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목소리는 금방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정말이에요? 어디 봐요.”“프린스턴, 스턴퍼드, 캘리 공대 학생들 전부 이 전업주부 밑에 있어요.”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헉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반하준의 비서 역시 직원들의 대화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지만 단지 그들보다 침착한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그는 반하준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ALI 수학 경시대회 조직위원회에서 참가자 정보를 잘못 입력한 게 틀림없어요. 지난 몇 년간 ALI 수학 경시대회 금상을 수상한 참가자들은 전부 해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최고 엘리트들이거나 국내 명문 대학의 학자들이었어요. 그런데 전업주부가 어떻게 수학 경시대회에서 그것도 1등을 하겠어요. 정말 그렇다면 ALI 그룹 명성도 망가질 텐데요.”비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직원이 휴대폰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예선 1등 참가자는... 강민아, 나이 27세, 고연대학교 학사, 졸업 후 7년 동안 전업주부로 지내...”ALI 그룹 공식 홈페이지에 로그인하면 확인할 수 있는 참가자들의 정보였다.전국적으로 많은 기대를 받는 이 수학 경시대회는 참가자들이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최고의 교육 기관으로 진학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그렇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대기업과 명문 대학에서 먼저 연락할 수 있도록 자기 이력서를 공개한다.상위 100명의 참가자 중 학사는 강민아 한 명뿐이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매년 수많은 상을 받거나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해외 유학생들인데 강민아의 이력서만 텅 빈 공백과 함께 ‘전업주부'라는 네 단어로 7년간의 삶을 요약했다.비서의 머릿속이 윙윙거렸다.“이름이 뭐라고요?”“강민아요. 엄 비서님 보세요.”직원이 엄규민에게 휴대폰을 건네자 엄규민은 눈을 크게 뜨며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러고는 허허 실없는 미소를 지었다.“어떻게 이런 우연이, 세상에 이런 재밌는 우연도 있네요.”엄규민은 불안한 마음으로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반하준은 강민아가 고연대학교를 졸업하
“만약 선배가 박사 학위까지 따고 쭉 과학 연구의 길을 걸었다면 지금쯤 저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됐을 거예요.”“사랑에 눈이 멀어도 정도가 있지!”“이력서에 7년 동안 헛짓거리를 했다고 써야 했네요.”“신이 절대적으로 뛰어난 두뇌를 주었는데 그걸 남편을 챙기는 데 쓰다니.”“근데 고 팀장님 선배는 왜 또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했대요?”고성호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저 한탄만 했다.“언젠가 제가 선배랑 같이 일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가 밖으로 나왔지만 직원들은 여전히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강민아가 갑자기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했다는 건 분명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에요.”“남편의 응원을 받고 대회에 참가한 걸 수도 있잖아요?”“남편이 응원했으면 애초에 학사 학위만 땄겠어요?”“어휴, 이래서 남자한테 기대면 안 된다니까. 공부도 못하고 사랑도 못 받는데 결국엔 스스로 자기 인생 살아가야죠.”직원들은 엘리베이터를 나서며 중얼거렸다.“엘리베이터 안이 너무 추워요.”그곳에는 반하준과 엄규민만 남았고, 엄규민은 내내 반하준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ALI 수학 경시대회 예선에서 1등을 한 사람은 분명 대표 사모님이 맞다. ‘저 사람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아무 말이나 뱉네!’반하준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한참 동안 그를 기다리고 있던 부신 그룹 주주들은 반하준을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대표님, 축하드립니다. 사모님께서 ALI 수학 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네요.”“대표님, 사모님께서 언론을 들썩이게 했어요. 온갖 기자들이 인터뷰하러 찾아갔다고 들었어요.”“하준아, 곁에 네 사람들을 둬야지. 지금 당장 네 아내를 회사로 들여. 수학에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네. 당장 기술팀으로 보내. IBM 대표도 이 소식을 듣더니 우리 부신 그룹에 대한 신뢰가 한층 두터워졌대. 기술팀에 6천억 더 투자할 의향이 있다고 하더라.”반하준은
기자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회의실은 적막감이 감돌았다.강민아는 이어지는 인터뷰 내내 부신 그룹과 반하준에 대해서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대형 스크린에서 IBM 대표가 우리말 사전을 꺼내더니 원하는 단어를 찾아 설명을 읽어 내려갔다.“언급, 어떤 문제에 대하여 말함... 가치, 사물이 지니고 있는 쓸모... 언급할 가치가 없다... 아하!”그가 놀라운 듯 말했다.“하준 씨, 그쪽 아내에게 당신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네요.”그는 두 손을 벌리고 컴퓨터 화면을 통해 회의실에 서 있는 반하준을 바라보았다.“그쪽 아내가 당신을 전남편이라고 부르는데, 수학 경시대회 1등을 한 부인과 이혼을 했나요?”회의실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뀌며 다른 주주들은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대표님, 사모님과 이혼하셨어요?”“기자 앞에서 전남편이라고 하던데 정말 이혼하셨어요?”“그냥 싸웠다더니 정말 이혼하셨어요? 그럼 부신 그룹에 영입할 수는 있는 건가요?”반하준이 싸늘한 기운을 뿜어내며 말하려는데 엄규민이 황급히 휴대폰을 반하준에게 건넸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인스타에 공식적으로 이혼을 발표했어요.”반하준은 엄규민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휴대폰 속 강민아의 인스타를 응시했다.순식간에 남자의 턱이 굳게 다물어지며 두 눈엔 점점 더 매서운 기운이 감돌았다.휴대폰을 꺼낸 순간 문득 자신의 계정으로는 강민아의 게시물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강민아는 진작 그를 차단했고 그 시각 반하준의 계정은 읽지 않은 메시지로 가득 차 있었다.대부분은 아내가 전국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을 축하하는 메시지였는데 강민아의 게시물을 본 일부 사람들은 정말 이혼한 게 맞냐고 묻고 있었다.반하준은 보이지 않는 힘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듯했다.강민아의 게시물을 캡처한 사진을 클릭하니 이혼합의서를 찍은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경사 났네.]그 네 글자가 마치 수백만 개의 바늘이 되어 반하준의 눈을 마구 찌르고 모세혈관을
“강민아의 양아버지가 은혜를 이용해 하준이를 협박하니까 어쩔 수 없이 결혼했죠. 이제 됐어요. 하준이가 드디어 그 촌스러운 시골 여자를 쫓아냈잖아요.”말하며 연진숙은 따사로운 봄 햇살처럼 환한 미소로 표정을 싹 바꾸었다.“다들 눈 똑바로 뜨고 서경에서 수준 맞는 재벌가 아가씨 좀 찾아봐요. 내가 하준이에게 맞선 주선할 테니까. 우리 귀한 손자가 크면서 엄마 사랑을 못 받아서야 되겠어요?”사모님들은 하나같이 들떠서 연진숙에게 어떤 며느리를 원하는지 물었다.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 외쳤다.“어머, 강민아가 기자와 인터뷰했네요. 대단해요. ALI 수학 경시대회 예선에서 1등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대요.”강민아의 이름이 들리자 연진숙은 바로 입을 삐죽거렸다.다른 재벌가 사모님들도 큰 관심을 보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ALI 수학 경시대회는 엄청 권위 있는 대회잖아요. 결승에서 상위 20위 안에 들면 대기업, 전문 기관, 명문 대학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난리일 텐데.”“제 기억엔 고작 학사 학위만 따낸 강민아가 어떻게 수학 경시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죠?”“혹시 조직위원회에서 강민아가 반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걸 알고 체면을 생각해 1등을 준 게 아닐까요?”“그건 아닐 거예요. ALI 수학 경시대회 조직위원회는 모두 명문대 출신의 고능한 학자들이에요. 게다가 강민아는 인터뷰에서 이혼했다고 했으니 반씨 가문 사모님의 덕을 절대 볼 수가 없어요.”연진숙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ALI 그룹과 부신 그룹이 협업하고 있어요. 내가 하준이한테 ALI 그룹 측에 연락하라고 할게요. 부신 그룹 때문에 그 여자애를 봐줄 필요는 없다고.”말하며 그녀는 웃었다.“조직위원회가 부신 그룹 때문에 예선 1위에 올려줬는데 주제도 모르고 인터뷰까지 하네요. 본인이 어떤 수준인지 정말 모르는 건가. 기자들 앞에서 반씨 가문과 선 긋는 건 오히려 잘된 일이에요. 결승에서 한 방 먹어봐야 정신 차리지. 허, 기자들이 주목하는 만큼 큰 창피를 당할 거예요.”연
눈을 뜬 반하준이 휴대폰을 집어 들자 강나현이 만든 ‘서경팸' 단톡방에 읽지 않은 메시지가 수십 개 쌓여 있었다.평소에도 강나현은 단톡방에서 서경 재벌 2세들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지만 반하준은 지금 그들이 열띤 토론을 이어가고 있는 게 자신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서경팸’ 단톡방을 클릭하자 누군가 ALI 수학 경시대회 예선전 명단을 보내며 특별히 강나현을 언급했다.[대회 1등이 네 언니인데?][나현, 네 언니가 그렇게 똑똑해? 그런 얘기 한 적 없었잖아.]지켜보던 누군가가 겁도 없이 단톡방에서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이혼하자마자 전국 최대 수학 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네. 전남편 반하준 씨는 소감이 어때?]이때 강나현이 튀어나와 반하준을 태그하며 말했다.[7일에 민아 언니가 심은호랑 같이 나타났던 거 기억나? 그날이 경시대회 예선 당일이었어.]강나현은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그날 민아 언니 시그니엘 떠나지 않았어? 그날 인터넷도 다 끊었다며 대체 어디서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한 거야?]반하준이 답했다.[심씨 가문에 가서 하루 동안 그곳에 머물렀어.]강나현은 충격받은 듯한 이모티콘을 보냈다.[심씨 가문에서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했다고? 심씨 가문 심한기 교수가 서경대 수학과 교수잖아. 그렇다면 설마...]강나현의 말에 단톡방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설마 강민아가 대회에 참가할 때 심 교수가 옆에서 도와준 거야?]강나현이 대꾸했다.[누가 알겠어. 내가 알기론 ALI 수학 경시대회는 온라인으로 진행되는데 대회 규칙상 온라인에서 자료를 찾을 순 있지만 문제를 유출해선 안 되고 그 누구와도 문제에 관해 토론해서는 안 돼. 하지만 온라인은 빠져나갈 구멍이 충분하잖아.]서경팸 사람들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그게 맞을 거야. 7년 동안 주부로 살았는데 어떻게 수학 지식을 아직도 기억할 수 있어. 심씨 가문에서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했다면 심한기가 부정행위를 도왔을 확률이 높지.]강나현이 단톡
반하준의 표정이 확 굳어지며 깊고 어두운 눈동자엔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 같았다....7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아온 여자가 수학 경시대회 1등을 했다는 소식에 온 인터넷이 열광하는 동안 의심의 목소리도 곪아가고 있었다.강민아의 이름은 하루 종일 인기 검색어에 올랐고 뉴스 인터뷰로 그녀에 대한 관심은 절정에 달했다.저녁에 한 인터넷 블로거가 강민아의 스승이 서경대 수학과 학장인 심한기 교수라는 소식을 전했다.수천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이 블로거는 수학 경시대회 예선전 당일 강민아가 심한기 학장의 집에서 온라인으로 문제를 풀었다는 내부 정보를 입수했다.이 블로거는 강민아가 심한기에게 문제를 유출한 후 심한기가 화이트보드로 문제를 풀고 답을 직접 적어 강민아가 그대로 답을 베낀 것으로 의심했다.이 때문에 강민아가 예선에서 단숨에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거다.[7년 차 주부가 ALI 수학 경시대회에서 이렇게 높은 점수를 받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유명 블로거가 문제를 제기하자 인터넷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일부 네티즌들은 대회 당일 강민아가 심씨 가문 근처에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공개했고, 서경대 학생들도 강민아가 과거 심한기가 가장 아끼는 학생이었다는 사실과 강민아를 서경대에 영입하기 위해 심한기가 고연대의 한 교수와 얼굴을 붉힐 정도로 다퉜다는 사실을 인터넷에 폭로했다.곧이어 서경대 교내 게시판에 한 수학과 학생도 글을 올려 토론에 열기를 더했다.[강민아는 자주 심씨 가문에 가서 우리랑 같이 문제를 풀었고 ALI 대회를 준비한 지 한 달도 채 안 됐어. 심한기 교수도 특별히 신경 써줬는데 과거 강민아가 교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결혼한다며 자퇴했어도 심씨 가문에 와서 수업 듣는 걸 허락했어.]서경대 학생은 본인 말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심씨 가문에서 강민아의 사진을 몰래 찍은 것까지 올렸다.이제 강민아와 심한기가 밀접한 사이라는 게 사실상 맞다고 밝혀졌다.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익명의 계정이 그 글에 자신의 추측을 게시했
“주부는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할 자격도 없다!”예선 발표 이후 ALI 수학 경시대회 조직위원회에선 전화가 끊기지 않았다.ALI 그룹이 수학 경시대회를 주최한 이래 가장 큰 신뢰성 위기를 겪고 있었다.강민아의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온라인 댓글이 늘어나자 대회 조직위원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했다.“수년간 온라인 대회에서 5대의 카메라로 여러 각도에서 참가자들을 지켜보는데 우리 심사위원을 뭐로 보고!”“오합지졸들이 한데 뭉쳐서 청원을 올리면서도 참가자 중 누구도 감히 공개적으로 나서지 않아요. 전부 학교 이름만 적는데 자기들이 정말 학교 대표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학교가 전부 망신을 당하게 생겼어요!”“우리 심사위원이 강민아 씨 문제 푸는 과정을 세 번이나 살펴봤는데 부정행위 의혹은 없었어요. 인터넷 사람들이 우리를 건드린 건 큰 잘못이에요.”“위원장님,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가만히 있으면 우리를 가마니로 본다니까요.”가마니 취급을 받는 칠순의 노인, 하성훈 위원장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명령을 내렸다.“대중들에게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해야죠. 내일 모든 플랫폼에 강민아 씨 대회 참가 영상을 공개하세요. 부정행위를 했는지 안 했는지 자신들 눈으로 똑똑히 보라고 하죠.”... 강민아는 한밤중에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강민아 씨, 인기 검색어 봤어요? 지금 예선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요.”강민아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네, 봤어요.”그러자 기자가 물었다.“심한기 교수님 댁에 가서 예선 문제에 답변한 게 사실인가요?”강민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네, 맞아요.”전화를 받고 있던 기자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기자의 이름은 지유빈, 승덕 학교 문 앞에서 강민아와 정이를 옹호했던 그 여기자였다.강민아가 그녀에게 말했다.“제가 교수님 댁에서 문제를 풀었다고 해서 교수님이 제 부정행위를 도왔다는 증거는 없어요. 이 일이 교수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전 당시 문제를 풀기 위해 교
강민아는 통화버튼을 눌렀다.“심은호 씨.”그녀의 차분하고 정중한 목소리가 늦은 밤 통화하는 애매한 분위기를 날려버렸다.이어 남자의 자상한 중저음 목소리가 들렸다.“검색어 봤어요.”강민아가 서둘러 물었다.“교수님은 괜찮으세요?”“벌써 주무세요.”심한기가 인터넷 가십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을 확인한 강민아는 안도했고 심은호가 말을 이어갔다.“편히 주무시라고 제가 몰래 수면제 두 알을 넣었어요.”“...”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교수님께서 인터넷 댓글 보고 화 많이 나셨죠?”“그쪽 부정행위를 도왔다는 모함이 아니라 4년 전에 장기명과 일어났던 갈등이 다시 언급되어 화가 나서 몸을 떨더라고요. 모두가 수재인 장기명을 질투해 아버지가 일부러 짓밟았다고 생각해요.”강민아는 죄책감, 양심 때문에 서경대를 자퇴한 후 무의식적으로 서경대와 관련된 모든 뉴스에 귀를 닫았다.그래서 자퇴 후 심한기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장기명은 저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강민아가 입을 열었다.반진경의 남편이었던 장기명을 가족 모임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늘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중후한 외모에 수수한 옷차림을 한 그는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사람 표정을 잘 읽고 부지런히 움직여서 반씨 가문 어르신들도 트집을 잡지 못했다.강씨 가문을 둔 강민아에 비하면 장기명은 정말 무일푼이었다.외딴 변두리 도시에서 태어나 가난한 집안에서 힘들게 공부해 하성 사범대에 입학한 뒤 다시 피나는 노력으로 서경대에 들어가 박사 학위를 받고 서경대에 남아 교직에 몸담고 있었다.반진경은 그의 지혜롭고 섹시한 두뇌에 매료되었다.올해 초 반진경은 장기명이 학장이 되는 건 정해진 사실이며 서경대에서 가장 젊은 학장이 될 거라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다녔다.강민아는 장기명도 수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장기명과 교수님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요?”“4년 전에 장기명이 발표한 논문 못 봤죠? 보내줄 테니까 한번 봐요.”강민아는 의아해하며 노트북을 손에 들
강나현은 다급한 어조로 강민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이 모든 게 강민아가 우리를 해치려고 짠 계획이에요!”그런데 얼굴 전체가 돼지처럼 부어올라 말을 해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고 목소리가 어눌하게 들렸다.그런 그녀의 말에 강성진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서둘러 벨트를 반으로 접은 뒤 강나현의 콧대를 조준해 휘둘렀다.“민아랑 내 부녀 사이 이간질할 생각 마!”강나현은 당황했다. 강성진이 왜 갑자기 강민아 편을 드는 걸까.“아빠가 키운 자식은 저예요! 강민아랑 무슨 감정이 있다고 그래요? 애초에 데려올 생각도 없었잖아요!”“닥쳐!”강성진은 화가 났다. 그의 평판은 무너졌지만 강민아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앞으로 그녀에게 의지해야 할 일이 많은데, 강나현이 대놓고 헛소리하는 걸 그냥 둘 리가 없었다.강성진이 소리를 질렀다.“테이프 가져와!”작고 하얀 손이 검은 테이프를 건넸다.강기성은 강성진에게 테이프를 건네는 김예나를 보고 날카로운 눈썹을 들썩였다.강성진이 테이프를 찢자 강나현이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아빠, 뭐 하는 거예요?”강성진이 매섭게 그녀를 노려보았다.“네 망할 입을 막으려는 거지!”강성진은 본인과 강민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강민아가 강씨 가문에 돌아온 지 9년이 지났어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건 손에 꼽힐 정도였다.게다가 둘은 한때 팽팽하게 맞서 싸운 적도 있었다.하지만 이제 강성진은 강민아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다.“아빠! 하지 마요!”강나현이 비명을 질렀지만 강성진의 행동에 전혀 저항하지 못했다.강성진이 곧장 테이프로 그녀의 입을 감자 김예나는 한쪽에 서서 진흙탕처럼 혼탁한 눈빛으로 싸늘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비슷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한때 강나현은 그녀를 화장실에 가두고 테이프를 붕대 삼아 눈과 머리, 입, 코를 감아 숨도 못 쉬고, 살려달라고 애원할 힘조차 없게 만들었다.그렇게 그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며 어둠 속에 잠식되어 갈 때 가위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강나현은 강성진의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고 상황을 뒤집을 희망이라도 본 듯 서서히 안도했다.‘그래, 이제 강민아가 맞아서 이빨이 뽑힐 차례야!’강성진은 강나현의 휴대폰 앨범 속 강민아와 관련된 영상을 지우고 숨을 고르더니 손을 들어 또다시 강나현의 뺨을 때렸다.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강나현의 얼굴을 강타했다.강나현의 입에 머금었던 솜뭉치가 끈적끈적한 피와 섞여 바닥에 튀어나왔다.“강나현, 이 망할 것! 날 해친 것도 모자라 민아까지 해치려고 들어? 강씨 가문을 무너뜨리고 싶은 모양이구나! 내가 오늘 너 때려죽인다.”강성진은 당장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아니에요!”강나현이 피를 뱉자 혀끝에는 온통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소리를 질렀지만 그녀의 설명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강성진은 왜 그녀를 믿지 않는 걸까.휴대폰을 강나현에게 던진 뒤 강성진은 벨트를 풀었다.강나현은 강성진이 벨트로 자신을 채찍질하려는 것을 보고 겁에 질린 표정을 드러냈다.그 순간 강성진의 휴대폰이 울렸다.벨트로 강나현을 한 대 세게 내려친 뒤 다른 한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여보세요.”강성진은 발신자를 확인한 후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들어와요.”강승 테크의 주요 주주 몇 명이 들어왔고 맨 앞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성진, 지금 여론이 자네한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 옴 쪽에서는 입찰에서 빠지려고까지 해!”강성진은 그 말에 덩달아 조바심을 냈다.“네? 어떻게 멋대로 발을 뺀다는 거죠? 지금 당장 옴 테크 쪽 임원에게 연락해 봐야겠어요!”또 다른 주주가 강성진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지금 어디든 자네가 나서면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다는 걸 몰라? 사람들 웃음거리가 되고 싶어?”“난...”주주들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우린 고심 끝에 만장일치로 자네가 먼저 대표 사임 발표를 하길 바라네. 그래야 자네나 회사에 대한 불리한 여론이 잠잠해질 거야.”“어떻게 강승
그러자 강성진은 강나현에게 소리쳤다.“민아를 좀 봐! 우리 회사를 위해서 애쓰고 있잖아!”강민아가 덧붙였다.“그런데 오늘 파티에서 공개된 영상이 서경 상류층에 퍼졌어요.”그녀는 부드러운 한숨을 내쉬며 강나현에게 물었다.“나현아, 넌 상류층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니까 가서 확인해 봐. 다들 우리 집 얘기하고 있는지.”강나현은 심장이 철렁하고 소름이 돋았다.강민아가 지금 그녀를 골탕 먹이고 있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강성진이 곧바로 강나현을 재촉했다.“휴대폰 내놔.”강나현은 두 볼이 부어올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강민아가 또다시 함정을 파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그녀는 강성진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곧바로 강성진이 그녀의 뺨을 또 때렸고, 이미 빨갛게 부어오른 뺨 사이로 새빨간 피가 스며 나왔으며 살갗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강성진은 그녀의 앞에 서서 내려다보며 명령했다.“두 번 말하게 하지 마!”강성진의 위협적인 압박에 강나현은 순순히 휴대전화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부은 얼굴로 휴대폰 잠금이 풀리지 않자 지문으로 해제한 뒤 카톡 채팅 기록을 살펴보았다.곧 여러 명이 친구 추가 요청을 보냈고, 강나현을 삭제하지 않은 재벌 2세들이 파티에서 강나현이 당당하게 강성진이 바람피운 것을 공개한 영상 링크를 보냈다.[강나현, 너 멋있다!][나현, 이게 네가 말한 빅 뉴스야?][역시 너야. 나오자마자 아빠부터 건드리네. 강나현, 용감해! 너는 내가 인정한다!]강성진은 강나현을 칭찬하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두 눈에 담긴 불길이 거세게 번졌다.한심한 재벌 2세들은 부모에 대한 불만이 많았고, 강나현이 파티에서 보여준 행동은 그들에게 ‘모범’ 역할을 했기에 강나현을 숭배하기 시작했다.강나현은 소파에 앉아 강성진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발바닥부터 올라오는 한기가 온몸을 휩쓸고 팔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래위 치아가 달달 떨리며 서로 부딪혀 딱딱 소리를 냈다.“아빠...”강성진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강나
강민아는 눈을 깜빡이며 물잔이 강나현의 가슴을 강타하고 뜨거운 물이 마침 강나현의 얼굴에 튀면서 그녀의 얼굴도 씻기는 것을 바라보았다.“아악! 젠장!”뜨거운 물을 뒤집어쓴 강나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물이 그녀의 얼굴에 있던 핏자국과 뒤섞이며 연분홍색으로 바뀔 때쯤 그녀가 허둥지둥 소파에서 일어났다.“죄송해요...”김예나는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어두운 동공엔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이런 망할!”강나현은 욕설을 내뱉으며 뒤에서 쿠션을 잡아 김예나를 향해 세게 내리쳤다.김예나는 피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강나현이 던지는 딱딱한 물건에 맞아 머리에 피가 난 적도 있는데 이까짓 쿠션쯤이야.강기성이 손을 뻗어 쉽게 쿠션을 낚아채더니 김예나를 등 뒤로 보내면서 쿠션을 옆으로 던졌다.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예나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그의 눈에 강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미친개 같았다.강나현은 입에 솜을 물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당장이라도 김예나를 산 채로 잡아먹을 것 같은 위협적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일부러 그런 거야! 왜 아직도 우리 집에 살게 놔두는 거야? 저번에 내 그릇도 깨고, 내 옷도 잘못 빨고, 내 방 창문도 열어놔서 엄청나게 큰 벌레가 내 침대에 기어들어 왔어!”김예나는 벌벌 떨며 강기성 뒤로 숨었다.강나현의 말이 맞다. 일부러 그랬다.강기성의 손에 이끌려 강씨 가문에 살게 되면서 강나현은 일부러 그녀에게 집안일을 시켰다.김예나도 기꺼이 도우미를 자처했는데 청소도구를 들고 강나현 방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하지만 강씨 가문의 다른 도우미들이 너도나도 일을 도와주는 탓에 강나현의 방을 꼼꼼히 뒤져 불리한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강나현에게 학창 시절 겪었던 괴롭힘을 하나하나 되갚아주는 것뿐이었다.2년 내내 강나현에게 괴롭힘을 당했기에 강씨 가문에서 강나현에게 했던 복수는 그녀가 한 짓에 비하면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어디서 목소리를 높여?
그녀가 강기성에게 약을 먹이고 나서야 그는 조금 나아질 기미가 보였다.강기성은 이 집안에서 강성진에게 맞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강나현은 어렸을 때부터 강성진에게 매를 맞으며 점차 폭력을 동경하게 되어 여성의 정체성을 버리고 남자 무리에 어울리려 했다. 마치 자신도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가 되어야만 매 맞는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는 것처럼.“그 사람이 도민영을 아끼는 것처럼 보여도 예전에 때려서 도민영 얼굴이 부은 걸 봤어. 난 어렸을 때부터 도민영이 저 사람한테 맞아서 머리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어젯밤에 왜 오빠를 때린 거야?”강기성은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내가 사람을 시켜서 친부모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았어.”강기성이 그녀를 돌아보았다.“강씨 가문은 남자가 물려받아야 한다면서 내가 친부모에게 가면 강씨 가문 대가 끊길 거래.”말하며 강기성이 경멸하듯 비웃었다.“난 언젠가 저 사람 죽여버릴 거야.”그저 홧김에 하는 말이었다. 강성진의 피가 튀는 것조차 더러운데 아무 상관 없는 사람 때문에 자신의 앞길까지 망칠 필요는 없었다.강민아는 숟가락으로 강기성에게 포도당 물을 먹여주었다.“언젠가 우리가 크면 저 사람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날이 올 거야.”도민영이 아이를 바꿔치기했다는 걸 강성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강기성은 그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하지만 고리타분한 마인드와 강나현의 출생 이후 강성진은 큰딸을 되찾으려는 생각을 접었다.“다들 이만 돌아가세요.”직원들에게 말하던 강민아는 자리에 있던 임원들과 주주들이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먼저 입을 열었다.“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단상 위에 꿇고 앉은 그녀의 발치에는 아직 기절한 척 시늉하는 도민영이 있었다.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임원들도 마음을 진정시켰다.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강민아의 차분한 모습은 임원들에게 구원의 지푸라기와 같았다.강민아는 심은호의 손바닥 위로 손을 올려놓으며 그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나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강성진에게 설명했다.“아빠,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올린 영상이 아니라고요!”강성진은 이제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과 어린 비서의 동영상이 폭로되었고, 게다가 폭로한 당사자는 그의 잘난 딸이었다.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행복한 얼굴로 단상 아래에 있는 임직원들에게 두 딸이 강승 테크에 입사해 온 가족이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그의 열정적인 연설이 아직도 귓가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효녀 강나현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이다.강성진은 당장이라도 강나현의 목을 비틀어 머리를 공처럼 차버리고 싶었다.“개자식,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강성진은 발을 들어 강나현의 머리를 세게 걷어찼다.이대로 머리를 박살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강나현은 겁에 질려 오줌까지 지리며 서둘러 기어서 도망쳤다.그때 강민아를 돌아보았다.‘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냥 내버려두진 않겠지?’그런데 강민아가 무릎을 꿇고 앉아 도민영의 어깨를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엄마, 일어나봐요!”강민아가 손을 뻗어 도민영의 인중을 누르자 도민영은 미간을 깊게 찡그렸다.그러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뜨며 강민아를 노려보았다.“아파!”그리고 다시 기절했다.강민아는 연기라는 걸 알았다.지금 상황에서는 무고한 피해자인 척 연기하는 것만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도 엄마를 걱정하는 효녀인 척 강성진에게 맞는 강나현을 무시하고 있었다.강나현의 비명이 끝없이 울려퍼졌지만 자리에 있던 직원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강성진은 그들의 대표였고 말 한마디로 그들을 해고할 수 있으니까.임원들과 주주들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거나 굳은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았다.강성진이 어린 비서와 놀아난 사실은 사내에서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하지만 적나라한 영상이 공개되고 현장에 기자까지 있으니 일의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그들은 지금 어떻게 하면 강승 테크에 미칠 부정
강나현의 목소리가 반하준의 귓가에 들리고, 그는 포박당한 채 매서운 눈빛으로 TV 화면을 응시했다.강민아를 저격하는 말인 건 안다.대체 강민아의 무슨 약점을 잡은 걸까.강민아가 강씨 가문을 파멸로 몰고 갈 만큼 위험한 짓을 한 건 그를 이곳에 가둔 것뿐이었다.하지만 강나현이 그가 감금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고?반하준은 자신의 뇌 어딘가에서 신경이 거칠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안 돼!’절대 그가 이곳에 감금된 사실을 폭로해선 안 된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확장되며 스크린에는 적나라한 영상이 재생되었다.강성진의 얼굴이 단번에 퍼렇게 질렸다.“아아악!”도민영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었지만 미처 입을 가리지 못한 채 비참한 비명을 내뱉었다.강씨 가문의 다른 친척이나 주주들도 일제히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좋지 않았고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강나현은 단상에 서서 모두의 반응을 살피고는 단상 아래 손님들에게 말했다.“여러분, 다 보셨나요? 저런 사람이 강승의 리더가 될 자격이 있나요? 저렇게 사생활이 엉망인데 정말 강승 테크를 믿고 맡길 수 있나요?”강나현이 눈가에 악의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차갑게 웃었다.무죄로 석방된 후 강민아에게 주는 큰 선물이었다.‘그러게 누가 감히 도발하래?’반하준의 얼굴을 다른 남자로 바꿨으니 이제 강민아가 심은호와 사귀면서 다른 남자와 낯 뜨거운 행각을 벌인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었다.강나현은 심은호를 바라보며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했다.무대 맨 앞줄에 서 있던 심은호는 잔을 들어 건배를 제의했다.“강나현 씨의 가족도 서슴없이 희생하는 용기는 대단하네요!”강나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심은호는 왜 저렇게 담담한 걸까.게다가 대놓고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강나현은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역시 심은호는 강민아를 그저 데리고 놀 생각이었고, 어쩌면 진작 그녀가 방탕하다는 걸 알고 있었나 보다.강나현이 승리의
강나현은 강민아의 게시물을 클릭해서야 이미 올렸던 영상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고개를 든 그녀가 매서운 눈빛으로 강민아를 쳐다보았다.영상을 삭제했다고 그녀를 도발했던 게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이미 강민아와 반하준의 영상을 저장해 놓았으니까!강민아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보며 강나현은 일부러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올렸다고 더더욱 확신했다.강민아는 분명 반하준이 합의서에 사인하고 아직 민이가 병원에 있는 데도 강나현이 보상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것에 화가 난 거다.그래서 다시 친구 추가를 한 뒤 일부러 그녀만 볼 수 있는 게시물을 올려 기선제압을 했다.강민아는 그녀가 반하준을 좋아해서 그의 체면 때문에 영상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 확신하겠지만, 강나현은 강민아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강나현은 영상을 저장한 뒤 반하준의 얼굴을 다른 남자로 바꾸었다.이제 강민아에게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깨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주련다.“강민아, 내가 이미 경고했지. 날 건드리지 말라고! 심은호와 만나고 하준 씨랑 얽혀 있다고 해서 내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마.”강나현의 경고가 끝나고 파티장 스피커가 울렸다.무의식적으로 단상 위를 돌아보니 강성진이 그쪽으로 다가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제가 이 자리에서 몇 마디 짧게 얘기하겠습니다...”강성진은 10분 넘게 열정적으로 연설한 뒤 도민영과 두 딸까지 무대 위로 데려갔다.그들은 저마다 다른 속셈을 품고 역겨움을 참아가며 사람들 앞에서 다정한 가족인 척 연기를 했다.마침내 강성진의 연설이 끝나고 강나현이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으며 말했다.“아빠의 딸로서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강나현의 발언은 약속된 게 아니었기에 강성진은 당황한 듯 강나현을 바라봤고, 강민아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우리 중엔 직책에 걸맞지 않은 품행을 지닌 사람이 있어요. 비록 가족이지만 사생활이 난잡해 강승 테크의 임원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호흡을 가다듬은 강나현은 강민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구치소에서 나온 뒤 미용실에 가서 브라운으로 염색하고 깔끔하게 묶은 포니테일이 걸을 때마다 흔들렸다.일부러 피부과에 가서 관리도 받았다. 그게 아니면 이 많은 사람 앞에 나설 용기도 없었을 거다.남성 정장을 입고 검은 가죽 구두를 신은 그녀의 발걸음은 당차 보였지만 나이 많은 임원이나 주주들 눈에는 무척 거슬리는 차림새였다.“언니, 축하해. 벌써 다른 사람 만나네.”강나현은 다가가 심은호를 돌아보며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눈빛을 감추었다.“심은호, 궁금한 게 있는데 어쩌다 우리 언니랑 만나게 됐어?”강나현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호기심을 드러냈지만 심은호는 무심하게 그녀를 흘겨볼 뿐이었다.“대단하네.”강나현이 눈이 휘어지게 히죽 웃었다.“심은호, 내가 물어보고 있는데 뭘 칭찬하는 거야?”“사고를 내고도 벌을 받지 않았잖아. 반씨 가문 도련님이 그 정도 다쳤는데 한 달도 안 돼서 나왔어. 참 운도 좋네. 반하준이 아마 불길 속에서도 구해줄 거야.”강나현의 표정이 다채롭게 바뀌었다.안 그래도 심은호는 존재만으로 눈에 띄고 주위에 어떻게든 그에게 말을 걸려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이제 그들이 전부 강나현을 조롱하듯 쳐다보고 있다.게다가 그들을 촬영하는 카메라도 있었다.지난달 강나현이 강변대로에서 큰 사고를 쳤다는 건 서경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심은호는 고개를 돌려 강민아에게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산에 있는 불상 대신 반하준이 거기 앉아있으면 되겠네요.”강민아는 심은호의 팔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얘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어요.”따스하고도 솔직한 심은호의 눈빛이 강민아의 얼굴에 머물렀다.“걱정되는데요.”강민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놀리듯 말했다.“얘가 날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서요?”두 사람은 거의 얼굴을 맞대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일부러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강나현은 불쾌함에 입을 삐죽거렸다.“언니는 날 뭐로 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