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의 분노가 지금 극에 다다랐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유건을 오래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었다. 이건 진짜로 ‘끝’까지 간 상태라는 걸. “나... 나는 정말 몰라요...” 남자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털썪! 유건이 손에 힘을 풀자, 남자는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윽!” 남자의 가슴이 먼저 바닥에 부딪혔다. “컥, 컥...”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퍽!어떻게든 일어나려 했지만, 유건의 발이 남자의 등을 밟았다. 그리고 완전히 짓눌린 채, 남자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유건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안에 서린 살기는 차가웠다. “살고 싶으면, 당장 그 여자가 어디 있는지 말해.” “그 여자,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렸다면, 넌 끝이야.” “저, 저...” 남자는 공포에 질려 덜덜 떨기 시작했다.하지만 모르는 일을 어떻게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제, 제발... 저, 저는 아무것도몰라요! 제발 살려주십쇼!” 순간, 방 안이 얼어붙었다. 쾅! 남자가 생각할 틈도 없이, 의자가 날아와 등을 강타했다. “윽!” 이어서 그 남자는 온몸이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 그 충격에, 남자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면서 이마에 몇 가닥 내려앉았다. 유건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느릿하게 넥타이를 풀었고, 혀로 어금니를 굴리며 중얼거렸다. “그 입을 다문 대가야.” 유건은 다시 의자를 들어 올렸다. “말할래, 안 할래?” “아, 아...” 남자는 더 이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좋아. 아주 좋아.” 유건은 낮게 웃으며, 다시 힘을 주었다. “그럼 네 뼈가 얼마나 단단한지 끝까지 확인해 보자고.” “유건 씨!” “형님!” “하지 마세요, 유건 씨!” 그 순간, 몇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는데, 장소미는 유건을 뒤에서 안았고, 지한과 민환이 서둘러 유건의 손에서 의자를 빼앗았다. “형님,
“유건 씨, 그렇게 말하지 마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소미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더니, 조용히 물었다. “혹시 오늘 일... 나 때문이에요?” 유건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입술은 단단하게 다물어졌다. “아니야. 소미 씨 탓이 아니야. 그냥... 내 탓이야.” 그는 책임을 떠넘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장소미를 임신시킨 것도, 시연에게 상처 입힌 것도...’‘모두 내가 한 일이었어.’ ‘책임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시연을 놓지 못한 건, 나였어.’ ‘내가 내 욕심을 못 버려서.’ 그 선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유건은 이제야 제대로 깨달았다. 따릉- 유건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부지하에서 온 메시지였다. 유건은 짧게 한숨을 쉬고,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소미를 힐끗 본 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받아요.” 소미가 잔잔하게 웃었다. “저요, 지금 뭐가 중요한지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진 않아요. 지금 가장 급한 건, 지 선생님을 찾는 거잖아요. 그 외의 일들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조용히 덧붙였다. “저는, 유건 씨가 저한테 한 말을 믿어요.” “고마워.” 그 순간, 유건은 미안함과 감사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는 지체 없이 전화를 받았다. “말해.” 지하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게, 유건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알겠어. 바로 갈게.” 전화를 끊자마자, 소미가 먼저 말했다. “전 괜찮아요. 가야 한다면 빨리 가요.”하지만 유건이 곧장 자리를 뜰 리는 없었는데, 유건이 소미의 손에서 약봉지를 가져오며 말했다. “아니, 일단 소미 씨를 집에 데려다주고 갈 거야.” 시연이 아직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소미까지 위험에 노출시킬 수 없었다. “그래요.” 소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나를 쉽게 버릴 순 없겠지.’ 소미를 집에 데려다준 뒤, 유건이 병원으
지한이 서둘러 말했다. “바로 사람들을 보내겠습니다.” “잠깐, 나도 같이 갈게.” 지하도 다시 시연을 찾으러 나갔고, 그렇게 해서 시작된 수색은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시연의 흔적은 없었다. 유건은 링거를 다 맞추고도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았지만, 더는 병실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정민환을 데리고 강울대 후문 쪽으로 향했다. ...차 안. 민환이 지한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응, 확인했어. 우리가 겹쳐서 찾지 않도록 이동할게.” 전화를 끊은 민환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 “형님, 지금까지 확인된 숙소들은...” 하지만, 유건은 듣고 있지 않았다. “형님?” “저기 봐.” 유건의 시선이 길 건너를 향해 있었는데, 민환도 그 시선을 따라가며 고개를 돌렸다. 바로 임진아가 보였다. 진아는 한 여학생과 함께 있었는데, 둘은 가벼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손에는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뭐가요?” “임진아가 저렇게 태평할 리가 없어.” 유건의 눈이 날카롭게 좁혀졌다. ‘제일 친한 친구가 사라졌는데, 임진아의 태도는 너무 평온하잖아?’ ‘임진아와 시연의 사이를 생각하면, 절대 저런 반응이 나올 수 없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 ‘하지만, 임진아의 집이 아니라면? 시연이를 어디에 숨겼을까?’ 그때, 유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에 서 있던 여학생에게 향했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누구였더라?’ 기억력이 좋은 그는, 머릿속을 빠르게 되짚었다. ‘병원! 맞아!’ ‘저 여학생, 시연이랑 같은 과에서 실습하던 여학생이야.’ ‘내가 전에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스쳐 지나가며 본 적이 있어.’ “허.” 유건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민환아.” “네, 형님.” “저 여학생 기숙사 방 번호 알아봐.” “네?” “지금 당장.” 이제야 실마리가 풀렸다.
아주 좁은 기숙사에는 벽 쪽으로 침대가 나란히 두 개 놓여 있고, 그사이에는 작은 책상이 하나 있었다. 그걸로 끝. 더 이상 공간은 없었다. 오래된 기숙사에는 에어컨조차 없었지만, 날씨는 미친 듯이 더웠다. 천장에 매달린 낡은 선풍기가 끽끽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지만, 바람이라고 할 만한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물병과 컵이 있었는데, 컵에 물을 따른 유건이 아무리 둘러보아도 기숙사에서 벌꿀을 찾지 못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꿀은 어디 있죠?” 침대에 등을 돌리고 누워 있던 시연이 움찔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굼뜬 움직임.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였네. 정말 고유건이 여기까지 찾아왔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유건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틀 정도 못 본 사이에 또 더 말랐네.’ 그는 하은을 힐끔 봤다. “아, 꿀이요?” 하은이는 재빨리 알아차리고 부리나케 벌꿀을 찾아 컵에 짜 넣었다. 그리고 공손히 내밀었다. “고마워요.” 유건은 짧게 인사를 건넨 후 자연스럽게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시연을 한 팔로 끌어안았다. ‘땀범벅이잖아...’ 시연은 순간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빼려 했지만 그녀는 힘이 없었다. 유건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곤, 꿀물을 한 모금 마셔 봤다. “딱 적당한 온도네.” 그리곤 컵을 시연의 입가에 가져갔다. “마셔. 천천히.” 조심스럽고도 다정한 남자의 손길. 하은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조용히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고 대표님, 시연이가 아직 밥 못 먹어서 이걸 사 오던 참이었어요.” “그래요? 수고했어요.” 품위 있는 감사를 건네는 남자의 태도에 시연은 꿀물을 반쯤 마시고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더는 안 마실래요.” 유건은 컵을 치우고, 그대로 그녀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그는 안의
“네?” 하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하은은 놀라 허둥대며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고 대표님! 시연이는 제 친구인데, 제가 당연히 돌봐야죠...” “빨리 알려줘요.” 유건은 귀찮다는 듯 단호하게 잘랐다. “말 안 해도 찾아낼 수 있으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학생이 시연이를 챙기는 게 정말 고마워서 그런 거니까 받아주고요.” “아... 네.” 하은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고 대표님.” “아니에요. 갈게요.” ...기숙사 건물 밖. 유건은 걸음을 멈추고 건물을 한 번 올려다봤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지한을 향해 낮게 말했다. “지금 당장 처리할 게 있어.” “알겠습니다, 형님.” ...기숙사 안. 하은이는 방을 들락날락하며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도착하는 배달 상자들... 전부 다 유건이 보낸 거였다. 책상 위는 이미 가득 찼기에, 결국 다른 짐들을 치워야 할 지경이었다. 음식, 생활용품, 필요한 건 전부 다 옮겨야 했다. “일단 밥부터 먹자.” 하은은 도시락을 여는 순간, 진한 냄새가 퍼졌다. 딱 적당한 온도... 하은은 밥그릇을 챙겨 시연을 부축했다. “조금이라도 먹어 봐.” “응.” 시연은 일부러 굶지는 않았다. 한눈에 봐도 성애 이모의 손맛이었으니 말이다. “꺅!” 갑자기 하은이 비명을 질렀다. “뭐야?” 시연이 고개를 들었다. 하은은 핸드폰을 부여잡고 있었다. “무슨 대형 이슈라도 떴어?” “아니, 그게 아니고!” 하은은 말을 더듬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곳엔 하은의 계좌에 5천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알림이 떠 있었다.순간, 시연의 손이 멈췄다. “이게 뭐야?” 하은은 침을 삼켰다. “고 대표님이, 나한테 보낸 거래... 널 돌봐준 거에 대한 감사라는데... 이건 너무 많잖아!” 여자의 말끝이 떨렸다. ‘이건... 장난이 아니야...
502호에 가장 먼저 에어컨이 설치되었고, 바로 옆 방들도 차례로 공사가 진행됐다. 어수선했던 소음이 점점 멀어지며 구경하던 학생들이 하나둘 흩어지자, 하은은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녀는 침대 쪽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며, 씨익 웃었다. “꿀물 좀 마실래? 고 대표님이 보내준 무첨가 최고의 국내산이야. 한 잔 타 줄게.” “응, 고마워.” 시연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하은은 찻잔에 꿀물을 타서 건넸다. 그리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한껏 즐기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와, 진짜 시원하다!” 시연은 말없이 컵을 내려다보며 한 모금 삼켰다. “시연아.” 하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 대표님, 너한테 진짜 잘해 주는 거 같아. 이렇게까지 하는 거 보면.” 시연은 잠시 망설였지만, 작게 중얼거렸다. “돈이 많잖아.” “아, 참.” 하은은 눈을 반쯤 감고 한숨을 쉬었다. “돈이 많은 건 맞지. 근데 돈 많다고 다 이렇게 해? 돈 아까워하는 부자들도 널리고 널렸어.” 그러더니 툭, 시연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한번 잘 생각해 봐. 뭐, 나는 그냥 하는 말이야.”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솔직히, 그녀는 확실히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여자는 없을 테니 말이다. 시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톡 알림이었는데, 유건에서 온 톡이 하나 떴다. [이제 좀 시원해?] 시연은 한참 동안 가만히 화면을 바라봤는데, 답장하진 않았다. 잠시 후, 또 유건에서 온 톡이 왔다. [편하게 쉬어. 내가 미처 생각 못 한 게 있으면, 네 친구한테라도 전해줘.] 시연은 핸드폰을 내려놓은 후,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순간, 그녀는 두려워졌다. ‘고생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하지만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건, 감당하기
“주지한 씨죠?” 하은은 다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제발, 고 대표님께 전해주세요! 시연이가 아주 아파요. 강울대학교병원에 가야 하는데, 제가 못 업겠어요!”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지한의 목소리가 순간 팽팽하게 긴장됐다. [고마워요, 친구분.] “별말씀을요!” 전화를 끊자마자, 하은은 급히 사탕 하나를 까서 시연의 입에 넣었다. “일단 이거 물고 있어. 고 대표님이 금방 올 거야!” 시연은 너무 지쳐서 고개를 끄덕일 힘도 없었기에, 그냥 눈만 천천히 깜빡였다. 하은은 시연의 곁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친구의 식은땀을 닦아주며 지켜봤다. ...그 시각. 지한이 전화를 받을 때, 유건은 수액을 맞고 있었다. 그는 회사 일로 종일 병원에 있지도 못했기에, 그제야 겨우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형님.” 지한은 망설임 없이 보고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제가 갈 테니까 형님은 수액부터...”그는 끝까지 말할 수 없었는데, 유건이 이미 바늘을 뽑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유건의 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형님!” 지한이 다급하게 티슈를 뽑았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를 닦으며 단호하게 물었다. “차는 준비됐어?” “예.” “그럼 가자.”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유건은 이미 병실 문을 나서고 있었다. ...10분도 채 안 돼서, 유건은 기숙사 앞에 도착했다. 밤늦은 시간. 기숙사 출입 문제를 고려해, 지한이 미리 기숙사 관리실과 조율을 끝마쳤다. “형님, 들어가도 됩니다.” 관리실 선생님은 문을 열어줬고, 유건은 거침없이 502호로 향했다. “고 대표님, 오셨...” 하은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유건은 이미 침대 옆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으응...” 시연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힘없는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유건의 가슴이 세게 죄어들었고 숨이 턱 막혔다. 그는 곧장 몸을
강울대학교병원, VIP 병실. 시연이 혹시라도 깨어나 도망칠까 걱정돼서, 유건은 그녀를 자신의 병실로 데려왔다. 그리고 바로 내과 담당의를 호출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닙니다.” 진료를 마친 의사가 차트를 넘기며 말했다. “이번에는 치료를 중단한 탓에 그런 거니까, 수액 이틀 정도 맞으면 괜찮아질 겁니다.” 유건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고,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천천히 물었다. “앞으로도 치료를 계속 받아야 하나요?” “지금 당장은 장담할 수 없지만...” 의사는 현실적으로 답했다. “초기에는 크게 악화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마친 후에도 주기적인 체크와 모니터링은 필수입니다.” 유건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수고 많으셨어요.” “별말씀을요, 고 대표님.” 의사가 나가고, 유건은 조용히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시연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임신으로 이렇게 고생하는 걸 보니 장소미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장소미 또한 앞으로 시연처럼 합병증이 생길 수도 있을 터였다. 유건은 더 이상 선택을 미룰 수 없었다.왜냐하면, 지금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결국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유건도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몇 시간 후. 시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순간,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깨달았다. ‘여긴... 고유건의 병실이야.’ 그리고 유건은 바로 옆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동식 수액 거치대가 옆에 놓여 있고, 남자의 왼손에는 수액 라인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른손으로는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또한 남자 앞에는 노트북이 켜져 있었고, 틈틈이 타자를 치며 업무를 보고 있었다. ‘진짜... 전형적인 워커홀릭이네.’ 그 순간, 시연은 자기가 유건의 침대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민망해졌다. ‘고유건은 소파에서 자고, 나는 침대에서 잤다?’ 왠지 미안해졌기에, 그녀는 팔을 짚고 천천히
문 밖.유건, 은범, 그리고 진주는 침묵 속에 서 있었다.가장 먼저 진주의 핸드폰이 울렸다.“엄마. 네, 이제 끝났어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진주는 은범을 바라보았다.“은범아, 우리 엄마가 집에 빨리 들어오래.”하지만 은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말 한마디 없이 굳어 있었다.그는 무조건 시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진주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럼 나 먼저 갈게.”“응...”은범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절대 시연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그러나 그때, 은범의 핸드폰이 울렸다.강수희였다.“어머니.”[은범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진주를 안 데려다준 거니? 서로 친해지는 건 좋지만, 너무 늦으면 진주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은범은 진주를 한 번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강수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이제 늦었으니, 무조건 진주 데려다줘야 해. 알겠지?]이를 악물며, 은범은 짧게 대답했다.“알았어요.”전화를 끊고, 그는 진주를 향해 말했다.“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어?”진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회의실 문을 가리켰다.“그래도 돼?”“너랑 같이 왔잖아.”은범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너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게 맞지.”시연에게는 나중에 충분히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니까.“가자.”“응.”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건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눈빛 가득한 냉소를 띄웠다.‘역시 믿을 수 없는 놈이었어.’그는 긴 다리를 내디뎌 은범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비꼬는 듯한 미소.“어디 가려고?”“고 대표님...”은범이 답하려 했지만, 유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내가 있는 한, 넌 한 발짝도 못 움직여.”은범은 얼굴을 찌푸리며 침착하게 말했다.“고 대표님, 전 친구를 집에 데려다줘야 합니다.”“헛소리 좀 그만하지 그래?”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몇 걸음 떨어진 곳.노은범과 하진주가 나란히 서 있었다.그리고 시연과 마주쳤다.“시, 시연아.”은범은 당황해 더듬거렸다.진주는 은범을 한 번 바라보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친구야?”“응, 아니... 아니야. 내가 좋아한다던 그 사람이야.”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부정했고, 더 이상 진주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서둘러 시연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뜻밖의 조우에 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교수님이 여기서 회의 중이셔. 놓고 가신 자료를 가져다주러 왔어.”그녀가 유건에게 한 말과 똑같았다.“그렇구나.”은범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연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엔 허공을 잡았다.시연은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다.은범은 순간 멍해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시연아?”시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엔 명확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먼저 가볼게. 그리고 널 방해하면 안 되잖아.”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려 했다.은범은 당황했다.시연이 오해했다고 확신했다.“시연아...”“잠시만요.”진주가 갑자기 시연의 앞을 가로막았다.여자의 직감은 빠르다. 이 짧은 순간에도 진주는 분위기를 감지했다.시연과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말했다.“죄송하지만, 잠깐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어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시간 없어서요. 비켜주세요.”거절이었다.진주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강단 있게 나섰다.그녀는 시연의 팔을 잡았다.“잠깐이면 돼요! 금방 끝날 말이에요.”그녀는 은범을 흘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당신이 은범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오해하신 것 같아요.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냥 친구일 뿐이거든요.”“하고 싶으신 말, 다 하신 거예요?”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실 문 앞에서, 시연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형수님.]“지한 씨.”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건 씨와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당연하죠. 형님도 여기 계세요.]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유건의 무심한 어조.“심폐 프로젝트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 당신이 한 일이에요?”질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바로 이해할 터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그래.]전혀 놀랍지 않았다. 시연은 눈을 감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여자의 침묵에, 유건은 비웃듯 말했다.[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벌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멍청하긴...]유건이 낮게 욕했다.[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간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설명해야 하냐?]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팀에 들어가면 분명 시연의 수입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지시연.]유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나와 관계를 끊는 게 중요해? 아니면 네 미래가 더 중요해?]책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연도 알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결정을 내렸다.“고마워요, 유건 씨.”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다행이네. 이 여자, 결국 받아들였어!’하지만 시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유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예전엔 내가 잘못했어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유건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저 여자, 부와 명예를 누려야 마땅해. 하지만 지금은...’...차에 돌아온 지한은 유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즉, 유건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묵직한 어둠과 슬픔을 느낀 것.‘설마, 또 형수님한테 혼난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엔 진짜로 맞기라도 한 건가?’“형님...”“지한아.”유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가로질렀다.“방법을 좀 찾아봐. 시연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내가 돈을 건네면, 시연이는 절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연이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연이가 돈과 명예를 탐하는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한심해!’...시연은 임진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에 양석현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교수님.”[시연아,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할 말이 있어.]“네, 교수님.”양석현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은 교대 근무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외과로 향했다.양석현은 회진을 마친 후에야 시간을 냈고, 시연을 과장실로 데려갔다.“일찍 왔구나. 앉아.”시연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교수님, 무슨 일이신가요?”‘혹시 내가 1학년 실험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걸까?’“뭘 그렇게 긴장해?”양석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도,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야.”그는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연에게 건넸다.“이걸 작성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거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교수님, 이게... 정말 규정에 맞는 건가요?”“규정대로라면, 맞지 않지.”양석현이 웃었다.“원래는 네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팀에 넣을 생각이었어. 그 자체도 예외적인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아직 대학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양석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