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야?”성유리가 전화를 받자마자 박한빈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바로 물었다.“병원이요.”성유리는 박한빈을 속일 생각이 없었기에 솔직하게 대답하자 수화기 너머 그는 잠시 침묵했다.“전 일이 있어서 먼저 끊을게요.”그녀는 박한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성유리가 병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을 때, 안에 있던 두 사람은 대화를 하고 있지 않았다.주춤거리던 성유리는 어색함을 무릅쓰고 먼저 입을 열었다.“저 정우 바래다주고 왔어요.”“어... 그래.”류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고마워.”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저 방금... 일부러 몰래 들으려던 건 아니었어요. 정말... 죄송해요.”“괜찮아. 우리도 네가 들으면 안 될 말을 한 게 아니거든.”사민혁은 얼굴에 미소를 띤 채로 되묻기까지 했다.“아마... 없겠지?”“없어요. 없어요!”성유리가 손까지 내저으며 대답하자 류수미는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먹을래?”그러다 깎고 있던 사과 하나를 성유리에게 건네주며 물었다.“저... 제가 혼자 깎아 먹을게요.”류수미가 직접 깎은 사과를 넙죽 받아먹기 어색했던 성유리는 거절할 마땅한 이유도 떠오르지 않아 결국 이 한마디만 뱉었다.사과를 건네던 류수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성유리는 허락을 맡은 것 마냥 자리에 앉았다.뭐든지 빠릿빠릿하게 하는 것이 습관이 된 성유리는 사과를 손에 들고 칼질 몇 번 만에 깨끗하게 껍질을 다 깎았다.사민혁은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더니 감탄했다.“딱 보니까 평소에 이런 거 잘했구나. 아주머니와는 달리. 봐라, 아주머니가 깎은 사과.”그의 말에 류수미는 남편을 째려보며 반박했다.“그럼 드시지 마세요.”두 사람의 사이는 늘 좋았다. 잉꼬부부라고 해도 될 정도로.중간에서 둘의 모습을 보던 성유리는 긴장했던 마음이 서서히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류수미는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맞다, 아까 이미 들었다고 했지? 그럼 넌 내
박한빈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성유리를 자신의 뒤로 살짝 끌어당겼다.“연정우 씨를 두 분이 어떻게 보든, 좋게 평가하시든 상관없지만 성유리는 이제 제 아내입니다.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죠.”류수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얼어붙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서둘러 중재하려고 나섰다.“사모님, 죄송해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그러면서 박한빈을 흘깃 째려보며 말했다.“사모님께서 농담하신 거 몰라요? 얼른 사과하세요.”“사과는 됐어.”성유리가 박한빈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류수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유리야, 생각해 보니 방금 박한빈 씨가 한 말이 틀리지도 않아. 이 일은... 확실히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는데 괜히 참견했네.”그녀는 얼굴을 살짝 돌려 박한빈을 보며 말을 이었다.“의사도 말했지만 제 남편은 지금 충분한 휴식이 필요해요. 직접 이렇게 찾아와주신 마음은 충분히 알았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 주세요.”아까완 달리 류수미의 얼굴은 훨씬 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성유리는 뭔가 더 설명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오히려 이 상황을 반겼다는 듯 더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류수미가 추가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 누워 있는 사민혁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후 바로 성유리를 이끌고 병실을 나섰다.단 한마디도 더 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그렇게 병실에서 끌려 나오듯 따라 나온 성유리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다.“잠깐만요, 박한빈 씨! 제가 기다리라고 했잖아요!”그제야 멈춰 선 박한빈이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봤고 그녀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따져 물었다.“대체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내가 뭘?”박한빈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설마 지금 나한테 따지는 거야?”“이건 오히려 내가 너한테 물어야 할 질문 같은데?”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만약 내가 방금 거기 들어가지 않았다면 너는 뭐라고 대답할 생각이었어?”“설마... 너도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갑자기 조용해졌다.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침묵을 견디기 힘들었던 박한빈이 무언가 더 말하려던 찰나,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뭐라고?”뜻밖의 질문에 박한빈은 순간 멍해졌고 무심결에 되묻고 말았다.그러나 성유리는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박한빈 씨 눈에는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제가 얼마나 이성 없이 굴어야 그런 선택을 하겠어요?”성유리는 겉으로는 차분해 보였지만 목소리에는 분명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그제야 박한빈은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아까 제가 병실에 도착했을 때 연정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요?”성유리가 다시 물었다.“뭐라고 했는데?”“박한빈 씨가 일부러 하나 씨 아버지가 편찮으시단 걸 저한테 숨겼다고 하더라고요.”성유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계속 말했다.“하지만 저는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했죠. 저는 박한빈 씨를 믿는다고.”그녀는 박한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그런데 이게 박한빈 씨가 제 신뢰에 대한 보답인가요?”“아니야, 그게 아니고...”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박한빈이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성유리는 손을 들어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거기 서 계세요.”단호한 태도에 박한빈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이내 성유리는 그를 한 번 흘끗 바라보더니 곧장 뒤돌아 걸어갔고 그 속도는 무척 빨랐다.박한빈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성유리의 모습은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그는 급히 성유리를 뒤따라갔다.하지만 병원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성유리가 탄 차는 사라진 뒤였다.결국 박한빈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실버 포레스트로 돌아갔다.그런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깨달은 사실 하나, 성유리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박한빈은 순간적으로 불안감이 엄습했다.급히 도우미들에게 물어보니 그들은 성유리가 아예 집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한 통 걸 때마다 곧바로
하늘이의 맑은 목소리는 어쩐지 약간 남의 불행을 즐기는 듯한 기색마저 띠고 있었다.분명, 딸은 부모의 가장 든든한 존재라 하지 않던가?그런데 하늘이는 대체 어느 쪽인 걸까?박한빈은 그 자리에 서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한편, 성유리는 방에 스스로를 가둔 채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건 저녁 식사 때가 되어서였다.말을 아낀 채 식사하는 내내, 단 한 번도 박한빈을 쳐다보지 않았다.식사가 끝나자 박한빈은 그제야 기회를 잡아 성유리에게 먼저 물었다.“이따 나랑 같이 집으로 돌아갈 거야?”“아니요.”망설임 없이 돌아온 단호한 대답에 박한빈의 표정이 굳어졌고 곧장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그러나 성유리는 그보다 먼저 박한빈의 손을 뿌리쳤다.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는데 순간, 김서영이 입을 열었다.“그만하고 우선 돌아가는 게 좋겠다.”차분한 목소리가 박한빈을 멈춰 세웠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김서영을 보며 말했다.“어머니.”그러나 김서영은 박한빈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성유리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마침 내일 주말이잖니. 하늘이도 학교 안 가는 날이고... 너희 둘이 여기서 이틀 정도 쉬어가는 게 어떠니?”그리고 다시금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너는 회사 일로 바쁘잖아. 일단 돌아가도록 해.”결국 박한빈은 억지로 ‘쫓겨나듯’ 이곳을 떠났다.하늘이 역시 그런 박한빈을 달갑지 않게 대하는 듯했다.하지만 밤이 되어 성유리가 아이를 재우던 중, 하늘이는 갑자기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 진짜로 화난 거야?”그 질문에 행동을 멈춘 성유리는 이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녀의 미소에 하늘이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했다.“역시 그럴 줄 알았어. 엄마가 진짜 화난 건 아니구나.”“응?”“엄마가 진짜 화났다면 바로 나를 데리고 바로 경운시로 갔겠지.”그 말을 듣고 나서도 성유리는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결국 성유리는 아이의
“한빈 씨가 저랑 싸울 사람인 것 같나요?”성유리의 반문에 김서영은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은 없네.”그러면서도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하지만 그 애 성격상 가끔은 사람 속 뒤집는 말을 할 수도 있어. 그래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라면... 그럴 리 없을 텐데?”성유리는 그 말에 대답 대신 시선을 살짝 돌리더니 잔을 들어 한 모금 더 마셨다.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사실 저는 화난 것도 아니에요.”“오?”“그냥... 보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성유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화가 난다기보다는... 너무 답답해요. 저에 대한 그 사람의 불신이.”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저는 도대체 어떤 모습을 보였기에 박한빈 씨가 그렇게 오해한 걸까 싶어요. 대체 무슨 이유로 제가 고작 남이 하는 몇 마디 말에 흔들릴 거라고 생각했을까요?”김서영은 이미 박한빈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터였다.그럼에도 다시금 성유리의 입에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나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그녀의 가벼운 웃음에 성유리는 더욱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김서영을 바라봤다.“네가 뭘 잘못했을까 고민할 필요 없어.”김서영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네 잘못이 아니라 그 애 스스로의 문제야.”“걔가 널 믿지 않는 게 아니야. 단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거지.”“네가 너무 소중해서 혹시라도 잃을까 봐 불안한 거야. 그래서 계속 확인하고 싶어 하고 스스로 선택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서는 거지.”그녀의 말에 성유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김서영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잔을 채워주며 계속 말했다.“아무튼 괜찮으면 된 거야. 결국엔 둘이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해결될 테니까.”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적어도 이틀 정도는 걔가 좀 불안해하면서 지내게 내버려둬.”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녀의
김서영은 그날 밤, 성유리와 한참을 이야기했다.처음 그녀가 술을 함께 마시자고 했을 때만 해도 성유리는 그녀가 박한빈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줄 알았다.하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오히려 박한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었다.이야기에 빠져들던 그녀는 급기야 그의 사진첩까지 가져왔다.그 사진들을 보면서 성유리는 점점 깨달았다.박한빈의 성격은 단순히 박씨 가문의 영향만이 아니라 타고난 면도 있었다.다른 아이들의 돌사진이나 유치원 사진 속 모습은 활기차고 장난기 넘쳤지만 박한빈은 언제나 똑같은 표정이었다.지금과 다름없이 어린 시절의 그도 마치 현재의 모습이 축소된 듯한 느낌이었다.그렇게 이야기와 사진을 주고받다 보니 성유리는 원래 이 대화를 왜 시작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였다.결국, 둘은 박한빈에 대해 이야기하며 와인 두 병을 비웠다.다음 날 아침.잠에서 깬 성유리는 머리는 아프지 않았지만 정신이 여전히 몽롱했다.몸을 돌리는 순간, 손가락 사이에 박한빈의 어린 시절 사진이 끼어 있는 걸 발견했다.사진 속 그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 정색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던 그녀는 조용히 그것을 옆에 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집 안은 평소와 똑같이 조용했다.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도우미가 다가와 김서영이 이미 하늘이를 데리고 마장으로 갔다고 알려주었다.그녀는 김서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미처 말을 꺼내기 전에 하늘이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엄마! 내 말 보러 와!”그제야 성유리는 아직 하늘이의 말을 본 적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그래, 지금 갈게.”“그럼 내가 운전사를 보낼게.”김서영이 대답했다.“길이 좀 복잡하기도 하고 네가 처음 가는 곳이라 헷갈릴 수도 있어.”성유리는 시계를 힐끗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럼 옷 좀 갈아입고 갈게요. 준비할 거 있어요?”“아니, 다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냥 와.”김서영의 말엔 전혀 의심할 만한 글이 없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꿈에서조차 예상하지
“보아하니... 아직 제대로 달래주지 못한 것 같네?”박한빈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김서영은 옆에서 불 건너 강 구경하는 식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어머니는 대체 누구 편입니까? 어머니는 제 친어머니잖아요!”보다 못한 박한빈이 입술을 오므리다 김서영에게 말했다.“당연히 그건 알지.”김서영은 침착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그런 말이 있잖니? 혈연관계를 토대로 사람을 도우면 안 된다고.”“그러십니까? 전 또 어머니께서 이 상황을 즐기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박한빈의 평온한 목소리에 김서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아니야. 게다가 나도 오늘 너한테 기회를 만들어주지 않았니?”김서영의 물음에 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앞에 있는 사람을 쳐다만 봤다.그 시각, 성유리와 하늘이는 말 위에 타고 있었는데 승마장 직원들이 앞에서 두 사람을 데리고 달리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김서영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 박한빈을 보며 계속 말했다.“네.”비록 빠르게 대답했지만 그의 신경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무슨 일 있니?”김서영은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느껴 다시 물었다.“아니요.”하지만 그의 대답을 김서영은 믿지 않았고 미간을 점점 더 찌푸려갔다.조금 망설이던 박한빈은 낮은 소리로 김서영에게 먼저 말했다.“사실 뭐 별 건 아닙니다. 다른 지사에 일이 좀 생긴 것뿐이죠.”“처리하기 힘든 일이니?”“네. 제가 직접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대화를 나누던 박한빈은 손목에 있는 시계를 쓱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좀 잇다가 여기서 바로 공항으로 떠날 겁니다. 요 며칠... 유리네는 어머니 쪽에서 지내게 해주십시오. 제가 돌아오면 데리러 오겠습니다.”박한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발신자는 비서였다. 그는 박한빈에게 지금 어서 공항으로 출발해야 한다며 보챘다.“저 먼저 가보겠습니다.”박한빈은 시선을 성유리에게서 떼지 못했고 그걸 김
“됐어요.”성유리는 재빨리 대답했다.“그 사람이 저한테 직접 말 안 했으니까 제가 묻는 게 아무 의미도 없을 거예요.”김서영은 성유리가 말한 ‘문제’가 이것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박한빈을 위해 몇 마디 해주려고 입을 뻥긋거렸다.그러나 성유리는 이미 하늘이의 손을 잡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가자. 우리 저기 가서 좀 쉴까?”하늘이는 말을 신나게 탄 바람에 얼굴까지 새빨갛게 변했다. 그래서 성유리의 말에 아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김서영은 떠나가는 둘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몰래 핸드폰을 꺼내 박한빈에게 문자를 전송했다....[나 지금 도한시야. 이쪽 일은 한 사흘 동안 처리해야 될 것 같아. 요 며칠 너랑 하늘이는 엔젤 월드에서 지내. 내가 데리러 갈 테니까.][공항 도착했어.][지금 이륙 준비하고 있대.][비행기에서 내렸어. 지금 호텔가는 길이야.]...이건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보낸 문자들의 일부였다.문자 빼고 사진들도 몇 장 보냈고 가는 길 내내 성유리에게 자신의 일정을 보고해 줬다.성유리는 끊임없이 새 문자가 전송되는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만 보다 결국 박한빈에게 답장했다.[알겠어요.]그녀는 자기가 답장을 하면 박한빈이 가만히 있을 줄 알았지만 예상은 아예 빗나갔다.게다가 성유리의 답장을 받자 그는 신이 난 건지 더욱 많은 문자를 보내왔다.어느 호텔에 묵는지, 방은 어떤 구조인지, 사흘 동안 스케줄은 무엇인지까지 하나하나 성유리에게 전송했다.결국, 성유리는 박한빈을 차단해 버렸고 그녀의 반응에 그는 더 이상 쓸데없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당연하게도 아마 박한빈이 너무 바빠 시간이 없었을 수도 있다.필경 성유리는 뉴스에서 이번 일에 관한 소식을 많이 접했으니까.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초기 단계에서 기중기가 고장 나 아래에 있던 사람 한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현장에는 사고 당시에 영상을 찍은 사람도 있었기에 짧은 영상은 인터넷에서 빠르게 퍼졌다.그리고 사람들은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을 개발상에게 돌렸고
“미안해요. 제가 괜히...”아라가 막 사과하려는 찰나, 그들 등 뒤에 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성유리의 코앞에 손가락을 겨누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냉혈하고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아직 상황 파악도 못 했을 때 알리는 이미 그녀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지금 아라 씨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안 보이십니까?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형한테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라 씨가 전에 당신 목숨까지 살려줬다는 거, 잊었어요?”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자신이 엄청난 배신을 당한 피해자인 것처럼 절절했다.성유리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차분하게 되물었다.“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왜 당신은 안 도와주는 거죠?”“전...”알리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으니 곧 정신을 차리고 되받아쳤다.“당신들 일에 제가 왜 끼어들어야 합니까? 전 돈이 남아도는 줄 알아요?”“그 사람은 당신 친형이잖아요. 당신이 끼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그리고 당신이 금성에 온 것도 이 일 때문 아닌가요?”성유리는 다툴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이성적으로 말했을 뿐이었다.오히려 어조는 담담했고 눈빛엔 약간의 의문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알리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했고 성유리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아라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에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이 일은 아라 씨가 가족들과 먼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맞다고 생각해요.”아라는 말이 없었다.성유리도 더 머물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섰다.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알리가 그 뒤를 따라 나올 줄은.처음엔 또다시 성유리를 욕하려는 줄 알았지만 예상과 달리 알리는 비웃듯 한마디를 툭 던졌다.“위선자, 가식덩어리!”알리의 말을 성유리는 아예 못 들은 척 그냥 걸음을 옮겼다.자신이 무시당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리
아라와 성유리는 금성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문을 막 들어서자 성유리는 아라 목에 감겨 있는 스카프를 보고 바로 눈치를 챘다.“그건... 왜 그래요?”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스카프를 풀었고 그 아래로는 뚜렷하게 남은 손자국이 드러났다.이미 이틀이나 지났건만 그 자국은 여전히 선명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그리고 그 자국은 에릭이 당시 얼마나 강하게 목을 졸랐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였다.선명하게 남은 자국을 본 성유리의 얼굴도 바로 굳어졌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미안해요. 원래 유리 씨한테 이런 말 하려고 한 건 아닌데 솔직히 지금...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데가 없어서...”말하는 아라의 눈가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저희 가족은 제 처지를 전혀 이해 못 해요.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죠. 에릭 씨한테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말을 하는 걸 두려워하고요. 그들한테 중요한 건 제가 에릭 씨랑 빨리 결혼해서 뭔가를 얻는 것뿐이에요.”“제가 행복한지, 이 결혼을 원하는지...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아라가 처한 상황을 성유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며칠 전... 제가 에릭 씨한테 이별 통보를 했고 그 사람도 동의했어요.”아라의 말에 성유리는 놀랐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잘됐네요. 그럼 이제...”하지만 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런데... 그 사람이 저희 부모님께 이미 결혼 자금으로 돈을 송금했거든요. 에릭 씨는 제가 파혼을 원한다면 그 돈을 전액 돌려줘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 돈은 이미 부모님이 다 써버렸고... 지금 제가 그 돈을 달라고 해도 당연히 안 줄 거고...”여기까지 말했을 때 아라의 의도는 너무도 명확했다.성유리가 아직 입을 떼기 전에 아라가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유리 씨가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아라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
아라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손으로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벗어나려 했다.하지만 에릭은 아라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붙잡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그렇게 아라의 숨이 점점 끊겼고 결국 마지막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아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지금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느낀 건... 허무함뿐이었다.설마 자기 인생이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죽는 걸로 끝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렇지만 이게 또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귀찮은 일들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어차피 집에서는 파혼을 받아들일 리 없었고 에릭의 태도 역시 결혼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쪽은 아닌 듯했다.그렇다고 아라는 평생을 에릭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죽는 것도 어쩌면 자신에게는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에릭이 갑자기 손에 힘을 풀었다.공기가 한순간에 밀려 들어오며 폐를 터뜨릴 듯 부풀게 만들었다.아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목을 부여잡은 채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숨을 너무 오래 참았던 탓에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 되었고 아라의 모습은 더없이 초라하고 처참했다.그러나 에릭은 힘들어하는 아라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냉정하게 말했다.“파혼하고 싶다고? 좋아. 해.”예상치 못한 에릭의 대답에 아라는 움찔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대신, 내가 준 1억 돌려줘.”...“알리!”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알리는 발걸음을 뚝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이내 다가오는 여자를 본 순간,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한테 제 이름을 부르라고 했습니까? 말해두는데 당신이 설령 우리 형이랑 결혼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절대 당신 같은 여자를 형수로 인정하지 않을 거고 우리 부모님도 당신을 받아들일 일 없으니까.”알리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
아라는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뺨에 있던 붉은 자국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하얀 피부 위에 눈에 띄게 남아 있었다.에릭은 그 시각 호텔에 있었다.그는 아라를 보고 처음에는 잠시 멈칫하다가 금세 눈빛이 다시 싸늘하게 식더니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이런 거야?”아라는 에릭의 반응을 보고 알았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소유물이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했다면 예전에 자신이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을 리 없었고 술집에서 자신에게 술을 퍼붓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행동들이야말로 에릭이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증거였다.지금 에릭이 아라의 얼굴의 붉은 자국에 대해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무언가가 손을 대었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이것은 아라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그녀는 자기가 전혀 무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에릭을 속인 것도 사실, 자신이 자발적으로 한 일이었다.그때는 단지 주성운의 병원비를 빨리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었다.아라는 자신이 잘못된 방법을 쓴 것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에게도 충분히 마음을 다했다고 생각했다.결국 그것은 하나의 거래였으니 아라는 에릭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어차피 에릭은 전에 다른 여자들에게도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지 않나?그저 자신도 그 많은 여자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그러나 아라는 한 가지를 깜빡하고 있었다.자신의 무심함이 오히려 에릭의 소유욕과 승부욕을 자극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결국 아라의 모든 예상을 뒤덮고 상황은 이렇게 된 것이다.“누가 그랬는지 말해줘.”에릭이 다시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이미 짜증이 섞인 듯 들렸고 미간을 찌푸리며 아라를 바라보고 있었다.“저희 가족이요.”아라가 순수히 대답했지만 에릭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에릭은 자신이 이미 결혼 예물까지 보냈으니 아라는 이미 자신의 소유물
“싫어요.”성유리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박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왜?”“그때 찍은 사진 안 예뻐요.”“그럼 다시 찍자.”“우리 결혼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이제 와서 다시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나는 의미 있다고 보는데.”“당신 원래 사진 찍는 거 싫어하잖아요?”성유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그의 속내를 간파한 듯 미소를 지었다.“박한빈 씨, 뭐든지 남이 가지고 있는 건 다 가져야겠어요? 애처럼 굴지 마세요.”박한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 손에 들고 있던 청첩장을 옆으로 휙 던졌다.그리고는 외투를 거칠게 벗어던졌다.성유리는 그 행동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깨달았고 이내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찍어요. 다시 찍자고요. 저희 내일 당장 가서 찍어요.”...아라는 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로 집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에릭이 보낸 200억이나 되는 예물이 이미 입금되었다.그 돈으로 아라의 가족은 즉시 새집을 샀고 아버지는 새 차까지 뽑았다.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찾아왔다.거실에서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내가 뭐랬어? 아라는 딱 봐도 크게 될 애라고! 해외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좋은 신랑감을 데려와?”“그러게 말이야. 형, 이런 사위가 있으면 노후 걱정 끝난 거 아니야?”“하하, 난 그냥 우리 딸 미래를 위해서 한 거지!”아라의 아버지는 흡족한 듯 계속 말했다.“솔직히, 난 우리 딸이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싫어했어. 그래서 가까운 데서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 외국인인 데다 너무 잘해주니까 어쩌겠어? 거절할 수가 없지!”“거절? 그런 걸 거절하는 게 바보지!”“맞아! 이렇게 좋은 결혼... 남들은 꿈도 못 꾸는걸!”“근데 말이야, 아직 형 사위를 직접 본 적이 없네? 이왕 다 모인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할까?”“식사는 무슨,
성유리가 마련한 집은 작지만 아늑했다.하지만 층이 낮아 창가에 서도 제대로 된 풍경이나 달빛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박한빈의 팔을 힘주어 움켜쥐었는데 목소리는 이미 살짝 쉰 상태였다.사실 성유리는 박한빈의 화가 전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조금 전 보였던 불쌍한 척과 반성하는 태도는 결국 밀고 당기기의 한 수였을 뿐이었다.성유리는 다 봤다.손등의 작은 상처 외엔 몸 어디에도 멍 하나 없었다.심지어 그 상처도 벽에 일부러 긁어서 만든 걸지도 몰랐다.지금의 박한빈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그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성유리가 안심하고 자신을 집에 들여보내는 것.일단 문을 열어준 순간, 주도권은 박한빈 것이었다.그리고 그는 충분히, 아주 충분히 성유리에게서 ‘보상’을 받아 갔다.바로 지금처럼.성유리는 이미 여러 번 머리까지 저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하지만 박한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점점 더 거칠게, 센 힘으로 성유리를 탐했고 그녀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성유리는 그날 밤 박한빈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수없이 내뱉었다.다음 날 아침, 스스로 했던 말을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반면, 박한빈은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집 괜찮네. 앞으로 종종 와야겠다.”그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박한빈이 떠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는 것이었다.그날 밤, 정말 박한빈과 에릭이 싸웠는지는 성유리도 알 수 없었다.다만, 확실한 건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의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었다.그리고 에릭과 아라의 결혼 준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성유리는 이미 청첩장을 받아 두었는데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라였다.청첩장 안에는 그들과 함께 찍은 웨딩사진도 들어 있었다.사진 속 아라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에릭은 그녀의 뒤에 서서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흔한 웨딩 촬영 포즈였지만 성유리는 어딘가 모
갑작스럽게 터진 박한빈의 웃음에 성유리는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마치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박한빈을 가만히 쳐다봤다.“너 이제 안 화났어?”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화가 난 상태여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심지어 집에 가는 것도 싫다고 선언한 상태였다.방금 박한빈이 괜히 상기시켜 주는 바람에 다시 감정을 끌어올리려던 순간,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오늘은 내가 잘못했어.”뜻밖에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그의 태도에 성유리는 당황했다.“내가 널 너무 가뒀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네가 하면 안 된다고 말한 것도 잘못이야.”“난 그냥 네가 너무 걱정됐어. 누군가 너를 속이거나, 혹시 또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진심을 다해 말하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그녀 또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저도 잘못했어요.”“네가 뭘 잘못했는데?”박한빈은 성유리를 쓱 밀어내곤 그녀와 눈을 맞췄다.그 태도가 너무 명확했기에 성유리가 그의 의도를 모를 수 없었다.‘유도신문 같은 거였구나. 결국 나한테서 이런 대답을 들으려던 거였어.’하지만 이미 말을 꺼낸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사실 저도 그런 곳을 좋아하진 않아요. 그냥... 아라 씨가 너무 불쌍해서 같이 간 거고요.”성유리는 자신이 말한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불쌍하다는 말, 그 말을 내뱉는 순간부터 성유리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 있었다.집안이 비슷해야 잘 어울린다는 어른들의 말과 사랑하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 정확했다.하지만 그런 문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발생하기 마련이다.마치 아라와 에릭처럼.그들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그리고 아라의 부모는 에릭을 마치 ‘입장권’처럼 여겼다.결혼을 위한 거액의 지참금조차도 그들에게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었다.그 결과, 아라는 점점 외딴섬처럼 고립되었다.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단순한 싱글 파티라는 명
성유리가 산 집은 사실 그리 크지 않았다.비록 그녀가 받은 저작권 수익이 적지는 않았지만 땅값이 비싼 금성에서 겨우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 계약금 정도를 마련할 수 있을 뿐이었다.이 집에 박한빈은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다.그리고 성유리는 알았다.그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는걸.하지만 박한빈이 모르는 사이 성유리는 이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잘 꾸며 놓았다.필요한 생활용품들은 모두 근처 마트에서 산 터라 세면을 마친 성유리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공간이 생겼다.그러니까 마음이 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눈을 감고 한참 누워 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어쩐지 어색했다.매일 밤 박한빈과 함께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혼자 있는 침대가 이렇게 넓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게다가 새로 들여놓은 가구에서는 아직도 약간의 냄새가 났다.결국, 한참을 누워 있던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던 것은 아니었다.방금 술집 앞에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와서 돌아가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그저 잠이 안 와서 아래층 편의점에 가서 뭐라도 사 오려고 했을 뿐이다.하지만 문을 연 순간, 그 앞에 서 있는 박한빈과 마주쳤다.박한빈은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아직 피우던 상태였는데 성유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듯 급히 담배를 비벼 끄며 변명했다.“나... 지금 막 다시 피우기 시작했어.”그리고는 얼른 담배를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왜 나왔어?”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그렇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또 다른 걸 깨닫고 다시 물었다.“아니,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죠?”“관리실에 알아봤어.”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사실 박한빈에게 이걸 물어본 게 실수였다.여기는 금성이다.박한빈이 모르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 금성.아마 성유리가 이 집을 사자마자 관리사무소에서 바
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는 이미 혼자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어디 가려고?”그는 급히 따라붙으며 물었다.“이제 집에 가야죠.”“나...”“당신이랑 같이 안 가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전 제집으로 갈 거예요.”그녀가 말하는 집은 저작권 수익으로 스스로 마련한 집이었다.박한빈은 한때 성유리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굳이 네 명의로 집을 살 필요 있어? 내가 가진 부동산이 얼마든지 있는데? 네가 원하면 하나 넘겨줄 수도 있어.”하지만 성유리는 끝까지 자신의 명의로 집을 장만했다.박한빈은 그때는 그녀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성유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예전에는 둘이 싸우면 김서영에게 갔었다.하지만 김서영이 아무리 그녀를 아낀다 해도 결국 박한빈의 어머니였다.이제는?성유리는 더 이상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술이 취한 상태라 운전을 할 수 없었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박한빈은 차를 몰고 따라가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술집 입구에서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급하게.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뻔했다.‘쟤가 또 난동을 부렸겠지.’성유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던 박한빈은 짧은 고민 끝에 술집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역시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방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에릭은 테이블이며 술병이며 모조리 집어던졌고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었다.그리고 소파 한쪽에 앉아 있는 아라는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누가 봐도 에릭이 술을 끼얹은 것이었다.모든 분노를 쏟아낸 에릭은 이제 아라를 데리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술집 관계자들이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에릭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당장이라도 난폭하게 부딪칠 듯한 기세였다.그 순간, 박한빈이 앞으로 나섰다.그는 술집 매니저에게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