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더는 말이 없었다. 그는 서해금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서해금은 야망이 크고 승부욕도 강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면 절대 쉽게 도망가지 않을 것이었다.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오늘은 날 왜 부른 거야.”상대방에게 의도를 들킨 서해금 역시 불쌍한 연기는 넣어두고 옆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 박안수에게 건넸다. “이 사람 국내에서의 행적을 좀 알아봐 줘. 누굴 만나는지도 전부. 최대한 자세하게.”박안수가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도일준이라는 남자의 신상 자료였다. 자료를 넘기던 박안수는 사진 속 남자의 눈매가 어쩐지 눈에 익은 것 같았지만 좀처럼 어디서 본 얼굴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가 서해금에게 물었다. “누구야?”“회사와 새로 계약한 클라이언트야. M 국의 교포래. M 국에서의 신분도 확인할 거야. 하지만 국내에서 누구와 연락을 주고받는지도 알아야겠어. 만약 신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날 도와 깔린느가 해외로 진출할 수 있도록 M 국과 연결해 줄 다리가 될 거야.”M 국은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 그들의 의료 체계는 국내와 달라 실력이 뛰어난 의사일수록 상류층의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것이 바로 서해금이 직접 도일준을 에스코트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가 노린 것인 의사라는 신분 뒤에 따라올 수많은 도일준의 자원이었다. 택시에 앉아 시트에 기댄 도일준이 장갑을 벗었다. 온전하지 않은 손가락이 공기 중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손을 뻗어 무명지를 슬며시 어루만졌다. 그 행동은 마치 반지를 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무명지는 텅 비어 있었고 남은 것이라곤 끊어진 손가락이 남긴 공허한 공기뿐이었다. 차가 병원을 지나치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고층 건물이 산을 이루고 인파가 물밀듯 몰리며 차가 물살처럼 쌩쌩 지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이미 기억 속의 모습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비슷한 것이라곤 병원 맞은편 건물엔 여전히 깔린느의 광고가 걸려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와 똑같은 모습 그대
택시 기사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 아는 사이예요?”민경하는 말없이 웃는 얼굴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도일준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가시죠.”그런 도일준의 태도에 민경하는 화조차 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희 대표님께서 26년 전 한주 병원에서 근무하시던 조예단이라는 분에 관해 여쭤볼 게 있다고 하셨어요. 조예단이라는 분을 아세요?”주먹을 꽉 움켜쥔 도일준이 홱 고개를 돌려 민경하를 바라보았다. 민경하는 여전히 단정하고 격식 있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어떤 공격성도 보이지 않았다. 이를 악물던 도일준이 몇 초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쪽 대표님이 누군데요.”민경하가 대답했다. “만나면 아실 겁니다.”도일준은 허락도, 거절도 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가만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 함께 멈춰 선 차들이 하나둘 클랙슨을 울리는 탓에 도일준의 마음도 따라 복잡해졌다. 교대 시간이 가까워지자 택시 기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갈 거예요, 말 거예요. 이거 지금 업무 방해예요.”숨을 깊게 들이쉰 도일준이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풀었다. 민경하는 택시 기사에게 사과를 건네며 재킷 안쪽에서 현금 몇 장을 꺼내 택시 기사에게 건넸다. 택시 기사는 그중 한 장을 뽑으며 말했다. “이건 그쪽이 내 담뱃값 대준 거로 해요. 앞으로 운전 조심해요. 초보 운전자가 겁도 없이 험하게 운전을 해. 오늘 날 만나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크게 한 방 털렸을 거예요. 이건 인생 수업 들은 수강료라고 생각해요. 조심 좀 하고.”민경하가 웃으며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택시 번호를 한 번 확인한 민경하는 반대편으로 돌아가 도일준의 차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오른 도일준이 다시 한번 민경하에게 물었다. “그쪽 대표님이 누구예요.”민경하의 대답은 여전히 똑같았다. “도착하면 알게 되실 거예요.”그러자 도일준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30분 후, 민경하가 운전한 차가 구시가 근처에
“그러는 강 대표님은 제가 탄 차를 멈춰 세워서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뭐죠?”도일준을 힐끔 쳐다본 강한서가 대답했다. “제가 도일준 씨를 여기에 모신 건 도일준 씨께 어떤 분에 관해 여쭤볼게 있어서예요.”도일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한주 사람도 아닌데요. 저를 통해 누군가를 뒷조사할 생각이라면 사람을 잘못 찾은 것 같네요.”강한서가 반문했다. “제가 여쭤보려는 사람이 누구라고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도일준 씨는 어떻게 본인이 모르실 거라고 확신하시는 거예요? 정말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강한서에게 낚였다는 것을 눈치 채고 울컥 화가 치민 도일준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굴 알아볼 생각이든 전 몰라요.”“모르시면 어쩔 수 없죠.”강한서는 도일준의 건강 상태가 그리 좋지 않으니 최대한 자극하지 말라던 한현진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오늘 도일준 씨를 모신 건 제 아내를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예요.”미간을 찌푸린 도일준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장모님이 살아계실 때 후원하시던 고아원이 있었어요. 작년부터 지금까지 도일준 씨도 여러 차례 그 고아원에 후원하셨더라고요. 절대 적은 금액도 아니었고요.”“그래서 제 아내가 직접 만나 뵙고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줄곧 얘기했었어요.”도일준은 고아원에 후원한 것을 조금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당시의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그 아이와 마주치고 꼬리가 밟히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굳은 얼굴의 도일준이 대답했다. “그 돈은 제가 친구 대신 후원한 거예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말하며 도일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일 없으면 전 이만 가볼게요.”도일준이 민경하를 따라나선 건 그가 서해금의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한현진 쪽 사람이었다니, 도일준의 예상 밖이었다. 그는 송씨 가문 사람 앞에서 태연하게만 행동할 수는 없었다.
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예준이 룸을 나서며 문을 꼭 닫았다. 조예준을 향한 도일준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조 셰프님은 진미가에서 마지막으로 모신 셰프님이세요. 다른 셰프님들과는 달리 다른 일을 하시다가 셰프로 전향하신 케이스예요. 아마 이쪽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던 것 같아요.”“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말처럼 지금은 진미가에서 제일 예약하기 어려운 셰프님이세요.”강한서는 말하며 계란술국 한 그릇을 떠 천천히 도일준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계란술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일준 씨, 드셔보세요.”계란술국을 바라보는 도일준의 눈앞에 과거의 장면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너져가는 집, 돈 새는 구멍이라며 학교도 못 가게 하더니 고기 한 점 더 먹었다는 이유로 잔소리를 늘어놓던 부모.그리고 계란술국을 들고 몰래 방으로 들어와 앞으로 술국은 전부 누나에게 줄 테니 울지 말라며 달래던 어린 남자 아이...이젠 전부 잊혀 전생의 기억 같던 그 모든 일들이 그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도일준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어와 그를 흔들었다. 하지만 눈 깜짝 할 사이 모든 걸 집어삼킬 것 같은 화재가 기억을 덮쳤고 눈을 뜨자 보이던 상처투성이의 자신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역경들이 또다시 뱀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끊어진 약지에서 다시금 통증이 느껴졌다. 그 고통은 절단된 손가락에서부터 몸으로 퍼져나갔고 그로 인해 오장육부마저도 누군가에 의해 칼로 다져지듯이 아팠다. 도일준을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죽을힘을 다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강한서가 나지막이 도일준을 불렀다. “도일준 씨, 도일준 씨. 괜찮으세요?”도일준이 고개를 들자 빨개진 그의 눈이 보였다. 얼굴은 심각하다고 느껴질 만큼 창백했고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잠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하자는 거예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고.”강한서는 오히려 차분한
“셰프님처럼 좋으신 분이 40세가 되어서야 결혼하셨어요. 진미가 대표님 말씀으로는 그동안 누나 소식이 있기만 하면 진짜든 가짜든 본인이 직접 가셔서 확인하셨다고 해요.”“그래서 혹시라도 결혼 후 가정을 돌보지 못해 아내 될 분에게 부담이 될까 줄곧 결혼하지 않으셨대요.”“처음엔 다들 셰프님께서 누나를 찾는 일에 집착하는 이유가 어머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어요. 하지만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셰프님은 여전히 누나를 찾는 걸 멈추지 않으셨죠.”“20여 년이 지나 세상도 사람도 전부 예전 같지는 않은데 어느 날 누나를 만난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문밖에서 가슴을 쿡쿡 찌르는 강한서의 말을 듣고 있던 민경하는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천재는 달라. 안 하셔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해내시잖아.’민경하가 강한서에게 건넨 자료는 몇 마디 글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강한서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가족 찾아 삼만 리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하지만 조예단의 부모가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들은 전형적인 남아선호 사상이 있고 우매하며 독단적인 사람들이었다. 10살이 어린 남동생을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명령을 따라 돌봐온 탓에 남동생은 누나와 살갑게 지냈다. 젊었을 땐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누나를 찾아 헤맨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누나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고 안 그래도 여유롭지 않던 가정 형편은 더 이상 그가 누나를 찾는 일에 몰두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든, 생활은 결국 이어나가야만 했다. 아들밖에 모르던 부모는 곁에 있을 때도 좋아한 적 없던 딸을 실종되었다고 해서 걱정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어쩌면 아들 장가 밑천이 되어줄 딸의 예물을 받을 수 없어 그녀를 더 원망했을지도 모른다.그런 생각이 들자 민경하는 강한서의 스토리텔링 실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천재는 어떤 면에서도 천재인 법이지.’울컥한 도일준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왜 저에게 이런
도일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입 안에서 녹슨 비린 맛이 날 때까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가 겨우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강 대표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그 말에 강한서는 실망하는 기색 없이 여전히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모른 척한다고 달라지지 않아요.”도일준은 아무런 말없이 문을 열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도일준이 나가고 몇 분이 지나자 민경하가 들어왔다. “대표님, 차에 타셨어요.”알겠다며 대답한 강한서는 의자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경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예단 씨를 너무 늦게 찾은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죠. 안 그래도 시한부 판정을 받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저였어도 남은 인생은 조용히 보내고 싶을 것 같아요. 당시의 사건이 다시 수면에 떠오르면 그동안의 명성을 포함한 모든 걸 잃게 될 테니까요.”강한서가 말했다. “도일준 씨는 더 이상 그때의 도일준이 아녜요. 성별 인지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게 가장 절망적인 문제일까요?”멈칫하던 민경하는 강한서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저희와 협력하는 것이 제일 좋은 선택이잖아요. 조예단 씨가 본인에게 손을 쓴 사람이 누군지 털어놓고 그 사람이 또 서 대표님을 주범으로 지목한다면 서 대표님을 법정에 세울 수 있잖아요. 그러면 도일준 씨의 복수도 할 수 있는 거 아녜요?”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말했다. “조예단 씨 남편은 불에 타 죽었어요.”민경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강한서가 민경하에게 물었다. “당시 화재로 죽은 건 분명 도일준이예요. 하지만 왜 그의 부모님은 그걸 부인했을까요?”그 점 역시 민경하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 화재로 사망한 건 본인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왜 대외적으로는 며느리가 죽었다고 얘기를 하는 걸까? 그리고 며느리는 왜 죽은 아들의 얼굴로 성형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걸까?조예단이
충격에 빠진 민경하는 순간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싶으면서도 또 저도 모르게 강한서의 추측이 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느리에게 복수하기 위해, 또는 아들을 그리기 위해 그들은 며느리를 아들로 만들어 곁에 남겼다. 조예단은 왜 반항하지 않은 걸까? 아니, 어쩌면 반항했거나 반항을 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애초부터 반항하기를 포기했던 걸지도. 마음에 남은 죄책감 때문에 그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도일준의 부모는 한 분이 이미 돌아가셨고 다른 한 분은 2년 전부터 점점 심각해져 가는 치매증상 때문에 요양원에 보내졌다. 그리고 그녀는 부부의 통제를 벗어나 고작 2년 동안의 자유를 누린 후 불치병을 판정 받았다. 귀국 후 도일준이 후원을 위해 들르는 고아원과 정기 치료를 위해 가는 병원을 제외하면 제일 자주 다니는 곳은 바로 사찰이었다. 매번 백팔 배를 올리며 치성을 드리는 것을 보면 인과응보를 믿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당시 돈을 받고 했던 짓들은 천리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남편이 그런 험한 일을 당한 것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부처님에게 기도를 드리며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동안만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강한서가 이어놓은 이야기와 그동안 조사했던 것들을 연결시키니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그동안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상상도 못할 고통을 겪었는데 원망스럽지 않을까요?”“원망스럽겠죠. 왜 아니겠어요. 특히 당시의 동료들이 전부 그런 운명을 맞이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당시의 화재도 어쩌면 단순한 사고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겠죠.”“그럼 왜 본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 걸까요? 당시 자신에게 돈을 건넸던 사람을 제보한다면 범인을 검거할 수 있을 텐데요.”민경하가 던진 질문에 강한서는 또 다시 처음의 대답으로 돌아갔다. “조예단 씨의 남편은 불에 타 죽었어요.”민경하가 멈칫
송민준이 보낸 짤을 본 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이 남매는 대체 어디서 이런 짤을 가져오는 거야.’강한서가 전화를 걸자 곧 수화기 너머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세요?”강한서가 물었다. 민경하에게 도일준의 차를 세우도록 강한서를 지시한 사람은 한현진이 아니라 송민준이었다. 도일준의 일은 줄곧 송민준이 책임지고 따라붙었다. 도일준이 서해금을 찾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현진도 바로 송민준에게 연락을 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것인지 강한서에게 도일준을 막으라며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송민준이 대답했다. “외할아버지께서 입원하셔서 고담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강한서의 표정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언제 입원하셨는데요? 심각한 거예요?”송민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젯밤에 입원하셨는데 아침에야 나한테 연락을 하셨어. 지금은 깨어나셨대.”잠시 말을 멈춘 송민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마 엄마 일 때문인 것 같아.”“할아버님께 말씀 드렸어요?”“아니. 아직 어떻게 말씀 드려야 할지 몰라서 얘기 안 했어. 하지만 해외에서의 조예단 씨 자료를 조사하면서 엄마 쪽의 도움을 조금 받았거든. 그래서 할아버지 귀에 그 일이 들어간 것 같아.”“안 그래도 현진이가 돌아온 후 어떻게 아이가 바뀔 수 있냐면서 두 분께서 계속 의아해 하셨거든. 내가 당시 분만실에 있던 의료진을 조사한다는 걸 아셨으니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송민준이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가 현진이를 낳으실 때 예정일보다 10일이나 일찍 진통이 왔었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강의 때문에 외지에 계셨고 전화를 받고 바로 오시려고 했지만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이라 항공편은 지연됐고 고속도로는 아예 막혀버렸지.”“그래서 두 분이 도착하셨을 땐 엄마 마지막 모습도 볼 수 없으셨어. 게다가 딸이 고생 끝에 낳은 아기마저도 죽었다는 소식에 두 분은 오랫동안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셨어.”한태진과 공영선은 그 일로 줄곧 송씨 가문을
강한서는 말이 없었다. 송민준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대체 누가 그 아줌마에게 그런 자신감을 준 걸까?”그 당시의 송병천은 서해금과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고 심지어 몇 번 만난 적조차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송민준은 서해금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송민준은 껌처럼 한아람 곁에 붙어있었다. 특히 한아람이 임신한 후 송민준은 동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녀의 곁에 늘 달라붙어 있었다. 한아람은 둘째를 임신 했다는 이유로 송민준을 향한 사랑이나 관심을 줄이지 않았다. 송민준이 조금만 고집을 부리면 한아람은 혹시라도 그녀가 힘들까 걱정하는 송병천을 뒤로하고 송민준의 투정을 받아줬다. 그때의 송민준은 틈만 나면 한아람과 함께 회사에 갔다. 회사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정하게 송민준을 대했다. 특히나 서해금은 더 유난스레 그를 보살폈다. 한아람이 바쁠 때면 서해금은 그녀 대신 송민준을 봐주기도 했다. 사실 어린 시절의 송민준은 낯을 많이 가렸다. 친절하게 대하는 서해금을 송민준은 처음엔 눈길도 주지 않았었다. 서해금은 틈만 나면 송민준에게 간식과 장난감을 선물했고 그 중엔 송민준이 본 것도 보지 못했던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서해금이 선물을 줬다는 이유로 그녀와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그저 그런 사이로 지내며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어느 날, 몇 주 동안 보이지 않던 서해금은 잔뜩 야윈 채로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한아람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송민준은 나중에야 어른들의 대화를 통해 서해금의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뱃속에 있던 아이는 아빠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아람은 송민준에게 서해금을 너무 차갑게 대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한아람이 말했다. “아줌마도 엄마처럼 뱃속에 아이가 있어. 민준이가 너무 귀엽게 생겼고 아줌마도 아이를 좋아하니까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거야.”어린 시절의 송민준은 한아람의 말을 잘 들었다. 게다가 그 역시도 서해금이 조금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송민준이 보낸 짤을 본 강한서가 눈을 씰룩였다. ‘이 남매는 대체 어디서 이런 짤을 가져오는 거야.’강한서가 전화를 걸자 곧 수화기 너머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세요?”강한서가 물었다. 민경하에게 도일준의 차를 세우도록 강한서를 지시한 사람은 한현진이 아니라 송민준이었다. 도일준의 일은 줄곧 송민준이 책임지고 따라붙었다. 도일준이 서해금을 찾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현진도 바로 송민준에게 연락을 했다. 하지만 송민준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것인지 강한서에게 도일준을 막으라며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송민준이 대답했다. “외할아버지께서 입원하셔서 고담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강한서의 표정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언제 입원하셨는데요? 심각한 거예요?”송민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젯밤에 입원하셨는데 아침에야 나한테 연락을 하셨어. 지금은 깨어나셨대.”잠시 말을 멈춘 송민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마 엄마 일 때문인 것 같아.”“할아버님께 말씀 드렸어요?”“아니. 아직 어떻게 말씀 드려야 할지 몰라서 얘기 안 했어. 하지만 해외에서의 조예단 씨 자료를 조사하면서 엄마 쪽의 도움을 조금 받았거든. 그래서 할아버지 귀에 그 일이 들어간 것 같아.”“안 그래도 현진이가 돌아온 후 어떻게 아이가 바뀔 수 있냐면서 두 분께서 계속 의아해 하셨거든. 내가 당시 분만실에 있던 의료진을 조사한다는 걸 아셨으니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송민준이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가 현진이를 낳으실 때 예정일보다 10일이나 일찍 진통이 왔었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강의 때문에 외지에 계셨고 전화를 받고 바로 오시려고 했지만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이라 항공편은 지연됐고 고속도로는 아예 막혀버렸지.”“그래서 두 분이 도착하셨을 땐 엄마 마지막 모습도 볼 수 없으셨어. 게다가 딸이 고생 끝에 낳은 아기마저도 죽었다는 소식에 두 분은 오랫동안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셨어.”한태진과 공영선은 그 일로 줄곧 송씨 가문을
충격에 빠진 민경하는 순간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싶으면서도 또 저도 모르게 강한서의 추측이 진실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느리에게 복수하기 위해, 또는 아들을 그리기 위해 그들은 며느리를 아들로 만들어 곁에 남겼다. 조예단은 왜 반항하지 않은 걸까? 아니, 어쩌면 반항했거나 반항을 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애초부터 반항하기를 포기했던 걸지도. 마음에 남은 죄책감 때문에 그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도일준의 부모는 한 분이 이미 돌아가셨고 다른 한 분은 2년 전부터 점점 심각해져 가는 치매증상 때문에 요양원에 보내졌다. 그리고 그녀는 부부의 통제를 벗어나 고작 2년 동안의 자유를 누린 후 불치병을 판정 받았다. 귀국 후 도일준이 후원을 위해 들르는 고아원과 정기 치료를 위해 가는 병원을 제외하면 제일 자주 다니는 곳은 바로 사찰이었다. 매번 백팔 배를 올리며 치성을 드리는 것을 보면 인과응보를 믿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당시 돈을 받고 했던 짓들은 천리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남편이 그런 험한 일을 당한 것이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부처님에게 기도를 드리며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동안만이라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강한서가 이어놓은 이야기와 그동안 조사했던 것들을 연결시키니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그동안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상상도 못할 고통을 겪었는데 원망스럽지 않을까요?”“원망스럽겠죠. 왜 아니겠어요. 특히 당시의 동료들이 전부 그런 운명을 맞이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당시의 화재도 어쩌면 단순한 사고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겠죠.”“그럼 왜 본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 걸까요? 당시 자신에게 돈을 건넸던 사람을 제보한다면 범인을 검거할 수 있을 텐데요.”민경하가 던진 질문에 강한서는 또 다시 처음의 대답으로 돌아갔다. “조예단 씨의 남편은 불에 타 죽었어요.”민경하가 멈칫
도일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입 안에서 녹슨 비린 맛이 날 때까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가 겨우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강 대표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그 말에 강한서는 실망하는 기색 없이 여전히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모른 척한다고 달라지지 않아요.”도일준은 아무런 말없이 문을 열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도일준이 나가고 몇 분이 지나자 민경하가 들어왔다. “대표님, 차에 타셨어요.”알겠다며 대답한 강한서는 의자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경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예단 씨를 너무 늦게 찾은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죠. 안 그래도 시한부 판정을 받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저였어도 남은 인생은 조용히 보내고 싶을 것 같아요. 당시의 사건이 다시 수면에 떠오르면 그동안의 명성을 포함한 모든 걸 잃게 될 테니까요.”강한서가 말했다. “도일준 씨는 더 이상 그때의 도일준이 아녜요. 성별 인지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사람에게 그게 가장 절망적인 문제일까요?”멈칫하던 민경하는 강한서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저희와 협력하는 것이 제일 좋은 선택이잖아요. 조예단 씨가 본인에게 손을 쓴 사람이 누군지 털어놓고 그 사람이 또 서 대표님을 주범으로 지목한다면 서 대표님을 법정에 세울 수 있잖아요. 그러면 도일준 씨의 복수도 할 수 있는 거 아녜요?”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말했다. “조예단 씨 남편은 불에 타 죽었어요.”민경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강한서가 민경하에게 물었다. “당시 화재로 죽은 건 분명 도일준이예요. 하지만 왜 그의 부모님은 그걸 부인했을까요?”그 점 역시 민경하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 화재로 사망한 건 본인의 아들이었다. 하지만 왜 대외적으로는 며느리가 죽었다고 얘기를 하는 걸까? 그리고 며느리는 왜 죽은 아들의 얼굴로 성형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걸까?조예단이
“셰프님처럼 좋으신 분이 40세가 되어서야 결혼하셨어요. 진미가 대표님 말씀으로는 그동안 누나 소식이 있기만 하면 진짜든 가짜든 본인이 직접 가셔서 확인하셨다고 해요.”“그래서 혹시라도 결혼 후 가정을 돌보지 못해 아내 될 분에게 부담이 될까 줄곧 결혼하지 않으셨대요.”“처음엔 다들 셰프님께서 누나를 찾는 일에 집착하는 이유가 어머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여겼어요. 하지만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셰프님은 여전히 누나를 찾는 걸 멈추지 않으셨죠.”“20여 년이 지나 세상도 사람도 전부 예전 같지는 않은데 어느 날 누나를 만난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문밖에서 가슴을 쿡쿡 찌르는 강한서의 말을 듣고 있던 민경하는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천재는 달라. 안 하셔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해내시잖아.’민경하가 강한서에게 건넨 자료는 몇 마디 글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강한서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가족 찾아 삼만 리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하지만 조예단의 부모가 그리 좋은 사람들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들은 전형적인 남아선호 사상이 있고 우매하며 독단적인 사람들이었다. 10살이 어린 남동생을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명령을 따라 돌봐온 탓에 남동생은 누나와 살갑게 지냈다. 젊었을 땐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누나를 찾아 헤맨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누나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고 안 그래도 여유롭지 않던 가정 형편은 더 이상 그가 누나를 찾는 일에 몰두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상황이 어떻든, 생활은 결국 이어나가야만 했다. 아들밖에 모르던 부모는 곁에 있을 때도 좋아한 적 없던 딸을 실종되었다고 해서 걱정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어쩌면 아들 장가 밑천이 되어줄 딸의 예물을 받을 수 없어 그녀를 더 원망했을지도 모른다.그런 생각이 들자 민경하는 강한서의 스토리텔링 실력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천재는 어떤 면에서도 천재인 법이지.’울컥한 도일준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왜 저에게 이런
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예준이 룸을 나서며 문을 꼭 닫았다. 조예준을 향한 도일준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조 셰프님은 진미가에서 마지막으로 모신 셰프님이세요. 다른 셰프님들과는 달리 다른 일을 하시다가 셰프로 전향하신 케이스예요. 아마 이쪽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던 것 같아요.”“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는 말처럼 지금은 진미가에서 제일 예약하기 어려운 셰프님이세요.”강한서는 말하며 계란술국 한 그릇을 떠 천천히 도일준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계란술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일준 씨, 드셔보세요.”계란술국을 바라보는 도일준의 눈앞에 과거의 장면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무너져가는 집, 돈 새는 구멍이라며 학교도 못 가게 하더니 고기 한 점 더 먹었다는 이유로 잔소리를 늘어놓던 부모.그리고 계란술국을 들고 몰래 방으로 들어와 앞으로 술국은 전부 누나에게 줄 테니 울지 말라며 달래던 어린 남자 아이...이젠 전부 잊혀 전생의 기억 같던 그 모든 일들이 그 순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도일준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어와 그를 흔들었다. 하지만 눈 깜짝 할 사이 모든 걸 집어삼킬 것 같은 화재가 기억을 덮쳤고 눈을 뜨자 보이던 상처투성이의 자신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역경들이 또다시 뱀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끊어진 약지에서 다시금 통증이 느껴졌다. 그 고통은 절단된 손가락에서부터 몸으로 퍼져나갔고 그로 인해 오장육부마저도 누군가에 의해 칼로 다져지듯이 아팠다. 도일준을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죽을힘을 다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강한서가 나지막이 도일준을 불렀다. “도일준 씨, 도일준 씨. 괜찮으세요?”도일준이 고개를 들자 빨개진 그의 눈이 보였다. 얼굴은 심각하다고 느껴질 만큼 창백했고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잠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하자는 거예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고.”강한서는 오히려 차분한
“그러는 강 대표님은 제가 탄 차를 멈춰 세워서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뭐죠?”도일준을 힐끔 쳐다본 강한서가 대답했다. “제가 도일준 씨를 여기에 모신 건 도일준 씨께 어떤 분에 관해 여쭤볼게 있어서예요.”도일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한주 사람도 아닌데요. 저를 통해 누군가를 뒷조사할 생각이라면 사람을 잘못 찾은 것 같네요.”강한서가 반문했다. “제가 여쭤보려는 사람이 누구라고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도일준 씨는 어떻게 본인이 모르실 거라고 확신하시는 거예요? 정말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말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강한서에게 낚였다는 것을 눈치 채고 울컥 화가 치민 도일준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굴 알아볼 생각이든 전 몰라요.”“모르시면 어쩔 수 없죠.”강한서는 도일준의 건강 상태가 그리 좋지 않으니 최대한 자극하지 말라던 한현진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오늘 도일준 씨를 모신 건 제 아내를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예요.”미간을 찌푸린 도일준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장모님이 살아계실 때 후원하시던 고아원이 있었어요. 작년부터 지금까지 도일준 씨도 여러 차례 그 고아원에 후원하셨더라고요. 절대 적은 금액도 아니었고요.”“그래서 제 아내가 직접 만나 뵙고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줄곧 얘기했었어요.”도일준은 고아원에 후원한 것을 조금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지 당시의 그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그 아이와 마주치고 꼬리가 밟히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굳은 얼굴의 도일준이 대답했다. “그 돈은 제가 친구 대신 후원한 거예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말하며 도일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일 없으면 전 이만 가볼게요.”도일준이 민경하를 따라나선 건 그가 서해금의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한현진 쪽 사람이었다니, 도일준의 예상 밖이었다. 그는 송씨 가문 사람 앞에서 태연하게만 행동할 수는 없었다.
택시 기사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 아는 사이예요?”민경하는 말없이 웃는 얼굴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도일준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가시죠.”그런 도일준의 태도에 민경하는 화조차 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희 대표님께서 26년 전 한주 병원에서 근무하시던 조예단이라는 분에 관해 여쭤볼 게 있다고 하셨어요. 조예단이라는 분을 아세요?”주먹을 꽉 움켜쥔 도일준이 홱 고개를 돌려 민경하를 바라보았다. 민경하는 여전히 단정하고 격식 있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어떤 공격성도 보이지 않았다. 이를 악물던 도일준이 몇 초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쪽 대표님이 누군데요.”민경하가 대답했다. “만나면 아실 겁니다.”도일준은 허락도, 거절도 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가만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 함께 멈춰 선 차들이 하나둘 클랙슨을 울리는 탓에 도일준의 마음도 따라 복잡해졌다. 교대 시간이 가까워지자 택시 기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갈 거예요, 말 거예요. 이거 지금 업무 방해예요.”숨을 깊게 들이쉰 도일준이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풀었다. 민경하는 택시 기사에게 사과를 건네며 재킷 안쪽에서 현금 몇 장을 꺼내 택시 기사에게 건넸다. 택시 기사는 그중 한 장을 뽑으며 말했다. “이건 그쪽이 내 담뱃값 대준 거로 해요. 앞으로 운전 조심해요. 초보 운전자가 겁도 없이 험하게 운전을 해. 오늘 날 만나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크게 한 방 털렸을 거예요. 이건 인생 수업 들은 수강료라고 생각해요. 조심 좀 하고.”민경하가 웃으며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택시 번호를 한 번 확인한 민경하는 반대편으로 돌아가 도일준의 차 문을 열어주었다. 차에 오른 도일준이 다시 한번 민경하에게 물었다. “그쪽 대표님이 누구예요.”민경하의 대답은 여전히 똑같았다. “도착하면 알게 되실 거예요.”그러자 도일준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30분 후, 민경하가 운전한 차가 구시가 근처에
남자는 더는 말이 없었다. 그는 서해금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서해금은 야망이 크고 승부욕도 강한 사람이었다.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면 절대 쉽게 도망가지 않을 것이었다.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오늘은 날 왜 부른 거야.”상대방에게 의도를 들킨 서해금 역시 불쌍한 연기는 넣어두고 옆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 박안수에게 건넸다. “이 사람 국내에서의 행적을 좀 알아봐 줘. 누굴 만나는지도 전부. 최대한 자세하게.”박안수가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도일준이라는 남자의 신상 자료였다. 자료를 넘기던 박안수는 사진 속 남자의 눈매가 어쩐지 눈에 익은 것 같았지만 좀처럼 어디서 본 얼굴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가 서해금에게 물었다. “누구야?”“회사와 새로 계약한 클라이언트야. M 국의 교포래. M 국에서의 신분도 확인할 거야. 하지만 국내에서 누구와 연락을 주고받는지도 알아야겠어. 만약 신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날 도와 깔린느가 해외로 진출할 수 있도록 M 국과 연결해 줄 다리가 될 거야.”M 국은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 그들의 의료 체계는 국내와 달라 실력이 뛰어난 의사일수록 상류층의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것이 바로 서해금이 직접 도일준을 에스코트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가 노린 것인 의사라는 신분 뒤에 따라올 수많은 도일준의 자원이었다. 택시에 앉아 시트에 기댄 도일준이 장갑을 벗었다. 온전하지 않은 손가락이 공기 중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손을 뻗어 무명지를 슬며시 어루만졌다. 그 행동은 마치 반지를 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무명지는 텅 비어 있었고 남은 것이라곤 끊어진 손가락이 남긴 공허한 공기뿐이었다. 차가 병원을 지나치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고층 건물이 산을 이루고 인파가 물밀듯 몰리며 차가 물살처럼 쌩쌩 지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이미 기억 속의 모습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비슷한 것이라곤 병원 맞은편 건물엔 여전히 깔린느의 광고가 걸려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와 똑같은 모습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