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밑에 있는 해변에 다녀왔어요.” 하지만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박한빈의 미간이 더욱더 찌푸려졌다. “여긴 국내가 아니야. 너 혼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다는 거 몰라?” 성유리는 박한빈의 물음에 마음 같아서는 대꾸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왜 자신을 여기에 데려온 건지, 그리고 계속 방안에 바보처럼 갇혀만 있어야 한다는 말인지 묻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겠어요.”성유리의 반응에 잠시 멍해졌던 박한빈이 금세 정신을 차렸다. “방에 돌아온 이유가 뭐예요?” 성유리가 물었다. 그제야 박한빈은 그녀를 다시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해 줬다.“너랑 같이 누굴 좀 만나러 갈 거야.” “파티인가요?” “아니. 여기 있는 내 친구 만나러.” 박한빈이 말한 그 친구라는 사람이 혹시 그의 투자와 사업에 관련된 사람인지 궁금했기 때문에 성유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얼마 전 그의 서재에서 증거를 찾으려고 했던 성유리에게 박한빈이 지금 자신의 협력자를 소개할 리는 없다고 판단했다. ‘아예 불가능한 일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유리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고 오히려 순순히 따르며 물었다.“드레스로 갈아입어야 하나요?” 성유리의 태도에 박한빈은 다소 놀란 듯했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알겠어요. 그럼 화장이라도 하고 갈게요.” 그 말을 남기고 성유리는 곧장 화장실로 향하려고 뒤를 돌았다. 그런데 그 순간, 박한빈은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을 보고는 멈칫했다. 성유리의 드레스 뒷부분은 상당히 드러나 있는 디자인이었고 그 때문에 그녀의 등이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짐을 쌀 때, 박한빈은 옷을 대충 챙겼던 터라 디자인까지 확인하지 않았었다. 그녀의 하얀 등이 그의 시야에 들어오자 박한빈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잠깐만.” 성유리가 멈춰서 그를 돌아봤다. “드레스는 다른 걸로 갈아입어. 굳이 드레스
박한빈이 말한 약속 장소는 해변 주위에 위치한 개인 별장이었다. 두 사람이 탄 차가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 성유리는 별장 앞에 “외부인 출입 금지”라는 경고판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분명히 “외부인”에 속하지 않는 듯했다. 긴 연미복을 입은 남자가 차가 들어서는 것을 보자마자 정중히 다가와 차 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이분은 로버트 씨야. 여기 별장의 집사야.”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남자를 소개하자 성유리는 고개를 살짝 숙여 로버트에게 인사했다. 남자도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성유리를 향해 인사를 건넨 뒤, 앞장서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박 선생님, 에릭 선생님께서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박한빈은 로버트의 말에 짧은 대답을 했다.현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성유리는 별장 내부의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화이트 톤으로 꾸며진 공간은 높은 천장과 넓은 면적 덕분에 마치 서양식 궁전을 연상케 했다. 앞쪽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한 남자가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는 전형적인 유럽인의 외모였고 금발에 파란 눈과 흰 피부, 그리고 얇은 입술까지 더해져 한층 이국적으로 보였다. 남자의 손에는 와인 잔이 들려 있었는데 박한빈을 보자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빠르게 다가왔다.“로얀, 드디어 왔군.” 박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악수를 나누고 가볍게 포옹했다. 이후 박한빈은 성유리를 앞에 내세우며 에릭에게 소개했다. “내 아내 성유리야.” 처음에는 박한빈에게만 시선을 두었던 에릭이 그의 말을 듣고는 가볍게 성유리를 한 번 훑어본 뒤,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그가 성유리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남편의 친구니 예의상 성유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박한빈은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너무 신경 쓰지 마. 원래 사람들한테 좀 무뚝뚝한 편이라.” “네” 성유리가 박한빈의 말에 짧게 대답해 줬
그러나 이어진 대화에서 박한빈의 답변이 들려왔다. “넌 우리와 다르잖아. 우리에겐 결혼과 가족에 대한 집착이 있어.” “그래. 이해 못 하겠네. 하지만 결혼은 감옥이라는 거에 우리 둘 다 이미 동의했던 거 아니야? 네가 결혼 때문에 놓친 재미가 얼마나 많은지 얘기했던 거 기억 안 나? 이제 겨우 자유를 찾았는데 왜 다시 그 감옥으로 돌아간 거야?” 박한빈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에릭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네 아내에게 무슨 특별한 점이라도 있어서 그런 거야? 그런 감옥을 기꺼이 감수할 이유가 있는 거야?” “특별할 거 없어. 그냥 평범한 여자야. 아무것도 특별한 게 없어.” “그런데도 왜 굳이 그녀와 결혼했는데?” “네가 말했잖아. 결혼이 감옥이라면 누구와 해도 똑같아. 다른 사람에게 시간을 낭비하는 게 귀찮아서 아무나 골랐는데 하필 고른 사람이 아내였던 거지.” 그 말을 들은 성유리는 더 이상 들어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원래는 문을 열고 들어가 그를 찾으려 했지만 발걸음을 멈췄다. 뒤에서 도우미가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낀 성유리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무 일 없네요. 그냥 밖에서 기다릴게요.” 그렇게 말한 뒤 성유리는 다시 거실로 돌아와 홍차 한 잔을 더 마셨다. 얼마 후, 박한빈과 에릭이 거실에 돌아왔다. 에릭은 여전히 고고한 태도를 유지하며 성유리를 힐끗 보았다. 성유리는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특별한 점을 찾으려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것이 호기심 때문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에릭은 지금 박한빈이 왜 성유리와 결혼했는지 궁금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등을 곧게 펴고 당당히 그를 바라보았고 에릭은 그런 그녀를 계속 훑었다. 그때 박한빈이 대화를 시작했는데 출장의 협력 사업과 관련된 이야기였고 두 사람은 곧바로 일 주제로 넘어갔다. 성유리는 그들이 사용하는 전문 용어를 이해할 수 없어서 결국 듣기를 포기했고 테이블 위의 음식을 조용히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
에릭이 부른 차가 두 사람을 호텔로 데려다주는 중이었다. 하지만 호텔 근처에 도착했을 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차를 멈추라고 지시하더니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 잠깐 해변에서 산책할까?” 그는 오늘 밤 술을 꽤 마셨지만 여전히 눈빛은 또렷했다. 옆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본 성유리가 아니었다면 술을 마셨다는 사실조차 알아채기 어려웠을 것이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손을 꽉 잡더니 차에서 내렸다. 밤이 되면서 해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낮에는 맑고 푸르렀던 바다는 지금은 칠흑 같은 하늘과 하나가 되어 끝없이 어두운 구멍처럼 보였고 발밑으로 밀려오는 파도마저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성유리는 이런 바닷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그녀와 달리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계속 앞을 향해 걸어갔다. “내일은 좀 바쁠 것 같아. 내가 가이드 한 명을 붙여 줄게. 너 혼자 주변을 둘러보도록.” “괜찮아요.” 성유리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의 얼굴에 약간의 불쾌함이 스치더니 뚝 멈춰 서서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성유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호텔에서 기다릴게요.” 같은 뜻의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돌려 말하자 그의 표정이 금세 풀렸고 박한빈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박한빈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을 더욱 꽉 잡더니 그녀를 자신의 앞으로 확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거리감에 성유리는 당황하며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박한빈은 이를 눈치채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결국 두 사람은 거의 밀착한 상태가 되었고 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박한빈은 그윽한 눈빛으로 성유리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 성유리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려 시선을 아래로 피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개의치 않고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네?” “마지막에 말했던 거.” “호텔에서 기다리겠다고 한 거요?” “그래. 그
술이 깬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게 바로 네가 오늘 내 말에 순순히 따른 원인이야?” “...” 성유리는 대답을 못 했다. ‘왜 오늘 이렇게 착해졌나 했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태도에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밥을 같이 먹자고 하면 먹어주고 옷을 갈아입으라 하면 갈아입고 심지어는 따뜻하게 안아주기까지 한 성유리는 결국 연정우를 위해서 박한빈의 기분을 좋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박한빈은 오늘 있은 모든 일에 기뻐했던 자신이 한심하고 웃겼다. 그는 이빨을 꽉 깨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했던 노력들을 성유리가 드디어 봐줬다고 착각했고 둘 사이에 있던 커다란 “벽”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결과는? 성유리는 오직 연정우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 박한빈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들끓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 감정들은 질투와 분노, 그리고 고통이었다. 감정들은 마치 혈관 속을 파고드는 것 같이 빠르게 박한빈의 몸을 지배했고 그는 저도 모르게 화가 나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박한빈은 순간 머릿속에서 연정우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연정우만 없으면 성유리가 자신을 봐줄 것 같았고 성유리의 세상에 연정우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박한빈은 냉큼 핸드폰을 꺼내 들었고 덜덜 떨리는 손과 하얘진 머릿속으로 한참을 연락처를 뒤졌지만 원하던 번호를 찾아내지 못했다. 성유리는 박한빈의 이상행동에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놔.” 그때, 박한빈이 차디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성유리가 묻는 말에 박한빈은 더더욱 화가 났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역시 자신을 잘 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연정우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그녀가 미웠다. 분노는 불길처럼 빠르게 번져 박한빈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었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성유리에게 되물었다. “네 생각에는?” 성유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생각
박한빈은 이미 전화를 걸고 있었고 수화기 너머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하지만 정작, 전화를 먼저 건 그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박 대표님?” 상대방이 계속 말을 걸어왔지만 박한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만 봤다. 그녀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박한빈을 보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박한빈이 물었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연정우를 죽인다면 나도 죽을 거예요.” 성유리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자 박한빈은 뭐가 웃긴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박한빈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웃으며 박수까지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점점 붉어졌고 혀끝에서는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그럼에도 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고 성유리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연정우 하나를 위해 네가 죽겠다고?” “네. 맞아요.” “그럼 성리 그룹은? 넌 그게 안중에도 없니? 그리고 병원에 누워 있는...” “박한빈 씨는 사람을 협박할 수 있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죠?” 성유리는 그의 말을 뚝 끊으며 말했다. “난 이미 당신의 뜻대로 당신과 결혼했어요. 그런데도 그걸로는 부족한 건가요? 왜 다른 사람까지 철저히 망가뜨려야 하죠?” “내가 철저히 망가뜨린다고? 연정우가 자신이 한 잘못 때문에 조사받는 게 내 탓이라는 말이야?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네가 죽겠다는 거야? 대체 왜 내가 그 사람을 도와야 하냐고!” “지금 당신이 단지 돕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성유리가 되물었다.“아까 그를 죽이겠다고 말한 건 박한빈 씨가 아니었나요?” 박한빈은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버렸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도 그와 다투기를 포기했다.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고 바닷물은 계속 밀려왔다가 나가기를 반복하여 잔잔한 파도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하지만 그들 사이의 공기가 얼마나 변했든 이 세상은 아무
“그래서 무슨 방법이든 동원해서라도 그를 도와주겠다는 거야? 심지어 내 심장에 칼을 꽂는 일이라도?” “성유리, 너 정말 독하다.” 박한빈은 말을 끝내더니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거친 파도는 여전히 밀려왔다가 나갔지만 넓은 해변 위에는 이제 성유리 혼자만 남아 있었다.그날 밤, 성유리와 박한빈은 서로 등을 돌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는 침대 한쪽에 누군가 더 있는 게 익숙해졌지만 그전에는 둘이 같은 베개를 쓸 때면 잠들기 전 꼭 뭔가를 하거나 아니면 박한빈이 그녀를 품에 안고 잠들 곤 했다. 그러나 그날 밤 기분이 상한 박한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등을 돌린 박한빈의 모습은 마치 그들 사이에 깊은 골이 생긴 것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성유리 역시 등을 휙 돌렸고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가 버렸다. 아침이 밝았을 때, 성유리가 눈을 떴지만 박한빈은 이미 없었다. 그가 일을 하러 갔는지 아니면 에릭이 말한 파티에 갔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주변 풍경도, 해변도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고 다른 곳도 딱히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루 종일 호텔에 머물며 영화만 봤다. 방을 나가지도 않고 식사는 모두 호텔 레스토랑에서 방으로 배달시켰다. 어느덧 어둑어둑한 밤이 되었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성유리는 그들이 말한 파티가 얼마나 순수하지 않을지 대충 예상은 했다. 아마 지금쯤 박한빈의 곁에는 다른 여자가 있을 것이다. 여긴 금성은 아니지만 그는 여전히 탑에 서 있는 남자였으니까. 꿀을 발라놓은 케이크에 화려한 나비들이 몰려들 듯이 박한빈에게 여자들은 끊임없이 달라붙었다. 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을 기다리기 포기했고 그냥 휴대폰을 꺼두고 혼자 잠잘 준비를 했다. 혼자서 큰 침대를 차지하는 건 역시 편했고 성유리는 곧 깊은 잠이 들었다. 그러나 꿈속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무언가에 눌리는 듯 답답했고, 몸 아래로 차갑고 간지러운 느낌이 스멀
고통과 분노, 그리고 굴욕과 공포의 감정이 한순간에 몰려왔다. 성유리는 그 충격으로 몸부림조차 할 수 없어 잠시 멈췄지만 몇 초 후 정신을 차리자마자 더욱 거칠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전히 그녀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입을 크게 벌려 그의 손등을 있는 힘껏 물었다. 온몸의 힘을 다해 문 성유리기에 남자의 살이 거의 뜯길 정도였다. 그제야 그 남자는 참지 못하고 고통에 하던 행동을 멈추더니 신음을 냈다. 그 틈을 타 성유리는 무릎으로 그의 복부를 강하게 찼지만 이번에는 남자가 먼저 대비를 하고 있었다.남자는 성유리의 다리를 붙잡아 아래로 눌러 제압한 뒤, 그녀의 입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성유리는 곧바로 크게 비명을 질렀다. “이거 놔요! 살려주세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이미 풀고 있던 넥타이를 그녀의 입에 밀어 넣었다. 그 남자의 몸에서는 진한 술 냄새가 났지만 그보다 더 익숙한 냄새가 성유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성유리는 그 순간 치가 떨렸고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남자를 쳐다봤다. 방 안에 불은 꺼져 있었기에 어둠 속에서 남자의 얼굴을 성유리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에게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넥타이를 성유리의 입에 밀어 넣은 뒤, 다시 그것으로 그녀의 두 눈을 가렸다. 성유리는 더 이상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시야마저 완전히 차단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불길한 추측이 자리 잡았고 성유리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남자의 일방적인 분풀이였다. 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그녀에게 고통을 주었고 그제야 성유리는 깨달았다. 이전까지 그가 그녀를 다루던 방식은 그나마 부드러운 편이었다는 것을. 이제 남자는 그녀를 만족시키려는 마음을 완전히 버렸는지 성유리는 오로지 고통만 느낄 뿐이었다. 일 초는 일 년같이 느껴졌고 결국 성유리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을 정도로 지쳐버렸다. 얼마나 시
성유리의 대답은 홍지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자신이 기대했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기에 그녀는 한순간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마친 뒤, 곧바로 돌아서서 걸어갔고 박한빈이 곧장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떠나기 전, 그는 단 한 번도 홍지은을 쳐다보지 않았다.하지만 홍지은은 알았다.그동안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이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을.그러나 생각보다 더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시궁창뿐인 인생이 여기서 훨씬 나빠진다고 한들 얼마나 더 나빠질까?그렇다고 혼자만 괴로울 수는 없었다.그러니 죽더라도 반드시 한 사람은 끌어내릴 것이다.성유리가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지 홍지은은 아직 모른다.세상 그 누가 행복하게 지낸다 해도 괜찮다.‘성유리는 절대 안 돼.’...성유리는 다시 경매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곧장 복도 끝까지 걸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그리고 뒤따라오던 박한빈도 곧바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지만 옆에 조용히 서서 성유리만 쳐다봤다.엘리베이터의 거울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은 또렷이 비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는데 아무 말도, 반응도 없었다.박한빈은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그는 발신자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울리는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그러나 상대는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왔다.연달아 몇 번을 끊었음에도 전화는 계속해서 울렸다.그렇게 주차장까지 도착했을 때, 성유리가 먼저 떠날까 봐 조바심이 난 박한빈은 그녀의 팔을 붙잡고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입니까?”날카로운 그의 목소리에 상대방이 순간 움찔하는 기색이었지만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다.“박 대표님, 저예요. 왜 말도 없이 먼저 가셨습니까? 저...”박한빈은 상대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행여 핸드폰이 또다시 울릴까 봐 박한빈은 이번에 아예 전원을 꺼버
홍지은의 말에도 박한빈은 여전히 침묵했고 아까보다 더 얼굴을 찌푸렸다.눈빛에 그득히 담겨있는 혐오와 무시의 감정은 선명히 드러났지만 박한빈은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바로 맞은편에 서 있던 홍지은도 당연히 그의 감정을 알아차렸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진짜예요. 박 대표님,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제 남편은...”“꺼져.”단 두 글자뿐인 박한빈의 대답에 홍지은은 할 말을 잃었다.하지만 사실... 신경 쓰이는 건 박한빈의 대답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이었다.홍지은은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자기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처지가 더 난감해진다는 사실을.그러나 박한빈은 홍지은에게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자리를 떠버렸다.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홍지은은 박한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박한빈 씨, 계속 이러신다면... 제가 유리한테 그 일들을 다 알려줘도 제 탓은 하지 마세요.”그녀의 말에 박한빈의 발걸음이 뚝 멈췄고 이내 고개를 돌려 홍지은을 쳐다봤다.그러자 홍지은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제가 아예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그때 유정 씨가 임신했던 아이 말이에요. 박 대표님 아이 맞죠?”그녀의 말에 박한빈은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홍지은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고 냉랭했다.그의 눈빛에 홍지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내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말했다.“지금 유정 씨가 잡혀있긴 하지만 그 일들이 다 끝이 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때 유리가 잃었던 아이도... 사실 박한빈 씨는 다 알고 있었잖아요. 유정 씨가 그랬다는 걸.”홍지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한빈의 뒤에서 물건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쿵!그 소리에 박한빈이 뒤돌아보자 성유리가 머지않은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은 채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웠다.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그녀의 표정은
그리고 이내 홍지은은 자신의 자리에서 성유리와 박한빈이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금성에서 제일가는 큰 인물은 박한빈은 당연하게도 가장 앞에 있는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무대 위에 전시되는 물건엔 흥미가 없어 보였다.홍지은이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을 때, 박한빈도 마침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멈칫하던 그는 다정하게 성유리 귓가에 얽혀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해 줬다.그저 연인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행동이지만 박한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들을 일일이 다 풀어줬다.만약 홍지은이 직접 본 게 아니라면 그녀는 꿈에서도 박한빈이 이런 일을 한다고는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너무 놀란 홍지은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박한빈 좀 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성유리는 퉁명스럽게 그의 손을 밀쳐냈다.그리고는 박한빈을 슬쩍 째려봤지만 그는 화를 내기도 커녕 오히려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꽤 거리가 있던 홍지은과 두 사람이기에 그녀는 박한빈의 말을 들을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옆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저기 좀 봐요. 두 사람 사이 너무 좋아 보이지 않아요? 유리가 평소에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게 혹시 박 대표님께서 쟤를 숨겨두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니까요.”홍지은의 옆에 있는 사람은 그녀와 비슷한 나이대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금성에서 거주하는 현지 사람이 아니었고 결혼한 남자도 업계에서 중하층에 속하는 위치였다.전에 그녀는 홍지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 막상 말을 거니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그렇게 홍지은의 미소와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정 사모님?”상대는 여전히 침묵했지만 이내 정연화는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홍지은은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선명히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은 ‘화살’이 되어 홍지은의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고 있었고 흐르는 ‘피’조차 그녀에게는 차갑게 느껴졌다.입술을 뻥긋거리
홍지은은 마치 성유리와 떨어질 래야 떨어질 수 없는 절친이라는 듯 능글맞게 대꾸했다.그리고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녀는 발 빠르게 성유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박한빈은 경매에 참석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성유리는 미소를 지은 채 그의 곁을 지켰다.사실 그녀는 웃고는 있었지만 이미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는 상태였고 상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그래서 홍지은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처음엔 미처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난 네가 안 올 줄 알았어. 예전에는 이런 장소에 오는 거 별로라고 했잖아.”홍지은은 아주 자연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잡으며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잡힌 손을 빼냈다.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홍지은은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보며 계속 말했다.“어머? 박 대표님도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만약 이런 장소에서 다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다면 아무리 싫어도 박한빈은 몇 마디 대답은 해줬었다.그렇지만 유독 오늘따라 그는 대답하기가 내키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말을 건 상대가 홍지은이라서 싫었다.필경 홍지은을 볼 때면 성유리가 지나간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리니까 말이다.그게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일까, 박한빈은 성유리가 홍지은을 마주치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그저 오다가다 마주친다고 하더라도.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자기 쪽으로 가까이 끌어당겼고 홍지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녀와 함께 떠나버렸다.박한빈은 홍지은이 자신의 대답을 들을 자격도, 자기가 대답해 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대답을 하지 않은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제자리에 서 있던 홍지은의 반응과 표정이 어떻게 변해가던 박한빈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박 대표님!”이내 다른 사람이 박한빈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그는 미소 지으며 상대에게 성유리를 소개해 줬다.“여기는 제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성유리라고 하고요.”“안녕하세요. 사모님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홍지은은 늘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성유리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요. 제가 여러 번 말해봤지만 걔는 원래 이런 곳에 나오길 싫어해서요.”오늘도 그녀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괜찮아요. 그래도 한번 얼굴을 비추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마침 경매회도 곧 시작하는데 저도 박 대표 부인의 취향이 궁금하네요.”“그러게 말이에요. 어차피 나는 경쟁 상대가 될 수도 없으니까 미리 유리 씨가 뭘 원하는지 알아두고 포기하는 게 낫겠어요.”홍지은도 사람들을 따라 웃으며 말했다.“유리는 오지 않을 거예요. 전에도 물어봤는데 딱히 관심 가는 물건이 없다고 했거든요.”그녀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 현실은 완전히 뒤집혔다.왜냐하면 그날 경매장에 성유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올해 금성에서 열리는 첫 대형 경매 행사였다.특히 경매 목록에 포함된 한 세트의 보석이 큰 주목을 받으면서 도시 내에서 일정한 신분을 가진 인사들은 전부 참석했다.사실 성유리는 처음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런데 전날 밤, 박한빈과 게임 내기를 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박한빈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그 조건이 바로 경매장에 함께 가달라는 것이었다.다만, 박한빈도 굳이 오래 있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그냥 얼굴만 비추고 가면 돼. 너 피곤해지면 바로 나가자.”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다.성유리가 입장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홍지은에게로 향했다.그녀는 칵테일 잔을 들고 주변 사람들과 해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비록 남편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자리에서만큼은 홍지은에게 자유를 허용했다.어차피 그의 사업 자원 중 상당수가 홍지은의 인맥과 네트워크 덕분에 얻어진 것이었으니까.오늘 그녀는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생기가 넘쳤다.완벽한 메이크업 덕분인지 얼굴에도 빛이 나는 것 같았고 평소보다 더 예뻐 보였다.그런데 이
사실 박한빈은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곤 끝없는 공부와 훈련뿐이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할 것이 많았다.학교 성적은 언제나 최고여야 했고 악기나 골프, 승마를 포함한 다양한 외국어까지 익혀야 했다.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박한빈의 신분을 부러워했다.박 씨라는 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영광을 의미했다.하지만 그 영광과 함께 짊어져야 할 무게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만약 지금 그때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삶이 더 나은 것인지조차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한빈이 평범한 아이로서의 행복을 잃었다는 사실이다.잃을 게 많은 만큼 박한빈은 손에 넣은 것도 많았다.그리고 그는 자신이 짊어졌던 짐을 하늘이에게 만큼은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그래서 얼마 전, 김서영이 하늘이에게 특별 교육을 시키자고 했을 때 박한빈은 단칼에 거절했다.“박한빈, 네 딸은 분명 앞으로 금성에서 주목받는 존재가 될 거야.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익히지 못하면 그 신분이 아깝지 않겠니?”김서영은 박한빈을 설득하려 했지만 박한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뭐가 어떻게 됐든 하늘이는 박한빈의 핏줄이자 친딸이다. 설령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더라도 말이다.감히 누가 박한빈의 딸을 무시하고 얕잡아볼 수 있겠는가?그래서 김서영이 뭐라고 하든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그 이야기를 마친 후, 박한빈의 품 안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성유리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박한빈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그녀는 살짝 찌푸린 미간과 다물린 입술로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었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순간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것인가 싶어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에요.”성유리는 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박한빈에게 물었다.“그런데 이거 왜 아직도 안 멈추죠?”“곧 멈출 거야.”박한빈은 짧게 대답하다 문득 깨달았다.“설마... 지금 나를 가슴 아파하는 거야?“아니거든요?”성유리는 전혀 망설
박한빈은 천천히 웃음을 거두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직접 물을 따라왔다.성유리는 그가 자신이 마실 물을 준비하는 줄 알았다.그런데 박한빈이 몸을 휙 돌리곤 성유리에게 컵을 내밀었다.“방금 건 그냥 장난이었어. 재미없었지?”그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물컵을 받아 들었다.그것만으로도 이미 박한빈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푹 쉬어.”박한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성유리에게 말했다.성유리는 물 한 모금을 마신 뒤, 컵을 옆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잠깐 나갔다 올게요.”그녀가 문 쪽으로 향하려 하자 박한빈이 손목을 붙잡았다.“어디 가려고?”“정원이요. 햇볕 좀 쬐려고.”“나도 같이 가.”“아까 그렇게 아프다면서 괜찮으세요?”성유리는 박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그 눈빛에는 박한빈을 향한 의심이 가득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나도 햇볕 좀 쬐고 싶어. 그리고 의사가 말했잖아? 내 면역력 좋다고.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래.”‘심각하지 않다?’‘그러면 아까까지는 왜 그렇게 책임지라고 난리였는데?’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려 했지만 결국 성유리는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그녀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박한빈은 마치 그것을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성유리의 손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방에서 본 그대로 오늘 날씨는 유난히 화창했다.햇살 아래, 정원의 회전목마가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박한빈이 특별히 주문 제작해 놓은 것이라 그런지 원색의 유채가 한층 더 생생해 보였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그런데, 박한빈은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가 보내는 그윽한 시선을 느꼈지만 성유리는 한참을 모른 척했다.박한빈이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는.“한번 타볼래?”“뭐를요?”“회전목마.”성유리는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제가 어린애도 아니고.”“그럼 어릴 때는 타봤어?”그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잠시 침
“그럼 자. 난 네가 잠들면 나갈게.”박한빈의 말을 성유리가 철석같이 믿을 리가 없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와 다투는 것도 귀찮았다.그래서 그냥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푹 덮고 등을 돌리고는 박한빈에게서 멀어졌다.사실 처음에는 전혀 졸리지 않았지만 조금 전 박한빈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탓인지 피곤함이 몰려왔다.머릿속에 들던 생각도 점점 흐려지고 그렇게 결국 잠에 빠져들었다.아니나 다를까, 박한빈의 말을 거짓말이었다.다음 날 아침, 성유리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바로 옆에 누워 있는 박한빈이었다.그는 한쪽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잠에 들어있었는데 성유리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당장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갑자기 그가 몸을 돌려 두어 번 기침을 했다.그리곤 반쯤 감긴 눈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너한테서 감기가 옮은 것 같아.”성유리는 그 말에 그대로 멈춰버렸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잡아 자기 이마에 갖다 댔다.“한번 만져봐. 나 열 나는 거 같지 않아?”성유리는 일단 체온계를 가져와 박한빈의 체온을 재봤다.그러나 체온계에 표시된 건 아주 멀쩡한 수치였다.그 말인즉 박한빈은 열이 안 나고 있다는 것이었고 감기에 걸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그런데도 박한빈은 여전히 몸이 아프다며 자신이 감기에 걸렸으니 여기서 병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전의 고고하고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마치 억지를 부리는 아이 같았다.결국 성유리는 의사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뿐만 아니라 아예 다른 방으로 옮겨서 지내기로 결심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속내를 간파한 듯, 서둘러 앞을 막아섰다.“뭐 하려는 거야?”“방을 옮길 거예요.”성유리는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다.“의사 선생님께서 교차 감염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어요.”“그럼 난 어떡하라고?”“저택에 도우미분들도 많고 의사 선생님도 있잖아요. 박한빈 씨를 돌볼 사람 충분하죠.”“난 다른 사람이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어.”
“걱정 마, 엄마 괜찮으니까.”하늘이는 문가에 서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한참을 그러던 아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다시 감기 옮으면 어떡해?”그 말에 성유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괜찮아, 엄마 마스크 쓰고 있잖아.”그래도 하늘이는 여전히 망설이는 눈치였다.망설이던 아이는 결국 괜찮다는 성유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이제 가서 자. 혼자 잘 수 있겠어?”“응!”하늘이는 성유리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나 이제 다 컸어.”“그래, 그럼 가서 쉬어.”하늘이는 여전히 아쉬운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를 점차 거뒀다.하늘이가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은 걸 확인한 뒤에야 성유리도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낮 동안 너무 오래 잠들었던 탓인지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결국 다시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아주 익숙한 발소리.그걸 듣는 순간 성유리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나 성유리는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곧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침대 곁에 서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그제야 성유리는 몸을 뒤로 빼며 경계하듯 눈을 떴다.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에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열은 안 나는지 보려고 했어.”“전 괜찮아요.”성유리는 박한빈이 행여 다른 말을 할까 두려워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박한빈 씨는 서재에서 주무셔아 하는 거 아니었어요?”“잠이 안 와.”“그러면 그냥 조용히 나가주세요. 제 잠까지 방해하지 말고.”성유리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박한빈은 미동도 없었다.한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점점 짜증이 밀려왔고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했다.“빨리 나가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