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박한빈은 이미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어디에 있던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성유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이제 더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성유리는 이제야 박한빈이 예전부터 다른 투자자들과 다 얘기를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성유리가 손에 쥐고 있던 작디작은 지분까지 뺏겼지만 그녀는 저항할 자격도 없었다. 허나 성시원에게는 성유리보다 많은 발언권이 있다. 박한빈이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을 막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시간은 끌 수 있었다. 만약 그 시간들을 충분히 이용해 박한빈과 고명도 사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한다면 두 사람에게는 솟아날 구멍이 생기는 것이다. 성유리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다 세우며 병원으로 향했지만 뜻밖의 인물과 마주쳐버렸다. ‘박한빈 씨?’ 그녀를 발견한 박한빈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먼저 건네자 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성 대표님도 계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오셨군요. 그럼 저희 이 자리에서 바로 얘기 나눕시다.” 박한빈은 냉정하고도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이게 바로 성리 그룹의 현재 금전 흐름 상황입니다. 오늘 아침까지 통계한 결과 이미...” 어젯밤 침대에서의 화면들이 떠오른 성유리는 지금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성리 그룹의 미래 계획을 말하고 있는 박한빈이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아주 냉철하고 침착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박한빈의 모습에 성유리는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성유리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성시원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동의하신 거예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성시원이지만 성유리는 그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사실 성유리도 지금 성리 그룹의 상황으로 놓고 말하면 누군가 회사를 인수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 않다면 회사의 재무 상황이 공개될 것이니 회사는 지금보다 더 심각한 어려움을 겪을 게 뻔했다. 법원까지 가 회사를 매매로 넘기는
성유리는 능청맞게 말하는 박한빈을 보기도 싫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짓더니 바로 병실 밖을 나갔다. “저게 무슨 말이냐? 지금 두 사람 같이 살고 있어?” 성시원은 박한빈이 나가자마자 성유리를 보며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정우랑은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성유리는 성시원의 물음에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 오늘 저는 성리 그룹의 미래에 대해 얘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이미 그럴 필요 없겠네요. 저는 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잠깐만! 아까 내가 한 물음에 대답부터 해줘야지. 정말 같이 사는 거야? 그래서 이 모든 게 다 둘이 짜고 한 판이다 이거야? 어쩐지 시간을 넉넉하게 주겠다고 한 사람이 왜 갑자기 이렇게 빠르게 찾아와서 결판을 짓는지 궁금했는데... 다 네가 한 짓이었구나.” “됐어요.” 성유리는 피로에 잔뜩 찌든 목소리에 입을 열었다. “뭐라고?” “이미 다 알고 계세요. 박 대표님은.” 성유리는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처음부터 끝까지 저희는 그냥 그 사람의 손아귀에 잡힌 사냥감일 뿐이었다고요.” “아예 다른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평 공정하게 싸울 수 있겠어요?” 성유리의 평온한 목소리는 마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사람 같았다. 성시원은 성유리의 말에 입만 뻥끗거리다 결국 연정우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그럼 연정우는? 이미 무산된 결혼 아니냐? 그 사람 일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런 정 없고 매정한 인간은 우리 성씨 가문과 절대 어떠한 관련도 없어!” 성유리는 화를 내며 말하는 성시원의 앞에서 효녀가 되고 싶지 않아 아무 말 없이 뒤돌아 떠났다. “성유리!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데 어디가? 당장 돌아와!” 뒤에서 들리는 성시원의 고함에도 성유리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걷는 와중에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병원 앞에 몰려있던 기자들은 이미 다 떠났는지 조용했기에 성유리는
박한빈의 말을 끝으로 차 안에는 적막만 흘렀다. 성유리는 그가 내민 서류를 손에 꼭 쥐고 있었는데 너무 힘을 쓴 탓에 손가락에 피가 안 통해 혈색이 없었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의 옆에 가만히 앉아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만약 성유리가 전처럼 화를 못 이겨 자신을 힘껏 깨문다 해도 박한빈은 아마 속으로 좋아할 것이다. 오랜 시간 함께 한 두 사람이라 그런지 성유리도 박한빈의 속내를 알아차렸고 이미 미쳐버린 사람과 상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박한빈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성유리는 애를 써서 자기감정을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만약 거절한다면요?” “음, 그럼 할 수 없지. 성리 그룹이 점점 더 망가져 가는 꼴을 두고 봐야 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거야. 연정우 씨에 관한 일도 나는 더 이상 모른 척하지 않을 거고.” 평온하게 대답하는 박한빈이었지만 마음이 급한 탓인지 말은 점점 더 빨라졌다. 성유리는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커다란 회사를 거머쥐고 있는 대단한 대표가 아니라 그냥 날강도 같아 보였다. ‘정말 뻔뻔한 사람! 어쩜 사람이 이래?’ 비록 성유리가 입 밖으로 박한빈을 욕하는 말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는 무언가 눈치 차린 듯 먼저 말을 이어갔다. “지금 속으로 나를 욕하고 있는 거 알아. 그래도 아무런 소용은 없어. 어차피 넌 이제 연정우 그 사람이랑 다시 만나지는 못할 테니까. 툭 털어놓고 말할게, 잘 들어. 앞으로 네가 어떤 남자를 만나든 나는 절대 그 남자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평생 너는 어차피 나랑 얽히게 될 거야.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나랑 결혼하지 그래?” 박한빈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성유리에게 말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그녀는 지금 자기 옆에 물 한 잔도 없다는 사실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만약 물이 있다면 당장 박한빈의 얼굴에 뿌려버렸을 성유리지만 물이 없으니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시골에서 자란 성유리는 이런 일을 종종 봐왔었지만 결국 본인이라는 “턱”을 넘지 못해 포
담담하게 사인을 하던 성유리는 마지막에 화를 못 이기고 종이를 연필로 찢었다. 허나 그녀는 찢어진 종이를 신경도 안 쓰고 서류를 박한빈에게 던지듯 건넸다. 그리고는 박한빈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옆으로 몸을 돌리더니 차에서 내리려 했다. “어디로 갈 건데? 데려다줄게.” 순간, 박한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맞다! 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으니까 내일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자. 아침에 데리러 가도 되지?” 성유리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거절하지 않았고 그대로 차 문을 닫아버렸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차 안에는 또다시 적막이 찾아왔고 박한빈은 운전대를 잡은 채로 성유리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 그녀가 던진 서류를 손에 쥐었다. 일부로 두 개의 서류를 준비한 박한빈은 성유리가 두 장 다 사인을 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잊은 탓인지 아니면 보기도 싫어 두고 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유리가 가져가야 하는 서류는 박한빈의 손에 들려있었다. 박한빈은 뭐가 어떻게 됐든 성유리가 사인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류를 잘 넣어두고 박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고 시간도 너무 늦지 않았기에 김난희와 김서영도 깨어있었다. 저번 일이 발생한 뒤로 두 사람의 사이는 얼음 빙판을 걷는 듯 차가웠고 김나희는 김서영이 박씨 가문의 체면을 다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서영은 이미 김난희의 생각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고 두 사람은 같은 집 안에 있지만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집에 돌아온 박한빈을 발견한 두 사람은 깜짝 놀랐고 김난희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밥상 위에 툭 내려놓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집에 돌아올 줄은 아나 보지? 내가 너한테 전화를 몇 통이나 걸었는지 알아?” “죄송합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새벽밖에 시간이 없었습니다. 혹시 새벽에 다시 전화를 걸면 할머니 주무시는데 방해될까 봐 하지 않았고요.”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박한빈을 보던 김난희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지만 혼자 뭐라고 중
김난희는 너무 화가 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박한빈은 감정이 없어 보일 정도로 덤덤했고 차까지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할머니, 저도 이젠 다 큰 어른입니다. 제 평생 삶이 걸린 문제는 이제 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요.” “네 일? 네 놈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경고하는데 네 성이 박 씨인 이상 내 손자고 내 말에 따라야 해!” “잊었나 본데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건 다 내가 너한테 준 거야. 허튼수작 부리면 내가 다...” 김난희는 노발대발 화를 내며 말하다 문득 멈췄다. 박한빈은 그런 김난희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다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물었다. “다 뭐요? 밖에 있는 그 애들 말씀이십니까?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전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그의 말에 김난희는 김서영을 매섭게 노려보았고 김서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박한빈은 두 사람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상관하지 않았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할머니, 걱정 마십시오. 사실 저도 그냥 한 명의 존재만 알 뿐입니다.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이름이 뭔지 모르거니와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지금 공개된 박씨 가문 유일한 상속자는 저 하나잖습니까. 만약 할머니께서도 그 사람을 손자라고 생각한다면 잘 숨어 있으라고 전해주십시오. 정말 내 앞에 나타난다면 그 사람이 박씨 가문의 모든 것에 적응하지 못해 가문의 멸망을 초래할 것 같은데... 할머니 마음이 아프시지 않겠습니까?” 박한빈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짙은 어둠 속에서 이빨을 숨기고 있는 맹수처럼 보였고 김난희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화를 내던 김난희는 천천히 진정하다 떨리는 손으로 박한빈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박한빈! 너 지금 누구 앞에서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김난희는 김서영에게 시선을 돌리며 그녀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역시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너 같은 애한테서 무슨 좋
그러나 그런 감정도 시간이 지나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졌고 김서영이 깨어난 날, 박한빈은 기쁘다는 감정보다는 성유리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부터 고민했다. 성유리의 죄책감을 끌어낸다는 잔인한 계획은 박한빈도 보통 사람이라면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냉철하고 매정한 교육을 받아온 박한빈은 가능했다. 김서영은 어린 박한빈에게 어떻게 해야만 좋은 상인이 되는지, 어떻게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하나하나 알려줬었다. 그녀는 결국 박한빈을 자신이 원하던 상인으로 만들어 냈지만 좋은 아들로 키우지 못했다. 그래서 박한빈은 만약 보통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도 마찬가지다. 김서영은 박한빈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유리한테 무슨 짓을 했니?” 박한빈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자 김서영이 이빨을 꽉 깨물며 다시 물었다. “유리를 협박이라도 한 거야? 요즘 유리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 어떻게 그래? 이게 바로 너의 수단이야?” “네.” 간단하기만 한 박한빈의 대답에 김서영은 안색이 잔뜩 어두워져갔다. “너는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요?” 박한빈은 화를 내는 김서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어머니가 시킨 결혼 아니었습니까? 성유리가 내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원하던 대로 됐는데 도대체 왜 화를 내시는지 저는 이해가 잘 안가네요.” 김서영은 화를 꾹꾹 참으며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난 네가 내 말을 이렇게 잘 듣는 사람인 줄 몰랐어.” 아무 말이 없는 박한빈을 보던 김서영은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는지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빈아, 전에는 엄마가 잘못했어. 유리는 너랑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이미 이혼하지 않았니? 지나는 길은 지나간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자신이 머무르는 호텔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금성에서는 아마 박한빈이 모르는 곳이 없을 테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찾아낼 수 있다. 다음 날, 성유리가 깨어나자마자 초인 종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앞에는 박한빈이 서 있었고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자. 혼인 신고하러 구청에.” 오늘 다른 정장 외투 없이 깔끔한 하얀 셔츠만 입은 박한빈은 앞머리까지 내려 평소와는 약간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마치 수년 전, 자신이 몰래 훔쳐보던 박한빈이 떠올라 멍해졌다. 성유리는 이제야 그때 박한빈의 모습 또한 가짜였다는 것을 알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뻔뻔하고 파렴치한 사람이 진짜 박한빈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옷은 이미 내가 다 준비했어. 혼인 신고하는 데 필요한 물건은 잘 챙겼지?” 성유리는 아직 찾지 못했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속내를 다 아는지 웃으며 계속 말했다.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는데 이제 와서 미처 못 챙겼다는 말로 시간 끄려는 건 아니지?”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인데? 아니야?” 성유리는 두 주먹을 꽉 쥐었지만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다 챙겼으니까.”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에 만족한 듯 더 환하게 웃더니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건네주며 재촉했다. “가서 이 옷으로 갈아입고 와. 빨리 가자.” 두 사람은 이내 빠르게 구청에 도착했고 성유리는 이번에 3번째 방문이라 딱히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3번이나 같은 남자와 구청에 온 본인이 한심했고 올 때마다 성유리의 마음은 더 차가워져 있었다. 어차피 처음 하는 결혼이 아닌 두 사람인지라 혼인 신고를 하는 모든 과정을 아주 익숙하고 신속하게 처리했다.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장이 꾹 찍힌 혼인 신고서는 그들의 손에 쥐어졌다. 성유리는 혼인 신고서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가방 안에 던지듯 넣어버리고는 택시를 타려고 뒤를 돌았다. 하지만 뒤에 있던 박한빈이 재빨리 성유리의
김서영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비록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네가 우리 한빈이랑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니까 주는 거야. 이건 내가 결혼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건데 오늘 유리 너한테 넘겨줄게. 처음 만나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받아.” “이건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괜찮아. 어차피 한빈이는 평생 유리 너랑 살겠다고 마음먹었잖아. 결국 이건 네 손에 들려야 할 거야.” 옅은 미소를 띠며 말하는 김서영을 성유리는 조용히 쳐다만 보았다. 눈앞에 있는 김서영은 여전히 성유리가 알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사람이었고 전과는 다를 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러한 김서영도 박씨 가문이라는 큰 “철창”에서 벗어나려고 목숨까지 바친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서영이 사랑했던 남자는 이미 세상을 떴고 두 사람의 일은 세상에서 점점 잊혀갔다. 그리고 김서영마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달랐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김서영을 대해야 하는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 대신 김서영이 건넨 물건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김서영은 그런 박한빈에게 시선을 휙 돌리더니 입을 뗐다. “할머님 편찮으시다. 올라가서 얼굴이나 뵙고 가. 유리는 여기 놔두고.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유리도 같이 올라가고 싶습니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꽉 잡으며 김서영의 말에 거부 의사를 비쳤다. “이미 혼인 신고까지 마쳤는데 내가 설마 유리를 어떻게 하겠니?” 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은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뒤돌아 위층으로 뚜벅뚜벅 올라갔다. “앉아.” 멀뚱멀뚱 서 있는 성유리에게 김서영이 다정하게 말했다. “일부러 네가 좋아하는 홍차로 끓였어. 이거 좋아하는 거 맞지?” 성유리는 앞에 놓인 찻잔과 김서영을 번갈아 보다 물었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세요?” 김서영은 말없이 성유리를 쳐다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를
꿈속에서 박한빈은 성유리가 연정우에게 다가가는 것을 막으려고 다급히 뛰어갔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망치고 성유리를 다시 자기 곁에 세우고 싶어 그녀의 손에 거의 닿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눈을 번쩍 떴다. 눈이 부시게 비추는 햇살 때문인지 박한빈은 눈물이 맺혔고 정신을 다잡고는 옆에 누워있는 사람을 안으려 했다. 하지만 옆에 있는 것은 오직 베개 하나뿐이었다. 큰 방에 홀로 남겨진 박한빈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빠른 속도로 아래층에 내려간 박한빈은 얼른 성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세요?” 성유리는 박한빈의 전화를 꽤 빨리 받았다. “어디야?” 박한빈은 잠긴 목소리로 물었고 성유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내, 문 벨 소리가 성유리의 대답 대신 들렸다. 성유리도 벨 소리를 들었는지 박한빈과의 통화를 끊어버리고는 입구 앞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박한빈은 성유리가 다른 곳이 아닌 뒤에 있는 정원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성유리를 본 박한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녀 손에 들려있는 약 봉투를 발견했다. 머릿속에는 약 봉투 안에 뭐가 담겼는지 떠올랐지만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성유리는 약을 개봉하더니 물과 함께 꿀꺽 삼키더니 박한빈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왜 저를 찾은 거죠?” 박한빈은 어떤 대답도 없이 상위에 놓인 약상자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예상은 딱 맞아떨어졌고 박한빈은 꽉 쥐었던 주먹에 서서히 힘을 풀었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보며 되물었다. “배 안 고파? 나가서 밥 먹을까?” “저 약속이 있어서 나가봐야 돼요.”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보니 이미 그녀가 외출복 차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허리라인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연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성유리는 유난히 더 아름다웠다. 안 하던 화장까지 하고 머리도 깔끔하게 묶어 목선이 드러난 성유리를 말없이 쳐다보던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랑 한 약속인데?” “...” 아무 대답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운 건지도 기억을 못 했다. 몇 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진 성유리는 비몽사몽인 상황에서 누군가 자신의 몸에 닿는 느낌을 받았다. 서서히 눈을 뜬 성유리는 자기 옆에 누워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깨어난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바로 성유리의 종아리를 잡더니 힘껏 그녀를 깔았다. 성유리는 화가 나 손을 뻗어 박한빈의 얼굴이라도 할퀴고 싶었지만 그는 어느새 그녀의 두 손을 다 잡아 자신의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박한빈의 힘을 당할 수 없었던 성유리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했고 그는 순순히 따르는 그녀에 더 흥분했다. 가만히 있는 자신을 잡고 이런저런 자세를 취하며 사랑을 나누고 있던 박한빈이 방심하는 틈을 타 성유리는 그의 배를 강하게 차버렸다. “저 숨 좀 쉬게 놔두면 안 돼요?” 진심이 담긴 자신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박한빈을 본 성유리는 그가 정말 정신병자라고 생각했다. 성유리는 옆으로 돌아 박한빈을 애써 무시하며 자려고 했지만 박한빈은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저항하면 할수록 더욱 강하게 안던 박한빈은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 할게.” “근데 네가 이렇게 계속 움직이면 난 안 한다는 보장은 못 해.” 박한빈의 말이 성유리에게 먹혔는지 그녀는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시간이 오래 흐르도록 잠에 들지 못한 박한빈은 지금 자기 품에 얌전히 안겨있는 사람은 아주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어나면 또 나를 그런 눈으로 보겠지.’ 박한빈이 아무리 애를 쓰며 관심을 받고 싶어 해도 성유리는 눈길 한번 돌려주지 않았고 분노와 원망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또 좋아지겠지.’ 박한빈의 강압 아래 다시 혼인을 한 두 사람이니 그는 성유리가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고 품에 있는 그녀를 더욱 꽉 안았다. 성유리는 잠에 들었지만 매우 불편한지 미간을 찌푸렸고 박한빈은 서서히 힘을 풀었다. 박한빈은 잠이 든 성유리의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성유리는 물이 마시고 싶은 것도 꾹 참고 뒤척거리며 잠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목이 너무 말라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혼자만의 싸움을 벌이던 성유리는 결국 아래 주방으로 내려가 물을 마시기를 선택했다. 조명이 다 꺼진 집은 어두컴컴했고 성유리는 복도 등만 켠 채로 주방에서 물을 따랐다. 물컵에 물이 가득 채워지는 순간, 성유리의 뒤에서 누군가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한 잔만 따라줘.”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성유리는 컵을 떨어뜨렸고 놀란 박한빈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 보호했다. 하지만 성유리는 그의 손을 뿌리쳤고 박한빈은 멋쩍은 듯 주방으로 걸어가더니 다시 물을 따라 성유리에게 먼저 건넸다. 성유리는 그가 내민 물컵을 무시하고는 다시 혼자 따랐고 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묵묵히 쳐다만 보다가 표정이 굳어갔다. 갈증을 해소한 성유리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 자려고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팔을 확 낚아채듯 잡았다.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다른 쪽 손까지 잡더니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녀는 강한 박한빈의 힘에 못 이겨 벽에 딱 붙은 채로 화를 내며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뭐 하려는 것 같은데?” 박한빈은 씩 웃으며 되물었다. “유리야, 오늘 우리 신혼 첫날밤인데?” ‘첫날밤?’ 성유리가 생각에 잠기는 찰나, 박한빈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했다.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돌아온 박한빈의 입에서는 아직 강한 술 냄새가 진동했지만 그는 마치 맹렬한 짐승처럼 성유리의 입술을 탐했다. 성유리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박한빈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더욱 강하게, 더욱 진하게 키스했다. 그녀의 두 손은 여전히 박한빈에 의해 꽉 잡혀있었기에 저항조차 할 수 없었고 박한빈은 성유리의 잠옷 안으로 천천히 손을 넣었다. 성유리가 입고 있던 잠옷은 박한빈이 방 안에 준비해 둔 실크 잠옷이었다. 단추를 하나하나 다 잠근 성유리
늦은 밤, 도연제. 박한빈은 꽤 늦은 시각이었지만 돌아오지 않았기에 성유리는 그를 상관하지 않고 혼자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다. 얼굴에 선명하게 남은 붉은 자국을 계단으로 비비자 점점 옅게 변했다. 성유리는 원래 박한빈이 집에 돌아와 자신의 얼굴을 보면 뭐라 할 것 같아 내심 걱정했지만 그럴 필요 없겠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한 성유리는 오늘 박한빈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해진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았다. 똑같은 넓은 집에 똑같이 홀로 남아 남편을 기다리는 것 말이다. 그러나 성유리가 지금 누운 곳은 작은 방이 아닌 큰방이었다. 아마 이런 큰 변화 때문일까, 성유리는 누운 지 한참이 지났지만 잠에 들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차라리 작은 방에 누워있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작은 방은 성유리가 익숙해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곳은 익숙한 냄새였지만 성유리와 박한빈에 관한 물건들이 가득 차 있었고 전과는 사뭇 달랐다. 익숙하고도 낯선 장소는 마치 천천히 자신을 베는 날카로운 칼처럼 느껴졌고 죽을 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심한 고통이었다. 성유리는 침대에서 한 시간을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려고 할 무렵, 아래에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신경 쓰지 않으려 눈을 더욱 질끈 감았지만 이내 누군가 벨을 누르는 소리를 들었고 성유리는 못 들은 척 무시했다. 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도 않고 한번, 또 한 번 눌러댔고 성유리는 그제야 집안에 다른 도우미가 없기에 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결국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준 성유리는 문 앞에 서 있는 서훈과 박한빈을 발견했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주무시는 데 방해했네요.” 서훈은 잔뜩 움츠러들며 말을 이어갔다. “박 대표님께서 너무 취하시는 바람에 모시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유리는 박한빈과 서훈을 번갈아 보다 문 앞에서 비켜주며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그거랑은 다르죠.” “뭐가 다른데?” 성유리도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쳐다보며 계속 물었다. “다 알면서 왜 계속 묻는 거죠?” 박한빈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점점 더 실렸다. 성유리는 그와 달리 아주 평온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저희는 초혼이 아니라 재혼이잖아요. 굳이 결혼식을 해야겠어요?” 박한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김서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생각도 유리랑 같아. 그리고 혼인 신고서도 이미 손에 넣지 않았니? 결혼식은 그저 형식일 뿐이야. 중요하지 않잖니?” “하지만 결혼 사실은 알려야 할 거야. 그러니까 결혼식보다는 연회 같은 거 준비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니?” 김서영의 말에 성유리는 더는 반박하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요. 저는 꼭 결혼식을 치를 겁니다. 이미 다 말해놔서 번복 못 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는 김서영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성유리만 쳐다봤다. 성유리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지금 자기가 마치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툭 터져버려 공중에서 사라지는 그런 우스운 풍선 말이다. 풍선이 아니라면 떼를 쓰는 어린아이나 관심받고 싶어서 애를 쓰는 철없는 어른이라고 형용할 수 있다. 하지만 옆에서 별의별 일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어떠한 반응도 해주지 않는 성유리가 미웠고 자기 자신이 우스웠다. 박한빈은 성유리에게서 시선을 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말했다. “저는 또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디 가게?” 김서영이 물었다. “회사요.” “그럼 유리는?” 성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박한빈을 보고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마 김서영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성유리는 그제야 박한빈을 쳐다보았다. 박한빈은 속으로 내심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바랐지만 성유리는 그러지 않았다. 뒤돌아 빠른 속도로 앞으로 걸어 나가는 박한빈은 사실 별일이 없었지만 빨리 이곳에서
김서영의 말에 성유리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에 김서영은 불쾌함을 느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 성유리가 천천히 입을 뗐다. “역시 사모님은 여전히 그 사람을 많이 사랑하고 계시네요.” 가볍게 던진 성유리의 한 마디에 김서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는 사모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그렇다 해서 박한빈 씨를 용서할 생각은 없고요.” 성유리는 찻잔을 상에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박한빈 씨가 업계 상의 위치를 이용해 그렇고 그런 수단과 방법으로 강압하고 위협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됐을 거예요.” “만약 사모님이시라면 이런 상황에서 다시 그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나요?” 김서영은 성유리의 말에 뭐라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만약 성유리가 자신의 말에 강하게 반박하고 따졌다면 김서영은 아직 그녀가 박한빈에게 감정이 남아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전혀 흥분하지 않았고 오히려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했다. “나도 알아.” 몇 분 뒤, 김서영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이름이 연정우라고 했나? 근데 유리 너도 그 남자를 좋아했어?” “네.” 평온한 말투로 제일 듣기 버거운 말을 내뱉는 성유리의 대답에 계단 앞에 서 있던 박한빈은 몸이 굳어 발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성유리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연정우와는 그저 평범한 비즈니스 사이라고 성유리가 직접 인정했었다. 왜 결혼을 하냐고 물었을 때도 성유리는 직접 박한빈에게 연정우의 외할아버지가 건강이 악화돼서 서두른다고 알려줬다. ‘어떻게 유리가...’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박한빈의 뒤에 서 있던 집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요?” 집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김서영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동공이 많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옆에 있던 성유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김서영은 성유리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비록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네가 우리 한빈이랑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니까 주는 거야. 이건 내가 결혼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건데 오늘 유리 너한테 넘겨줄게. 처음 만나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받아.” “이건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괜찮아. 어차피 한빈이는 평생 유리 너랑 살겠다고 마음먹었잖아. 결국 이건 네 손에 들려야 할 거야.” 옅은 미소를 띠며 말하는 김서영을 성유리는 조용히 쳐다만 보았다. 눈앞에 있는 김서영은 여전히 성유리가 알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사람이었고 전과는 다를 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러한 김서영도 박씨 가문이라는 큰 “철창”에서 벗어나려고 목숨까지 바친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서영이 사랑했던 남자는 이미 세상을 떴고 두 사람의 일은 세상에서 점점 잊혀갔다. 그리고 김서영마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달랐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김서영을 대해야 하는지 몰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박한빈은 그런 성유리 대신 김서영이 건넨 물건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김서영은 그런 박한빈에게 시선을 휙 돌리더니 입을 뗐다. “할머님 편찮으시다. 올라가서 얼굴이나 뵙고 가. 유리는 여기 놔두고.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유리도 같이 올라가고 싶습니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꽉 잡으며 김서영의 말에 거부 의사를 비쳤다. “이미 혼인 신고까지 마쳤는데 내가 설마 유리를 어떻게 하겠니?” 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은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뒤돌아 위층으로 뚜벅뚜벅 올라갔다. “앉아.” 멀뚱멀뚱 서 있는 성유리에게 김서영이 다정하게 말했다. “일부러 네가 좋아하는 홍차로 끓였어. 이거 좋아하는 거 맞지?” 성유리는 앞에 놓인 찻잔과 김서영을 번갈아 보다 물었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세요?” 김서영은 말없이 성유리를 쳐다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를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자신이 머무르는 호텔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금성에서는 아마 박한빈이 모르는 곳이 없을 테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찾아낼 수 있다. 다음 날, 성유리가 깨어나자마자 초인 종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앞에는 박한빈이 서 있었고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자. 혼인 신고하러 구청에.” 오늘 다른 정장 외투 없이 깔끔한 하얀 셔츠만 입은 박한빈은 앞머리까지 내려 평소와는 약간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에 성유리는 마치 수년 전, 자신이 몰래 훔쳐보던 박한빈이 떠올라 멍해졌다. 성유리는 이제야 그때 박한빈의 모습 또한 가짜였다는 것을 알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뻔뻔하고 파렴치한 사람이 진짜 박한빈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옷은 이미 내가 다 준비했어. 혼인 신고하는 데 필요한 물건은 잘 챙겼지?” 성유리는 아직 찾지 못했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려 했지만 박한빈은 그녀의 속내를 다 아는지 웃으며 계속 말했다.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는데 이제 와서 미처 못 챙겼다는 말로 시간 끄려는 건 아니지?”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인데? 아니야?” 성유리는 두 주먹을 꽉 쥐었지만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걱정마세요. 다 챙겼으니까.” 박한빈은 성유리의 대답에 만족한 듯 더 환하게 웃더니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건네주며 재촉했다. “가서 이 옷으로 갈아입고 와. 빨리 가자.” 두 사람은 이내 빠르게 구청에 도착했고 성유리는 이번에 3번째 방문이라 딱히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3번이나 같은 남자와 구청에 온 본인이 한심했고 올 때마다 성유리의 마음은 더 차가워져 있었다. 어차피 처음 하는 결혼이 아닌 두 사람인지라 혼인 신고를 하는 모든 과정을 아주 익숙하고 신속하게 처리했다.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장이 꾹 찍힌 혼인 신고서는 그들의 손에 쥐어졌다. 성유리는 혼인 신고서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가방 안에 던지듯 넣어버리고는 택시를 타려고 뒤를 돌았다. 하지만 뒤에 있던 박한빈이 재빨리 성유리의
그러나 그런 감정도 시간이 지나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졌고 김서영이 깨어난 날, 박한빈은 기쁘다는 감정보다는 성유리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부터 고민했다. 성유리의 죄책감을 끌어낸다는 잔인한 계획은 박한빈도 보통 사람이라면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냉철하고 매정한 교육을 받아온 박한빈은 가능했다. 김서영은 어린 박한빈에게 어떻게 해야만 좋은 상인이 되는지, 어떻게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하나하나 알려줬었다. 그녀는 결국 박한빈을 자신이 원하던 상인으로 만들어 냈지만 좋은 아들로 키우지 못했다. 그래서 박한빈은 만약 보통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도 마찬가지다. 김서영은 박한빈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유리한테 무슨 짓을 했니?” 박한빈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자 김서영이 이빨을 꽉 깨물며 다시 물었다. “유리를 협박이라도 한 거야? 요즘 유리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 어떻게 그래? 이게 바로 너의 수단이야?” “네.” 간단하기만 한 박한빈의 대답에 김서영은 안색이 잔뜩 어두워져갔다. “너는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요?” 박한빈은 화를 내는 김서영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어머니가 시킨 결혼 아니었습니까? 성유리가 내 아내가 될 사람이라고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원하던 대로 됐는데 도대체 왜 화를 내시는지 저는 이해가 잘 안가네요.” 김서영은 화를 꾹꾹 참으며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난 네가 내 말을 이렇게 잘 듣는 사람인 줄 몰랐어.” 아무 말이 없는 박한빈을 보던 김서영은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는지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한빈아, 전에는 엄마가 잘못했어. 유리는 너랑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이미 이혼하지 않았니? 지나는 길은 지나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