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에서 시연은 기본적인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생명 지표는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임신 중이었기에, 산부인과 전문의의 협진이 필요했다. 그 사이, 유건은 병실 밖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기환아.” “예, 형님.” 오늘 시연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기환이었기에, 유건은 그에게 반드시 상황을 확인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해봐.” 기환은 먼저 고개를 숙였다. “형님, 죄송합니다. 형수님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자신이 기억하는 전후 상황을 전부 설명했다. 그 얘기를 다 들은 유건은 눈썹을 깊게 찌푸렸다. “네가 마신 그 밀크티... 장소미 씨가 줬다고?” “네.” 기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방심했어요. 장소미 씨가 줬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의심도 안 했습니다.” 곧이어 서둘러 덧붙였다. “그런데요 형님, 이 모든 게 장소미 씨의 계략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장소미 씨도 누군가에게 이용당한 걸 수도 있어요.”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엔 소미를 의심하긴 했다. 하지만, 소미가 이런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조금 전, 지한에게 들은 바로는 소미 역시 납치당했고, 시연보다 훨씬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건 그녀의 소행일 리 없었다.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일을 꾸민 놈... 우리 쪽 사정을 아주 잘 알고 있어. 다친 사람들은 전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야.’ ‘CA국... 그 사람들이 아니라면 또 누가?’ ‘아직은 뚜렷한 대상이 없는데...’ ‘할아버지가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으니, 날 흔들려고 이런 짓을 벌인 건가?’ ‘진짜 못된 놈들... 남까지 해치면서 날 압박하겠다는 건가?’유건이 보기에, CA국 사람들은 비열하고 비합리적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또 성공했다는 것. 지금,
기환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확한 건 아직 잘 모르겠고... 그냥, CA국 쪽이랑 관련이 있을 거라고 추측만 하고 있어요.” 시연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지한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게 끝이야?’ 시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지한은 그녀가 던진 두 번째 질문을 회피했다. ‘장소미는... 어떻게 된 거지?’ “형수님, 푹 쉬세요. 전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게요. 필요하신 거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시고요.” “그래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 의문은 점점 깊어졌다. ‘지한 씨... 뭔가, 나를 피하는 것 같아.’ 그리고, 이상한 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유건이 오지 않았다. 그것도 너무 늦게.‘왜 안 와? 납치당한 나를 두고...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지한은 아까 ‘일이 좀 생겼다’고 했지만, 그 ‘일’이 그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게 말이 될까? ‘말이 안 돼... 너무 이상해.’ 시연은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사모님...!” 간호사가 놀라며 그녀를 부축했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제가 다 도와드릴게요.”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시연은 간호사의 팔을 빌려 병실 문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자, 바깥에서 들려오는 두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형님은 언제쯤 오시는데?” “글쎄... 민환이 말로는, 장소미 씨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시연과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곧추세웠다. “형수님...” “형수님!” 시연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차가운 기운이 가슴속 깊숙이 퍼졌다. “장소미... 어떻게 된 거예요?” 지한과 기환은 서로 눈치를 보며 말문이 막혔다. 시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물었다. “유건 씨... 지금 장소미랑 같이 있는 거죠?” 이번엔 더 대답이 없었다.
상처 부위 때문에, 소미는 어깨가 드러나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왼팔부터 턱 아래까지, 하얀 붕대가 겹겹이 감겨 있었고, 응급 처치 과정에서 급히 잘라낸 머리카락은 자비 없이 뚝뚝 잘려져 있었다. 게다가 계속 울었던 탓에, 얼굴은 눈물과 붉은기, 부은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심지어 유건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축하며, 손을 들어 눈가를 닦아주었다. “울지 마. 눈물이 상처에 닿으면 안 좋아.” “유건 씨...” 소미는 눈을 꼭 감더니, 그대로 남자의 품에 안기며 흐느꼈다. “어떡해요... 저 앞으로 어떻게 살아요?” “무서워하지 마.” 유건은 낮고 부드럽게 말했다. “요즘 의학, 많이 발전했잖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근데... 그게 안 되면요...?” 소미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영원히 못 고치면요...? 그런 일, 충분히 있을 수 있잖아요?” 유건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저 입술을 꾹 다문 채 여자를 바라볼 뿐. “봐요... 대답 못 하잖아요. 저를 위로하려고 한 말인 거 다 알아요.” 소미는 울음을 꾹 참으려다, 다시 숨을 들이켰다. “아...!!!” 그러고는 그대로 눈이 뒤집히며 쓰러졌다. “소미 씨!” 유건은 당황해서 그녀를 흔들었다. “의사! 간호사!” “들어갑니다!” 의료진이 급히 병실로 들어왔다. “상태가 왜 이래요? 아까까지 괜찮았잖아요!” “고 대표님, 환자분은 광범위 화상으로 인한 쇼크 증세를 겪고 있습니다. 지금 바로 응급 처치가 필요하니, 잠시만 자리를 비워주세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병실 안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침대 가리개가 닫히고, 유건은 밖으로 밀려 나왔다. 그가 뒤돌아선 순간, 시연이 병실 문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 유건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흔들렸다. “여보...” 시연은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봤다. 유건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오자, 그녀는 피하지 않고 서 있었다. “여긴 어떻게..
왜냐하면, 시연은 다 보고 말았으니까.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우리 둘은, 이전처럼 지내는 게 좋겠어요. 더 먼 미래는...” “잠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의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비웃듯 되물었다. “‘이전처럼’이라는 게, 어떤 거지?” “네?” 시연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말 그대로 명목상 부부, 서로 터치 안 하고, 간섭도 안 하고...” “하.” 유건은 코웃음을 내뱉었다. “먹은 밥을 도로 뱉는 것도 아니고, 그게 말이 돼?” ‘무슨 소리야?’ 시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동의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왜요?” “왜냐고?” 유건은 속이 뒤집힐 듯한 감정을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지금까지 꾹 참고 있었던 감정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까스로 감정을 눌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나한테 화난 거야? 당신 쪽으로 먼저 안 갔던 거, 그거 때문에?” 시연이 대답할 틈도 없이, 유건은 말을 이어갔다. “당신 입장에선 당연히 화날 수 있어. 나한테 뭐라고 해도 좋아. 근데...” “그래요. 당신 말대로, 내가 화내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시연이 무표정하게 남자의 말을 끊었다. 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역시... 시연이는 화가 난 거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맞아, 다 이해해.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당신한테 갔다면, 구출이 더 늦어졌을 거야. 기환이가 당신 옆에 있기도 했고, 지하한테 부탁하기도 했으니까...” “알아요.” 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그 반응에 유건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알면서 왜...?” ‘왜 이러는 건데...?’ 시연은 미세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라
시연이 문손잡이를 잡고 살짝 당기려던 찰나, 뒤에서 다가온 유건이 팔을 뻗더니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 남자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시연의 머리 위를 감쌌다. “그래, 진료받을게. 대신 같이 가자.” “뭐라고요?” 시연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요?” “지시연!” 유건의 미간에 분노가 깊게 드리워지며 얇은 입술이 꽉 다물어졌다. “넌 내 아내야. 당연히 내 옆에 있어야지.” “그래요, 난 당신 아내예요. 하지만...” 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차분한 눈빛으로 말했다. “근데, 당신 그 상처... 나 때문에 입은 거 아니잖아요. 내 남편이 다른 여자 때문에 다쳤는데, 그걸 왜 내가 책임져야 하죠?” “당신!” “아, 맞다...” 시연은 무심한 표정으로 웃음을 더했다. “이젠 내가 당신을 돌볼 생각이 없으니까, 돈이 많은 당신은 간병인을 쓰면 되잖아요. 한 명으로 부족하면 두 명을 쓰고...”“지시연!” 유건의 얼굴은 새까만 먹물처럼 굳어버렸다. 그리고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이라는 게 있어! 장소미는 나 때문에 다쳤어! 그런 사람을 안 돌보면... 나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 “나, 돌보지 말란 말은 안 했어요.” 시연은 억울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오히려 돌보라고 했잖아요. 옆에 있어 주라고요. 진심이에요.” “그럼 왜 이러는데? 왜 이렇게 구는 거야?” “내가 뭘요?” 시연은 허탈한 듯 웃었다. “난 그냥, 당신의 선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거잖아요. 나도 내 선택을 했을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이해돼요?”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하게 웃었다. “네 선택? 명목상 부부?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개소리라고요?” 시연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제안, 처음 꺼낸 사람이 누군지 잊었어요?” 유건은
유건은 능력 있고, 잘생기고, 집안까지 완벽하며, 시연에게도 잘했다. 시연이 그런 사람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이성을 놓고, 실수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제, 시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는 정신 차려야 해.’ ‘그리고 이제 나는, 정말 푹 자야 해...’ 그녀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잘못된 감정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밤새 깊은 잠을 잤다. 시연이 눈을 떴을 때, 팔이 묘하게 무거웠다. 아파서가 아니라, 눌린 느낌. 그리고 고개를 숙여보니, 유건이었다. 그가 침대 옆에 앉아, 시연의 손을 꼭 잡은 채, 팔에 머리를 얹고 잠들어 있었다. ‘어쩐지 무겁더라.’ 그녀는 이 남자가 언제 왔는지, 왜 이러고 있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고, 알 필요도 없었다. 시연은 팔을 힘껏 빼보려 했지만, 여자와 남자의 힘 차이는 너무 컸다. “유건 씨.” 시연은 더 이상 뵈는 게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팔 저려서 미치겠으니까.” “응...?” 유건은 곧바로 눈을 떴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여자의 팔을 풀어줬다. “여보, 일어났네.” ‘그건 나도 알지.’ 시연은 유건의 의미 없는 말에 대꾸하지 않고, 침착하게 침대 옆 호출 벨을 눌렀다. 곧 간호사가 들어왔다. “사모님, 일어나셨네요. 세수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몸이 훨씬 나아졌어요. 퇴원하고 싶어요.” “그렇군요. 그럼 주치의한테 여쭤볼게요.” “네, 부탁해요.” 간호사가 나가고, 시연은 곧장 침대에서 내려왔다. 유건이 그 뒤를 따랐다. “벌써 퇴원하게? 하루쯤 더 쉬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시연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욕실로 들어가, 철컥-남자의 코앞에서 문을 잠갔다. 유건은 멈칫했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손잡이를 잡아보았지만,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어쩔 수
시연의 어투는 담담했다. 하지만 유건의 귀에는, 그 말투가 기묘하게 비꼬는 듯 들렸다. 그는 애초에 굳이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반복되는 비아냥은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내가 팔을 다친 건, 다 너 때문이야!”“네?” 시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정말요...?”“그래!” 유건은 당황했다. 무언가에 쫓기듯 설명하려 들었다.“그때 나는...”“그만해요.” 시연은 그의 말끝을 잘랐다.“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계속 말할래요?”유건은 움찔했다. 차가운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왠지 모를 무력감이 밀려왔다. ‘말해봤자, 뭐가 달라지겠어.’“그래, 안 할게. 가자.”그렇게 그는 시연의 손을 잡고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고씨 가문의 본가였다.본가에 도착하니, 집 안에는 왕성애만 있었다. 고상훈이 입원 중이라 이호민은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집안일은 왕성애가 맡고 있었다.거실에 들어서자 시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모님, 수고스러우시겠지만, 객실 하나 정리해 주세요.”“네...?” 왕성애가 잠시 멈칫하며 유건을 바라봤다. 그런데 유건 역시 미간을 찌푸리며 놀란 눈치였다. 이 얘기는 금시초문인 듯했다.“객실은 왜?”“내가 써야 하니까요.” 시연은 얕게 웃으며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 “이모님, 제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어서 고유건 씨랑 따로 자는 게 편할 것 같아요. 부탁드릴게요.”“지시연!” 유건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왕성애를 힐끔 보더니, 낮게 말했다. “이모님, 먼저 들어가 계세요.”“아, 예예...” 왕성애는 분위기를 눈치채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유건은 시연을 끌고 2층으로 올라가, 침실 문을 닫았다. 눈빛에 분노가 가득했다.“도대체 너, 뭐 하자는 거야? 어?”“왜 소리를 질러요?
“그래?” 유건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말투는 싸늘했다. “그깟 걸로 죽진 않을 거야.”‘이젠 아프다고 유세네.’‘이러면 내가 물러설 줄 알았나?’ 시연은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죽어요.”유건은 움찔하며 눈빛이 갈라졌다. “여보!”“왜 그렇게 쳐다봐요?” 시연은 싸늘하게 눈을 흘겼다. “나 때문에 다친 거예요? 내 앞에서 불쌍한 척은 왜 해요?” 이 말을 끝낸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정말 죽기라도 하면, 장소미는 슬퍼서 엉엉 울 거예요. 어쩌면... 장소미도 따라 죽을지 모르죠.” 그러고는 조롱 섞인 미소로 덧붙였다. “그렇게 되면 너무 좋겠네요. 완전 비극 속의 연인 같지 않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저승까지 함께 간다니... 축하해요.” “지시연!!” 유건의 얼굴은 순식간에 시퍼레졌고, 눈은 타오르듯 번뜩였다. “진심이야? 너, 진짜 날 미치게 만들고 싶구나?!”“당신 마음대로 생각해요” 시연은 더 이상 말 섞을 의지도 없어 보였다. 그리고 왕성애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119 좀 불러주세요. 저 상태로 놔두면 열 때문에 곧 의식 잃을 거예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지시연!!” 하지만 계단을 몇 걸음 오르기도 전에... 쿵! 시연의 뒤에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 이어 왕성애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도련님!”시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왕성애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울먹였다.“사모님... 이제 어쩌죠?”“119 부르세요! 지금 당장이요!”“네, 네!”곧 119가 도착했고, 구급대원들이 유건을 들것에 실었다.“가족 분도 함께 타세요.” 구급대원이 말하자, 왕성애가 시연을 슬쩍 바라봤다. “사모님...?”“전 안 갈 거예요.”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모님, 너무 걱정 마세요. 의사랑 간호사가 잘 돌볼 거예요.”그 말만 남기고, 시연은 진짜로 등을 돌려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시연은 짐 정리는 이미 끝나 있었다. 사실, 딱히 챙길 것도 많지 않았다.그녀는 캐리어 하나, 그리고 작은 캐리어 하나를 꺼내 놓고, 문 옆에 조용히 세워뒀다. 고개를 들자, 진아가 서운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진짜 가는 거야?” “응.” 시연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여기 살 순 없잖아. 언젠가는 떠나야지.”몇 달 뒤면 아이가 태어난다. 지동성이 준 그 작은 집은, 시연이 임시로 머물던 공간이었다.그리고 지동성이 건넨 그 카드에는, 우주의 유학 비용을 감당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금액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는 출산 후, 시연이 아이를 돌보는 도우미를 쓰는 데 쓸 수 있을 터였다. ‘내가 조리원에서 나와 다시 일하게 되면, 어떻게든 살 수 있겠지.’‘그 사람이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건 인정해야 해.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날 도와준 거야.’ 진아도 그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말없이 입술을 내밀었다.“그냥... 네가 가는 게 싫어서 그래.” “못 만나는 것도 아닌데 뭘.” 시연은 진아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우리 집 넓어. 방도 많으니까 자주 놀러 와. 꼭이야.”“응...” 진아는 코끝을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런 멍청이.” 시연은 웃으며 그녀를 안았다. “그래서 너, 남자 친구는 언제 만들 거야?”“나?” 진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 친구 같은 건 안 만들래. 난 그냥... 잘생긴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또 시치미 떼네.’ 시연은 장난스럽게 진아의 목덜미를 팔로 감싸고 속삭였다.“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여자가 먼저 고백할 수도 있는 거야. 여자가 먼저 다가가도 돼. ‘여자가 마음먹고 다가가면, 남자는 무너진다’는 말도 몰라?”진아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그, 그런 거 아냐! 그런 사람 진짜 없다고 했잖아!”‘과연 그럴까?’ 시연은 모른 척, 가볍게 웃었다.“
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마음은, 통째로 꼬여버린 듯 아팠다. ‘아파. 진짜... 미치게 아프네...’ 그래서 더 또렷해졌다. 이 아픔이 현실임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걸.그녀는 유건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냈다. “인제 그만 가요. 늦어서 나도 이만 자야 해요.” 말을 마치며 하품까지 했다. 꽤 피곤한 얼굴이었다.유건은 끝내 시연의 손을 놓았다. 얽히고설킨 마음을 억지로 끊어내는 듯, 조용히.“나도, 당신 자신도 좀 놓아줘요. 유건 씨, 마음이 둘인 거, 그것만큼 힘든 건 없어요.” 그 말만 남기고 시연은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닫히는 정문. 그 앞에 홀로 선 유건은, 주먹을 쥔 채 숨을 삼켰다.‘놓아달라고? 전엔 그랬지.’‘근데 지금은 안 돼. 못 놔. 절대 못 놔.’...다음 날 아침. 최예민은 첫 지하철을 타고 새벽같이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단정히 주차된 포르쉐 카이엔을 발견했다.‘설마... 어젯밤부터 있었던 거야?’차에 다가가지는 않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시연은 이미 세수도 끝낸 상태였다. 우주의 세수를 도와주며 옆에서 웃고 있었다.“사모님, 아침 사 왔어요. 드시고 가세요.” 최예민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네, 고마워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앉았다.우주가 거실로 나오자, 최예민이 서둘러 아이를 돌봤다.시연은 따뜻한 죽을 천천히 먹으며, 무심하게 묻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사모님, 아까 보니까 고 대표님이 벌써 도착해 계시던데요? 매번 이렇게 일찍 와서 데려가세요? 완전 스윗하시다...”‘뭐...?’숟가락을 멈춘 시연은 눈을 깜빡였다.‘그 사람... 어젯밤에 안 간 거야?’‘아님... 새벽부터 또 온 거야?’어느 쪽이든, 그녀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그래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아침을 다 먹고, 우주에게 인사하고 시연은 가방을 멨다. 하지만 정문으로는 나가지 않았다.‘그 사람... 아직 거기
‘손을 잡으라고?’시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요청이야?’ ‘또 왜 이러는 걸까?’‘진짜 미쳤나? 하지만 나까지 같이 미쳐줄 순 없지.’ “당신...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별일 없으면 나 들어가야 할 것...”말을 마치기도 전에, 유건이 성큼 다가와 시연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단숨에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어...!” 순간, 시연은 중심을 잃고 유건의 가슴팍에 안겨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남자의 두 손에 단단히 얽혀 있었다. 두 사람의 손이, 꼭 맞물렸다.“당신, 이 밤중에 왜 이러는데요?” 시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왜냐고?” 유건의 눈에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남자의 타오르는 눈빛은, 오로지 그녀만을 향하고 있었다.유건은 시연의 손을 입술에 가져갔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은 내 아내야. 내 사람이라고. 나 말고, 누구도 당신을 건드릴 수 없어. 설마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미쳤어. 또 시작이네.’ “누가 날 건드렸다고 그래요? 정신 차려요, 고유건 씨.” 시연은 당황과 분노가 뒤섞인 채 반박했다.‘또 그 망상이야? 또 내 사생활 의심하는 거야?’“정말 아니야?”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다시 생각해 봐. 힌트를 줄게. 오늘 있었던 일이야.” “뭐라고요...?” 시연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러다 문득, 머리가 번뜩였다.‘설마... 아버지?’‘맞네, 오늘 하루 종일 정기환이 나를 따라다녔었지.’ 시연의 경호원이자, 동시에 유건의 정보원이기도 한 정기환.“하하.” 시연은 비웃듯 웃었다.“계속 기환 씨를 시켜서 날 감시할 거면, 경호는 필요 없어요. 그냥 데리고 가요.”그녀는 몸을 빼려고 했지만, 유건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헛수고야. 도망친다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남자는 두 팔로 더욱 단단히 시연을 조였다.유건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시연이 향한 곳은 태산요양병원이었다. 즉, 우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시연이 도착했을 때, 최예민은 방을 정리 중이었다.“사모님, 오셨네요.” “네. 우주는요?” 최예민은 우주의 방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다. “교수님과 심리상담 중이에요. 방해될지도 모르니 조금만 기다리시죠.” “알겠어요.” 최예민은 시연에게 물을 내오며 덧붙였다. “우주 상태가 정말 아주 좋아졌어요. 교수님이 확실히 전문가이긴 하시네요.” “정말 수고 많았어요.” “별말씀을요. 전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예요.”시연은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 밤엔 제가 여기 있을게요. 지금 퇴근하고 내일 아침에 다시 와주세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는 내가 보이면 나만 찾잖아요. 어차피 여기 계셔도 특별히 할 일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오랜만에 휴식 시간을 좀 가지세요. 멀리 가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그럼 감사합니다, 사모님.” “천천히 정리하고 가요.”최예민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시연은 가방을 내려두고, 미리 사 온 딸기를 씻기 시작했다. ‘오늘 딸기가 유난히 향긋하네.’ 가을 냄새가 짙게 내려앉은 저녁. 해가 완전히 져갈 무렵, 검은색 카이엔 한 대가 요양병원 앞에 조용히 멈췄다.차 문이 열리고, 긴 다리가 바닥을 디뎠다. 고유건이었다.“형님!” 기환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왔다. “지동성이랑 헤어진 후, 곧장 여기로 오셨어요. 계속 안에서 계십니다.”“그래.” 유건은 짧게 대답하고 곧장 안으로 향했다.하지만 요양병원 입구에서 보안팀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면회 시간은 이미 지났습니다. 지금은 아이들도 다 잠든 시간이거든요.” 유건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밤 9시 50분이었다.‘강제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자는 우주를 깨우게 될지도 몰라. 놀라게 하면... 그건 안 되지.’그는 잠시 고민한 뒤,
“장난 그만 치시고, 여기까지 하자고요.” 시연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시연아!” 지동성은 다급히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가지 마! 제발...!”아버지의 목소리엔 진짜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말도 다 꺼냈는데, 딸은 여전히 받지 않겠단다. 그 순간, 지동성은 절실하게 깨달았다. 딸이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그것도, 뼛속까지.‘이젠 애원으로도 안 되는 거구나...’지동성은 이를 악물며 쓴웃음을 흘렸다. “그냥 가버릴 거야? 그게 네 마음이야?”“무슨 뜻이에요?” 시연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아빠는 이제 오래 못 살아. 네가 이 집도, 돈도 안 가지겠다고 하면, 이 모든 건 결국 소미 엄미랑 소미의 몫이 될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그 말에, 시연의 눈빛이 단단히 흔들렸다.“너희 엄마 말이야.” 지동성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네 엄마... 내가 아무것도 없을 때부터 같이 고생한 사람이야. 지금 이 집, 이 돈, 반은 네 엄마 몫이야. 정말... 안 가져갈 거야?”시연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그래... 우리 엄마는 아버지가 아무것도 없을 때부터 함께했지. 겨우 자리 잡기 시작했을 땐 이미 병에 걸려...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떠나셨고.’‘그리고, 그 자리를 장미리가 차지했어... 떳떳하게 들어와, 우리 엄마의 자리를 당당히 차지한 여자라고...’시연은 말이 없었지만, 지동성은 딸의 흔들리는 눈빛을 읽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손에 봉투를 쥐여주며 말했다. “가져. 원래 너랑 우주의 몫이야.”시연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멀리, 건물 모퉁이 한쪽. 기환은 그 장면을 모두 목격하고 있었다.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어서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지동성은 시연의 손을 잡았던 것을 봤다. 그것도, 두 눈으로 똑똑히.기환은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두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그리고 바로 유
‘고유건... 보기 드물게 화가 나 있었는데... 정말, 나 때문일까?’시연의 마음이 더욱더 복잡해졌다.“형수님.” 기환이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흰 다 알아요. 형님이 진심으로 형수님 좋아하신다는 거요. 정말로 잘해주시잖아요.”“그래요.”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부정하지 않았다.“나한테는 정말 잘해줘요. 근데... 나한테만 잘하는 건 아니잖아요. 장소미한테도 잘하니까요. 아니, 어쩌면... 더 잘하겠죠.” ...다음 날, 시연은 마침 휴무였다. 오랜만에 게으름을 부릴 수 있었고, 거의 정오가 다 돼서야 눈을 떴다. 진아는 출근하면서 식사를 챙겨놓고 갔다.시연이 늦은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지동성이었다.“무슨 일이세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았다.[시연아, 지금 어디야?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장소미 상태가 그 정도면 바쁠 만도 한데... 날 보러 나올 시간이 있나?’“어디서요?” [강울대 뒷길, 거기서 보자.]“좋아요.” 전화를 끊고도 시연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식사를 마친 뒤 옷을 챙겨 입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강울대 뒷골목. 그곳에 도착하자, 지동성은 이미 와 있었다.“시연아, 여기.” 그가 손을 흔들었다.시연은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인데요? 아버지도 바쁘실 텐데.”지동성은 잠시 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알고 있구나?”그는 얼굴빛이 조금 바뀌었다. “하긴, 소미가 다친 건 워낙 큰일이니까... 네가 모를 리 없지.”“설마 그 얘기 하려고 절 부른 건 아니겠죠?” 시연의 말투엔 은근한 짜증이 묻어났다. “용건은 뭐죠?” “알았어, 바로 말할게.” 지동성은 황급히 말을 돌리며, 옆에 두었던 갈색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었다.“이게 뭐죠?”“전에 말했던 집문서야. 너랑 우주 명의로 된 집문서랑 열쇠, 그리고 네가 지난번에 안 가져간 카드도 같이 들어 있어.”
시연은 손에 들고 있던 ‘팸플릿’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말해, 조한나의 상대 남자들... 얼굴은 꽤 괜찮았다.‘인성은 글러도, 눈은 제대로 달린 모양이네.’그렇게 감탄하고 있던 찰나, 시연의 눈앞이 훅 어두워졌다. 누군가 그녀의 두 눈을 가렸다.은은한 민트향의 향수 냄새. 누군지 안 봐도 알 것 같은 그 향기.유건은 시연의 손에서 팸플릿을 쓱 빼내고 나서야, 두 손을 풀었다. “이런 거 보지 마. 예쁜 눈 더럽히지 말란 뜻이야.”‘또 시작이네...’시연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만으로도 유건은 알 수 있었다. ‘나랑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거구나...’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만하지. 내가 잘못했으니까. 조금만 참자.’“오늘 저녁은 같이 못 먹겠어.” 유건은 말투를 낮춰 설명했다. “수액 맞고, 바로 옆 도시로 가야 해. 비즈니스 미팅이 있어.”“나한테 그런 말 안 해도 돼요.” 시연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일찍이 그런 반응을 예상한 유건은 예전만큼 동요하지 않았다.“아니, 해야 해. 오늘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매일 당신한테 보고할 거야.”‘맘대로 하던가.’ 시연은 그저 대꾸하지 않았다. “할 말 다 했어요? 그럼 어서 수액 맞으러 가요.” ‘제발 빨리 좀 가라.’유건은 그녀의 표정에서 ‘귀찮음’ 세 글자를 읽었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내일 오후, 늦어도 저녁엔 돌아올 거야.”“그래요...” 시연은 성의 없는 고갯짓으로 대답했다. 유건은 더 이상 붙잡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뒷모습이 멀어지자, 시연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만큼은 안 봐도 되네. 다행이야.’그리고 몸을 돌리자마자, 기환과 딱 마주쳤다. 예나 지금이나, 그녀를 은근히 지켜주는 사람이었다.기환은 무언가를 들고 있었는데, 시연을 보자 화들짝 놀라 그 봉투를 얼른 등 뒤로 숨겼다. “형수님, 이제 퇴근하세요?”“그건
식사를 마치고, 유건은 약속대로 시연을 진아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기환은 이미 짐을 옮겨놓은 상태였다.“도착했어요. 난 이만 올라갈게요.” 시연은 손을 흔들고 돌아서려 했다. 그 순간, 손이 탁 잡혔다. 유건은 앞을 보며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이 건물, 복도 등이 다 고장 나 있어. 당신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어떡해?”‘진짜 별걸 다 챙기네.’ ‘이럴 필요가 있을까? 지금 우리 같은 사이에?시연은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고유건도 시간이 지나면 알겠지. 내가 애교 부리는 것도, 밀당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다음 날, 시연은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빴다. 오전에 정리해야 할 자료와 진료차트가 한가득, 오후엔 외래 진료까지 있었다.외래 진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병원 로비 쪽이 왁자지껄해졌다.시연은 마지막 환자를 진료하고 차트를 건네며 당부했다. “정해진 날짜에 꼭 다시 오세요.” “네, 선생님.”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시연은 궁금해져서 복도를 따라 걸었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아, 날카롭고 귀에 익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보지 마! 다들 그만 봐!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시연은 잠깐 멍해졌다가, 곧 머릿속에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곧이어 두 눈이 그 사실을 확인해 줬다. 조한나였다.로비 한쪽, 병원 홍보 게시판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의료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환자와 보호자였다.“비켜! 다들 꺼져! 가라고!!” “야, 사진 속 여자랑 똑같은데?” “진짜야? 가슴에 명찰 달고 있잖아.” “맞네, 조한나라고 적혀 있어!” “어머, 저 여의사, 진짜 뻔뻔하네.”“더러워, 손대지 마!” “아악!”조한나는 눈이 벌게진 채, 게시판에 붙은 사진을 찢고 사람들을 마구 밀쳤다. 그리고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소리 질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시연이
유건은 간신히 유지하던 표정을 더는 감추지 못 했다. “내가 보기엔, 네가 너무 모르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든, 우리 관계엔 아무 영향도 없을 거야.” ‘영향이 없다고? 그럴 리가...’ “당신은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난 달라요.” 시연은 입술을 꾹 눌러 담았다. “당신이 괜찮은 사람이란 건 인정해요. 나도 한때는 당신한테 마음이 있었고, 앞으로 쭉 함께할 수 있겠다는 환상도 품었으니까요.” “그럼 계속 그렇게 생각해.”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말하는 유건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 하지만 시연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이젠 그만두기로 했어요.” “그럴 필요 없어...” 유건은 놀란 듯 여자의 손을 붙잡고,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럴 필요 없어, 여보. 난 정말로 장소미 씨를 보살펴주고 있을 뿐이야. 그 이상은 없어.” ‘그 이상은 없다고?’ 시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하나만 물을게요. 대체 언제까지 장소미를 돌볼 생각이에요? 하루? 이틀?”유건은 말이 없었다. 소미의 상태를 생각하면, 금방 끝날 일이 아닌 건 분명했다. 그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루아침에 회복시킬 수 있는 병은 아니었다.“오래 걸릴 거잖아요?” 시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내 입장에선 얼마나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여보...” “그 여자를 보살피고 싶으면, 마음껏 그렇게 해요. 하지만 난, 내 남편이 다른 여자한테 그렇게까지 잘해주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요. 유건 씨, 난 싫어요.”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남자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빼냈다. 허공에 남은 손끝을 바라보자, 유건은 가슴이 싸하게 저며왔다. “나한테... 아무런 미련도 없는 거야?” “있죠.” 시연은 잠시 생각한 뒤, 솔직하게 말했다. “당연히 아쉽고, 조금은 슬플 거예요. 하지만 인생엔 사랑만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을 잃는 건 안타깝지만... 난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