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더는 말이 없었다. 그는 서해금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서해금은 야망이 크고 승부욕도 강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면 절대 쉽게 도망가지 않을 것이었다.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오늘은 날 왜 부른 거야.”상대방에게 의도를 들킨 서해금 역시 불쌍한 연기는 넣어두고 옆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 박안수에게 건넸다. “이 사람 국내에서의 행적을 좀 알아봐 줘. 누굴 만나는지도 전부. 최대한 자세하게.”박안수가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도일준이라는 남자의 신상 자료였다. 자료를 넘기던 박안수는 사진 속 남자의 눈매가 어쩐지 눈에 익은 것 같았지만 좀처럼 어디서 본 얼굴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가 서해금에게 물었다. “누구야?”“회사와 새로 계약한 클라이언트야. M 국의 교포래. M 국에서의 신분도 확인할 거야. 하지만 국내에서 누구와 연락을 주고받는지도 알아야겠어. 만약 신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날 도와 깔린느가 해외로 진출할 수 있도록 M 국과 연결해 줄 다리가 될 거야.”M 국은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 그들의 의료 체계는 국내와 달라 실력이 뛰어난 의사일수록 상류층의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것이 바로 서해금이 직접 도일준을 에스코트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가 노린 것인 의사라는 신분 뒤에 따라올 수많은 도일준의 자원이었다. 택시에 앉아 시트에 기댄 도일준이 장갑을 벗었다. 온전하지 않은 손가락이 공기 중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손을 뻗어 무명지를 슬며시 어루만졌다. 그 행동은 마치 반지를 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무명지는 텅 비어 있었고 남은 것이라곤 끊어진 손가락이 남긴 공허한 공기뿐이었다. 차가 병원을 지나치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고층 건물이 산을 이루고 인파가 물밀듯 몰리며 차가 물살처럼 쌩쌩 지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이미 기억 속의 모습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비슷한 것이라곤 병원 맞은편 건물엔 여전히 깔린느의 광고가 걸려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와 똑같은 모습 그대
택시 기사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 아는 사이예요?”민경하는 말없이 웃는 얼굴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도일준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가시죠.”그런 도일준의 태도에 민경하는 화조차 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희 대표님께서 26년 전 한주 병원에서 근무하시던 조예단이라는 분에 관해 여쭤볼 게 있다고 하셨어요. 조예단이라는 분을 아세요?”주먹을 꽉 움켜쥔 도일준이 홱 고개를 돌려 민경하를 바라보았다. 민경하는 여전히 단정하고 격식 있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어떤 공격성도 보이지 않았다. 이를 악물던 도일준이 몇 초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쪽 대표님이 누군데요.”민경하가 대답했다. “만나면 아실 겁니다.”도일준은 허락도, 거절도 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가만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 함께 멈춰 선 차들이 하나둘 클랙슨을 울리는 탓에 도일준의 마음도 따라 복잡해졌다. 교대 시간이 가까워지자 택시 기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갈 거예요, 말 거예요. 이거 지금 업무 방해예요.”숨을 깊게 들이쉰 도일준이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풀었다. 민경하는 택시 기사에게 사과를 건네며 재킷 안쪽에서 현금 몇 장을 꺼내 택시 기사에게 건넸다. 택시 기사는 그중 한 장을 뽑으며 말했다. “이건 그쪽이 내 담뱃값 대준 거로 해요. 앞으로 운전 조심해요. 초보 운전자가 겁도 없이 험하게 운전을 해. 오늘 날 만나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크게 한 방 털렸을 거예요. 이건 인생 수업 들은 수강료라고 생각해요. 조심 좀 하고.”민경하가 웃으며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택시 번호를 한 번 확인한 민경하는 반대편으로 돌아가 도일준의 차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오른 도일준이 다시 한번 민경하에게 물었다. “그쪽 대표님이 누구예요.”민경하의 대답은 여전히 똑같았다. “도착하면 알게 되실 거예요.”그러자 도일준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30분 후, 민경하가 운전한 차가 구시가 근처에
“그러는 강 대표님은 제가 탄 차를 멈춰 세워서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뭐죠?”도일준을 힐끔 쳐다본 강한서가 대답했다. “제가 도일준 씨를 여기에 모신 건 도일준 씨께 어떤 분에 관해 여쭤볼게 있어서예요.”도일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한주 사람도 아닌데요. 저를 통해 누군가를 뒷조사할 생각이라면 사람을 잘못 찾은 것 같네요.”강한서가 반문했다. “제가 여쭤보려는 사람이 누구라고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도일준 씨는 어떻게 본인이 모르실 거라고 확신하시는 거예요? 정말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강한서에게 낚였다는 것을 눈치 채고 울컥 화가 치민 도일준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굴 알아볼 생각이든 전 몰라요.”“모르시면 어쩔 수 없죠.”강한서는 도일준의 건강 상태가 그리 좋지 않으니 최대한 자극하지 말라던 한현진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오늘 도일준 씨를 모신 건 제 아내를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예요.”미간을 찌푸린 도일준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장모님이 살아계실 때 후원하시던 고아원이 있었어요. 작년부터 지금까지 도일준 씨도 여러 차례 그 고아원에 후원하셨더라고요. 절대 적은 금액도 아니었고요.”“그래서 제 아내가 직접 만나 뵙고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줄곧 얘기했었어요.”도일준은 고아원에 후원한 것을 조금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당시의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그 아이와 마주치고 꼬리가 밟히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굳은 얼굴의 도일준이 대답했다. “그 돈은 제가 친구 대신 후원한 거예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말하며 도일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일 없으면 전 이만 가볼게요.”도일준이 민경하를 따라나선 건 그가 서해금의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한현진 쪽 사람이었다니, 도일준의 예상 밖이었다. 그는 송씨 가문 사람 앞에서 태연하게만 행동할 수는 없었다.
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예준이 룸을 나서며 문을 꼭 닫았다. 조예준을 향한 도일준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조 셰프님은 진미가에서 마지막으로 모신 셰프님이세요. 다른 셰프님들과는 달리 다른 일을 하시다가 셰프로 전향하신 케이스예요. 아마 이쪽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던 것 같아요.”“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말처럼 지금은 진미가에서 제일 예약하기 어려운 셰프님이세요.”강한서는 말하며 계란술국 한 그릇을 떠 천천히 도일준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계란술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일준 씨, 드셔보세요.”계란술국을 바라보는 도일준의 눈앞에 과거의 장면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너져가는 집, 돈 새는 구멍이라며 학교도 못 가게 하더니 고기 한 점 더 먹었다는 이유로 잔소리를 늘어놓던 부모.그리고 계란술국을 들고 몰래 방으로 들어와 앞으로 술국은 전부 누나에게 줄 테니 울지 말라며 달래던 어린 남자 아이...이젠 전부 잊혀 전생의 기억 같던 그 모든 일들이 그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도일준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어와 그를 흔들었다. 하지만 눈 깜짝 할 사이 모든 걸 집어삼킬 것 같은 화재가 기억을 덮쳤고 눈을 뜨자 보이던 상처투성이의 자신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역경들이 또다시 뱀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끊어진 약지에서 다시금 통증이 느껴졌다. 그 고통은 절단된 손가락에서부터 몸으로 퍼져나갔고 그로 인해 오장육부마저도 누군가에 의해 칼로 다져지듯이 아팠다. 도일준을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죽을힘을 다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강한서가 나지막이 도일준을 불렀다. “도일준 씨, 도일준 씨. 괜찮으세요?”도일준이 고개를 들자 빨개진 그의 눈이 보였다. 얼굴은 심각하다고 느껴질 만큼 창백했고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잠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하자는 거예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고.”강한서는 오히려 차분한
“셰프님처럼 좋으신 분이 40세가 되어서야 결혼하셨어요. 진미가 대표님 말씀으로는 그동안 누나 소식이 있기만 하면 진짜든 가짜든 본인이 직접 가셔서 확인하셨다고 해요.”“그래서 혹시라도 결혼 후 가정을 돌보지 못해 아내 될 분에게 부담이 될까 줄곧 결혼하지 않으셨대요.”“처음엔 다들 셰프님께서 누나를 찾는 일에 집착하는 이유가 어머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어요. 하지만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셰프님은 여전히 누나를 찾는 걸 멈추지 않으셨죠.”“20여 년이 지나 세상도 사람도 전부 예전 같지는 않은데 어느 날 누나를 만난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문밖에서 가슴을 쿡쿡 찌르는 강한서의 말을 듣고 있던 민경하는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천재는 달라. 안 하셔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해내시잖아.’민경하가 강한서에게 건넨 자료는 몇 마디 글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강한서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가족 찾아 삼만 리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하지만 조예단의 부모가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들은 전형적인 남아선호 사상이 있고 우매하며 독단적인 사람들이었다. 10살이 어린 남동생을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명령을 따라 돌봐온 탓에 남동생은 누나와 살갑게 지냈다. 젊었을 땐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누나를 찾아 헤맨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누나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고 안 그래도 여유롭지 않던 가정 형편은 더 이상 그가 누나를 찾는 일에 몰두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든, 생활은 결국 이어나가야만 했다. 아들밖에 모르던 부모는 곁에 있을 때도 좋아한 적 없던 딸을 실종되었다고 해서 걱정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어쩌면 아들 장가 밑천이 되어줄 딸의 예물을 받을 수 없어 그녀를 더 원망했을지도 모른다.그런 생각이 들자 민경하는 강한서의 스토리텔링 실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천재는 어떤 면에서도 천재인 법이지.’울컥한 도일준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왜 저에게 이런
도일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입 안에서 녹슨 비린 맛이 날 때까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가 겨우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강 대표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그 말에 강한서는 실망하는 기색 없이 여전히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모른 척한다고 달라지지 않아요.”도일준은 아무런 말없이 문을 열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도일준이 나가고 몇 분이 지나자 민경하가 들어왔다. “대표님, 차에 타셨어요.”알겠다며 대답한 강한서는 의자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경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예단 씨를 너무 늦게 찾은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죠. 안 그래도 시한부 판정을 받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저였어도 남은 인생은 조용히 보내고 싶을 것 같아요. 당시의 사건이 다시 수면에 떠오르면 그동안의 명성을 포함한 모든 걸 잃게 될 테니까요.”강한서가 말했다. “도일준 씨는 더 이상 그때의 도일준이 아녜요. 성별 인지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게 가장 절망적인 문제일까요?”멈칫하던 민경하는 강한서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저희와 협력하는 것이 제일 좋은 선택이잖아요. 조예단 씨가 본인에게 손을 쓴 사람이 누군지 털어놓고 그 사람이 또 서 대표님을 주범으로 지목한다면 서 대표님을 법정에 세울 수 있잖아요. 그러면 도일준 씨의 복수도 할 수 있는 거 아녜요?”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말했다. “조예단 씨 남편은 불에 타 죽었어요.”민경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강한서가 민경하에게 물었다. “당시 화재로 죽은 건 분명 도일준이예요. 하지만 왜 그의 부모님은 그걸 부인했을까요?”그 점 역시 민경하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 화재로 사망한 건 본인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왜 대외적으로는 며느리가 죽었다고 얘기를 하는 걸까? 그리고 며느리는 왜 죽은 아들의 얼굴로 성형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걸까?조예단이
충격에 빠진 민경하는 순간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싶으면서도 또 저도 모르게 강한서의 추측이 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느리에게 복수하기 위해, 또는 아들을 그리기 위해 그들은 며느리를 아들로 만들어 곁에 남겼다. 조예단은 왜 반항하지 않은 걸까? 아니, 어쩌면 반항했거나 반항을 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애초부터 반항하기를 포기했던 걸지도. 마음에 남은 죄책감 때문에 그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도일준의 부모는 한 분이 이미 돌아가셨고 다른 한 분은 2년 전부터 점점 심각해져 가는 치매증상 때문에 요양원에 보내졌다. 그리고 그녀는 부부의 통제를 벗어나 고작 2년 동안의 자유를 누린 후 불치병을 판정 받았다. 귀국 후 도일준이 후원을 위해 들르는 고아원과 정기 치료를 위해 가는 병원을 제외하면 제일 자주 다니는 곳은 바로 사찰이었다. 매번 백팔 배를 올리며 치성을 드리는 것을 보면 인과응보를 믿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당시 돈을 받고 했던 짓들은 천리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남편이 그런 험한 일을 당한 것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부처님에게 기도를 드리며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동안만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강한서가 이어놓은 이야기와 그동안 조사했던 것들을 연결시키니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그동안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상상도 못할 고통을 겪었는데 원망스럽지 않을까요?”“원망스럽겠죠. 왜 아니겠어요. 특히 당시의 동료들이 전부 그런 운명을 맞이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당시의 화재도 어쩌면 단순한 사고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겠죠.”“그럼 왜 본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 걸까요? 당시 자신에게 돈을 건넸던 사람을 제보한다면 범인을 검거할 수 있을 텐데요.”민경하가 던진 질문에 강한서는 또 다시 처음의 대답으로 돌아갔다. “조예단 씨의 남편은 불에 타 죽었어요.”민경하가 멈칫
송민준이 보낸 짤을 본 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이 남매는 대체 어디서 이런 짤을 가져오는 거야.’강한서가 전화를 걸자 곧 수화기 너머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세요?”강한서가 물었다. 민경하에게 도일준의 차를 세우도록 강한서를 지시한 사람은 한현진이 아니라 송민준이었다. 도일준의 일은 줄곧 송민준이 책임지고 따라붙었다. 도일준이 서해금을 찾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현진도 바로 송민준에게 연락을 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것인지 강한서에게 도일준을 막으라며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송민준이 대답했다. “외할아버지께서 입원하셔서 고담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강한서의 표정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언제 입원하셨는데요? 심각한 거예요?”송민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젯밤에 입원하셨는데 아침에야 나한테 연락을 하셨어. 지금은 깨어나셨대.”잠시 말을 멈춘 송민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마 엄마 일 때문인 것 같아.”“할아버님께 말씀 드렸어요?”“아니. 아직 어떻게 말씀 드려야 할지 몰라서 얘기 안 했어. 하지만 해외에서의 조예단 씨 자료를 조사하면서 엄마 쪽의 도움을 조금 받았거든. 그래서 할아버지 귀에 그 일이 들어간 것 같아.”“안 그래도 현진이가 돌아온 후 어떻게 아이가 바뀔 수 있냐면서 두 분께서 계속 의아해 하셨거든. 내가 당시 분만실에 있던 의료진을 조사한다는 걸 아셨으니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송민준이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가 현진이를 낳으실 때 예정일보다 10일이나 일찍 진통이 왔었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강의 때문에 외지에 계셨고 전화를 받고 바로 오시려고 했지만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이라 항공편은 지연됐고 고속도로는 아예 막혀버렸지.”“그래서 두 분이 도착하셨을 땐 엄마 마지막 모습도 볼 수 없으셨어. 게다가 딸이 고생 끝에 낳은 아기마저도 죽었다는 소식에 두 분은 오랫동안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셨어.”한태진과 공영선은 그 일로 줄곧 송씨 가문을
진윤이 진술을 마치자 경찰이 물었다. “그날 경기 참가자의 명단에 장준이라는 사람은 없었어요.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녜요?”멈칫한 진윤이 대답했다. “저와는 일면식이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다들 그 사람을 장준이라고 불렀어요.”진수한과 홍혜림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경찰은 더는 아무것도 캐묻지 않은 채 쾌차를 빈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찰이 병실을 나선 후 진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활발하던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병실 아래서 누군가 확성기로 진윤의 이름을 불렀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홍혜림이 얼른 창문을 닫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진윤이 그런 홍혜림을 불러세웠다. “엄마, 괜찮아요. 듣게 해줘요. 듣고 싶어요.”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선 홍혜림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밖에서는 사람을 개미 목숨처럼 여기는 진윤은 사회의 악이라며 그를 욕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윤에게 죽음으로 죗값을 치루라며 울부짖었다. 진윤은 자신의 취미라며 즐겼던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안전을 무시한 취미는 그저 모두의 목숨을 내건 채 한 순간의 쾌감을 쫓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사고 전엔 하나 같이 본인의 운전 실력을 뽐내던 인간들이 사건이 터지자 바로 모든 책임을 코마에 빠진 사람에게 밀어버렸다. 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이런 사고는 본인에겐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착각했을 뿐이었다. 부모님이 잠깐 병실을 나서자 진윤이 몰래 강한서에게 말했다. “형님, 휴대폰 좀 빌려줘요. 엄마가 제 휴대폰을 가져가셔서 그래요.”강한서가 말했다. “팔도 들지 못하면서 휴대폰은 무슨. 그냥 가만히 있어.”진윤이 대답했다. “인터넷에서 절 뭐라고 욕하는지 봐야겠어요.”강한서: ...진윤이 씩 미소 지었다. 하지만 얼굴의 상처 때문에 그 미소는 그를 더 불쌍해 보이게 했다. “아침에 약을 바꿔주던 간호사가 몰래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지금 악플 장난 아니죠. 엄마는 제가 악플을 볼까봐
병원으로 찾아온 피해자 가족에 휴대폰을 떨어뜨려 망가졌다는 말에 한현진이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넌 괜찮아? 다쳤어?”“난 괜찮아. 걱정하지 마.”“분명 피해자 가족 앞에서 이간질을 한 사람이 있어. 가족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병원까지 찾아와 소란을 피울 정신이 있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아직 공식적으로 사고 원인을 밝힌 적도 없는데 소란을 피운다고 뭘 얻을 수 있는데?”“기껏해야 여론이나 더 뜨거워지겠지. 지금 이 여론몰이를 설계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하네.”강한서가 멈칫하며 물었다. “너 성우에게 연락했어?”그제야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인지하고 당황한 한현진이 말했다. “너는 연락이 안 되는데 기사까지 보고 나니까 너무 걱정이 돼서 성우 씨에게 전화한 거야.”변명하던 한현진이 물었다. “진윤 씨는 어떻게 됐어? 아직도 상태가 안 좋아?”“고비는 넘겼지만 과다출혈에 부상도 심한 상태라 아직 깨어나지 못했어.”“나쁜 자식. 분명 더는 그런 경기엔 참가하지 않기로 약속까지 해놓고 대체 왜 결국 약속을 어기는 거야.”강한서가 말했다. “운전자가 진윤이 아니야. 진윤이 몸에 생긴 상처를 봐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운적석에서 나온 부상이 아니래. 하지만 사고가 났을 땐 진윤이도 차에 있었어. 아마 팀원이 책임을 피하기 위해 윤이를 운적석으로 옮긴 것 같아.”“아무래도 술까지 마셨으니까 음주운전이 여론몰이 이용하기 좋았겠지. 그래도 증거를 지울 수는 없을 거야. 경찰 측에서 조사를 진행하면 바로 사건의 진위를 밝힐 수 있어. 하지만 지금 일이 생각보다 커져서 여론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아.”“아직 학생이라 차짓하면 윤이에겐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갈 거야.”재벌 2세의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무고한 시민 사망, 이라는 기사는 사회에 불만을 품었던 네티즌이 마침 원하던 타이틀이었다. 그러니 경찰 측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꺼내놓지 않는 한 정정 기사나 반박 기사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
진윤이 입원한 병원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기자들과 그들이 데려온 피해자의 가족으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진수 그룹 오너가의 모든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공개되었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간 그 짧은 사이, 사람들은 그녀가 있는 비상계단으로 몰려들었다. 강한서가 홍혜림을 감싸고 비상계단을 벗어나며 흥분한 피해자 가족에 의해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은 그대로 박살이 났다. 경찰이 도착하고 나서야 현장은 잠시 평화를 되찾았다. 저녁사이 홍혜림은 눈에 띄게 핼쑥해졌다. 진수한은 까칠해진 얼굴로 최대한 홍혜림을 위로하고 있었다. 경찰 측에서는 아직도 홍혜림에게 어젯밤 진윤의 알리바이를 묻고 있었다. “여러 번 얘기했잖아요. 술 안 마셨다니까요. 머리 깎으러 가서 친구가 경기 구경하러 오라고 해서 간다고 했어요. 먼저 경기 약속을 어긴 거라 안 갈 수가 없어서 인사할 겸 다녀오겠다고 했었어요.”“사고를 낸 차가 저희 아들 차는 맞아요. 하지만 운전자가 저희 아들일 리는 없어요.”경찰이 물었다. “어떻게 진윤 씨가 운전한 게 아니라고 확신하시죠? 무슨 근거로요?”“저와 다시는 그런 경기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게 어제 저녁이에요. 변하고 싶어 했어요. 복수 전공도 하고 싶다고 얘기했다고요.”“그 말을 믿으세요?”아들이 생사를 헤매고 있으니 안 그래도 우울한 감정에 쌓여있던 홍혜림은 경찰에게 붙잡혀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당장이라도 멘탈이 붕괴될 것만 같았다. 그런 시점에 그 말을 믿냐는 경찰의 말에 홍혜림은 드디어 폭발했다. “아니면요? 제가 제 아들을 안 믿으면 설마 인터넷에 떠도는 그런 얘기들을 믿을까 봐요? 증거가 필요하면 당신들이 가서 찾아요. 길가에 설치된 CCTV는 인테리어예요? 왜 계속 병원만 지키고 있는 거예요?”“지금 코마에 빠져 깨어나지도 못하는데 도망이라도 갈까봐 그래요? 윤이는 범인이 아니라고요.”그러자 경찰도 언성을 높였다. “홍혜림 씨, 저희도 지금 조사 중에 있어요. 심문도 저희 업무 중 하나예요.
한성우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형수님도 양심은 없으시네요. 아무리 그대로 강운이가 형수님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렇게 이용하시면 마음에 안 찔리세요?”한성우의 말에 한현진의 말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좋아하면 강한서를 자극하기 위해 절 간민혜 씨 모습으로 분장시킬 수 있어요? 저와 주 변호사님은 그저 지인 딱 그 정도예요. 말 할 거예요, 말 거예요? 말 안 할 거면 됐어요.”‘강한서에게 덫을 놓은 건 내가 평생 기억하고 있을 거야.’말을 잘못 꺼냈음을 인지한 한성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얘기하면 되잖아요.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지만 제가 얘기한다고 해서 강운이가 나설 거란 보장은 저도 못해요.”한현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거예요.”주강운이라는 사람의 모든 면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었지만 한현진은 변호사로서의 그의 능력은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정서희의 의뢰를 받고 정설희 사건을 조사하고 있으니 당연히 장준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제 발로 찾아온 기회는 주강운은 거절할 리가 없었다. 주강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던 한성우는 돌고 돌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불법 레이싱 교통사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대. 전부 이제 갓 20살이 된 어린 애들이던데 안타깝게 됐어. 학교나 열심히 다닐 것이지 레이싱은 대체 왜 한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봐.”커피를 한 모금이 마신 주강운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이젠 사회 뉴스도 봐?”“아니, 그냥 우연하게 본 건데 놀라워서 그러지. 바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잖아. 부상자 중에 진수 그룹 막내아들도 있었고. 탄식이 절로 나오더라니까.”물을 한 모금 마신 한성우가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이런 뉴스 안 봐?”주강운이 말했다. “봤는데 자세히는 안 봤어.”“사건 관련 기사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겨진 뒷이야기가 더 충격적이야. 그러니까...”“잠깐만.”주강운이 한성우의 말을 잘랐다. “나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끝
[아니, 지금 중요한 건 사고 원인을 밝히는 거 아녜요? 대체 왜 부상자 신상정보나 캐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여론 몰이 하려는 거 아녜요?][그러니까요. 이렇게 큰 교통사고면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이 경기의 주최 측에 문제점을 둬야하는 거잖아요.][속도 제한 구간에서 불법 레이싱을 하다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뭐 더 할 말 있어요? 위에 댓글 혹시 진수 그룹 알바 아니세요?][그래서 진모 씨는 경기에 참가하지 않은 건가요? 피해자라도 된대요? 피해자는 그 인간들 차에 치인 사람이에요. 논리적인 척 하는 거 웃기네요. 쓰레기 같은 인간 때문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나 몰라라 하면서 그것도 인간이라고 신상정보가 털리는 게 안타까워요?][진윤. 남. 서화 대학 전기정보공학과 2학년. 주민등록 번호: XXXX. 전화번호: XXXX.]진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전부 폭로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보를 공유했다. 심지어 진윤의 수능성적을 폭로하며 그의 성적으로는 서화 대학에 입학할 수 없다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법 레이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 사람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여론은 이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여론 몰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 대상이 진윤이 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 진윤을 이용해 사건의 요점을 흐리려는 의도이거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진수 그룹에 타격을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현진이 한성우에게 연락했다. 진윤의 일로 전화했다는 것을 안 한성우가 말했다. “이번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녜요. 일단 불법 레이싱도 문제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건 레이싱에 참가한 사람 중 마약을 한 인간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사고가 일어난 제일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고요.”“지금 그 인간을 숨기기 위해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의 모든 화살을 진윤 씨에게 돌리고 있어요. 형수님과 한서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말아요.”한현진이 멈칫하며 물었다. “그
한현진은 어쩔 수 없이 민경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하는 민경하를 위해 강한서는 특별 휴가를 지급했다. 그러니 민경하도 지금은 강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아주머니 말로는 아침 여섯 시부터 급하게 나갔다고 해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한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어요.”“잠깐만요, 사모님.”갑자기 한현진을 부른 민경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 아침 뉴스 보셨어요?”“아직요. 왜요?”민경하가 말했다. “어젯밤 남서신길에서 레이싱 경기가 있었는데 큰 교통사고가 발생했어요. 3명이 죽고 15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해요. 남서신길 쪽에 저희 자회사에서 시공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요.”“오늘 아침 6시쯤에 뉴스가 터진 거니까 대표님께서 급히 나간 게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남서신길이요?”잠깐 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진윤 씨가 전에 참가하겠다고 고집 부리던 경기잖아?’한현진이 곧바로 진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뿐만 아니라 홍혜림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비록 진씨 가문과 연이 깊은 것도 아니었고 진윤에게 다가간 것도 홍혜림에게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고를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자식! 분명 강한서와 더는 그런 위험한 경기엔 참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대체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자 한현진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하리에게 물어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진윤의 사촌누나이니 어쩌면 남인 그들보다 먼저 소식을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열이 말했다. “진윤 씨도 다쳐서 아직 깨어나지 못했대요. 신하리 씨도 아까 공항으로 가서 아마 지금쯤 그쪽으로 출발했을 거예요. 아직 사람을 보지도 못했으니 신하리 씨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을 거예요.”제일 염려했던 일이 결국은 일어나고 말았다. 진윤도 그 사고 현장에 있었다. 그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