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은 무심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진짜로 승낙한 건지 알 수 없었다.에릭의 차가 멀어지자마자, 박한빈은 곧장 성유리에게 물었다.“아라 씨랑 둘이 몰래 무슨 얘기 했어?”“네?”“화장실에서 에릭 아내랑 마주쳤지? 무슨 얘기 나눴어?”박한빈은 이미 확신을 가진 채로 성유리에게 물었다.“별얘기 안 했어요.”성유리는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그냥 몇 마디 나눈 것뿐인데... 왜 그러세요?”박한빈이 더 묻기 전에 성유리는 이미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제가 그냥 다른 사람이랑 몇 마디 나누는 것도 한빈 씨한테 허락받아야 하나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난 그냥... 걱정돼서 그래. 에릭이 지금 아내한테 엄청 신경 쓰고 있잖아. 괜히 네가 무슨 말이라도 들었다가 나중에 에릭이 그걸 빌미 삼아 너한테 화풀이할까 봐.”그러자 성유리는 박한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그러니까 한빈 씨도 눈치챘다는 거죠?”“뭘?”“아라 씨가 진심으로 에릭 씨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는 거.”성유리는 전방을 바라보았다.에릭의 차는 이미 멀리 사라졌고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보았을 때는 어두운 밤하늘만이 펼쳐져 있었다.“난 아라 씨가 좀... 불쌍하다고 생각해요.”성유리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피식 웃더니 갑자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널리고 널렸어. 그리고... 지금 얻은 것들은 예전의 아라 씨가 꿈도 못 꾸던 것들이잖아. 어떻게 보면 좋은 일 아닐까?”“아라 씨가 불쌍하다면 밥조차 먹기 힘들고 몸 누일 곳도 없는 사람들은 뭐가 되는데?”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각자 처한 상황은 다 다르니까.아라는 겉으로 보면 많은 걸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전부 에릭이 그녀에게 주겠다고 한 것들이다.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혼’이라는 계약을 맺는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었다.즉, 아라가 결혼을 거부하면 에릭은 언제든 모든 것을 회수할
박한빈은 사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자신이 식사 자리에서 에릭과 나눈 대화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성유리는 그를 봤을 때 분명 기뻐 보였다.그런데 식사가 끝난 뒤, 성유리의 태도는 확연히 차가워졌다.집으로 돌아갈 때 굳이 조수석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도 그렇고 집에 도착한 후에도 박한빈과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심지어 잘 때조차 박한빈이 침대에 오르자마자 원래 반듯하게 누워 있던 성유리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박한빈에게 등을 돌린 것도 모자라 침대 끝으로 살짝 몸을 움직이는 것까지 더해져 의미는 명확했다.순간 멍해져 있던 박한빈은 몸을 숙여 성유리에게 물었다.“너 왜 그래?”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눈을 계속 감고 있었다.박한빈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성유리는 그의 손을 툭 쳐냈다.힘이 세지는 않았지만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박한빈의 기분은 더욱 엉망이 됐고 마치 심장이 무언가에 의해 꽉 잡힌 듯한 기분이었다.“대체 무슨 일인데?”박한빈이 끈질기게 물었다.“누가 너 괴롭혔어?”그러나 성유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한빈은 잠시 기다리다가 결국 폭발해 성유리의 어깨를 잡고 강제로 돌려 눕혔다.“왜 말을 안 해?”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 물었다.“무슨 일 생겼어?”박한빈의 끊임없는 질문에 드디어 성유리가 눈을 떴다.그녀는 그를 한 번 바라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손 놔요.”“뭐?”“전 지금 박한빈 씨 보고 싶지 않으니까 손 놓으라고요.”그 말에 박한빈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내가 뭘 어쨌다고 갑자기 날 보기 싫어하는데?”“당신도 잘 알잖아요.”“뭐?”“에릭 씨 일, 박한빈 씨가 조언해 준 거죠?”성유리는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그 말에 박한빈의 심장이 순간 빠르게 뛰었다.뭔가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에릭 씨는 원래
박한빈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 앉아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성유리도 질세라 턱을 치켜들고 그와 맞섰다.방 안의 분위기는 점점 얼어붙었다. 마치 날카로운 갈고리가 과거의 모든 것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 같았다.비록 상처는 아물었고 새살도 돋아났지만 여전히 여린 살결 속에는 아물지 않은 피가 맺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흐릿하게나마 검붉은 혈관이 선명하게 보였다.박한빈은 더 이상 서로를 이렇게 몰아붙이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잠시 고민한 끝에 먼저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과거는... 이미 다 지난 일이잖아. 우리 더 이상 꺼내지 않기로 했잖아.”“그건 당신이 달라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전혀 아니었네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성유리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따지듯 물었다.“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난 그저 에릭한테 한마디 조언해 줬을 뿐이야. 설마 걔가 그냥 아라 씨를 강제로 데려가 버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둘 사이의 문제잖아.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인데 넌 왜 이걸로 날 평가하려 드는 거야? 그건 나한테 너무 불공평하지 않아?”“저희에겐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죠.”성유리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하지만 박한빈 씨의 가벼운 말 한마디 때문에 어떤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어요.”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가 침묵한 이유는 성유리의 말에 설득당해서가 아니었다.도대체 왜 성유리가 한낱 ‘남’의 일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설령 자신이 에릭에게 그런 조언을 했다고 해도 결국 실행한 건 에릭이었다.게다가 그 둘은 이제 결혼 준비까지 하고 있고 겉으로 보기엔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성유리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이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도 그에게 더 이상 대꾸할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그저 말없
“너 진짜 잘 생각한 거야?”박한빈이 대뜸 물었다.에릭은 그가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랐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박한빈을 바라보았다.“너와 아라 씨는 집안 배경부터 다르고 성장 배경도 다르잖아. 나는 네가 왜 그 사람이랑 결혼하려는지 전혀 이해가 안 돼.”박한빈이 말을 마치자 에릭은 웃음을 터뜨렸다.“이해가 안 돼? 나도 처음에 성유리 씨랑 네가 만났을 때도 너랑 같은 생각을 했어.”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러다 결국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정말 그런 거라면 이제 더는 내 앞에서 불평하지 말고 앞으로 네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조언을 구하지 마. 안 해줄 거니까.”“왜? 난 친구라곤 너 하나밖에 없는데?”“맞아, 너는 내 친구지. 그래서 난 널 버리거나 만나지 않을 권리가 있고.”박한빈이 말을 마치자 에릭은 잠시 침묵했다.그런 다음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씩 웃었다.“너랑 성유리 씨 나 때문에 싸운 거지? 넌 모든 게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고.”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에릭은 혀를 끌끌 차며 계속 말했다,“내가 아라랑 안 맞다고 했는데... 넌 너랑 성유리 씨가 잘 맞는다고 생각해? 솔직히 말해서 성유리 씨 요즘 좀 너무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 다 너희 쪽 여자는 순하고 온화하다고 하지만 난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해. 특히 성유리 씨는 성격이 너무 드세서 아내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어.”“사실 너 정도 조건이면 너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을 텐데 왜...”에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그의 무릎을 세게 차버렸다.깜짝 놀란 에릭이 소리를 지르자 박한빈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내 아내에 대해 네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어?”“너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에릭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내 무릎 알잖아? 의사가 말했어. 너무 힘을 주면 나중에 못 일어난다고!”“아, 알겠네. 결혼식에서 너는 여자 쪽 부모에게 절해야 돼. 차례로 인사를 해
“게다가 아라 씨 가족이 너를 그렇게 쉽게 놓아줄 거라고 생각해? 지금도 명목상 돈을 빌려달라고 하고 있는데 너희가 결혼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박한빈은 자신이 에릭에게 얼마나 많은 말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렸다.어쨌든 결혼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박한빈은 뭐든지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본래는 이런 일들이 그와는 전혀 관계없었다.박한빈은 한 번도 자신이 ‘상담자’가 될 필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유리와의 관계는 이렇게 계속될 수 없었다.그는 이미 생각을 정리했다. 성유리는 자신이 에릭에게 조언을 해줘 아라의 인생을 바꿨다고 생각했으니 그럼 에릭이 결혼을 하지 않게 설득하면 그만이었다.에릭만 결혼을 포기한다면 성유리와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에릭이 행복하고 잘 살든 말든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어쨌든... 성유리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그러나 에릭은 박한빈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이성적이었다. 결국 사무실을 떠날 때도 박한빈에게 확실한 답을 주지 않았다.박한빈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그저 에릭이 스스로 돌아가서 냉정히 생각하라고 했다.에릭이 떠난 후, 박한빈은 차를 몰고 실버 포레스트로 돌아갔다.그러나 성유리는 집에 없었다.박한빈은 그녀가 엔젤 월드에 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거기서도 허탕을 쳤다.“유리 출장 간 거 몰랐어?”김서영은 갑자기 찾아온 박한빈 때문에 놀랐는지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봤다.“유리가 전에 개작한 드라마가 성공적이었잖아? 지금은 영화 찍으러 갔어.”멍해 있는 박한빈에게 김서영이 계속 말해줬다.“지금쯤 아마 비행기에서 내렸을 것 같아.”김서영의 말을 듣고 박한빈은 그 일이 생각났다. 사실 그가 변호사를 통해 저작권을 처리할 때 성유리가 박한빈과 상의했었지만 오늘 출장이 있다는 건 알지 못했다.그녀가 더 말을 하려는 찰나, 옆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하늘이가 먼저 말했다.“아빠, 또 엄마 화나게 했죠?”아이의 말은 너무 직설적이었기에 박한빈은 저도 모
성유리가 극장 리딩을 마친 시간은 밤 11시였다. 그녀가 하늘이 보내온 음성 메시지에 답하려고 할 때, 뒤에서 누군가의 부름 소리가 들렸다.“성유리 씨!”그 소리에 성유리는 바로 걸음을 멈췄고 뒤돌아보니 이우빈의 매니저였다.“오랜만입니다. 아까 감독님들이랑 함께 있어서 인사드리지 못했어요.”남자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말했다.“잘 지내셨나요?”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잘 지냈어요.”“네. 아직 시간이 그리 늦지 않아서 우빈 씨가 모두 다 함께 야식 먹자고 하는데... 성유리 씨도 같이 가시겠어요?”“저는 안 갈래요.”성유리는 자신의 노트북을 가리키며 대답했다.“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여러분들끼리 가세요.”“그러시군요.”매니저는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성유리의 대답에 약간 당황했지만 금방 다시 말했다.“그럼 제가 잠시 후에 음식을 방으로 가져다드릴게요.”“진짜 괜찮아요. 배고프면 호텔에서 시킬 수 있으니 전 신경 쓰지 마세요.”“괜찮습니다. 사실 이우빈 씨도 성유리 씨께 감사한 마음이 많아요. 드라마 촬영할 때 팬들이 너무 시끄러워서 유리 씨한테 불편을 끼쳤잖아요.”“이번 영화 준비할 때 이우빈이 주연을 맡을 수 있을지 몰랐는데...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역할은 제가 결정한 게 아니에요. 감사는 감독님께 하셔야죠.”“물론입니다! 그래도 결국엔 성유리 씨 덕분이에요. 이 작품에 영혼을 넣은 사람은 성유리 씨니까요.”매니저는 계속해서 공손한 태도로 말하며 성유리를 추켜세웠다.결국 성유리는 이런 분위기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약간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저 먼저 가고 싶은데... 혹시 더 하실 말씀이 있나요?”“아니, 없습니다. 그럼 성유리 씨, 좋은 밤 되세요.”매니저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성유리는 자신의 의사를 매니저가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이우빈이 직접 준비해 온 야식을 그녀의 방문 앞에 가져다 놓았다.“작가님, 아직 식사 안 하셨죠?”아주 사적인 자리였
캐리어 안에서 빠르게 알레르기 약을 찾고 나온 성유리는 이우빈이 이미 방안의 소파 옆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성유리와 눈이 마주친 이우빈은 급히 변명했다.“복도에 사람이 있어서 혹시라도 오해가 생길까 봐 먼저 들어왔습니다.”“괜찮아요.”성유리는 찾은 알레르기 약과 생수 한 병을 함께 건넸다.“먼저 약부터 드세요.”“감사합니다.”이우빈은 약을 받으며 잠시 성유리를 쳐다봤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마치 마음이 불편한 듯 빠르게 고개를 숙이고 약을 삼켰다.“할 말 있어요?”성유리가 물었다.“아니요... 아닙니다.”이우빈은 담담한 척 대답했지만 물을 마시던 중 갑자기 목에 걸려버렸다. 성유리 앞에서 실례를 범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물을 억지로 삼킨 후 심하게 기침했다.그 모습에 당황한 성유리가 물었다.“괜찮아요?”“괜... 괜찮습니다.”이우빈은 손을 내저으며 입술을 종이로 닦았다. 기침이 끊기자 그는 성유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그냥... 목에 물이 걸려서버려서...”성유리는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하늘이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하늘이요? 네. 잘 지내요.”이우빈은 입술을 깨물며 잠시 망설이다가 계속 말했다.“사실 저는 항상 하늘이에게 사과할 기회를 찾고 있었어요.”“왜요?”“그때... 하늘이가 저희 둘을 이어주려고 했지만 저는 저희가 잘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하늘이 앞에서 불필요한 말을 했어요. 그 말들이 작가님과 하늘이한테 상처를 입힌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합니다.”이우빈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그런 일도 있었던 걸 기억해 냈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하늘이가 이우빈을 좋아했는데 이후로 이우빈이 관련된 드라마나 기사를 보면 하늘이는 아예 보지 않으려고 했다.“괜찮아요. 하늘이는 아직 어리니까 그런 건 다 잊었을 거예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러자 이우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움켜쥐고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그때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성유리는 처음에는 이우빈의 매니저가 찾으러
이우빈을 발견한 박한빈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그리고 처음엔 어두웠던 눈빛이 점점 놀람과 억울함으로 변해갔다.성유리는 큰일이 날 것 같은 불안함에 서둘러 해명했다.“박한빈 씨가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저랑 이우빈 씨는... 아, 맞다! 한빈 씨도 잘 알죠? 이번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은 사람이에요.”성유리는 급하게 해명하느라 말을 얼버무렸다.그때, 이우빈이 빠르게 다가와 먼저 입을 열었다.“박 대표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그냥 작가님께 간단한 물건을 전해드리러 왔을 뿐입니다.”그럼에도 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이우빈을 바라볼 뿐이었다.원래 미소를 짓고 있던 이우빈의 얼굴이 그 시선과 맞닿는 순간 점점 굳어졌다.단 2초 동안의 눈 맞춤이었지만 그렇게 짧은 순간에 분위기가 압도당한 듯했다.기세가 꺾인 이우빈의 미소는 점점 경직되어 갔다.결국, 그는 당황한 듯 성유리를 은근슬쩍 바라보았다.“먼저 가보세요.”성유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우빈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길은 본능적으로 다시 박한빈을 향했다.그러나 박한빈은 더 이상 이우빈을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캐리어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후,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한쪽에 던지듯 놓고 소파에 앉았다.진짜 ‘황비’가 다시 자신의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한 듯한 모습으로.물론 그렇게 나올 만도 했다. 어차피 박한빈은 지금 성유리의 남편이니까.이우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성유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 뒤,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떠나는 이우빈의 발걸음은 지나치게 빨랐다. 마치 조금이라도 늦으면 전쟁터 한복판에 휘말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성유리는 문을 닫고 나서야 천천히 박한빈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박한빈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짱을 꼈다.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손등 위로 툭툭 튀어나온 핏줄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지금 그는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음이 분명했
“하늘이가 안 자고 있으면 네가 가서 잡으려고?”박한빈의 그럴싸한 말에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곧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박한빈을 살짝 째려보며 물었다.“이거 한빈 씨가 하늘이한테 가르친 거죠? 박한빈 씨, 제발 딸한테 좀 제대로 된 걸 가르쳐줘요.”“난 지금도 하늘이가 아주 잘 크고 있다고 생각해.”박한빈은 그렇게 말하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뭐 하시려고요?”“알리 씨한테 밥 한 끼 하자고 연락하려고.”“왜 그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건데요?”성유리가 당황한 듯 물었지만 박한빈은 대답 대신 화제를 돌렸다.“유리야, 우리 내기 한번 해볼래?”이 말에 성유리는 뭔가 불길한 예감을 강하게 느껴 즉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싫어요.”“난 아직 뭘 걸고 하는지도 말 안 했는데?”“뭔지는 몰라도 싫어요. 전 당신이랑 내기하면 항상 지니까. 한빈 씨도 그걸 노리고 그러는 거잖아요!”성유리는 온몸으로 박한빈을 밀어내며 반항했지만 그는 그녀의 허리에 감은 자신의 팔을 더 꽉 조였다.“안 돼. 이번엔 무조건 해야 돼.”“세상에 이런 사람이 다 있네?”성유리는 박한빈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려 하며 외쳤다.“매번 한빈 씨랑 내기하면 나만 손해 보잖아요. 이거 지금 사람 협박하는 거예요. 강매라고! 강매!”“아까 너 분석 잘하더라?”박한빈은 태연하게 말했다.“그렇게 자신 있게 말했으면 네 선택이 맞을 거라고 믿는 거잖아.”그 말에 성유리는 말문이 막혔다.그 사이 박한빈은 알리의 연락처를 찾아 바로 전화하려고 했다.그런데 성유리가 그의 손을 꾹 잡고는 강제로 못 움직이게 만들었다.“그러니까 당신이 말한 내기라는 게... 알리 씨가 밥 먹자는 제안을 받아줄지 말지 보는 건가요?”“응.”“그럼 전 알리 씨가 받아들인다는 것에 투표.”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이 살짝 찌푸렸다.“왜요? 내기라면서요? 선택권은 먼저 말하는 쪽에 있는 거 아닌가?”박한빈은 한동안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이내 미소를 지었다.요즘 들
“하늘이가 뭐라고 했는데요?”성유리가 되물었지만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침묵하는 그를 성유리는 조급해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이런 식의 ‘대치’는 두 사람에겐 이제 익숙한 일이었지만 요즘 들어 박한빈이 밀리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었다.방금 전만 해도 다른 사람 같았으면 하늘이를 바로 들먹이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성유리 앞에서는 늘 한발 늦게 반응하게 됐기에 항상 지는 싸움이었다.박한빈은 이걸 성유리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라며 스스로 위로했다.그녀에게 충실하고 싶기에 숨기는 일 없이 다 말하고 싶은 것뿐이라고.그래서 박한빈은 망설이지 않고 사실대로 털어놓았다.“하늘이가 알리라는 사람을 만났다고 하더라고.”“네. 맞아요. 우연히 마주쳤어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정말 그냥 우연이야? 아니면 그 사람이 너희를 미행한 거야?”“전 우연이라고 생각해요.”성유리는 곰곰이 생각한 뒤 대답했다.“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희를 미행할 이유가 없잖아요? 에릭 씨랑 한빈 씨도 이제 멀어졌으니 저도 더는 에릭 씨랑 아라 씨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아요.”“어디서 마주친 거야?”“식당 안에서요.”박한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하지만 알리 그 사람은 중식 안 먹잖아.”즉,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었다.하지만 성유리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한빈 씨는 알리 씨를 잘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근데 어떻게 그런 걸 알고 계시죠?”“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왜 알리 씨가 너희를 미행했느냐는 거야.”“그러게요. 그 사람이 왜 저희를 따라왔을까요?”성유리는 다시 박한빈에게 되물었다.이번엔 박한빈도 우습다는 듯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실제로는 웃지 못했다.보통의 경쟁자라면 아예 신경도 안 썼겠지만 알리는 달랐다.박한빈은 그에 대해 많이 알진 못했지만 알리의 형인 에릭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그 형제가 어떤 부류인지, 어떤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인지도. 그러니 결코 순한 부류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하늘이의 말에 박한빈은 멈칫했지만 곧 웃음을 터뜨렸다.“고작 그거야?”박한빈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지난번 공개수업 때, 성유리를 대신해 자신이 참석하니 그 남자가 자신을 보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뻔히 보였다.한 번은 성유리와 함께 하늘이를 데리러 갔을 때도 차 안에서 창밖으로 그 남자의 눈빛을 봤다.그 시선은 거의 성유리에게 들러붙을 기세였다.예전 같았으면 박한빈은 벌써 질투심에 들끓었겠지만 이젠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그만큼 성유리가 매력 있다는 증거니까.누군가 그녀를 사랑하고 동경한다는 건 성유리가 충분히 빛나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게다가 그 정도 인물은 박한빈에게 상대도 안 됐다.질투할 가치조차 없는 수준이었으니 그런 사람 때문에 화내는 건 오히려 자존심이 상했다.그래도 하늘이조차 눈치챘다는 건 앞으론 성유리와 그 남자가 접촉하는 걸 조금은 조심시키는 게 좋겠다 싶었다.물론 그건 질투나 소심함 때문이 아니라 하늘이의 건강한 성장 환경을 위한 것이었다.“그 사람만 있는 게 아니야.”하늘이는 아빠가 별것 아니라는 듯 웃는 걸 보고 더 짜증 난 표정으로 말했다.“그 사람 말고도 다른 사람도 있어. 아빠 몰랐지? 오늘 우리 유치원 끝나고 집에 가는데... 누가 따라왔어!”이 말에 박한빈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다.“뭐라고? 따라왔다고? 누가?”“알리라는 사람이야. 에릭 아저씨랑 똑같이 생겼어! 그리... 눈빛을 봤을 때 알 수 있었어. 그 사람도 엄마 좋아해.”이건 박한빈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무엇보다도 성유리와 알리는 이미 얽힐 일이 없어진 줄로만 알았다.비행기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그 남자는 성유리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지 않았던가?그런데 하늘이 말대로 좋아한다는 감정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박한빈은 더 캐묻고 싶었지만 그 순간, 다른 쪽 방문이 열리며 성유리가 나왔는데 그녀는 당연하게도 잠옷 차림이었다.성유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보며 물었다.“누구랑 얘기하고 있었어?”박한빈은 대답하
성유리는 곧 하늘이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하늘이가 잘못 본 거 아니야?” 성유리의 물음에도 하늘이는 말이 없었지만 미간을 찌푸린 표정은 아빠인 박한빈을 꼭 닮아 있었다.그걸 본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하늘이의 작은 코를 살짝 꼬집었다.“넌 걱정이 너무 많아. 이렇게 어린 나이에 맨날 찡그리면 주름 생긴다?”다른 여자아이 같았으면 이 말에 깜짝 놀라며 안절부절못했을 테지만 하늘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사실 하늘이에게 외모가 안 예뻐지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요즘 유치원에서 단체 게임을 할 때마다 남자아이들이 자신을 두고 다투는 바람에 하늘이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피곤했다.성유리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럼 아이스크림 먹을래? 아니면 밀크티 마실까?”하늘이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따뜻한 거 마시고 싶어.”“따뜻한 밀크티는 맛없는데.”“그럼 안 마실래.”하늘이는 너무나 단호하게 대답했다.성유리는 요즘 하늘이를 조금도 속일 수 없다는 걸 실감했다.그리고 이건 다 박한빈의 영향 때문이었다.그래서 결국 둘은 그냥 평범한 식당으로 향했다.하늘이는 성유리 맞은편에 앉아서 식당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렸다.성유리는 그런 아이의 모습이 웃긴 한편 궁금해서 물었다.“뭐 찾는 거야?”“우릴 따라오는 사람.”하늘이가 말했다.“누구?”“몰라. 근데 엄마는 진짜 못 느껴? 아무 느낌도 없어?”성유리는 고개를 저었다.“없는데?”“엄마 지금 너무 방심하고 있어.”하늘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그 사람 지금 근처에 있어. 나쁜 사람일 수도 있어!”성유리는 식당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처음엔 하늘이가 너무 예민한 줄 알았다.그런데 앞쪽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을 본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내가 가서 볼게.”성유리는 하늘이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하늘이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말리려 했지만 성유리는 이미 그 사람에게 다가가 있
“미안해요. 제가 괜히...”아라가 막 사과하려는 찰나, 그들 등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성유리의 코앞에 손가락을 겨누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냉혈하고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아직 상황 파악도 못 했을 때 알리는 이미 그녀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지금 아라 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안 보이십니까?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형한테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라 씨가 전에 당신 목숨까지 살려줬다는 거, 잊었어요?”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절절했다.성유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차분하게 되물었다.“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왜 당신은 안 도와주는 거죠?”“전...”알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니 곧 정신을 차리고 되받아쳤다.“당신들 일에 제가 왜 끼어들어야 합니까? 전 돈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그 사람은 당신 친형이잖아요. 당신이 끼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이 금성에 온 것도 이 일 때문 아닌가요?”성유리는 다툴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이성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오히려 어조는 담담했고 눈빛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알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고 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에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이 일은 아라 씨가 가족들과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아라는 말이 없었다.성유리도 더 머물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섰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알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올 줄은.처음엔 또다시 성유리를 욕하려는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알리는 비웃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위선자, 가식덩어리!”알리의 말을 성유리는 아예 못 들은 척 그냥 걸음을 옮겼다.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
아라와 성유리는 금성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문을 막 들어서자 성유리는 아라 목에 감겨 있는 스카프를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그건... 왜 그래요?”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스카프를 풀었고 그 아래로는 뚜렷하게 남은 손자국이 드러났다.이미 이틀이나 지났건만 그 자국은 여전히 선명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그리고 그 자국은 에릭이 당시 얼마나 강하게 목을 졸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였다.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본 성유리의 얼굴도 바로 굳어졌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미안해요. 원래 유리 씨한테 이런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솔직히 지금...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말하는 아라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저희 가족은 제 처지를 전혀 이해 못 해요.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죠. 에릭 씨한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걸 두려워하고요. 그들한테 중요한 건 제가 에릭 씨랑 빨리 결혼해서 뭔가를 얻는 것뿐이에요.”“제가 행복한지, 이 결혼을 원하는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아라가 처한 상황을 성유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전... 제가 에릭 씨한테 이별 통보를 했고 그 사람도 동의했어요.”아라의 말에 성유리는 놀랐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잘됐네요. 그럼 이제...”하지만 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데... 그 사람이 저희 부모님께 이미 결혼 자금으로 돈을 송금했거든요. 에릭 씨는 제가 파혼을 원한다면 그 돈을 전액 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돈은 이미 부모님이 다 써버렸고... 지금 제가 그 돈을 달라고 해도 당연히 안 줄 거고...”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라의 의도는 너무도 명확했다.성유리가 아직 입을 떼기 전에 아라가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유리 씨가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아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
아라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손으로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에릭은 아라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그렇게 아라의 숨이 점점 끊겼고 결국 마지막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아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지금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느낀 건... 허무함뿐이었다.설마 자기 인생이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죽는 걸로 끝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렇지만 이게 또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귀찮은 일들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어차피 집에서는 파혼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에릭의 태도 역시 결혼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쪽은 아닌 듯했다.그렇다고 아라는 평생을 에릭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죽는 것도 어쩌면 자신에게는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에릭이 갑자기 손에 힘을 풀었다.공기가 한순간에 밀려 들어오며 폐를 터뜨릴 듯 부풀게 만들었다.아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목을 부여잡은 채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숨을 너무 오래 참았던 탓에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 되었고 아라의 모습은 더없이 초라하고 처참했다.그러나 에릭은 힘들어하는 아라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했다.“파혼하고 싶다고? 좋아. 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움찔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대신, 내가 준 1억 돌려줘.”...“알리!”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알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내 다가오는 여자를 본 순간,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제 이름을 부르라고 했습니까? 말해두는데 당신이 설령 우리 형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절대 당신 같은 여자를 형수로 인정하지 않을 거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을 받아들일 일 없으니까.”알리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
아라는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뺨에 있던 붉은 자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하얀 피부 위에 눈에 띄게 남아 있었다.에릭은 그 시각 호텔에 있었다.그는 아라를 보고 처음에는 잠시 멈칫하다가 금세 눈빛이 다시 싸늘하게 식더니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거야?”아라는 에릭의 반응을 보고 알았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소유물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했다면 예전에 자신이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을 리 없었고 술집에서 자신에게 술을 퍼붓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행동들이야말로 에릭이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지금 에릭이 아라의 얼굴의 붉은 자국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무언가가 손을 대었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이것은 아라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그녀는 자기가 전혀 무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에릭을 속인 것도 사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다.그때는 단지 주성운의 병원비를 빨리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아라는 자신이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에게도 충분히 마음을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그것은 하나의 거래였으니 아라는 에릭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어차피 에릭은 전에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지 않나?그저 자신도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그러나 아라는 한 가지를 깜빡하고 있었다.자신의 무심함이 오히려 에릭의 소유욕과 승부욕을 자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결국 아라의 모든 예상을 뒤덮고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다.“누가 그랬는지 말해줘.”에릭이 다시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이미 짜증이 섞인 듯 들렸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저희 가족이요.”아라가 순수히 대답했지만 에릭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에릭은 자신이 이미 결혼 예물까지 보냈으니 아라는 이미 자신의 소유물
“싫어요.”성유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그때 찍은 사진 안 예뻐요.”“그럼 다시 찍자.”“우리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나는 의미 있다고 보는데.”“당신 원래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요?”성유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그의 속내를 간파한 듯 미소를 지었다.“박한빈 씨, 뭐든지 남이 가지고 있는 건 다 가져야겠어요? 애처럼 굴지 마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옆으로 휙 던졌다.그리고는 외투를 거칠게 벗어던졌다.성유리는 그 행동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이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찍어요. 다시 찍자고요. 저희 내일 당장 가서 찍어요.”...아라는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로 집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에릭이 보낸 200억이나 되는 예물이 이미 입금되었다.그 돈으로 아라의 가족은 즉시 새집을 샀고 아버지는 새 차까지 뽑았다.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왔다.거실에서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내가 뭐랬어? 아라는 딱 봐도 크게 될 애라고! 해외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좋은 신랑감을 데려와?”“그러게 말이야. 형, 이런 사위가 있으면 노후 걱정 끝난 거 아니야?”“하하, 난 그냥 우리 딸 미래를 위해서 한 거지!”아라의 아버지는 흡족한 듯 계속 말했다.“솔직히, 난 우리 딸이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가까운 데서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 외국인인 데다 너무 잘해주니까 어쩌겠어? 거절할 수가 없지!”“거절? 그런 걸 거절하는 게 바보지!”“맞아! 이렇게 좋은 결혼... 남들은 꿈도 못 꾸는걸!”“근데 말이야, 아직 형 사위를 직접 본 적이 없네? 이왕 다 모인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할까?”“식사는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