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못 할 것 같아? 날 우습게 보지 마.”차설아의 눈빛에 살기가 돌더니 손에 힘을 주어 성도윤의 목을 꽉 잡았다. 몇 년 동안 무술을 익혔던 차설아가 성도윤을 목 졸라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날 죽일 용기도 없는 것 같은데? 당신 겨우 이 정도였어?”성도윤은 일말의 두려움 없이 온몸을 차설아에게 맡겼고 차설아가 죽여주기를 바라는 표정을 지었다.“그래. 당신이 죽고 싶다면 내가 직접 죽여줘야지.”차설아는 이를 꽉 문 채 온 힘을 다해 성도윤의 목을 졸랐다.“윽!”성도윤의 얼굴은 삽시에 빨갛게 달아올랐고 이마와 목에 핏줄이 서렸다. 성도윤은 숨이 막혀서 곧 죽기 직전이었다.“당, 당신 손에 죽는다면... 여한이 없을 거야. 어서 죽여줘...”성도윤은 고통을 참으면서 겨우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하자 입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목을 조금만 더 꽉 잡는다면 이 세상에 더 이상 성도윤이란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차설아는 성도윤을 차마 죽이지 못했다. 차설아가 손을 놓자 소파에 내팽개쳐진 성도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당신을 죽이면 내 손이 더러워질 테니 오늘은 봐줄게. 당신이 밑바닥까지 떨어지게 해줄 테니 딱 기다려. 난 당신처럼 더러운 수를 쓰는 사람이 아니야.”말을 마친 차설아는 뒤돌아 나갔다.“차...”성도윤은 시야가 흐릿해지더니 차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의식을 잃었다.“도윤아, 얼른 일어나봐! 도윤아!”누군가가 성도윤을 다급히 흔들어 깨웠다. 성도윤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원이었다. 목에 붕대를 감고 며칠 동안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었다.“며칠이나 지났지?”성도윤은 입술이 텄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차설아가 힘껏 목 조르는 바람에 성대도 어느 정도 손상을 입었다. 성도윤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두 날째 누워있었어. 아주머니랑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서은아는 성도윤의 손을 꼭 잡고는 눈물을 흘렸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 지경이 된 거야!
성도윤의 말을 듣던 서은아는 피식 웃더니 팔짱을 꼈다. 은색 반지를 병실 침대에 두고 온 뒤로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었다.“맞아. 그 반지는 내가 일부러 차성철 침대맡에 두고 온 거야. 너랑 차설아 그년을 갈라놓으려고 그랬어! 날 욕하든 때리든 상관없어. 난 절대 후회하지 않을 테니 네 마음대로 해.”서은아는 두 눈을 감은 채 성도윤이 결정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넌 정말 무서운 여자야. 내가 알던 네가 아닌 것 같아.”성도윤은 서은아가 단번에 인정할 줄 꿈에도 몰랐다. 서은아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이 여자에게 벌을 주어야 하나? 옛 추억을 떠올리면 절대 그럴 수 없어. 은아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었는데... 하지만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어서 괴로워. 은아가 어쩌다가 이런 짓을 벌인 걸까?’“난 그 여자랑 아무 사이도 아니고 너만 사랑해. 그러니까 네가 한 짓들은 아무 의미도 없어. 네가 그럴수록 난 점점 네가 싫어져.”성도윤은 침을 넘길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허약해진 몸 때문에 제대로 일어날 수도 없어서 가슴 한편이 답답하기만 했다.“뭐? 나만 사랑한다고?”서은아는 깔깔 웃더니 말을 이었다.“도윤아, 내가 그 말에 속을 것 같아? 우리 서로 솔직해지자. 네가 마음에 누구를 담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어. 나도 이러기는 싫었지만 네가 지금껏 나를 봐주지도 않았고 날 안으려고 하지도 않았어. 내가 보고 싶다고 말해도 너는 날 밀어내기만 했잖아. 나를 거절하고 만나러 간 건 그년이었어!”서은아가 손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난 너의 약혼녀고 우리 곧 결혼해. 그런데 그년이랑 빌붙어서 병원에서 밤을 새워? 너답지 않게 한낱 의사랑 바다낚시나 하면서 그년을 도와줬잖아. 그런데도 그년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게 네가 날 사랑하는 방식이야?”서은아는 그동안 꾹 참았던 것들을 전부 쏟아냈다. 갑자기 들이닥친 홍수처럼 성도윤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내가 무슨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년이랑
비록 뇌수술로 성도윤이 기억을 잃게 한 건 잔인했지만 차설아의 자리를 꿰찬 덕에 성도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은아는 갑자기 태도가 뒤바뀐 성도윤을 바라보면서 수술 효과가 사라진 게 아닌지 의심했다.“지난 일을 들먹이면서 화제를 돌리지 마. 나는 내가 누구를 신경 쓰고 보고 싶어 하는지 잘 알아. 그리고 그 사람은 네가 아니야.”성도윤은 서은아에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다. 독한 말로 상처받을 수도 있었지만 성도윤은 더 이상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눈앞의 여자는 성도윤의 이상형이 아니었지만 기억나는 순간에 서은아가 함께했다.“내가 아니라면 누군데? 말해! 말해보라고!”서은아는 붉어진 두 눈을 하고서 울먹이며 말했다.“차설아야? 또 차설아 그년이야? 너는 그년을 본 순간부터 영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굴더니 결국 날 버리기로 한 거구나. 너를 너무 사랑해서 내가 그런 짓까지 벌였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 없어? 나도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성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저지른 짓이 결국 나 때문이라면 내가 전부 책임져야 해. 차성철을 죽이려고 한 사람은 너지만 내가 모두 짊어지고 갈게. 차설아는 이 상황에서도 날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어.”성도윤이 차설아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서은아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서은아가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져도 약혼자인 성도윤은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성도윤은 차설아의 손에 죽을 각오까지 했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도 반응하는 몸과는 달리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차설아, 당신은 착해 빠졌어!’“도윤아, 지금 뭐라고 했어? 너를 이렇게 만든 게 차설아라고?”삼계탕을 들고 들어오던 소영금은 마침 성도윤과 서은아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깜짝 놀란 소영금은 그릇을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 서은아는 소영금의 팔을 붙잡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아주머니, 도윤을 제발 말려주세요! 그 여자가 하마터면 도윤을 죽일 뻔했는데 그 여자 때문에 혼약을 파기하겠대요. 도
성도윤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인과응보라는 말 모르세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그런 벌을 받는 거라고요. 차설아가 절 살려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성도윤은 소영금한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모진 말을 내뱉었다.“도윤아, 그년이 무슨 약을 먹였기에 이러는 거야! 넌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소영금은 한숨을 내쉬더니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네가 미치든 말든 상관없어. 너랑 은아는 계획대로 그날에 결혼할 거고 절대 취소할 수 없을 거야. 너희 두 사람 사주가 그렇게 좋대. 너랑 은아가 결혼하면 두 가문이 승승장구할 것이고 나쁜 기운을 막아주어서 잘 될 일만 남았대.”사실 소영금은 성도윤과 서은아의 사주를 본 것이 아니라 성도윤과 차설아의 사주를 보았던 것이다. 소영금은 과감하고 똑똑하고 책임감 있는 차설아를 더 마음에 들어 했지만 차설아와 성도윤이 그동안 많은 일을 겪으면서 서로에게 상처만 주었다.그래서 미신이라고 생각하던 사주를 보러 가게 되었다. 작년 초에 차설아가 해안시를 떠나고 성도윤이 의식을 되찾자 소영금은 구척산에 가서 차설아와 성도윤의 사주를 보게 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의 사주는 강한 기운이 서로 부딪히기만 했다.오행의 상생상극을 가리키던 사주는 두 사람이 헤어지면 각자 사업이 잘되고 하는 일이 좋은 결과를 맺지만 서로 사랑하면 파멸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했다.소영금은 성도윤과 차설아가 함께 지냈던 날들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같이 있기만 하면 한쪽이 사고가 나거나 사업에 문제가 생겼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미신에 집착하면 안 되지만 소영금은 큰아들을 잃은 엄마로서 혼자 남은 작은 아들마저 잃기 싫었다. 소영금은 악역을 자처했고 성도윤을 지키려고 했다.“엄마를 너무 미워하지 말거라. 내가 이러는 건 전부 널 위해서야! 은아랑 너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라서 이성적인 감정이 들지 않을 수는 있지만 평화롭고 안정적인 삶은 보낼 수 있단다. 엄마 말대로 하겠다고 어서 약속해. 네 아버지도 연
소영금은 성도윤을 노려보면서 말했다.“감히 혼약을 파기했다가는 내 손으로 직접 죽일 거야!”한편, 다른 병원.차성철은 회복하고 나서 붕대를 푸는 날이 되었다. 차설아는 달이와 원이, 민이 이모를 데리고 병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달이와 원이는 신이 났는지 들뜬 채로 차설아의 팔을 흔들면서 계속 물었다.“삼촌 얼굴에 있는 흉터가 다 지워진 거예요?”“그럼 삼촌은 엄청나게 잘생긴 거잖아요!”“우리 아빠보다 더 잘생겨지는 건 아니겠죠?”“삼촌한테 곧 여자 친구가 생길 수도 있겠네요?”차설아는 지칠 줄 모르고 떠들어대는 아이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고 손짓하면서 말했다.“조용히 해. 삼촌이 회복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쉬어야 하는데 너희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쉬지 못하잖아.”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차성철은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괜찮아. 아이들 목소리라도 들으니까 마음이 편안해. 우리 아이들만 있으면 아픈 게 다 나을 것 같아.”달이가 차성철 곁으로 다가가더니 작은 손으로 차성철의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삼촌, 연애 몇 번이나 해봤어요?”“흠!”차설아는 달이의 질문에 어이가 없어서 뜯어말렸다.“버릇없이 그런 질문하는 거 아니야. 삼촌은 어른인데 예의를 갖춰야지.”차성철 앞에서 연애에 관한 얘기는 금기어나 마찬가지였기에 아이들이 섣불리 질문했다가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었다. 달이는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물었다.“어른이면 연애할 수 없는 거예요? 저는 삼촌처럼 멋진 남자한테 여자 친구가 엄청 많을 줄 알았어요.”“아니거든! 너 아직 잘 모르는구나?”원이가 나서면서 시크하게 말했다.“우리 삼촌은 연애한 적이 한 번도 없을걸! 여자 친구가 한 명도 없었을 거야.”차설아는 한숨을 내쉬었다.‘얘들아, 제발 그만해! 너희 삼촌이 자정 살인마라고! 자정 살인마의 심기를 건드리면서도 좋다고 깔깔 웃는 사람은 너희들밖에 없을 거야.’차설아가 걱정한 것과 달리 연애에 관한 말만 나오면 예민하게 굴던 차성철은 이상할 만큼 덤덤했다. 게다가
차성철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솔직하게 대답했다.“여자 친구는 없지만 잊을 수 없는 여자는 있어.”두 아이는 잊을 수 없는 여자라는 존대가 한 남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로지 차설아만이 차성철이 말하는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기에 잔뜩 긴장한 채 침만 삼키고 있었다.“오빠, 정말...”차설아는 차성철을 바라보면서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이때 민이 이모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환하게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자, 속상했던 일은 다 잊고 좋은 것만 생각해요. 도련님이 큰 시련을 딛고 다시 깨어나셨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만약 잊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분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해 보세요. 그래도 안 된다면 다른 여자를 만나봐도 되죠. 도련님처럼 멋진 남자한테 반해서 구애하는 여자도 많을 테니깐요.”“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요.”차성철은 덤덤하게 말했다. 붕대를 감은 얼굴에 눈 한쪽만 드러나 있었다. 그 눈은 차설아처럼 눈물과 상처를 머금었지만 강인함이 돋보였다.“이모, 아이들을 데리고 이 앞에 있는 공원에 가보세요. 오빠랑 단둘이 할 얘기가 있어서요.”차설아의 말에 민이 이모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그러고는 차설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더니 조심스럽게 귓속말했다.“아가씨, 도련님이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것 같아요. 아가씨가 도련님을 위로해 줘요.”“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얘기해 볼게요.”차설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민이 이모와 두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민이 이모뿐만 아니라 차설아도 차성철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었다.차성철은 의식을 되찾은 뒤로 성격이 완전히 변했다. 예전에는 거만하고 안하무인이던 차성철이 이제는 비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비감에 휩싸여있었다.의사한테 물어봤지만 큰 병을 앓고 다시 깨어난 환자들은 호르몬의 변화로 잠시 이상하게 행동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건 푹 쉬고 가족과 함께하면서 하루를 즐겁게
차설아는 주먹을 꽉 쥔 채 생각에 잠겼다.“영원히 마주칠 수 없는 사람이라...”그 사람이 송지아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성철이 흥분할 수도 있었기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내 얘기는 이쯤하고 네 말이나 들어볼까?”차성철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웃어 보이면서 차설아를 바라보았다.“나의 수술을 맡은 신경외과 의사가 박성훈이라면서? 그 의사가 성도윤의 부탁을 받고 왔다던데, 이 은혜는 네가 갚아야 하는 거야? 아니면 내가 갚아야 하는 거야?”사과를 깎던 손이 떨리더니 칼이 손가락에 스쳤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차성철은 깜짝 놀라서 손을 뻗었고 어쩔 줄 몰라 했다.“설아야, 괜찮아? 봐봐!”마음이 급해 난 차성철이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자 차설아는 차성철을 밀치고는 티슈로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살짝 스친 것 갖고 뭘 그렇게 오버해? 오빠 동생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말을 마친 차설아는 사과를 계속 깎았고 작은 조각으로 썰어서 그릇에 담았다. 그러고는 포크로 사과 한 점을 찍어 차성철한테 먹여주었다.“오빠, 얼른 먹어봐. 달고 맛있는 사과야.”차성철은 고분고분 말을 듣더니 사과를 먹으면서 물었다.“화제 돌리지 말고 대답해. 성도윤이 우리를 도와준 건 어떻게 갚아야 할까?”“그럴 필요 없다고!”차설아가 이를 부득부득 갈더니 차갑게 말했다.“그건 성도윤이 응당 해야 할 일이야. 그동안 우리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그놈을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자비를 베푼 거야.”“뭘 또 그렇게 얘기해. 무서우니까 표정 풀어.”차성철은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예전의 일을 떠올리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성도윤과 오랫동안 싸우면서 우리 두 사람은 서로에게 상처만 주었어. 퉁친 셈이긴 하지만 설득하기 어려운 의사에게 부탁해서 나의 수술을 맡겼다는 건 성도윤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야. 예전의 일에 연연하면서 은혜도 모르는 놈이 되긴 싫어.”“오, 오빠. 왜 그놈 편을 들고 그래?”차설아는 차성철의 뒤바뀐 태도에 당황했다.“수술 전에는 다 나아서
차설아는 그제야 차성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챘다.“오빠, 그게 무슨...”차성철은 차설아와 성도윤이 다시 화해하고 만나보라는 뜻이었다. 예전의 차설아였다면 고민해 보겠지만 많은 일을 겪고 난 지금은 성도윤과 엮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첫 번째 이유는 성도윤이 음모가 많고 교활하고 차성철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성도윤과 성씨 가문 사람들이 성도윤을 여러 번 죽이려고 했던 차설아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차설아는 뉴스를 잘 보지 않는 편이었지만 최근 기사는 온통 성도윤에 관한 것이었다.“성대 그룹 대표 습격 받아 응급실행, 대표의 운명은?”시선을 끄는 기사 제목들은 성도윤이 하마터면 또 차설아의 손에 죽을 뻔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꺼운 벽이 세워져 있어서 옛정으로 그 벽을 부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게다가 성도윤은 차설아를 잊었기에 옛정이라는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설아야, 부담 갖지 말고 사랑한다면 다시 만나봐. 나처럼 체면이 구겨질까 봐 고민하지 말고 일단 얘기해. 난 바보처럼 시작도 못 해봤잖아.”차성철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분위기는 삽시에 가라앉았다.“죽기 전까지도 날 미워한 여자야. 나의 가슴팍에 칼을 꽂으면서 나를 용서했는지도 모른 채 떠나보냈어.”“오빠, 사실 있잖아...”차설아는 마음 아파하는 차성철을 바라보면서 송지아가 살아있다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송지아는 지금 차성철과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하지만 차설아가 입을 떼기도 전에 의료진들이 줄지어 병실로 들어왔다.“자, 환자분의 붕대를 풀겠습니다.”차성철의 주치의가 차설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네, 잘 부탁드릴게요!”차설아는 잔뜩 긴장한 채 뒤로 물러났다. 설레기도 하면서 걱정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배경윤과 바람도 병실로 들어왔고 민이 이모는 달이와 원이를 데리고 들어왔다.큰 병실은 사람으로 가득 찼고 모두 이 기쁜 순간을 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차성철 씨, 수술이 잘 되었고 회복했으니 걱정하지 마
“위치 추적 장치?”성도윤은 깜짝 놀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한데? 내 몸에 추적 장치를 달아놓고도 내가 전혀 몰랐다니. 영화 속 첩보 요원도 너만큼은 못 하겠다.”차설아는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하죠! 난 영화 속 첩보 요원보다 훨씬 대단하거든요. 그러니까 나 잘 모셔야 해요. 괜히 나한테 못되게 굴었다간 아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걸요?”그녀는 자신만만하면서도 살짝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어찌 감히 여왕님께 잘못하겠습니까? 남은 생애,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흠, 그거면 됐어요. 아주 착하네!”차설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성도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졸리고 추워 죽겠어요! 빨리 이불 속으로 안내해요.”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녀는 어느새 그와 함께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오늘 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마도 그가 곁에 없어서일 것이다.그래서 결국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어서 와. 이불 속은 이미 따뜻하게 데워놨지.”성도윤은 능청스럽게 ‘충실한 침대 보좌관’처럼 행동하며 그녀를 이불 속으로 이끌었다.차가운 밤, 따뜻한 이불 속에서 서로를 감싸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차설아는 옆으로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린 채 마치 엄마 뱃속에 있는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성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그 온기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 같았고 덕분에 차설아는 금세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성도윤은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여보, 우리 오늘 밤에 그 두 유치한 녀석들 갈라놓은 거... 혹시 너무한 거 아닐까?”그가 말한 ‘두 유치한 녀석’이란 당연히 사도현과 배경윤을 뜻했다.솔직히, 그 둘은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였고 아마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오늘 밤 자신들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 이러다가 정말 절교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성도윤의 머리가 아파졌다.“혹시 사도현이 끝
“그게 뭔데?”“두 사람 서로의 감정을 확실히 깨닫고 흔들림 없이 서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줄 그 한 가지.”차설아는 이번만큼은 저 두 사람이 깨닫기를 바랐다.그녀와 성도윤도 그 기나긴 길을 돌아왔기 때문에 그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은 함께 많은 일들을 겪어야만 ‘이 사람을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차설아와 배경윤의 긴 대화가 이어질수록, 밤은 더욱 깊어졌다.배경윤은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다 지쳐 잠들었고 그녀의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하지만 차설아는 도무지 잠이 들지 않았다.지금의 이 고요함이 너무 불안했다. 이렇게 평온할 때일수록 더 큰 위기가 다가오는 법이었다.같은 시각, 성진의 차가 그녀의 집 아래에 멈춰 서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차 위로 희미하게 드리웠고 차 안의 남자는 어둠과 빛 속에서 조각 같은 얼굴을 드러냈다.그 역시 때로는 빛 속에 머물고 때로는 어둠 속에 숨어 지내면서 가끔은 스스로조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사실, 그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저택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화 소리도 들었고 차설아가 실명한 게 사실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그렇다면 그녀의 눈을 누구에게 줬을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성진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머릿속에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싶었다.“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왜 네 소중한 눈을 나 같은 인간한테 줬냐고!”하지만 정작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그렇게 따져 묻고 눈을 돌려주려 했던 순간, 그는 망설였다.그는 한때 지옥을 경험한 사람이었다.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얼마나 처참한지 아직도 잊지 않았다.그리고 한 남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속옷 하나조차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챙길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층에서도 차설아와 배경윤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숨죽여 통곡하던 배경윤이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쳤다.“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말할 수 있다고! 드디어 목소리가 돌아왔어!”배경윤이 눈물을 닦고 기쁨에 겨워 차설아를 와락 끌어안으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설아야, 나도 목소리 되찾았으니까, 너도 분명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꼭 방법을 찾아볼게!”“잘 됐어! 네 목소리가 돌아온 건 정말 다행이야. 아니면 우리 전투력이 너무 약해질 뻔했잖아. 팬들 상대로 밀려서 너무 힘들었어.”차설아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오늘 오전, 그녀와 배경윤이 무기력하게 몰려다니며 반격조차 못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경윤이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대학교 시절, 차설아, 배경수, 그리고 배경윤은 유명한 삼총사였다.셋이 무적이었던 이유는 각자의 역할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차설아는 ‘물리적 공격’을 담당했고, 배경수는 ‘두뇌 플레이’를 맡았다. 그리고 배경윤은 ‘언어 공격’을 담당했다.하지만 지금 차설아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물리적 공격’ 능력이 반감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배경윤마저 목소리를 잃었으니, ‘언어 공격'도 무용지물이 된 셈이었다.그렇다 보니 팬들이 둘을 조롱하며 몰아붙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맞아! 만약 내가 오늘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저 미친 팬들 제대로 박살 냈을 거야! 아까,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 내가 제대로 반격도 못 했잖아! 안 되겠어, 사도현 찾아가서 다시 따질 거야!”배경윤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당장이라도 사도현과 한바탕 말싸움을 벌일 기세였다.차설아는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이기고 싶다면 지금은 절대 그를 찾아가면 안 돼. 그리고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마. 만약 그가 진짜 너에게 마음이 있다면 반드시 너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줄 거야.”“그 답을 내가 받을 수나 있을까? 그냥 당장 그랑 싸우는 게 속이 더 후련할 것 같은데.”“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왜 네
성도윤이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사도현은 남자의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 이게 정말 형 입에서 나온 말이야?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그럼 그게 완전 ‘호구’랑 뭐가 달라? 그렇게 냉정하고 도도하던 형이 어쩌다... 이제는 아내가 하라는 대로 한다고? 이건 형답지 않아...”사도현은 여자를 쫓아다니긴 하지만 성도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여자에게 돈을 쓰고 달콤한 말을 하긴 해도 어떤 여자도 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의 사고를 지배할 수 없었다.어떤 여자가 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순간, 그는 단호하게 다른 여자를 찾았다.배경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원칙이 걸린 문제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기에 오늘도 이렇게 끝없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나도 오랜 시간 고민해서 얻은 결론이야.”성도윤이 드물게 인내심을 가지고 사도현에게 연애 철학을 설파했다.“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과 일들을 만나게 되지. 그 중요도를 정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없어. 중요한 건, 네 마음속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아는 거야.”“네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는 것이 그 여자와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 여자를 포기하면 되는 거고.”그는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네가 여자를 유혹하는 데 능숙한 건 알지만 결국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야. 나는 아내의 말을 듣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혹시 네가 그렇게 못하는 건, 단순히 네가 상대방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성도윤은 날카롭게 바라보며 정확한 지적을 했다.“나는...”사도현은 그런 게 아니라고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 하자 말문이 막혔다.그는 다른 사람을 속일 수도 있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도 있었다.하지만 성도윤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성도윤은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자신의 마음속 가장 솔직한 감정을 그가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형은 내가 좀
“내가 왜 경윤이한테 뭐라고 해야 하죠?”차설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사도현에게 물었다.“만약 내가 도현 씨라면 이 일이 윤설과 관련이 있든 없든, 나는 단번에 배경윤을 위해 나섰을 거예요. 좋아하는 여자가 이렇게 큰 모욕을 당했는데 괴롭힌 사람을 찾아서 따지기는커녕 내 여자에게 참으라고 한다면, 그건 도현 씨가 그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겠죠.”“지금 이간질하려는 건 아니지? 사람마다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무턱대고 화를 내고 일이 커지면 더 큰 소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데,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까?”사도현은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떠받들던 차설아가 자기편을 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경윤과의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직도 이해를 못 하시네요.”차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 일에서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도현 씨의 태도예요. 그런 태도라면 어떤 여자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어요.”“그게 아니라...”사도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좋아하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는 게 정말 힘들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설아야, 역시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너뿐이구나!]배경윤은 타자한 후, 서러운 마음에 바로 차설아를 껴안았다.[이런 마음은 여자만이 이해할 수 있어! 도현 씨는 그저 내가 징징거린다고만 생각하겠지!]“도현 씨, 3일 안에 경윤이한테 사과할 기회를 줄게요. 하지만 어떻게 사과할지는 도현 씨가 알아서 해야 해요. 경윤아, 우리 오늘 같이 자자. 할 얘기가 정말 많을 것 같아!”차설아의 말에 배경윤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팔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아래층에서는 두 남자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며 어리둥절해 있었다.성도윤은 왜 남의 커플 문제에 자신이 이렇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반대로 사도현은 왜 이해심 많던 차설아가 갑자기 이렇게 고집불통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형, 우리 커플 일에 형수가 너무 과하게 간섭하는 거 아니야? 원래 하루이틀이면 해
“그때는 그때고, 사람은 성장하는 법이잖아.”샤워를 마친 차설아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2층에서 사도현과 배경윤이 성도윤을 둘러싸고 다투는 소리를 듣고 성도윤 대신에 반박하며 나선 것이다.세 사람은 고개를 들어 목욕 가운을 입고 나온 차설아를 보고 급하게 다가갔다.“설아야, 너 혼자 내려왔어? 움직이지 마, 잠깐만.”성도윤이 제일 먼저 달려가 아기를 돌보듯 세심하게 챙기며 말했다.배경윤과 사도현도 마치 공주를 대하듯 신중하게 행동했다.[괜찮아? 기분 나쁘거나 불편한 거 없어?]성도윤이 차설아를 거실 소파에 앉히자 배경윤이 그녀의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난 괜찮아. 기분도 나쁘지 않고 아픈 곳도 없어. 내가 전에 겪은 일에 비하면 몇 명 애들이 장난친 정도인데 뭐가 대수겠어.”차설아가 배경윤의 손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안심시키려 했다.“경윤아, 네가 더 걱정이야. 기분 잡치게 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마. 그러면 오히려 너 자신이 힘들어져. 그냥 흘려보내. 신경 쓸 필요 없어.”그 말을 들은 배경윤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했다.[맞아, 맞아. 어떤 사람은 정말 마음에 두지 않더라고. 그 사람 때문에 화내는 내가 진짜 등신이지.]그녀는 당연히 차설아가 말한 ‘기분을 잡치는 사람’이 사도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도현은 오히려 차설아가 배경윤에게 작은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더 관대해지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들었어? 역시 형수가 마음이 넓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너도 같이 물려고?”사도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사도현은 배경윤이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고집 센 여자인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차설아의 말만큼은 예외라는 걸 알고 있었다.차설아는 배경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인간적 우상이었기 그녀의 말이면 배경윤은 무엇이든 믿었다.[도현 씨가 그 미친개라는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배경윤이 분노를 담아 타자기를 두드리며, 마치 사도현을 죽일 듯 차가운 눈빛
사도현은 배경윤이 적은 글을 보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윤설 씨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더 큰 사이버 폭력이 일어날 수도 있어. 난 그냥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어.”[흠, 당연히 연예인 본인까지 끌어들이지 않길 바랄 거야. 그 사람들 도현 씨 팬들이잖아. 게다가 윤설 씨까지 얽혀서 그 여자가 곤란해질까 봐 그런 거지?]배경윤은 그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신경을 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윤설이 첫 번째이자 아마 유일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눈앞의 이 남자를 더 용서할 수 없었다.‘이런 바람둥이!’“조금만 머리 쓰면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알 텐데.”사도현은 배경윤의 ‘모함’을 듣고 이 오명을 씻을 수 없다는 생각에 더 이상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차갑게 말했다.“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는 이 사건에 연예인 본인을 끌어들이는 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아.”그도 어쨌든 윈스 엔터테인먼트의 CEO였고 연예계의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때로는 하나의 루머가 칼날처럼 되어 사람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다.연예계에서 온라인 폭력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진 스타들이 많았고 배경윤과 차설아 같은 일반인은 그 악플의 고통을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헐, 이제 나를 협박하겠다는 거야? 도현 씨가 그렇게 말할수록 난 더 윤설을 찾아갈 거야. 날 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은 분노를 담아 빠르게 타자를 했다. 소리 없이 치는 타자 소리만으로도 그녀의 분노가 느껴졌다.성도윤은 그들 옆에서 분위기를 살피며 처음으로 연애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고 피곤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이 두 사람은 분명 서로에게 감정이 있었지만 계속해서 상처가 되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망쳐가고 있었다.‘내가 보기엔 차설아와 내 관계가 훨씬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 같아. 내가 정말 운이 좋아.’차설아를 떠올리며 성도윤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2층으로
“오늘 소란을 일으킨 사람 중에 내 팬도 있었던 거 확실해?”사도현은 사실 명성과 노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배경윤 때문이 아니라면 절대 미디어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어색한 연애 프로그램 같은 것도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그가 이렇게 많은 팬을 얻게 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라 팬들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팬들이... 오물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았다.“믿을 수 없지?”배경윤이 오늘 자신과 차설아가 괴롭힘을 당한 영상 파일을 사도현에게 보여주었다.“봐봐, 그 팬이라는 여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도현 씨가 잘생기고, 부유하고, 성격도 좋고, 완벽한 남자라며 윤설과 천생연분이라고 하더라. 도현 씨가 윤설의 왕자인데 내가 그 악녀가 되어 두 사람의 관계를 망쳤다고 하면서, 심지어 설아까지 모욕했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뭐, 우리 설아까지 욕했다고?”옆에서 무표정하게 싸움을 구경하던 성도윤은 배경윤의 말을 듣고 나서 차설아에게 더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는 사도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빼앗 분노에 차서 영상을 확인한 뒤 싸늘하게 말했다.“이 사람들, 이런 짓을 할 용기가 있다면 그 자만과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어떻게 할 건데?”배경윤이 성도윤에게 물었다. 이전과 달리 이제는 거부하는 태도가 없었다.“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이 사람들 다 찾아낸 뒤, 두 사람 앞에서 머리 조아려 사과하게 해야지.”성도윤이 이를 갈며 한 글자씩 뱉어냈다.이 말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끝까지 추궁할 수 있는 말이었다.“그나마 다행이네...”배경윤이 사도현을 보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저것 봐,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했으면 정상적인 반응은 저런 건데, 도현 씨는... 아니지. 도현 씨한테는 사랑하는 여자가 괴롭힘을 당한 게 아니라 사랑하는 여자의 팬이 그냥 길 가던 사람을 괴롭힌 정도잖아. 이제야 왜 이렇게 무관심한지 알
[무슨 소리야, 그건 옛날얘기지. 지금은 완전히 아니라고! 나도 한때 도현 씨를 내 ‘남신’이라고 했었잖아? 그런데 그 결과가 어땠어?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형편없더라!]배경윤이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두 사람, 완전 끼리끼리야. 나랑 설아는 이제 두 사람이랑 거리를 둬야 해. 안 그러면 우리도 불행해질 거야. 봐, 오늘 내가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을 겪은 것도 다 네 탓이야.]“아니, 이게 왜 또 내 탓이야?”사도현은 어이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죄인처럼 배경윤의 분노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당연히 도현 씨 탓이지! 오늘 나랑 설아에게 똥물을 뿌린 사람들이 누구인 줄 알아?]배경윤이 팔짱을 끼고 사도현을 노려봤다.“누군데?”사도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아무리 세상이 험악해졌다고 해도 앞을 못 보는 여자랑 말을 못 하는 여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정도면 정말 제정신 아닌 인간들 아니야?’[한쪽은 도현 씨 팬들이고, 다른 한쪽은 윤설의 광적인 팬들이야.]“뭐?”사도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내가 도현 씨를 알지 않았으면 윤설이랑 엮일 일도 없었을 거고, 그 여자의 팬들에게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당신 팬들도 마찬가지야. 윤설 팬들이랑 다를 게 뭐야? 둘 다 극성맞고 정신 나간 사람들뿐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도현 씨 탓이라고!]배경윤은 흥분해서 글을 계속해서 쳐냈다. 사도현은 그녀가 쓴 긴 글을 읽고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다. 글에는 온통 그에 대한 비난이 가득했다.사도현은 억울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근데 말이야, 팬들이 한 행동을 내가 어떻게 책임져? 사람마다 다 성격이 다르고 수천, 수만 명의 팬을 내가 어떻게 다 통제해?”[핑계 대지 마!]배경윤은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다.[팬들의 행동은 결국 본인이 책임지는 거야. 팬덤 문화 몰라? ‘팬들의 행동은 본인이 책임진다.’ 이게 기본 원칙이야! 팬들이 왜 그렇게 극성인지 알아? 그건 본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