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릉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 조정에 2품 관리는 첩을 네 명 둘 수 있는데 아버지는 이미 네 명이나 두셨으나 한 명 더 두는 것은 과잉이지. 비록 조정에서 조사하지는 않지만 아버지는 문관의 모범이니 당연히 자신에게 오점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어찌 그런 어리석은 일을..!” 제 황후는 얼굴을 붉히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하면 그냥 하녀로 저택에 데려오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난 후에 아버지가 그 하녀와 어떻게 지내든 상관하는 자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이젠 부모의 금슬도 웃음거리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명성은 실추되었습니다.” 그녀는 두 손을 꽉 잡고 말했다. “북명왕도 참. 왜 가문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신 겁니까?” 제릉서는 마음이 뒤숭숭해서 돌아가서 어떻게 아버지를 마주해야 할지 몰랐었기에 황후의 말을 듣고 말했다.“어젯밤에 황실에서는 사람을 보내 아버지에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기다리시지 않고 외출을 하는 바람에 북명왕이 반 시진을 넘게 기다리다 인내심을 잃고 그냥 가버린 것이다.” 제릉서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너무 오만하고 송석석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일부러 망신을 주려다가 제 발등을 찍은 것 아니냐? 이건 모두 자업자득인 것 같구나.” 그러자 제 황후가 반문했다. “그렇다고 남의 비밀까지 낱낱이 공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왜 그의 통지 하나면 아버지가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까?” “황후마마..!” 제릉서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일로 북명왕과 송 지휘사에게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상황에서 조금의 원한이라도 산다면 두 집안은 정말로 관계가 틀어질 것이야. 북명왕은 민심을 얻었고 송 지휘사도 여자들의 모범이라고..” “여자들의 모범이라니요? 여자들의 모범은 바로 국모인 접니다.” 제 황후는 불쾌해져 말을 끊어버렸다. “네가 국모라는 것은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인데 일개 신하와 비길 필요가 있니? 그러니 절대로
제씨 둘째 어르신은 제상서를 보고 멍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상서는 눈을 감고 빠르게 생각했다. “그녀를 안치한 후 내가 조사해 보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아내지는 못했고 시간이 지나자 그녀를 잊어 버렸어. 내가 소홀해서 초래한 일일 뿐, 나는 사람을 시켜 그녀를 주시하라고만 했지 그녀를 건드린 적이 없다. 그곳의 하녀들이 모두 증언할 수 있다.” 둘째 어르신은 환희로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이 말이 사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형님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수상한 사람이 접근했다면 가문의 사람을 파견해서 조사할 것이고, 조사 결과가 어떻든 간에 안치하는 게 아니라 멀리 내쫓았을 것이 분명했다. “형님.” 둘째 어르신은 마음이 무거웠다. 자신의 형님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다시금 물었다. “대체 왜 그러신 것입니까?” 제상서는 입술을 오므리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 또한 자신이 이런 저급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 여자가 고부진의 서녀라는 사실을 더욱 믿지 못했다. 둘째 어르신이 말했다. “저는 형님께서 대체 왜 그러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형님은 형수님과 금슬이 좋은 데다 형수님도 단아하고 숙덕 해서 일찌감치 형님을 위해 첩실을 마련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제상서는 미간을 문지르며 천천히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하다. 가장 젊은 첩인 환정영도 벌써 올해 마흔이 되어가고 다른 세 명은 벌써 마흔 초반이다. 헌데, 그녀는 올해 갓 열아홉밖에 안 되었다.” 이 일은 그에게 있어서 분명 난감한 일이라 그는 입을 열기가 부끄러웠지만 둘째 동생의 추궁에도 그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순조롭지 않았지. 허나 황제폐하께서 우리 제씨 가문을 중히 여기니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내가 어리석었지만 나도 젊은 시절의 활력을 되찾고 싶은 마음에 그녀의 신분
제릉서는 방에 들어선 후 모두에게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온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뛰쳐나와 황공한 태도로 자신의 신분을 말했다. 여인도 무릎을 꿇었다. 붉은색 드레스에 팬치색 망토를 두르고 있어 그녀의 작은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오늘 사람들이 와서 딸을 데려갈 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고 있었다. 물론 그전부터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고 있었고, 장공주가 무너졌으니 이제 당연히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이 뭡니까?” 제릉서가 분노로 찬 눈빛으로 물었다. “고청묘.”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쉬었지만 꽤 매혹적이었고, 제릉서는 여전히 그녀를 노려보며 계속 물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본 게 언제입니까?” 고청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어제 오후에 상서께서 이곳에서 한 시진 정도 쉬다 가셨습니다.” 제릉서는 한 대 맞은 듯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 오후에도 아버지가 왔었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이부를 장관 하시는데 점심엔 대부분 이부 후아에 계셨지. 설마..?’ “그는 항상 정오에 옵니까?” “예, 맞습니다.” 제릉서가 화가 난듯 이를 갈며 물었다. “얼마 만에 한 번 옵니까?” 고청묘는 냉정한 눈빛으로 사실대로 대답했다. “이틀에 한 번씩 오십니다.” “말도 안 돼!” 제릉서는 벌컥 화가 나서 냅다 소리쳤다. 고청묘는 고개를 들어 제릉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믿을 수 없다면 하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는 딸을 보러 자주 왔습니다.” 제릉서가 째려보자 모든 사람이 너도나도 급히 무릎을 꿇었다.방금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말했었는데, 계산해 보면 시녀 8명, 시종 3명, 유모 2명, 호위 2명, 차부 2명, 정원사 1명, 그리고 조리사 4명 정도가 된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모두 그녀와 그녀의 딸을 모신다는 말인가...?’ 제릉서가 두 마마에게 눈짓을 보내자 두 마마는 즉시 고청묘를 끌고 들어갔다. 고청묘는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매우 협조적이
전숙이 말했다. “그래, 네 아버지는 원래 제1여관이라 불리는 송석석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네 아버지도 찾지 못한 일을 조사해 내니 네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느냐? 헌데, 그 여자에게 딸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가서 보지 못했느냐?” 그러자 제릉서가 얼른 답했다. “그거 모두 헛소리입니다. 딸은 없고 오직 그녀와 그녀를 지키는 사람들만 있었습니다.” “그럼 됐다.” 전숙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제릉서 또한 자신의 어머니가 안심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조부 쪽에는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제제사한테는 제사서가 직접 가서 보고했는데, 제제사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그의 뺨을 후려치며 꺼지라고 했다. 제제사의 방에서 비틀거리며 나온 제상서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는 이 일은 북명왕을 탓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정에서 인덕과 겸손했지만 유독 송석석에게만 석연치 않았다. 그가 여관이라는 이유로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것이었다. 또한 그는 송석석에게 너무 오만하게 굴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대리사에 가서 설명할 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대리사에서 다시 저택으로 찾아오면 그땐 가문의 사람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어질 것이다. 대리사에선 오늘 사온의 서건을 조사했는데, 이번엔 황제폐하의 지시대로 그녀에게 형벌을 가했다. 그녀는 손가락이 부러질 정도로 심한 형벌을 받아 아파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찍소리 하나 하지 않았다.도중에 아파서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난 그녀에게 허약하지만 흉악한 말투로 말했다.“다른 수단이 있다면 다 해보거라.”그녀의 말을 들은 진이도 고려하지 않고 기본적인 형벌은 모두 한 번씩 가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참아내기만 했다.사람들은 역시나 이런 결과를 예상했다.‘선제께서 혹독한 형벌을 취소하지만 않았어도 그녀가 한 두 명은 자백할 수 있었을 텐데.’황제도 선제가 취소했던 형벌을
제상서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왕야님, 황제폐하께서는 이 여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계획이십니까?” 그러자 사여묵은 다소 차갑게 답했다. “그건 송 지휘사에게 물어보십시오. 이 부분은 그녀가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제 상서는 난처한 표정으로 송석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송 지휘사님…….” 그러자 송석석이 그의 말을 끊어 버렸다. “저는 이미 제 대인께 말했습니다. 그러니 제 씨 가문에서 직접 관리하셔도 되고 경위로 보내 통일로 관리해도 됩니다. 이건 제 상사가 결정하십시오. 제씨 가문에서 관리한다면 그녀들이 진성을 떠난다 거나 다른 사람과 접촉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역모사건의 주모자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제 상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위에게 통일로 관리를 맡긴다면 어디로 데려갈 생각 입니까?” “저희가 이미 진성 곳곳의 암자에 연락하여 그녀들을 수용할 만큼 큰 암자가 있는지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수용할 비용은 고후부와 공주부를 수색해서 얻은 은전으로 지불할 것입니다.” “암자 말입니까?” 제 상서는 두 순으로 무릎을 만지며 생각하는듯 했다. “그렇다면 조건이 그리 좋지는 않겠네요.” “먹고사는 건 보장하지만 호화롭게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송석석은 잠깐 멈추더니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역모사건이 종결되면 그녀들도 암자를 떠나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루라도 사건이 종결하지 않으면 그녀들은 계속 암자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뜻이군요.”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맞습니다. 제 상서께서 안쓰럽다고 생각된다면 가문에 남겨두고 혼자 관리해도 됩니다. 다만 그렇게 해서 문제가 생긴다면 제 상서가 책임져야 하겠지요.” 제 상서가 연신 고개를 저었다. “경위에게 맡기겠습니다.” “제 상서께서 그렇게 결정하셨다면 저희가 사람을 데려갈 것이지만요, 제 상서
그들은 고부진을 심사할 때도 형벌도구를 적지 않게 사용했다. 평시에는 찍소리도 못하던 겁쟁이가 웬일로 강인하게 아무것도 모른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는 자신도 이용당한 것이라고 우겼다.형벌을 받을 때 그는 울부짖었다.“나는 피해자요. 사온이 가장 미안한 사람은 나와 부인, 그리고 내 딸들이오. 사람을 죽이고 다른 가문으로 보내다니 정말 미친 여자요. 이제 그녀도 체포되었으니 나도 드디어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소.”경조부의 공양도 직접 그를 심문하러 왔었다. 경조부는 대리사보다 형벌을 더 많이 사용하고 수단이 더 많았지만 고부진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잡아뗐다.사건은 아침 조정에서 보고했는데 문무백관들은 모두 듣고 있었다. 모두들 불안하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모두의 마음이 안정되었다.조정에 가지 않던 연왕조차도 사온과 고부진이 아무도 불어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하인들이 연왕과 회왕이 공주부에 갔었다고 자백했다. 하지만 그들 말고도 진왕과 녕왕, 그리고 회왕마저 갔었다. 그러니 그들이 역모를 꾸민 걸 직접 듣지 못한 이상 증거로 삼을 수 없었다.왜냐하면 오라버니나 동생으로서 누나나 동생을 면회하러 가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기 때문이었다.게다가 연왕은 진성으로 돌아온 후 장공주댁에 한 번 밖에 가지 않았으니 어떤 일도 그를 끌어들일 수 없었다.이 사건도 드디어 중단되었다. 숙청제가 아침 조정에서 명령을 내렸다. 경위가 책임지고 사온을 종인부에 가두고 대리사는 계속 역모사건을 조사하고 언제 배후를 알아내면 언제 사건을 종결할 것이라고 했다.피해를 입은 여자들을 위해 고부진을 처형하고 고후부는 공범이 되어 작위를 회수하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숙청제는 그들의 집을 수색하지 않았고 몇 년 동안 장공주의 덕에 모은 재산도 몰수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 은자 10만 냥을 내놓아 그 여자들을 안치하도록 했다. 첩은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서녀들은 모두 암자에 남았다. 그들이 먹고 생활하는 돈은 모두 고후부에서 냈다. 이
연왕도 무상과 이 일을 상의했다. 무상은 사람을 파견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지만 연왕은 사온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를 폭로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멍청한 군주가 간교하긴. 그렇게 많은 무기와 갑옷을 조사해 내 일벌백계하다니. 사온을 종인부에 가두었으니 사건이 종결되지 않는 한 사여묵이 계속 미친개처럼 본왕을 물어뜯을 것이다. 그러니 사온이 살아있다는 건 나에게 아주 큰 위협이야.” 그러자 무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위협이긴 하지만 작전이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사온은 미친년이니 그땐 바로 당신을 폭로할 것입니다.” “그래서 본왕은 구출의 명목으로 접근한 뒤 기회를 봐서 그녀를 암살할 작정이다.” 하지만 무상은 여전히 반대했다.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왕야님은 그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 없습니다. 왕야님은 매일 궁에 들어가 간호만 하면 됩니다. 다른 일은 일제 상관하지 마십시오. 이게 최상의 방법입니다.” “아무래도 모험이다. 하지만 그녀가 죽지 않으면 난 하루도 편한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연왕의 눈 밑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무상은 그가 결정을 내린 것을 보고 말했다. “왕야님께서 정말로 그렇게 하시겠다면 사사들을 무림 인사로 변장시켜 죄수들을 겁탈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황제폐하께서는 사온이 무림에서 사람들을 키운 것이라고 추측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엔 송석석이 호성 하는 것이기에 그녀의 눈 밑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구하는 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연왕은 요즘 밤잠을 이루지 못해 많이 초췌해졌는데 외부인들은 어머니 걱정에 지쳤다고 생각했다.그는 계속 말했다. “언제 호송할 것인지 알아보고 10명만 파견하면 될 것이다. 지금은 사온의 사람을 쓸 수 없으니 정보를 알아볼 때 회왕부의 사람을 쓰도록 하거라.” 그러자 무상은 고개를 끄덕
아니나 다를까 석연거리를 지나자 송석석은 사방에서 살기를 느꼈다. 그 살기는 매우 강해서 보통 사람이 맡을 수 없는 피비린내까지 섞여 있었다. 송석석은 이런 느낌에 너무나도 익숙했다. 바로 장군부에 나타났던 사사들의 기운이었다. ‘사부님은 예전에 송석석에게 사사를 양성하는 과정이 매우 가혹하다고 했었지. 살아남은 사람은 짐승의 시체나 사람의 시체를 밟고 나온 자들이었다. 시체가 가득한 피바다에서 빠져나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무공이 강하고 포악하면서도 짙은 살기와 피비린내를 뿜어내지.’ “모두 경계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소리를 뚫고 모두의 귀에 떨어졌다. 모든 사람들의 눈빛에는 경계로 가득 찼고 무기를 쥐고 주변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사거리를 자나자 공기 중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칼날이 칼집을 나와 바람을 스치는 소리였다. “멈춰.” 필명은 손을 들어 대열을 멈추게 하고 부근의 백성들을 해산시켰다. “자객이 있어 위험합니다.” 백성들은 모두 장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이라 많지 않았다. 그들은 필명의 말을 듣고 멍해 있다가 바로 발을 빼서 도망쳤다. 이때 장검 한 자루가 허공을 가르며 송석석을 향해 날아왔다. 송석석은 바로 말에서 날아올라 도화창으로 막자 검이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좌우에서 열 명가량의 사람이 날아왔다. 그들은 모두 얼굴을 가린 채 병기를 손에 쥐고 송석석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송석석뿐인 것 같았다. 송석석은 안색이 굳어지며 재빠르게 검 위로 날아올랐고, 도화창으로 쓸어버리자 검은 땅에 떨어져 진동을 일으켰다. “죽여라.”필명은 검을 들고 앞으로 돌격했다. 경위는 10명을 남겨 마차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진했다.송석석의 도화창으로 막으며 돌진하자 자객들은 연신 후퇴했다. 금창이 땅에 부딪쳐 불꽃이 튀면서 챙그랑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송석석은 바람이 낙엽을 쓸어내리는 것 같이 속도가 빨랐다. 적어도 5명의 자객이 송석석과 싸우
고청우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역겹다는 눈빛이 새어 나왔다. ‘버러지 같은 놈, 능력도 없고 용맹하지도 못하면 마음이라도 독하게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천하의 멍청한 놈!’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말했다.“역시 저희 서방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제가 서방님을 참 잘 만난 것 같네요.”한편, 결심을 하고 나니 왕표는 되레 마음이 너무 편했다. 그는 고청우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눈앞의 이 여자와 남은 평생 신분을 숨긴 채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상상을 하고 있었다.지금까지 남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삶도 살아봤고 나라를 위해 목숨도 잃을 뻔했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왕표는 절대 잘못한 게 없으며 더군다나 그가 남강에 있든 없든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어차피 제린과 방천허 등 부하들은 그를 원수로 인정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가서 왕진을 불러오게. 이곳을 떠나기로 했으니 그자와 논의해서 우리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가야지.”왕진은 본래 평서백부의 교두였는데 왕표를 따라 남강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다.왕표는 전에 최씨가 그의 곁에 몰래 사람을 붙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부인 고청우가 남강에 오고나서 최씨가 심어놓은 사람들을 전부 제거한 것이다.때문에 지금 저택에 남아있는 부하들은 왕표의 믿음을 듬뿍 받고 있는 자들이다.한편, 왕표의 계획을 들은 왕진이 흠칫 놀랐지만 이내 찬성했다.남강에 오기 전, 왕진은 진성에서 더할 나위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고 평서백부에서 교두로 지내던 나날들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하지만 왕표를 따라 남강에 오고 나서부터 좋은 술을 마셔본 적도 없고 입맛에 맞는 요리를 먹어본 적도 없었다.지금 그 부귀영화를 누리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데 그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더군다나 전쟁이 터져서 왕표가 전장에 나가면 왕진도 따라가서 목숨 걸고 피 터지게 싸울 수밖에 없다.왕진 등 사람들은 정식적인 사병이 아니기에 지금 도망간다고 해도 그들의
몰래 저택 안으로 들어온 무당은 10분 뒤, 다시 뒷문으로 빠져나갔다.한편, 저택에 앉아있던 왕표는 온몸에 힘이 쫙 풀렸으며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조금 전, 무당은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담담하게 한 마디만 뱉었다.“장군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그리고 나서는 고청우가 아무리 울며 빌어도 무당은 입을 꾹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굿을 해달라고 해도 단호하게 거절하며 소용없는 짓이라고 얘기했다.그러다가 저택을 떠나기 전, 무당은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이 땅은 장군의 무덤입니다. 장군님께서는 가족들을 달 대피시키십시오.”무당의 말에 왕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이 남강 땅에 얼마나 많은 장군의 뼈들이 묻혀 있단 말인가! 더할 나위 없이 용맹하고 전쟁 경험이 많은 송회안 부자도 이 땅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왕표는 송회안 부자를 존경하지만 두 사람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만약 전장에서 죽는다면 평서백부가 아무리 대대손손 흥한다고 해도 왕표는 전혀 그 영광을 누리지도 못할 것이고 심지어 그의 부인과 아들도 이를 누릴 수 없다.이때, 고청우가 뒤에서 왕표를 끌어안고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서방님, 서방님께서 전장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면 저와 아들도 서방님을 따라 가겠습니다.”“아니, 난 절대 죽을 수 없어!”눈물을 뚝뚝 흘리는 고청우를 보며 왕표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고청우의 손을 덥석 잡더니 결심한 듯 말을 이어갔다.“우린 아무도 안 죽을 것이오. 전에도 약속하지 않았소?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남강 땅을 떠날 것이오!”흠칫하던 고청우가 당황한 기색으로 왕표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저희가 정녕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요? 이 저택에 저희 사람만 있는 건 아닙니다. 더군다나 모든 걸 버리고 몸만 떠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왕표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안일한 생활을 오랫동안 보낸 왕표는 절대 가난하게 살 수는 없었다.반드시 당당하고 순조롭게 금은보화를 저택 밖으로
한편, 남강에서 왕표는 며칠동안 계속 좌불안석이었다. 그는 사국 병사들이 정말 쳐들어올 줄은 몰랐으며 시씨 가문 도련님이 보낸 서신이 사실일 줄도 전혀 몰랐다.왕표는 방천허 등 사람들과 몇 번이고 논의를 했지만 그자들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으며 쳐들어오면 바로 전쟁을 치르면 된다고 했다.방천허가 보인 자신감에 왕표는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지만 전쟁이 일어난 순간 왕표는 절대 군영에서 지휘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그리고 방천허 등 병사들에게 정말 그만한 실력이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송씨 가문 군대와 북명군은 평소에도 건방진 태도로 왕표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병사 훈련을 진행하지 않았기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승산이 높지 못할 것이다.왕표는 자신의 다리를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비가 내리면 다친 무릎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으며 전장에서 다리도 잃을 뻔했다.진성으로 돌아가 오랜 시간의 치료를 통해 겨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가끔 다리가 불편했다.왕표는 전장에서 죽음에 이르렀던 그 순간을 여전히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살인으로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심지어 칼을 들 힘도 없었다.그뿐만 아니라 몸에 입고 있는 갑옷이 너무 무거웠던 탓에 적에게 공격을 당했을 때 누군가가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왕표는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을 것이다.물론 이제 원수가 된 왕표는 굳이 전장에 직접 나갈 필요가 없지만 남강에는 원수가 숨어서 지휘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앞장서서 싸워야 한다는 전통이 있었다.그 전통을 만든 사람이 바로 송회안과 사여묵이었고, 제린과 방천허도 이 전통을 찬성하는 바였다. 원수가 전장에 직접 나서야만 병사들의 투지와 열정을 끌어올릴 수 있어, 짧은 시간 내에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바로 그때, 대문이 열리며 고청우가 인삼차를 들고 들어왔다.왕표는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긴 채 고청우를 쳐다보았고 고청우는 조금 전에 울고 온 듯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
임 태의는 북명왕의 상태가 걱정되어 황실에 남아 밤을 보내려고 했지만 저녁쯤 돌아온 단 신의가 한걸음에 황실로 달려와 북명왕에게 단설환 한 알을 건네 주었다.단설환을 복용한 북명왕은 흉부 통증이 바로 완화되었고 임 태의가 맥을 짚어보니 그가 처방한 약보다 효과가 훨씬 좋았다.임 태의는 오래 전부터 단 신의의 명성을 익히 전해 들었기에 굳이 자신이 황실에 남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위로 몇 마디를 남긴 뒤 황실을 떠났다.임 태의가 가자마자 단 신의는 북명왕을 위해 처방을 했고 제자를 시켜 약왕당에서 가서 약재를 구해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약을 먹은 사여묵은 가슴에 꽉 막혀 있던 큰 돌멩이가 사라진 기분이었으며 겨우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임 태의가 내일도 찾아올 걸세. 때문에 왕야께서 진성을 떠난다고 해도 내일 저녁까지 저택에 계시다가 출발하셔야 하네.”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임 태의께서 내일 다시 장군님의 맥을 짚어본다면 모든 게 들통나는 거 아닙니까?”“사람을 시켜 저택 밖에서 지켜보다가 임 태의가 나타나면 내가 다시 왕야께 약을…”“약을 또 드셔야 한다는 겁니까? 더 이상 중독되면 안 됩니다.”송석석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다급하게 말하자 단 신의가 송석석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렇게 걱정됐다면 그 반 알도 드시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송석석이 후회 막심한 표정을 지었고 단 신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남은 반 알을 먹이려는 게 아니네. 현빙환이라는 약이 있는데 조울증을 치료하는 약이라 이 약을 복용하면 맥박이 여전히 이상하게 보일 걸세.”그제야 마음이 놓인 송석석이 다시 물었다.“그 전에 드신 약이 이미 심장을 손상시켰는데 거기에 이 현빙환까지 드시면 몸 상태가 더 악화되지 않겠습니까?”“큰 문제는 없을 것이네. 그래서 치료제로 이런저런 약을 많이 드리지 않았나?”단 신의의 말에 곁에 서있던 동동이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그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왕야께 현빙환을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친위병 몇 명을 거느린 척귀가 임 태의와 오대반과 함께 북명 황실로 향했다.송석석은 며칠동안 공무를 내려놓기로 하고 모든 업무를 필명과 오진에게 맡겼다.시만자도 송석석을 통해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고 오늘 임 태의와 오대반이 저택에 왔다는 소식에 시만자는 괜히 어설픈 모습을 들키기 싫어서 나타나지 않았다.임 태의와 오대반은 이내 두 눈이 퉁퉁 부은 송석석을 만나게 되었고 오대반이 조심스럽게 위로했다.“왕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임 태의가 계시니 왕야께서도 조만간 호전될 것입니다.”“감사합니다.”송석석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한편, 척귀 등 친위병은 왕야와 왕비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기에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척귀는 침실 밖에 나타난 염구진을 보자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물었다.“염 선생, 폐하께서 왕야를 걱정하셔서 이렇게 소인을 보냈습니다. 혹시 왕야께서 예전에도 이런 질병을 앓으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왜 갑자기 쓰러지신 겁니까?”염구진은 척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왠지 모르게 마음속으로 짜증이 확 났고 요즘 따라 이런 감정을 자주 느끼는 것 같았다.그는 황제의 이러한 조사가 결국 불신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염구진은 짜증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왕야께서 이토록 바쁘신데 쓰러지지 않을 수가 없지요. 언젠가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낮에는 대리사에서 공무를 처리하시고 저녁에는 잡다한 일로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조정에 참석하시느라 한 시간도 채 못 주무시는데 몸이 어떻게 건강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노주로 가셨을 때 산속에 숨어 지낸 탓에 추위에 약해지셨고 진성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제대로 휴식을 취하신 적이 없었지요.”척귀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어명을 받고 탐문하러 온 척귀는 지금 이 순간 북명왕이 너무 대단하게 느껴졌으며 북명왕처럼 매일 바쁘게 살면 쓰러지지 않을 사람이 없
저녁쯤, 숙청제가 송석석을 궁으로 불렀고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송석석을 보며 숙청제는 사여묵이 아프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너무 걱정하진 말거라. 임 태의가 있으니 상황이 호전될 것이야.”숙청제의 말에 송석석은 영혼을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감사합니다, 폐하. 소인이 단 신의께 소식을 전했으니 단 신의께서도 곧 돌아오실 겁니다. 단 신의에게 좋은 약이 있으십니다.”“단설환을 얘기하는 것이냐?”숙청제도 단설환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으며 진성에 있는 황족과 세가들은 돌발 상황을 대비하여 한두 알 정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2년 전부터 이 약은 거의 판매를 하지 않았기에 매우 귀한 약이 되었다.“네.”“단 신의는 언제쯤 돌아올 수 있다고 하더냐? 그 약을 약왕당에서 구할 수는 없는 것이냐?”숙청제의 물음에 송석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아무리 빨라도 삼일 정도는 걸릴 것입니다. 약왕당에도 현재 이 약을 판매하고 있지 않습니다. 홍작한테서 들었는데 단 신의께서 단설환 두 알을 가지고 계신다고 합니다.”“그럼 단설환 외에는 다른 약이 없느냐?”숙청제는 단설환의 약효가 좋다는 건 인정하지만 들리는 소문처럼 그리 신통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저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하다고 여겼다.“다른 약은 약효가 그리 좋지 못합니다.”머뭇거리던 송석석은 살짝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전북망 장군님 모친께서도 심각한 심장 질병으로 거의 사망하시기 직전이셨는데 단설환을 드시고 목숨을 부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뒤로 매달 단설환 한두 알씩 드셨다고 하는데 효과가 확실했다고 합니다.”숙청제도 이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망자를 언급하는 건 재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내 송석석을 위로했다.“임 태의한테서 들었는데 상황이 조금은 호전되고 있으니 치료를 받고 충분히 휴식하면 곧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네, 폐하. 오늘 임 태의가 계셔서 너무 다행이었습니다.”송석석의 눈시울은
어서방에서, 임 태의가 허리를 숙인 채 황제에게 사여묵의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두 시간 전, 대리사 소경 진이가 북명왕의 옥패를 들고 태병원으로 달려와 북명왕이 갑자기 쓰러졌다고 외쳤다.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숙청제도 이내 보고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소인이 보기엔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의심됩니다. 상황이 매우 위험한데 소인이 도착했을 때 왕야는 이미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계셨습니다. 침술을 몇 번이나 사용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셨는데 제대로 걷지 못하셔서 마차에 태워 황실로 보내 드렸습니다.”“왜 갑자기 발작을 한 것인가? 전에는 한 번도 이런 병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 없는 것 같은데.”숙청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며 속으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찌 됐든 사여묵과 피를 나눈 형제였기에 평소에 의심하고 경계한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소인도 황실에 계신 염 선생한테서 들었는데 왕야는 얼마전 진성으로 돌아오고 나서부터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했고 가끔 기침을 심하게 했다고 하셨습니다. 가슴이 답답할 때도 있었는데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고뿔이 악화되면서 발작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숙청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지만 조금 의심이 들기도 했다.“고뿔을 앓고 있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상태가 악화될텐데, 왜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것이냐?”“폐하, 염 선생께서는 왕야가 진성에 돌아온 뒤로부터 너무 바빠서 쉴 시간도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고뿔 외에도 마음에 걱정되는 일이 있어서 고뿔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뿔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평소에 풍채가 좋은 분들은 증상이 확실하게 티가 나지 않아서 자신이 아프다는 것도 잘 모릅니다. 왕야도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숙청제는 의학에 대해 전혀 몰랐기에 그저 물을 수밖에 없었다.“그럼 이젠 조금 나아졌느냐?”“폐하, 왕야는 현재 상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충분한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절대 과로해서는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