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지. 방금 에릭이 나한테도 말 안 해줬잖아?”성유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근데 에릭 씨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이 단순히 재산 문제로 화낼 리는 없고... 그렇다면 그냥 가지고 놀았다는 건가요?”성유리가 이 일에 대해 그렇게 분석하자 박한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아마도 그럴걸?”에릭은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그 녀석이 예전에 나보고 미쳤다고 난리 치더니 이제야 본인이 제대로 당했네. 아주 좋아.”그렇게 말하면서도 에릭은 뭔가 떠오른 듯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아라의 신원을 조사해 보라고 지시했다.그리고는 다시 성유리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번 연극... 아주 볼만하겠어.”...에릭이 도착한 건 새벽이었지만 박한빈은 당연히 마중을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미리 주소를 알아두었기 때문에 에릭은 공항에서 곧장 이곳으로 쳐들어왔다.현관 벨이 울릴 때, 성유리와 박한빈은 아직 잠들지 않은 상태였다.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움찔했고 그 바람에 그녀의 손톱이 박한빈의 등을 스치며 얇은 상처를 남겼다.그래서 박한빈 역시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사람 있어요.”성유리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그녀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그렇지만 벨 소리는 마치 재촉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성유리는 점점 신경이 곤두섰고 결국 그를 밀어내려 했다.살짝 화가 난 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더니 아예 성유리의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눌러버렸다.한편, 에릭은 문 앞에서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금성은 아직 그렇게 추운 계절이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그에게 이처럼 문 앞에서 추위를 견디며 기다리는 경험은 그야말로 치욕이었다.그렇게 이를 악물고 서 있다가 마침내 문이 열리고 박한빈이 내려왔는데 그의 표정은 에릭 못지않게 어두웠다.“대체 뭐 하러 온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짙은 짜증이 배어 있었다.에릭은
아라는 요 며칠 계속해서 누군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뒤를 돌아볼 때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잠시 불안감이 스쳤지만 이내 스스로를 달랬다.‘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누가 날 쫓아오겠어?’아라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돈도 많지 않고 외모도 그렇게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다.그러니 누군가 아라를 미행할 이유 따위 없었다.애써 잡생각을 정리하고 괜찮다고 생각하며 신경을 끄기로 했다.요즘 아라의 가장 큰 관심사는 주성운이었다.요즘 그는 점점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기에 아라가 돈을 모아 주문한 의족도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의족이 도착하면 주성운은 다시 두 발로 설 수 있고 그들의 삶도 한층 더 나아질 터였다.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함께 작은 가게를 열어 조용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그것이 아라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미래였다.공공버스에서 내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순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아라야.”익숙한 이름,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아라의 발걸음이 즉시 멈췄다.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딱 떨어지는 고급 정장을 입은 채로 눈에 띄는 금발과 짙은 청록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남자가 입을 열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아라에게 쏠리자 아라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에릭이 아라를 찾아온 것이다.순간 아라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몇 초 후, 그녀는 억지로 평정을 되찾고 조심스럽게 다가섰다.“에... 에릭 씨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예요?”에릭은 아라를 쳐다만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냥... 지나가는 길인가요?”아라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연스럽게 상황을 넘기려 했다.“진짜 우연이네요. 근데...”“아니. 특별히 널 찾으러 왔어.”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멈칫했다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저... 저를 왜 찾아오셨어요? 무슨
아라는 원래 그저 하나의 거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릭의 태도는 그녀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아라는 당연히 에릭과 계속 함께할 생각이 없었다.그래서 일부러 에릭에게 바람을 피울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일부러 현장에서 들키는 상황까지 연출했다.아라의 뛰어난 연기 덕분에 에릭은 결국 그녀에게 질려버렸고 먼저 이별을 통보했었다.그녀는 약간의 소란을 피운 뒤, 에릭이 건넨 이별 위로금을 받고 아쉬운 마음이 가득한 듯 끄 까지 연기하며 퇴장했다.이걸로 모든 이야기가 완벽하게 끝났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에릭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그리고 에릭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눈치챈 것 같기도 했다.에릭이 얼마나 냉혹한 남자인지 아라도 잘 알고 있었기에 즉시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진짜요? 정말 다행이네요.”말을 하며 아라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팔을 껴안았다.“제가 요즘 에릭 씨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르시죠?”에릭은 아라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아라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세요. 이제부터 철없이 굴지 않을게요. 에릭 씨 일에는 절대 참견하지도 말썽도 부리지 않을 거예요. 그저 에릭 씨 곁에 남아있을 수만 있다면...”“그래. 걱정 안 할게. 이제부터 다른 사람은 없을 거니까.”에릭이 아라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버리며 단호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네?”아라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난 너랑 결혼하고 싶어. 어떻게 생각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질문에 아라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가자. 지금 당장 혼인 신고하러.”“아니... 잠깐만요.”그제야 아라는 정신을 차리고 몸부림치기 시작했고 에릭은 곧장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싫어?”에릭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고 눈빛도 점점 싸늘하게 식어갔다.눈치 보던 아라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라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박한빈은 오
“성유리 씨, 이쪽으로 오십시오.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습니다.”레스토랑의 프라이빗 룸에서 에릭은 기분 좋은 듯 싱글벙글 웃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이쪽은 아라, 전에 본 적 있죠? 오늘 유리 씨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불렀습니다. 저희가 결혼했거든요.”성유리는 오늘 에릭에게서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이런 폭탄 발언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당황한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져 본능적으로 옆에 앉아 있는 아라를 바라봤다.그런데 아라는 의외로 아주 차분했다.심지어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옅은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성유리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로얀은요?”에릭이 묻고 나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아직 오는 중일 거예요.”성유리는 그러면서 거리를 두려는 듯 자기 의자를 당겨 앉았다.별것 아닌 평범한 행동이었지만 에릭은 그 행동이 불만스럽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저희 둘이 결혼까지 했는데... 그 정도 반응밖에 없습니까?”성유리는 에릭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게다가 에릭의 초대가 워낙 갑작스러웠던 데다 오기 전까지도 그들이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그냥 얼마 전 에릭이 아라 문제로 경찰서까지 다녀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때 에릭과 충돌했던 그 사람은...성유리는 은근히 아라의 표정을 살폈다.그런데 아라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이 일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없는 것처럼.결국 성유리는 궁금증을 억누르고, 먼저 술잔을 들었다.“축하드려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미처 준비를 못 했네요. 선물은 다음에 챙겨드리죠.”그제야 에릭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아라도 함께 잔을 들려 했지만 에릭이 단번에 그녀의 잔을 빼앗고는 단호하게 말했다.“너는 지금 술 마시지 마. 내가 대신 마실게.”그러면서 성유리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유리 씨도 궁금하죠? 아라가 왜 술을 못 마시는지?”성유리는 사실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그렇지만 에릭
그러고는 바로 고개를 돌리며 계속 말했다.“성유리 씨가 원하지 않으면 됐어요.”사실 성유리가 원한다고 해도 박한빈이 꼭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필경 누구랑 사돈을 맺든 그는 다 수긍할 수 있었으니까.아란은 웃으며 나중에 아이가 크면 자신만의 생각이 확고해 어른들의 말은 듣지 않을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이 말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에릭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줬다.연인 사이에 아주 평범한 행동이었지만 에릭이 그런 행동을 하자 성유리는 어쩐지 너무 낯설고 어색했다.저도 모르게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였으니까.마침 그때 박한빈이 도착했는데 성유리는 거의 구원자를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박한빈은 먼저 성유리를 힐끗 본 뒤, 아무 말 없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또 무슨 일이야?”“쳇,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했는데 무슨 태도지?”에릭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으며 성유리를 흘낏 쳐다봤다.그 눈빛은 마치 성유리더러 직접 말하라는 듯했다.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성유리가 대신 말했다.“두 사람 결혼했대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살짝 눈썹을 올리더니 고개만 끄덕였다.그렇게 간단한 반응이 에릭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뭐야? 그게 다야?“그럼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박한빈은 태연하게 되물었다.“됐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겠지. 그래서 축의금으로 뭘 원해?”그렇게 말하던 박한빈은 아란을 쓱 쳐다봤다.“예전에 홍성 출신이라고 했죠? 그럼 이제 에릭과 함께 라온시로 갈 생각입니까? 뭐가 어떻게 됐든 어쨌든 이곳이 당신 고향이니 돌아올 수 있는 곳은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제가 집 한 채를 선물할까 하는데... 어떻습니까?”확실히 박한빈은 에릭을 더 잘 아는 사람이었다.아니나 다를까, 단 몇 마디 말만으로 에릭의 기분을 제대로 풀어줬다.그러자 자연스럽게 대화는 금성의 부동산 시장과 집값으로 이어졌다.성유리는 그들의 대화를 한참 듣다가 점점 지루해졌는데 마침 하늘이가 전화를 걸어왔다.그녀는 박한빈에게 한 마디 남기고
“고마워요.”아라는 성유리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잠시 머뭇거리던 성유리는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아라 씨는 왜 에릭 씨랑 결혼한 거예요?”이 질문에 아라는 순간 멍해졌다.성유리도 자신의 질문이 다소 무례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는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말하기 싫다면 안 해도 돼요. 전 그냥... 좀 궁금해서.”성유리의 말을 들은 아라는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유리 씨도 에릭 씨가 지난번에 싸운 일은 알고 있죠?”“네. 한빈 씨가 그 일을 처리해 줘서 저도 조금은 알게 됐어요.”아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사실 저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에릭 씨가 저희 과거 일을 제 전 남자 친구한테 말해버렸거든요. 그 사람이 제가 몸을 팔아서 돈을 가진 걸 알고는 절 경멸하더라고요. 그리고 에릭 씨가 저희 집까지 찾아갔었어요.”“대뜸 저희 부모님께 200억 예물을 주겠다고 했죠. 그 솔깃한 제안을 저희 부모님이 거절할 수 있었을까요?”성유리는 담담히 들어주려 했지만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니까... 아라 씨 부모님 의견을 먼저 물어본 거네요?”“네. 그리고 저희 부모님이 원하면 나중에 라온시로 함께 이사할 수도 있다고 했어요. 저희 부모님은 평생 비행기 한 번 타본 적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당장 승낙했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죠. 자기들이 곧 라온시로 이사 간다고.”아라는 본인이 말하면서도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성유리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물었다.“그럼 아라 씨는요?”“네?”“아라 씨는 에릭 씨랑 결혼하고 싶어요?”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아라는 멍해졌다.그리고 잠시 후,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저희 부모님도 이미 동의하셨고 게다가 저 임신까지 했어요.”“정말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여기서 몰래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았겠죠.”성유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말은 마치 총알이 되어 아라의 정곡을 찌는 것 같았다.아라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박한빈은 무심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진짜로 승낙한 건지 알 수 없었다.에릭의 차가 멀어지자마자, 박한빈은 곧장 성유리에게 물었다.“아라 씨랑 둘이 몰래 무슨 얘기 했어?”“네?”“화장실에서 에릭 아내랑 마주쳤지? 무슨 얘기 나눴어?”박한빈은 이미 확신을 가진 채로 성유리에게 물었다.“별얘기 안 했어요.”성유리는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그냥 몇 마디 나눈 것뿐인데... 왜 그러세요?”박한빈이 더 묻기 전에 성유리는 이미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덧붙였다.“그리고 제가 그냥 다른 사람이랑 몇 마디 나누는 것도 한빈 씨한테 허락받아야 하나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겨우 입을 열었다.“난 그냥... 걱정돼서 그래. 에릭이 지금 아내한테 엄청 신경 쓰고 있잖아. 괜히 네가 무슨 말이라도 들었다가 나중에 에릭이 그걸 빌미 삼아 너한테 화풀이할까 봐.”그러자 성유리는 박한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그러니까 한빈 씨도 눈치챘다는 거죠?”“뭘?”“아라 씨가 진심으로 에릭 씨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는 거.”성유리는 전방을 바라보았다.에릭의 차는 이미 멀리 사라졌고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보았을 때는 어두운 밤하늘만이 펼쳐져 있었다.“난 아라 씨가 좀... 불쌍하다고 생각해요.”성유리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피식 웃더니 갑자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은 널리고 널렸어. 그리고... 지금 얻은 것들은 예전의 아라 씨가 꿈도 못 꾸던 것들이잖아. 어떻게 보면 좋은 일 아닐까?”“아라 씨가 불쌍하다면 밥조차 먹기 힘들고 몸 누일 곳도 없는 사람들은 뭐가 되는데?”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각자 처한 상황은 다 다르니까.아라는 겉으로 보면 많은 걸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전부 에릭이 그녀에게 주겠다고 한 것들이다.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혼’이라는 계약을 맺는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었다.즉, 아라가 결혼을 거부하면 에릭은 언제든 모든 것을 회수할
박한빈은 사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자신이 식사 자리에서 에릭과 나눈 대화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성유리는 그를 봤을 때 분명 기뻐 보였다.그런데 식사가 끝난 뒤, 성유리의 태도는 확연히 차가워졌다.집으로 돌아갈 때 굳이 조수석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도 그렇고 집에 도착한 후에도 박한빈과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심지어 잘 때조차 박한빈이 침대에 오르자마자 원래 반듯하게 누워 있던 성유리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박한빈에게 등을 돌린 것도 모자라 침대 끝으로 살짝 몸을 움직이는 것까지 더해져 의미는 명확했다.순간 멍해져 있던 박한빈은 몸을 숙여 성유리에게 물었다.“너 왜 그래?”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눈을 계속 감고 있었다.박한빈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성유리는 그의 손을 툭 쳐냈다.힘이 세지는 않았지만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박한빈의 기분은 더욱 엉망이 됐고 마치 심장이 무언가에 의해 꽉 잡힌 듯한 기분이었다.“대체 무슨 일인데?”박한빈이 끈질기게 물었다.“누가 너 괴롭혔어?”그러나 성유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박한빈은 잠시 기다리다가 결국 폭발해 성유리의 어깨를 잡고 강제로 돌려 눕혔다.“왜 말을 안 해?”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 물었다.“무슨 일 생겼어?”박한빈의 끊임없는 질문에 드디어 성유리가 눈을 떴다.그녀는 그를 한 번 바라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손 놔요.”“뭐?”“전 지금 박한빈 씨 보고 싶지 않으니까 손 놓으라고요.”그 말에 박한빈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내가 뭘 어쨌다고 갑자기 날 보기 싫어하는데?”“당신도 잘 알잖아요.”“뭐?”“에릭 씨 일, 박한빈 씨가 조언해 준 거죠?”성유리는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그 말에 박한빈의 심장이 순간 빠르게 뛰었다.뭔가 말하려 했지만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에릭 씨는 원래
박한빈이 화가 난 채로 돌아왔을 때, 성유리는 마침 손에 들고 있던 게 게 껍질을 내려놓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미처 박한빈이 화가 난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성유리는 돌아서면서 환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밀었다.“이거 보세요. 제가 한빈 씨 거 다 발라놨어요! 빨리...”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그릇을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더니 곧장 성유리의 손을 잡아끌었다.“나랑 가자.”박한빈의 얼굴은 잿빛처럼 어두워져 있었는데 성유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냉랭한 표정이었다.잔뜩 당황한 성유리가 천천히 웃음을 거두었다.“왜 그러는데요? 무슨...”하지만 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섰다.몇 걸음 가던 그는 문득 무언가 떠올렸는지 발걸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 성유리가 힘들게 발라놓은 게살이 담긴 그릇을 다시 집어 들더니 옆에 멍하니 서 있던 웨이터에게 내밀었다.“포장해 주세요.”웨이터는 박한빈의 기세에 놀라 움찔했지만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박한빈은 더 이상 웨이터를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성유리를 끌고 나섰다.성유리는 복도로 나오면서 이우빈을 쓱 쳐다보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는데 박한빈이 성유리를 끌고 나오는 모습을 보자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무슨 일인데요?”성유리는 이제야 벌어진 상황을 퍼즐조각처럼 맞춰 보려 박한빈에게 물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박한빈의 싸늘한 눈빛만 봐도 기분이 최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성유리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조금 후, 웨이터가 포장한 게살을 들고나오자 박한빈은 차창을 내리고 그것을 받아 들더니 바로 운전기사에게 명령했다.“출발.”박한빈의 태도는 마치 이곳에 단 1초도 더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했다.쌩쌩 달린 차가 일정 거리를 지나고 나서 성유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이우빈 씨가 뭐라고 했어요?”성유리가 말을 마치자마자 박한빈은 고
박한빈이 성유리를 이끌고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의 귀 끝과 뺨은 여전히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방금 전 차 안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성유리의 얼굴에 남아 있는 열기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게다가 그녀의 머리끈도 아까 차 안에서 박한빈이 잡아당겨 풀려버린 터라 긴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며 얼굴을 가렸다.덕분에 얼굴이 빨개진 모습을 어느 정도 숨길 수 있었다.반면, 박한빈은 아까까지도 불만 가득한 욕설들을 쏟아냈으면서도 지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한 표정이었다.오히려 성유리의 반응이 꽤 만족스러웠던 모양인지 박한빈의 기분은 한결 나아져 보였다.그래서인지 이우빈이 다가와서 술을 권할 때도 그와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이우빈 씨 원래 술 알레르기 있지 않아요?”성유리는 무심결에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얼마 전, 이우빈이 술을 조금 마셨다가 온몸이 가렵고 붉어지는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때도 결국 성유리가 직접 알레르기 약을 챙겨줬었다.지금도 단순히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박한빈의 시선이 곧장 그녀에게로 향했다.그 차가운 눈빛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괜찮습니다.”이우빈은 웃으며 대답했다.“성 작가님께서 저까지 신경 써 주신다니... 정말 영광입니다.”하지만 성유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눈앞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한편, 테이블 아래 박한빈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그래서 성유리는 찻잔을 내려놓고 슬쩍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단박에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그러자 성유리는 다시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고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려 더욱 단단히 쥐었다.박한빈은 한숨을 쉬듯 성유리의 손을 거칠게 뒤집어 쥔 후, 힘을 주어 꽉 눌렀다.“아!”성유리는 그 힘에 저도 모르게 작게 신음했다.“작가님, 괜찮으세요?”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이우빈이 그
며칠 전, 성유리가 이우빈에게 식사 약속을 한 것은 그저 형식적인 응대였을 뿐이었다.이미 이우빈의 속내를 훤히 알고 있는 이상 괜히 기회를 줄 이유도 없었다.하지만 박한빈은 마치 성유리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며 오히려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감싸 쥔 채 말했다.“이우빈 씨께서 정성껏 초대해 주셨는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어디에서 식사할 예정인지 궁금하군요.”박한빈의 말에 유재국의 표정이 순간 딱 굳어졌다.보통 이런 단체 회식은 메운탕 집이나 고깃집 정도에서 진행하는 게 일반적이었다.수백, 수천 명이 모이는 자리에서 그 정도면 충분히 최고급 대우라고 할 수 있었다.그렇지만 박한빈의 신분이 촬영팀의 조명 담당자나 촬영기사들과는 분명 다른 급이었다.부잣집 도련님 같은 그를 고깃집으로 데려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하지 않았다.유재국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박 대표님께서는 어떤 음식을 드시고 싶으신가요?”“저는 음식에 별다른 욕심이 없습니다.”박한빈의 대답에 유재국은 속으로 안도하며 이제야 회식 장소를 알려주려고 했다.그런데 그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마침 이 근처에 괜찮은 고급 레스토랑이 하나 있더군요. 거기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박한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재국의 표정이 경직되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웃음을 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성유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이 정도 돈이 이우빈에게 큰 부담이 되는 건 아니었다.요즘 한창 잘나가는 인기 배우인 그는 하루 출연료만 해도 몇억이 되는 정도였다.하지만 문제는 돈이 많다고 해서 모든 비용을 무작정 써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촬영팀을 위해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었다.그러나 그 장소가 1인당 몇백만 원 하는 고급 레스토랑이라면?이건 단순히 대인배 이미지 구축을 넘어서 그야말로 지출의 비효율적인 낭비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박한빈이 그렇게 정해버린 이상
박한빈 덕분에 성유리는 제대로 갑을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쪽의 재미를 느껴볼 수 있었다.그가 투자하자마자 원래 끼어들겠다고 떠들던 사람들은 조용해졌고 감독도 더 이상 말을 아꼈다.사실 감독도 처음부터 성유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최근 몇 년간 그녀와 박한빈이 워낙 조용하게 지내 온 데다 이우빈이 흘린 여러 소문 때문에 성유리의 현재 위치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감독은 늘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만약 두 사람 관계가 정말 돈독하다면 박한빈 씨가 성유리 씨에게 이렇게 힘든 일을 시킬 리가 없잖아?’그렇지만 오늘에서야 그는 깨달았다.성유리야말로 자신이 가장 존중해야 할 갑이라는 사실을.처음엔 혹여나 자신이 전에 했던 말 중 실례가 되는 게 있었을까 걱정하며 눈치를 살폈지만 예상과 달리 성유리는 신분이 바뀌었다고 해서 거만하게 구는 일 없이 평소처럼 촬영팀 회의에 참석했다.시나리오 수정이 있을 때도 가장 먼저 의견을 냈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감독은 몇 번이나 회의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박한빈을 보게 됐다.성유리가 회의를 하는 동안, 박한빈은 밖에서 전화를 하거나 노트북을 보며 일을 했다.하지만 무슨 일을 하든, 성유리가 문을 나서는 순간 즉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갔다.두 사람의 관계는 누가 봐도 너무나도 좋아 보였다.그래서 감독은 속으로 생각했다.‘그동안 떠돌던 소문들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박한빈의 투자 덕분에 외부 자본이 끼어들 걱정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그리고 감독은 이 점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기뻤다.마침내 촬영 시작일이 다가왔다.촬영장에는 이미 기자들과 남녀 주인공의 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성유리도 개막식에서 상징적으로 받은 축의금 봉투를 살짝 열어 보았다.그 안에는 현금 대신 복권 한 장이 들어 있었다.호기심에 긁어 보니 뜻밖에도 5천 원이 당첨되었다.그 돈으로 성유리는 자신과 박한빈에게
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이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다시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투자를 받으려면 최소 몇 근 정도 되는 엄청난 양의 술은 마셔야 해. 그런데 넌 뭘 했지?”“전 당신 아내잖아요. 저한테 그 정도 특권도 없나요?”성유리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고 아내라는 단어도 이제는 꽤 자연스럽게 나왔다.박한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지만 눈빛 속에 감춰지지 않는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하지만 바로 그때, 그들 뒤에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서연?”그 소리를 듣는 순간, 성유리는 발걸음을 뚝 멈췄고 모든 표정이 사라져 버렸다.지서연이라는 이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오래전이라 성유리는 자신도 이미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혹은, 이제는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다고 믿었다.어차피 지금은 박한빈과 예전의 일을 평온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과거의 자신을 농담처럼 가볍게 흘려보낼 수도 있으니까.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유리 혼자만의 착각이었다.지금 그 이름이 다시 들려온 순간, 날카로운 기억들이 마치 조각난 유리처럼 성유리의 차분한 겉모습을 찢어버리고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 사람이 벌써 성큼성큼 다가왔다.“정말 너 맞지? 아까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그런데 진짜 너였네.”여자는 잔뜩 흥분하며 말을 이어갔다.“나 요즘도 뉴스에서 너 자주 봤어! 다들 그러더라? 너 요즘 잘나간다고. 부자 남편 만나서 유복하게 산다며?”“원래 너 찾으려고 금성까지 갈까 했었는데 연락처를 몰라서 못 갔어.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만날 줄이야!”여자는 감격한 듯 팔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예전에는 너랑 우리 단이가 같은 반 친구였잖아! 맞다, 그리고 너...”여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손을 뿌리쳤다.그리고 담담하게 대답했다.“사람 잘못 보셨네요.”그 말에 여자가 순간 멍해졌지만 이내 다시 물었다.“그럴 리가 없어. 내가 널 어떻게 몰라보겠어? 네 집 예전엔...”
성유리는 손끝에 힘을 잔뜩 줬다.하지만 박한빈의 팔 근육이 워낙 단단해서 자신이 아무리 힘을 줘도 제대로 꼬집히지도 않았다.이 사실을 깨닫자 성유리는 살짝 짜증이 났다.성유리가 눈썹을 찌푸리며 박한빈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자 그는 곧장 그녀의 기분을 이해한 듯 말했다.“차라리 깨물어 볼래?”“됐어요.”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한 뒤,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그렇지만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했다.그제야 박한빈은 성유리가 진짜로 신경 쓰고 있는 게 뭔지 깨달았다.“일이 잘 안 풀려?”성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문 뒤, 고개를 끄덕거렸다.“아까 감독이랑 이야기했다고 했지? 무슨 얘기였어?”“대본 관련해서...”“수정해야 돼?”박한빈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다른 작가들도 있으니까 너 혼자 할 필요 없잖아.”“제작사가 새로운 배우를 끼워 넣으려고 해요. 그래서 캐릭터를 추가해야 하는데...”성유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이미 대본이 충분히 꽉 차 있어서 추가하려면 거의 처음부터 다시 짜야 돼요. 그런데 감독은 일주일 안에 끝내라고 했어요.”“넌 그걸 동의한 거야?”“제가 싫다고 해도 방법이 없었어요. 저쪽이 우리 영화 최대 투자사거든요 그래서 감독도 쉽게 거절할 수 없고요.”“음... 그럼 곧 최대 투자사가 바뀌겠네.”박한빈의 말에 성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왜요?”“내가...”그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성유리를 힐끔 바라봤다.그런데 성유리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보며 물었다.“성유리, 너 지금 나 떠보는 거지?”“아니요? 전혀 아닌데요?”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도 그녀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아야!”갑작스러운 행동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손까지 휘저으며 외쳤다.“뭐 하는 거예요! 살살 좀 하라고요!”성유리가 두 손으로 자신을 마구 밀쳐내자 박한빈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놓아주었다.“내가 제작사에 투자하게 만들고 싶으면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이렇게 덫을 세우지 말고.
새로운 캐릭터를 추가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고 게다가 투자사에서 내건 조건도 까다로웠다.“주인공보다 비중은 적어야 하지만 캐릭터 자체는 충분히 매력적이어야 합니다.”감독이 단순히 조건만 언급했을 뿐인데도, 성유리는 이미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성유리 작가님.”감독은 마치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원작자가 누구보다 가장 잘 알겠죠? 어디에 캐릭터를 끼워 넣어야 자연스러울지. 그러니까 이 작업은 당신이 맡아주세요.”감독의 말에 성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러나 감독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바로 통보를 내렸다.“투자사에서 일주일 내로 수정된 대본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준비하세요. 그리고 임 작가님이 성 작가님 작업에 맞춰 협조해 주세요.”그 말을 끝으로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캐스팅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나갔다.회의실에 남겨진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임 작가는 성유리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작가님, 혹시 떠오르는 아이디어 있으세요?”성유리는 묻는 임 작가를 한 번 바라본 뒤, 고개를 저었다.“그럼 어쩌죠? 겨우 일주일인데 이 대본을...”임 작가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성유리의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을 보자 예상대로 박한빈이었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임 작가에게 말했다.“일단 먼저 돌아가세요. 통화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볼게요. 필요한 부분 있으면 따로 연락할게요.”“네, 알겠습니다.”상대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성유리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으니 결국 조용히 짐을 챙겨 회의실을 나갔다.그제야 성유리는 전화를 받았다.“아직 회의실에 있어?”수화기 너머 박한빈의 목소리는 살짝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첫 두 글자만 들어도 이미 감정이 묻어나왔지만 그는 곧 스스로 감정을 누그러뜨리려는 듯 어조를 차분하게 바꿨다.“네.”“그런데 내가 보낸 메시지는 왜 안 봤어?”“감독님이랑 이야기 중이었어요.”“아... 그래?”그
이런 상황은 이미 익숙했다.이제는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유가 거의 다 박한빈 때문이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였을까, 이우빈이 식사 제안을 했을 때도 성유리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하지만 막상 듣고 나니 순간적으로 뭐라 답해야 할지 망설여졌다.잠시 고민하던 끝에, 담담하게 대답했다.“아마 그이도 시간 없을 거예요. 여기 온 것도... 원래 업무 때문에 온 거라서요.”“아, 괜찮습니다. 어차피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되는 거니까요.”“네.”성유리는 고개만 끄덕이며 대충 상황을 넘겼다.그렇게 대화를 마쳤으면 떠날 법도 한데 이우빈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성유리는 원래 하려던 대본 수정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바로 옆에서 버티고 있는 이우빈이 신경 쓰여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더 할 얘기 있어요?”“아니, 없습니다.”“그럼...”“전 그냥 할 일이 없어서 여기 있는 겁니다.”이우빈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했다.“작가님이 일하는 거 보는 게 꽤 재밌기도 해서요.”성유리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다 갑자기 이우빈이 뭔가 떠오른 듯 물었다.“맞다, 재국 형님이 오후에 라이브 방송을 잡아놨는데 작가님도 같이하실래요?”“전 괜찮...”“이번 신작 영화 관련해서 팬들이랑 얘기할 건데 제가 대본을 보긴 했지만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거든요. 작가님은 확실히 알고 계시죠?”“저도 잘 몰라요. 그리고 저 라이브 방송 안 할 거고요.”“그렇지만...”이우빈이 뭐라고 더 말하려던 순간,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성유리는 갑자기 몸이 굳었다.마치 자신이 잘못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까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우빈과 거리를 두고 있었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실례합니다, 성유리 씨 계십니까?”낯선 목소리에 성유리는 긴장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러나 이우빈이 먼저 나서서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던 건 배달
성유리는 컵을 한 번 힐끗 보기만 해도 이우빈이 뭔가를 오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자신의 상태를 굳이 설명하기도 난감했다.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점심도 안 드셨던데 뭐라도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매니저더러 시켜드리라고 할까요?”“괜찮아요. 전 그냥... 배가 별로 안 고파서 그래요.”“그래도 굶으시면 안 됩니다. 밥은 꼭 챙겨 드셔야죠.”이우빈은 굴하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면서 휴대폰 갤러리를 열어 성유리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이거 보세요, 어제 유재국 형님이 드셨던 건데 꽤 맛있어 보이지 않아요?”“죄송하지만 전... 감독님이 체중을 더 감량해야 한다고 해서 요즘 다이어트식만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추천은 못 해 드리겠어요.”“아니, 정말 괜찮아요. 지금은 별로 안 먹고 싶어서...”“그럼 그냥 시켜놓겠습니다. 입맛이 없어도 조금이라도 드셔야 하니까요.”이우빈은 성유리가 거절할 틈도 없이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리고 마치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 매니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뭔가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남자는 성유리를 한 번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이우빈 씨, 유재국 씨께서 계속 찾고 계십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시면 한 번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오랜 시간 인기 스타로 활동해 온 이우빈이 이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그렇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매니저를 향해 손을 휙 내저었다.매니저는 뭔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결국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나갔다.“자, 빨리 드셔보세요.”그리고 이우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활짝 웃으며 음식을 성유리 앞에 밀어놓았다.워낙 적극적인 태도에 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음식을 받아들었다.이우빈이 시킨 건 이 지역 특유의 비빔면이었다.고소한 참깨와 땅콩 소스가 올려져 있었는데 고추기름은 따로 곁들여져 있었다.“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