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의 계략에 빠져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던 그녀는 자살을 선택했고, 만약 이 모든 게 정말로 이소원의 얘기였다면 엄청난 충격이 될 것이었다.유현진도 그 장편의 글을 보고 있었고 댓글을 확인하려던 순간 뒤바뀌지 않는 화면에 그녀는 다시 그 게시글을 눌러 새로 고침을 했다. 그러자 그 게시글은 삭제 처리가 되었다.다시 페이스북 홈으로 돌아온 그녀는 실검도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송민영의 대처는 아주 빨랐다.강한서가 그녀에게 건넨 송민영의 자료에 이 사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자료에 적힌 진실은 홈마가 올린 게시글보다 더 충격적이었다.이소원은 사진까지 찍혔을 뿐만 아니라 성폭행까지 당했다.그녀는 어릴 때 당한 성추행으로 이미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던 상태였고 오랜 치료 끝에 겨우 증상이 나아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그녀는 다시 깊은 어둠 속에 잠기게 되었다.그녀의 오빠는 동생을 위해 사실을 밝히려고 했지만, 증거를 수집하러 가던 도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었다.지속된 악플에, 친한 친구의 배신, 친오빠까지 잃게 되어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었고 우울증이 다시 도져 자살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이소원의 부모님은 아들과 딸을 잃고 서서히 병으로 앓기 시작했다.그들은 지금까지도 그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죽은 아이들을 위해서 진상을 파헤치며 이소원을 성폭행 한 사람과 그 사람들을 사주한 배후를 지금까지 조사하고 또 조사하고 있었다.유현진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두드리고 있었다. ‘이번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병원. 페이스북을 보고 있던 송민영은 표정이 구겨졌다.“망할 년! 이런 쓰레기 같은 년이! 어디서 떼 거지로 몰려와 헛소리를 해!”임효우가 말했다.“언니, 일단 뭐라도 좀 먹어요. 그 사람들이 뭐라 하든 어차피 진짜도 아닌데 뭘 신경 써요?”송민영은 마치 꼬리라도 밟힌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누가 신경 쓴다고 그래? 내가 두려울 게 뭐가 있다고? 걔는 이런 사소한
매니저는 바로 툴툴거렸다.“이런 상황에서도 인기몰이나 해보겠다고? 너한테 굳이 필요한 건 아니지 않냐?”신하리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나한테 늘 말하지 않았나요? 다른 사람한테 미움을 사면 안 된다고. 게다가 상대가 먼저 소통하자고 연락 왔는데, 넙죽 안 받고 그럼 미움받게 거절해요?”매니저는 할 말을 잃었다.신하리는 주의 깊게 들어야 할 말은 듣지 않고 흘려들어야 할 말만 기억하고 있었다.송민영은 신하리가 소통하겠다는 확답을 들은 후 바로 신하리가 드라마로 상을 받은 사실을 언급하며 축하한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그리고는 그녀는 신하리의 답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략 30분이 흐르고 임효우는 신하리의 페이스북을 보자마자 바로 그녀에게 알렸다.“언니, 신하리 씨가 게시글을 올렸어요.”송민영이 다급하게 물었다.“뭐라고 올렸는데? 내 이름은 태그했어?”내용을 확인하던 임효우는 입가가 바르르 떨려왔다.아무런 대답도 없는 임효우에 송민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뭐야, 왜 그래?”임효우는 휴대폰을 송민영 앞으로 내밀었고 내용을 확인한 송민영은 하마터면 화병으로 쓰러질 뻔했다.신하리는 임효우가 카톡으로 캡처해서 보낸 페이스북 게시글 사진을 게시글로 올리며 두 글자를 겸비했다.「소통.」이건 소통이 아니라 치욕을 주는 것이 분명했다.신하리의 게시글은 마치 아무리 톱스타가 되었다 해도 결국은 그녀에게 부탁해 소통하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그야말로 송민영의 체면을 짓밟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송민영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바로 방금 올렸던 축하 게시글을 삭제하곤 신하리를 팔로우 취소했다.강한서는 점심에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터라 유현진은 다소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다.점심을 먹은 유현진은 잠깐 앉아 휴식하다가 2층에 올라가 러닝머신을 이용하고 있었다.얼마 달리지 않아 휴대폰이 울렸다.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에 그녀는 바로 러닝머신에서 내려와 전원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네, 할머니.”정인월은 다
그녀는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그 물고기를 보았다. 그리고 강한서와 연락도 닿았다.“왜, 무슨 일이야?”강한서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정신이 든 유현진이 물었다.“칠득이가 왜 우리 정원 연못에 있는 거야?”강한서가 뜸을 들이더니 느긋하게 말했다.“네가 이틀 전에 정원에 있는 연못이 너무 공허하다며. 그래서 내가 할머니 연못에서 한 마리 건져 왔지.”유현진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내가 연못이 공허하다고 했다고 칠득이를 건져 와? 내가 정원이 공허하다고 하면, 그럼 준이를 데려오겠네?”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물고기로 가득한 연못에서 하필이면 제일 눈에 띄는 칠득이를 데려오다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강한서는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정원은 크기가 작아서 준이가 맘껏 뛰어놀지 못할 거야.”“말 돌리지 마!”유현진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할머니가 칠득이가 사라졌다고 나한테 연락하셨어.”그녀는 멈칫하다니 이내 뭔가 깨달은 듯 말을 이었다.“어쩐지 할머니께서 나한테 연락하셨다 했더니, 네가 훔친 걸 알고 나한테 하신 걸 거야. 아니, 어쩌면 내가 공범이라고 생각하셨겠지. 그래서 특별히 나를 떠보려고 전화하신 거야! 난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어 너한테 한번 연락해 보겠다고 했어. 그런데 칠득이가 우리 집 연못에 있었잖아! 내가 뭘 어떻게 할머니한테 말씀드려야 해? 할머니 귀한 손자가 할머니께서 애지중지하는 칠득이를 훔쳐 왔다고?”강한서는 침묵을 지켰다.머리를 쓰긴 했지만, 완벽히 쓴 것은 아니었다.정인월은 칠득이가 있는지 없는지 그녀에게 떠보려고 연락한 것이 아니었다. 정인월은 유현진이 그의 집에 있는지 없는지 떠보려고 연락한 것이었다.그가 민경하를 시켜 물고기를 건져 오라고 할 때 몰래 건져 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정인월이 칠득이가 그의 집 연못에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분명 민경하가 물고기를 건져 오면서 쓸데없이 소식을 흘린 것이고 그걸 확인하기 위해 정인월이 그녀에게 연락한
그녀가 말했다. “300년은 무슨, 요즘 유행하는 거거든?”강한서는 뉴턴의 사진을 검색하더니 그녀의 헤어스타일과 비교했다. 그러더니 “똑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화가 난 유현진은 다음날 바로 파마를 풀어버렸다. 할머니의 파마를 석가모니 같다고 하다니, 강한서 그 멍청한 입에서 나올만한 말이었다. 유현진은 생각하더니 말했다. “강한서한테 사진 몇 장 보내달라고 해서, 제가 할머니한테 보내드릴게요.”정인월이 말했다. “나 속일 생각하지 말고 가까이에서 몇 장 찍어서 보내라고 하렴.”유현진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계단을 내려가 미끼로 칠득이를 유인해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강한서가 보낸 것처럼 보이기 위해, 그녀는 한참 후에야 사진을 정인월에게 전송했다. 정인월은 본가의 등나무 의자에 앉아 포도를 먹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리자, 정인월은 진씨에게 휴대폰을 가져오라고 했다. 전부 비단잉어를 클로즈업한 사진이었다. 정인월은 돋보기를 쓰고 진씨에게 말했다. “자네, 확대 좀 해주게.”진씨가 사진을 확대했고, 정인월은 마침내 반짝이는 물 위에서 한 인영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바로 휴대폰을 든 채 쭈그리고 앉아 비단잉어의 사진을 찍고 있는 유현진이었다. “이 자식이, 아직도 날 속여?”정인월은 돋보기를 벗어 옆에 두고는 입을 열었다. “황씨가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정원이 허전한 것 같다고 애완동물이라도 기르고 싶어 한다며 민 실장이 물고기를 가지러 오질 않나. 물을 그렇게 무서워하는 녀석이 물고기를 기를 리가 있어? 귀신을 속여야지!”“이 자식이, 다시 만나면서 날 속여!”진씨가 말했다. “아무래도 사모님이 일반인은 아니라 공개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요.”“멍청한 것!”정인월이 코웃음을 쳤다. “지금 현진이한테 한서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다가, 현진이가 슈퍼스타라도 되는 날엔, 한서가 현진이 눈에 차지 않을지도 모르네.”진씨: ...손주며느리 앞에서 그녀의 큰 손자는 정말 아무런 가
강민서는 그 일을 겪으며 오히려 많이 성장했다. 정인월도 흐뭇하게 생각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나중에 한서에게 너한테 적당한 자리를 내주라고 얘기하마.”정인월의 말에 대답한 강민서가 말을 이었다. “할머니, 일이 정해지면, 저 원래 살던 집에 들어가 살아도 돼요?”정인월이 찻잎을 휘저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요즘 여기서 잘 지냈잖니. 왜 갑자기 돌아가려고 그래?”강민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거기서 사는 게 습관이 되어서요. 그리고 일 시작하면 아무래도 거기서 지내는 편이 편해요. 본가는 회사랑 너무 멀잖아요.”정인월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회사가 멀면 진씨가 출퇴근 바래다주면 되잖니. 거기서 네가 혼자 있는 건,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강민서는 정인월의 눈치를 살폈다. 정인월이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자, 강민서는 용기를 냈다. “할머니, 제가 돌아가고 싶은 건 다른 이유도 있어요. 저 엄마를 모셔 와 살고 싶어요. 얼마 전에 낭종 제거 수술을 하셨는데, 회복이 잘되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지금 계신 곳은 집도 작고 환경도 좋지 않아서 잠도 잘 못 주무시는 것 같아요. 상처 회복이 더디니, 제가 걱정이 되어서요. 모셔 와서 몸조리 시켜드리려고요.”정인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물었다. “네 엄마가 너한테 말한 거니?”강민서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한텐 수술하신 얘기도 안 했어요. 저도 다른 사람한테서 들었어요.”말하던 강민서는 참지 못하고 강한서를 원망했다. “오빠도 그래요. 아무리 엄마가 원망스러워도 그렇지 수술도 했는데, 어떻게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어요?”정인월은 찻잔을 내려놓고 강민서를 쳐다보았다. “네 말은, 네 오빠가 네 엄마를 강씨 집안에서 내쫓은 게, 과한 처사라는 거니?”강민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희를 낳아주신 분이잖아요. 그 세월 동안, 특별한 공로는 없었어도 고생은 하셨잖아요. 할머니께서도 백 가지 선행 중에 효도가 제
강민서는 정인월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정인월은 호흡을 가다듬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한서가 결혼한 뒤에 어땠는지는 둘째치고, 네 엄마가 한 짓이, 어른이 할 짓이니? 네 오빠가 결혼하기 전엔 또 어땠고?”“한서가 회사가 금방 들어가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도와주기는커녕, 자금 유통을 위해 마련한 돈을 가져갔잖니. 그것 때문에 한서는 하마터면 사람을 잃을 뻔했고. 네 오빠가 회사에서 자리를 잡으니, 몰래 네 오빠 명의로 신씨 가문 사업을 끌어주기나 하고. 신씨 가문의 생산 라인이 어떤 수준인지 몰라? 하루가 멀다고 문제가 생겨서 그 뒷수습을 전부 네 오빠가 해줬잖니.”“넌 네 엄마가 널 키우느라 고생했다지만, 남편을 잃은 과부가 강씨 가문에 근 20년을 살았는데, 강씨 가문에서 푸대접한 적이 있기를 해? 널 키운 건 사실이지만, 신씨 가문 돈으로 널 키웠니? 넌 정말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재가도 가지 않은 게, 다 너희를 돌보기 위한 거라고 생각해? 네 엄마는 그저 강씨 가문이라는 배경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야!”강민서는 당연히 신미정에 대한 정인월의 평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인월은 강민서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20여 년을 키웠으니, 신미정을 향한 강민서의 감정은 이미 뼛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당연히 정인월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반박할 용기가 없을 뿐이었다. 정인월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넌 어려서부터 네 엄마 그늘에서 자랐어. 네 엄마가 널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어도, 네가 말한 것처럼 고생은 했지. 네가 효도하고 싶은 것도 당연한 거야. 하지만 네 오빠에게 네 엄마는, 낳아준 은혜만 있고 키워준 은혜는 없단다. 낳아준 은혜도 네 오빠는 진작 다 갚았어. 그러니 걔가 어떤 짓을 해도 과하지 않은 처사야. 너도, 신미정도, 네 오빠를 질책할 자격이 없어.”“네 엄마가 걱정되면, 가서 만나면 돼. 물론 원래 집으로 돌아가서 살아도 되고. 하지만, 네가 네 엄마를 다시
강민서가 신미정의 말을 새겨들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던 주강운 여자친구의 사진을 신미정에게 전송했다. 전화를 끊은 신미정은 바로 양시은에게 연락했다. 신미정이 강씨 가문에서 나온 사실은 이미 이 바닥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강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신분이 사라지자, 예전의 “절친”들은 점차 그녀를 멀리했다. 2개월 동안, 신미정은 세력에 돛다는 인간의 밑바닥을 수도 없이 봐왔다. 그녀가 잘나갈 때 받들어 주던 인간들은 그녀가 강씨 가문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누구보다 빠르게 그녀를 멀리했다. 오직 양시은만이 전처럼 신미정을 대했다. 심지어 신미정이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뒤, 양시은은 오히려 더욱 다정하게 신미정을 대했다. 그녀가 지금 묵고 있는 별장도 양시은이 그녀에게 얻어준 것이었다. 신미정은 점점 더 양시은을 신임하고 의지했다. 전화 연결음이 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시은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미정 언니, 무슨 일이에요?”“시은 씨, 누굴 좀 찾아줬으면 좋겠는데, 괜찮겠어요?”양시은이 웃으며 대답했다. “미정 언니, 저한테 그렇게 예의 갖추실 필요 없어요. 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오히려 어색해요.”잠시 말을 멈추던 양시은이 다시 말을 이었다. “누굴 찾고 싶으세요?”“주강운 여자친구요. 어떤 사람인지 찾아줬으면 해요. 제가 조금 이따 사진 보내줄게요.”“네, 알겠어요.”쿨하게 대답하는 양시은에 신미정이 오히려 뻘쭘해졌다. 특히 자신이 전에 양시은을 대했던 태도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후회가 밀려왔다. 신미정이 말했다. “전 의원은 요즘 괜찮죠?”양시은이 웃으며 말했다. “전에 도와주신 덕분에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고 있어요. 위에서도 그이를 더 높은 자리에 발탁할 의향이 있어서, 요즘 선거에 나서려고 준비 중이에요.”신미정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좋은 소식이네요. 시은 씨가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그러게요.”양시은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비웃
유현진이 입술을 앙다물며 떠보았다. “돈이라면, 얼마요?”“그건 상대방이 얼마를 원하는지 봐야죠.”유현진이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보았다. “얼마를 부르든 다 준다는 거예요?”양시은이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신미정은 지금 강씨 가문에서 쫓겨났어요. 강한서가 신미정의 카드를 막았다는데 무슨 돈이 있겠어요. 품위 유지를 하기도 이미 벅찰 텐데요.”“그럼 얼마나 줄 수 있을 것 같아요?”“말이야 하겠지만, 정말 돈을 주겠는가 하는 건 모르는 일이죠. 신미정이 정말 그렇게 호의적으로 남에게 돈을 줄 것 같아요? 상대방이 돈을 원하기만 하면, 갖은 방법을 써서 그 사람을 사기꾼으로 만들 걸요. 돈을 가지는커녕, 잘못하다간 감옥에서 몇 년 썩을 수도 있어요.”유현진: ...“그래서, 알아요, 몰라요?”양시은이 또 물었다. “대충 얘기라도 해줘야 신미정을 속이죠.”유현진이 말했다. “그건 저예요.”“뭐라고요?”양시은이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유현진은 간단히 그날 있었던 일을 양시은에게 전해줬다. 양시은은 어이가 없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신미정이 전생에 현진 씨에게 죽을죄를 진 것이 분명하네요. 이번 생에 현진 씨가 이렇게 신미정의 걸림돌이 되는 걸 보면 말이에요. 아들이 현진 씨 때문에 신미정을 집안에서 내쫓고, 예비 사위가 현진 씨와 사연이 있으니, 신미정이 알면 아마 열받아 죽으려고 하겠죠?”유현진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사연이라뇨? 전 그저 도와준 것 뿐이에요.”양시은이 말했다. “어쨌든 신미정이 지금 급히 이 사람을 알아보고 싶어 하니까, 이 사람이 현진 씨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게 조심해요. 현진 씨에 대한 미움만 커지면 산 채로 벗겨질지도 모르니까.”유현진이 냉소를 지었다. “제가 무서워할 것 같아요?”양시은이 태연하게 말했다. “만약 강 대표와 만날 생각이 아니라면 어떻게 대하든 상관은 없지만, 다시 잘해볼 생각이라면 너무 극단적으로는 하지 않는 게 좋아요. 강 대표가 현진 씨를 감싸주면,
주현의 생각은 성월과 달랐다. 송가람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의 사랑을 바랐지만 주현은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를 애초부터 매우 명확했다. 주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노렸다. 그건 20년, 30년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주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현은 성월의 성격을 잘 알았다. 성월은 반평생을 야심으로 가득 찬 서해금 곁을 지키며 진작 서해금의 충직한 개가 되었다. 성월에게 신분은 뛰어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거였고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기회를 잡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해금 역시 자신의 두 손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송병천과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서민 출신에 남편을 잃고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 무슨 수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웃기지 말라 그래.’하지만 그 말을 주현은 감히 성월 앞에선 할 수 없었다. 주현은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도와줘요. 신씨 가문으로 돌아가든 아니든 저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송가람 씨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는 일로 부탁해요. 활동이든 파티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자리로요. 그래야 신씨 가문에 호감을 살 수 있죠.”성월의 학창 시절, 그녀의 집안은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주현의 부모님이 빌려주신 돈으로 급한 불을 끈 덕에 성월은 늘 주현의 집안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주현의 애교에 견디지 못한 성월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송가람 씨 비서로 전근 보내볼게. 너, 네 남자친구한테 기본적인 건 잘 가르쳐. 묻는 말에 아무 것도 대답 못하면 안 돼.”주현이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월에게 팔짱을 끼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모! 역시 이모가 날 제일 예뻐할 줄 알았어. 주말에 집에 와서 식사해요. 안 가신지 꽤 됐잖아요...”한편, 사무실로 돌아온 한현진의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만약 어제 바로 세정제
서해금이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냉정하다니, 한현진 답지 않아.”성월이 말했다. “사실 전 그렇게 냉담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오일을 깨뜨린 것도 주혁 씨였고 몰래 부업을 하다 한 대표님 얼굴에 먹칠한 것도 주혁 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원망하는 마음이 있을 거예요.”말이 없던 서해금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인사팀에 잠깐 다녀와요. 일단 주혁을 가람이 운전기사로 전근시켜요.”성월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가람 아가씨에게 운전기사를 붙일 생각이시면 제가 다른 기사님을 찾을게요. 회사에는 지금 마침 새로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들이 많아요. 어리고 건강하고 운전 경력도 전부 5년이 넘었어요. 주혁 씨는 한현진 곁에서 한동안 일을 하신 분인데, 가람 아가씨 운전기사로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전근시키라고 하면 시켜요. 제가 이렇게 하는 덴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 성 비서는 나서지 말아요.”성월이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네.”성월이 사무실을 나서자 주현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모, 어떻게 됐어요? 대표님께 말씀 드렸어요?”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대표님께서 이미 송가람 씨에게 다른 운전기사를 붙이셨어. 이미 결정된 일이야.”순간 주현은 조바심이 났다. “왜 갑자기 결정 난 거예요? 회사에서 요즘 새로 신입사원 모집했잖아요. 보안팀은 싫어할 거란 말이에요.”성월이 말했다. “대표님께서 주혁을 송가람 씨 운전기사로 전근시켰어. 지금 인사팀에 가서 그 일부터 처리해야 해.”그 말을 들은 주현이 투덜거렸다. “한현진 밑에 있던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본인 상사를 배신까지 했고요. 대표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사람을 딸 운전기사로 쓰시겠다는 거예요?”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린 성월이 주현을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성월은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주혁의 팔을 내치며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너 미쳤어? 여긴 회사야. 여기서 집인 줄 알고 그렇게 큰 소리로 대표님 뒷담화를 하는 거야?
직원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회사의 조치가 꽤 인간적이라며 칭찬했고 또 어떤 직원은 아무리 화장실 청소라도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세제를 쓰진 말았어야 했다며 안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번 일은 단순히 청소 직원이 화상을 입은 것으로 그쳤지만 만약 누군가 범행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부식성이 강한 세정제는 범죄자에게 칼을 준비해준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꼴이었다. 의문을 제기하던 직원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한현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실언했다는 것을 인지한 직원이 다급하게 말했다. “대표님, 전 회사에서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요. 단지 위험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거니까, 저도 모르게 제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해본 거예요.”한현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위험 요소요?”그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못... 못 들으셨어요?”“죄송해요.”한현진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 친구 문자에 답장하느라 못 들었어요.”직원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또 다른 직원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사에서 며칠 동안 청소하시는 직원분들이 다치는 사고가 있었잖아요. 그 일 때문에 다들 마음이 뒤숭숭해요.”한현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직원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대표님. 다치신 분 중에 대표님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전에 대표님 운전 기사셨던 주혁 기사님이요. 그 분이 제일 심하게 다치셨어요.”한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기사님이요? 확실해요? 어제 볼 일 보러 갔다가 기사님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언제 다치신 거예요?”한현진의 말에 직원이 멍해졌다.“그럴 리가요. 며칠 전에 이미 다치셨어요. 대표님과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내셨어요.”한현진이 곰곰이 생각했다. “그날 제가 급한 일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누진 못했어요. 손에 붕대 같은 건 본 기억도 없고 기사님께서도 저한테 그런 얘기는 없으셨는데... 심하게 다치셨어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