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아가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짓는데 강성진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하준이가 6천억을 제시했어!”강성진은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강승이 부신 그룹에 인수되면 나도 너와 함께 부신 그룹 이사회에 들어갈 수 있어!”이는 심은호가 인수 문제와 관련해 강씨 가문 측에 약속하지 않았던 내용이었다.“이건 하준이가 직접 작성한 인수 계획서인데 한번 봐.”강성진은 강민아에게 두툼한 계획서 한 권을 건넸다.반하준이 제시한 가격과 거래 조건은 그를 매우 흥분하게 만들었다.강민아는 계획서를 건네받고도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첫 페이지를 찢어 자동 파쇄기에 넣었다.곧바로 두 번째, 세 번째 페이지도 찢어버리며 강민아는 느긋하게 종이를 파쇄기에 넣었다.반하준이 밤새워 작성한 계획서였지만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강성진이 고함을 질렀다.“강민아, 뭐 하는 거야!”서늘한 얼음이 반하준의 얼굴을 뒤덮었다.“나한테 원한이 있는 건 알겠지만 6천억짜리 인수 계획서를 들여다보지도 않는 건 너무 감정적인 행동 같은데?”반하준은 강민아의 행동을 지켜보며 말했다.“6천억이 부족해서 그래? 1조로 강승 인수할게.”강성진은 가슴이 떨려 진정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이 제시한 가격은 심은호보다 두 배, 아니, 두 배 이상 높은 금액이었다.“하준아, 정말 그 가격에 살 의향이 있다면 내가 강승 테크 대표로...”“아빠, 이제 아빠는 결정권이 없어요.”강민아는 한 마디로 강성진을 의자에 다시 앉게 만들었다.강승에 대한 의사 결정권을 잃은 것을 생각하니 강성진은 강나현을 더욱 원망하며 이렇게 충고할 수밖에 없었다.“민아야, 우리 우강 그룹의 미래를 생각해야지! 하준이랑 일하는 게 뭐가 문제야? 하준이랑 7년 동안 부부로 지냈으니 섭섭지 않게 널 챙겨줄 거야.”강민아는 반쯤 찢어진 계획서를 책상 위에 던졌고 반하준은 의자에 앉아 강민아를 올려다봤다.그는 강민아의 얼굴에서 또다시 자신을 가두었을 때 강민아가 몸을 짓밟으면서 드러냈
이보다 더 사람을 괴롭게 하는 건 없었다.분명 한때는 그의 소유였는데 소중히 여기지 않다가 다 잃은 뒤에야 그리워하며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그는 진지하게 강민아를 향해 물었다.“정말 심은호를 선택할 거야?”강민아는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이미 태산 그룹과 인수에 관련된 모든 프로젝트 계약을 마무리했고, 다음 주에 공식적인 인수 계약식을 진행할 거야.”강민아는 남자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무심하고 덤덤하게 말했다.“반 대표님은 너무 늦게 오셨네요. 반년 전에 우강 그룹 인수를 제안했으면 경쟁자가 없었을 텐데. 지금은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받아줄 수가 없네요. 진짜 말 안 바꾸고 변덕 부리지 않아도 당신이 내미는 돈은 1조가 됐든 2조가 됐든 안 받아요.”그가 아무리 많은 돈을 들고 와서 손을 내밀어도 소용없었다.감정이란 게 원래 한번 무너지면 다시 쌓아 올리기 어려운 거니까.마치 수백만 개의 차가운 바늘이 반하준의 몸을 찌르는 듯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남자가 미간을 팍 찌푸리며 고함을 질렀다.“심은호를 선택한 걸 후회하게 될 거야!”강민아는 그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아빠, 손님 배웅하세요. 반 대표님이 알아서 떠나지 않으면 사람 부를 거예요.”반하준은 의자에 앉아서 전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그는 강민아를 위해 한발짝 물러섰다.“우강 그룹 입찰에선 손을 떼겠지만 조건이 있어. 지금 당장 심은호와 헤어져!”강민아는 우습기만 했다.“당신이 뭔데? 이 지구의 주인이라 온 세상이 당신 말을 들어야 하나?”반하준이 서류봉투를 내밀었다.“이것 좀 봐.”강민아는 볼 생각이 없었고, 결국 반하준이 서류봉투의 포장을 풀고 안에 든 서류를 꺼내 강민아 앞에 내놓았다.심은호의 이름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심은호 씨 진료 기록?’강성진과 다른 임원들도 모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심은호의 기록을 들여다보자 강민아는 곧장 서류를 집어 들었다.대충 내용을 확인한 그녀가 화가 난 듯 반하준을 노려보았다.“미쳤
반하준은 마치 전쟁터에 발을 들여 보이지 않는 연기가 사방에서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육성민의 깊은 동공은 맹수처럼 사나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찰나의 순간 엘리베이터 안에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흐르더니 육성민이 매섭게 소리쳤다.“민아 내려놔!”육성민이 엘리베이터 문을 막고 있으니 반하준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강민아를 내려놓았다.강민아는 가슴을 움켜쥔 채 반하준의 몸에 토하려 했지만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메스꺼움이 다시 내려갔다.육성민은 손을 뻗어 강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겼다.“반하준, 꺼지라는 말 몰라?”육성민은 속으로 살인은 범죄라는 걸 무수히 되뇌고 나서야 반하준의 머리를 뭉개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있었다.하지만 반하준은 떠날 생각이 없었고, 서류봉투를 꺼내 육성민에게 건넸다.“한번 보시죠.”육성민은 반하준이 건네는 것을 받고 싶지 않은 듯 얼굴을 찡그렸다.그러자 강민아가 말했다.“고작 비뇨기과 진료 기록 하나가 나와 심은호 씨 협업 관계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해? 너무 순진한 거 아니야?”반하준은 예리하게 무언가를 감지하고 곧바로 되물었다.“너 진짜 심은호랑 만나는 거 아니지? 연애하는 게 아니야, 그렇지?”강민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반하준은 계속 물었다.“정말 좋아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이 비뇨기과에 다니는 데 전혀 신경 안 쓸 수 있겠어?”강민아의 표정은 싸늘했다. 이혼까지 한 상황에서 반하준과 굳이 좋게 얘기할 생각도, 그럴 인내심도 남아있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와 심은호가 계약 연인이라는 사실을 반하준이 퍼뜨린다면 또다시 인수에 악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남의 사생활이나 캐고 다니는 게 참 비열하다. 하지만 당신은 원래 역겨운 사람이었지. 이미 그 사람이 비뇨기과에 간 걸 봤다니까 그냥 얘기할게. 우리가 하도 격정적으로 놀다가 다쳐서 간 거야.”반하준의 귓가에 스피커를 가져다 놓은 것처럼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강민아를 바라보았다.
심은호는 반하준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은 채 그를 무시했다.그의 시선이 반하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강민아에게 향했다.순간 심은호의 눈빛이 허공에서 멈칫했다.달빛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강민아는 심은호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손목을 잡았다.남자는 시선을 내린 채 강민아에게 잡힌 손을 바라보며 풍성한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강민아가 고개를 돌려 심은호에게 말했다.“비뇨기과에 간 거 알아요.”그녀를 바라보는 심은호의 검은 눈동자가 파문을 일으키며 말을 꺼내려는데 강민아가 새끼를 지키는 어미 암탉처럼 그를 자기 뒤로 보냈다.“반하준, 우리 일에 참견하지 마!”동시에 두 남자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심은호는 입꼬리를 피식 올렸고 반하준의 얼굴은 극도로 어두워졌다.태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강민아가 심은호와 ‘우리’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전남편인 그는 완전히 모르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반하준은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그는 무기력하게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무언가를 참는 듯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한때 그를 깊이 사랑했던 강민아는 그의 의식주와 관련된 사소한 것 하나까지 메모해 두었다.앞으로 심은호한테도 그렇게 해줄까?반하준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우리에 갇힌 맹수가 된 기분이었다.눈앞에 있는 여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있었다.그래도 애써 내면의 감정을 무시한 채 이 불편한 고통을 날카로운 말로 바꾸어 입밖에 내뱉었다.“나랑 만났던 네가 그쪽으로 하자 있는 놈을 만날 리가 없잖아!”차갑게 웃는 반하준의 두 눈은 어느새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둘은 진짜로 사귀는 게 아니야.”분노에 찬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단지 계약 관계일 뿐이겠지.”강민아는 입술을 다물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반하준은 심은호가 비뇨기과에 다닌다는 사실을 물고 늘어져 그가 강승 테크를 인수하는 걸 방해할 생각인 것 같다.하지만 절대 그의
지금 심은호가 하는 말이 우리말이 맞나?그들이 생각하는 의미가 맞나?“그게 무슨 뜻이죠?”육성민은 정말 몰라서 의아해하며 물었다.심은호는 육성민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기록을 건네주었다.“형님, 그쪽 매제는 몸이 아주 튼튼해요.”육성민은 곧바로 심은호의 진료 기록에 적힌 상세한 수술 과정을 살펴보았다.일부 난해한 의학 용어를 알아볼 수 없었던 그가 심은호를 올려보다가 다시 손에 든 기록을 내려다보았다.“대체 왜 그 구슬을 몸에 집어넣은 겁니까?”반하준이 거센 힘으로 심은호의 진료 기록을 낚아챘고 육성민은 그대로 넘겨주었다.기록을 확인한 반하준의 얼굴은 먹물보다 더 어둡게 변했다.지나치게 힘을 준 탓에 손가락은 떨리고 손등엔 핏줄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몇 장이나 되는 진료 기록이 반하준의 손에서 구겨졌다.그는 악귀에 사로잡힌 듯 시뻘건 눈으로 심은호를 노려보았다.“구슬 넣어서 뭐 하려고? 미쳤어?”반하준은 고함과 다름없는 소리를 뱉었다.모를 리가 있나. 심은호가 구슬을 꽂아 뭘 하려는 건지 잘 알았기에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당연히 민아 씨에게 더 좋은 경험을 선사해 주려고 그러지.”심은호가 당연하다는 듯 진지하고 당당하게 말하자 그런 그의 모습에 놀란 건 육성민이었다.‘민아에게 좋은 거였구나.’육성민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심은호에 대한 분노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강민아에게 좋은 일이라면 그도 뭐든 다 좋았다.강민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며 그녀가 나지막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어느... 어떤 구슬이요?”심은호는 잠겨 죽어도 좋을 만큼 그윽하고 반짝이는 눈망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지난번에 우리 집에 왔을 때 민아 씨가 골라서 팔찌로 만들고 남은 구슬 하나요.”강민아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저도 모르게 한쪽 손을 등 뒤로 보냈다.심한기를 만나러 갔을 때 우연히 서재에 놓여 있는 구슬 상자를 보게 되었다.구슬이 별 가치도 없는 거라 강민아가 먼저 구슬로 팔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두 사람은
강민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심은호는 예쁜 눈을 가늘게 뜬 채 핏줄마저 튀어나온 반하준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반하준, 왜 안 웃어? 원래 잘 안 웃나?”강민아는 자신의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아 눈앞에 반하준의 몸이 떨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닌지 의아했다.전남편은 적잖이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육성민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라 오히려 침착하게 한 손에는 심은호의 진료기록을, 다른 손에는 휴대전화를 들고 검색하고 있었다.[구슬 넣는 좋은 점]‘아, 거기에 구슬을 넣는 거구나! 이게 가능해?’이미 모든 면에서 태생적으로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심은호도 이런 ‘노력’을 하고 있다니!검색을 마친 육성민은 심은호를 감탄하는 눈빛으로 돌아보았다.저런 근면 성실함은 따라 배워야 한다.그때 육성민의 귀에 반하준의 욕설이 들렸다.“천박하긴!”반하준은 심은호를 경멸했다.“태산 그룹의 후계자가 업소 제비처럼 고작 여자의 마음이나 얻으려고 구슬을 넣을 줄이야.”반하준의 욕설에도 심은호는 더더욱 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질투 나서 욕하는 거야? 넌 민아 씨한테 잘 보일 자격도 없잖아.”반하준의 심장이 철렁하며 거대한 충격에 폭탄이 몸속에서 터진 듯 영혼까지 송두리째 파괴당한 것 같았다.그의 눈에 심은호의 미소는 그토록 비열해 보여 목구멍에서부터 차가운 경멸의 비웃음이 흘러나왔다.“내가 이혼만 안 했어도 네가 나설 자리는 없었어.”심은호는 그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더욱 얄밉게 웃었다.“이제 내 차례가 됐네. 반하준, 고마워.”반하준의 얼음장 속에 갇힌 것 같았다.전부 그가 자초한 일이다.그가 강민아에게 소홀히 하고 그녀의 감정까지 전부 차갑게 식게 만들었다.반하준은 자신이 강민아를 밀어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명확히 알았다.육성민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구슬 넣으려고 비뇨기과에 온 겁
강민아가 심은호와 함께 떠나는 것을 보는 순간 반하준은 밀려오는 상실감에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를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강민아!”반하준은 고함을 질렀다. 주위의 공기가 끈적끈적하고 무거워져 숨쉬기가 힘들었다. 가슴이 심하게 들썩거리며 얼굴마저 점차 창백한 종잇장처럼 변해갔다.“다시 한번 모든 걸 되돌릴 기회를 줄게. 넌 여전히 내 아내고 민이의 엄마야. 강승에 투자해서 계속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도와줄게. 난 그냥 모든 것이 예전처럼 돌아가면 돼.”반하준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그가 말할 때마다 몸의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여전히 오만하고 고고한 태도였지만 눈가에는 두려움과 절망이 담겨 있었다.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말로는 괜찮다고 고집을 부리는 데 몸은 위태롭게 비틀거리고 있었다.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는 강민아의 두 눈에는 무심함과 냉정함, 짜증 섞인 혐오만 가득했다.“반하준, 후회돼?”그녀의 말에 허를 찔린 남자는 입술만 달싹였고 강민아는 말을 이어갔다.“난 당신 아내가 된 것도, 민이의 엄마가 된 것도, 모든 걸 버리고 떠난 것도 후회하지 않아. 난 이제 더 이상 당신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니까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거야.”심은호가 손을 내밀어 길고 힘 있는 손가락으로 강민아와 깍지를 꼈다.맞물린 두 손을 본 반하준의 동공이 급격히 움츠러들었다.지금 이 순간 다른 남자와 두 손을 맞잡는 게 반하준에겐 치명타가 될 거다.강민아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반하준을 불렀다.보이지 않는 실이 남자의 심장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며 강민아의 말에 그가 황급히 두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한때 당신에게 수없이 실망한 후 혼자서 되뇌던 말이 있는데 이젠 그걸 당신에게 해야 할 것 같네. 열리지 않는 문을 자꾸 두드리는 건 무례한 짓이야.”강민아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고 심은호는 뒤를 돌아보며 가만히 서 있는 반하준과 육성민을 향해 승리자처럼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반하준이 그렇게 못난 표정
“반하준은 절대 그쪽 진료기록을 공개하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사람들이 태산 그룹에서 강승 테크를 인수하는 것에 주목하고 본인에게 좋을 게 없으니까. 하지만 그쪽 진료기록을 훔쳐 간 사실에 대해선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저 사람이 질책받고 억울해도 할 말이 없게 만들 거예요.”강민아는 냉정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반하준을 바라보다가 심은호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남자는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린 채 한쪽 팔꿈치를 핸들에 얹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매혹적이고 예쁜 눈동자로 지그시 바라보는 모습에 강민아는 초조한 듯 물었다.“그쪽 생각은 어때요?”반하준을 골탕 먹일 생각이지만 심은호의 사생활과도 관련이 있었다.남자가 얇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말했다.“난 민아 씨의 이런 모습이 좋아요.”갑작스러운 고백에 강민아의 볼은 금세 뜨거워졌다. 그는 늘 몇 마디 말로 쉽게 그녀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반하준이 날 괴롭히지 못하게 지켜주고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건, 내가 민아 씨 편이고 민아 씨에게 내가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겠죠?”공기가 통하지 않는 밀폐된 차 안에서 둘만 앉아 있으니 강민아는 약간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무의식중에 소매 사이로 살짝 비치는 구슬 팔찌를 본 순간, 강민아는 목이 타면서 가슴 속에 수천마리 나비가 날갯짓하는 것 같았다.“그쪽처럼 노골적으로 저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없으니까요.”강민아는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남자의 허리와 배 쪽으로 시선이 갔다.하얀 손목에 차고 있던 구슬 팔찌가 달군 돌처럼 뜨겁게 느껴지며 강민아는 마음속으로 아우성쳤다.‘보지 말자!’그녀는 황급히 얼굴을 돌려 차창 밖을 흘끔거렸다.“왜 갑자기 그런 수술을 하게 된 거예요?”“저 개자식이 그쪽으로 나쁘지 않다는 걸 알고 민아 씨도 경험이 있으니까 당연히 비교하게 되잖아요. 정말로 언젠가 민아 씨가 원하면 어떤 남자한테도 지고 싶지 않았어요.”심은호의 시선이 육성민을 스쳐 지나가며 말을 이어갔다.“태생적으로 타고난 사람들과 비교가 되진
순진한 정이의 목소리에 반하준 뒤에 있던 선생님들은 흥미로운 표정이었다.반하준은 당황하며 서둘러 해명했다.“아니야...”그는 고개를 들어 강민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짜증이 솟구쳤다.“아빠는 강나현이랑 잔 적 없어!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마치 강민아에게 하는 말인 듯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그런데 반하준의 해명은 정이의 논리를 이길 수 없었다.“하지만 이모가 아빠의 친구인 것처럼 현이 씨도 엄마의 친구인데요?”“달라!”반하준이 부정하자 정이는 볼을 부풀리며 여전히 반박하려는 반하준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더니 오히려 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아저씨, 자기한테는 관대하고 남한테는 엄격하면 안 되죠. 그건 내로남불이에요!”말문이 막힌 반하준은 어른의 사생활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서 강민아에게 물었다.“대체 정이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강나현과 내 사이를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강민아는 콧방귀를 뀌며 설명하고 싶지도, 그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아저씨는 엄마를 오해하고 있어요.”딸이 입을 열자 반하준는 한결 마음이 풀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아빠가 했던 행동 때문에 네가 오해를 한 것 같으니까 지금 확실하게 말할게. 아빠와 이모는 그저 친구 사이야. 우리는 절대 네 엄마와 이 자식처럼...”윤세현은 몸을 돌려 강민아를 끌어안고 자기 머리를 강민아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그녀는 반하준을 향해 도발하듯 말했다.“엥? 친구랑 안은 적 없어요?”“...”반하준의 목소리가 뚝 멈추며 정이가 대신 대답했다 “내가 이모랑 아저씨 안고 있는 거 봤는데?”옆에 있던 선생님들은 구석에 숨어서 구경하기 바빴다.윤세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웃었다.“친구 사이에 서로 안는 건 당연하지. 가까운 사이면 뽀뽀도 하고.”말하며 그녀가 강민아의 얼굴에 쪽 입을 맞추자 반하준은 순식간에 속에서 피가 끓으며 입안에는 비릿한 피 맛이 가득 느껴졌다.주먹을 불끈 쥔 그의 손등
반하준은 자신의 역할을 부각하고 딸에게 아빠의 능력을 알려주기 위해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방송국 팀을 불러줄 수도 있고 춤추고 싶으면 아빠가 국내외 최고의 댄서들에게 연락할 수도 있어. 정아, 뭐가 됐든 넌 내 딸이니까 최대한 나한테 의지했으면 좋겠어.”정이는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이의 기억 속 반하준은 지금처럼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애정을 보이니 불편하기만 했다.“정아, 네가 나한테 의지했으면 좋겠어. 전에는 아빠가 미안했어. 넌 이제 겨우 다섯살이니까 지금부터라도 충분히 보상해 줄 수 있어.”정이는 반하준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었고, 그 뒤에 숨은 반하준의 의도도 분석할 수 없었다.그저 자신의 직감과 감정에만 근거해서 남자에게 대꾸했다.“아저씨, 엄마랑 날 방해만 하지 마세요.”반하준은 즉시 부인했다 “내가 왜 방해해...”“하지만 아저씨는 현이 씨를 좋아하지 않고 엄마와 현이 씨가 함께 있는 걸 반대하잖아요.”반하준은 칼로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통증과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그는 불쑥 말을 뱉을 뻔했다.‘당연히 반대하지!’강민아 곁에 다른 남자들이 나타나고 윤세현이 강민아의 진짜 사랑이라는 데 반대하지 않을 수가 있나.‘진짜 사랑’이라는 말이 씨앗처럼 반하준의 마음에 자리 잡아 싹을 틔우고 심장을 관통하는 가시로 자랐다.반하준은 위태롭게 요동치는 심장을 느꼈다.자기 핏줄인 딸이 강민아와 윤세현의 만남을 응원하고 있었다.젠장!반하준은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네 엄마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는데 네가 말하는 현이 씨가 같은 집에 살면서 엄마랑 자는 건 바람피우는 거야!”강민아의 감정사를 딸에게 너무 자세하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아 그는 씁쓸하게 말했다.“아빠는 엄마가 널 잘못 가르칠까 봐 걱정하는 거야.”강민아와 윤세현은 서로를 바라봤고, 윤세현은 입술을 달싹이며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힘겹게 참았다.강민아는 윤세현을 향해 어깨를 으쓱거렸다
강민아는 반하준을 차갑게 바라봤다.이미 조금 전 강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엘리베이터가 오작동하고 반하준이 우연히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의 의도는 이미 뻔했다.강민아는 정이의 손을 잡은 채 식은땀이 삐질 났다. 정말 미친놈이다. 말로는 제 딸이라고 하면서 정이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하지만 구체적인 증거 없이는 본인이 엘리베이터 오작동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거다.강민아는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참았다.“반진경이 정이를 노리는 거 알고 있었어?”“요즘 어머니랑 가깝게 지내고 있어...”다시 말해 반진경은 연진숙의 지시를 받고 학교에서 오만방자하게 날뛴 것이다.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문화부 선생님 몇 명이 나타났다.그들은 반하준을 보고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반 대표님.”정이도 그들을 안다. 별님반에서 축제에 참여할 때 그들이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었다.“안녕하세요. 저는 햇님반 강윤정이라고 합니다. 축제에서 단독으로 공연하고 싶은데 그래도 되나요?”정이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진지한 얼굴로 여러 선생님을 바라보았다.그들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반하준을 돌아보며 이사장인 그가 동의하면 그들도 그의 뜻에 따를 생각이었다.하지만 이런 암묵적인 규칙을 정이 앞에서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강민아가 반하준에게 물었다.“여기서 내가 애원하길 기다리는 거야?”반하준은 강민아가 부탁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에 깊은 동공에 웃음기가 번뜩였다.“나한테 부탁하면 정이가 축제에 참여하는 걸 쉽게 해결할 수 있지.”정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축제에 참여하고 싶지만 무슨 공연을 할지 생각은 못 했어요.”아이는 진지하게 선생님들을 향해 말했다.“연습하고 나서 선생님들께 보여드릴게요. 제 공연이 마음에 드시면 제가 무대에 올라가 친구들 앞에서 공연하는 걸 응원해 주세요.”반하준은 정이가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에 이렇게 물었다.“정아, 아빠 도움은 필요 없어? 네가 아빠 딸이
반하준은 강민아가 고개를 돌린 채 윤세현을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짓는 모습에 멈칫했다.강민아가 이렇게 웃는 건 처음 본다. 심은호에게도 이렇게 웃어준 적이 없는데, 마치 윤세현이 하는 말은 다 들어준다는 표정이었다.날카로운 단검이 그의 심장을 연달아 찌르는 것 같아 반하준의 호흡이 거칠어졌다.소꿉친구가 이토록 위협적인 존재였던가.윤세현과 강민아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사이라는 건 알지만 상대를 안중에도 둔 적이 없었다.반씨 가문의 후계자인 그가 외딴 마을에서 상경한 사람에게 눈길을 줄 리가 없으니까.강민아와 윤세현이 친한 친구 사이라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반하준은 윤세현을 경멸하고 있었다.그런데 강민아가 윤세현이 진짜 사랑이라는 말에 동의할 줄이야.윤세현이 진짜 사랑이고 심은호가 남자 친구이면 그는 뭐란 말인가.7년 동안 둘의 결혼은 그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걸까?무거운 쇠망치가 반하준을 내리치는 듯 뻥 뚫린 가슴에 차갑고 쌀쌀한 바람이 계속 쏟아져 들어와 오장육부를 후벼팠다.“강민아!”그의 어두운 눈동자는 짙은 먹물로 뒤덮인 것처럼 보였고 미간은 잔뜩 주름이 잡혀 있었다.“이 자식이 진짜 사랑이면 심은호는 뭐야?”“당신 심은호 좋아해?”강민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자신을 올곧게 쳐다보는 남자의 눈가에 씁쓸한 기색이 담긴 게 보였다.강민아는 풍성한 속눈썹을 깜박이면서 전남편을 마주하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어? 우린 모르는 사이야. 이혼할 땐 나보고 절대 돌아오지 말라더니 왜 이젠 당신이 계속 내 앞에 나타나는 건데?”강민아의 말에 남자의 말투도 차가워졌다.“네 착각이야. 설마 내가 일부러 너랑 마주치려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반하준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비웃더니 어두운 눈동자에 경멸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찔려서 강민아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사실 일부러 강민아와 마주치려고 이곳에 나타난 거다.강민아가 정이를
잡아보니 윤세현의 깡마른 팔에 반하준의 눈에선 경멸의 빛이 번뜩였다.이렇게 깡마른 놈이 감히 그의 여자를 건드리다니.“반하준, 뭐 하는 거야!”강민아는 소리를 지르며 윤세현을 꽉 잡고 있는 반하준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손 풀어!”반하준은 윤세현을 뒤로 보내며 감싸는 강민아를 보고 왠지 모를 분노가 밀려왔다. 그는 역겨운 듯 윤세현의 팔을 뿌리치더니 강민아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왜 계속 이렇게 약해빠진 놈이랑 있는 거야? 이 자식도 심은호랑 똑같이 여우짓 하면서 연약한 척 너한테 지켜달라고 하잖아.”반하준이 씩씩거려도 강민아는 퉁명스럽게 대꾸할 뿐이었다.“난 이런 게 좋아.”남자는 그녀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강민아는 그와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반하준이 봤을 때 심은호와 윤세현은 지극히 닮았다. 둘 다 연약하고 그가 조금만 건드리면 손쉽게 제압할 것 같았다.하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강민아의 뒤에 숨기 때문에 강민아는 점점 더 그를 미워하고 있었다.반하준의 턱이 굳게 다물리며 피부밑으로 튀어나온 핏줄이 꿈틀거렸다.그때 정이가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렸는데 현이 씨가 저와 엄마를 지켜줬어요. 아저씨, 현이 씨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지 마세요!”정이가 단호하게 말하자 반하준이 물었다.“이 사람이 좋아?”정이는 반하준이 윤세현에 관해 물어본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난 현이 씨가 제일 좋아요!”“그럼 이 사람이 좋아, 심은호가 좋아?”반하준은 정이에게서 답을 찾고 싶었다.“음...”정이가 풍성한 속눈썹을 깜빡이며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난 현이 씨가 더 좋아요!”아이가 무슨 처세술을 알겠나. 그저 본인 생각대로 솔직하게 답할 뿐이었다.정이의 말을 들은 윤세현은 미소를 지으며 반하준 때문에 언짢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왜?”반하준이 묻자 정이가 동그란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었다.“현이 씨는 요리도 잘하고 좋은 향기도 나요. 나랑
“네가 강씨 가문으로 돌아가면서 우경아는 널 양딸로 데려가 네 보호자가 될 절차를 밟을 수 없게 되었어. 그러다 네가 결혼했다는 걸 알고... 너한테 완전히 흥미를 잃었지.”강민아는 먼 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우경아의 발목을 잡은 세력은 뭔데?”윤세현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우경아도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윤세현의 맑은 눈동자가 진지하게 반짝였다.“내 생각엔 그 힘이 널 지켜주는 것 같아.”강민아도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우경아에게 내 과거에 대해 말한 적 있어?”윤세현은 멍하니 고개를 흔들었다.“몇 번이나 날 떠보긴 했어도 난 네 일에 대해 조금도 털어놓지 않았어. 미린국에 오면서 너와 완전히 갈라졌다고 했거든.”강민아는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내가 볼 때 우경아는 오래전부터 날 지켜봤던 것 같아. 나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고 너조차 모르는 내 일을 다 알고 있었어.”강민아는 더 생각하기 싫어 다시 가벼운 어투로 윤세현에게 물었다.“우경아가 나한테 무슨 짓할까 봐 학교로 온 거야?”“서경에 오자마자 너 때문에 양자 테크가 억대 손해를 봤다는 소식을 들었어. 우경아가 직접 널 만나러 학교에 온다는 얘기도... 우경아는 무자비한 사람이라 건드리기만 하면 제자리에서 상도 엎어.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강민아의 두 눈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담겨 있었다 “난 아직 그 여자한테 거대한 이용 가치가 있어서 당분간은 나한테 아무 짓도 못 해.”오히려 윤세현을 달래며 말을 이어갔다.“걱정하지 마, 이미 우경아와 거래를 달성했거든.”윤세현은 어리둥절했다.“어떤 거래?”“내가 양자 테크의 통솔권을 가지고 우경아와 협업하는 동시에 1분기 투자금 4천억을 요구했어. 거기에 향후 양자 테크의 수익은 100% 나한테 돌아오기로 했지.”윤세현은 찬 공기를 들이켜며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동의했어?”“응.”“어떻게?”강민아와 우경아가 협상한 조건은 윤세현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강민아가
“현이 씨!”윤세현을 보자마자 정이의 눈이 환하게 빛나며 폴짝폴짝 윤세현을 향해 달려갔다.윤세현은 강민아에 대한 걱정에 코끝에서 열기 섞인 숨결이 흘러나왔다.“현이 씨, 너무 보고 싶었어요!”정이의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윤세현은 쭈그리고 앉더니 정이의 의상을 보고 자기 외투를 벗어 아이에게 입혀주었다.“정이 너무 예쁘다.”정이의 머리가 조금 헝클어진 것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빗겨주었다.강민아는 윤세현을 향해 걸어갔다 “왔어?”지난주 윤세현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집을 나서면서 떠나기 전 곧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겼다.강민아는 윤세현에게 뭘 하러 가는 건지 묻지 않고 정이와 함께 윤세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그런데 뜻밖에도 윤세현이 서경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학교로 달려올 줄이야.우경아는 윤세현과 일정한 거리로 좁혀질 때쯤 말을 꺼냈다.“이번에 고생했어.”멈칫하던 윤세현의 조각상처럼 잘생긴 얼굴이 엄숙하게 바뀌었다.강민아는 우경아 앞에서 유독 경직된 윤세현을 알아차렸다.윤세현은 우경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긴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엄마, 민아는...”우경아는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고, 찬 바람에 풍성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더더욱 아름다움을 뽐냈다.“오랜만에 보는 건데 친구랑 좋은 시간 보내.”우경아는 강민아를 쳐다보지 않고 윤세현에게만 명령했다.“오늘 밤에 호텔로 와서 보고하고.”윤세현은 공손하게 우경아를 향해 답했다.“네.”우경아가 자리를 떠나서야 굳어있던 윤세현은 긴장이 풀리며 정이의 손을 잡고 강민아를 향해 걸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우 대표가 너 힘들게 했어?”강민아는 고개를 저었다.“미린국에 간 첫해에 한 거물이 널 눈여겨보고 거둬줘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했잖아. 그 거물이 우경아였어?”5년 전 윤세현은 강민아가 준 거금을 들고 미린국에 가면서 둘은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윤세현은 나쁜 소식은 전부 감추고 좋은 소식만 전해주었다.그때 강민아는 두 아이를 낳은 터라 윤세현과
우경아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강민아에게 40억을 주고 쫓아냈는데 이제 그녀를 다시 데려오려니 상대가 4천억을 원하고 있었다.그리고 그녀는 강민아가 4천억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걸 알고 있다.우경아의 목구멍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사업을 하면서 피를 말리는 협력자나 경쟁자를 만나본 적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여전히 강민아 앞에서 여유로웠다. “강민아 씨, 이 바닥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당신에게 수익의 70%를 줄 수는 있어요. 투자는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프로젝트 전체를 나한테 주지 않으면 전 그쪽이랑 일 안 해요.”“말도 안 되는 소리!”우경아가 낮게 윽박질렀다. 한 번도 그녀에게서 먹잇감을 통째로 가져가는 사람은 없었다.강민아는 여전히 사람 좋은 표정으로 부드럽게 한숨을 쉬었다.“전 우 대표님이 무서워서 시작부터 많은 걸 바라는 거예요. 이미 한번 절 아웃시켜서 아직 마음이 불안하거든요. 저한테 큰 조각을 넘기기 싫고 수익의 100%를 넘기지 않는다면 전 그쪽이랑 일 안 해요. 세상은 저 없이 잘만 돌아가고 우 대표님은 저 말고 다른 사람 알아봐도 되니까요.”강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경아를 지나쳐갔다.우경아는 자신이 소유한 양자 테크나 옴 테크에서 데려온 전문가들이 강민아가 건넨 대형 모델을 사흘 밤낮으로 연구해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강민아!”그녀가 소리쳐 부르자 강민아는 뒤에서 들려오는 우경아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강성진과 도민영 사이에서 당신 같은 딸이 나올 줄은 몰랐네요.”강민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우 대표님, 칭찬 감사합니다.” 우경아의 목구멍에서 차가운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강민아를 만나러 직접 승덕까지 찾아오고 반씨 가문 사람과 무례한 교사까지 혼내줬으니 강민아가 은혜를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면 그녀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강민아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줄이야.우경아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강민아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너무 일찍 저에게 등 돌린 걸 후회하고 계시네요.”“강민아 씨, 우리한테 넘겨준 데이터를 조작한 거죠?”우경아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눈빛에는 극도의 압박감이 느껴졌다.그녀에게서 음산한 냉기가 퍼져나갔지만 옆에 앉아 있던 강민아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제가 왜 조작해요? 우 대표님 밑에 일하는 직원의 능력이 부족한 거죠. 섣불리 사람을 배신하니까 벌써 200억 정도 손해를 보셨죠?”팔짱을 낀 우경아의 정성껏 관리한 손톱이 연분홍빛을 띠고 있었다.강민아의 말에 그녀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그녀는 진작 자신이 없으면 우영 그룹의 양자 테크에서 억대 손해를 볼 것을 예상하였던 걸까?심지어 수백억을 손해 볼 때 우경아가 자신을 찾아올 거란 것도 예상했다.그 생각에 우경아는 살짝 놀랐다.조금 전 자신이 나타났을 때 강민아가 전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걸 떠올리며 우경아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여자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민아 씨는 함께 일하기 좋은 사람인 것 같네요. 내가 그쪽을 오해했어요. 7년 동안 집안에만 갇혀 지낸 여자가 아무리 성적이 뛰어나도 별 능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공부를 잘하는 건 아무 쓸데가 없어요. 날고 기는 천재도 이론만 빠삭하고 실전에는 멍청이니까. 확실히 그쪽은 날 놀라게 하네요.”강민아를 바라보는 우경아의 두 눈엔 그녀를 손에 쥐고 싶은 충동이 타올랐다.“강민아 씨, 우리 계속 같이 일합시다. 전에 일은 내가 미안했어요. 나는 지금 진심으로 협업을 제안하는 겁니다. 협업 말고도 여러 가지 도와줄 수 있어요. 예를 들면...”앞을 돌아보니 그녀에게 맞아서 얼굴이 부어오른 반진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무대 위에서 발레하는 반연주에게 시선이 향했다.그녀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나랑 같이 일하면 그쪽 딸 센터로 만들어 줄게요.”“그건 됐어요.”강민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어른들 싸움에 아이들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