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진이 몸을 흠칫 떨었다.“나를 위해서?”우경아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 손을 시트에 올려놓고 몸을 지탱했다. 목이 낮은 정장을 입고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녀가 살짝 몸을 숙이자 강성진의 시선이 그녀의 옷깃 사이로 향하며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눈앞의 풍만하고 매혹적인 여성의 자태에 강성진은 넋을 잃고 우경아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닫히는 것만 바라보고 있었다.“강승 테크를 인수하고 싶어.”강성진은 다시 한번 놀랐다.“뭐라고?”여자가 가는 손을 그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성진 씨, 그렇게 해줘. 응?”강성진은 콧구멍에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며 몸이 경직되고 입도 말을 듣지 않았다.“그래그래...”우경아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강기성이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아버지, 제가 알기론 민아에게 인수 프로젝트 권한을 넘겨줬잖아요.”“민아?” 우경아가 의아한 듯 묻자 강성진은 불쾌한 표정으로 강기성을 흘겨보았다.“민아는 내 딸이야. 경아 너도 걔에 관한 뉴스 봤지?”우경아는 고개를 저었다.“난 해외에 있어서 국내 소식은 잘 몰라.”강성진은 제법 자랑스럽게 말했다.“내 딸이 ALI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해 금상을 땄어. 국내에서 유명한 카레이서 루나도 내 딸이야. 이번에 국제 레이싱 대회 시범경기에서 얼굴을 공개했어. 7년 동안 가정주부로 살았는데도 지금 이렇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어. 대단하지 않아?”우경아는 생각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가정주부가 대회에서 금상을 탔다니, 부정행위라도 한 것 아니야?”강성진이 발끈했다.“내 딸은 14살에 고연대 영재반에 입학한 천재야!”우경아가 강성진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하지만 ALI 대회 조직위원회에서 주부에게 금상을 주면 고생해서 공부한 대학원생과 박사에게 공평할까? 언젠가는 다시 주부로 돌아갈 텐데.”“음, 그건...”강성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자 우경아가 다시 물었다.“7년 동안 주부로 살다가 다시 레이싱 대회에 참가하면 다른
강나현이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남자는 차갑고 냉담한 표정이었다.“너 때문에 민이의 남은 인생이 망가질 뻔했어. 감옥에 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봐준 거잖아?”그의 목소리는 강나현의 온몸을 차갑게 만들었다.강나현은 울먹이며 고개를 저었다.“하준 씨, 나 감옥 가기 싫어! 유하도 내가 감옥 가는 걸 절대 보고 싶지 않을 거야! 전에 내가 구치소에 들어가면 유하가 제일 먼저 꺼내줬는데...”남자가 무자비하게 그녀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그건 내가 아니라 유하니까! 난 민이 아빠야!”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고 민이를 기어코 오토바이에 태운 강나현에겐 비난조차 하기 싫었다.강나현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뻔하다. 민이가 그녀를 따르고 좋아하면 아무리 큰 사고를 쳐도 그가 수습해 줄 거라고 믿었겠지.반유하와 그녀의 사이를 생각해서 반하준은 몇 번이고 그녀를 참아주었다.하지만 강나현 때문에 아들이 중환자실로 직행하니 반하준은 도저히 이 여자가 한 짓을 용납할 수 없었다.강나현은 남자에게서 풍기는 기세에 충격을 받아 눈이 붉게 물들고 어깨가 떨렸다.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난 오늘 유하가 널 챙겨달라고 한 말 때문에 온 거야.”반하준은 짐 가방을 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구치소에서 명절 잘 보내.”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일어나 자리를 떠났고 강나현은 꼿꼿한 남자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내 방 화장대 두 번째 서랍에 오래된 휴대폰이 있는데 그 안에 유하의 마지막 통화 메시지가 녹음돼 있어.”강나현의 말을 들은 반하준은 잠시 멈칫했고, 강나현은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원래는 그 녹음파일에 대해 아무 말도 안 하려고 했어. 하준 씨, 유하를 죽인 범인은 아직 법의 처벌을 안 받았어.”반하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그의 시선은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보는 강렬한 섬광처럼 그녀를 압박했다.“내가 그 범인을 얘기할 수 없었던 건...”반하준의 시선에 강나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우리 집에 가서 유하의 마지막 목소리를
창백한 햇살이 반하준을 비추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윙윙거리는 파리 떼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정오, 강민아와 심은호는 함께 식사하러 나갔고 남자는 강민아를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심은호가 메뉴판을 내려다보는 동안 강민아는 고개를 들어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반하준과 젊은 여성을 보았다.참 재수도 없다. 반하준이 자리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구역질이 났다.“민아 씨, 뭐 먹을래요?”심은호의 또렷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강민아는 홱 시선을 거두었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여친님, 벌써 한눈파는 건가요?”강민아는 냅킨이라도 집어 들고 자기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그 자식 봤어요.”그녀의 뺨이 살짝 부풀어 오르더니 심은호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눈앞에 있는 여자의 활발한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워 심은호는 입술을 끌어올렸다.“내가 식당을 잘못 골랐네요. 자리 바꿀까요?”심은호가 앉은 자리는 마침 병풍으로 가려져 있어 반하준의 각도에서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강민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미 날 봤겠죠.”역시나 반하준은 자리에 앉자마자 창가에 있는 강민아를 보았다.정장 차림의 강민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단정하고 우아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매일 그와 아이들 주위만 맴돌던 여자가 맞는지 의심했다.그가 강민아를 봤을 때 그녀는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하는 듯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강민아가 그를 보고 있었던 걸까?이곳은 부신 그룹 건물과 비교적 가까운 곳인데 강민아가 일부러 그가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에 이곳에 온 건 아닐까.한낮의 햇살이 강민아의 온몸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가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올리자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되어 황금빛으로 빛났다.“하준 씨, 내 말 듣고 있어요?”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남자가 생각에 잠겨 넋이 나간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여자는 반하준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아내려고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그때
심은호는 훤칠한 키에 반듯한 체격, 우월한 외모로 등장만 해도 다른 손님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반하준은 심은호가 화장실로 향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준 씨!” 여자가 그를 불렀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제 가요. 혼자 있고 싶네요.”여자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그래도 재벌 집 아가씨라 그런 반하준의 태도를 견딜 수가 없었다.“쳇!”맞선에 나왔던 여자는 루이비통 가방을 집어 들고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식당을 나오면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네, 우 대표님. 전 미션 실패한 것 같아요.”...강민아는 반하준도 화장실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두 남자가 동시에 화장실로 가는 건 누가 봐도 이상했기에 휴대폰을 들고 심은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장실 칸에서 강민아의 메시지를 받은 심은호는 동공에 휴대폰 화면의 불빛이 반사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려 미소를 지었다.달빛이 그를 걱정해 주니 너무 행복했다.심은호는 칸에서 나와 휴대폰을 세면대에 올려놓았다.손을 씻은 그가 휴지를 몇 장 뽑아 손을 닦으며 걸어 나갔다.굳은 표정의 반하준이 안쪽 칸에서 걸어 나오는데 세면대 위에 놓인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심은호 휴대폰 아닌가?’반하준이 다가가 휴대폰을 집어 들자 휴대폰 화면에 카톡 메시지가 떠 있었다.저장된 상대 이름은 달빛.[개자식도 화장실에 갔어요.]저장된 이름을 본 반하준은 심장이 철렁했고, 강민아가 심은호에게 보낸 메시지를 본 그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은 먹구름으로 뒤덮였다.빠득 어금니를 깨물자 얼굴 근육마저 떨려왔다.심은호가 휴대폰에 비밀번호를 설정해 놓지 않아 바로 열어서 살펴본 그는 숨이 턱 멎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리며 어둠 속에 숨어있는 악귀처럼 강민아와 심은호의 대화 내용을 훔쳐보았다.문득 반하준의 손끝이 멈칫하며 그의 눈에 심은호의 사진이 들어왔다.심은호가 강민아에게 보낸 것인데... 대체 이게 다 뭘까.반하준의 두 눈이 이글거렸다.휴대
반하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지금 심은호가 하는 말이 그가 생각하는 그런 뜻일까?그는 저도 모르게 휴대폰 속 심은호의 것이 핑크색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생각을 억누르며 화가 잔뜩 난 채 심은호를 노려봤지만, 심은호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의 가슴을 슬쩍 흘겨보았다.반하준의 얼굴 전체가 숯덩이처럼 검게 변했다.심은호는 경쟁에서 이겼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올렸다.말문이 턱 막힌 반하준은 이런 기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아 목을 가다듬고 반격을 시작했다.“색소침착, 옷감 마찰로 색이 짙어지는 건 정상이야. 너처럼 밝은색이 오히려 비정상이지.”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반하준의 머릿속이 펑 터져버린 뒤였다.심은호에게 코가 꿰인 채 끌려다니며 그가 일부러 파놓은 함정에 걸려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반하준이 턱을 치켜들고 심은호를 향해 휴대폰을 던졌지만 심은호는 받지 않았다.휴대폰은 바닥에 떨어져 저 멀리 날아갔다.‘허, 겁을 먹었나?’반하준의 눈동자 사이로 차가운 빛이 번쩍였다.전에 서밋 포럼에서 심은호에게 주먹을 한번 날렸을 뿐인데 그가 피를 토하던 게 떠올랐다. 심은호는 그의 앞에서 조금도 반격하지 못하는 나약한 남자였다.“7년 전부터 열심히 관리했는데 확실히 민아 씨는 핑크색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반하준은 분노가 극에 도달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넌 아무리 애를 써도 그저 빈껍데기일 뿐이야. 난 최고의 경험을 선사해 줬는데 네가 나랑 비교가 돼?”반하준의 콧구멍에서 뜨거운 김이 쏟아져 나왔고 그는 지금 이 순간 자기 얼굴이 성난 짐승처럼 일그러졌다는 것을 알았다.부신 그룹 후계자는 항상 냉철하고 이성적이어야 하는데 어떻게 심은호의 도발에 쉽게 넘어갈 수 있겠나.하지만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남자의 소유욕이 발동한 걸까.그는 심은호가 무모하게 자신을 도발하고 남자로서 자존심을 짓밟는 게 싫을 뿐이지 강민아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심은호의 잘생긴 얼굴이 싸늘해지며 별처럼 반짝
남자는 이런 볼품없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듯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왜 그래요?”서둘러 물어보던 강민아는 그가 몸에 미끈거리는 액체를 뒤집어쓴 것을 발견했다.“옷이 왜 이렇게 됐어요?”심은호는 곧바로 반듯하게 일어서서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괜찮아요. 반 대표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일부러 부딪힌 건 아닐 거예요.”남자는 애써 괜찮은 척하는 기색이 다분한 어투로 말했고 강민아는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반하준이 밀었어요?”심은호는 입술을 달싹이며 그녀를 달래기만 했다.“민아 씨, 난 정말 괜찮아요.”“저 사람이 그쪽 옷도 더럽힌 거죠?”강민아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하자 심은호는 설명하지 않고 손을 뻗어 주머니를 만지며 덧붙였다.“여기서 기다려요. 들어오지 말고. 내가 전화기 주워 올게요.”남자 화장실에 들어선 강민아는 반하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확 달아오른 불길이 그녀의 머릿속을 들끓게 했다.“반하준, 미친 거야?”반하준은 혼란스러웠다.심은호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고 그 의기양양한 미소가 반하준은 무척 눈에 거슬렸다.그는 느릿하게 허리를 굽혀 휴대폰을 집어 들며 일부러 깨진 화면을 강민아에게 보여줬다.반하준은 그제야 자신이 걸려들었다는 걸 깨달았다.강민아는 지금쯤 그가 심은호에게 주먹을 날리고 그를 밀치고 휴대폰까지 부수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지는 않을까.피가 솟구치고 반하준은 목구멍에서 비릿한 맛을 느꼈다.그때 심은호가 강민아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가요. 반 대표님은 우리만 보면 화를 내니까 그냥 상대하지 마요.”감히 그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그의 전처 손을 잡는 사람이 있다니.“난 밀지도 않았고 핸드폰 부수지도 않았어. 강민아, 저 자식이 나 모함하는 거 모르겠어?”반하준은 격앙된 목소리로 설명했다.“저 자식이 비누 가져가서 자기 몸에 들이부었다고. 내가 그런 한심한 짓이나 하는 인간으로 보여?”그를 바라보는 강민아의 두 눈엔 어떠한 감정이나 온기가 없었다.한때 반하준이 그녀를 바
반하준은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심은호가 쳐놓은 덫에 걸려드는 게 아니었다. 강민아가 심은호를 감싸주는 순간 누군가 송곳을 들고 그의 가슴에 찔러 넣은 것만 같았다.뿜어져 나온 피가 그의 눈앞을 얼룩지게 했다.심은호는 강민아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그가 일부러 반하준을 자극했다는 걸 강민아가 알겠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의 챙김을 받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심은호는 노골적인 도발이 가득한 눈빛으로 반하준을 다시 바라보았다.그는 손을 뻗어 강민아를 감쌌다.“민아 씨한테 비누 던질까 봐 걱정돼요.”목구멍에서 피가 끓었다. 재계에서도 반하준은 이렇게까지 누군가의 속임수에 놀아난 적이 없었다.게다가 여기는 남자 화장실이었고, 화장실에는 감시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에 강민아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수도 없었다.“반하준, 당신 성격에 죽어도 심은호 씨한테 사과는 안 하겠지. 그러면 정장값이라도 물어내. 안 물어내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100만원 이상의 재산 손해는 금액이 상당해서 두 세날 정도 유치장에 있을 거야. 원한다면 나도 막지는 않을게.”심은호는 몸을 숙여 입술을 강민아의 귀에서 10센티 정도 떨어뜨린 채, 반하준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은근하게 속삭였다.“역시 민아 씨밖에 없어요.”주먹을 꽉 쥔 반하준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살갗에 쌓인 채 하얗게 드러나 있었다.게다가 연달아 볼일을 보려고 화장실에 들어왔던 남자들이 강민아를 보고는 당황하며 나가버렸다.밖에선 몇 명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방금 반 대표님 본 것 같은데.”이곳은 부신 그룹 사옥과 가까워 자연스레 많은 직원이 식사하러 오는 곳이었다.화장실에 가지 못한 남자들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밖에 서 있어야 했다.“내가 다 들었어. 심은호가 반 대표님 전 와이프랑 만나는데 반 대표님이 화가 나서 심은호한테 핸드 워시를 들이붓고 밀어버렸대.”반하준은 밖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고 발끈했다.이젠 아무리 설명해도 돌이킬 수 없었다.밖에서 누군가가 한탄했다
강민아는 심은호의 셔츠 단추를 푸는 데만 집중했다. 비누가 잔뜩 묻어 확실히 단추를 풀기 어려웠다.자의식과잉 반하준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심은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하준을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내 여자 친구가 셔츠 벗는 걸 도와주는 게 뭐 어때서? 반 대표님은 조선시대에서 살다 왔나 봐. 어쩜 사람이 저렇게 고리타분하지?”심은호는 일부러 말끝에 힘을 주었고 반하준은 거대한 충격을 받은 듯 동공이 움츠러들며 몸에서 고통이 느껴졌다.“네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반하준은 우스웠다.“나랑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강민아는 반하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왜, 이혼까지 했는데 당신 때문에 혼자 살아야 해?”강민아는 셔츠 단추를 다 풀고 심은호가 손을 더럽힐까 봐 알아서 남자의 몸에서 셔츠를 벗겨냈다.남자는 몸이 좋았다. 지나치게 탄탄하지 않고 적당히 잔근육이 붙어있는 남자의 몸은 가슴과 복부 근육이 보기 좋은 굴곡을 자랑했다. 이건 타고난 것이지 절대 후천적인 운동으로 생겨난 게 아니었다.강민아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고 훅 느껴지는 호르몬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그녀의 얼굴에 담긴 홍조를 발견한 심은호가 고개를 숙이며 듣기 좋은 중저음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멋있어요, 반하준이 멋있어요?”이번에도 반하준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기에 그가 묻는 말에 반하준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강민아는 소리 내 웃었다.“그쪽이 제일 멋있어요.”이왕 애정행각을 벌일 바엔 이걸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덧붙였다.“피부가 아주 좋아요. 근육도 탄탄하고, 허리도... 아주 훌륭하고.”심은호의 허리가 예쁜 건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칭찬하니 왠지 모르게 야릇하게 들렸다.“오호.”심은호는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스스로 함정을 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온몸에 피가 끓으며 맨눈으로 봐도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반면 반하준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을 느꼈다.무심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니 눈은 새빨갛고 얼굴은
그는 이제 그 목도리를 어디에 뒀는지도 잊어버렸다.하지만 강민아는 목도리에 그려진 꽃을 자신이 직접 디자인했다고 말했다.백화점에서 살 수 없는 목도리니까 강민아가 직접 뜨개질을 한 것이 틀림없다!반하준은 우선 주문 내용을 살펴보며 강민아가 뜨개실을 많이 샀다는 것을 확인했다.그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목도리는 강민아가 직접 뜬 게 확실하다.그러다 문득 반하준의 시선이 한 주문 내용에 멈췄다.[자동 뜨개질 기계]아이들을 위해 목도리나 장갑, 모자 등을 뜨기 위해 구입한 것 같다.두 아이를 위해 그렇게 많은 걸 만들어줬는데 분명 강민아 혼자서 다 하기엔 힘들었겠지.반하준은 감시카메라 영상을 찾아 강민아가 자동 뜨개질 기계를 사용하는 모습을 발견했다.기계가 뜨는 속도가 느리다고 생각한 그녀는 전동 드릴을 꺼내 기계를 개조했다.10분 후, 기계에서 목도리 하나가 뚝딱 완성되었다.그건 반하준에게 선물한 그 목도리였다.반하준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강민아가 목도리를 건네줄 때 피곤한 표정으로 하품까지 했던 것을 기억한다.반하준은 강민아가 자신을 위해 밤새도록 한 땀 한 땀 뜨개질을 해서 그 목도리를 만들어줬다고 생각했다.그래도 기술이 발달한 탓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자동 뜨개질 기계가 있으니 강민아가 기계로 뜨는 건 당연했다.그러다 몇 번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면서 그녀에게 잘하는 요리를 준비하라고 했던 게 떠올랐다.강민아는 많은 요리를 준비하느라 오후 내내 바삐 돌았다.일부러 그때그때 마음을 바꾸면서 소금을 적게 넣거나 진간장 대신 전통 간장을 쓰라고 했었는데 그것까지 즉석식품으로 대체할 수는 없겠지.반하준이 주방 카메라를 돌려보니 그날도 어김없이 강민아는 점심에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햇빛 아래에서 책을 보고 태블릿을 이용해 에세이와 연구 논문을 찾아보며 오후 내내 주방에 머물렀다.반하준과 그의 친구들이 집에 도착하기까지 30분 정도 남았다는 운전기사의 전화를 받고서야 강민아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그
잘생긴 반하준의 얼굴이 팍 일그러지며 살벌한 표정이 드러났다.“아줌마한테 해달라고 해!”참 터무니없다.강민아를 대하는 민이의 태도가 확 달라지니 고통받는 사람은 그가 되었다.반하준은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지만 민이는 고집스럽게 떼를 썼다.“엄마가 직접 끓인 죽 먹고 싶어요! 으아앙!”전화기 너머로 아이가 칭얼대자 반하준은 귀에 수많은 바늘이 꽂힌 듯 고막을 찌르는 듯한 이명을 느꼈다.“그럼 내가 그 여자 손을 잘라서 죽 만들어줄게!”홧김에 뱉은 말에 민이의 얼굴이 충격으로 창백해졌다.“아빠! 어떻게 그런 말을 해요. 난 엄마...”“다시는 엄마라는 말 입에 담지 마!”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린 남자는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아팠다.분노의 불길에 피가 부글부글 끓으며 전화기를 쥐고 있던 손에서는 푸른 혈관이 뚫고 나올 기세로 뱀처럼 꿈틀거렸다.그는 여전히 강민아가 그토록 오랜 결혼 생활 동안 자신에게 무심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조금 전 봤던 건 전부 우연일 거다.그렇다면 스코틀랜드식 에그는?만드는 과정이 복잡한 스코틀랜드식 에그는 강민아가 분명 매번 손수 만들어줬을 거다.반하준은 컴퓨터를 들여다보다가 강민아가 올해 자신과 아이를 위해 스코틀랜드식 에그를 만들었던 영상을 발견했다.그는 모니터를 통해 강민아가 스코틀랜드식 에그를 직접 손으로 하나하나 만드는 것을 확인했다.반하준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꼬리까지 올라갔다.그러다 갑자기 반하준이 고개를 앞으로 숙여 컴퓨터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강민아가 스코틀랜드식 에그를 두 개만 만든 게 아니겠나.반하준과 민이, 정이를 위한 것이라면 세 개를 만들어야 했다.반하준은 음식이 거의 끝날 무렵 강민아가 냉장고에서 상자를 하나 꺼내는 것을 발견했다.포장을 뜯어보니 안에는 이미 튀긴 스코틀랜드식 에그가 들어있었고, 강민아는 조리된 채 얼린 스코틀랜드식 에그를 꺼내 에어프라이어에 넣었다.그렇게 곧 스코틀랜드식 에그 3인분이
반하준의 얼굴이 다소 일그러지고 반용화는 반하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보았다.“촌수로 따지면 너와 석현이가 같지 않나? 대단하신 반 대표님이라 사촌 동생한테 사과를 못 하겠어?”세대로 따지면 반석현이 그의 사촌 동생인 것은 맞지만 반석현은 민이와 동갑내기였다.게다가 반석현은 반용화의 양아들에 불과했고 반씨 가문에서 그의 지위는 민이보다 열세였다.그런데 어른인 그를 보고 반석현에게 사과하라고 하니 반하준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반용화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두 번 말하게 하지 마!”연진숙이 걸어 나왔다.“용화 씨, 지금 뭐 해요? 왜 가만히 있는 하준이보고 석현이한테 사과하라는 건데요? 그러다 애가 벌 받아요.”마지막 말은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연진숙도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대단한 반용화가 굳이 그녀에게 캐묻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준아,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손 내밀어.”반용화는 아무 기복 없는 목소리에 웃어른의 진중함을 담아 명령했다.반하준은 막연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마치 강한 힘이 자신을 부추기는 것 같아서 도저히 손을 뻗지 않을 수가 없었다.반용화가 비서에게 눈짓하자 비서는 자를 꺼내 반하준의 손바닥을 내리쳤다.짜악!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연진숙은 몸을 흠칫 떨었다. 병실에서 울고 있던 민이도 벌벌 떨며 울음을 그쳤다.맞은 반하준의 손바닥은 순간 하얗게 변했다가 이내 피가 몰리며 맨눈으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부풀어 올랐다.때린 건 반하준의 손바닥이지만 아픈 건 연진숙의 마음이었다. 연진숙은 속이 쓰라린 느낌에 입술을 달달 떨었다.“이... 이게 대체...”연진숙은 충격에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일부러 그녀가 보는 앞에서 때렸다는 걸 안다.반용화는 올곧은 소나무처럼 휠체어에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네 아들이 석현이한테 무례하게 굴어서 때리는 거야. 네 어머니가 말실수했으니 벌은 네가 받아야지.”반용화가 연진숙에게 말했다.“형수님, 다음에 또 말실수하면 그땐 제가 하
반용화는 깊은 웅덩이처럼 맑고 차가운 눈빛으로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반하준의 시선이 반용화의 두 다리로 향했다.7년 전, 반용화는 미린국의 제재를 받고 국가안보 리스트에 올랐다. 국내를 떠나 미린국과 조약을 맺은 나라만 가면 곧바로 체포될 수 있었다.그러나 국내의 많은 학자들에게 이러한 제재는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심한기도 5년 전에 미린국의 입국 제한 명단에 올랐고, 미린국은 심한기가 학자의 신분으로 어떠한 동맹국이든 연구 방문하는 것을 금지했다. 즉 세계 10대 대학에 전부 심한기, 반용화와 협업하는 것을 금한 것이다.하지만 이들이 국내에 거주하는 한 최고급 학자로서 생활하는 데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그러다 하필 반용화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목숨을 노린 교통사고가 일어난 것. 다행히 반용화는 목숨은 건졌지만 대신 다리를 잃었다.이후 반씨 가문은 반용화를 더욱 회피했고, 반용화도 반씨 가문 기업은 물론 그 어떤 사람과도 엮이려 하지 않으며 일부러 반씨 가문과 거리를 두었다.반하준은 반용화가 수많은 사람 중 강민아를 발탁해 영재반에 데려간 것 말고는 둘 사이에 접점이 없다고 생각했다.가족 모임에서 몇 번 만난 게 전부였다.강민아도 반용화를 만나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는 것 외에는 두 사람 사이에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이 때문에 반하준은 오랫동안 반용화와 강민아가 서로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반용화의 말이 그의 심장을 꽉 움켜쥐었다.“강민아가 원하던 야심 찬 목표가 뭔데요?”반용화의 검은 눈동자엔 통찰력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는 반하준의 당황과 긴장을 전부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민아가 자신을 깊이 사랑한다고 믿어왔던 것이 반용화의 한 마디에 너무도 쉽게 뒤집혀버린 것이다.“걔가 할 일은 끝났어. 사모님이라는 신분으로 보호받으며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지. 반씨 가문이 걔를 지켜주는 건 여기까지야. 이제부터는 내가 해. 하지만 너한테 고맙다는 말은 안 해. 결혼은 했지만 평범한 부부생활을 보내진 못했잖아
그가 고개를 돌려 병실을 보니 의사들이 병상 주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민이의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건가?’“네 아들 왜 저래?”“독한 엄마 때문에 저렇게 됐죠.”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차가운 기운이 칼날처럼 그의 얼굴을 스쳤다.뺨이 찬바람을 맞은 것처럼 아팠다.반하준은 물었다.“작은아버지, 왜 그런 눈빛으로 저를 보시는 거예요?”그의 말이 틀렸나.“제 아들이 강민아에게 달려가서 화해하자고, 제발 좀 자기를 봐달라고, 한 번만 안아달라고 애원했지만 강민아는 애가 밖에서 비를 맞게 내버려뒀어요. 그래서 민이가 저 지경이 됐는데 엄마로서 책임이 없나요?”반용화의 흠잡을 곳 없는 얼굴은 내내 무표정이었다.“나보고 민아를 질책하라는 거야?”반하준이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작은아버지도 반씨 가문 사람인데 팔이 바깥으로 굽으면 안 되죠.”반용화는 깊은 눈동자로 덤덤하게 반하준을 응시했다.“난 반씨 가문 사람이니까 당연히 반씨 가문 편을 들 거야. 반씨 가문 사람들이 선을 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불쾌함을 느낀 반하준의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강민아와 저는 이미 이혼했는데 작은아버지는 무슨 신분으로 걔 편을 드는 거죠?”반용화는 지나치게 강민아를 챙기고 있었다.이건 제자에 대한 스승의 애정을 넘어선 감정이다.게다가 반용화가 어떻게 강민아의 스승인가. 제대로 가르친 적도 없는데.“민아가 너랑 결혼한 진짜 이유가 뭔지 알아?”당황한 반하준은 순간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나랑 결혼하는데 다른 이유가 있겠어요? 날 좋아하고 내 위치 때문에...”“네 신분 때문인 건 맞지.”반용화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너무 많은 것을 감추고 있었다.반하준은 그런 그의 눈빛에 불안한 마음이 쿵쾅거렸다.“난 부신 그룹 대표고 그 여자는 불순한 의도로 내게 접근했어요.”“그래.”반용화가 인정했다.“민아는 더 큰 꿈을 위해 7년 동안 반씨 가문에 있었던 거야.”반하준은 휠체어에 앉은 반용화를 바라보면서 숨이 가빠지고 동공이
반하준이 민이를 병원에 데려왔을 때 민이의 목소리는 우느라 다 쉬었다.이젠 소리조차 나오지 않자 작은 얼굴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장시간 격한 감정 기복과 빗속에서 넘어지기까지 해서 몸의 염증을 유발한 탓에 민이의 뺨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온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반하준은 민이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고 재빨리 의사를 불렀다.여러 명의 의사가 민이를 둘러싸고 곧바로 응급처치를 시작했다.소식을 들은 연진숙은 병원에 도착해 의사들이 병상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가슴을 움켜쥔 채 소리를 질렀다.“민이한테 무슨 일 생겼어? 오소정이 어디로 데려갔어?”“강민아를 찾으러 갔어요.”반하준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연진숙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그 양심 없는 것을 만나러 갔는데 왜 이렇게 됐어? 강민아가 민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남자가 싸늘하게 말했다.“민이를 용서하지 않고 민이가 비를 맞도록 내버려두었대요.”그 말을 들은 연진숙은 분노에 기절할 것만 같았다.“기자들 불러서 강민아는 엄마가 될 자격이 없다고 모든 매체에 대서특필할 거야! 유명하다고 우리가 대단하게 생각할 줄 아나 본데, 명성은 원래 양날의 검이야. 높이 올라갈수록 처참하게 떨어진다고!”“마음대로 하세요.”뒤돌아 병실을 나서는 반하준의 얼굴이 침울했다.강민아의 이름은 가시처럼 그의 심장 깊숙이 박혀 혈관 속을 누비고 다녔다.그녀를 생각만 해도 반하준은 온몸이 아팠다.아들이 동의하는 모습에 연진숙은 기분이 좋았다.“오늘 신씨 집안 딸과 소개팅한 건 어땠어?”그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반하준은 귀를 의심했다.“어머니, 의사들이 지금 민이를 살리고 있잖아요!”조금 전까지 민이의 몸 상태에 대해 슬퍼하던 사람이 곧바로 기대에 찬 목소리로 반하준의 연애사에 개입했다.“의사들이 민이를 살리고 있지만 애한테 새엄마를 찾아주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지.”연진숙이 덧붙였다.“빨리 새엄마를 찾아줘야 민이를 잘 보살펴주지. 신씨 집안 딸이 의대생에 한의학 전공했대.
옷은 모두 젖어서 하얗고 얇은 천이 몸에 딱 달라붙어 섬세한 곡선을 드러내고 있었다.오소정의 입이 달걀 하나는 족히 들어갈 정도로 떡 벌어졌다.“여사님... 왜 그러세요?”오소정은 도민영이 미친 게 아닌지 의심되었다.도민영은 음악을 틀어놓고 휴대폰을 향해 요염한 몸짓을 선보이며 말했다.“모르겠어요? 나 성진 씨한테 복수하고 있어요!”그제야 오소정은 도민영이 SNS 계정을 만들어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이게 무슨 복수에요?”오소정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도민영은 허리를 비틀며 가슴을 흔들었다.“성진 씨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내 몸을 다른 남자들에게 보여줄 거예요!”오소정은 침묵했다. 강씨 가문에서 오랫동안 온실 속 화초로 자란 사람은 역시 남다르다.민이가 중얼거렸다.“할머니는 무슨 소설에서 뛰쳐나온 사람 같아요.”오소정은 민이를 안은 채 도민영에게서 멀어졌다.“도련님, 비가 너무 많이 오니까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안 돼요. 내려주세요!”오소정이 민이를 휠체어에 태우려 하자 민이의 온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또다시 휠체어에서 떨어졌다.“도련님!”오소정은 이제 목소리가 다 갈라져 있었다.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민이를 부축해 주려 하자 아이가 빽 소리를 질렀다.“건드리지 마!”“도련님, 바닥에 엎드려 있으면 어떡해요!”빗물이 얼음처럼 민이의 얼굴을 때렸지만 추운 날씨에 이미 감각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말라고!”도민영의 행동이 민이를 자극했다. 이렇게 바닥에 누워 있으면 강민아가 자신을 절대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민이와 도민영을 쫓아내려던 경비원들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민이는 바닥에 쓰러져 울부짖고 도민영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하나는 미친 할망구, 하나는 미친 아이라 차마 다가가서 쫓아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16층에서 강민아는 커튼을 열어 아래층 광경을 보고는 다시 커튼을 닫았다.다섯살 민이가 떼를 쓰
오소정의 심장이 철렁했다.“도련님!”“으아앙, 엄마!”민이는 두 손으로 강민아를 향해 기어가려고 했다.“엄마, 나 좀 봐줘요!”두 눈에서 눈물이 솟구치고 뺨이 붉게 상기된 채 민이는 몸의 통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앞으로 기어 나갔다.하늘에서 가랑비가 내리고 오소정이 서둘러 민이를 안아 들었다.강민아와 정이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오소정이 민이를 안은 채 뛰어왔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강민아와 정이가 안으로 들어갔다.“엄마!”민이는 목이 터지라 울부짖으며 두 팔을 쭉 뻗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아이는 손을 뻗어 엘리베이터 문을 두드렸고 슬픈 울음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엄마! 다시는 엄마를 화나게 하지 않을게요! 제발 돌아와요! 내가 이렇게 빌게요! 돌아와 줘요!”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머리 위 조명이 고개를 든 강민아의 눈동자를 비추었다.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는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민이가 버린 밥은 다시 지으면 그만이고, 민이가 찢어버린 시험지와 교과서도 다시 쓰면 되지만...버려진 사랑은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쓰레기통에서 자신이 부쉈던 조각들을 꺼내 다시 이어 붙여도 그 위에 얼룩진 상처는 다시 돌이킬 수 없었다.그것이 그녀가 엄마로서 아이에게 가르치는 마지막 교훈이었다.거듭된 상처를 받은 후 엄마로서 용기를 내어 가해자인 아들을 떠난 것이다....“엄마...”정이가 속삭였다.강민아가 슬퍼하는 것이 느껴져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엄마를 위로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강민아는 아랫입술에 깊은 이빨 자국이 남을 정도로 깨물며 고개를 숙이고 정이에게 괜찮다는 미소를 지으려 했다.하지만 표정을 바꾸자 뜨거운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정이는 마음이 아프고 코끝이 시큰거렸다.“엄마, 민이 낳은 거 후회해요?”강민아가 고개를 저으며 쭈그리고 앉자 정이는 손을 내밀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강민아가 말했다.“정아, 난
옆에서 지켜보던 도민영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딸, 민이 동생 용서해 줘. 엄마가 자식 용서 안 하는 게 어디 있어.”민이가 물었다.“엄마는 내가 어떻게 해야 용서해 줄 거예요? 내 카드 엄마한테 줄게요!”평소 강나현이 카드를 긁는 것을 제일 좋아했기에 민이는 손에 쥔 블랙 카드가 제일 가치 있고 누구나 탐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강민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민아,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건 이번 한 번만 용서하는 게 아니야. 오늘 내가 너를 용서하면 앞으로 매일 밥을 짓고 죽을 끓일 때마다 널 한 번씩 용서해야 할 거야. 앞으로 강나현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또다시 너를 용서해야 하고, 네 아빠를 볼 때면 반씨 가문에서 네가 나에게 했던 말과 행동이 떠오를 거야. 그러면 난 또 내 아픈 상처를 마주하면서 너그러운 척 너를 용서해야 해.”강민아는 민이의 눈에 수정 같은 눈물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아이는 지금 속상한 마음에 울기 직전이었다.“이제 오토바이 탈 수 있어?”강민아가 묻자 민이는 울면서 말했다.“이제 못 타요.”강민아가 덤덤하게 대꾸했다.“그래, 나도 못 해. 한번 뱀에게 물리면 10년 동안 밧줄만 봐도 놀란다는데, 넌 몸을 다쳤지만 난 마음을 다쳤어.”민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난 뱀이 아니라 엄마 아들이에요...”“난 네 아빠와의 결혼생활에서 일찍 벗어날 수 있었어. 하지만 너희를 두고 갈 수가 없었어. 네 아빠와 이혼하면 둘 다 데려가진 못하니까. 둘 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인데 누구를 버리겠어? 근데 네가 날 도와줬어. 네 덕분에 숨 막히는 결혼생활을 끝낼 결심을 할 수 있었어.”강민아는 오래전부터 이혼할 생각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줄곧 이혼을 준비해 왔기에 반하준 명의로 된 다양한 사업체와 자금을 파악하고, 마음을 굳힌 후 빠르게 이혼 서류와 합리적인 공동 재산 분배 계획을 반하준에게 내밀 수 있었다.아이를 낳은 후 본능적인 모성애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아이 울음소리만 들리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