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그녀는 자기 목을 빙빙 돌며 움직이는 가느다란 생명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그런데 눈을 크게 떠도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숨막히는 공포에 강나현은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헉!”강나현은 두 다리가 풀리며 곧바로 기절했다.그들이 있는 곳 위쪽 경사면에는 감시용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반하준은 잠시 생각한 뒤 민이를 데리고 다시 경사면 아래로 내려갔다....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반하준이 민이와 강나현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비탈길 아래쪽에는 벌레가 유난히 많아 반하준은 얼굴과 목에 여러 방 쏘였고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어 가슴 쪽을 문 벌레도 있었다.민이 역시 온몸에 붉은 발진이 생겼다.강나현은 더더욱 엉망진창이었는데 비탈길에서 기절한 후 벌레에게 물려 눈꺼풀이 부어올랐고 정신을 차렸지만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강나현은 눈이 멀었다고 생각했는지 반하준과 민이의 귀청을 찢을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침대에 엎드린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에 약을 발라주던 간호사는 쉬지 않고 아우성치는 그녀 때문에 몇 번이나 눈을 흘겼다.“강나현 씨?”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자 강나현은 고개를 돌렸다. 눈꺼풀에 연고를 발라 눈을 뜨지 못해서 자신을 보러 온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아, 네. 누구세요?”“저희는 운학구 지구대에서 온 경찰입니다. 신고를 받고 출동했고 폭행 미수에 대한 증거도 있으니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며칠 후 서경 국제공항.강민아는 정이의 손을 잡고 출구 쪽 난간 뒤에서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엄마, 윤세현이란 사람은 어떻게 생겼어요?”“사람 중에 제일 잘생기고 매력 있는 사람이 엄마 절친이야.”육성민과 심은호는 그들 모녀 뒤에 서 있었다. 심은호는 하품했다. 현재 시각 아침 7시, 윤세현을 데리러 오기 위해 그는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났다.그곳에 지나가던 여행객들은 저도 모르게 두 남자를 돌아보곤 했다.마스크를 쓴 육성민은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싫어했지만 훤칠하고
심은호는 경멸 섞인 야유를 내뱉었다.“허, 누구 심장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네요.”그가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오만하게 비아냥거린 뒤 육성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육성민의 표정도 굳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볼 뿐, 깊고 어두운 눈가엔 흐뭇한 감정까지 담겨 있었다.‘나만 한심한 놈이야?’부서진다는 심장은 심은호 것이었나보다.‘역시 육 소위, 흐트러짐이 없네.’사실은 그도 당장 달려가 윤세현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지만 강민아 때문에 억지로 참는 게 분명하다.심은호는 깊게 심호흡하며 육성민을 따라 배우기로 했다. ‘이 정도 아량도 없이 어떻게 첩 노릇을 해?’“나도 뽀뽀할래요!”윤세현에게 다정하게 입 맞추는 강민아를 본 정이도 기회가 오자마자 달려들었다.강민아가 정이를 안아들자 정이는 윤세현의 볼에 여러 번 뽀뽀했다.윤세현의 눈가는 촉촉했고 목까지 빨개진 그녀가 수줍게 말했다.“네 딸이야?”강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이름은 강윤정, 그냥 정이라고 불러.”윤세현은 다정하게 정이를 안아주었고 강민아는 그녀와 정이를 동시에 품에 가두었다.심은호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옛말에 하늘에서 떨어져 다친 학처럼 잘생긴 얼굴이 창백해졌다.“그쪽은 왜 안 가요?”심은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내가 왜 가요?”육성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쪽이 죽이고 시체는 내가 처리할게요.”심은호는 육성민의 감옥생활까지 생각해 둔 상태였다.한꺼번에 두 라이벌을 제거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육성민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윤세현에 대한 심은호의 적대감을 알아차리고 경고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방해하지 마세요.”심은호는 경악했다.“오빠가 돼서 둘이 공공장소에서 뽀뽀하고 껴안는 걸 그냥 놔둘 거예요?”육성민은 크게 이상해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그게 뭐 어때서요? 민아가 얼마 만에 윤세현을 만난 건데요.”심은호는 다시 봤다는 눈빛으로 육성민을 바라보았다.“육 소위님은 진작
윤세현은 칼날 같은 심은호의 눈빛을 보고 작은 심장이 몇 번이나 놀랐는지 모른다.‘누구지? 낯이 익은데.’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원수라도 만난 걸까.정이는 가볍게 캐리어를 끌며 매끄러운 타일 위를 날아다녔다.심은호의 눈빛에 놀란 윤세현은 강민아의 뒤로 숨었다.낯을 가리는 그녀에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무척 힘들었는데 빤히 쳐다보는 이성의 눈빛은 더더욱 불편했다.늘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옷도 중성적으로 입어서 이성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는 일이 드물었다.본다고 해도 잘생긴 외모에 대부분은 우호적인 시선을 보냈다.육성민이 덤덤하게 윤세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네요.”윤세현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강민아의 오빠에 대해서는 키 크고 가슴도 크다는 것 외엔 별다른 기억이 없었다.강민아가 윤세현에게 소개했다.“이쪽은 심은호 씨, 문라이트 클럽 대표야.”윤세현은 제법 놀라며 고개를 돌려 강민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난 줄곧 문라이트 대표가 느끼한 아저씨인 줄 알았어.”심은호는 빠득 이가 갈렸다.‘저 기생오라비가!’감히 그가 보는 앞에서 강민아와 귓속말을 주고받는 건 기선제압이 아니고 뭘까.심은호는 서늘한 시선으로 윤세현을 뚫어져라 보며 손을 내밀고 차갑게 말했다.“안녕하세요.”윤세현은 강민아의 팔짱을 낀 채 심은호와 악수할 생각이 없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심은호의 어두운 눈동자엔 두꺼운 얼음이 한층 더 쌓였다.강민아가 설명했다.“세현이가 낯을 가려서 남자와 신체적 접촉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요.”강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은호가 강한 적대감을 드러낸 탓인지 윤세현이 목을 움츠리며 강민아 뒤로 숨었다.그녀의 두 손이 자연스럽게 강민아의 허리를 감쌌다.이렇게 강민아를 안으면 안정감이 느껴졌다.심은호의 눈동자에 드리웠던 차가운 얼음이 쩍쩍 갈라졌다.자주 사람을 죽이는 친구에게 먼저 오른손을 자를지, 왼손을 자를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그런데 강민아는 윤세현의 스킨십에
심은호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며 손발이 차가워지고 속에선 열불이 들끓었다.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강민아의 침대가 그렇게 크다면 셋이 같이 자는 건 안 될 게 뭐가 있나!말문이 막힌 심은호의 목울대가 요동쳤다.강민아는 심은호의 붉어진 눈가를 보고 물었다.“심은호 씨, 왜 그래요?”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에요. 민아 씨가 행복하면 됐어요.”강민아는 어리둥절했고,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윤세현이 턱을 그녀의 어깨 위로 올려놓으며 작게 말했다.“저 사람 이상해.”심은호는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살면서 이런 서러움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저 기생오라비가 강민아의 애정을 믿고 이 틈에 그를 모함하고 있다.심은호가 입을 열어 조롱하려는데...강민아가 다정하게 윤세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우선 집에 가자. 10시간 동안 비행기 타느라 힘들었지? 집에 가서 씻고 푹 쉬어.”심은호는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물에 빠진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는 그의 머리 위로 만약 귀가 있었다면 축 늘어졌을 거다.‘그래, 윤세현만 챙기지.’그는 그냥 어두운 구석에 숨어서 혼자 상처를 핥으며 질투심에 미쳐버릴 수밖에. 잔뜩 뒤틀리고 벌레가 되어서 기어다니기나 하겠지.심은호에게서 원망 섞인 기운이 끊임없이 흘러나오자 윤세현은 자신과 강민아의 등을 완전히 밀착시켰다.“응!”그러면서 강민아의 코트에 비비적거렸다.5년 동안 떨어져 지냈지만 두 사람은 한 번도 헤어진 적 없었던 것처럼 가까웠다.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고 나서야 윤세현은 5년 동안 비어 있던 자신의 마음이 비로소 채워졌음을 느꼈다.“저 사람 윤세현 아닌가?”“우리랑 같은 비행기 타고 왔는데 몰랐어?”입국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짐을 카트에 가득 싣고 온 외국인들이 여러 명 있었다.그들은 한참 동안 윤세현을 관찰하면서 윤세현의 품에 안겨 있는 강민아를 살펴보았다.윤세현이 누구와 이토록 가깝게 지내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강민아는 딸아이와 함께 서둘러 호텔에 도착했다. 아들의 다섯 번째 생일 파티가 이미 시작되었다.반하준이 아들 곁을 지키고 있었고 촛불의 따스한 빛이 아이의 앳된 얼굴을 비추었다.반현민이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나현 이모가 제 새엄마가 됐으면 좋겠어요.”그 시각 강민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밖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딸과 생일 케이크가 비에 젖지 않도록 몸으로 막은 바람에 몸 절반이 흠뻑 젖어버렸다.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옷이 온몸에 찰싹 달라붙었다.강나현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이모 말고 형이라 부르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나랑 네 아빠는 형제 같은 친구라서 작은 아빠밖에 못 해.”그녀의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강나현의 남사친들이었다. 그들도 함께 웃긴 했지만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반하준에게 장난을 칠 수 있는 사람은 강나현뿐이었다.반현민이 강나현에게 잘 보이려고 반짝이는 눈을 깜빡이며 환하게 웃었다. 강나현이 반현민의 볼을 어루만지며 물었다.“민이는 왜 갑자기 새엄마가 갖고 싶어졌어?”그러자 반현민이 재빨리 반하준의 눈치를 살폈다.“아빠가 현이 형을 좋아하니까요.”그 소리에 기분이 좋아진 강나현은 반현민을 무릎에 앉히고 반하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반하준에게 눈썹을 치켜세우며 자랑했다.“역시 민이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반하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애들 말은 그냥 흘려 들어.”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반하준과 강나현이 죽마고우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강나현이 항상 남자들과 어울려 다녀 반하준의 부모님은 그녀를 탐탁지 않아 했다.강민아가 18살이 되던 해에 강씨 가문으로 돌아왔는데 친정의 희망과 반하준에 대한 사랑을 가득 안고 그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길렀다.방 안의 사람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민이는 엄마랑 더 친해? 현이 형이랑 더 친해?”“현이 형이
강나현이 반하준을 돌아보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민아 언니가 또 오해했네. 내가 가서 잘 설명할게.”“설명할 것도 없어. 쟤가 너무 예민한 거야.”반하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강민아가 두고 간 생일 케이크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그의 말에 사람들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민아가 화를 내면서 가버린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다른 사람들도 맞장구를 쳤다.“형수 지금 화가 나서 저런 거니까 하준이가 가서 잘 달래면 돼.”“맞아. 형수가 하준이랑 이혼할 리가 없잖아. 하준이 아이를 낳아주겠다고 죽을 뻔하기까지 했는데.”“어쩌면 나가자마자 후회했을지도 몰라.”“자, 케이크나 먹자. 하준이가 집에 가면 강민아 씨가 문 앞에서 망부석처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어.”반하준도 그제야 찌푸렸던 얼굴을 폈다. 벌써 강민아가 주눅이 든 채 문 앞에 서서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반현민은 강나현이 사 온 케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크림이 입안 가득 퍼져 혀가 얼얼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엄마가 간섭하지 않아서 너무 좋아.’...생일 파티가 끝난 후 반하준은 차에 앉아 눈을 감았다. 창밖의 빛이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가 다시 꺼지곤 했다.“아빠, 몸이 가려워요.”반현민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반하준이 눈을 번쩍 뜨고 조명을 켰다. 반현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두 손으로 계속 몸을 긁으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재빨리 아이의 손을 떼어내고 살펴보니 목에 붉은 반점이 가득 돋아있었다.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반하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강민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어 입을 열려는 순간 차가운 기계음이 들려왔다.“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그의 두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애가 알레르기가 생겼는데도 신경 쓰지 않겠다고?’반하준이 운전기사에게 지시했다.“빨리 집으로 가.”그는 반현민을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무의식적으로 현관 쪽을 바라봤지만
사실 오소정더러 강민아에게 전화하라고 스코틀랜드식 에그를 먹고 싶다고 한 것이었다. 이미 충분히 한발 물러선 반하준이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시지 않겠다고 했어요.”“콜록콜록.”커피를 마시다가 그만 사레가 들려 참지 못하고 기침했다. 오소정이 뭔가 눈치채고 물었다.“두 분 혹시 싸우셨어요?”“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반하준의 호통에 주방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겁에 질린 오소정은 더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반하준이 손에 든 머그컵을 꽉 쥐었다.‘안 돌아올 리가 없는데? 지금쯤이면 점심에 회사로 가져올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을 거야.’예전에 그가 화를 낼 때면 강민아는 직접 회사로 도시락을 가져와 화해를 청하곤 했었다....식탁에 앉은 반우정이 아침상을 보고 두 눈을 번쩍 떴다.“와. 닭죽이다.”닭죽을 좋아하는 반우정과 달리 반현민은 닭죽만 보면 헛구역질을 했다.반하준과 반현민 모두 죽을 좋아하지 않아 반씨 저택에 있을 땐 죽을 거의 끓이지 않았다.연진숙은 죽이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음식이라고 했었다. 쌀이 부족해서 죽으로 끓여 먹는 거라고 말이다. 반씨 가문 사람들은 삼시 세끼를 과학적인 영양 균형에 맞춰 섭취했다.강민아는 죽도 영양아가 있고 아이들에게 먹이면 소화가 더 잘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에 닭고기와 야채 등을 넣으면 음식쓰레기 같다면서 혐오감을 드러내곤 했다.그리고 반현민에게 먹이려고 야채죽을 끓여준 적이 있었는데 반현민이 먹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후로 다시는 죽을 끓이지 않았다.반현민에게 음식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혼내자 반현민이 화를 내면서 따졌다.“이건 돼지들이나 먹는 건데 어떻게 나한테 먹일 수 있어요? 역시 엄마는 촌뜨기라니까요.”옛 생각에 강민아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반우정은 벌써 닭죽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그러고는 트림하면서 설거지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깨끗해진 그릇을 아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할머니 집에 와야만 닭죽을 먹을 수 있는 거예요?”강민
휴대폰 너머의 반하준은 진작 전화를 끊어버렸다.강민아는 차에 올라타 액셀을 밟고 달려나갔다. 하지만 검은색 스포츠카 한 대가 따라오고 있다는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도로 양쪽의 풍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은색 볼보가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번개처럼 달려갔다.강민아는 칠흑같이 어두운 눈빛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차를 이렇게 빨리 몰아본 게 정말 오랜만이라 계기판의 수치와 함께 아드레날린도 폭발했다.현란한 색상의 스포츠카 세 대를 연속 추월하자 스포츠카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소리쳤다.“대박. 저 사람 누구야?”다른 스포츠카에 타고 있던 사람이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부하에게 지시했다.“저 차 번호판 좀 조회해봐.”강민아는 개조된 스포츠카들을 가볍게 제쳤고 커버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몇몇 재벌 집 자제들이 낀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찾았습니다. 강씨 가문의 차입니다.”누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강씨 가문? 그럼 운전자가 강나현인가?”“강나현이 운전 저렇게 잘한다고? 그럼 전에 우리랑 레이싱할 때 실력을 숨기고 있었단 말이야?”은색 볼보가 산길을 따라 뱅글뱅글 올라갔고 뒤에 검은색 페라리가 바짝 따라붙었다.심은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 순간 머리카락이 눈썹 앞으로 툭 내려왔다.그는 한때 카리스마가 넘쳤던 강민아를 본 적이 있었다.강민아는 14살에 고연대학교 영재반에 입학하여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3년 연속 우승한 천재였다. 19살에는 자동차 경주 연맹에 지원하여 레이싱 면허를 취득한 후 월드 랠리 챔피언십에서 10위 안에 들었다.그녀의 인생은 꽃길이었고 항상 꽃과 박수갈채가 함께했다.그런데 박사 공부를 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갑자기 학업을 포기하더니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재벌가 전업주부가 되었다.그 후로 그녀의 차에는 카시트가 설치되었고 시속이 70㎞를 넘은 적이 없었다.타이어가 지면과 마찰하면서 귀를 째는 듯한 소리가 났다. 흰 연기가 피어오르던 그때 강민아의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심은호의 페라리가 그
심은호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며 손발이 차가워지고 속에선 열불이 들끓었다.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강민아의 침대가 그렇게 크다면 셋이 같이 자는 건 안 될 게 뭐가 있나!말문이 막힌 심은호의 목울대가 요동쳤다.강민아는 심은호의 붉어진 눈가를 보고 물었다.“심은호 씨, 왜 그래요?”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에요. 민아 씨가 행복하면 됐어요.”강민아는 어리둥절했고,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던 윤세현이 턱을 그녀의 어깨 위로 올려놓으며 작게 말했다.“저 사람 이상해.”심은호는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살면서 이런 서러움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저 기생오라비가 강민아의 애정을 믿고 이 틈에 그를 모함하고 있다.심은호가 입을 열어 조롱하려는데...강민아가 다정하게 윤세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우선 집에 가자. 10시간 동안 비행기 타느라 힘들었지? 집에 가서 씻고 푹 쉬어.”심은호는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물에 빠진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는 그의 머리 위로 만약 귀가 있었다면 축 늘어졌을 거다.‘그래, 윤세현만 챙기지.’그는 그냥 어두운 구석에 숨어서 혼자 상처를 핥으며 질투심에 미쳐버릴 수밖에. 잔뜩 뒤틀리고 벌레가 되어서 기어다니기나 하겠지.심은호에게서 원망 섞인 기운이 끊임없이 흘러나오자 윤세현은 자신과 강민아의 등을 완전히 밀착시켰다.“응!”그러면서 강민아의 코트에 비비적거렸다.5년 동안 떨어져 지냈지만 두 사람은 한 번도 헤어진 적 없었던 것처럼 가까웠다.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고 나서야 윤세현은 5년 동안 비어 있던 자신의 마음이 비로소 채워졌음을 느꼈다.“저 사람 윤세현 아닌가?”“우리랑 같은 비행기 타고 왔는데 몰랐어?”입국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짐을 카트에 가득 싣고 온 외국인들이 여러 명 있었다.그들은 한참 동안 윤세현을 관찰하면서 윤세현의 품에 안겨 있는 강민아를 살펴보았다.윤세현이 누구와 이토록 가깝게 지내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윤세현은 칼날 같은 심은호의 눈빛을 보고 작은 심장이 몇 번이나 놀랐는지 모른다.‘누구지? 낯이 익은데.’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원수라도 만난 걸까.정이는 가볍게 캐리어를 끌며 매끄러운 타일 위를 날아다녔다.심은호의 눈빛에 놀란 윤세현은 강민아의 뒤로 숨었다.낯을 가리는 그녀에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무척 힘들었는데 빤히 쳐다보는 이성의 눈빛은 더더욱 불편했다.늘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옷도 중성적으로 입어서 이성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는 일이 드물었다.본다고 해도 잘생긴 외모에 대부분은 우호적인 시선을 보냈다.육성민이 덤덤하게 윤세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오랜만이네요.”윤세현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강민아의 오빠에 대해서는 키 크고 가슴도 크다는 것 외엔 별다른 기억이 없었다.강민아가 윤세현에게 소개했다.“이쪽은 심은호 씨, 문라이트 클럽 대표야.”윤세현은 제법 놀라며 고개를 돌려 강민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난 줄곧 문라이트 대표가 느끼한 아저씨인 줄 알았어.”심은호는 빠득 이가 갈렸다.‘저 기생오라비가!’감히 그가 보는 앞에서 강민아와 귓속말을 주고받는 건 기선제압이 아니고 뭘까.심은호는 서늘한 시선으로 윤세현을 뚫어져라 보며 손을 내밀고 차갑게 말했다.“안녕하세요.”윤세현은 강민아의 팔짱을 낀 채 심은호와 악수할 생각이 없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심은호의 어두운 눈동자엔 두꺼운 얼음이 한층 더 쌓였다.강민아가 설명했다.“세현이가 낯을 가려서 남자와 신체적 접촉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요.”강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은호가 강한 적대감을 드러낸 탓인지 윤세현이 목을 움츠리며 강민아 뒤로 숨었다.그녀의 두 손이 자연스럽게 강민아의 허리를 감쌌다.이렇게 강민아를 안으면 안정감이 느껴졌다.심은호의 눈동자에 드리웠던 차가운 얼음이 쩍쩍 갈라졌다.자주 사람을 죽이는 친구에게 먼저 오른손을 자를지, 왼손을 자를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그런데 강민아는 윤세현의 스킨십에
심은호는 경멸 섞인 야유를 내뱉었다.“허, 누구 심장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네요.”그가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오만하게 비아냥거린 뒤 육성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육성민의 표정도 굳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볼 뿐, 깊고 어두운 눈가엔 흐뭇한 감정까지 담겨 있었다.‘나만 한심한 놈이야?’부서진다는 심장은 심은호 것이었나보다.‘역시 육 소위, 흐트러짐이 없네.’사실은 그도 당장 달려가 윤세현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지만 강민아 때문에 억지로 참는 게 분명하다.심은호는 깊게 심호흡하며 육성민을 따라 배우기로 했다. ‘이 정도 아량도 없이 어떻게 첩 노릇을 해?’“나도 뽀뽀할래요!”윤세현에게 다정하게 입 맞추는 강민아를 본 정이도 기회가 오자마자 달려들었다.강민아가 정이를 안아들자 정이는 윤세현의 볼에 여러 번 뽀뽀했다.윤세현의 눈가는 촉촉했고 목까지 빨개진 그녀가 수줍게 말했다.“네 딸이야?”강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응, 이름은 강윤정, 그냥 정이라고 불러.”윤세현은 다정하게 정이를 안아주었고 강민아는 그녀와 정이를 동시에 품에 가두었다.심은호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옛말에 하늘에서 떨어져 다친 학처럼 잘생긴 얼굴이 창백해졌다.“그쪽은 왜 안 가요?”심은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내가 왜 가요?”육성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쪽이 죽이고 시체는 내가 처리할게요.”심은호는 육성민의 감옥생활까지 생각해 둔 상태였다.한꺼번에 두 라이벌을 제거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육성민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윤세현에 대한 심은호의 적대감을 알아차리고 경고했다.“오랜만에 만났는데 방해하지 마세요.”심은호는 경악했다.“오빠가 돼서 둘이 공공장소에서 뽀뽀하고 껴안는 걸 그냥 놔둘 거예요?”육성민은 크게 이상해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그게 뭐 어때서요? 민아가 얼마 만에 윤세현을 만난 건데요.”심은호는 다시 봤다는 눈빛으로 육성민을 바라보았다.“육 소위님은 진작
“하...”그녀는 자기 목을 빙빙 돌며 움직이는 가느다란 생명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그런데 눈을 크게 떠도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숨막히는 공포에 강나현은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헉!”강나현은 두 다리가 풀리며 곧바로 기절했다.그들이 있는 곳 위쪽 경사면에는 감시용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반하준은 잠시 생각한 뒤 민이를 데리고 다시 경사면 아래로 내려갔다....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반하준이 민이와 강나현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비탈길 아래쪽에는 벌레가 유난히 많아 반하준은 얼굴과 목에 여러 방 쏘였고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어 가슴 쪽을 문 벌레도 있었다.민이 역시 온몸에 붉은 발진이 생겼다.강나현은 더더욱 엉망진창이었는데 비탈길에서 기절한 후 벌레에게 물려 눈꺼풀이 부어올랐고 정신을 차렸지만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강나현은 눈이 멀었다고 생각했는지 반하준과 민이의 귀청을 찢을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침대에 엎드린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에 약을 발라주던 간호사는 쉬지 않고 아우성치는 그녀 때문에 몇 번이나 눈을 흘겼다.“강나현 씨?”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자 강나현은 고개를 돌렸다. 눈꺼풀에 연고를 발라 눈을 뜨지 못해서 자신을 보러 온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아, 네. 누구세요?”“저희는 운학구 지구대에서 온 경찰입니다. 신고를 받고 출동했고 폭행 미수에 대한 증거도 있으니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며칠 후 서경 국제공항.강민아는 정이의 손을 잡고 출구 쪽 난간 뒤에서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엄마, 윤세현이란 사람은 어떻게 생겼어요?”“사람 중에 제일 잘생기고 매력 있는 사람이 엄마 절친이야.”육성민과 심은호는 그들 모녀 뒤에 서 있었다. 심은호는 하품했다. 현재 시각 아침 7시, 윤세현을 데리러 오기 위해 그는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났다.그곳에 지나가던 여행객들은 저도 모르게 두 남자를 돌아보곤 했다.마스크를 쓴 육성민은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싫어했지만 훤칠하고
강민아는 식사를 마친 후 서둘러 반용화의 서재로 들어갔다.반용화의 서재는 개인 서재보다 도서관에 더 가까웠다.그의 거처에는 3층짜리 서재가 있었는데, 소장하고 있는 책 대부분이 절판된 책이었고, 자료들은 기밀에 속해 유수의 대학교수들도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강민아는 지식의 바다에 푹 빠졌고 정이와 육성민은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시간 넘게 책을 읽고도 그녀는 미련 가득한 채로 서재를 나섰다....구름 목장, 언덕 아래 차가운 산바람이 휘젓고 지나갔다.“아빠, 오줌 마려워요! 못 참겠어요!”민이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반씨 가문에서 애지중지 키운 도련님인데 이렇듯 궁색한 처지에 놓였다.민이는 비탈길에 기댄 채 두 손은 양옆에 묶여있어 화장실이 아니라 스스로 바지 벗을 능력도 없었다.그런 민이 옆에 누워 있던 반하준은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지만, 날이 춥고 안개가 자욱한 산속에서 기온이 떨어지는 데 장시간 움직이지 않으니 몸의 혈액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온몸이 뻣뻣하고 팔다리가 저린 상태였다.반하준은 굳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으로는 이 또한 반용화가 그에게 주는 퀘스트라고 생각했다.그런데 민이가 자꾸 귓가에서 칭얼거리니 반하준은 상당히 짜증이 났다.그는 평소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드물었고 민이는 정말 철이 없었다.‘대체 5년 동안 강민아가 어떻게 가르친 건지.’조금 전 반하준은 비탈길 위에 있는 사람을 부르려고 했지만 애초에 거기를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시간이 늦어질수록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작아졌다.그래서 우선 민이를 붙잡아 데리고 나간 뒤 사람을 불러 강나현을 구할 생각이었다.강나현은 발을 삐끗하고 엉덩이와 허벅지까지 다쳤기에 그 혼자 어리고 약한 두 사람을 데리고 떠나기엔 무척 성가셨다.반하준은 늘 약자를 싫어했다.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비탈길을 막 올라갔을 때 어두운 숲에 여러 개의 손전등 불빛이 보이자 반하준은 급히 몸을 숙여 경사
장기명은 고작 대학교수이고 옴 테크를 도와주는 학자 중 한 명에 불과한데 옴 테크 임원 앞에서 이렇게 큰 입김을 자랑한다고?반용화는 휴대전화를 들고 조용히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장기명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해.”장기명은 전화기 너머로 강민아에게 히죽거리며 말했다.“정 고마우면 밥이나 한 끼 사요.”“일 끝나면 제대로 감사 인사드릴게요. 지금은 불필요한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 접촉을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장기명은 전화기 너머로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물론이죠. 강민아 씨가 인수 책임자라는 소식이 알려지면 반 대표도 주시할 텐데 조심하세요.”그러면서 그녀 대신 욕설을 퍼부었다.“반하준은 사람도 아니에요. 민이 그 자식도 마찬가지고. 두 부자가 강민아 씨에게 그랬다는 걸 듣고 정말 달려가서 주먹을 날리고 싶었어요.”“그럼 가서 구름 목장 지키세요.”반용화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의 목소리를 들은 장기명은 고양이를 본 쥐가 되어 황급히 목을 어깨 쪽으로 움츠렸다.조금 전 강민아가 반용화 집에 있다고 했으니 불쑥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그들 부자와 강나현이 비탈길 위로 올라오려고 하면 가서 주먹을 날리세요.”장기명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강민아 앞에서 큰소리 한번 친 것뿐인데...정말 반하준을 만나면 그 앞에서 감히 방귀도 뀌지 못했다.“반... 반 연구원님, 저는 오늘 밤에 정리해야 할 중요한 자료가 있어서...”전화기 너머로 장기명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구름 목장에 가서 하세요. 사람 보내서 모셔다드리죠.”“하, 하지만...”반용화의 살얼음 같은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대답만 하세요.”분명 휴대폰으로 통화만 하고 있는데도 장기명은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자기 목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았다.목소리가 너무 떨려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결국 그는 순순히 반용화의 말에 답했다.“네...”강민아는 장기명의 사색이 된 얼굴을 상상했다.반용화가 경고 차원에서
강민아가 반석현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석현아, 우리 모두의 결말은 각자의 손에 달려있어. 난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고 나에 대한 네 마음도 저버리지 않을 거야.”반석현은 조금 머뭇거리며 망설였지만 강민아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그리움과 애틋함이 가득했다.아이는 강민아의 품에 뛰어들어 가느다란 팔로 강민아의 목을 감쌌다.그는 강민아가 자신의 엄마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강민아가 자유로워지길 바랐다.강민아가 고개를 돌려 반용화에게 말했다.“선생님의 애정도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진심으로 사랑하면 상대가 조금이라도 손해 보고 다치는 게 싫어진다.자신의 좋아하는 마음을 감춰서라도 상대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도록 내버려둔다.상대가 잘 지내면, 수많은 별과 함께 빛나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니까.강민아는 반석현의 손을 잡고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정이는 반석현이 식탁에서 밥을 먹으려는 것을 보고 직접 반석현에게 음식을 건넸다.저녁 식사가 끝나고 반용화가 물었다.“나랑 한 내기 기억해? 이제 3주도 안 남았어. 강승 테크엔 언제 손을 쓸 거야?”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잠시 생각했다.“흠... 한두 주 지나고 보죠.”반용화는 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강민아에게 나름의 계획과 생각이 있을 거다. 게다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니 강승 테크는 진작 그녀가 손에 넣은 먹잇감 같았다.하지만 그녀와 강성진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으니 강성진은 절대 먼저 강승 테크를 강민아에게 넘겨주지 않을 거다.“2주 뒤에 강승 테크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겠어?”강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이 먼저 울렸다.그녀는 화면을 흘끗 보고는 그대로 반용화에게 보여주었다.발신자는 장기명이었다.전화를 받은 강민아가 스피커 모드로 돌리자 장기명의 흥분한 목소리가 사람들 귀에 들려왔다.“강민아 씨, 지금 어디 있어요? 좋은 소식이 있어요!”강민아가 대답했다.“지금 반 연구원님 집에 있는데 무슨
그림 속 왕비의 표정은 슬펐다.반석현이 또 다른 그림을 내밀었다.크레파스로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왕비가 딸의 손을 잡고 성을 떠나는 모습을 그렸는데, 왕비는 얼굴에 밝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강민아는 반석현이 건네준 세 번째 그림을 받았다.그림 속엔 왕비가 어린 소녀를 데리고 또 다른 국왕을 만나는데 국왕 옆에는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왕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들고 왕비에게 청혼하고 있다.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반석현은 다섯 번째 그림을 문틈으로 내밀었다.그림 속 여자아이와 함께 새 국왕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린 왕비는 멍한 표정이었다.그림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반석현은 그저 간단히 슥슥 그리기만 해도 인물의 표정까지 생동하게 표현했다.강민아는 바닥에 앉아 방문에 기대었다.그녀는 반석현이 그린 다섯 장의 그림과 쪽지를 손에 들었다.[우리 엄마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강민아의 눈시울이 뜨거워 나며 순식간에 눈가가 촉촉해졌다.[당신이 내 엄마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또다시 가정에 얽매이고 다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엄마로서의 무게를 짊어지는 게 싫어요.]하지만 그토록 많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반석현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너무 좋아하니까 조금이라도 상처 주기 싫은 거다.반석현은 자신도 강민아에게 괴로움을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고 제일 먼저 멀어지는 걸 선택했다.자신을 방에 가두면 또다시 강민아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서.강민아가 고개를 돌리니 반용화가 한 손을 휠체어 팔걸이에 올려놓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왜 바닥에 앉아있어?”남자가 강민아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묻자 강민아는 받은 그림을 그에게 보여주었다.“석현이는 똑똑하지만 안쓰러운 아이예요.”반용화는 반석현이 그린 그림을 보았다.“좋다고 꼭 소유해야 하는 건 아니지.”그러고는 강민아를 바라보며 솔직하게 말했다.“한때는 나도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어. 넌 내가 만난 학생 중 최고였지만 여자이기에 온실에
반용화의 시선은 이미 육성민의 얼굴에서 멀어진 뒤였다.“그러세요.”그는 덤덤하고 여유로운 눈빛으로 강민아를 바라보았다.“석현이 구해줘서 고마워.”강민아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석현이가 절 구해줬어요.”반석현은 강민아의 손을 잡고 자기 가슴을 두드리더니 워치를 가리켰다.강민아는 반석현의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자신이 있는 한 강민아를 지켜주겠다는 말이었다.강민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칭찬했다.“오늘 석현이 아주 용감했어.”“석현아, 뽀뽀해도 돼?”반석현을 안은 정이는 그가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자 볼에 쪽 입을 맞췄다.강민아도 몸을 숙여 반석현의 머리에 부드럽게 입맞춤했다.반석현의 볼이 불그스레 물들고 검은 눈동자엔 무수히 많은 별이 담긴 듯 반짝였다.조금 전 캠프로 돌아갈 때 강민아는 정이에게 반석현과 버섯을 채취하러 갔을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정이는 그 말을 듣고 당장이라도 민이를 찾아가 따질 기세였지만, 민이가 비탈 아래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말에 학교로 돌아가 자기 주먹을 보여주며 차분하게 얘기해 보기로 했다.육성민은 강민아와 반석현을 바라보던 반용화가 차가운 렌즈 속 깊은 눈동자에 따뜻한 온기를 머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연구원님, 혹시 아드님에게 엄마를 찾아줄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육성민이 입을 열자 부엌에서 음식을 나르던 도우미가 대신 답했다.“도련님은 강민아 씨를 무척 따르는데 강민아 씨가 도련님 엄마가 되어주면 좋겠네요.”반용화의 집에서 일하는 도우미들도 강민아가 한때 반용화의 조카며느리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들은 반씨 가문 사람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다.이들은 강민아가 반용화의 서재에 들어갈 수 있고, 반석현이 강민아와의 친밀한 접촉도 거부하지 않는 것을 보며 강민아가 그들 부자에게 남다른 존재라는 걸 알았다.그런데 도우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반석현이 크게 반응했다.그를 안고 있던 정이는 아이가 불편한 듯 꿈틀거리자 얼른 손을 놓았다.반석현은 뒤로 두발짝 물러나 붉게 물든 눈으로 강민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