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놀랐지만, 시연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대답 대신,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런 걸 물어요?” 그 반응에 유건은 거의 확신했다. 즉, 시연은... 억울했던 거다. 비록 이젠 남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한때 부부였다.시연의 저런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유건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이걸 기뻐해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억울한 게 아니었다면, 더 견딜 수 있었을까? 아니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까?’ 유건은 시연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냥, 진실이 궁금해서.” “진실이요?” 시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정말 웃기네요.” “시연아.” 유건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미안해요.” 시연은 웃음을 거두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단단하게 다듬어진 목소리로. “이미 무덤에 들어간 얘기까지 꺼낸 이유가... ‘검시’하고 싶어서였어요?” “진실이 그렇게 궁금해요? 그럼 적어도, 그 ‘시신’한테 동의는 구했어요?”‘이 사람은 늘 이래. 자기가 정리해 놓고선, 나중에 궁금해지면 다시 와서 묻는다니까.’ ‘그땐 믿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뭘 들으려는 거야?’ “알겠어.” 유건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후회, 미안함, 그리고... 자책.“말 안 해도 돼. 내가 잘못했어.” 시연의 미소가 서서히 굳어졌다. 그리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야... 사과하러 온 거였어?’ 유건의 눈빛은 흔들렸고, 입술을 깨물며 다시 말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너한테 너무 미안해.” 시연은 눈을 크게 떴다. 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놀람이 컸다. ‘고유건이... 사과를... 했어?’‘그것도, 진심으로?’ 단순한 형식이 아니었다. 유건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시연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꿍꿍이지? 이제 와서 왜
발걸음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웠지만, 유건은 억지로라도 걸음을 옮겼다. ‘시연이는... 날 좋아하지 않아.’ ‘어떻게든 날 벗어나려고 했고, 그걸 막는 건... 아무 의미 없어.’ 잡을 수 없다면, 남자답게 놓아줘야 했다.‘내가 없어야 시연이가 더 편하고 행복하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아이가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뿐이야.’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없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니까.’ ...이틀이 지나고, 일상은 별다를 것 없이 흘러갔다. 시연은 확신했다. ‘그날 고유건은 진짜로 사과하러 온 거였구나. 다른 의도는 없었어.’ 그렇게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날 오후, 시연은 정리해 둔 진료차트를 품에 안고, 의무 기록실로 향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렸고, 시연은 걸음을 멈췄다. 안에 있던 두 사람. 한 사람은 휠체어에 앉아 수액을 맞고 있는 장소미. 그리고, 그 옆에서 휠체어를 밀고 있던 사람은... 유건이었다. 시연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다음 엘리베이터 타면 돼. 굳이 같이 탈 이유 없어.’ 소미는 시연을 힐끔 보더니, 유건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시연의 팔을 잡아당겼다. 순간, 시연은 깜짝 놀라 유건을 쳐다보았다. 유건은 시연의 맨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엘리베이터 타려던 거 아니었어?” “아... 다음 거 타려고요.” “지금 타.” 유건은 말을 마치자마자, 시연의 팔을 살짝 힘줘 당기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이끌었다. “비어 있잖아. 굳이 안 타고 기다릴 이유 없잖아.” 시연은 입을 열려다 닫았다. ‘말해봤자 소용없지. 이미 문 닫혔고... 빠져나갈 타이밍도 지났어.’ 그렇게, 시연은 진료차트를 품에 안은 채, 엘리베이터 구석에 가만히 기대섰다. 유건과는 거리감이 느껴질 만큼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우린 지금, 같은 공간에 있지만.
저녁 여섯 시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잔잔했던 하늘은 어느새 흐려졌고,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유건의 표정은 조금 무거웠다. 소미의 검사 결과가... 예상보다 좋지 않았다.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겠네.’ ‘몸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질까 봐... 그게 걱정이야.’ 유건이 그렇게 천천히 병원 1층 로비를 빠져나오던 중, 현관 앞, 처마 밑에 서 있는 시연이 눈에 들어왔다. 우산 없이 비를 피하는 모습이었다. 유건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조용히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우산 없어?” 그 목소리에 시연은 고개를 들었고,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깜빡했어요.” “그 집 쪽으로 가는 거지?” “네.” “비 많이 와. 내가 데려다줄게.” 유건의 차는 지하 주차장에 있었고, 차까지 함께 내려가면 비에 젖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시연은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 순간, 유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왜? 내가 데려다주는 게 싫어? 아직 네 ‘전남편’도 아닌데, 차를 태워주는 것조차 거절할 만큼... 싫어졌어?” “그런 거 아니에요.” 시연은 다급히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진아한테 연락했어요. 곧 데리러 온대요.” ‘진짜...?’ 유건은 믿기지 않는 듯, 속이 꽉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핑계 같아. 나랑 조금이라도 마주하는 게 싫어서 그런 거겠지.’ “그럼 나도 같이 기다릴게.” “네...?” 시연은 당황스러웠다. ‘같이 기다린다고? 왜? 설마, 내가 거짓말하는지 확인하려고?’ 하지만, 여긴 병원. 그가 서 있겠다는 걸 그녀가 막을 권리는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말없이 병원 입구 처마 아래, 나란히 서 있게 되었다. 말도 없이, 눈빛도 없이. 오직 들려오는 건... 비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뿐. 잠시 후, 멀리서 진아가 달려
그래서일까... 우주에게 ‘아빠’라는 개념은 너무 희미했다. 시연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우주의 아빠. 우주한테도 아빠가 있어. 모든 사람은 다, 자기만의 엄마랑 아빠가 있는 거야.” 우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작은 손가락이 살짝 꼼지락거렸고, 표정엔 혼란이 가득했다. ‘당연한 말을 하는 건데... 우주는 그조차도 낯설구나.’ 시연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우주가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우주가 입을 열었다. “아빠도, 엄마처럼... 없는 거야?” 그 말에 시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목이 잠기듯 아팠고, 눈시울이 금세 뜨거워졌다. “왜 그렇게 생각해?” 우주의 미간이 더 깊게 찌푸려졌다. “아빠, 한 번도 우주 보러 안 오잖아.” 시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이 콱 막힌 느낌이었다. ‘내가 괜한 얘기를 했어. 그냥 말하지 말걸.’ ‘간 이식 못 받는 거, 그건 그 사람 인생의 업보야.’‘자식한테 무심했던 대가일 뿐인데...’ 그 현실을, 그녀는 장애가 있는 여린 우주에게 말할 수 없었다. “우주야, 누나가 아끼는 딸기 하나 줄게.” 시연은 애써 미소 지으며 조심스럽게 분위기를 바꿨다. “입 주변에 잼 다 묻었어. 어휴... 완전 고양이 같네, 고양이!”결국, 시연은 우주와 함께 저녁 식사하지 않고, 병원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내일 수술을 앞둔 환자가 있었고, 수술 전 설명이 하나 남아 있었다. ...시연은 병동에서 그 일을 마치고 나오던 길이었다.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인물이 시연을 불렀다. “시연아.” “교수님?” 대학병원 교수이자, 시연의 수련 책임자인 양석현이었다. 양석현은 평소에 워낙 바빠 병동에서 마주치는 일이 드물었다. ‘이 시간에 연구실로 따로 부르다니... 무슨 일이지?’ 시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따
집에 돌아온 시연은 서둘러 박스를 꺼내 큰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졸업 논문과 관련된 모든 자료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원본 USB까지 포함해서, 단 하나도 빠짐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건 전부 시연이 직접 발로 뛰며 모은 결과물이었다. ‘절대 버릴 수 없어. 아무 데나 놓는 것도 싫어.’ 이 자료들만 있으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안했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그 자료들을 들고 양석현 교수에게 찾아갔다. “교수님, 여기 있습니다.” “그래.” 양석현은 자료를 꼼꼼히 넘겨보며 미묘하게 안도의 빛을 띠었다. “이 정도면, 정은주가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할 거야. 고작 입으로만 떠든다고 다 되는 줄 아나?” “네.” 이제 남은 건 학교와 병원의 조사 결과였다. 그날 오후, 양석현이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을 때,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점점 커졌다. “아직 단정하긴 이르지만...” 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게도, 정은주 쪽에서도 뭔가 자료를 제출했더라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사람이? 자료를?’ ‘거짓으로 나를 모함한 사람이,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나도 정확히는 몰라. 나는 네 담당 교수이고, 이번 사건은 학교와 병원이 직접 조사하는 부분이라 나한테는 공유가 안 됐거든. 아무튼 좀 기다려보자.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게 돼 있으니까.”“네...”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시연은 불안함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하루하루를 견뎠다. ‘뭔가, 진짜 잘못될 것 같아...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닐까...’ 그리고 셋째 날, 결국 소식이 전해졌다. 양석현 교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말을 꺼내기 어려운 듯,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연아, 지
“아직 끝난 거 아니야. 내가 있잖아. 방법을 찾아볼게.” “감사합니다, 교수님.” 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새로운 증거를 내놓지 못하면, 아무리 양 교수라 해도 오래 버티기 힘들다는 걸. ‘교수님께서 아무리 힘이 있어도, 결국 학교와 병원이 결정권을 쥐고 있는데...’ 역시나, 다음 날 아침. 시연은 병원으로부터 직무 정지 통보를 받았다. “시연아.” 양석현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직 절망할 단계는 아니야. 우리... 같이 더 고민해 보자.” “네, 교수님.”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시연은 이미 마음속으로 체념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뭘 더 할 수 있지...?’ 그녀는 애써 정신을 붙들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교수님, 괜히 걱정 끼쳐드렸네요.”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양석현은 손을 저으며, 시연을 다시 찬찬히 바라봤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이 일... 고 대표한테 말했니?” “네...?” 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 교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녀가 말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유건에게 말해야 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을까... ‘우린 원래부터...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잖아.’ 양석현은 장미리 사건 이후, 제자와 고유건 사이에 묘한 거리감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상하지 않니? 정은주가 널 고발해서 얻을 게 뭐가 있을까?” 시연은 그 말에 눈을 번뜩였다.‘그러고 보니... 그 애가 이걸로 뭘 얻는다고?’은주도 논문이 자기 거라는 걸 명확하게 입증할 수 없을 터였다. 그녀가 이렇게 나선 건 그저 시연에게 더러운 오명을 씌우기 위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얻을 것도 없는데 왜 굳이 이런 짓을 했을까?” 양석현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혹시 너, 정은주랑 사이 안 좋았니?” “설마요.” 시연은 미간을
시연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내가... 이 사람한테 뭘 잘못했나?’ “아이고야!” 옆에서 군고구마 리어카를 밀던 아주머니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임신한 처자가 왜 그렇게 길을 멍하니 걸어? 부르는데도 못 들었잖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시연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잠깐 정신이 없어서요.” “됐고, 다음부턴 조심해. 홑몸도 아니잖아.” 시연은 다시 고개를 들었고, 그제야 유건의 얼굴이 왜 그렇게 굳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화냈구나... 하지만 이 사람...’‘이제 제발, 이 손 좀 놓아주면 안 되나?’“고마워요. 정말 괜찮아요.” 유건은 그런 시연을 한참 바라보더니, 허탈한 듯 비웃으며 말했다. “정말... 네 몸은 네가 제일 안 챙기는구나?”“길에서 그렇게 멍때리고 다니면 어쩌자는 건데?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또... 혼난다.’ 시연은 고개를 툭 떨구고,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천천히 귀에 꽂았다. “아무 생각 안 했어요. 그냥 잠깐 정신이 나갔어요.” 그러고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거 보니까... 할아버지 뵈러 가는 길이죠?” “응.” 유건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짧게 대답했다. “아침 식사 같이하려고.” “그럼 얼른 가봐요.” 시연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할아버지 기다리시겠네요.” 유건은 그대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사실, 그는 말하고 싶었다. ‘같이 갈래?’ ‘우리... 진짜 오랜만에 같이 가는 거잖아.’ ‘할아버지도 몇 번이고 물어보셨어. 왜 요즘은 너희 둘이 같이 안 오냐고...’ 하지만 유건은 말이 안 나왔다. 며칠 전, 시연이 전화했을 때. 문자를 보냈을 때. 그는... 아무것도 답하지 못했다. “응, 알겠어.” 결국 유건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그럼, 잘 가요.”
‘도대체 누가 감히, 시연의 직책을 정지시킬 생각을 했단 말이야?’ ‘누가 그런 짓을 해? 제정신이야?’ [그게요... 시연이가 신고를 당했어요.] 하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했다. 그리고 그 뒤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건에게 설명했다. 유건은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쥔 손만 꾹 움켜쥘 뿐이었다. “알았어.” 짧은 대답 후, 전화를 끊기 직전. “근데, 이번 일... 왜 나한테 바로 말 안 했어?” 하은은 사실상 유건의 부탁으로 시연을 챙기고 있었다.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아무 얘기도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게...] 하은은 목소리를 낮추고 망설였다. [두 분... 자주 보시잖아요. 시연이가 직접 말할 줄 알았어요.] 유건은 그 말을 듣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마워, 끊을게.” 뚝-전화가 끊긴 뒤, 하은은 핸드폰을 꼭 쥔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었다. ‘고 대표님이... 시연이 직무가 정지된 것도 몰랐다니.’ ‘확실해, 둘 사이에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설마... 헤어진 건가...?’ ‘...’유건은 여전히 핸드폰을 쥔 채, 가만히 입술을 움직였다. “힘든 일이 생겼고, 혼자 해결할 수도 없는데... 왜 나한테 말 안 해?” ‘아니면... 이젠 나 말고, 의지할 사람 생긴 건가?’ ‘예를 들면 노은범이라든가...’ ...시연의 집. 아침을 간단히 먹은 임진아는 다시 나섰다. 다른 학과 친구들에게 정은주에 대한 정보를 수소문하러 간다고 했다. 진아가 나간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현관 벨 소리가 울렸다. 띵동-“갑니다, 가요!” 시연은 진아가 뭔가 놓고 갔나 싶어 얼른 문을 열었다. “뭐 두고 갔어?” 그런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유건이었다. 시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왜... 이 사람이 여기...?’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그녀에게, 유건
‘그래서 그런가... 불길한 예감은 꼭 맞아떨어진다니까.’ 저녁 회의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온 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처음엔 단순히 목이 간질간질했는데, 곧이어 재채기가 계속 나왔고, 콧물에 눈물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이마에 손을 얹어보고 깜짝 놀랐다.‘뜨거워... 감기다. 몸살이 왔어.’ 그녀는 임신 중이라 함부로 약을 먹을 수도 없었고, 병원에 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시연은 따뜻한 물을 끓여 계속 마시면서, 이불에 몸을 꽁꽁 감쌌다.‘이러면... 땀 나면서 열 좀 빠지겠지.’ 하지만 아무리 이불을 덮고 있어도 오한이 멈추지 않았다. 몸은 나른하고,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깐만... 쉬자...’ 그렇게, 시연은 핸드폰 진동 소리도 듣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같은 시각, G시. 유건은 회사를 나와 BLUE로 향하던 중, 차에 올라타자마자 첫눈을 마주했다. 창밖에서는 조용히 작은 눈송이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제 진짜 겨울이네...’ 그때, 별산장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말해.” [고 대표님, 우주 도련님께서 며칠 뒤에 건강검진 예약이 잡혀 있는데요. 이쪽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돼서, 이전 병원 기록을 요청드리고자 연락드렸습니다.]“나한테 물어보면 뭐 해? 사모님한텐 연락 안 했어?” [네, 사모님께 먼저 연락드렸는데... 전화를 안 받으시더라고요. 바쁘신 것 같아서요.]유건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내가 해볼게.”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계속 진동음만 울릴 뿐, 받지는 않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회의는 끝났을 텐데.’ ‘잠든 건가?’ 하지만 마음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럴 리 없는데...’ ‘시연이... 요즘 몸도 약해졌는데...’ 유건은 핸드폰을 꾹 쥐고 곧바로 옆자리에 앉은 지한에게 말했다. “시연이가 L시에 있는 호텔 이름 확인해.
임신 후기가 되면서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된 시연은 L시까지 가는 KTX를 예약했다. 출장 기간은 일주일. 짐도 그만큼 많았다. 다행히 양석현 교수가 챙겨줘서 특실로 표를 끊을 수 있었다. 기차에 올라 지정석을 찾아갔지만, 자리 앞에서 시연은 한참을 고민했다. ‘이거... 혼자 올릴 수 있을까?’ 배가 제법 불러온 상태. 짐이 무거워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가볍게 톡 쳤다. “시연아.” 그녀가 돌아보자, 은범이 웃으며 서 있었다. “은범이...?”시연은 깜짝 놀랐지만, 그의 얼굴이 반갑긴 했다. “이 캐리어 네 거야?” “응.” “내가 해줄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범은 자연스럽게 캐리어를 들어 선반에 올려주었다. “고마워.” “뭘, 당연히 해야지.” 두 사람의 좌석은 우연히도 나란히 붙어 있었다. 정말 묘한 인연. 시연은 낮게 웃으며 물었다. “난 L시에서 학회 발표가 있어서 가는 거야, 너는 출장?” “응.” 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약 복용 중이라 장거리 운전은 피하라고 하길래, 그냥 기차 타기로 했어.” ‘약...’ ‘그럼, 역시...’ 시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은범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걸. 그래서 굳이 놀라는 척도, 돌려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은범의 그 담담한 말투 안에서 시연은 뭔가 미묘한 걸 느꼈다. “내가 그거, 알고 있다는 거... 너도 알고 있었구나?” “응.” 은범은 아주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그날,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웠어.” ‘역시... 알았구나.’ 시연은 조용히 시선을 떨구었다. 그제야 그날 이후 유건이 갑자기 달라진 이유가 모두 들어맞는 듯했다. “너였구나.” “응, 내가 고 대표한테 말했어.” 은범은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곧 미안한 듯 말을 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했던 일, 정말 미안해. 그 일로 두 사람 사이가 더 꼬인 건 아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시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건은 미묘하게 시선을 낮추며 기다렸다. “오늘 온 거, 프로젝트 투자자로서 문 과장님이랑 양 교수님의 체면을 봐서 온 거예요? 아니면... 정말, 나 때문이에요?” ‘이 질문은... 피하지 말고 꼭 해야 해.’ 생각보다 직설적인 질문에 유건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살짝 굳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너는, 뭐라고 생각해?” “모르겠어요.” 시연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진심으로, 그녀도 헷갈렸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전자예요.” 그 말에 유건은 피식, 짧은 웃음을 흘렸다. 비웃는 것인지, 자조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럼 당연히, 전자지.” 남자의 눈매가 비죽 올라갔다. “설마, 지금... 내가 너 때문에 왔다고 생각한 거야?” 시연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유건은, 그 침묵이 곧 대답이라는 걸 알아챘다. ‘아, 진짜 그렇게 믿은 거야?’ 그는 낮게 웃었다. 어딘가 허탈한 웃음. “너, 참 재밌다.” “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건지 궁금하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한다고... 나한테 마음도 없는 여자 붙잡고 질질 끌 사람으로 보여?” “세상에 여자가 너 하나뿐이고, 내가 너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그 말에 시연의 눈썹이 살짝 흔들렸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착각했구나.’ 무안함과 동시에, 어딘가 가볍게 안도감이 스쳤다. 시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내가 괜히 예민하게 굴었네요. 그냥... 우리가 예전에 했던 그 이상한 결혼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 시절,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 감정의 거래였으니까.’ 유건의 심장이 순간에 세게 쪼여왔다. ‘이상한 결혼 생활?’ ‘그게, 너한텐 그렇게까지 나빴던 거구나.’ 가슴이 먹먹했지만, 표정만큼은 여전히 담담했다. “나도 그래.” 그는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유건은 계속 이해가 안 됐다.‘그 정도로 화가 났다고? 내가 온 게 그렇게 싫은 건가.’ 사실 오기 전부터 그는 이미 예상했다. 시연이 자신을 반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비록 알고 있었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유건도 묘하게 가슴이 쓰렸다. ‘그래...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나.’ 그 순간, 유건의 머릿속에 뭔가 스쳐 지나갔다. 살짝 몸을 기울여 시연의 귀에 대고 작게 물었다. “아까 족발, 좀 아쉬웠던 거지?” 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갑자기, 웬 족발?’ 하지만 놀란 얼굴로 유건을 바라보던 시연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헉... 들켰나?’ 유건은 그 반응 하나로 모든 걸 알아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알았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더 시켜줄게.”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애도 아니고... 고작 한 점 덜 먹었다고 삐지는 거야?” “네?!” 시연은 반사적으로 부르려다 멈췄다. ‘뭐야, 지금 이 사람 왜 이래?’ ‘어디서 갑자기 예전처럼 굴고 있는 건데...’ 시연은 헷갈렸다.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거야? 아니면 진짜... 뭔가 바뀌었나?’ 잠시 후, 더 주문한 족발이 나왔다. 유건은 그것을 직접 들어 시연 앞에 내려놓았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먹어. 너 한 사람 먹으라고 더 시킨 거야. 그리고 오늘 회식비, 내 카드로 결제했어.” “당신...” 시연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런 걸 해?’ 하지만 주변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이런 자리에서 굳이 따질 수는 없었다. ‘이따가 따로 물어보자.’ 그녀는 결국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고, 족발을 한 점 들어 입에 넣었다. 유건은 조용히 웃었다.며칠간의 출장 때문에 쌓인 피로가 단번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시연도 두 점쯤 먹고 나자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래, 이렇게까지 했는데... 굳이 삐져 있을 필요는
‘아래층? 무슨 아래층?’ 시연은 헛기침이 나왔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던 그녀는, 곧 유건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지금 1층인데, 데리러 와줄래?’‘진짜... 온 거야?’ 그리고 몸이 먼저 반응했다. 시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잠깐...” 말도 제대로 안 마친 채, 주변 눈치도 보지 않고 헐레벌떡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1층 로비로 향했다. 그곳에, 유건이 있었다. 정말로. 큰 키, 넓은 어깨, 공항에서 막 돌아온 듯한 모습.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눈에 띄는, 그 익숙한 실루엣. “시연아.” 유건은 시연을 발견하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길고 고된 이동 끝에도 그 눈빛엔 피곤 대신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어쩐 일이에요...” 시연은 다가가며 말했다. 그 얼굴엔 놀람만 가득했고, 기쁨은 없었다. ‘기뻐해야 하나? 아니잖아.’ 유건은 살짝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초대한 거 아니었어? 지금 보니까... 아닌가 봐?”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시연은 솔직하게 말했다. 물론, 표정은 최대한 부드럽게 유지한 채. ‘솔직히 말하면, 진짜로 온 게 아직도 실감 안 나.’ “네가 초대한 거 맞잖아. 나는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못 간다’라고는 안 했고.” 유건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입꼬리에 묘한 웃음까지 살짝 얹었다. 그 말에 시연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아, 또 저런 말장난이네.’ ‘바쁘면 안 와도 괜찮은데... 굳이 시간 내서 오면 나는 또 ‘잘 지내는 부부’처럼 보여야 하잖아...’‘할아버지 앞에서도 그랬고, 이젠 과장님, 교수님들 앞에서도?’ 시연은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 사람이 그걸 몰랐다고?’ ‘난 우리 둘 사이, 서로 암묵적으로 선 그은 줄 알았는데.’ “사실...” 시연이 입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문광수 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 선생!” 시연은 본
지한은 조심스럽지만 솔직하게 말했다. “형님... 근데 이건 좀 너무 빡빡한 거 아닙니까?” 유건이 직접 수정한 일정표에는 거의 쉴 틈이 없었다. 식사 시간은커녕, 수면 시간도 애매했다. “괜찮아.” 유건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대로 해. 중간중간 짬 날 때 눈 좀 붙이면 돼. 빨리 마무리하면, 빨리 돌아갈 수 있잖아.” 지한은 눈을 좁히며 물었다. “형님, 급하게 복귀하시는 이유라도...?” 유건은 짧게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할아버지 혼자 병원에 계시는데, G시를 너무 오래 비우니까 좀 신경 쓰여서.” 지한이 속으로 그 대답을 믿지 않았다.‘거짓말인 티가 너무 난다...’ ‘어르신은 전담 간호사도 있고, 형님은 G시에 있어도 병실에 잘 안 가시잖아...’ 하지만 그런 말을 지한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형님 마음속엔 다른 사람이 있는 거겠지.’ ...드디어, 심폐 프로젝트팀의 축하 파티 날. 의사, 간호사, 인턴, 심지어 병동 도우미까지, 진료과 전원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출발 전, 모두가 병동 회의실에 모여 대기 중이었고, 주하은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시연의 팔짱을 꼈다. “시연아, 나랑 같이 다니자. 낯선 자리에서 혼자 있으면 어색하잖아.” “좋지.” 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뭘.” 하은은 슬쩍 웃으며 시연을 흘끗 바라봤다. 그러다 못 참고 툭 던지듯 물었다. “근데... 고 대표님이랑 너, 이제 진짜 아무 사이 아니야?” “응...?” 시연은 잠깐 멍해졌다. “나랑 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데?” “흥... 그 눈빛은 못 속이지.” 하은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지만, 그 순간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들여다보는 시연의 눈이 커졌다. ‘고유건’이라는 이름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왜?’ 그녀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양석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그건 너한테 부탁할게. 부부 사이잖아, 말하기 편할 테니까.” ‘부부 사이...’ 시연은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유건이 직접 나서서 논문 사건을 해결해 줬으니, 양석현 입장에선 두 사람이 사이가 좋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사이, 그런 거 아니에요, 교수님...’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시연은 결국 꾹 삼켰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번 말해볼게요. 유건 씨가 그런 거 따지는 사람은 아니지만, 요즘 워낙 바빠서요... 시간이 안 맞을 수도 있어요.” “괜찮아.” 양석현은 부담 주지 않으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고 대표가 바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우리 문 과장님이랑 나도 충분히 이해해.” “네.” ...병실 돌아다닐 때도,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서도 시연의 머릿속은 온통 ‘전화’ 생각뿐이었다. ‘며칠 전에 도움받았는데... 이렇게 또 연락하면, 진짜 내가 고유건한테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루 종일 핸드폰을 쥐었다 놨다 반복하며 망설이던 시연은, 결국 늦은 밤, 조용한 집 안 거실에서야 조심스레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한 번, 두 번...시연은 이 기다림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마치 몇 시간을 기다린 것처럼. [여보세요.]낮고,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시연?]이름을 불러주는 그 한마디에 시연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왜 이렇게 긴장돼...’ 입술을 한 번 핥고 나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고 대표님.” [응?]유건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또 무슨 호칭이야? 장난치지 마. ‘고 대표님’은 너한테 해당 안 되는 말이야.]“아, 그게...” 시연은 급히 말을 이어갔다. “이번 전화는 내 사적인 용무가 아니라서요. 그래서 그냥 그렇게 부르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그래?] 이번엔 유건의 말투가 조금 진지해졌다
그 질문은 유건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지하가 던진 말에, 유건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래... 인정해. 난 나비 공주를... 잊은 적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장소미가 나비 공주였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 감정은 자연스레 장소미에게 옮겨갔다. 그냥,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생각해 봐.” 지하는 유건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였다. “기억 속 첫사랑이랑 계속 살 건지, 지금 네 앞에 있는 결혼이라는 현실과 살아갈 건지... 이제는 정해야 할 때 아냐?” “치.” 유건은 코웃음을 치며 지하를 노려봤다. “내가 장소미랑 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지만...” “넌... 내가 시연이랑 백년해로라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냥... 나 놀리는 거지?” 지하는 피식 웃으며 눈을 굴렸다. “왜, 네가 더 억울한 표정이냐?” 그는 가볍게 반문하며, 유건을 똑바로 바라봤다. “하나만 더 묻자. 넌, 시연 씨한테 ‘한 번이라도’ 제대로 다가가 본 적 있냐?” 유건은 말문이 막혔고, 대답하지 못했다. 지하는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없지.” “그럼 넌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시연 씨가 널 좋아해 주길 바라는 건데?” ‘그냥 돈이 많아서? 능력 있어서? 그게 다야?’ 유건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가 그렇게 한심했나?’ 그 순간, 멀리서 강석이 당구봉을 흔들며 소리쳤다. “야, 너희 둘! 왜 거기서 연애 상담만 하냐? 와서 당구나 쳐!” “갈게!” 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겉옷을 벗었다. 일어서기 전, 유건을 다시 바라보며 덧붙였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누굴 얻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야. 그럼 세상의 ‘순정남’들은 어디서 숨 쉬고 살겠냐?” 그 말은 유건의 가슴에 조용히 박혔다. ‘나 지금,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날 밤, 유건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댔고, 다음 날엔 아무 말 없
말을 마친 유건은 웃음을 거두고, 날카롭게 내뱉었다. “빨리 꺼져.” 은주는 유건의 눈빛에 숨이 턱 막혔다. 그 안에 담긴 서늘한 분노가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 “그래요... 인정 안 할 거면 갈게요!” 울먹이며 뒤돌아선 은주는 그대로 뛰쳐나갔다. 은주가 사라지자, 남은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 분위기, 왜 이렇게 민망하지...’ “저기, 그게...” 유건은 식은땀이 날 정도로 당황했다. 해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서둘러 말을 꺼냈다. “오해하지 마. 그날 클럽에는 지하랑 거래처 사람들이 있었고...”“굳이 설명 안 해도 돼요.” 시연은 황급히 손을 저었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그런 설명까지 필요하진 않잖아요. 법적으로만 안 끝났지, 서로의 감정은 이미 끝났으니까.”‘당신 마음은... 장소미를 향하고 있잖아.’ ‘이제 와서 해명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 말을 들은 유건은 얼어붙은 듯 시연을 바라봤고,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끝났다고?’ 둘 사이에 감돌던 공기가 더 묘하게 얼어붙었다. 시연은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장소미도 아니잖아요... 오히려 다행이죠, 뭐. 장소미였으면, 아까 그 상황을 설명할 겨를도 없었을걸요?”그 말에 유건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하... 그 이름을... 왜 굳이 지금 꺼내는 건데.’ 시연도 순간 후회했다. ‘말... 잘못했나?’ ‘괜히 분위기 풀어보려다 더 망친 것 같아...’이렇게 생각한 시연이 헛기침하자, 유건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그는 먼저 걸음을 옮겼고, 시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남자를 따라갔다. 차 안. 출발한 뒤에도 유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운전만 할 뿐. 남자의 손은 단단히 핸들을 쥐고 있었다. 표정은 차분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