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돌리자 한껏 멋을 부린 한 남자가 송가람의 옆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바로 송가람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이도휘였다.송가람이 손을 뻗어 귀걸이를 만지려는데 이도휘가 그녀를 말렸다.“내가 할게요.”그는 송가람의 귀걸이를 정리해 주고는 그녀의 귀밑머리도 정리해 줬다.“바로 옆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날 불러요.”그의 말에 송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도휘가 자리를 뜬 후 사람들이 다시 수군대기 시작했다.“저 사람 이도휘 씨 맞죠? 업계 최고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어쩐지 오늘 송가람 씨의 메이크업이 달라 보인다고 했어요. 이도휘 씨의 솜씨였군요. 역시 최고의 아티스트는 솜씨가 다르네요.” “이도휘 씨 예약 잡기 엄청 힘들다고 하던데. 전에 친구가 생일 때 메이크업 예약하려고 한 것도 결국은 실패했어요.”“가람 씨 오늘 메이크업 정말 예뻐요. 이따가 송씨 가문의 친딸이 가람 씨 옆에 서면 가람 씨의 미모에 묻히고 말겠는데요.”“송가람 씨가 이렇게 유명한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모셨으니 그분도 이도휘 씨 못지않은 사람으로 모셨겠죠.”“이도휘 씨는 업계에서 최고예요. 이도휘 씨보다 더 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없을 거라고요.”이때, 송가람이 입을 열었다.“파티 메이크업일 뿐이에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건 송씨 가문의 피로연이었다. 친딸이 찾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만약 송가람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보다 못하면 이건 정말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 이런 수준 이하의 호텔을 정한 것도 모자라 업계 최고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초대하지 못한다면 기른 정이 낳은 정보다 더 깊다는 걸 말해주는 꼴이 아니겠나? 아무리 친딸이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송가람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옆에서 몰래 듣고 있던 차미주는 핸드폰을 꺼내 녹음된 오디오를 유현진에게 보내줬다. 그러고는 이내 일부러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여기 지금 엄청 시끄럽고 난리니까 오지 마.”그녀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문자를 확인한 차미주는 아무 말이 없었다.‘이 빌어먹을 자신감은...’한편, 송병천은 환한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현장에 와서 축하를 전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돈봉투라도 쥐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내가 죽은 후, 20여 년 동안 오늘이 그에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걸어오다가 갑자기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남자가 강한서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흠칫하던 송병천은 급히 다가가 말을 걸었다.“제임스 씨?”그의 말에 그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오뚝한 콧날, 깊은 눈매를 가진 그 남자는 송병천을 발견하고는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영어로 그와 인사를 나누었고 송병천에게 악수하였다. 제임스는 얼마 전 그와 사업 얘기가 오고갔던 북미 쪽의 한 고객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과 사업을 할 생각이 없었던 제임스였기 때문에 그 사업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제임스는 기획안을 보는 것조차 거부했고 그들과 대화를 나눌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얼마 전, 송민준이 외국에 자주 간 것도 이 일 때문이었다. 도중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은 상대방을 설득하지 못하였다.그는 제임스가 최근 여자친구와 이곳에서 여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초대장을 보냈다. 사실 제임스가 참석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다만 사업 파트너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주 만나다 보면 친구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송씨 가문에서 친딸을 찾게 된 일에 대해 송병천은 온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러니 제임스한테까지 그 얘기를 한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상대방이 정말로 초대에 응할 줄은 몰랐다. 이곳에 온 손님이니 송병천은 당연히 환영이다. 제임스는 강한서에게서 딸아이의 얘기를 들었다고 하면서 자신도 하마터면 아이를 잃을 뻔한 적이 있어 송병천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고 말했다.송병천은 조금 의외였다. 한편, 강한서는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신미정의 자리는 뒤쪽에 있어서 한참을 비집고 나와야만 송민준이 데리고 나온 여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여인의 실루엣이 왠지 낯익다는 생각이 들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여인이 고개를 들자 깜짝 놀란 신미정은 소리를 질렀다.“유현진?”쥐 죽은 고요하던 장내에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 퍼졌다. 흠칫하던 유현진이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 한편, 유현진의 담담한 눈빛을 마주한 신미정은 그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떻게 유현진이야? 이게 무슨 일이냐고?’강한서와 유현진을 갈라놓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건만 결국 아들을 위해 찾은 송씨 가문의 친딸이 바로 자신이 쫓아낸 전 며느리였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신미정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강민서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신미정을 부축하며 입을 열었다.“엄마, 괜찮아요?”신미정은 예전에 유현진에 대한 자신의 온갖 악행과 송씨 가문의 친딸에게 아부했던 일들이 떠올라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송씨 가문에서 만약 자신이 유현진에게 약을 먹었다는 걸 알게 되면 어찌 나올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엄마?”옆에 있던 강민서가 또다시 그녀를 불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신미정은 급히 입을 열었다.“나 좀 피곤해서 그러는데. 먼저 갈게.”말을 마친 그녀는 강민서가 뭐라 하기도 전에 황급히 자리를 떴다. 멀지 않는 곳에서 신미정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전 여사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런 자리만 아니었다면 다가가서 한껏 조롱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한편, 송민준은 유현진의 손을 잡고 무대 위에 서 있었고 송병천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자신의 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제 딸입니다. 많은 분께서 이 아이를 알고 있거나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 아이에게 어떤 신분이 있든지 오늘 이 자리에서 이 아이는 단지 이 송병천의 딸일 뿐입니다.”“하현
유현진은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울고불고하며 20여 년간의 서러움을 토해내지도, 송씨 가문으로 돌아와 신분 상승을 이룬 것에 대한 흥분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심경의 변화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동안 조심스럽게 다가와 준 가족의 사랑과 관심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화려한 언변이나 감동적인 서사는 어니었지만 유현진의 말에는 가족과 친구를 향한 고마움이 가득했다. 한태진과 공영선은 눈시울을 붉혔다. 비록 하현주가 유현진을 잘 가르쳤지만 20여 년을 생이별했으니, 마음이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서해금은 위에서 말을 이어가는 유현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콧등에 점 하나만 더 있었다면, 정말 똑같겠어...’“엄마, 올라가서 사진 찍어야지.”송가람의 목소리에 서해금이 생각을 멈췄다. 서해금이 정신을 차리니 이미 유현진이 말을 마친 뒤였다. 한태진과 고영선 그리고 한중웅은 이미 무대에 올라 사진을 찍고 있었다.입술을 앙다물던 서해금이 말했다. “가자.”공영선이 입을 열었다. “현진이가 내 옆에 서고 당신은 열이와 민준이 중에서 하나 골라요.”한태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현진이가 내 옆에 서야지. 그 두 놈은 키가 너무 커서 내 옆에 서면 숨쉬기가 벅차다고.”송민준과 한열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편애가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두 어르신이 고집을 꺾지 않자 송민준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몇 장 더 찍으면 되잖아요? 카메라 필름이라도 아끼시려고 그러시는 거예요?”한태진과 공영선이 송민준을 노려보았다. “네 놈이 뭘 알아. 가족사진은 한 장만 걸어야 하잖니.”두 버전으로 사진을 찍었다간 어느 사진을 가족으로 걸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언쟁을 벌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애초부터 유현진을 쟁취해야 했다. 한참을 투덕거리던 두 분은 결국 유현진을 가운데 세우고 손자와 외손자를 두분 양쪽에 세웠다. 유현진은 순간 자신이 이 집안
‘그럼 지난번 돈 봉투는? 에피타이저 같은 건가?’유현진이 막 거절하려는데 송민준이 말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마음이니까, 받아.”그 말에 유현진은 거절할 수 없어 선물을 받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마워요.”한준웅도 다가와 선물 박스를 건넸다. “현진아, 이건 나와 외숙모가 준비한 선물이야. 네가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곧 가족들 전부 하나둘 유현진에게 선물을 건넸다. 심지어 12살인 한열의 동생이자 유현진의 사촌 동생인 한승도 선물을 준비했다. 무대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유현진은 이미 가족들의 “마음”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송민준이 그녀 대신 선물을 들어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내가 먼저 가지고 있을게. 피로연이 끝나면 네가 선물 리스트를 확인해야지.”유현진이 움찔하더니 물었다. “무슨 선물 리스트요?”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 “넌 이 피로연에 사람들이 그저 구경이나 하려고 온 줄 알아?”송병천은 상권에서는 꽤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성격이 시원시원했고 발이 넓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줬다. 해외로 갔을 때도 그는 국내의 경조사를 전부 챙길 정도였다. 참석하지는 못해도 축의금이나 조의금은 늘 전해주었다. 송병천이 그렇게 많은 축의금을 냈지만 송씨 가문에서는 어떤 연회도 연 적이 없었으니 사람들은 이번 피로연을 통해 송병천에게서 받은 마음을 돌려주려고 할 것이었다. 유현진은 현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만약 이 사람들 전부 선물을 준비했다면 그게 다 얼마야...’“좋으면 좋다고 해.”귓가에 송민준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티가 났나?’송민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강한서가 널 옆에 둘 수 있는 이유겠지.”입술을 짓이기던 유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 이유만은 아니에요. 전 얼굴도 보거든요.”“...”선물을 정리한 뒤 송민준은 유현진을 데리고 자리에 앉았다. 이때, 송병천은 제임스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민준과 유현진을 본 그가 그들에게 오라고
제임스는 유현진을 훑어보았다.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한국어로 자신과 대화를 나누려는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제임스는 유현진이 꽤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현진 씨 말에도 일리가 있네요.”그러더니 제임스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제게 한국어를 하라고 하는 건, 현진 씨가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인가요?”사람들이 하나둘 유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영어를 잘 못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임스가 많은 말을 한 뒤에 유현진은 그에게 한국어를 할 수 있는지 물었고 또 한국어를 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러니 어쩐지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특히 그녀의 옆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송가람과 비교되니 사람들은 생각했다. ‘친딸이면 뭐 또 어쩔 거야. 오랫동안 밖에서 자랐으니 교양뿐만 아니라 교육도 보는 눈도 딸리는 거겠지.’송병천이 딸을 위해 변명이라도 하려는데, 유현진이 당당하게 인정했다. “영어가 유창하지 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말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어요.”영어는 당연히 영어가 익숙한 환경에서 연습해야 빨리 느는 법이었다. 하지만 유현진은 토픽 시험을 마친 뒤로는 영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강한서가 있었다. 강한서는 평소 해외 고객들과 전부 영어로 통화했고 유현진도 많이 듣다 보니 듣기능력은 제법 제고되었다. 다만 회화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일상적인 대화는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긴 문장을 구사하려면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임스 이 사람은... 어제 강한서가 유현진에게 팁을 알려주었다. 제임스는 직설적인 화법을 좋아했다. 어차피 상대방이 질문을 던졌으니, 굳이 핑계를 댈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그런 일은 결국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었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다 들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창피한 일이었다. 유현진의 말이 끝나자 서해금이 얼른 설명했다. “현진이는 어렸을 때 저희가 곁에 없어서 가람이처럼 해외 유학을 다녀오지 못했거든요. 국내 교육으론 한
제임스는 따지려 파트너를 찾아갔지만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어떻게 해도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2년간 집에서 피폐한 시간을 보냈다. 아내도 그와 이혼 후 딸을 데리고 그를 떠났다. 하지만 그 파트너는 두 사람의 성과로 새 회사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다. 동창 모임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파트너는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제임스를 비웃으며 그의 모든 노력과 공헌을 부인했다. 그는 초라한 제임스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일은 제임스의 투지를 자극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너무 힘든 과정을 겪었지만, 파트너에게 배신당한 과거를 떠올리며 그는 자신을 다그쳤다. 지금의 여자친구는 바로 두 번재 창업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그녀는 제임스와 함께 그의 제일 어두웠던 시간을 함께 견뎌냈고 그에게 많은 격려와 도움을 줬다. 하지만 파트너에게 배신당한 일로 그는 여전히 한국인을 믿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여자친구와 9년째 연애 중이었지만 결혼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파트너가 결과물 갈취해 새로운 회사로 간 것을 원망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아프게 건 몇 년간의 우정이 처참히 부서졌다는 것이었다. 파트너는 제임스를 발판 삼아 성공한 뒤 그를 친구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 오히려 그를 깎아내렸다. 이익 앞에서, 그들의 우정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했던가, 그는 사업이 성공한 뒤에도 유독 한국인과의 사업을 추진하기를 꺼렸다. 그의 여자친구는 한국인이었고, 심지어 그 바닥에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마침 송민준과 아는 사이였고, 송민준을 제임스에게 소개해준 것이었다. 제임스는 송병천 부자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 한편에 남아있는 경계심은 여전히 그들과의 사업 추진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에게 한국인은 허위적이고 교활하며 인정사정 봐주지 않으며 배
송병천이 제임스의 말에 멈칫했다. 물론 그도 지금의 장소가 마음에 내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입을 달싹였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때 서해금이 입을 열었다. “제임스는 모르시겠지만, 이 호텔은 현진이 뜻대로 고른 거예요. 친딸을 공개하는 피로연인 만큼, 저희도 당연히 성대하고 열어 현진이를 모든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었죠. 하지만 아무래도 주인공은 현진이잖아요.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현진이의 의견을 물었고, 여긴 현진이가 직접 고른 호텔이에요. 아무래도 밖에서 자랐으니 현진이에겐 5성급이면 제일 좋은 호텔이었나 봐요. 그리고 이 호텔도 너무 나쁜 건 아니었고, 또 애가 좋아하니까, 현진이 뜻에 따랐죠.”휴지를 꺼내던 송민준의 손이 멈칫 허공에 굳어버렸다. 그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처졌다. 유현진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말솜씨 하나는 정말 빼어나네.’호텔을 고르라고 했을 때부터 이 순간을 기다린 것일지도 몰랐다. 현진이에게 5성급이면 제일 좋은 호텔이었나봐요 라니, 결국 유현진은 시야가 좁고 세상 물정을 몰라 뭐가 좋고 나쁜지도 구분 못 한다는 뜻이었다. 옆 테이블에선 이미 귀를 쫑긋 세우고 이쪽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서해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이곳으로 선택했다 했어. 유현진이 직접 고른 거라잖아. 설마 한주에서 어느 호텔이 제일 좋은지도 모르는 거 아냐? 5성급이면 다 좋은 줄 아나 봐?”“지난번 송가람이 생일 파티를 했던 온천리조트도 여기보다 나아.”“아무래도 유씨 집안 같은 졸부집에서 자랐으니, 식견이 짧은 것도 어쩔 수 없지, 뭐.”“아무리 그래도 강씨 집안 며느리로 3년을 있었잖아. 그 정도 분별력도 없다고?”“백조를 오리로 키우면, 그건 백조일까 오리일까?”더 이상 들어줄 수 없었던 고여정이 차갑게 말했다. “모르죠. 하지만 제아무리 오리를 백조처럼 기른다 한들, 결국은 날지도 못하는 오리일 뿐이잖아요. 아무래도 유전자는 못 속이니까.”그녀의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
법적 장모님이라는 여섯 글자에 멍한 표정을 짓던 강한서가 물었다. [서해금 대표 말하는 거야?][네. 그 분, 현진 누나 새엄마잖아요. 그럼 형님에겐 법적 장모님 아녜요?]강한서: ...‘맞긴 하네.’[난 오성빈 교수님과는 전혀 모르는 사이야.]멈칫하던 강한서가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강한서의 말에 기분이 축 처진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학교에서 제 재시험 성적을 취소하더니 재수강하래요.]강한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학교에서는 네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거야?][명백하게 얘기한 건 아닌데 사실은 그런 셈이죠. 하지만 다른 처분은 없이 그냥 재수강만 하래요. 친한 친구에게 들은 건데 학교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었데요. 홈페이지에도 전부 부정행위 진상 규명을 바라는 댓글로 도배됐다고 하더라고요.][아마도 학교의 이미지 회복을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적당한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고 대중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던 조치를 취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강한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그럼 교수님에게는 무슨 일로 연락을 하려는 거야?][조교님께서 이번 일은 오 교수님 담당이라고 하셔서요. 비록 재수강으로 결론이 났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엄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오 교수님을 한 번 만나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아는 분께 부탁해 오 교수님과의 자리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연락이 닿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침 형님 법적 장모님께서 제 병문안을 오셨다가 그 얘기를 들으시더니 오 교수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아 엄마는 만약 가능하다면 그분께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세요.]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지적인 얼굴을 하고 계서서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딸인 현진 누나에게도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 같던데 전 그런 사람이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방금 형님과 얘기를 하면서 혹시 형님도
홍혜림이 서해금에게 얘기를 꺼내려던 그때, 진윤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잠깐 실례할게요.”홍혜림이 곧바로 하려던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부축해줄게.”“네.”진윤이 대답했다. 진윤을 부축하며 병실을 나서는 홍혜림을 쳐다보던 서해금이 고개를 돌려 성월에게 물었다. “아무 문제없이 잘 해결했죠?”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어요.”멈칫하던 성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정말 사모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러 오실까요?”서해금이 덤덤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부탁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면 분명 부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홍혜림은 지금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에요. 그러니 저를 통해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아무리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어요.”“조향 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OM향 협회의 투표로 승패가 결정돼요. 홍혜림은 OM향 협회의 오래된 회원이에요. 게다가 이번 조향 대회 열 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고요.”“홍혜림은 누구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큰 도움을 준다면 어떻게든 그 빚을 갚으려고 할 거예요. 전 준비가 안 된 싸움은 시작하지 않아요.”피식 웃음을 흘린 서해금의 눈빛이 멸시로 가득했다. “전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어요.”성월은 이토록 치밀한 서해금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성빈의 친척과 친분이 있다는 얘기를 꺼내는 서해금의 모습에 성월은 그녀가 단지 빼앗긴 고객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던지는 미끼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해금이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에 빚을 진 홍혜림이 조향대회에서 관건적인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었다. 서해금이 이렇게까지 서포트 해주고 있으니 송가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순간 뭔가를 떠올린 성월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물었다. “대표님, 인터넷에서 진윤 씨에 관한 여론이 들끓고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가면 걔들은 거짓말을 들킨 네가 양심에 찔려서 해외로 도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진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걔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출국하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할 텐데.”“그럼 너 평생 해외에만 있을 거야? 안 돌아올래?”입술을 달싹인 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도, 가족도 전부 한주에 있으니 지금 당장 해외에 나간다고 해도 결국 돌아와야만 했다. 홍혜림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아, 사람의 명성이라는 게 한 번 나빠지면 다시 좋아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야. 해외로 도망쳐 이번 일을 지나보낸다고 해도 졸업하면 결국 여기 동기들과 다시 마주해야 한 텐데, 걔들이 널 보고도 옛날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 같아?”“다들 널 안 좋게 보고 있는 지금, 네가 끝까지 네 결백을 증명해야 나중에 걔들이 다시 이 얘기를 꺼내도 억울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어?”“결백을 뭐로 증명해요? CCTV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전 당당하다는 걸 아무도 증언해줄 사람이 없어요. 절 믿는 사람도 없다고요.”진윤이 잠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저 어떡해요?”홍혜림은 미어지는 가슴을 붙잡고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아무도 널 안 믿어도 엄마는 널 믿어. 네 아빠, 형 그리고 네 형수님도 널 믿어. 그러니까 아들, 괜찮아. 엄마가 있는 한 아무도 우리 아들 못 건드려. 엄마가 꼭 네가 정정당당하게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게 할게.”홍혜림이 말에 진윤이 대답하려던 그때,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진윤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며 감정을 추슬렀다. 홍혜림 역시 심호흡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보이는 의외의 인물에 홍혜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서해금이었다.서해금은 성월과 함께 진윤의 병실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손에 선물을 잔뜩 들고 서 있었다. 병실 문이 열리자 서해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