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을 하려면 그렇게 크거나 실한 것으로 고르지 않아도 돼요.”주강운은 붕어를 살펴보더니 그중에서 눈이 조금 들어간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눈이 불룩하지 않거나 혼탁한 것은 신선하지 않은 거예요. 고르지 마요. 색깔이 어두운 것도 안 돼요. 하얀 걸로 골라요. 너무 크지 않고 비늘이 완전한 걸로요.”그는 말하더니 손바닥 크기만 하고 몸뚱이가 납작한 붕어를 가리켰다. “이걸로 해요. 탕을 하기엔 딱 좋을 거예요.”유현진은 얼른 사장님을 불러왔다. 물고기를 건져 올린 사장님이 칭찬했다. “젊은 사람이 보는 눈이 있네.”무게를 재고 고기 손질까지 한 번에 이루어졌다. 가격은 총 9000원이었다. 유현진은 물고기를 봉투에 넣고 고개를 들어 주강운에게 물었다. “강운 씨는 안 사요?”주강운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생선 안 먹어요.”유현진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생선에 대해 잘 아시기에, 전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주강운이 말했다. “전 낚시를 좋아해요. 하지만 먹지는 않죠.”유현진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왜 안 드세요, 생선 식감이 싫은 거예요?”주강운은 몇초간 침묵하더니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어렸을 때 숙제도 안 하고 성우랑 강에서 잡다가 가족한테 들켰거든요. 노느라 정신이 팔려 학업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제가 잡아 온 물고기를 직접 죽이라고 했었어요. 아마 그 장면이 충격이 컸던지 그 뒤로 생선이 넘어가질 않더라고요. 어쩐지 죄짓는 기분이라.”유현진: ...그녀의 멍청한 입은 늘 주강운의 아픈 곳을 쿡쿡 찔렀다. 유현진도 어렸을 때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렸었다. 하지만 하현주가 그녀에게 주는 제일 큰 벌은 고작 손을 몇 대 때리거나 저녁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떤 보호자가 노는 것을 탐해서는 안 된다며 직접 잡아 온 물고기를 죽이라고 강요할까. ‘그게 무슨 변태적인 교육이지?’“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요.”유현진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그를 위로했다. “아이가 노는
유현진은 바로 말을 바꿨다. “그럼 장은 다 보셨어요?”주강운은 한번 쓱 확인하더니 말했다. “컵만 사면 돼요.”잠시 말을 멈추던 그가 유현진에게 말했다. “바빠요? 안 바쁘면 절 도와서 좀 골라주세요. 전 그런 건 잘 고를 줄 몰라서요.”유현진은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시간이 있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말했다. “좋아요. 저도 마침 필요했는데, 같이 고르면 되겠어요.”주강운이 지나가듯 물었다. “차미주 씨랑 같이 쓰시게요?”유현진이 멈칫하더니 마른 웃음을 지었다. “네.”그녀는 사실 강한서의 새집에 살 컵을 고를 생각이었다. 비록 인테리어는 끝났지만, 별장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식기와 세면용품은 전부 민경하가 가져온 일회용이었다. 강한서는 그와 유현진이 모두 시간이 될 때 함께 고르고 재혼하면 여기로 신혼집을 옮기자고 했다. 왜냐면 정인월이 이곳 풍수지리가 좋아 행복한 결혼생활은 물론 아이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강한서와 같은 무신론자와 요즘 왜 이렇게 신학적인 것을 보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함께 쇼핑을 한다는 것은 꽤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컵은 그녀가 골라야 했다. 강한서는 못생기고 사무적인 컵을 고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유현진은 물건을 차에 실어놓고 주강운의 차로 함께 근처의 백화점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주강운은 틈틈이 유현진의 근황을 물었다. 요즘 송민영이 계단에 굴러떨어진 사건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특히 송민영의 인터뷰가 나온 뒤로, 인터넷에서는 또 그녀에게 나와 사과를 하라며 유현진을 외쳐댔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도록 유현진이 아무런 소식이 없자, 조금 걱정이 되었다. 주강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홍보 일을 하는 친구가 있는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요.”멈칫하던 유현진은 그가 요즘의 여론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뇨,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어떻게
유현진과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바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유현진이 의아해하는 사이, 옆에서 주강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컵을 사고 싶어요? 텀블러 아니면 그냥 물컵?”정신을 차린 유현진이 대답했다. “평소에 사용할 물컵이요.”그러더니 그녀가 물었다. “강운 씨는요?”주강운이 대답했다. “손님들이 쓰실 찻잔이요.”“집에 그런 잔이 없어요?”유현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주강운의 말대로라면, 매년 명절 때마다 가족 모임을 하는데, 어떻게 그런 잔이 없을 수 있을까? 주강운이 말했다. “얼마 전에 다기를 놓았던 찬장이 넘어져서, 안에 있던 물건이 전부 깨졌는데 계속 새로 사지 않았었거든요.”유현진은 “아~”하고 짧게 대꾸하고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다기를 두는 찬장이면 꽤 클 텐데, 어떻게 갑자기 쓰러져서 망가질 수가 있지? 설마 집에서 누구랑 싸우다가 망가진 건가?’엘리베이터는 곧 4층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서 쏟아져 나왔고, 주강운은 그녀를 데리고 곧장 다기 전문 매장으로 향했다. 예쁜 컵은 많았지만 전부 수입 브랜드라 가격이 꽤 나갔다. 유현진은 매장을 한 번 슥 훑었고 유리컵 한 세트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컵을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컵은 꽤 두꺼웠고, 유리도 방폭 재질인데다 조금 그러데이션이 되어있어 깔끔하고 예쁜 디자인이었다. “예쁘네요.”주강운이 다가오며 말했다. “이걸로 하실래요?”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하죠. 많이 보면 더 못 골라요.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게 항상 마음에 들더라고요.”주강운이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말했다. “이것들을 포장하고 같이 계산해 주세요.”당황한 유현진이 얼른 그를 말렸다. “아뇨, 아뇨, 아뇨. 따로 계산해 주세요.”주강운이 웃으며 말했다. “얼마 하지도 않아요. 제가 낼게요.”유헌진이 손을 저었다. “강운 씨한테는 얼마 안 하겠지만, 저한테 몇만 원은 절대 싸지 않아요. 계속 제가 빚지게 만들지 말아요. 그러면
유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불쾌한 심정을 드러내며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입술을 앙다물고 모래를 더 아래로 꾹 눌러썼다. 유현진은 문득 방금까지 자신을 몰래 찍고 있던 여자가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자기 옆에 서 있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 여자는 아마도 유현진이 마스크를 내렸을 때 알아본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강운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지만 주강운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주강운에게 카톡을 보냈다. 「절 알아본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컵은 다음에 사요. 저 지금 내려가서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겠어요. 기다리지 마세요.」문자를 남기고 유현진은 컵을 직원에게 건네며 나지막이 말했다. “죄송해요. 다음에 살게요.”그러더니 그녀는 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다. 그녀를 찍고 있던 여자는 유현진이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얼른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 여자는 유현진을 잡고 말했다. “유현진 씨죠? 맞죠?”유현진은 잡힌 손목을 빼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잘못 봤을 리가 없어요. 유현진 씨 맞아요!”여자는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며 유현진의 마스크를 내리려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유현진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여자의 휴대폰은 심지어 유현진의 턱에 부딪혔다. 턱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유현진은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의 손을 밀어냈다. 그 결과 여자의 휴대폰을 쳐내게 되었고 휴대폰은 손에서 미끄러져 “탁”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사람들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는 얼른 허리를 숙여 휴대폰을 주었다. 입술을 달싹이던 유현진이 막 입을 열려는데, 다른 여자가 씩씩거리며 다가와 유현진을 밀어냈다. “뭐 하는 거예요? 때리기라도 하려고요?”비틀거리던 유현진이 중심을 잡고 바로 섰다. 그녀는 여자의 휴대폰이 깨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
휴대폰을 떨어뜨린 여자가 친구를 붙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됐어. 내 휴대폰 망가지지도 않았어.”그 친구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유현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전화가 연결된 그 순간, 그녀는 갑자기 달려들어 유현진의 마스크를 벗겨버렸다! “유재수! 정말 너네!”그러더니 그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기 보세요! 대스타 유현진이 백화점에서 제 친구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사과하기를 거부했어요. 저희를 협박하기도 했고요! 연예인이면 이렇게 마음대로 사람을 협박해도 되는 거예요?”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 백화점에서 소리를 지르니 매점 밖에 있던 사람까지도 모여들었다. “대스타”라는 세글자는 꽤 이목을 끌었다. 얼마 후, 매점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유현진은 입술을 짓이겼다. 통화가 연결된 휴대폰은 여자에 의해 바닥에 떨어졌다. “왜요, 또 어디 도움이라도 구해 보시게요?”그러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여기 좀 보세요. 요즘 인터넷에서 시끄럽던, 송민영을 밀어뜨린 대스타 유현진 씨예요. 사고가 있고 사고하기를 거부하는 인간이요. 어떤 사람은 유현진 씨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하시는데, 대체 어디가 억울하다는 거죠? 그 여자는 현실에서 다른 사람의 휴대폰을 떨어뜨리고도 사과는커녕 저와 제 친구를 협박하는 사람이라고요. 이런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연예인을 해요?”그녀는 말하며 유현진의 마스크와 모자를 잡아당기며 그녀의 얼굴이 사람들에게 노출되게 만들려고 했다. 유현진은 얼굴이 긁히는 것은 방지하기 위해 밀치는 와중에 뒤로 물러나며 휴대폰을 떨어뜨린 여자와 부딪혔다. 그 여자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를 밀어붙이던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연예인이 사람 때리네! 연예인이 사람을 때려!”그 여자는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친구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자 바닥에 쓰러진 여자는 일어나지 못하는 척했다. 현장에는 젊은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게다가 송민영의 팬층은 대부분 나이가
유현진이 밀쳐버린 그 소녀는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만약 유현진이 그녀를 밀쳐내지 않았더라면 유리컵에 다친 사람은 바로 그녀였을 것이다.“현진 씨!”사람들 속에서 주강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사람들을 헤치고 유현진에게 다가왔고 급히 손수건을 꺼내 상처 부위를 눌러주었다. 피가 손수건을 젖히자 그는 차가운 얼굴로 주위 사람들을 훑어보았다.“누가 그런 거죠?”방금까지 기세등등하게 유현진에게 사과를 원하던 사람들은 전부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서로 눈빛을 마주했다. 누구 하나 나와서 자신이 그랬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기고만장해져 말했다.“그러길래 누가 우리 민영 언니 밀어놓고 사과 한마디도 하지 않으랬어요? 그렇게 된 것도 쌤통이네요!”주강운은 싸늘하고 매서운 눈길로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현진 씨가 밀었다는 거 직접 보셨어요? 경찰 측에서도 현진 씨가 밀었다고 확정 지었나요?”그 사람은 당황한 듯 말을 버벅거리며 반박했다.“민영 언니를 밀지 않았다면 왜 해명하지 않은 건데요? 꼬리 말고 숨어 있은 사람이 누군데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 사과하지 않은 게, 그게 옳은 행동인 건가요?”주강운이 싸늘해진 목소리로 말했다.“그쪽들이 인터넷이 떠도는 헛소리를 믿고 현진 씨가 밀었다고 확정 지은 거잖아요. 그리고 막무가내로 찾아와 욕해놓고 지금은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왜 해명하지 않았냐고 하시네요. 현진 씨가 오늘 이 자리에서 누구도 밀지 않았다고 해명해도 당신들은 현진 씨의 말을 믿어줄 건가요?”“아무리 밀지 않았다고 말해도 당신들은 현진 씨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믿고 있었겠죠. 해명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또 막무가내로 사람을 해치고는 인정도 안 하고 말이죠. 무슨 말을 하든 당신들에게 공격을 받을 거고 정말로 밀었든, 아니든 당신들은 그 어떤 결과에도 만족하지 않을 테죠. 당신들이 말하는 정의는 정의란 이름을 뒤집어쓴 폭행일 뿐이에요. 당신들이 미쳐있는 연예인을 대신해
여자아이는 고개를 저었다.“저 언니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왜 유리컵을 던진 거야?”여자아이는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던 언니를 보았다. 그러자 언니가 바로 대답했다.“제 동생도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런 거예요. 절대 고의는 아니에요.”주강운은 담담한 눈길로 아이의 언니를 흘겨보았다.“그 쪽에게 묻지 않았습니다.”여자는 딸꾹질하더니 바로 입을 다물었다.주강운은 다시 한번 여자아이를 보며 말했다.“내 질문에 대답해 줄래?”여자아이는 붉어진 눈가로 말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전... 전 저 언니가 싫어요.”“싫어하는 것도 사람을 해치는 이유가 되지.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져야 해.”말을 마친 그는 바로 몸을 일으켜 여자아이의 손을 잡았다.“가자. 당장 나랑 경찰서로 가야겠다.”경찰서로 가자는 말에 여자아이는 순간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고 바로 버둥거리며 주강운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애를 썼다.“안 갈 거예요... 경찰서 가기 싫어요. 오빠, 잘 못 했어요. 경찰서로 보내지 말아요. 엉엉...”여자아이는 발버둥을 치면서 울어댔고 덜덜 떨리는 몸을 보니 놀란 것이 분명했다.여자아이의 언니는 바로 아이를 당겼다.“제 동생이 이미 잘못을 알고 사과까지 했잖아요. 그만 하세요. 어차피 배상금을 원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치료비 드리면 되잖아요!”통곡하는 여자아이에 구경하던 사람들도 저마다 나서 아이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아직 어린아이잖아요. 애가 뭘 알겠어요!”“사과했으면 된 거 아닌가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요?”“아이도 잘못했다고 사과도 했으면 그만이죠. 다 큰 어른이 굳이 어린 아이랑 그래야겠어요?”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건 주강운은 시종일관 싸늘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고 여자아이의 팔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안 갈래요-”끄떡없는 주강운에 여자아이는 말을 가리지 않고 내뱉었다.“전 아직 14살이 되지 않아서 언니가 처벌받을 수도 없을 거라고 했어요. 전 안 갈 거예요...”주강운은 멈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아직 사건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는데, 지금 가시면 안 되죠. 안 그런가요?”여자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어차피 유리컵을 던진 건 제가 아닌데, 저랑 무슨 상관이 있죠? 비키세요!”주강운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누가 던진 거든 CCTV를 찾아보면 알 수 있는 겁니다. 아무리 이 여자아이라고 해도 당신은 아이의 보호자이니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CCTV를 찾아보겠다는 주강운의 말에 그녀는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제가 던졌다고 한들 뭐 어쩌시게요? 저 여자는 쌤통이라고요! 뜨기 위해 동료 배우를 계단에서 밀어놓고, 저런 사람은 애초에 배우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요! 전 미리 저런 사람을 처리한 거예요!”주강운이 차갑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범죄를 저질러 놓고 미성년자인 동생에게 범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으면서 모든 게 들키니까 이젠 적반하장으로 나오시네요. 이것도 당신들이 말하는 정의인 거예요? 아니면, 당신들이 추종하는 연예인이 당신들에게 세뇌한 생각인 건가요. 좋은 연예인이란 말이죠, 긍정적이고 좋은 에너지만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해요. 팬들의 부정적인 마음을 부추겨 이런 짓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야말로 연예인 할 자격이 없는 거 아닌가요?”유현진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주강운을 보았다.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송민영 탓을 하지 않았다. 팬덤 문화는 사고를 치면 바로 탈덕을 하는 한 있어도 자신의 연예인 탓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강운은 한 마디 한 마디 전부 송민영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주강운은 마치... 일부러 여자가 송민영 탓이라고 말하도록 유도하는 것 같았다.역시나 여자는 주강운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부인했다.“송민영은 누구죠? 전 그 사람을 몰라요! 괜히 엄한 사람에게 잘못을 돌리지 마세요! 전 그 누구의 팬도 아니에요! 그냥 저 여자가 꼴 보기 싫었을 뿐이라고요!”주강운은 담담하게 여자를 흘겨보며 느긋하게 말을 꺼냈다.“제가 송민영 씨라고 말했나요?”여자의 표정이 빠르게 변했고 그제야 자신이 주강운의 유도 신문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