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빈의 검사 결과가 곧 나왔고 그 결과는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결과를 본 성유리는 편히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없었다. 어제 그와의 대화는 결코 순조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한빈이 떠날 때 성유리는 분명 분노에 휩싸인 그의 표정을 보았었다. 그가 동원한 의료진과 그의 관계는 분명 아주 돈독해 보였으니 지금쯤 박한빈도 이미 결과를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까지도 성유리에게 연락이 없었다. 성유리는 휴대폰을 손에 꼭 쥔 채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먼저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신호음이 한참이나 울렸고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성유리는 그가 전화를 받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이내, 수화기 너머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박한빈의 목소리는 원래 성유리에게 익숙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이 떨려와 휴대폰을 더 꽉 쥐었다. 성유리는 입술을 몇 번이나 움찔거린 끝에 간신히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저예요.” “알아.” 박한빈은 빠르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성유리의 심장을 꽉 움켜쥐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녀는 힘들었다. 입술을 꾹 다문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조심스레 물었다. “결과 나왔어요. 박한빈 씨도 봤죠?” “응.” “그럼 언제쯤...” “성유리, 나 마음 바꿨어.” 그는 그녀의 말을 뚝 끊었다.사실 박한빈의 이런 태도 또한 성유리가 예상했던 바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이 들어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고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성유리는 이를 악물며 천천히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생각해 봤어. 네 눈에 내가 이렇게 비열하다면 내가 아무 문제 없이 수술을 받아주는 건 네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겠지?” “박한빈 씨, 저는...” “변명하지 마. 어제 네
이 층은 최고급 스위트룸이 있는 층이었다.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했고 왠지 모를 스산함도 감돌았다. 성유리는 초인종을 누른 뒤 고개를 숙이고 자기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에서만 지내던 최근, 그녀의 하얀 운동화에는 어느새 흙이 묻어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딛고 있는 고급스러운 브라운 카펫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여기 지금 성유리가 서 있는 이 세상은 그녀의 세계가 아니었다. 성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알 수 없었다. 몇 초일 수도, 아니면 아주 긴 십여 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 시간이 한 세기처럼 길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손발이 저려오기 시작할 때쯤, 마침내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러나 문 너머의 사람을 본 순간, 성유리는 당장이라도 돌아서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옆에 늘어져 있던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고 커다랗게 뜬 눈으로 그를 살짝 바라봤다. 박한빈은 방금 욕실에서 나온 상태였는지 허리에는 흰 수건 하나만 걸려 있었고 머리카락은 아직 마르지 않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물방울은 하얗고 탄탄한 가슴을 타고 흘러내려 복근을 따라 아래로 이어졌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은 앞머리가 길어 눈을 거의 덮을 정도였지만 그 안의 깊고 어두운 눈빛은 성유리에게 똑똑히 보였다.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준 박한빈은 성유리를 본 체도 하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몇 걸음 걸어가던 박한빈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박한빈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먼저 물었다. “무슨 뜻이야?” 그의 말에 성유리는 순간 숨이 가빠졌고 박한빈에게 되물었다. “뭐가 무슨 뜻이에요?” 성유리의 말을 들은 박한빈은 웃음을 터뜨렸다. “성유리, 네가 지금 나한테 질문을 하고 있어?” 그녀는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내 박한빈은 벽에 몸을 기
금세 담배 한 대를 다 피운 박한빈은 깊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면 피울수록 박한빈의 기분은 더욱더 뒤숭숭해졌다. 욕실 안에서 끝도 없이 씻고 있는 성유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결국 담배를 꺼버리고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박한빈이 손가락으로 문을 살짝 두드리자 또랑또랑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5분 줄 테니까 나와.” 말을 마친 박한빈은 바로 옆에 있는 침대에 앉더니 시선을 욕실 문에 고정했다. 그러자 안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마침내 멈췄다. 성유리는 마치 안에서 휴대폰으로 시간을 재고 있었던 것처럼 정확히 5분이 다 되어가는 순간, 문을 살며시 열었다. 그녀의 가운으로 자신의 몸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고 이를 본 박한빈은 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꼭 이래야 해? 네 몸에서 내가 못 본 데가 어디 있다고?” 성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땅바닥만 쳐다봤고 가운을 꽉 움켜쥔 손가락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박한빈은 지금 그녀가 폭발하기를 바랐다. 무엇이든 던지거나, 욕을 해도 되고 심지어는 자신을 물어뜯기라도 하길 바랐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쭈뼛거리던 성유리는 몸에 걸친 가운을 한 번 더 단단히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불 끄면 안 될까요?” “뭐라고?” “불... 끄고 싶어요.” 성유리의 목소리는 아주 낮은 데다가 떨리기까지 했다. 마치 박한빈이 너무 두렵다는 듯이. 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쭉 뻗어 그녀를 단숨에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성유리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의 몸은 이미 침대 위에 눕혀졌고 부드러운 매트리스가 그녀의 등을 받치자 이내 그녀의 눈앞에는 박한빈의 잔뜩 찌푸려져 있는 얼굴이 보였다. 그는 몸을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길게 늘어진 앞머리가 성유리의 뺨을 스치자 그녀는 더욱 떨리기 시작했다. “끝까지 연기하려는 셈이야? 응?”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비웃으며 물었다. “내 아이까지 낳아준 몸인
박한빈은 언제나 어딜 가도 주목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성유리는 잘 알고 있다. 예전에도, 그리고 얼마 전에도 수많은 여자들이 그의 곁에 머물렀고 심지어 종래로 마트에 발을 들이지 않던 박한빈이 다른 여자와 함께 다니는 모습까지 보았었다. 박한빈이 원하기만 하면 그와 함께 침대에 올라가려는 여자들은 줄을 서 있을 것이다. 늘 인기가 많은 박한빈에게는 성유리를 제외하고도 다른 선택지가 많다. 그리고 자신은 그 많은 선택지 중에서 제일 좋은 선택이 될 리가 없었다. 예전에도 아니었으니 지금은 더더욱 아닐 것이 뻔했다. 그 순간, 박한빈의 몸이 굳어지더니 시선이 성유리의 흉터에 머물렀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시선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고 무슨 원인에서인지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입꼬리를 약간 올려 미소를 짓던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그래서 박한빈 씨는 계속하실 건가요? 확실하세요?”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깊고 어두워 성유리는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녀가 뭔가를 더 말하려는 찰나, 그는 고개를 숙였고 이내 박한빈의 입술이 그녀의 흉터에 닿았다. 부드럽고 섬세한 감촉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안색이 잔뜩 어두워지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단단히 눌러 제압했다. “당신...” 성유리는 뭔가 말하려 애썼지만 박한빈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쳐 하려던 말을 막아버렸다. 이런 감정이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그녀는 이미 잊고 있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사실 성유리는 오늘 박한빈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오늘 밤을 함께 보내면 내일 수술을 받아들일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말을 꺼내지 않은 이유는 박한빈이 끝까지 자신과 사랑을 나눌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유리가 알던 박한빈은 늘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 흉터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니,
“유리 언니? 성유리 씨!” 사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더니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사하나가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며 물었다. “정신이 어디 외딴곳으로 나가 있는 것 같아요.” “나... 괜찮아.” “그런데 다크서클이 왜 이렇게 심해요? 어제는 집에 가서 푹 쉬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병원에서 밤을 새웠을 때보다 더 안 좋아 보이는데?” “그냥... 어젯밤에 잘 못 잤어.” 성유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늘이를 못 봐서 걱정돼서 그런가 봐.” “뭐가 걱정이세요? 여기 이렇게 의사랑 간호사가 많은데. 게다가 의사 선생님도 말했잖아요. 이식 수술만 잘되면 하늘이는 곧 완치돼서 퇴원할 거라고.” 사하나는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그나저나 박한빈 씨는 언제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러 오는데요? 그 말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성유리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는 성유리의 모습을 사하나가 놓칠 리 없었다. “왜 그래요? 설마... 박한빈 씨가 마음을 바꾼 건 아니죠?” “아니야.” “근데 이상하잖아요. 어제도 병원에 안 왔고 오늘도 안 왔어요. 이게 뭘 의미하는 건데요? 검사가 끝난 걸 모를 리 없잖아요. 그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죠? 일부러 잘난 척하려고 그러는 건가? 언니한테 직접 와서 부탁하게 만들려고?”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하나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듯 언성을 높이며 계속 말했다. “미쳤나 봐요! 하늘이가 자기 친자식인데! 언니가 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대한다고요? 이건 완전 고의적인데?”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언니가 무릎 꿇고 빌기라도 바라는 건가요? 아님 자기 앞에서 사죄하면서 참회하라고? 정말...” 사하나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성유리가 그녀를 진정시키듯 입을 뗐다. “진정해.” 사하나와는 달리 성유리는 오히려 차분한
“지금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단지 분풀이일 뿐일 거야.”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말했다. “나에게서 받은 좌절과 실망감을 이제 와서 나에게 되갚아주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제가 보기엔...” “만약 그 사람이 정말로 나를 아직도 좋아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의 일을 가지고 나를 협박하진 않았을 거야.”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 그의 말에 따르고 있는 것도 하늘이가 수술받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야. 이런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러니 사하나, 나와 그 사람은 정말로 끝난 사이야.” ... 어느새 밤이 다시 찾아왔다.솔직히 말해서 성유리는 이 시간이 가장 두려웠다.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박한빈에게서 어떤 메시지가 올까 걱정했고 동시에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어쨌든 박한빈은 아직까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성유리는 왜 박한빈이 전날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뉴스에서는 전날 밤 박한빈이 어떤 연회에 참석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사진 속 박한빈의 옆에는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화장이 조금 달라졌지만 성유리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에 그와 함께 마트에 갔던 여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성유리에게 있어 함께 마트로 향하는 일은 꽤 친밀한 행위로 느껴졌다. 둘이 함께 살지 않는다면 마트에서 함께 필요한 물건을 고르며 자신들만의 공간을 꾸민다는 일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성유리와 박한빈 사이에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박한빈은 항상 바빴다. 그의 옷은 계절마다 고급 맞춤 팀에서 직접 저택으로 보내졌고 생활용품 같은 사소한 물건에 시간을 쓰는 일을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의 낭비라는 것도 박한빈의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었다. 어쩌면 어떤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을 하든 시간 낭비라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
박한빈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성유리가 카드를 받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 들며 말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이번 거래 조건에 대해 먼저 얘기해 보는 게 어때요?” 박한빈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저 성유리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쳐다보았다. “이건 수술 동의서예요. 먼저 서명해 주세요.” 성유리는 차분히 말했다. 지난번 그는 자신이 약속한 적 없다고 했을 때 성유리는 반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행여나 같은 일이 반복이 되는 것이 두려운 성유리는 이번에 준비를 아주 철저하게 했다. 박한빈은 철저한 사업가였으니 결국 눈앞에 놓인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성유리는 동의서 외에도 또 다른 계약서를 준비했는데 그 계약서에는 그들의 관계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계약서에 똑똑히 이런 문구를 적었다.자신이 박한빈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지만 그 조건은 하늘이가 회복되는 기간 동안에만 작용을 한다는 문구.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하늘이가 건강을 되찾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즉시 종료되며 앞으로는 아무런 관련도 없게 된다.] 계약서의 조항은 간단하지만 지나치리만큼 직설적이었다. 이 문서가 만약 언론에 공개되기라도 한다면 둘 모두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성유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거래의 도구로 내놓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박한빈은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조용히 서류만 주시하고 있었다. 짧은 몇 줄의 문장이었기에 그는 이미 내용을 다 읽었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를 바라봤다. “박 대표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제야 박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성유리는
하지만 이내 박한빈은 성유리를 무시한 채 뒤돌아섰다.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당연히 그가 자신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성유리지만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성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성유리가 먼저 말했다. “지난번에 당신을 그렇게 생각했던 건 제 잘못이에요.”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간절함이 더 묻어나 있었다.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아이는 아무 죄가 없잖아요. 제발...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성유리는 행여나 박한빈의 심기를 또 건드릴까 신중히 단어들을 선택했고 그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성유리는 이곳에서 박한빈의 시간을 조금도 빼앗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성유리도 잘 알고 있었다. 박한빈은 사실 그녀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박한빈은 그녀가 무릎을 꿇고 굴욕적이게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기를 바랐다.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그제야 그녀를 똑바로 쳐다봐줬다. 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잡아 억지로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고 그렇게 둘의 눈이 마주쳤다. 성유리의 눈은 약간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에 한층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는 잠시 성유리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야.” 그의 말은 성유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성유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성유리는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붙잡으려는 듯 그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녀는 한동안 마음을 다잡은 뒤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성유리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있었고 그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그녀의 눈빛은 박한빈이 전에 사랑했던 여자의 모습이 조금 담겨있
성유리의 손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예전에도 박한빈에게 손을 댄 적이 있긴 했지만 온전히 박한빈을 향한 악감정 때문에 힘껏 내리친 적은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성유리는 온 힘을 실어 박한빈의 뺨을 쳤다.성유리의 손길에 박한빈의 뺨은 빠른 속도로 붉어졌다.그런 박한빈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성유리가 그를 밀어내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두 사람 이미 찾았어.”그 말에 성유리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그게 정말이야?”“응.”“두 사람 지금 어디 있는데? 하늘이는 괜찮대? 지금 어디 있는 거야?”성유리는 박한빈의 앞으로 달려가며 두서없이 말을 내뱉었다.“왜 나 만나러 안 왔대? 설마 내가 찾으러 안 가서 화났대? 너 뭐 숨기는 거 있지?”“그 두 사람 지금 병원에 있대. 눈사태 날 때 산속 동굴로 피신해서 목숨은 건졌지만 동굴 입구가 거의 막혀 있어서 구조대가 진입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나 봐. 어쨌든 지금 구조돼서 응급실로 실려 갔어.”박한빈은 성유리의 어깨를 꽉 감싼 채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차분하고도 느린 말투에서 어떻게든 성유리를 진정시켜 보려는 정성이 느껴졌다.성유리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아직도 의식은 없다는 거지?”“그래.”“목숨에 아무 문제 없는 건 맞고?”박한빈은 성유리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대답했다.“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줄 거야.”“하늘이 보러 가고 싶어.”성유리의 모습은 조금 전보다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았지만 잔뜩 쉰 목에서는 여전히 거친 소리가 났다.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박한빈이 말했다.“지금 상태가 별로 안 좋은 것 같으니까 내일 가는 게 좋겠어.”“난 지금 당장 보러 가고 싶다고!”방금까지만 해도 진정된 것 같았던 성유리는 다시 폭발하듯 소리를 지르며 박한빈을 밀어냈다.그녀가 문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박한빈이 다시 한번 성유리를 붙잡았다.“알겠으니까 내가 데려다줄게.”“나 혼자 갈 수 있어.”“어느 병원인지는
성유리는 박한빈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의사를 마주한 순간, 박한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바로 알 수 있었던 그녀는 본능적으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박한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성유리의 동공이 겁에 질린 듯 순간적으로 수축하더니 더는 생각하지도 않고 곧장 박한빈을 밀치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부림쳤다.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아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 박한빈 한 사람도 못 당해내던 성유리가 많은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결국, 그녀는 강제로 침대 위에 눕혀졌고 의사는 그녀에게 투여할 진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이거 놔! 박한빈, 이거 놓으라니까! 내가 뭘 하든 너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당장 이 손 놓으라고!”성유리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외쳤다.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는 뭔가를 뚫고 나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곧이어 의사가 준비한 진정제의 바늘이 망설임 없이 성유리의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이 개자식아! 박한빈, 넌 진짜 더럽게 이기적인 새끼야! 내가 하늘이 찾고 싶다는데, 하늘이 찾겠다는데 그걸 네가 무슨 자격으로 막아... 네가 너무 역겨워... 역겨워서 미칠 것 같다고!”성유리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곧이어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약해지더니 몸부림치던 힘도 사라져만 갔다.그렇게 성유리를 잡고 있던 사람들의 손길도 사라졌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그녀를 침대 위로 누르고 있었다.성유리의 말을 듣고 있던 박한빈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래, 마음껏 역겨워해.”“난 그냥... 네가 살아있어만 주면 돼.”살아있어만 달라고?성유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만에 하나 정말 성하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성유리에게는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도, 의미도 없었다.이 모든 게 다 자신의 실수처럼 느껴졌다.이 모든 일이 다 자신의 잘못 같았다.지금 성유리는 그저 성하늘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그런데 박한빈은 대체 왜
성유리는 어딘가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마음의 준비라뇨? 무슨 마음의 준비요? 저는 한빈 씨가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는데요.”“아, 맞다. 하나한테 전화 해봐야겠어요. 하나가 지금 하늘이랑 같이 있을 거예요. 분명히 하나는 하늘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거라고요.”“한빈 씨는 모르겠죠, 하늘이가 착해 보여도 얼마나 장난꾸러기인지.”“하늘이, 금방 걸음마 뗐을 때부터 여기저기 숨는 걸 좋아했어요. 어느 날에는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가 있었는데,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방을 한참이나 뒤졌어요. 결국, 경찰까지 부르고 나서야 침대 밑에 숨어 있던 애를 찾아냈죠.”“그래도 우리 하늘이 정말 착한 아이예요. 제가 그때 너무 놀랐다는 건 아는 건지, 그 후부터는 다시 저 걱정 안 시켰거든요.”“하늘이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정말 약했어요. 자주 아팠고, 열이 날 때는 제가 밤새 끌어안아 줘야 했어요.”“저는 그렇게 하늘이를 계속 안아줬죠. 품에 안겼던 하늘이는 아주 작고 소중했어요. 물론 엄청 피곤했는데, 그래도 저는 너무 좋았어요. 저랑 피가 섞인 아이였고, 제가 아이의 세상이었으니까요.”“하지만 하늘이는 몰랐을 거예요. 제 세상도 하늘이였다는 걸. 저는 정말 하늘이 없으면 못 살아요...”성유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그녀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연락처를 뒤졌다.성유리는 사하나의 연락처를 찾고 있었다.그녀는 사하나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떨려오는 손에 사하나의 연락처를 찾을 수 없었다.“왜 이러지? 하나 번호가 안 나와요.”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물었다.“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하나도 하늘이한테는 엄마랑 다름없는 존재거든요. 계속 연락했었는데, 왜 없지? 한빈 씨...”성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힘을 실어 꽉 끌어안는 박한빈의 손길에 성유리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그런데도 성유리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저 멍하니
성유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새하얀 눈뿐이었다.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러던 중, 성하늘의 목소리가 들렸다.“엄마, 나 여기 있어. 빨리 나 찾아봐!”즐거운 듯한 아이의 목소리가 성유리의 이성을 돌려놨다.맞다... 성유리는 성하늘을 찾아야 했다.하지만 성하늘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성유리는 성하늘과 함께 수도 없이 숨바꼭질하며 놀았다.참을성이 부족하던 성하늘은 숨어 있다가도 몰래 나와 힐끔힐끔 성유리를 살펴보곤 했다.성유리 역시 매번 어디에 숨어 있을지 뻔했던 성하늘을 일부러 모른 척하며 과장된 몸짓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이의 행방을 묻곤 했다.그럴 때면 성하늘은 즐거운 듯한 웃음을 지었다. 성유리가 “어렵게” 성하늘을 찾아내면 아이는 자신을 못 찾았던 엄마를 바보라며 놀리곤 했다.하지만 이번엔 놀이가 아니었다. 성하늘이 정말 보이지 않았다.성유리는 계속해서 성하늘의 이름을 불렀다.분명 성하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그녀의 귀를 맴돌고 있었다.“엄마, 빨리 나 찾아보라니까!”“하늘아, 어딨니? 장난 그만 치고 나와. 엄마가 정말 널 못 찾겠어서 그래!”성유리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성하늘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성유리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하늘아! 들리니? 하늘아!”하지만 그런 성유리의 말에 대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건 그저 새하얗기만 한 눈뿐이었다.그 새하얀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병원을 떠올렸다.성하늘이 병에 걸렸을 때, 성유리는 하얀 천장과 벽을 보며 홀로 간절히 기도하곤 했다.성유리는 그때마다 맹세했다. 성하늘이 다시 건강을 되찾기만 한다면 항상 아이의 곁에 있어 줄 것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하지만 성하늘은 다시 자취를 감췄다.“하늘아...”성유리는 끊임없이 몸부림치다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보이는 희미한 노란 빛이 그녀를 혼란스
여자의 말에 끝나기도 전에 곁에 있던 그녀의 남편이 여자를 세게 끌어당겼다.그제야 여자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아이고, 내가 또 말실수했네. 너무 걱정 마요, 하늘이 분명 괜찮을 테니까.”하지만 지금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지금도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눈사태로 발이 묶인 사람들이라면 밖에서 자신들을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을지 모를 리 없었다. 별일 없었다면 지금쯤 연락이 왔어야 했다.하지만 여태껏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감감무소식이었다.사하나의 휴대폰은 여전히 꺼져있었다.감정 없이 차가운 음성 알림이 반복될 때마다 성유리는 점점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어떻게 정신을 잃지도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눈사태가 멈추자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했다.직원들이 다급히 구조대에게 달려가 상황을 설명했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곧장 그들의 뒤를 따랐다.“사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하지만 성유리는 빠르게 제지당했다.“언제 다시 눈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사모님께선...”“제 친구랑 딸이 저쪽에 있어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쉬어 거칠어져 있었고 거친 목소리 안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제발 저도 같이 가게 해주세요.”사실 성유리는 아까부터 최대한 본인의 감정을 있는 힘껏 억누르고 있었다.그녀는 어떻게든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안 그랬으면 눈사태가 일어난 순간, 사람들이 말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달려나갔을 것이다.이곳에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것만으로 그녀는 자신의 인내심을 최대로 발휘한 상태였다.성유리는 여전히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 보면 사하나와 성하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그리고 마침내 성유리를 만난 두 사람이 모든 게 다 장난이었다는 가벼운 말을 해주기만 바랐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게 아니었다.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이대
성유리는 여전히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 그녀가 따라가 본다고 해도 별 소용 없었으니 그저 가만히 두 사람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카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관광객이 거의 없었던 탓에 카페도 한산했다.성유리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시간을 확인하며 하늘만 계속해서 바라보았다.하늘에는 여전히 어두운 먹구름이 가득했다.그런 하늘을 바라보며 성유리의 걱정은 깊어져만 갔다.그녀는 성하늘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에 대한 자책을 멈출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돌아오면 성하늘이 아무리 떼를 써도 바로 호텔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멀리서 “쿵”하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에 성유리의 손이 저절로 떨렸다.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도 그 소리에 일제히 밖으로 나가 보았다.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진 성유리도 사람들 틈에 끼어 함께 밖으로 달려나갔다.그들이 있는 곳은 산 정상에 가까운 위치였다.눈을 구경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던 만큼 반대편의 설산에서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내려오는 눈이 한눈에 들어왔다.그 광경은 시각적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고 솔직히 말하면 공포감까지 불러일으켰다.카페에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으며 혼란에 빠진 채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다.직원들은 눈사태가 여기까지 오지는 않을 거라는 말로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빨리 대피할 것을 권유했다.하지만 성유리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그녀는 다급히 직원을 팔을 덥석 붙잡고 물었다.“저쪽... 설마 스키장인가요?”“네. 그래도 전문 인력들이 있어서 미리 사람들 대피시켰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그렇게 말하는 직원의 표정도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성유리는 곧장 몸을 돌려 사하나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하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자동응답뿐이었다.극도의 불안함에 성유리의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들을 바라보았지만 그쪽도
성유리는 그녀의 말에 그저 가벼운 미소만 지어 보였다.그때, 남자아이가 성하늘이 손을 잡고 다가왔다.“엄마, 동생이랑 참새 찾으러 가고 싶어.”“이 녀석이, 갑자기 무슨 참새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지금 참새가 어디 있는데?”“있어! 어제도 봤거든!”“없어, 네가 잘못 본 거겠지.”“진짜 있다니까. 못 믿겠으면 내가 지금 가서 보여줄게!”두 사람은 그렇게 말싸움을 시작했다. 결국, 여자가 남자아이의 귀를 잡아당겨 아이를 호텔 안으로 끌고 들어가며 싸움이 일단락됐다.성유리는 그런 모자의 모습을 보며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성하늘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다 놀았어? 우리도 이제 돌아갈까?”성하늘이 고개를 저었다.“난 조금만 더 기다려 볼래.”“뭘 기다리는데?”“아줌마가 오늘 나 데리고 스키 타러 간다고 했거든.”시간을 확인해 보던 성유리가 말했다.“아줌마도 이 시간에 돌아오기는 힘들 거야. 우리 먼저 들어가서 낮잠 좀 자고 있을까?”“싫어, 난 여기서 기다릴래. 아줌마가 예전부터 약속했단 말이야.”성하늘은 고집을 부리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장갑 낀 손가락으로 계속해서 눈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그런 아이의 모습에 성유리가 몇 마디 더 꺼내려던 그때,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보다 귀가 더 밝았던 성하늘은 곧바로 그 엔진소리가 사하나의 차라는 것을 눈치채고 벌떡 일어나 외쳤다.“아줌마!”“나 왔어.”사하나가 차에서 내려 성하늘을 안아 올리더니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며 물었다.“아줌마 안 늦었지?”“조금 늦었네요.”성하늘이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그래도 괜찮아요. 아줌마가 와 줘서 기분이 좋거든요. 우리 이제 스키 타러 가는 거예요?”“당연하지! 내가 왜 왔겠어?”“신난다!”성하늘은 한껏 두껍게 껴입은 몸으로 콩콩 뛰다가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그런 아이를 성유리가 재빨리 잡아주었다.성하늘은 민망한 듯 웃으며 사하나에게 물었다.“아줌마, 우리 언제 출발할 거예요?”“지금 바로
사실 경운시에도 눈이 내리긴 한다.하지만 지리적인 이유와 날씨 문제로 눈이 내린다고 해도 가벼운 눈만 내릴 뿐, 성하늘이 원하는 그런 두껍게 쌓이는 눈은 내린 적이 없었다. 아이가 원하는 눈은 온 세상을 덮을 정도로 많이 내려 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 그런 큰 눈이었다.작년에는 사하나가 성하늘을 데리고 큰 눈을 보기 위해 해외여행까지 가자는 제안을 한 적도 있었다.아쉽게도 그때는 성하늘이 너무 어렸던 탓에 성유리가 먼저 거절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자기만의 사고방식이 생긴 성하늘은 곧장 사하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아이는 뒤늦게 성유리의 존재가 떠올랐는지 곧장 고개를 돌려 애처로운 눈빛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우리 갈 거지?”아이의 표정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성유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같이 가자.”“앗싸!”한껏 흥분한 성하늘은 폴짝폴짝 뛰며 사하나에게 출발 날짜를 물어보았다.한술 더 떠서 아이는 자신의 저금통을 꺼내며 장갑과 모자를 사겠다며 설쳐댔다.사하나는 이번 달 말에 출발하기로 했지만 바빠진 일정 탓에 연말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그때는 한빛시가 가장 추워질 시기였고 도시 전체가 새하얀 눈에 뒤덮일 한겨울이었다.성유리는 혹시라도 성하늘이 그곳의 추위를 이기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되었지만 아이는 계속해서 아무 문제 없을 거라며 성유리에게 애원했다.“엄마, 우리 제발 가자. 제발! 나 말 잘 들을게!”성하늘의 간곡한 부탁에 성유리는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들이 도착하던 날, 날씨는 아주 화장했다.택시 기사마저 한빛시의 날씨가 가장 좋은 날이라고 말할 정도였다.내리쬐는 햇볕은 따스했고 도로변에 앉아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도 보였다.사람들의 붉은 코트와 집 앞에 걸려있는 노란 옥수수는 이 도시만의 독특한 풍경 같아 보였다. 그동안 사진이나 그림으로만 보던 장면들이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지자 성유리도 모든 것을 아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정겨운 풍경이긴 했지만 그녀들이 머물 곳은
오히려 사하나는 연정우의 일로 성유리에게 사과를 했다.“제가 상황파악도 제대로 못 하고 억지로 엮어주려고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솔직히 저도 연정우가 그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사하나는 한껏 찌푸린 얼굴로 변명해보았지만 성유리는 그녀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성유리의 눈빛에 사하나는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물었다.“언니... 혹시 제 탓하는 건 아니죠?”“내가 네 탓을 왜 해?”성유리가 웃기다는 듯 말했다.“이게 너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그래도... 그때 제가 부추기지만 않았다면...”“난 어른이잖아. 이런 기본적인 판단능력도 없으면 나중에 무슨 결정을 내리든 다 다른 사람 탓이나 하게?”성유리가 별수 없다는 듯 말했다.“게다가 나도 그때는 연정우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뒤늦게 둘이 안 맞는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뿐이고.”“안 맞는 게 아니라, 연정우가 언니한테 안 어울리는 거죠!”사하나가 곧장 대답했다.“언니 그거 알아요? 요즘 박한빈 버린 여자가 연정우한테 차였다고 소문 돌고 있던데요.”“그 새끼 완전 미친놈 아니에요? 박한빈한테 사업으로 밀리니까 그딴 식으로 물어뜯는 거잖아요. 싸울 거면 자기들끼리 싸우든지, 왜 언니까지 끌어들인대요? 언니가 뭘 잘못했다고!”사하나는 말할수록 점점 화가 치미는지 언성을 높였다.성유리는 그런 사하나의 모습에 오히려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물이나 좀 마시고 진정하지 그래?”사하나는 태연한 성유리의 모습에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성유리는 그저 가만히 서서 사하나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사하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성유리를 빤히 쳐다보았다.그 시선에 어딘가 머쓱해진 성유리가 물었다.“왜 그래?”“언니는 화도 안 나요?”사하나가 물었다.“왜 화가 나야 하는데?”“그러니까... 연정우가 언니를 그런 식으로 대했던 것도 그렇고,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도 그렇고, 화가 나야 하잖아요.”사하나의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