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운이 소리 내 웃었다. “만약 적은 돈으로 현진 씨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한현진은 주강운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의 눈을 피하며 피아노로 시선을 옮겼다. “제가 칠 수 있는 거 몇 곡 없어요.”“‘별밤’ 알아요?”“조금요.”주강운이 휴대폰으로 악보를 찾아 거치대 위에 올려놓았다. “한 번 쳐봐요.”한현진은 무대 아래를 오가는 사람들을 힐끔 쳐다보더니 피아노를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잠시 악보를 보고 나서야 손을 올려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다채로운 곡조가 순식간에 공연장에 울려 퍼졌다. 한현진은 늦은 속도로 건반을 눌렀다. 처음엔 그래도 어영부영 이어갈 수 있었지만 뒤로 갈수록 손에 익지 않아 곡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세계 명곡이 그녀의 손에서 들어줄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한현진은 조금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녀가 움직임을 멈추기 전에 옆 건반에 뼈마디가 뚜렷하게 보이는 손 한 쌍이 올려졌다. 그 손은 피부가 하얗고 손가락도 가늘고 길었다. 손등의 핏줄은 주인의 움직임에 따라 보일 듯 말듯 해 조금 고고한 분위기를 풍겼다. 춤추듯 움직이는 손가락을 따라 은은한 피아노 소리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주강운이 고개를 돌려 한현진을 바라보았다. “같이 쳐요.”다시 피아노에 집중한 한현진은 천천히 음을 찾아 그다지 능숙하지는 않은 솜씨로 주강운의 페이스를 따라갔다. 조금 더 치자 한현진은 서서히 느낌을 찾았고 곡도 저점 더 유창해졌다. 한 곡을 마치고 한현진은 주강운을 쳐다보며 말했다. “피아노 칠 줄 아셨네요.”주강운이 말했다. “한동안 피아노를 좋아했던 적이 있어서 조금 배웠어요. 잘하는 건 아니고 그저 조금 다룰 줄만 아는 정도예요.”주강운의 말에 한현진은 침묵했다. 역시 사람마다 기준이 다른 법이었다. 한현진은 그런 형편 없는 실력으로도 사람들 앞에 나섰다. 주강운은 능숙하게 피아노를 치면서 그저 다룰 줄 아는 수준이라고 했다. 한현진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주강운
한현진은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죄책감을 안고 주강운을 이용해 확실하지 않은 스캔들을 만들 수는 있었다. 그러나 염치도 없이 상대방의 마음을 볼모로 삼아 그에게 협조해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한현진은 주강운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원망하게 할지언정 그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주강운은 손바닥에 놓였던 목걸이를 쥐고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걸어줄게요. 연인의 목걸이 선물, 아마 내일 헤드라인도 핫하겠어요.”한현진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주강운은 선을 잘 지키던 전과는 달리 가볍게 한현진의 어깨를 잡았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이미 찍고 있어요. 만약 현진 씨가 거절한다면 그동안 퍼진 소문을 믿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한현진은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주강운은 두 손으로 목걸이를 쥐고 가녀린 한현진의 목을 감싸 조심스레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무대 아래에서 보면 두 사람이 목을 껴안고 있는 것 같았고 그 모습은 정말이지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현진은 고개를 돌려 주강운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가까웠던지라 한현진은 여전히 주강운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한현진은 그 순간이 이상하리만치 견디기 어려웠다. 주강운이 손을 놓고 조금 떨어져서야 한현진은 점차 긴장을 풀었다. 한현진은 손을 들어 가슴 쪽에 닿은, 강한서의 사진이 들어있는 사진을 만지더니 나지막이 물었다. “얼마예요? 계좌이체 해드릴게요.”주강운이 말했다. “18000원이요. 사진 인쇄하는 값까지 더하면 19000원. 계좌 이체는 됐어요. 야식이라도 사주실래요?”한현진이 멈칫하자 주강운이 웃으며 말했다. “최대한 19000원을 넘기지 않을게요.”그 말에 한현진이 조금 어색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런 게 아니라, 단지…”한현진은 단지 이 목걸이의 가격이 이렇게 쌀 줄은 몰랐다. 전혀 주강운이 살만한 물건 같지 않았다. 주강운도 당연히 그만의 생각이 있었다. 너무 비싼
차미주가 중얼거렸다. “가까이에서 살고 싶지 않아.”두 사람 사이엔 아마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차미주가 말하기를 원치 않으니 한현진도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그래. 그러면 내일 같이 방 알아보러 다니자.”“응.”대답한 차미주는 또 전에 한성우가 싸웠던 화제를 떠올리고는 나지막이 물었다. “현진아. 너 주강운 씨와는 어떻게 된 거야? 다들 너희 둘이 사귄다고 하는데, 진짜야?”한현진은 고개를 돌려 멀지 않은 곳에서 관리인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주강운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주강운이 고개를 들어 한현진과 눈을 맞추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눈빛이었다. 한현진이 갑자기 두서없이 질문을 내뱉었다. “해리증이 정말 사람을 다치게 할까?”“뭐?”“아무것도 아니야.”한현진이 시선을 거두며 덤덤하게 말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강한서만 돌아오면 돼.”차미주가 한현진의 ‘어떤 대가를 치르든'이라는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한현진이 내일 보자며 뚝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공연장 키스'라는 검색어가 실검에 올랐다. 근거가 없는 추측에 불과하던 전과는 달리 이번에 공개된 영상엔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똑똑하게 찍혀있었다. 한현진은 상대방과 함께 피아노를 쳤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사람이 직접 목걸이 걸어주도록 허락했다. 동영상이 찍힌 각도에서 보면 두 사람은 마치 키스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브랜드 뉴 엔터의 전화는 쉴 틈 없이 울려댔다. 송민준의 휴대폰도 조용할 틈이 없었다. 전부 송씨 가문과 주씨 가문의 결혼 문제에 관해 묻는 전화였다. 심지어 송병천도 참지 못하고 몰래 송민준에게 한현진과 주강운은 대체 어떻게 된 인지 물었다. 송민준도 자기 동생님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길이 없었다. 강한서에게 사고가 난 후 한현진은 줄곧 이상한 짓을 해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송병천에게 대충 둘러댔다. “언론사에서 사진만 보고 아무렇게 쓴 거예요. 걔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
휠체어에 앉은 주진철은 비록 마른 몸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쳐 흘렀다. 그는 찻잔에 떠오른 찻잎을 건져내며 덤덤하게 말했다. “예로부터 정략결혼은 부모들이 중매를 서 맺어진 약속이었어. 애들의 의사를 묻는 경우는 없었지. 병천이 자넨 아이들을 너무 감싸고 돌아.”송병천이 웃으며 말했다. “현진이는 올해 스물여섯이에요. 제가 그 아이와 상봉한 지 이제 겨우 몇 개월이고요. 현진이에겐 갚아야 할 키워준 은혜도 없는데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이의 결혼에 간섭한다면, 제 죽은 아내가 알게 되면 그럴 거면 차라리 집에 데려오지 말라고 할 거예요.”“차라리 현진이가 저의 마음에 안 드는 사윗감을 데려오는 것이 낫지, 결혼 문제 때문에 저와 멀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아요. 주진철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대역부도'한 송병천의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주진철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 자기중심적이었다. 게다가 주씨 가문은 정계에 몸담은 집안이라 주진철은 송씨 가문이나 강씨 가문 같은 집안엔 정중하게 대하는 듯 보이나 사실은 그다지 마음에 차지 않아 했다. 만약 당시 주강운이 치료 때문에 해외에 가 있은 데다 건강상의 이유로 결혼이 늦어지지만 않았다면 그는 절대 주강운이 재벌과 결혼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강운이 주씨 가문에서 정해준 대로 정치에 입문하지 않은 것은 주진철에게는 늘 마음의 걸림돌이었다. 그가 송병천에게 정략결혼 얘기를 꺼낸 것은 한현진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결혼에서부터 시작해 주강운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주진철은 식사를 대접한다는 명분으로 송병천과 약속을 잡았지만 사실은 이 기회를 빌어 두 가문의 정략결혼을 성사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문전박대를 당하게 될 줄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주진철의 입장에선, 주씨 가문에서 이혼 경험이 있는 여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송씨 가문에서는 감
서해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여지는 둬야죠. 방금 들은 소식인데 강씨 가문에서 모든 인양팀을 철수시켰대요. 얼마 안 가 한서가 사고당한 사실을 공개할 거예요.”송병천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렇게 빨리?”“곧 있으면 1달이에요. 집안 전부가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텐데 이젠 장례를 치를 때가 되긴 했어요.”송병천은 애처로운 마음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현진은 강한서가 나타났다는 소식 대신 강씨 가문에서 부고를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강씨 가문은 대외적으로 강한서가 사고를 당한 소식을 공표했고 그의 추모식은 이틀 후로 정해졌다. 한현진은 휴대폰에 뜬 글을 빤히 쳐다보았다. 숨통이 꽉 막히는 느낌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목이 억눌린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모든 글자가 눈앞을 맴돌았지만 아무리 조합해 봐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한현진은 갑자기 화장실로 달려가 세면대를 붙잡고 헛구역질했다. 노파심에 따라온 차미주가 한현진의 등을 토닥이며 걱정된다는 말투로 물었다. “현진아, 왜 그래?”입을 헹군 한현진은 두 손으로 세면대를 짚고 서 있었다. 눈이 시큰거렸다. 한현진은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들어 다시 한번 정인월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통화연결음 후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건 진씨의 목소리였다. “한현진 씨, 무슨 일이에요?”진씨는 선을 긋는 사람처럼 차갑고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얼마 전 기사 때문에 한현진에 대한 친밀감이 사라진 것 같았다. 한현진이 잔뜩 쉰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 강한서 아직 죽지 않았어요. 할머니께 말씀 좀 전해주세요. 장례식 하면 안 돼요.”잠시 말이 없던 진씨가 덤덤하게 얘기했다. “한현진 씨. 그건 강씨 가문의 일이에요. 어떻게 처리하든 큰사모님께서 알아서 하실 겁니다.”한현진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그녀는 주강운을 이용해 스캔들을 터뜨려 기사를 냈을 때부터 이런 결과를 초래할 것이
강한서의 영정사진은 로비에 모셔두었다. 신미정은 검은색 한복을 입고 영정사진 옆에서 강민서와 함께 조문하러 온 손님을 맞이했다. 정인월은 휠체어에 앉아있었고 그녀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사람은 진씨였다. 엄숙한 표정을 한 정인월의 머리카락은 전보다 더 하얘졌다. 조금은 살집이 있던 얼굴엔 최근 많이 핼쑥해져 얼굴의 주름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강한서는 강씨 가문의 장손이었다. 자식도 없이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으니 상복을입을 후손도 없어 장례식장은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도 이루 말로 표현 못 할 비통한 분위기가 풍겼다.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한현진의 눈에는 영정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진은 그녀와 강한서의 웨딩사진을 편집한 것이었다. 다만 채색이었던 사진이 흑백 사진으로 되어 있었다.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던 신미정은 한현진을 보자마자 불같이 화를 냈다.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한현진을 향해 달려가 소리쳤다. “당장 나가. 한서 눈 더럽히지 말고!”정인월은 손에 쥔 염주를 돌리며 냉담한 태도로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현진을 바라보는 정인월의 눈빛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눈빛에 한현진의 마음이 욱신거리며 아파졌다. 한현진과 함께 온 송병천과 송민준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송병천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한서의 마지막 길을 함께 하려 온 겁니다. 말조심하세요.”한현진에 대한 원망이 진작 극에 달한 신미정은 송병천의 말에 냉소 지었다. “한서가 사고를 당한 지 이제 겨우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다른 남자를 만났더군요. 그런 짓을 했으니 저도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불쌍한 우리 아들은 죽을 때까지도 자기가 사랑한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고 유서에 제1상속인으로 지정하기까지 했어요. 대체 저 여자가 무슨 낯짝으로 한서 추모회에 참가하는 거예요?”주강운이 차가운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어머님, 그 발언은 현진 씨의 명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말을 삼가시죠.”신미정이 어이
한현진이 신경 쓰는 것은 유산 재분할이 아니라 강단해 입에서 나온 직계 혈족이라는 말이었다. ‘신미정을 제외하고 강한서에게 직계 혈족이라니?‘강단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한서와 몇 년이나 결혼생활을 했으면서 한서에게 딸이 있는 것도 몰랐던 거야?”한현진은 무의식적으로 그 말을 부정했다. “말도 안 돼요.”강단해가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이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강단해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현우가 상복을 입은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 나왔다. 꼬마 숙녀는 그다지 하얗지는 않은 피부에 조금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두 눈은 큰 편이었고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강현욱에게 이끌려 나오고 있었지만 아이의 눈은 호기심에 가득 차 주위의 낯선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이 한현진에게 다다랐고 아이는 순간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아이는 곧 눈빛을 거두고 잰걸음으로 사람을 지나쳐 영정 사진이 놓은 곳 가운데로 걸어가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신미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할머니.”순간 눈시울을 붉힌 신미정이 허리를 숙여 꼬마 숙녀를 안았다. “착한 우리 아기, 고생했어.”모든 사람이 충격에 휩싸인 채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 모습은 마치 폭탄이 터진 것처럼 현장을 떠들썩하게 했다. 강한서에게 사생아가 있었다니, 너무도 꽁꽁 숨기고 있어 전혀 들은 적도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한성우조차도 충격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미주에게 서로 비밀을 은폐해 준 공범으로 오해받아 또 한 대 얻어맞았다. 오직 강씨 집안 사람들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그 누구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정인월마저도. 강단해가 소리 높여 말했다. “오늘은 한서의 추모회입니다. 그리고 저희의 증손녀를 강씨 가문으로 다시 데리고 온 날이기도 하죠.”한현진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백지장이 되어 버렸다. 그녀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말하며 그녀
뼛속까지 익숙한 그 목소리에 한현진은 바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렸지만 겁이 나 차마 돌아볼 수가 없었다. 돌아본 후 실망할까 봐 두려웠다. “강한서!”차미주가 문 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며 놀란 마음에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강한서의 얼굴이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한현진은 마치 모든 기력이 쭉 빠진 것 같았다.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굳은 몸을 돌렸다. 강한서는 휠체어에 앉아 안으로 들어왔다. 한 달 사이, 강한서는 많이 핼쑥해져 있었다. 머리도 짧게 잘라 이목구비가 더욱 날렵해 보였고 혈색은 오랜 병마에 시달린 사람처럼 창백했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는 사람은, 바로 송가람이었다. 순식간에 분노가 한현진의 온몸을 휩쓸었다. 그녀는 자기 추측이 틀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었다. 강한서가 사고를 당한 뒤의 송가람이 풍기던 이상한 기운은 전혀 한현진의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 송가람이 강한서를 숨기고 있었다. 한현진은 붉어진 눈으로 주강운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는 억울함, 분노와 그리운 감정을 가득 담은 채, 성큼성큼 강한서를 향해 걸어갔다. 강한서의 시선이 한현진에게 머물렀다. 덤덤한 눈빛으로 한현진을 쳐다보더니 곧 시선을 돌렸고 손을 돌려 휠체어의 핸들을 움직여 한현진을 피해 갔다. 멈칫, 한현진은 충격에 빠진 채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강한서는 안으로 들어서서야 영정 사진을 확인했다. 그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아마 오늘 여러분께서 헛걸음하신 것 같네요.”강한서는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정인월을 쳐다보더니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강한서가 정인월을 향해 말했다. “할머니, 저 돌아왔어요.”정인월이 염주를 꽉 움켜쥐었다. 혼탁하던 눈빛이 점점 흐릿해졌고 목소리도 잔뜩 잠겨 말이 아니었다. “돌아왔으면 됐어. 왔으면 됐어.”강민서도 드디어 참지 못하고 강한서에게 뛰어가 그의 품에 파고들더니 하염없이 흐느꼈다. “오빠, 정말 깜짝 놀랐잖아. 왜 이제야 돌아온 거야...”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