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당신은 에릭 씨 형제인가요?”성유리는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에릭에게 형제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물론, 둘 사이의 관계가 그 정도까지 깊지 않아서 에릭이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그러나 상대 남자는 그녀의 질문을 무시한 채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당신이 그 로얀의 아내 되시는 분입니까? 에릭은 지금 어디 있죠?”남자의 말투는 마치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묻는 듯한 태도였다.“당신은 에릭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것 같은데?”“에릭 씨를 찾을 거면 왜 여길 찾아온 거죠?”“저는 뭐 원해서 온 줄 아십니까?”남자는 말할수록 화가 나는지 이를 악물었다.“에릭이 갑자기 미쳐서 어떤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했습니다. 집안에서는 당연히 반대했죠. 그런데 갑자기 도망치듯 여기에 와버렸고요. 지금 위치 추적도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그러다가 우연히 로얀이라는 친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그 단서를 따라 여기까지 온 거야!”남자는 중간에 자신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뭔가를 계속 중얼거렸다.그중에는 몇 마디 욕설도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에릭 씨는 여기 없어요.”“그럼 지금 어디 있죠?”“저도 잘 몰라요. 제 남편이 돌아오면 직접 물어보세요.”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판단한 성유리는 남자로부터 등을 돌리고 걸어가려 했다.그러나 남자가 그녀를 다시 막아섰다.“에릭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못 찾겠군요. 그러니까 당신이 먼저 제 숙소를 잡아 주십시오.”남자의 말투는 여전히 마치 당연한 요구를 하는 듯했다.참고 참던 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제가 왜 그래야 하죠?”“제 카드가 없어졌는데 비서랑도 연락이 안 됩니다.”남자는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그냥 방 잡아 주십시오. 제가 돈이 없을 거 같습니까? 나중에 열 배, 백 배로 갚아 줄 테니까 좀!”이 말을 듣자 성유리는 문득 깨달았다.남자는 한국어 실력이 예상외로
“지서연 그 아이를 전 진심으로 아꼈어요.”선생님은 과거를 회상하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시 우리 반에 학생이 많지 않았는데 지서연은 언제나 성적이 1등이었어요. 그리고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서 저는 서연이가 계속 그 길로 가길 바랐죠. 하지만 서연이 양아버지는 돈이 든다며 반대했어요. 심지어 걔가 중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결혼을 시키려고도 했고...”“지석민 같은 인간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그 아이에게 온갖 더럽고 힘든 일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밖에 나가 허드렛일을 해서 번 돈으로 도박 빚을 갚게 했죠.”“마을 사람들? 괜찮은 사람들은 그저 모른 척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못된 사람들은요? 아무나 서연이를 막 괴롭혔어요. 서연이가 일해서 번 돈을 빼앗기 일쑤였고 심지어 협박까지 일삼았죠.”“학교에서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도둑질을 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자주 썼고요.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겨우 열 살 남짓한 아이가 어떻게 버텼을까 싶어요.”“그러다가 친부모님이 서연이를 찾으러 왔다고 했을 때, 사실 전 누구보다 기뻤어요. 이제는 서연이도 잘 살고 있겠죠?”“정말 그렇다면 참 다행이에요. 서연이의 남편으로서 이제는 정말 잘해 줘야 해요. 두 번 다시 서연이가 그런 고통을 겪지 않게 해 주세요.”식사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선생님의 말은 박한빈의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특히, 어제 마을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태도가 떠올라 더욱 기가 막혔다.그렇게 지서연을 방치하고 괴롭혔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도로 포장해 달라, 학교를 지어 달라며 박한빈에게 기대고 있었으니 말이다.정말 가소로운 일이지 않은가?그들은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게 아니다.어제 마을을 돌아보면서 확인했 젊은이들은 거의 다 도시로 나가 돈을 벌고 있었다. 가난 때문이 아니라 그냥 편하게 얻어먹으려는 심보일 뿐이었다.박한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지사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많은 설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살짝 암시만 해도 상대는 바로 알아듣
“에릭이 정말 결혼하고 싶다면 상관은 없다만 최소한 정상적인 사람을 골라야지 않습니까? 저 여자는 사기꾼이라고요.”“역시 당신 같은 미친놈들이랑 어울리면 결국 이렇게 되는 거군요. 지금 보세요! 에릭까지 제대로 정신이 나갔잖습니까! 결국 뒷수습은 또 제가 해야 하고!”알리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안색 또한 어두워졌다.하지만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듣고 있을 뿐이었다.알리가 자신을 어떻게 깎아내리든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당신이랑 에릭, 두 사람 분명 연락하고 있겠죠? 당장 에릭에게 말하세요. 얌전히 나랑 같이 돌아가자고. 정말 가정을 이루고 싶다면 부모님의 뜻을 따라야 할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 꿈을 완전히 박살 내버리겠다고.”비록 알리의 말투엔 여전히 약간의 억양이 섞여 있었지만 그 태도와 싸늘한 눈빛은 강한 위압감을 풍겼다.보통 사람이라면 그 앞에서 기가 죽었을 것이다.그러나 박한빈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물었다.“다 말하셨습니까?”“다 하셨으면 이제 나가시죠.”알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박한빈을 빤히 쳐다보다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이 호텔, 너무 형편없습니다. 전 여기서 안 잘 겁니다.”“그럼 안 자면 되죠. 어디 가든 당신 맘대로 하십시오.”알리는 코웃음을 치며 오히려 더욱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그 행동은 마치 안 나가면 어쩔 거냐고 묻는 듯했다.박한빈은 그 모습을 보다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성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경찰 부르자. 강제로 쫓아내게.”그 말이 너무도 자연스러웠기에 성유리는 순간 망설였다.그렇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은 듯, 기다릴 것도 없이 자신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경찰이 도착하기도 전에 호텔 매니저와 보안팀이 먼저 방으로 들어왔다.알리는 아무리 봐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확실한 건 박한빈의 존재감이었다.이 호텔에서 박한빈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결국, 그들은 알리를 ‘정중하
성유리는 원래 박한빈에게 한참을 설명해야 할 줄 알았다.하지만 의외로 그는 단 한 마디도 더 묻지 않았다.박한빈이 자신을 의심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그러나 그의 성격상 설령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도 성유리가 다른 남자와 얽히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특히 호텔 방 안에서라면 더욱.그렇지만 지금 박한빈의 반응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성유리는 꺼림칙한 기분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오늘 어디 갔었어요?”박한빈이 막 대답하려던 순간, 성유리는 갑자기 그에게 성큼 다가갔다.그리고는 코를 박한빈 옷깃에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았다.그 행동에 박한빈은 잠시 당황하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뭐 하는 거야?”“점심은 누구랑 먹었는데요?”성유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지사 사람들이랑.”“정말 그냥 식사 자리였어요?”“그렇지 않으면 또 뭐겠어?”“그런데 왜 저한테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는데요?”그 질문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밖에서라면 그는 절대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다.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에게서 작은 흔들림조차 놓치지 않았고 예리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왜 말이 없어요? 혹시 걸리는 거라도 있으신가 봐요?”“너 원래 이런 자리 싫어했잖아.”“맞아요. 그런데 한빈 씨는 원래 그래도 같이 가자고는 했잖아요.”성유리는 마치 탐정처럼 날카롭게 문제점을 지적했다.“근데 오늘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도대체 왜죠?”“그건...”“그리고 아까 한빈 씨 반응도 이상했어요.”박한빈은 태연한 척했지만 그녀의 집요한 시선에 긴장감이 스며들었다.“내 반응이 어때서?”“저한테 잔소리 한마디도 안 하셨잖아요.”성유리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계속 말했다.“지난번에 제가 이우빈 씨를 방 안에 들였을 땐 엄청 화냈잖아요. 근데 이번엔 어쩜 이렇게 조용하죠?”“알리는 널 좋아할 사람이 아니니까.”박한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그 말에 성유리는 미묘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박한빈은 그제야 자
“저야... 당연히 믿죠.”결국 성유리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그럼 됐어.”박한빈이 태연하게 말했다.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성유리는 얼어붙었다.그사이 박한빈은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휴대폰을 꺼냈다.“에릭 문제는 내가 처리할 거야. 우리 내일 바로 돌아가자.”박한빈은 그렇게 말하며 바로 항공권을 예약하려고 했다.그러나 성유리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다가섰다.“잠깐, 박한빈 씨! 정말 이렇게 넘어갈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대체 누구랑 밥 먹었냐고요!”“너 방금 나를 믿는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내가 누구랑 밥을 먹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잖아?”“당연히 중요하죠!”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당신이 다른 여자랑 데이트라도 한 거면 어쩌려고요?”“그렇게 말하는 건 결국 날 의심한다는 거잖아? 방금까지는 믿는다고 해놓고?”“저...”성유리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분명 자신이 박한빈을 추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자신이 오히려 추궁당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하늘이 선물은 뭐 살 거야?”박한빈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결정했어? 아니면 내가 같이 가줄까?”성유리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고민하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됐어요!”그러고는 홱 돌아서 걸어가려 했지만 박한빈이 성유리의 손목을 잡아끌더니 자기 품으로 끌어안았다.“뭐 하는 거예요?”성유리가 당황하며 몸을 빼내려 했지만 박한빈은 턱을 그녀의 어깨에 살짝 기대었다.그의 얼굴이 서서히 성유리의 목덜미에 파묻혔고 두 사람 사이 거리는 너무나도 가까워졌다.박한빈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히자 성유리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왜 이러세요?”“별 이유 없어. 그냥 너를 좀... 안아주고 싶어서 그래.”...비행기 티켓은 빠르게 예약되었는데 뜻밖에도 알리도 두 사람과 같은 비행기에 타 있었다.게다가 그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당신 돈 많잖아? 왜 전용기를 안 빌린 겁니까?”“그게 알리 씨랑 무슨 상관이죠?”박한빈은 무표
“한빈 씨 지금 저한테 점점 더 무례해지네요. 제가 예전에 금성에서 어떻게 대해줬는지 잊었나 봅니다? 제가 당신 집에서 하룻밤 자려고 했을 때도 싫다고 하더니 지금은 저한테...”공항에서 에릭은 박한빈에게 불평을 하고 있었지만 순간 그의 표정은 갑자기 사라졌다.그러다 얼마 후, 그는 박한빈을 돌아보며 화난 표정으로 물었다.“시*, 너 지금 나 판 거야?”“난 널 위해서 이러는 거야.”박한빈이 대답했다.“결혼은 결국 두 집안의 일인 거잖아. 네가 여자의 부모님 동의를 구하려고 한다면 네 부모님의 동의도 중요하지 않겠어?”“우리 부모님이 동의할 리가 있겠냐?”“그건 네 문제지. 하지만 결혼 같은 큰 일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박한빈은 말을 마친 후, 에릭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그는 더 이상 에릭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유리와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성유리는 박한빈과 함께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보았다. 에릭과 알리 두 형제가 서로 닮은 듯했지만 두 사람을 가까이서 보니 차이가 꽤 있음을 깨달았다.에릭은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내면은 차갑고 예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고 알리는 처음 봤을 땐 더 차가운 사람 같았지만 그의 성격은 에릭과 전혀 달랐다.그렇지 않았다면 알리가 이렇게 먼 길을 와서 박한빈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두 형제가 만나는 장면을 성유리는 기대와 호기심을 가졌지만, 박한빈은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알리와 에릭이 만났으니 짐을 덜어냈다고 생각했고 둘만 남기곤 성유리와 함께 얼른 자리를 떠났다.그러다 자꾸만 뒤돌아보는 성유리를 발견하곤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돌려버렸다.“뭘 보는 거야?”박한빈이 불만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두 사람 싸울 수도 있지 않겠어요?”“넌 저 둘이 싸우길 바라는 건가?”박한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되물었다.그 모습은 마치 성유리만 원한다면 본인이 직접 둘 사이를 이간질해 싸움을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아니요. 전 그냥... 에릭 씨가 한빈 씨를 원망할까
“아, 그러고 보니 이 근처에 유치원이 하나 있네요.”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처음엔 아라가 자신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온 줄 알았지만 한참을 가만히 서 있어도 아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결국 기다리던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아... 아니요.”아라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그냥 혼자 시간도 남고 해서 거리 좀 돌아다니다가 마침 유리 씨를 봐서 인사하려고 온 거예요.”“아, 그래요?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성유리는 다소 의아했지만 지금 바쁜 상황이라 더 시간을 낼 수 없었다.그녀가 자리를 뜨려 하자 아라가 급히 말을 붙였다.“저기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밥이나 먹을래요? 저 곧 결혼하잖아요. 그래서 싱글 파티를 하려고 하는데... 유리 씨는 올 수 있어요?”“언제 하는데요?”“유리 씨 시간 될 때.”성유리는 의아했다.“아라 씨 싱글 파티잖아요? 당연히 아라 씨 일정에 맞춰야죠. 시간은... 제가 한번 봐볼게요.”“그럼 내일 저녁 어때요?”“시간 되세요?”내일은 마침 주말이었다.지금 하늘이는 주말을 거의 김서영과 함께 보내고 있었다.성유리도 하늘이를 자신과 함께 지내게 할까 고민했었지만 며칠 전 김서영의 건강검진 결과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하늘이에 대한 김서영의 애정을 아는 이상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게 해주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결국, 특별한 일정도 없었기에 성유리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그래요. 갈게요.”아라는 성유리의 대답에 안도한 듯 숨을 내쉬더니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그럼 저희 연락처라도 교환할까요? 내일 저녁에 장소 보내드릴게요.”성유리는 흔쾌히 응했다.에릭과 박한빈은 친구였고 아라는 에릭의 아내였기에 그녀와의 교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오히려 그녀와 잘 지내게 된다면 박한빈에게도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이 이 싱글 파티를 탐탁지 않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안 가면 안 돼?”박한빈이 미간을
성유리는 싱글 파티라고 해서 최소한 열 명 이상은 모일 줄 알았다.하지만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고 보니 그곳엔 아라를 제외하면 손님은 혼자였다.게다가 장소도 술집이었다.아라는 바텐더와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성유리는 자연스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아라는 금방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왔어요? 이쪽이에요!”성유리는 아라 쪽으로 다가가며 그녀 손에 들린 술잔을 흘깃 쳐다보았다.“이래도... 괜찮아요?”“아, 유리 씨는 아직 모르죠?”아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이제 뱃속에 애는 없어요. 그러니까 마셔도 상관없고요.”아라의 목소리는 무척 담담했지만 성유리는 그 대답에 순간 온몸이 굳어졌고 눈도 점점 휘둥그레졌다.그러나 아라는 아무렇지 않은지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사실 별일도 아니에요. 애초에... 낳을 생각도 없었고요.”“이제 없어진 게 오히려 잘된 거죠. 혼전임신... 저희 집안에서도 썩 달가워하지 않았거든요.”아라는 그렇게 말하며 성유리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동안 부모님도 비슷한 말로 위로해 주었다.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처음에는 오히려 걱정을 많이 했다. 혹여 아이가 사라지면 에릭이 결혼을 취소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그러다 에릭이 변함없이 결혼을 진행하겠다고 하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는 태도가 바뀌었다.“아이가 없는 게 뭐가 문제야? 너희 아직 젊잖아. 앞으로 기회는 많아.”아라는 그런 위로에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부모님은 모른다.그 아이가 그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는걸.그저 아라가 주성운을 한 번 만났다는 이유만으로.아라는 그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었다.에릭이 주성운에게 달려들려 하자 그녀는 막아보려 했다.하지만 에릭은 아라를 밀어냈고 그녀는 그대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한 층 높이의 계단을 통째로 구른 바람에 머리가 열 번도 넘게 부딪혔고 그 고통
“저번에 다 말했잖아요. 뭘 더 원하세요?”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그리고 저도 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성유리는 그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전 하늘이랑 집에 있을게요.”비록 전에 아라가 거절했었지만 지금 그들이 정말 결혼식을 올린다는 게 성유리에게는 좀 찝찝하게 느껴졌다.마치 사람이 불 속에 뛰어드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었다.“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면 되지.”박한빈은 아라에 대해 다시 언급하지 않고 대답했다.“나도 얼굴만 비추고 금방 돌아올 거야. 돌아오면 우리 다 같이 놀러 가자.”“어디로요?”“어디든. 뭐... 쇼핑몰 가도 좋고.”성유리는 거절하지 않았다, 이내 그녀는 박한빈에게 외투를 입혀주고 발끝을 들고 넥타이를 묶어주었다.박한빈은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쳐다봤다.성유리는 이미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마친 상태였는데 오늘 바른 립스틱은 광이 도는 빨간색이었다.그 촉촉한 질감이 그녀의 입술을 더욱 풍성하고 윤기 있게 만들어 주었다.박한빈은 성유리의 입술을 잠시 응시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그리고 이내 고개를 숙여 성유리의 입술을 정말 물어버렸다.성유리는 아프다고 신음하며 그의 가슴을 세게 때렸다.그러자 박한빈은 금방 그녀를 풀어주었지만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씩 올렸다.박한빈이 미소에 성유리는 화가 나서 다시 때리려 했지만 박한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립스틱도 발랐잖아. 낭비하면 아까운 거 아냐?”그는 진지하게 말했다.“중독되면 어쩌시려고요?”“괜찮아. 내가 죽으면 내 재산은 모두 네 거야. 손해 볼 거 없어.”성유리는 더 이상 박한빈과 말이 통하지 않음을 느꼈고 잠시 대치한 후, 결국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빨리 가세요.”“그럼 집에서 기다려. 금방 돌아올게.”성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한빈은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갔다.그런데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돌아서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선물.”“뭔데요?”“직접 열어봐.”그
“병신같은 놈.”그 말과 함께 차가운 물이 한 바가지 쏟아져 내리자 알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처음에는 욕설을 내뱉으려 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위장에서 큰 움직임이 느껴졌다.알리는 더 이상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그저 눈앞에 있던 사람을 밀어내고 화장실로 마구 달려갔다.그리고 그곳에서 내장까지 토해낼 듯 구토를 했다.박한빈이 알리에게 먹인 술은 그가 이전에 마셨던 것들과는 달랐다.지금 알리는 위장이 타는 듯이 불에 달아오르고 머리가 마치 터져버릴 것처럼 아팠다.“독을 탄 게 분명해.”알리가 정신을 차린 후, 에릭에게 가장 먼저 했던 말이다.“그 인간이 술에 독을 탔어. 나를 죽이려고 했다고!”에릭은 알리의 모습을 보고는 조롱 섞인 웃음을 지었다.그 비웃음에 알리는 불쾌감을 느꼈다.“그건 무슨 뜻이지?”“네가 남의 땅에서 남의 아내를 탐내고 있으면서 어떻게 사람들이 널 잘 대해줄 거라고 생각한 거지?”에릭이 계속 말했다.“나는 너 같은 어리석은 동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형이 뭘 알아?”알리가 반박했다.“그리고 이게 형이랑 무슨 상관인데? 형 그 인간이랑 절교했다고 하지 않았어?”“난 그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려고 했을 뿐이야. 그리고 너 성유리 씨를 좋아한다고? 너 전에 결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어?”“나는 결혼한다고 말한 적 없잖아! 그냥 유리 씨랑 연애하고 싶을 뿐이야!”“술집에서 했던 멍청한 고백 다시 말해줄까?”에릭은 동생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며 물었다.“정말 창피할 지경이야.”“내가 아무리 창피한 짓을 해도 형보단 낫잖아.”“상대방이 형을 좋아하지 않는 거 알면서 결혼하려고 했잖아. 그런 형이 나보다 뭐가 나은데?”“뭐라고?”“내가 틀린 말 했어? 형은 지금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성유리 씨한테까지 찾아갔어. 1억 좀 빌려달라고.”알리의 말에 에릭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그래서? 성유리 씨가 빌려줬어?”“당연히 안 빌려줬지. 아무 사이도 아니니
알리의 했던 말을 박한빈은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유리가 그를 발견했을 때 박한빈의 얼굴은 이미 몹시 창백하고 괴로워 보였다.성유리는 재빠르게, 그리고 정말 온 힘을 다해 알리를 자신에게서 떼어내려 했다.그리하여 박한빈 옆에 다다를 때 성유리는 손목과 손등에 따가운 통증을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곧장 박한빈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 같으면 그녀가 그의 손을 잡자마자 자연스럽게 손을 되돌려 잡았을 텐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그는 심지어 성유리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그냥 알리를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술을 마신 박한빈의 얼굴엔 본래 생기조차 없었는데 이때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워 보였다.성유리가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조금 멈칫한 후, 그는 바로 성유리를 끌어 앞으로 걸어갔다.뒤에서 따라오던 직원은 알리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싸늘하게 식은 박한빈의 눈빛에 발걸음을 멈추었다.그 순간, 매니저가 달려와 직원을 뒤로 밀어내며 박한빈에게 사과했다.“박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직원교육을 잘 못시켰습니다. 다음에는 반드시 다시 교육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일어난 일은 한 마디도 새지 않게 하겠습니다!”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고 발걸음도 멈추지 않았다.성유리는 그저 박한빈에게 끌려 나갔고 이내 차에 올라탔다.운전기사는 그 모습을 보고 지금이 말을 꺼낼 적당한 때가 아님을 직감했다.그는 침을 삼키며 조용히 차 문을 열어줬다.차에 올라타던 성유리는 머리를 차 상단에 부딪혔다.큰 고통에 그녀는 곧바로 신음하며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박한빈은 여전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지만 그 소리에 바로 성유리의 상처를 살펴보려고 했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반응을 보고 그 기회를 이용해 그를 꽉 끌어안았다.박한빈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놔.”“안 놔요.
박한빈은 오늘 밤 술을 꽤 많이 마셨다.원래 사업적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고 가끔 있는 술자리에서도 과하게 마시는 일은 드물었다.하지만 오늘은 자비 따윈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을 잘 안다.그는 술을 마셔도 얼굴이 붉어지지 않는 체질이고 오히려 마실수록 더 창백해지는 스타일이다.지금 박한빈의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을 보니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반면, 맞은편에 앉은 알리는 정반대였다.고량주를 반병 이상 마신 뒤, 알리의 얼굴은 피가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눈빛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성유리는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말리려는 찰나, 박한빈이 또다시 술잔을 들어 올렸다.그런데 알리는 이번에 잔을 받기는커녕 입을 틀어막고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다.성유리는 힘들어 보이는 알리를 쫓아가는 대신 박한빈 쪽으로 몸을 돌려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괜찮아요?”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다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도대체 왜 그 사람하고 술을 이렇게 마시는 거예요?”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 물었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부축에 따라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그러곤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안고 얼굴을 그녀의 가슴팍에 묻었다.박한빈의 눈은 이미 감겨 있었고 호흡은 차분했다.성유리는 한참을 지켜보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설마 지금 주무시는 거예요? 잘 거면 집에 가서 자야죠. 여기서...”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저기요, 아까 나가신 손님분 일행 맞죠? 지금 복도에 토하셨는데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여서요.”직원의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이내 박한빈을 잠시 맡아달라고 직원에게 부탁한 뒤, 성유리는 곧장 복도로 나갔다.그곳은 이미 꽤 시끄러워져 있었다.그 고귀하고 차가운 인상으로 처음 봤던 알리는 지금 쓰레기통을 붙잡고 마구 토하고 있었다.“구급차 부를까요?”옆에 있던 누군
“하늘이가 안 자고 있으면 네가 가서 잡으려고?”박한빈의 그럴싸한 말에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곧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박한빈을 살짝 째려보며 물었다.“이거 한빈 씨가 하늘이한테 가르친 거죠? 박한빈 씨, 제발 딸한테 좀 제대로 된 걸 가르쳐줘요.”“난 지금도 하늘이가 아주 잘 크고 있다고 생각해.”박한빈은 그렇게 말하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뭐 하시려고요?”“알리 씨한테 밥 한 끼 하자고 연락하려고.”“왜 그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건데요?”성유리가 당황한 듯 물었지만 박한빈은 대답 대신 화제를 돌렸다.“유리야, 우리 내기 한번 해볼래?”이 말에 성유리는 뭔가 불길한 예감을 강하게 느껴 즉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싫어요.”“난 아직 뭘 걸고 하는지도 말 안 했는데?”“뭔지는 몰라도 싫어요. 전 당신이랑 내기하면 항상 지니까. 한빈 씨도 그걸 노리고 그러는 거잖아요!”성유리는 온몸으로 박한빈을 밀어내며 반항했지만 그는 그녀의 허리에 감은 자신의 팔을 더 꽉 조였다.“안 돼. 이번엔 무조건 해야 돼.”“세상에 이런 사람이 다 있네?”성유리는 박한빈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려 하며 외쳤다.“매번 한빈 씨랑 내기하면 나만 손해 보잖아요. 이거 지금 사람 협박하는 거예요. 강매라고! 강매!”“아까 너 분석 잘하더라?”박한빈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렇게 자신 있게 말했으면 네 선택이 맞을 거라고 믿는 거잖아.”그 말에 성유리는 말문이 막혔다.그 사이 박한빈은 알리의 연락처를 찾아 바로 전화하려고 했다.그런데 성유리가 그의 손을 꾹 잡고는 강제로 못 움직이게 만들었다.“그러니까 당신이 말한 내기라는 게... 알리 씨가 밥 먹자는 제안을 받아줄지 말지 보는 건가요?”“응.”“그럼 전 알리 씨가 받아들인다는 것에 투표.”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이 살짝 찌푸렸다.“왜요? 내기라면서요? 선택권은 먼저 말하는 쪽에 있는 거 아닌가?”박한빈은 한동안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이내 미소를 지었다.요즘 들
“하늘이가 뭐라고 했는데요?”성유리가 되물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침묵하는 그를 성유리는 조급해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이런 식의 ‘대치’는 두 사람에겐 이제 익숙한 일이었지만 요즘 들어 박한빈이 밀리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었다.방금 전만 해도 다른 사람 같았으면 하늘이를 바로 들먹이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성유리 앞에서는 늘 한발 늦게 반응하게 됐기에 항상 지는 싸움이었다.박한빈은 이걸 성유리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라며 스스로 위로했다.그녀에게 충실하고 싶기에 숨기는 일 없이 다 말하고 싶은 것뿐이라고.그래서 박한빈은 망설이지 않고 사실대로 털어놓았다.“하늘이가 알리라는 사람을 만났다고 하더라고.”“네. 맞아요. 우연히 마주쳤어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정말 그냥 우연이야? 아니면 그 사람이 너희를 미행한 거야?”“전 우연이라고 생각해요.”성유리는 곰곰이 생각한 뒤 대답했다.“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희를 미행할 이유가 없잖아요? 에릭 씨랑 한빈 씨도 이제 멀어졌으니 저도 더는 에릭 씨랑 아라 씨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아요.”“어디서 마주친 거야?”“식당 안에서요.”박한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하지만 알리 그 사람은 중식 안 먹잖아.”즉,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었다.하지만 성유리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한빈 씨는 알리 씨를 잘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근데 어떻게 그런 걸 알고 계시죠?”“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왜 알리 씨가 너희를 미행했느냐는 거야.”“그러게요. 그 사람이 왜 저희를 따라왔을까요?”성유리는 다시 박한빈에게 되물었다.이번엔 박한빈도 우습다는 듯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실제로는 웃지 못했다.보통의 경쟁자라면 아예 신경도 안 썼겠지만 알리는 달랐다.박한빈은 그에 대해 많이 알진 못했지만 알리의 형인 에릭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그 형제가 어떤 부류인지, 어떤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인지도. 그러니 결코 순한 부류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하늘이의 말에 박한빈은 멈칫했지만 곧 웃음을 터뜨렸다.“고작 그거야?”박한빈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지난번 공개수업 때, 성유리를 대신해 자신이 참석하니 그 남자가 자신을 보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뻔히 보였다.한 번은 성유리와 함께 하늘이를 데리러 갔을 때도 차 안에서 창밖으로 그 남자의 눈빛을 봤다.그 시선은 거의 성유리에게 들러붙을 기세였다.예전 같았으면 박한빈은 벌써 질투심에 들끓었겠지만 이젠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그만큼 성유리가 매력 있다는 증거니까.누군가 그녀를 사랑하고 동경한다는 건 성유리가 충분히 빛나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게다가 그 정도 인물은 박한빈에게 상대도 안 됐다.질투할 가치조차 없는 수준이었으니 그런 사람 때문에 화내는 건 오히려 자존심이 상했다.그래도 하늘이조차 눈치챘다는 건 앞으론 성유리와 그 남자가 접촉하는 걸 조금은 조심시키는 게 좋겠다 싶었다.물론 그건 질투나 소심함 때문이 아니라 하늘이의 건강한 성장 환경을 위한 것이었다.“그 사람만 있는 게 아니야.”하늘이는 아빠가 별것 아니라는 듯 웃는 걸 보고 더 짜증 난 표정으로 말했다.“그 사람 말고도 다른 사람도 있어. 아빠 몰랐지? 오늘 우리 유치원 끝나고 집에 가는데... 누가 따라왔어!”이 말에 박한빈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다.“뭐라고? 따라왔다고? 누가?”“알리라는 사람이야. 에릭 아저씨랑 똑같이 생겼어! 그리... 눈빛을 봤을 때 알 수 있었어. 그 사람도 엄마 좋아해.”이건 박한빈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무엇보다도 성유리와 알리는 이미 얽힐 일이 없어진 줄로만 알았다.비행기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그 남자는 성유리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지 않았던가?그런데 하늘이 말대로 좋아한다는 감정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박한빈은 더 캐묻고 싶었지만 그 순간, 다른 쪽 방문이 열리며 성유리가 나왔는데 그녀는 당연하게도 잠옷 차림이었다.성유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보며 물었다.“누구랑 얘기하고 있었어?”박한빈은 대답하
성유리는 곧 하늘이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하늘이가 잘못 본 거 아니야?” 성유리의 물음에도 하늘이는 말이 없었지만 미간을 찌푸린 표정은 아빠인 박한빈을 꼭 닮아 있었다.그걸 본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하늘이의 작은 코를 살짝 꼬집었다.“넌 걱정이 너무 많아. 이렇게 어린 나이에 맨날 찡그리면 주름 생긴다?”다른 여자아이 같았으면 이 말에 깜짝 놀라며 안절부절못했을 테지만 하늘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사실 하늘이에게 외모가 안 예뻐지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요즘 유치원에서 단체 게임을 할 때마다 남자아이들이 자신을 두고 다투는 바람에 하늘이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피곤했다.성유리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럼 아이스크림 먹을래? 아니면 밀크티 마실까?”하늘이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따뜻한 거 마시고 싶어.”“따뜻한 밀크티는 맛없는데.”“그럼 안 마실래.”하늘이는 너무나 단호하게 대답했다.성유리는 요즘 하늘이를 조금도 속일 수 없다는 걸 실감했다.그리고 이건 다 박한빈의 영향 때문이었다.그래서 결국 둘은 그냥 평범한 식당으로 향했다.하늘이는 성유리 맞은편에 앉아서 식당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렸다.성유리는 그런 아이의 모습이 웃긴 한편 궁금해서 물었다.“뭐 찾는 거야?”“우릴 따라오는 사람.”하늘이가 말했다.“누구?”“몰라. 근데 엄마는 진짜 못 느껴? 아무 느낌도 없어?”성유리는 고개를 저었다.“없는데?”“엄마 지금 너무 방심하고 있어.”하늘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그 사람 지금 근처에 있어. 나쁜 사람일 수도 있어!”성유리는 식당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처음엔 하늘이가 너무 예민한 줄 알았다.그런데 앞쪽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을 본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내가 가서 볼게.”성유리는 하늘이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하늘이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리려 했지만 성유리는 이미 그 사람에게 다가가 있
“미안해요. 제가 괜히...”아라가 막 사과하려는 찰나, 그들 등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성유리의 코앞에 손가락을 겨누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냉혈하고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아직 상황 파악도 못 했을 때 알리는 이미 그녀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지금 아라 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안 보이십니까?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형한테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라 씨가 전에 당신 목숨까지 살려줬다는 거, 잊었어요?”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절절했다.성유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차분하게 되물었다.“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왜 당신은 안 도와주는 거죠?”“전...”알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니 곧 정신을 차리고 되받아쳤다.“당신들 일에 제가 왜 끼어들어야 합니까? 전 돈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그 사람은 당신 친형이잖아요. 당신이 끼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이 금성에 온 것도 이 일 때문 아닌가요?”성유리는 다툴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이성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오히려 어조는 담담했고 눈빛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알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고 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에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이 일은 아라 씨가 가족들과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아라는 말이 없었다.성유리도 더 머물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섰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알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올 줄은.처음엔 또다시 성유리를 욕하려는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알리는 비웃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위선자, 가식덩어리!”알리의 말을 성유리는 아예 못 들은 척 그냥 걸음을 옮겼다.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