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이 송병천, 그리고 송민준과 함께 무대에서 내려와 자리에 앉자, 무대의 불빛이 어두워졌다. 곧이어 관현악기 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갑자기 무대의 조명이 밝게 빛나며 배경도 고전풍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노랫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줄줄이 무대로 올랐다. 노래가 점점 클라이맥스에 다다르며 판소리의 시작을 알렸다. 익숙한 창법에 정인월이 고개를 들었다. 무대에 오른 사람을 확인하더니 정인월이 잔뜩 흥분해 손자를 잡아끌었다. “은영! 은영이 어떻게 이곳에! 너 이 할미한테 은영 씨가 온다는 말 없었잖니.”강한서는 팔을 잡고 있는 정인월의 손을 내려놓으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나이 드실 만큼 드신 분이 덕질하는 애들처럼 흥분하세요.”정인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놈 자식이, 누구더러 나이 먹을 만큼 먹었다는 거냐?”만약 집이었으면 정인월은 강한서의 뺨을 한 대 쳤을 것이다. 정인월은 진짜 가족을 찾은 유현진을 보려고 피로연에 참석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예상치 못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국악가의 무대를 보게 될 줄이야. 정인월은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정인월이 강한서를 나무랐다. “네가 일찍 알려줬더라면 오늘 더 꾸미고 나왔을 텐데.”강한서가 말했다. “은영 선생님께서는 아버지보다도 어리세요. 그러니 할머니 같은 늙은 팬이 뭘 입었는지는 관심도 없으실 거예요.”늙은 팬이라는 말에 정인월은 더 이상 참지 않고 자리에 앉아 강한서를 차버렸다. 그러자 강한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도 얘기 못 해?’은영이 무대에 오르는 건 강한서도 모르는 일이었다. 잠시 생각해 보니 아마도 양시은이 모신 것이라 생각되었다. 무대를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역시나 기쁨과 충격에 사로잡혀 있었다. 은영은 이 바닥에서 인기가 꽤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은영이 더 이상 공연을 하지 않을 거라고 공식 발표했으니 그의 판소리를 듣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은영을 모시는 건 돈의 문
그 어르신은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을 빤히 쳐다보며 한 걸음 한 걸음 유현진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유현진 앞에 선 어르신이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유현진 씨. 저는 오늘 피로연의 메인 셰프인 장우라고 합니다. 오늘 현진 씨와 가족분들을 위해 피로연을 준비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음식이 현진 씨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어요.”유현진이 얼른 일어나 장우와 악수했다. “안녕하세요. 음식은 정말 최고였어요. 수고 많으셨어요.”정우가 미소 지었다. “현진 씨 피로연을 준비할 수 있어서 제가 영광이죠.”그러더니 정우가 손을 들자 제자들이 곧 밀차에서 음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장우가 소개했다. “이건 제가 현진 씨를 위해 준비한 음식이에요. 음식 이름은 고진감래에요. 앞으로 현진 씨 삶이 이 음식의 이름처럼 쓴 고생 뒤엔 달콤한 행복만 가득하길 바라요.”“말도 안 돼. 장우? 장씨 가문의 후계자이자 연속 5년 전국 요리 대회 대상 수상자인 그 장우? 장우를 메인 셰프로 모셨다고?”“누구? 누구라고?”“전에 기사에 났던 사람 말이야. 대통령님께서 X국 수상을 모시고 갔던 그 맛집 대표. 당시 장우 님이 직접 요리를 했는데 그 수상이 귀국하고도 계속 음식이 생각나 한 번은 일부러 장우 님을 모셔갔었잖아.”“어쩐지 오늘 음식이 너무 맛있더라니. 역시 셰프 솜씨였어.”“그냥 셰프가 아니라 전국 요리 대회 대상 수상자. 대통령마저도 그리워하는 손맛.”“은영 선생님에 요리 대회 대상이라니. 대체 누가 송씨 가문에서 유현진의 지위가 낮아서 이런 작은 호텔에서 피로연을 한다고 한 거야? 장우 셰프를 모시는 돈만 해도 신라호텔에서 3날이나 묵을 수 있는 가격이라고.”양시은은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역시 어젯밤 새벽까지 동분서주하고 아침 일찍 연락을 돌린 보람이 있었다. 피로연을 그랜드호텔로 정한 터라 장소는 바꿀 수 없었다. 그러니 작은 장소에서 호화로운 피로연을 준비하려면 당연히 다른 곳에 더 투자
이도휘는 한성우에게 밉보일 위험을 감수하고 한성우와의 약속을 펑크내고 송가람과 계약을 맺었다. 그는 이 기회로 송가람을 업고 송씨 가문과 한배에 올라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이 거절한 그 사람이 사실은 송씨 가문 친딸이라니.이도휘와 한성우가 알고 지낸 지 이젠 6, 7년이 되어갔다. 그가 처음 한성우를 알게 되었을 때,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 그의 인기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바이브 엔터도 이제 막 업계에서 두각을 드러낼 때였다. 바이브 엔터의 연예인 스타일링을 몇 번 맡으며 한성우는 이도휘가 실력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스케줄이 잡히기만 하면 이도휘에게 연락했다. 당시 인기가 없었던 그는 일이 잡히기만 하면 얼마를 주든 무조건 달려갔다. 나중에 몇몇 연예인의 스타일링이 대박 나면서 이도휘도 점차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연예인의 스타일리스트는 이름을 알리기 전과 후의 수입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유명해진 이도휘는 탑 클라스의 연예인이 먼저 그에게 스타일링을 부탁했고 몸값은 원래보다 몇 배 뛰었다. 몸값은 점점 올라가고 사람들은 이도휘를 실장님, 실장님 부르며 극진하게 대했다. 몸값도 이젠 부르는 게 값이 되었다. 바이브 엔터의 연예인을 제외하고 이도휘는 누구에게 메이크업해 주든 돈을 원하는 만큼 쓸어모았다. 이도휘의 몸값이 껑충 뛴 후에도 한성우가 그에게 지급한 계약금은 다른 회사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특히 매번 계약금은커녕 구두계약 하기 일쑤였다. 그는 연예계에서의 한성우의 입지를 생각해 감히 밉보일 수는 없었다. 그러자 한성우는 이도휘를 자신의 직원처럼 부려 먹었다. 진작 바이브 엔터의 스타일링은 맡고 싶지 않았던 이도휘는 송가람이 그에게 스타일링을 부탁했을 때 그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한주 송씨 가문의 딸이자 브랜드 뉴 엔터 대표의 동생인 송가람의 눈에만 든다면, 송씨 가문이라는 동아줄을 꽉 움켜줄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그는 한성우에게 밉보이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앞으로 그는 더 높은 사람들과
자신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안 이도휘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는 햐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여 쉰 목소리를 내뱉었다. “한 대표님... 대표님께서 현진 씨 스타일링을 맡기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셔서요.”유현진이 여전히 미소를 유지했다. “누구든, 최소한 이미 약속한 일은 지켜야 하는 거 아니에요? 혹시 한 대표가 말한 계약금이 언니가 부른 것보다 적어서 변덕을 부리신 건가요? 실장님은 한 대표와 친분이 있으시니, 실장님이 얘기하시면, 돈은 절대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텐데요.”몸이 얼어붙은 이도휘는 창백해진 얼굴로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송가람이 입술을 짓이겼다. “이번 일은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한 대표님이 계약금을 지불하지 않았으니 실장님도 그저 하는 말인 줄 알았을 거예요.”유현진의 시선이 송가람에게 향했고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대표가 계약금을 지불하지 않은 사실도 알고 있네요...”그 말은 마치 번개처럼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러네, 송가람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는 거야?”“대박, 설마 일부러 유현진 씨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가로챈 거야?”“제가 오늘 아침에 들은 소식이 있는데, 다들 들었어요?”“뭔데요?”“채팅방에서 떠도는 소문인데, 어제 새벽에 한성우 씨가 여기저기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알아보고 다녔대요. 이도휘 실장 정도면 미리 예약해야 할 텐데, 갑자기 변덕을 부렸으니 당연히 난리도 아니었겠죠.”“예약해야 하는 거라면, 이도휘가 못 갈 거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으면서 미리 한 대표님께 언질도 없이 갑자기 통보했다는 거예요? 그건 일부러 엿먹이려는 거잖아요.”“게다가 이도휘가 하필이면 송가람 씨 스타일링을 맡았으니 우연치곤 의심스럽긴 하네요.”“송씨 가문에서 친딸을 공개하는 자리인데, 양딸인 주제에 저렇게 화려하게 입고 메이크업 아티스트까지 가로채다니, 고의가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기나 하겠어요?”...주변의 수군거리는 말을 듣는 송가람의 얼굴이 창백해졌
송가람의 얼굴을 벌겋게 물들었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 탓에 이마에는 핏줄이 불뚝 튀어 올랐다. 많은 사람은 이런 상황이 처음인지라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송가람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앞으로 다가가 상태를 확인하려는데, 언제 다가온 것인지 강한서가 유현진 곁으로 다가오며 그녀의 손목을 당겼다. “너무 가까이 가지 마.”강한서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자 유현진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큰 소란에 곧 현장은 떠들썩해졌고 송민준은 빠르게 현장의 사람들을 분산시켰다. 송가람의 모습을 본 서해금도 눈시울을 붉히며 얼른 딸은 품에 안고 당장 약을 가져오라고 했다. 약을 사용했지만 증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서해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송병천은 굳은 얼굴로 서해금을 위로하며 송민준에게 얼른 차를 대기시켜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주변의 수군거림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송가람 씨 방금까지 유현진 씨랑 얘기하고 있었잖아? 왜 갑자기 발병한 거야?”“뭔가 송가람 씨를 자극하는 말을 한 거 아냐?”“송가람 씨가 예약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유현진과의 약속을 펑크내고 송가람 씨를 선택한 것 같던데. 유현진 씨는 송가람 씨가 일부러 그런 거라고 의심하면서 말다툼이 있었던 것 같아.”“말다툼이라니, 내가 옆에서 똑똑히 봤어. 몇 마디 할 새도 없이 송가람이 천식 증상을 보였어.”“그것도 유현진과 연관이 있겠네.”...유현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만약 강한서가 그녀를 잡지 않아 송가람의 상태를 확인했더라면, 그녀는 아마 새로운 죄까지 뒤집어썼을 것이다. 하지만 유현진은 아마 모를 것이다. 사실 강한서도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송가람이 발병한 모습이 조금 무서워 혹시나 유현진이 다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뿐이었다. 차미주는 분노로 이를 악물고 한성우의 귓가에 속삭이며 욕설을 내뱉었다. “자기가 흥분해서 발병한 거잖아. 본인 감정을 본인이 주체하지 못한 건데
한승은 한열이 가지 않자 엄마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아빠, 저도 누나랑 더 있고 싶어요.”한승은 평소에는 말을 잘 듣고 자기 의견을 잘 말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니 한승이 유현진과 있고 싶다고 얘기하자 한준웅은 바로 동의했다. 그러더니 곧 한열에게 말했다. “잊지 말고 승이 데리고 와.”한열은 썩 내키지 않아 옆에 있는 동생을 힐끔 쳐다보더니 어쩔 수 없이 알겠다며 대답했다. 강단해 가족은 조용히 피로연에 참석했다가 또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유현진이 송씨 가문이 친딸이라는 것은 너무 충격적인 사실이라 그들은 지금쯤 아마 강한서와 유현진이 재혼할까 봐 걱정할 것이 분명했다. 송씨 가문의 도움은 강한서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그들이 한성을 차지하는 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정인월과 강민서는 강단해네 가족과 함께 나왔다. 손님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고 연회장엔 사람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계속 구석에 있던 주강운이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주강운의 어머니는 유현진에게 다가가는 아들을 따라나섰다. 하이힐을 신고 하루 종일 서 있은 유현진은 발이 너무 아파 강한서에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하이힐은 정말 벌칙이라니까. 예쁜 것 외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하이힐과 나에 대한 평가가 똑같네.”멈칫하던 유현진이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그건 예전이잖아. 그땐 네가 너무 미워서 나에게 넌 잘생긴 거 빼고는 아무 쓸모도 없었어.”강한서는 유현진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래서 지금 네 마음속에 나에 대한 평가는 좀 나아졌어?”“당연하지. 만약 네가 계속 예전 그대로라면 내가 왜 너랑 화해했겠어?”강한서는 순간 궁금해졌다. “그럼 지금 너한테 난 어떤 사람이야?”유현진이 그의 귓가로 다가가 속삭였다. “잘생기고 그쪽으론 쓸모가 많지.”“...”유현진이 눈을 깜박였다. “평가가 정확한 것 같아?”강한서의 눈빛이 그윽해지
유현진이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주강운의 어머니가 옅은 카키색의 치마를 입고 선물 박스를 든 채 서 있었다. 그녀는 화려한 액세서리를 하는 신미정이나 주시윤과는 달리 수수하지만 우아한 코디를 즐겨 했다. 조금 통통한 몸매였지만 기품만은 그대로였다. 주강운의 어머니에게 대한 유현진의 기억은 여전히 6개월 전 주얼리 전시회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주강운의 어머니는 하얀 피부에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었다. 하지만 오늘 주강운의 어머니를 다시 마주하니 어쩐지 핼쑥해진 것 같아 6개월 전의 혈기 왕성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유현진을 부른 주강운의 어머니는 비록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근심 걱정이 가득 담긴 미간은 여전히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유현진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주강운은 티가 나지 않게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짓이겼다. “왜 따라오셨어요. 전 인사만 하고 가려고요.”주강운의 어머니가 말했다. “나도 현진 씨랑 인사나 좀 나누려고.”미간을 찌푸린 주강운은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강운의 어머니는 유현진을 쳐다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현진 씨. 전에 강운이가 칼에 찍혔을 때 도움을 주셔서 제가 안 그래도 찾아뵙고 직접 인사를 전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강운이가 현진 씨가 불편해할 거라고 자기가 직접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직접 인사를 전하지 않으면 계속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어요.”유현진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사모님, 마음 쓰시지 마세요. 강운 씨는 제 친구이기도 해요. 친구 사이에 그 정도 도움은 당연한 거죠. 게다가 그날 먼저 강운 씨를 위해 나선 건 제가 아니라 제 친구였어요. 그리고 강운 씨도 이미 선물도 줬었고요. 전에 소송 때도 제가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이런 일로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돼요.”주강운의 어머니가 말했다. “저에겐 강운이 하나뿐이라서요. 현진 씨가 강운이를 구한 건 절 구한 거나 마찬가지예
주강운의 어머니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키면서 아들과 간다는 말을 남기곤 자리를 떠나버렸다.그녀가 가자 유현진은 그제야 강한서에게 말했다.“강운 씨 어머님은 이상한 분이신 것 같아. 고마우면 고마운 거지 막내아들 물건을 나한테 주는 건 무슨 의미야? 설마 아주 오래전 뭐 은혜를 보답하는 증표 같은 거야? 이거 들고 가면 뭐든 들어준다, 그런 건가?”“...”강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처음부터 주강운의 어머니가 하는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무언가 알 것 같기도 했다.주강운의 어머니는 아마도 주강운이 유현진을 향한 마음이 다른 것을 눈치채고 주강운과 떨어지라는 의미로 물건을 준 것이다.유현진은 딸처럼 여기든, 아니면 좋은 뜻으로 물건을 준 것이든 그녀의 목적은 아주 분명했다. 바로 주강운과 유현진을 남매처럼 여겨 두 사람 사이의 가능성을 없애버린 것이다.유현진은 강한서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묻잖아. 무슨 생각하는 거야?”정신이 든 강한서가 담담하게 답했다.“내가 강운이 어머님 뜻을 어떻게 알겠어. 뭐 어쩌면 네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주신 거겠지.”그는 주강운 대신 주강운의 마음을 유현진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유현진은 그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입도 참 번지르르하네!'주강운의 안색은 돌아오는 길 내내 어두웠다. 차에서 내린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제 감정은 제가 알아서 잘 억제하고 있어요. 어머니께선 나서실 필요 없어요.”주강운의 어머니는 입술을 틀어 물다가 한참 후에야 대꾸했다.“난 보인단다. 현진이는 한서한테 마음이 있어.”주강운은 입꼬리를 올리며 빈정댔다.“저라고 모를 줄 알았어요?”“그럼 왜 포기하지 않은 건데!”주강운의 어머니는 다소 흥분하게 되었다.그녀가 며칠 전 아들의 서재를 청소해 주다가 하얀 백지에 전부 유현진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주강운은 눈을 지그시 감더니 입술을 뗐다.“그냥 나 혼자 좋아하고 있으면 안 돼요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