을 이뤄줘야 하지 않겠어?”“뭐... 뭐라고?”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임채원은 어리둥절했다. 몰래 준비한 ‘감성팔이’ 작전도 무용지물이 된 듯싶었다.보아하니 성도윤과 차설아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계약 부부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아니면 내연녀를 마주친 상황에서 대체 어떤 와이프가 이처럼 무심하고 관대할 수 있겠는가?이내 차설아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다만 불륜인 만큼 이혼 합의서에 적힌 재산분할에 관한 내용을 다시 협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임채원은 차설아가 재산을 언급하자 조급한 나머지 가식을 떨기는커녕 한층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도윤이가 당신한테 800억에 동탄구 아파트 펜트하우스까지 넘겨주지 않았어?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해줬다고 보는데? 게다가 그동안 도윤네 집에서 그쪽 집안 뒤처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다고! 사람이 너무 욕심을 부리면 못 써.”차설아
성도윤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인과응보라는 말 모르세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그런 벌을 받는 거라고요. 차설아가 절 살려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성도윤은 소영금한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모진 말을 내뱉었다.“도윤아, 그년이 무슨 약을 먹였기에 이러는 거야! 넌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소영금은 한숨을 내쉬더니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네가 미치든 말든 상관없어. 너랑 은아는 계획대로 그날에 결혼할 거고 절대 취소할 수 없을 거야. 너희 두 사람 사주가 그렇게 좋대. 너랑 은아가 결혼하면 두 가문이 승승장구할 것이고 나쁜 기운을 막아주어서 잘 될 일만 남았대.”사실 소영금은 성도윤과 서은아의 사주를 본 것이 아니라 성도윤과 차설아의 사주를 보았던 것이다. 소영금은 과감하고 똑똑하고 책임감 있는 차설아를 더 마음에 들어 했지만 차설아와 성도윤이 그동안 많은 일을 겪으면서 서로에게 상처만 주었다.그래서 미신이라고 생각하던 사주를 보러 가게 되었다. 작년 초에 차설아가 해안시를 떠나고 성도윤이 의식을 되찾자 소영금은 구척산에 가서 차설아와 성도윤의 사주를 보게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의 사주는 강한 기운이 서로 부딪히기만 했다.오행의 상생상극을 가리키던 사주는 두 사람이 헤어지면 각자 사업이 잘되고 하는 일이 좋은 결과를 맺지만 서로 사랑하면 파멸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했다.소영금은 성도윤과 차설아가 함께 지냈던 날들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같이 있기만 하면 한쪽이 사고가 나거나 사업에 문제가 생겼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미신에 집착하면 안 되지만 소영금은 큰아들을 잃은 엄마로서 혼자 남은 작은 아들마저 잃기 싫었다. 소영금은 악역을 자처했고 성도윤을 지키려고 했다.“엄마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내가 이러는 건 전부 널 위해서야! 은아랑 너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라서 이성적인 감정이 들지 않을 수는 있지만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은 보낼 수 있단다. 엄마 말대로 하겠다고 어서 약속해. 네 아버지도 연
비록 뇌수술로 성도윤이 기억을 잃게 한 건 잔인했지만 차설아의 자리를 꿰찬 덕에 성도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은아는 갑자기 태도가 뒤바뀐 성도윤을 바라보면서 수술 효과가 사라진 게 아닌지 의심했다.“지난 일을 들먹이면서 화제를 돌리지 마. 나는 내가 누구를 신경 쓰고 보고 싶어 하는지 잘 알아. 그리고 그 사람은 네가 아니야.”성도윤은 서은아에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다. 독한 말로 상처받을 수도 있었지만 성도윤은 더 이상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눈앞의 여자는 성도윤의 이상형이 아니었지만 기억나는 순간에 서은아가 함께했다.“내가 아니라면 누군데? 말해! 말해보라고!”서은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울먹이며 말했다.“차설아야? 또 차설아 그년이야? 너는 그년을 본 순간부터 영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굴더니 결국 날 버리기로 한 거구나. 너를 너무 사랑해서 내가 그런 짓까지 벌였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 없어? 나도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저지른 짓이 결국 나 때문이라면 내가 전부 책임져야 해. 차성철을 죽이려고 한 사람은 너지만 내가 모두 짊어지고 갈게. 차설아는 이 상황에서도 날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어.”성도윤이 차설아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서은아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서은아가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져도 약혼자인 성도윤은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손에 죽을 각오까지 했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도 반응하는 몸과는 달리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차설아, 당신은 착해 빠졌어!’“도윤아, 지금 뭐라고 했어? 너를 이렇게 만든 게 차설아라고?”삼계탕을 들고 들어오던 소영금은 마침 성도윤과 서은아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깜짝 놀란 소영금은 그릇을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 서은아는 소영금의 팔을 붙잡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아주머니, 도윤을 제발 말려주세요! 그 여자가 하마터면 도윤을 죽일 뻔했는데 그 여자 때문에 혼약을 파기하겠대요. 도
성도윤의 말을 듣던 서은아는 피식 웃더니 팔짱을 꼈다. 은색 반지를 병실 침대에 두고 온 뒤로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었다.“맞아. 그 반지는 내가 일부러 차성철 침대맡에 두고 온 거야. 너랑 차설아 그년을 갈라놓으려고 그랬어! 날 욕하든 때리든 상관없어. 난 절대 후회하지 않을 테니 네 마음대로 해.”서은아는 두 눈을 감은 채 성도윤이 결정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넌 정말 무서운 여자야. 내가 알던 네가 아닌 것 같아.”성도윤은 서은아가 단번에 인정할 줄 꿈에도 몰랐다. 서은아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이 여자에게 벌을 주어야 하나? 옛 추억을 떠올리면 절대 그럴 수 없어. 은아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하지만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서 괴로워. 은아가 어쩌다가 이런 짓을 벌인 걸까?’“난 그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고 너만 사랑해. 그러니까 네가 한 짓들은 아무 의미도 없어. 네가 그럴수록 난 점점 네가 싫어져.”성도윤은 침을 넘길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허약해진 몸 때문에 제대로 일어날 수도 없어서 가슴 한편이 답답하기만 했다.“뭐? 나만 사랑한다고?”서은아는 깔깔 웃더니 말을 이었다.“도윤아, 내가 그 말에 속을 것 같아? 우리 서로 솔직해지자. 네가 마음에 누구를 담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어. 나도 이러기는 싫었지만 네가 지금껏 나를 봐주지도 않았고 날 안으려고 하지도 않았어. 내가 보고 싶다고 말해도 너는 날 밀어내기만 했잖아. 나를 거절하고 만나러 간 건 그년이었어!”서은아가 손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난 너의 약혼녀고 우리 곧 결혼해. 그런데 그년이랑 빌붙어서 병원에서 밤을 새워? 너답지 않게 한낱 의사랑 바다낚시나 하면서 그년을 도와줬잖아. 그런데도 그년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게 네가 날 사랑하는 방식이야?”서은아는 그동안 꾹 참았던 것들을 전부 쏟아냈다. 갑자기 들이닥친 홍수처럼 성도윤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내가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년이랑
“내가 못 할 것 같아? 날 우습게 보지 마.”차설아의 눈빛에 살기가 돌더니 손에 힘을 주어 성도윤의 목을 꽉 잡았다. 몇 년 동안 무술을 익혔던 차설아가 성도윤을 목 졸라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날 죽일 용기도 없는 것 같은데? 당신 겨우 이 정도였어?”성도윤은 일말의 두려움 없이 온몸을 차설아에게 맡겼고 차설아가 죽여주기를 바라는 표정을 지었다.“그래. 당신이 죽고 싶다면 내가 직접 죽여줘야지.”차설아는 이를 꽉 문 채 온 힘을 다해 성도윤의 목을 졸랐다.“윽!”성도윤의 얼굴은 삽시에 빨갛게 달아올랐고 이마와 목에 핏줄이 서렸다. 성도윤은 숨이 막혀서 곧 죽기 직전이었다.“당, 당신 손에 죽는다면... 여한이 없을 거야. 어서 죽여줘...”성도윤은 고통을 참으면서 겨우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하자 입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목을 조금만 더 꽉 잡는다면 이 세상에 더 이상 성도윤이란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차설아는 성도윤을 차마 죽이지 못했다. 차설아가 손을 놓자 소파에 내팽개쳐진 성도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당신을 죽이면 내 손이 더러워질 테니 오늘은 봐줄게. 당신이 밑바닥까지 떨어지게 해줄 테니 딱 기다려. 난 당신처럼 더러운 수를 쓰는 사람이 아니야.”말을 마친 차설아는 뒤돌아 나갔다.“차...”성도윤은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차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의식을 잃었다.“도윤아, 얼른 일어나봐! 도윤아!”누군가가 성도윤을 다급히 흔들어 깨웠다. 성도윤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다. 목에 붕대를 감고 며칠 동안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었다.“며칠이나 지났지?”성도윤은 입술이 텄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차설아가 힘껏 목 조르는 바람에 성대도 어느 정도 손상을 입었다. 성도윤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두 날째 누워있었어. 아주머니랑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서은아는 성도윤의 손을 꼭 잡고는 눈물을 흘렸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지경이 된 거야!
“그래요. 내가 묻는 말에 전부 솔직하게 대답해 줘요.”차설아는 곧바로 가방에서 은색 반지를 꺼내고는 물었다.“이 반지가 누구 것인지 알아보겠어요?”성도윤은 눈을 살짝 뜬 채 반지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계속 끼고 있는 반지야.”“계속 끼고 있는 반지라고요...”차설아의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미 누가 저지른 짓인지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미련 가득한 차설아는 계속 물었다.“당신이 계속 끼고 있는 반지가 왜 우리 오빠의 병실 침대에 놓여있었던 거죠?”“당신 오빠 병실 침대에 있었다고?”성도윤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차설아의 질문에 정신이 든 성도윤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설아는 깜짝 놀란 성도윤을 바라보면서 사그라들었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 같았다.“이 반지가 왜 우리 오빠가 누워있던 침대에 나타났는지 모르는 거죠? 도윤 씨, 반지를 잃어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맡긴 적이 있어요?”차설아는 성도윤이 이러한 이유로 반지를 빼버렸다고 하면 차설아는 성도윤이 이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굳게 믿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성도윤의 대답은 전혀 달랐다.“누구한테 준 적도 잃어버린 적도 없어. 이 반지는 내가 차성철의 침대맡에 두고 온 거야.”“뭐, 뭐라고요?”차설아는 성도윤을 노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바람 말대로 성도윤은 자신이 저지른 짓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남자였다. 성도윤은 차설아를 속일 생각조차 없었다.“나 같은 나쁜 놈에게 무슨 기대를 한 거야? 차라리 미워해.”성도윤은 반지를 꽉 쥐고는 눈을 감은 채 소파에 누웠다. 차설아는 성도윤의 건방진 모습에 화가 났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왜 그랬는지 알려줘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박성훈을 찾아가지 않아도 되었잖아요. 나의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지금 막말하는 거죠? 무슨 사연이 있으니까 당신도 이러는 거라고 말해요!”차설아는 여전히 성도윤이 극악무도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
전화 한 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지금 만날 수 있어요? 묻고 싶은 것도 있고 해서 전화했어요.”“홍안루에 있어. 이쪽으로 와.”성도윤은 기사한테 차를 홍안루 문 앞에 세워두라고 지시했다. 얼마 후, 차설아는 홍안루 문 앞에 도착했고 차창을 두드렸다. 기사 장이섭이 차 문을 열고는 차설아한테 인사했다.“차설아 씨, 오셨어요. 성 대표님께서 오늘 술을 많이 마셨어요. 취한 것 같은데 두 분을 호텔로 모실까요? 아니면...”장이섭은 성도윤과 차설아가 늦은 시각에 만나기 적합한 장소가 호텔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차설아는 뒷좌석에 기대 자고 있는 성도윤을 힐끗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큰집으로 데려다주세요.”“알겠어요. 차에 오르시죠.”장이섭은 충신처럼 주인의 사생활에 대해 더 묻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 차설아는 조수석에 앉았고 큰집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은 적막이 흘렀다.성도윤은 두 눈을 감은 채 뒷좌석에 기대있었지만 자고 있는지 자는 척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차설아는 불안한 마음에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한참 후, 차는 익숙한 별장 앞에서 천천히 멈춰 섰다. 이곳은 차설아와 성도윤이 함께 지냈던 집이었지만 임채원이 별장을 차지했었다. 임채원한테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뒤, 아무도 살지 않는 별장에 가끔 도우미 아줌마가 와서 청소했고 그 덕분에 별장은 여전히 원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집에 왔으니 얼른 내려요!”차설아는 고개를 돌려 성도윤을 불렀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성도윤은 여전히 뒷좌석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아니, 얼마나 마셨길래 이러는 거야! 술도 못 마시는 사람이 술을 왜 마셔!”차설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날을 잘못 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차설아는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고 성도윤을 부축해서 별장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왜 이렇게 무거워...”차설아는 별장 안으로 들어가는 길 내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투덜거렸다.“이 나쁜
예상치 못한 성도윤의 반응에 박성훈은 진지하게 물었다.“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성도윤은 입을 꾹 다문 채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다른 술잔을 가지고 달려오더니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정말 모르고 있었던 거야?”박성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그럴 리 없었을 텐데... 너랑 차설아 씨는 특별한 사이잖아. 차설아 씨의 오빠한테 그런 일이 생겼으면 제일 먼저 너한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야?”“특별한 사이 아닌데요.”성도윤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뭘 또 부정하고 그래! 누가 봐도 두 사람은 서로 미칠 듯이 사랑하는데 티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어.”박성훈은 한 도시에 정착하지 않고 여행 다녀서 해안시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성도윤과 차설아가 원래 부부였다는 것을 모른 채 지켜보아도 성도윤과 차설아 사이의 기류가 미묘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예전에 머리를 다치는 바람에 차설아와 어떤 사이였고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주변 사람들은 차설아가 나를 해치려고 했다고 말했고 차설아도 인정하는 눈치였어요. 차설아는 내가 하마터면 차설아의 손에 죽을 뻔했고 그 일로 인해 머리를 다쳤다고 했지만 나는...”성도윤은 격동된 어조로 말하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술만 들이켰다. 박성훈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성도윤을 지그시 바라보았고 계속해서 물었다.“다쳤다고 했지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것도 아니에요.”성도윤은 술을 연거푸 마시면서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다.“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해 봐.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아? 나 이래봬도 신경외과 의사야. 네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줄 수도 있어.”“정말이에요?”성도윤은 고개를 쳐들고는 활짝 웃었다. 여태껏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성도윤이 처음으로 마음을 연 순간이었다.“기억을 되찾게 해줄 수 있다고요?”사실 성도윤은 지난번 수술 뒤로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 다시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차설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도윤이 맞나보네. 스파크, 내 말이 맞지?”바람은 지난 일을 떠올리더니 차설아가 걱정하는 것이 무언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유독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만약 성도윤이 성철 형을 죽이려고 했다면 박성훈을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되잖아. 성도윤이 벌인 짓이라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글쎄, 박성훈을 데려오면 내가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그리고 더 잔인한 방법으로 오빠를 죽이려고 했을 거야. 오빠만 죽인다면 차씨 가문과 영흥 부둣가에 배치한 세력은 성도윤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차설아는 사람을 쉽게 믿었었지만 극악무도한 사람한테 여러 번 배신당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성도윤이 나쁜 사람처럼 느껴진 것이다.“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물어보지 않고 섣불리 판단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성도윤은 솔직한 사람이라 거짓말하지는 않을 거야. 직접 만나서 물어봐.”차설아는 바람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너 오늘 좀 이상한 거 알아?”“진심으로 한 말인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이상하다는 거지.”차설아는 날이 갈수록 바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계산적인 사람인 것 같았지만 바람은 의외로 단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선우 가문과 성씨 가문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어. 이 기회에 나랑 성도윤을 완전히 갈라놓을 수도 있었는데 오해일 수도 있다면서 직접 물어보라고 부추겼잖아. 오해라는 것이 밝혀지면 더더욱 갈라놓을 수 없을 거야.”“난 이간질하는 사람이 아니야. 비열한 수법으로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고 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거라고...”바람은 반짝이는 두 눈을 하고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난 네가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복수할 용기도 없고 이번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서 매일 마음 아파하고 있었잖아. 공원에서 6시간 동안 앉아 있을 바에는 직접 찾아가서 물
바람은 얇은 셔츠를 입고 서 있었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네가 여기에 앉았을 때부터 뒤에 숨어있었어.”“너 바보야?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차설아는 투덜거리면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은 차설아의 곁에 앉으면서 미소를 지었다.“힘든 줄 모르니까 이 시간까지 앉아 있었던 거겠지.”“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나도 똑같아. 네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재밌어서 계속 쳐다보고 싶었어. 6시간이나 지난 줄 몰랐거든.”“그런 장난도 지긋지긋하다.”차설아는 바람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오후에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오빠 생각에 미쳐서 주변 사람들을 전부 의심했던 것 같아.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에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차설아의 말에 바람이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사과하지 않아도 돼. 난 신비한 컨셉이라 의심받은 적이 셀 수 없을 만큼 많거든.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네가 속상해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거든...”바람은 차설아가 죄책감 때문에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바람은 누구한테 의심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람의 유일한 목표는 차설아와 결혼해서 선우 가문을 빛내려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쁜 짓을 하든 암암리에 손을 쓰든 중요하지 않았다. 차설아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바람은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누가 자책했다고 그래. 넌 여우처럼 교활하니까 당연히 의심받지. 아무도 너의 속내를 꿰뚫어 보지 못하잖아.”차설아는 바람의 이마를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우리 둘이 그저 해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합에 참가해서 상금을 타고 돈이나 벌었으면 복잡한 가문의 일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잖아. 복수할 것도 없으니 해커 활동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지냈으면 되었을 텐데 말이야.”“생각해 보면 너랑 같이 시합에 참가해서 겨루던 날들이 제일 재밌었어.”바람은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