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찻잔을 손에 들고 있던 송석석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제 상서께서 제게 무엇을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물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송석석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 상서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자 송석석은 이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얼른 저택으로 돌아가십시오. 오늘밤은 제가 직접 이곳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그럼 왕비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솔직하게 얘기해줄 수 있으시겠습니까?”제 상서가 집요하게 묻자 송석석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전 그저 선황제의 체면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일에 이익 관계가 따르는 건 아닙니다. 아 참, 경위부에서 음식을 공급하지 않으니 저택 하인들을 시켜 음식을 보내오세요. 혹은 저희 경위부에서 음식을 살 수 있게 은화를 남기고 가셔도 됩니다.”제 상서는 여전히 송석석의 속을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석석은 제씨 가문과 깊은 원한 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서로 그리 우호적이지는 않았기에 이렇게 조건 없이 제씨 가문을 도와준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송석석이 선황제의 체면을 위해 제씨 가문을 돕는 거라고 했지만 제 상서는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대감님, 혹시 제 곁에 능력 있는 자가 생기면 제가 북명왕에게 소개를…”“제 상서,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송석석은 재빨리 제 상서의 말을 끊었고 잠시 고민하던 제 상서는 자신의 몸을 뒤적이다가 은화를 챙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저택으로 돌아가서 음식을 준비해오겠다고 얘기한 뒤 떠났다.제 상서가 떠나자마자 시만자가 잔뜩 들뜬 얼굴로 달려왔다.“나 먼저 돌아갈게. 조금 전에 황실에서 말을 전해왔는데 신신과 만두가 곧 도착할 거라고 했어서. 넌 오늘밤 이곳을 지키고 있을 거지? 그럼 나 먼저 갈게?!”그러자 송석석이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그게 정말이야?
조용하게 지켜보던 송석석이 순방영 경위에게 일단 열 냥을 챙기라고 명했다.“이걸로 일단 모든 사람들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샀다가 나중에 풀려나면 이 사람들끼리 알아서 돈 계산하라고 하면 돼.”송석석은 일부러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말했다. 이곳에 잠깐 갇혀 있는 것이니 난동을 부리지 말고 조용하게 버티라는 뜻이다.밤이 깊어지자 송석석은 다시 한번 순찰에 나섰는데, 이번에 본 제 제사는 조금 전보다 더 심하게 떨고 있었다.그러자 주위를 경계하던 양기웅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감님, 혹시 덮을 것 하나만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희 어르신께서 추위에 많이 약하십니다...”송석석은 제 제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제 제사는 이상한 자세로 움츠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온몸이 점점 더 굳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계속 이대로 뒀다가는 동상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송석석은 결국 지시를 내렸다.“여봐라. 이 자를 데리고 가서 따로 가두거라. 이대로 두면 동상으로 사망할 수도 있으니 덮을 것도 하나 내어주거라.”양기웅은 얼른 무릎을 꿇은 채 훌쩍이면서 머리를 조아렸다.“감사합니다!”스스로 일어설 힘도 없는 제 제사는 양기웅 등에 업혀 옥에서 나갔고 이를 지켜보던 나머지 사람들은 불만이 생겼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뒷모습으로 보았을 때 업혀 나간 늙은이는 곧 죽을 사람처럼 보였기에 이곳에서 죽은 사람과 함께 갇혀 있고 싶지는 않았다.경위부는 매우 커 정당 옆에는 곁방도 하나 있었다. 곁방은 평소에 송석석이 쉬는 곳으로 공간은 작지만 아늑하고 따듯했다.송석석은 양기웅과 제 제사를 곁방에 안치한 뒤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의자는 마음껏 사용해도 되지만 침대에 누우면 안 됩니다. 이곳은 제가 평소에 잠깐 휴식을 취하는 공간입니다.”송석석의 말에 양기웅이 사정하기 시작했다.“저희 어르신은 몸이 약해서 밤새 앉아 계실 수 없습니다. 저희 어르신께서 일단 이 침대에 며칠만 신세를 지고 나중에 새것으로 사드리
송석석은 이내 곁방을 나서자, 뒤따르는 양기웅이 문을 굳게 닫았다.그렇게 곁방 안에는 부자 두 사람만 남게 되었고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한 채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먼저 아버지에게 다가간 제 상서는 제 제사 머리에 씌워진 천을 거두려고 했지만 제 제사는 두 손으로 천을 꼭 잡은 채 놓지 않았다.제 상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불과 의상을 아버지 곁에 내려 놓았고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일단 의상부터 갈아입으세요. 전 돌아서서 보지 않을게요.”한참 뒤, 옷을 벗는 소리가 들렸고 제 상서는 갑자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으며 코끝이 찡해진 채 눈물도 글썽였다.이 감정이 서러움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어서 생긴 건지 제 상서 자신조차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제 제사는 아들 앞에서 늘 위엄이 넘치는 모습을 보였었고, 심지어는 사람들의 존경과 찬송을 한 몸에 받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제 제사의 말 한 마디면 문단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기에, 지금 이 모습이 외부에 전해지기로 한다면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한참 뒤, 제 상서가 물었다.“다 갈아입으셨습니까?”제 제사는 아무 대꾸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제 상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제 제사는 이불로 얼굴과 몸을 가린 채 합쳐 놓은 의자에 누워 있었고 그의 옆에는 조금 전까지 입고 있었던 의상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제 상서는 화려한 색감의 의상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결국 꾹 참고 있던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도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자신의 아버지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불을 꽉 잡고 있던 제 제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제 상서는 곁방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제 제사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제 제사도 아들이 무슨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마저 지금의 자신을 창피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제 상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의자에 털썩 앉았고 방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
결국 곁방에서 나온 제 상서는 정당을 지나가다가 불 앞에 앉아 몸을 녹이고 있던 송석석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 상서는 그녀와 마주하기 싫었지만 마음과 다르게 발길은 이미 송석석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만약 송석석이 이곳을 지키고 있지 않았었다면 제 상서는 강제로 아버지를 데리고 갔을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런 행동으로 황제 폐하께 벌을 받는다고 해도 아버지가 이곳에서 창피를 당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시간도 늦었는데 제 상서께서는 댁으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송석석이 물었고 제 상서는 기가 확 죽은 채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며 겁이 나서 경위부 문턱을 나설 수가 없었다.밖에 나가면 어떠 상황을 마주하게 될지 감도 잡히지 않고, 너무 두려웠다.오늘밤 경위부에 처음 찾아왔을 때, 제 상서는 송석석과 담판할 준비를 철저하게 했는데 송석석은 이 사건으로 이익을 얻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높은 관직으로 수많은 관원들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제 상서는 평소에 권력과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으며 심지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추태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다.하지만 송석석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황제가 북명왕을 경계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정에 인맥이 있어야 나중에 문제가 터졌을 때 편들어줄 사람이 있을 텐데 송석석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는 듯했다.이런저런 생각들이 제 상서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조금 전에 본 아버지의 허연 얼굴과 알록달록한 의상은 계속 생각이 났다. 제 상서는 괴로워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대감님께서는 오늘밤 계속 이곳을 지킬 생각이십니까?”“네, 오늘밤은 계속 이곳에 있을 겁니다.”송석석의 대답에 제 상서는 괜히 그녀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이젠 왕비님께서 댁으로 돌아가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송석석은 제 상서를 힐끔 쳐다보며 대답했다.“제가 이곳을 떠나면 누군가가 권력의 힘을 이용하여 옥에 갇힌 자들을 데리고 갈 수도 있습니다.그런 상황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한참 동안 버티고 있던 제 상서는 결국 경위부를 떠났고, 송석석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걷고 있는 제 상서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평소에 기세 등등하던 제 상서의 모습은 사라져.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비참해 보였다.제 상서 때문에 잠이 완전히 깬 송석석은 감옥을 한 바퀴 더 순찰한 뒤, 필명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사실 대감님께서 이만 댁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소관 혼자서도 잘 지킬 수 있습니다.”“괜찮다. 어차피 이제 곧 날이 밝을 때도 됐어. 경위부 밖에 지키고 있는 세가들이 많아. 그 사람들이 난동을 부리면 네 힘으로는 절대 제지하지 못할 거야.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도 그자들 신분을 외부에 알릴 생각이 없는데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폐하께 상황을 설명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어.”“맞는 말씀이십니다.”필명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다음날 아침, 제 상서와 송석석보다 더욱 이른 시간에 황제를 찾아간 사람은 다름아닌 광릉후였다. 그는 숙청제를 보자마자 무릎을 털썩 꿇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구구절절 얘기했다.처음 남풍관을 만든 건 사온이었고 사온이 망한 뒤로 남풍관을 닫으려고 했지만 제 제사의 제안과 설득에 넘어가 남풍관을 이어서 계속 운영하게 되었다고 했다.간단하게 얘기하자면 광릉후는 제 제사를 모함하고 팔아버린 것이다.이런저런 방법을 많이 생각해봤지만 결국 제씨 가문을 원수로 등지는 방법을 선택했다. 사국 정탐조에 대해 깊이 알아본 광릉후는 대신 이 죄를 뒤집어쓸 희생양이 필요했고 제 제사를 끌어내려야만 자신의 가문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그 대가는 제씨 가문과 원수 사이가 되는 것이지만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제 제사는 더 이상 남풍관을 자주 찾는 손님뿐만이 아니라 남풍관을 계속 운영할 수 있었던 장본인이 되었기에 문제의 성질이 바뀌었다.하지만 숙청제는 선황제의 체면을 고려해서라도 이 사건을 조용하게 처리할 것이다.조금 뒤, 제 상서가 궁에 찾아왔을 때 그를 맞이한 건 숙청제의 들끓는 분노였다.숙
조금 뒤, 숙청제는 세 사람을 불러들여 크게 혼을 냈고, 광릉후와 제 상서는 무릎을 꿇은 채 연신 사죄를 했지만 유독 송석석만은 입을 꾹 닫고 있었다.숙청제는 그런 송석석을 보며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너도 전혀 억울한 게 아니다! 넌 제 제사가 남풍관에 자주 오가는 사실을 알고도 짐에게 미리 보고를 하지 않았다.”송석석은 밤새 잠도 못 잔 탓에 피곤했는데, 황제에게 혼까지 나고 있으니 마음속에 불만이 차올라 반문했다. “소인이 폐하께 미리 보고를 했다면 폐하께서 남풍관을 수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까?”“수사할 건 당연히 수사를 해야겠지. 하지만…”숙청제는 언성을 높였지만 바로 말문이 막혔다. 미리 알았다면 몰래 제 제사에게 얘기해줬을 거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더군다나 제 제사가 어젯밤 남풍관에 찾아갈지 확실하지 않는 상황에서 송석석이 남풍관에서 제 제사를 본 적이 있다고 보고를 해도 숙청제는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체포되기 전까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제 제사는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 그런 곳에 갈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신분 지위가 높고 백성들의 존경과 찬양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며 모든 이의 모범인 사람이 어떻게 그런 곳에 갈 리가 있단 말인가!송석석이 미리 이 사실을 보고했다면 숙청제는 송석석을 무고죄로 벌했을 것이었다.송석석은 목청 높여 말을 이어갔다.“이 큰 제씨 가문에 노비와 시녀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무도 제 제사께서 남풍관에 오갔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소인은 그저 수사만 했습니다. 누가 언제 남풍관에 나타날지 소인도 예측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남풍관에 제 제사만 있었던 게 아니라 관원들과 세가 자제들도 많았습니다.”송석석의 말은 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화가 나 있는 숙청제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아무튼 네 일 처리가 확실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야. 그러니 변명할 것도 없어!”“네, 모든 게 소인의 잘못입니다. 소인은 지금 당장 경위부로 돌아가서 제 제사를 풀어
말을 타고 저택으로 달려온 송석석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왕비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저택 앞을 지키던 하인 한 명이 그 모습을 보고 큰소리로 외쳤다. 조금 전 시만자가 송석석이 오면 바로 보고를 하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송석석이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나타난 모신신은 송석석을 향해 풀쩍 뛰어올랐고 화들짝 놀란 송석석은 재빨리 모신신을 꽉 끌어안았다.“왜 이제야 왔어! 우리 송 대감! 진짜 너무 보고 싶었어!”신난 모신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송석석은 모신신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 손으로 모신신의 볼을 마구 만졌다.“신신아, 너 살이 좀 찐 거 같구나.”송석석을 확 밀어낸 모신신은 입을 삐죽 내밀며 반박했다.“너 진짜 이럴 거야? 어떻게 만나자마자 내 아픈 곳을 그렇게 콕콕 찌르지?!”“아니야, 아니야! 안 뚱뚱해! 딱 보기 좋아, 여전히 예뻐!”송석석이 피식 웃으면서 말하자 모신신은 송석석의 팔짱을 끼고는 안으로 걸어갔다.“네가 완전 뚱뚱한 사람을 아직 못 봐서 그래.”이때, 시만자와 만두가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만두는 살이 찐 건 아니지만 몸매가 전보다 훨씬 건장하고 튼튼해 보였다. 그리고 저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차분해진 모습으로 송석석을 보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이제야 돌아와? 공사가 다망하네.”“만두야!”송석석은 만두의 가슴팍을 툭 치다가 건실한 근육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너 이제 무술 실력도 고수 수준에 도달한 거 아니야?”만두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대답했다.“고수까지는 모르겠는데 전보다는 훨씬 늘었지. 이제 너랑 싸우면 지지 않을 자신 있어.”“오, 그래? 그럼 조만간 제대로 한 번 겨뤄봐야겠네?”송석석이 피식 웃으면서 대꾸하자 모신신이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됐거든. 네가 우리 석석이를 이길 수 있다는 게 말이 돼? 그러다가 강냉이 다 털린다? 무술을 고작 2년 배우고 천하무적이라도 되는 줄 알아? 내가 다 창피하거든.”모신신과 만두는 예전부터 티격태격
그렇게 네 사람은 밥을 먹으면서 각자에게 있었던 일을 바삐 얘기했다. 그렇게 송석석은 만두와 모신신이 혼인을 약속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폭탄 발언에 송석석과 시만자는 입을 떡 벌린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봤다.송석석이 모신신과 만두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근데 두 사람 꽤 잘 어울리는 거 같지 않아? 둘 다 얼굴이 동글동글하잖아.”“네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두 사람이 꽤 닮은 것 같네? 근데 너희 두 사람 언제 눈이 맞은 거야?”시만자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묻자 만두가 모신신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신신이 네가 얘기해.”“눈이 맞을 게 뭐가 있어. 혼인할 나이도 됐고 사부께서 처음 보는 남자와 혼인할 바에는 차라리 만두와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셔서 그렇게 됐지.”모신신이 발그레한 얼굴로 대답했다.종파 내에서 혼인을 하는 남녀가 많았다. 그들은 외부인과 접촉할 기회도 적고 한창 이성에게 눈을 뜰 나이에 매일 붙어 있었기에 서로 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모신신과 만두는 같이 전장에 나간 적 있는 전우로써 경험도 비슷하고 마음이 잘 맞았기에 점점 서로에서 정이 생긴 것이며 많은 것을 함께 해온 두 사람은 평생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다.한참동안 두 사람을 축하해주던 송석석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남풍관에 관한 일을 털어놓았고 모신신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송석석을 쳐다보며 말했다.“밤까지 새야 하는 걸 보면 관직을 책임지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 같네. 그때 우리가 진성을 떠나기로 한 게 참 잘한 선택이었어. 그런데 조금 전에 들어올 때 보니까 표정이 많이 안 좋던데 혹시 황제한테 혼이라도 난 거야? 고생은 혼자서 다 하고 혼까지 나면서 그 관직을 계속 맡고 싶어? 차라리 우리랑 같이 매산으로 돌아가서 자유롭게 사는 게 낫지 않아?”송석석은 매산으로 돌아가는 게 꿈이었기에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매산으로 돌아가긴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어른이 됐으니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 이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