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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황소
“세윤아, 왜 나를 차단한 거야?”

강시헌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아, 맞다. 그날, 강시헌과의 모든 대화를 삭제하면서 함께 차단했었지.’

나는 차갑게 시선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강시헌, 나 분명히 말했어. 우린 이미 이혼했고, 나는 네 회사에서 퇴직했어. 그런데 지금 나한테 찾아와서 도대체 뭘 바라는 거야?”

내 말에 강시헌은 힘겹게 목울대를 넘겼다.

남자의 표정이 흔들렸다.

“우리 이혼...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너를 오해하고, 화내고, 그 감정에 휩쓸려서 충동적으로 한 거야.”

“프로젝트 건도 다 조사해 봤어. 네가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았어. 내가 너를 몰아세운 거,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다시 한번 기회를 줄 수 있어?”

나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남자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혼 확정까지 한 달. 그 사이 강시헌에게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어.’

그는 몰랐다. 내가 이혼을 결심한 이유가 단순히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건 그저 7년의 연애와 5년의 결혼을 망가뜨린 마지막 한 방울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건, 강시헌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나에게서 떠났다는 것이었다.

“너는 내가 송나은한테 프로젝트를 넘겨서, 그리고 내가 뒤에서 너를 음해했다고 생각해서 이혼한 거라고 믿고 있구나?”

강시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폐소공포증이 있는 나를 깜깜한 엘리베이터 안에 혼자 내버려두고, 그 시간에 송나은에게 감기약을 가져다준 순간, 나는 이미 마음을 정리했어.”

강시헌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날 밤을 기억하는 듯했다.

나는 폐소공포증이 있었다. 과거 창고에 몇 시간 동안 갇힌 적이 있었고, 그때 그는 눈물을 흘리며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두 번 다시 그런 일 없을 거야. 항상 네 곁에 있을게.”

그렇게 말하던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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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나은은 계속해서 강시헌이 자신에게 했던 일들을 나열했다. 마치 그것이 그의 사랑이 진짜였다는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강시헌은 송나은이 붙잡은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만해, 송나은. 더 이상 나한테 집착하지 마.” 남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내가 네게 잘해줬던 이유? 그건 네가 세윤이의 젊은 시절과 닮았기 때문이야.” 나는 그 순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그래서, 결국 나를 대체할 사람이 필요했던 거네.’ 하지만 그는, 더 가관인 말을 덧붙였다. “세윤아, 처음 널 만났을 때, 넌 정말 순수하고 사랑스러웠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너와의 관계는 익숙해졌고, 더 이상 아무 설렘도 없어졌어.” “그때 송나은이 내 삶에 들어왔고, 나는 그 감정을 멈출 수 없었어.” “하지만 세윤아, 그래도 난 너를 쉽게 놓을 수 없어.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몇 년인데, 제발... 나랑 다시 시작하자.” 나는 경멸스럽다는 듯 강시헌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 있지?’ 송나은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닦고 한 발짝 내디뎠다. “그럼... 우리 아이는요?”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강 대표님, 정말 우리 아이는 신경 안 써요? 정말 저를 버릴 거예요? 지금 저도 여기서 뛰어내릴 수도 있어요.” 그녀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리 난간 위로 올라섰다. 아래로 격렬하게 흐르는 강물이 보였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두 사람, 이미 아이까지 가졌구나.’ 강시헌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힘겹게 내뱉었다. “미안해, 세윤아. 나은이는... 잘못이 없어. 일단 이 사람부터 안정시키고 올게.” 그렇게 그는 송나은을 따라 귀국했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네.’ 예상했던 일이지만, 이 모든 게 한심해서 나는 한숨을 쉴

  • 사랑의 끝자락   제7화

    “세윤아, 왜 나를 차단한 거야?” 강시헌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고,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아, 맞다. 그날, 강시헌과의 모든 대화를 삭제하면서 함께 차단했었지.’ 나는 차갑게 시선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강시헌, 나 분명히 말했어. 우린 이미 이혼했고, 나는 네 회사에서 퇴직했어. 그런데 지금 나한테 찾아와서 도대체 뭘 바라는 거야?” 내 말에 강시헌은 힘겹게 목울대를 넘겼다. 남자의 표정이 흔들렸다. “우리 이혼...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너를 오해하고, 화내고, 그 감정에 휩쓸려서 충동적으로 한 거야.” “프로젝트 건도 다 조사해 봤어. 네가 아니라는 걸 이제야 알았어. 내가 너를 몰아세운 거,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다시 한번 기회를 줄 수 있어?” 나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남자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혼 확정까지 한 달. 그 사이 강시헌에게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어.’ 그는 몰랐다. 내가 이혼을 결심한 이유가 단순히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건 그저 7년의 연애와 5년의 결혼을 망가뜨린 마지막 한 방울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건, 강시헌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나에게서 떠났다는 것이었다. “너는 내가 송나은한테 프로젝트를 넘겨서, 그리고 내가 뒤에서 너를 음해했다고 생각해서 이혼한 거라고 믿고 있구나?” 강시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가 폐소공포증이 있는 나를 깜깜한 엘리베이터 안에 혼자 내버려두고, 그 시간에 송나은에게 감기약을 가져다준 순간, 나는 이미 마음을 정리했어.” 강시헌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날 밤을 기억하는 듯했다. 나는 폐소공포증이 있었다. 과거 창고에 몇 시간 동안 갇힌 적이 있었고, 그때 그는 눈물을 흘리며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두 번 다시 그런 일 없을 거야. 항상 네 곁에 있을게.” 그렇게 말하던 사람이

  • 사랑의 끝자락   제6화

    “강시헌, 이게 내가 한 일인지 당신이 직접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니야? 그리고 송나은한테도 전해. 그런 쓸데없는 짓 할 시간에 실력이나 키우라고.” 나는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순간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강시헌의 전화번호를 차단하고, 핸드폰에서 번호를 완전히 삭제했다. 메모리 사용량이 너무 커서 휴대폰이 느리게 작동했다. 나는 우리가 서로 알고 지내던 시간부터 뜨겁게 사랑했던 순간까지 담긴 기록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그저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하고, 서로 상처 입히고 입혔던 흔적들이 화면 위에서 하나씩 사라져 갔다. ‘기분이 참 묘하네.’ 어쩐지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지만, 나는 휴대폰을 조용히 주머니에 넣고, 외할머니와 삼촌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는 두 분께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 삼촌은 이미 나를 위해 깨끗하고 따뜻한 방을 준비해 두었다. “세윤아, 방 한 번 둘러봐. 삼촌이 여자들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대충 골랐어.”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는 삼촌. 하지만 방을 둘러본 순간, 나는 삼촌이 결코 ‘대충’ 준비한 게 아님을 알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크림 화이트 인테리어. 심지어 조명조차 내가 예전에 말했던 파란색 스탠드였다. ‘삼촌이 나한테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시다니...’ “너무 좋아요, 삼촌. 고마워요.” 삼촌은 그제야 안심한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짐 정리하고 나와. 곧 저녁 먹자!” 가족의 사랑이 다시 나를 감싸 안았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며칠 동안 집에서 푹 쉬었지만, 집에만 가만히 있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이제 슬슬 일자리를 구해야겠어.’ 예전엔 강시헌과 함께 살기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하루하루 실적을 채우고, 돈을 벌기 위해 바쁘게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냥... 내 마음

  • 사랑의 끝자락   제5화

    비행기 창문 너머로 도시가 점점 작아졌다. 그제야 정말 떠난다는 실감이 들었다. ‘강시헌이 내가 떠난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깜짝 놀랄까? 아니면... 드디어 날 벗어나서 속이 후련할까?’ 내 기억 속에서, 우리는 가장 가까운 연인이었고, 최고의 파트너였다. 서로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모두가 부러워했었다. 강시헌은 부모님을 잃고 혼자가 된 나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앞으로 내가 당신의 가족이 되어줄게.” 하지만 그 후, 그 말은 이렇게 바뀌었다. “부모도 없는 주제에, 가긴 어딜 가겠어?” ‘내게 주었던 위로와 동정은 어디 가고, 어떻게 하면 저렇게 뻔뻔하게 돌아설 수 있을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힘든 관계는 끝내는 게 답이다.” 어딘가에서 들어본 말처럼, 나는 눈을 감고 이 비행기가 나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길 기다렸다. ...비행기가 착륙했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윤아!!”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삼촌이 내 이름이 적힌 피켓을 흔들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삼촌의 옆에는... 외할머니. 여전히 따뜻한 눈빛, 여전히 나를 알아보실 정도로 건강한 외할머니의 모습. “우리 세윤이, 외할머니한테 와봐!” 외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주름진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었다. “우리 착한 세윤이... 얼마나 힘들었어... 이제 외할머니 곁에 있어. 다시는 아무도 널 힘들게 못 하게 할 거야.” 그 손길이 너무 따뜻해서, 그 말 한마디가 너무 따뜻해서, 나는 괜히 눈물이 나올까 봐 웃어버렸다. 삼촌은 옆에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작에 돌아왔어야지! 네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너 혼자 그곳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외할머니가 하루도 걱정 안 한 날이 없었어.” 이토록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었음에도, 강시헌 때문에 나는 자주 찾아가 만

  • 사랑의 끝자락   제4화

    내일이면 이혼숙려기간이 끝난다. 내일이 지나면, 나는 강시헌과 완전히 남남이 된다. 나는 베란다에 둔 작은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 순간, 손가락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반지였다. 내 눈이 깜짝할 새에 반지가 베란다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숙여 반지를 찾으려 했다. 그때, 강시헌이 내 팔을 강하게 붙잡고, 나를 뒤로 끌어당겼다. “뭐 하는 거야!” “위험한 짓 하지 마!” 남자의 눈에는 뚜렷한 걱정과 불안이 서려 있었다. 마치 아직도 나를 신경 쓰고 있는 것처럼.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반지가 떨어졌어.” 그 반지는 강시헌이가 직접 만들어 준 반지였다. 디자인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이었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계속 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지가 떨어지는 순간, 본능적으로 주우려고 몸을 숙였을 뿐이다. 강시헌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고작 반지 하나잖아. 새로 사면 돼. 그런 걸로 위험하게 굴 필요 없어.” ‘고작 반지 하나라고...’ 나는 남자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텅 빈 손가락... 강시헌은 결혼반지를 뺀 지 이미 오래였다. 그런데도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내일, 우리 결혼기념일이잖아.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 같이 보내자.” ‘얼마만의 결혼기념일이지?’ ‘아니, 솔직히 지금까지 제대로 보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 끝낼 때 끝내더라도 마지막으로 예의를 갖춰 끝내자.’ ...다음 날, 결혼기념일. 나는 예약된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점점 지나갔다. 나는 배가 고팠지만, 강시헌의 도착은 늦어지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열어 강시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냥 솔직히 말하지? 오기 싫으면, 괜히 시간 낭비하게 만들지 말고.’ 그러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때, 회사 동료들이 모두 있는 업무용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알

  • 사랑의 끝자락   제3화

    “어? 대표님, 원래 세윤 언니랑 결혼하신 사이 아니었어요?” “야, 조용히 해! 세윤 언니 듣잖아.” “세윤 언니, 그냥 장난이에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테이블 위에 한가득 놓여 있는 망고 빙수와 초콜릿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이걸 보니 나도 확신할 수 있었다. 송나은이 다이어트 때문에 안 먹느라 건강이 나빠질까 봐, 강시헌이 전 직원에게 간식을 사며 그녀를 챙겼다는 사실을. ‘정말 맛보고 싶네. 그 두 사람이 사랑한다는 증거를.’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망고 알레르기가 있고, 초콜릿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에도 그랬다. 강시헌은 나를 쫓아다닐 때도 이렇게 거창한 방식을 좋아했다. 혹시라도 내가 업무에 치여 끼니를 거를까 봐, 회의를 빌미로 날 붙잡아 밥을 챙겼고, 내가 몸이 아픈 상태로 일하고 있으면, 케이크 속에 슬쩍 약을 숨겨 가져와 억지로 먹이기도 했다. 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쓴맛에 당황하는 걸 보고, 강시헌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때 사무실은 우리 둘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는 사람들로 활기찼다. 모두가 뒤에서 우리의 사랑을 응원하고 있었다. ‘지금은 강시헌의 감정과 노력의 대상이 바뀌었네.’ 하지만 감상에 젖어있을 틈도 없었다.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나를 붙잡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며칠 밤을 새웠는지 모른다. 오늘도 결국 야근이었다. 밖이 벌써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강시헌이 내 옆에 와 있었다. “아직도 야근해?” 그가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로 왔어?” 내가 거리감을 두자, 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 프로젝트, 나은이에게 넘기는 게 어때?”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내 귀로 듣게 되니 생각보다도 더 아팠다. “나은이에 대해 요즘 말이 많잖아. 이 프로젝트가 나은이 이름으로 올라가면, 실력에

  • 사랑의 끝자락   제2화

    나는 문을 열고 룸 안으로 들어섰다. 강시헌은 나를 보자 순간적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 “당신 여기서 뭐 해? 혹시 나 몰래 스토킹이라도 하는 거야?” 남자의 목소리는 나를 경계하는 기색이 뚜렷했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이 보낸 메시지잖아.” 그 순간, 송나은이 입을 삐죽이며 강시헌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강 대표님! 그냥 제 장난이었어요. 제가 대표님 폰으로 세윤 언니한테 요구르트 사 오라고 한 건 진짜 농담이었는데... 설마 화난 건 아니죠?” 강시헌의 굳어 있던 표정이 풀어졌다. ‘참 우습네.’ 송나은의 한없이 가벼운 장난, 그리고 강시헌의 묵인. 예전 같았으면 내 가슴이 미어졌겠지만, 이젠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예전처럼 소리치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히려 강시헌이 뜻밖의 행동을 했다. “오늘 나은이랑 그냥 업무적인 자리였어...” 남자의 변명을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니 나는 조용히 요구르트를 내밀었다. 강시헌은 술을 마신 상태라 직접 운전할 수 없었다. 결국 송나은을 먼저 보내고, 나는 강시헌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택시는 도로 건너편에 서 있었다. 나는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강시헌이 내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위험해!” 쌩 하고 지나가는 차량이 내 바로 앞을 스쳤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 좀 보고 다녀.” 남자의 목소리는 다그치듯 날카로웠다. 그리고... 나는 내 손을 꼭 잡은 강시헌의 손을 보았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내가 길을 건널 때마다 강시헌이 내 손을 꼭 잡아주곤 했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이젠 그런 감촉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도로를 다 건너자 나는 그의 손에서 내 손을 조용히 빼냈다. 강시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출

  • 사랑의 끝자락   제1화

    [세윤아, 잘 결정했어! 네가 이렇게 오랜만에 돌아와 줘서 삼촌이 정말 기쁘다.]전화기 너머 한층 밝아진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강시헌이 보였다. 강시헌과 함께 낯선 여자 향기가 따라 들어왔다. 진하고, 달콤했지만, 어딘가 역겨운 냄새였다. “누구랑 통화했어?” 그는 별 관심도 없다는 듯, 내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휴대폰 화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막 대답하려던 순간, 강시헌의 전화가 울렸다. 곧장 사람을 녹일 것 같이 간드러진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 대표님! 며칠 전에 약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덕분에 감기 증상이 좀 나아졌어요. 대표님 없었으면 저 어쩔 뻔했죠?] 강시헌이 순간적으로 스피커 음량을 낮췄다. 이런 행동 자체가 이미 매우 수상쩍었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네.’ ‘우린 어차피 이혼을 앞두고 있으니까’ 나는 조용히 내 짐을 정리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 자신을 위한 따뜻한 우유 한 잔을 준비했다. 강시헌은 방금까지도 전화기 속 달콤한 목소리에 빠진 채로, 이내 습관적으로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강시헌은 방금 전화기 너머로 다정한 대화를 나눈 뒤, 소파에 앉아 평소처럼 신문을 넘겨보고 있었다. 그런데 늘 내가 그를 위해 늘 내가 준비해 두던 허브차가 없다는 걸 깨닫자, 비로소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강시헌의 표정이 눈에 띄게 짜증스러워졌다. “엘리베이터 고장 났을 때 내가 못 구해줬다고 이러는 거야?” “나은이 친척이 의사인데, 당신 폐소공포증 별거 아니라더라. 그렇게 유난 떨 필요 없어.” “그리고 당신이 먼저 이혼하자고 해서 내가 받아들인 거잖아. 근데 왜 하루 종일 이런 얼굴이야?” 그날 밤, 나는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다 엘리베이터에 갇혔다. 설상가상으로 정전이 되었고, 휴대폰 배터리도 거의 바닥이었다. 그 와중에 폐소공포증이 도지면서 나는 공황 상태로 손을 벌벌 떨며 강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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