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단서도 여기서 끊겼다.여진수는 하루 종일 마음이 착잡했다. 그렇게 3일 후 여진수는 침대장에서 내가 남긴 이혼서류를 발견했다. 이혼서류에는 내 친필 사인이 보였다.그리고 이혼서류와 함께 메모장 하나도 발견되었다.[진수 씨, 이제 당신 놓아줄게요. 맹수지 씨와 잘 되길 바라요. 우리 이혼해요.]장미옥은 그 쪽지를 보자마자 여진수의 귀뺨을 후려치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네가 못 할 짓 했을 줄 알았어. 아니면 희연이가 왜 아이를 데리고 가출하고 우리가 찾지 못하게 행적까지 숨기겠어?”여진수가 부어오른 얼굴을 감싸 쥐며 말했다.“엄마, 내가 희연이 꼭 찾아낼게요. 내 아이를 가졌는데 멀리는 못 갔을 거예요.”여진수는 이혼 서류를 보고 내가 일부러 찾지 못하게 떠난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신고를 취하하려는데 뉴스 속보가 여진수의 시선을 앗아갔다.이튿날 아침.시체에서 벗겨낸 고깃덩어리를 넣은 비닐봉지가 공원을 청소하던 사람에게 발견되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바로 현장으로 향했다.경찰 감정을 통해 비닐봉지에 담긴 건 일반 돼지고기도 닭고기도 아닌 인육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이 사실이 보도되자 소식은 신속하게 퍼졌다. 뉴스를 보고 있는 여진수도 얼굴이 굳어졌고 바로 맹수지를 찾아갔다.“수지야, 비닐봉지 알아서 잘 처리한다며?”맹수지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어쩔 바를 몰라 했다.“미안해. 진수야. 사람이 잘 가지 않는 곳에 버리면 끝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경찰에게 알려질 줄은 몰랐어.”여진수의 안색이 너무 어두웠다.맹수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여진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진수야, 우리 이제 어떡해? 경찰이 찾아오지는 않겠지? 나 감옥 가기 싫어.”어찌 됐든 간에 여진수와 맹수지는 지금 한배를 타고 있었다.여진수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불안을 꾹꾹 눌러 담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 정말 경찰이 찾아온다 해도 다 내가 한 짓이라고, 너랑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할 거야…”여진수의
여진수는 경찰이 곧 찾아올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 전에 어떻게든 나를 찾아내야 했다.어느 날.여진수는 실험실에서 조수 이진성을 만났다.이진성은 여진수를 보자마자 뭔가 생각났는지 입을 열었다.“박사님, 사모님이 전에 박사님 주려고 삼계탕을 들고 왔다가 뭘 보셨는지 저 먹으라고 주셨거든요.”“먹었는데 정말 너무 맛있더라고요.”이진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사모님께 레시피 좀 구해주시면 안 돼요? 배워서 여자 친구한테 해주게요.”이진성의 말에 여진수도 생각나는 게 있었다.나는 여진수와 대판 싸운 뒤로 문을 박차고 집을 나왔지만 뒤에 실험실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여진수는 맹수지와 얘기를 나누느라 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여진수는 얼른 실험실 CCTV 영상을 확인했다.영상에는 일요일 저녁에 내가 그의 실험실로 찾아온 것으로 나왔다.그날 아침 여진수는 온라인으로 미팅하고 있었다. 미팅을 마치자 맹수지가 먼저 밥 먹자고 찾아왔다.이진성이 여진수에게 내가 찾아왔다고 말했지만 여진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맹수지와 웃고 떠들며 얘기를 나누었다.CCTV 영상에서 나는 삼계탕이 담긴 도시락을 든 채 맹수지와 여진수가 꽁냥대는 걸 지켜보다 도시락을 이진성에게 주고 자리를 떠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맹수지가 나를 뒤쫓아 나왔다.여진수는 영상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그날에 있었던 일을 한번 회상했다. 맹수지는 원래 여진수와 밥을 먹자고 찾아왔다가 갑자기 걸려 온 전화 한 통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영상에서는 맹수지가 나와 같은 방향으로 나간 게 보였다. 이에 여진수는 맹수지가 나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기 시작했다.여진수는 맹수지를 찾아가려 했지만 경찰이 한발 먼저 그의 앞을 막아섰다.두 경찰이 경찰증을 보여주며 말했다.“여진수 씨죠?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데 여진수 씨가 관련되어 있어서요. 서로 같이 가시죠.”
여진수는 경찰서로 연행되었다.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서인지 경찰이 질문해도 여진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하지만 여진수는 차분할 수 있어도 맹수지는 아니었다. 여진수가 경찰에 잡힌 다음 날 맹수지도 똑같이 경찰에 연행되었다.맹수지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발뺌했다.나는 그런 맹수지가 너무 우스웠다. 법치 사회에서 억울한 척한다고 받아야 할 벌을 피해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나는 영혼 상태라 경찰이 어떻게 두 사람을 심문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경찰은 먼저 심경이 매우 불안정한 맹수지부터 공략했다. 경찰은 맹수지에게 여진수가 모든 걸 자백했다고 말했다.맹수지는 처음에 믿지 않다가 경찰이 추궁하자 취약하던 방어선이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맹수지가 울며 말했다.“가서 여진수한테나 물어봐요. 시체가 어딨는지 아는 사람은 여진수지 내가 아니에요. 다 여진수가 한 짓이에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풀어주세요.”경찰은 여진수가 있는 취조실로 들어가 여진수에게 말했다.“맹수지 씨가 모든 걸 자백했습니다. 주범은 여진수 씨라고 하더군요. 지금이라도 시원하게 자백하세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맹수지를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겠다고 했지만 맹수지가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밀었다는 말에 여진수도 깜짝 놀랐다. 그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맞아요. 다 내가 한 짓이에요…”“제 실험실에 표본이 몇 개 있는데 거기에 살인 증거가 담겨 있어요…”여진수는 더는 못 참겠는지 허리를 숙이고는 헛구역질하더니 어떻게 시체를 처리하고 표본으로 만들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진술을 마친 여진수는 진이 빠진 듯 취조실 의자에 늘어졌다.“제가 훼손한 시체에 미안하네요. 죽어서도 온전치 못하니 편히 쉴 수도 없겠네요…”여진수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이제 와서 미안하다니, 너무 늦었다.경찰은 살인 및 사체 훼손으로 여진수를 감옥에 처넣었다. 맹수지는 여진수 덕분에 무죄로 석방될
아내를 죽이고 표본으로 박제한 사건의 재판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여진수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그 결과에 놀랐다. 그래도 죽기 전에 맹수지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하지만 여진수가 뼈저리게 사랑한 맹수지는 만남을 거절했다.장미옥은 여진수가 맹수지를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여진수의 귀뺨을 여러 번 후려쳤다.“정신 차려. 그 여자가 뭐가 좋다고 그리워하는 거야? 희연이 얼마나 좋은 아이야. 희연이를 놔두고 어떻게 그런 여자를…”“너 여기 갇혀있는 동안 맹수지가 한 번이라도 찾아온 적 있어?”“아마 지금쯤 너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너 출세하기 전에 네가 돈이 있든 없든 아프든 건강하든 늘 곁을 지킨 사람은 희연이야. 희연이라면 너 이렇게 된 거 알고 무조건 너 보러 왔을 거야. 아쉽게도 희연이는 지금 없어. 더는 너를 참지 못하고 떠나버렸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여진수는 장미옥의 말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희연아, 희연아. 어디 있어… 너무 보고 싶다…”여진수가 내 이름을 중얼거렸다.[여진수, 드디어 내가 생각난 거야?]정말 아이러니했다. 나는 이제 돌아갈 수 없으니 여진수도 더는 나를 만날 수가 없었다.…감정 의뢰한 결과가 드디어 나왔다. 여진수가 표본으로 박제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여진수는 이 결과를 듣고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사람이 어떻게 희연이에요. 아니, 절대 그럴 리 없어요…”경찰이 감정 보고서를 여진수 앞에 들이밀었다.“임희연 씨 맞아요. 당신이 분해한 그 시체 당신 와이프 맞다고요.”의대 박사인 여진수는 그 보고서가 얼마나 정확한지 잘 알고 있었다. 경찰은 결코 그를 속이지 않았다.그가 두 손으로 직접 와이프의 시신을 분해하고 표본으로 박제한 것이다. 더욱 잔인한 건 아이까지 죽였다는 것이었다.“아악.”너무나도 큰 충격에 휩싸인 여진수는 더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아니야. 다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이라
여진수는 자기가 와이프와 아이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하루 만에 겨우 소화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얼른 경찰에게 맹수지가 한 짓임을 알려줬다.맹수지야말로 진정한 범인인데 이렇게 대신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죽은 아내와 아이를 위해 복수해야만 했다.경찰은 신속하게 맹수지가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도망가기 전에 공항에서 체포했다.여진수는 이번에 드디어 맹수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푹 꺼진 채 충혈된 눈으로 맹수지를 노려봤다.유리창으로 가로막히지만 않았어도 바로 맹수지를 덮쳐 갈기갈기 찢어 죽였을 것이다.“왜. 희연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내 아이까지 가진 사람을 왜 그렇게 잔인하게 죽인 거야. 왜.”맹수지도 더는 발뺌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전부 털어놓았다.“왜라니. 임희연이 너의 아이를 가졌잖아. 네가 아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임희연이 아이를 가지면 너에게 접근할 기회가 없어지는데?”“애초에 임희연과 결혼한 것도 나랑 비슷하게 생겨서 그런 거 아니야? 내 대용품이 내 자리를 꿰차게 할 수는 없지. 너의 진정한 와이프는 나야.”맹수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내가 왜 죽었는지 알 것 같았다.일요일 저녁.나는 삼계탕을 들고 여진수를 찾아가 화해하면서 임신 사실을 알려주고 앞으로 싸우지 말고 잘살아 보자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실험실로 와보니 여진수는 맹수지를 꼭 끌어안은 채 웃고 떠들고 있었다.순간 나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맹수지를 따라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5년이라는 결혼 생활을 이제 끝낼 때가 온 것 같았다.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하지만 맹수지를 찾아 마무리는 해야 할 것 같아 맹수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따라 나온 맹수지가 나를 보자마자 비아냥댔다.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나는 대용품일 뿐이니 영원히 여진수를 가질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나는 맹수지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이제 여진수 돌려줄게요.”이 말을 뒤로 나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 임신 결과지가 바닥으로 떨
여진수는 하루 만에 머리가 희끗해졌고 10년은 늙은 것 같았다.사건이 진실이 밝혀지자 경찰은 법정에 선처를 요구했다. 여진수는 사형을 면하고 25년 형을 받았지만 맹수지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25년 형을 받았다는 소식에 장미옥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더 경악스러운 건 여진수가 맹수지를 도와 내 시체를 훼손하고 여씨 가문의 핏줄을 죽였다는 것이었다.장미옥은 여진수의 어깨를 붙잡고 캐물었다.“왜 그랬어. 희연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왜 그랬냐고. 이 나쁜 놈아.”여진수는 실성한 듯 장미옥의 말은 듣지 못하고 혼자 중얼거렸다.“희연아, 돌아와. 응? 우리 다시 시작하자.”[아니. 싫어.]다음 생이라는 게 있어도 싫었다.여진수는 옥살이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 상태가 점점 악화했다. 의사는 그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했다.삶의 의지를 잃어서인지 여진수의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졌고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았다.그렇게 3년이 지나 여진수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모습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온몸이 썩어 문드러진 채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여진수가 죽자 내 영혼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나는 장미옥과 엄마를 따라 나를 묻은 묘지로 향했다. 두 사람은 나를 위해 기도문을 읊었다. 내가 다음 생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었다.기도문을 읊자 내 영혼도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내 영혼은 허공에서 사라졌다.나는 다음 생에도 여진수를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다음 생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영혼이 된 상태로 실험실 허공에 붕 뜬 채 내 시체가 벌거벗은 채로 여진수 앞에 놓여 있는 걸 보았다.내 얼굴은 이미 사고로 짓뭉개져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두 팔도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여진수는 그 자리에 선 채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억울한 표정을 하고 옆에 서 있는 맹수지를 바라봤다.“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야?”맹수지가 여진수의 말을 듣고 안도했다. 여진수는 이 시체의 주인이 나라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진수야, 나 도와줄 거지?”맹수지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여진수는 또렷한 눈빛으로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심호흡하더니 입을 열었다.“수지야, 내가 너 지켜준다고 했잖아. 그 약속은 평생 변함없어.”말이 끝나기 바쁘게 여진수는 장갑을 끼고 시체에 난 상처를 말끔히 처리하고는 모발과 지방을 벗겨냈다. 마지막으로 메스를 들어 개복하고 장기를 꺼내기 시작했다.메스가 살을 가른 순간 여진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긴장한 듯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이 여자 임신 했는데…?”옆에 서 있던 맹수지가 이 말에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버벅댔다.“정… 정말?”맹수지는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 당황함을 감추려 했다.자궁을 메스로 가른 여진수는 안에서 아직 모양을 채 갖추지 않은 아이를 발견했다.커다란 죄책감이 여진수를 덮쳤고 누군가 목을 힘껏 조르는 것처럼 숨이 올라오지 않았다.맹수지는 여진수가 동작을 멈추자 얼른 거짓말했다.“임신한 줄 몰랐어. 진수야,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운전하고 있는데 이 여자가 미친 듯이 뛰어든 거야.”맹수지가 여진수의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진수야, 나 도와줄 거지? 나 감옥 가기 싫어. 죽고 싶지 않단 말이야.”여진수는 애걸복걸하는 맹수지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눈을 질끈 감고 자궁에 들어있던 태아를 들어내더니 황산이 들어있는 용기로 던져넣었다.[안 돼. 내 아이.]나는 여진수
맹수지는 여진수의 행보에 눈빛이 살짝 변하더니 다시 슬픈 척 연기하기 시작했다.“진수야, 아이 좋아하는 거 알아. 하지만…”맹수지가 배를 부여잡은 채 비통한 기억에 사로잡힌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나는 희연 씨가 네 아이를 낳아도 괜찮아. 너의 아이라면 다 좋아.”맹수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여진수를 바라봤다.여진수는 그런 맹수지를 힐끔 쳐다보더니 앞에 놓인 시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희연과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어.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근데 두 사람…”“희연이 먹고 있는 비타민을 피임약으로 바꿨어. 그러니 내 아이를 낳을 일은 없을 거야.”여진수의 말을 듣고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5년간 결혼 생활을 이어왔지만 좀처럼 임신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다 병원 가서 검사했지만 정상이었고 그저 아이가 들어서지 않을 뿐이었다.영문을 몰랐는데 다 여진수가 한 짓이었다. 진작에 내가 먹는 비타민을 피임약으로 바꿨으니 아이가 들어설 리가 없었다.하지만 여진수는 아마 모를 것이다. 내가 그 비타민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비타민으로 바꿔서 먹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가 모르고 있었기에 나는 임신할 수 있었다.맹수지는 여진수의 대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마치 승자라도 된 듯 턱을 살짝 들고 이미 시체가 된 나를 내려다봤다.나는 여진수가 내 시체를 분해해 포르말린 용액에 넣는 걸 지켜봤다. 모든 작업을 마친 여진수는 진이 빠졌는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맹수지가 뜨거운 수건을 건네며 여진수의 다리에 올라앉아 얼굴을 마주했다.“진수야, 다크서클이 왜 그렇게 내려왔어? 희연 씨 아직도 화난 거야? 내가 전화해서 설명할까?”여진수는 내 이름을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맹수지는 여진수가 언짢아하는 걸 눈치채고 얼른 다독였다.“진수야, 희연 씨 성격이 원래 불같잖아. 평소에 많이 다독여줘.”여진수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맨날 질투만 하고 앉았는데 내가 왜 다독여? 나랑 얼마나 더
여진수는 하루 만에 머리가 희끗해졌고 10년은 늙은 것 같았다.사건이 진실이 밝혀지자 경찰은 법정에 선처를 요구했다. 여진수는 사형을 면하고 25년 형을 받았지만 맹수지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25년 형을 받았다는 소식에 장미옥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더 경악스러운 건 여진수가 맹수지를 도와 내 시체를 훼손하고 여씨 가문의 핏줄을 죽였다는 것이었다.장미옥은 여진수의 어깨를 붙잡고 캐물었다.“왜 그랬어. 희연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왜 그랬냐고. 이 나쁜 놈아.”여진수는 실성한 듯 장미옥의 말은 듣지 못하고 혼자 중얼거렸다.“희연아, 돌아와. 응? 우리 다시 시작하자.”[아니. 싫어.]다음 생이라는 게 있어도 싫었다.여진수는 옥살이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 상태가 점점 악화했다. 의사는 그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했다.삶의 의지를 잃어서인지 여진수의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졌고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았다.그렇게 3년이 지나 여진수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모습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온몸이 썩어 문드러진 채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여진수가 죽자 내 영혼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나는 장미옥과 엄마를 따라 나를 묻은 묘지로 향했다. 두 사람은 나를 위해 기도문을 읊었다. 내가 다음 생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었다.기도문을 읊자 내 영혼도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내 영혼은 허공에서 사라졌다.나는 다음 생에도 여진수를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다. 다음 생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여진수는 자기가 와이프와 아이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하루 만에 겨우 소화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얼른 경찰에게 맹수지가 한 짓임을 알려줬다.맹수지야말로 진정한 범인인데 이렇게 대신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죽은 아내와 아이를 위해 복수해야만 했다.경찰은 신속하게 맹수지가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도망가기 전에 공항에서 체포했다.여진수는 이번에 드디어 맹수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푹 꺼진 채 충혈된 눈으로 맹수지를 노려봤다.유리창으로 가로막히지만 않았어도 바로 맹수지를 덮쳐 갈기갈기 찢어 죽였을 것이다.“왜. 희연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 내 아이까지 가진 사람을 왜 그렇게 잔인하게 죽인 거야. 왜.”맹수지도 더는 발뺌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전부 털어놓았다.“왜라니. 임희연이 너의 아이를 가졌잖아. 네가 아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임희연이 아이를 가지면 너에게 접근할 기회가 없어지는데?”“애초에 임희연과 결혼한 것도 나랑 비슷하게 생겨서 그런 거 아니야? 내 대용품이 내 자리를 꿰차게 할 수는 없지. 너의 진정한 와이프는 나야.”맹수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내가 왜 죽었는지 알 것 같았다.일요일 저녁.나는 삼계탕을 들고 여진수를 찾아가 화해하면서 임신 사실을 알려주고 앞으로 싸우지 말고 잘살아 보자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실험실로 와보니 여진수는 맹수지를 꼭 끌어안은 채 웃고 떠들고 있었다.순간 나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맹수지를 따라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5년이라는 결혼 생활을 이제 끝낼 때가 온 것 같았다.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하지만 맹수지를 찾아 마무리는 해야 할 것 같아 맹수지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렇게 따라 나온 맹수지가 나를 보자마자 비아냥댔다.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나는 대용품일 뿐이니 영원히 여진수를 가질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나는 맹수지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이제 여진수 돌려줄게요.”이 말을 뒤로 나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 임신 결과지가 바닥으로 떨
아내를 죽이고 표본으로 박제한 사건의 재판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여진수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그 결과에 놀랐다. 그래도 죽기 전에 맹수지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하지만 여진수가 뼈저리게 사랑한 맹수지는 만남을 거절했다.장미옥은 여진수가 맹수지를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여진수의 귀뺨을 여러 번 후려쳤다.“정신 차려. 그 여자가 뭐가 좋다고 그리워하는 거야? 희연이 얼마나 좋은 아이야. 희연이를 놔두고 어떻게 그런 여자를…”“너 여기 갇혀있는 동안 맹수지가 한 번이라도 찾아온 적 있어?”“아마 지금쯤 너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너 출세하기 전에 네가 돈이 있든 없든 아프든 건강하든 늘 곁을 지킨 사람은 희연이야. 희연이라면 너 이렇게 된 거 알고 무조건 너 보러 왔을 거야. 아쉽게도 희연이는 지금 없어. 더는 너를 참지 못하고 떠나버렸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여진수는 장미옥의 말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희연아, 희연아. 어디 있어… 너무 보고 싶다…”여진수가 내 이름을 중얼거렸다.[여진수, 드디어 내가 생각난 거야?]정말 아이러니했다. 나는 이제 돌아갈 수 없으니 여진수도 더는 나를 만날 수가 없었다.…감정 의뢰한 결과가 드디어 나왔다. 여진수가 표본으로 박제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여진수는 이 결과를 듣고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사람이 어떻게 희연이에요. 아니, 절대 그럴 리 없어요…”경찰이 감정 보고서를 여진수 앞에 들이밀었다.“임희연 씨 맞아요. 당신이 분해한 그 시체 당신 와이프 맞다고요.”의대 박사인 여진수는 그 보고서가 얼마나 정확한지 잘 알고 있었다. 경찰은 결코 그를 속이지 않았다.그가 두 손으로 직접 와이프의 시신을 분해하고 표본으로 박제한 것이다. 더욱 잔인한 건 아이까지 죽였다는 것이었다.“아악.”너무나도 큰 충격에 휩싸인 여진수는 더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아니야. 다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이라
여진수는 경찰서로 연행되었다.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서인지 경찰이 질문해도 여진수는 침묵으로 일관했다.하지만 여진수는 차분할 수 있어도 맹수지는 아니었다. 여진수가 경찰에 잡힌 다음 날 맹수지도 똑같이 경찰에 연행되었다.맹수지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발뺌했다.나는 그런 맹수지가 너무 우스웠다. 법치 사회에서 억울한 척한다고 받아야 할 벌을 피해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나는 영혼 상태라 경찰이 어떻게 두 사람을 심문하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경찰은 먼저 심경이 매우 불안정한 맹수지부터 공략했다. 경찰은 맹수지에게 여진수가 모든 걸 자백했다고 말했다.맹수지는 처음에 믿지 않다가 경찰이 추궁하자 취약하던 방어선이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맹수지가 울며 말했다.“가서 여진수한테나 물어봐요. 시체가 어딨는지 아는 사람은 여진수지 내가 아니에요. 다 여진수가 한 짓이에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풀어주세요.”경찰은 여진수가 있는 취조실로 들어가 여진수에게 말했다.“맹수지 씨가 모든 걸 자백했습니다. 주범은 여진수 씨라고 하더군요. 지금이라도 시원하게 자백하세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맹수지를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겠다고 했지만 맹수지가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밀었다는 말에 여진수도 깜짝 놀랐다. 그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맞아요. 다 내가 한 짓이에요…”“제 실험실에 표본이 몇 개 있는데 거기에 살인 증거가 담겨 있어요…”여진수는 더는 못 참겠는지 허리를 숙이고는 헛구역질하더니 어떻게 시체를 처리하고 표본으로 만들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진술을 마친 여진수는 진이 빠진 듯 취조실 의자에 늘어졌다.“제가 훼손한 시체에 미안하네요. 죽어서도 온전치 못하니 편히 쉴 수도 없겠네요…”여진수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이제 와서 미안하다니, 너무 늦었다.경찰은 살인 및 사체 훼손으로 여진수를 감옥에 처넣었다. 맹수지는 여진수 덕분에 무죄로 석방될
여진수는 경찰이 곧 찾아올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 전에 어떻게든 나를 찾아내야 했다.어느 날.여진수는 실험실에서 조수 이진성을 만났다.이진성은 여진수를 보자마자 뭔가 생각났는지 입을 열었다.“박사님, 사모님이 전에 박사님 주려고 삼계탕을 들고 왔다가 뭘 보셨는지 저 먹으라고 주셨거든요.”“먹었는데 정말 너무 맛있더라고요.”이진성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사모님께 레시피 좀 구해주시면 안 돼요? 배워서 여자 친구한테 해주게요.”이진성의 말에 여진수도 생각나는 게 있었다.나는 여진수와 대판 싸운 뒤로 문을 박차고 집을 나왔지만 뒤에 실험실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여진수는 맹수지와 얘기를 나누느라 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여진수는 얼른 실험실 CCTV 영상을 확인했다.영상에는 일요일 저녁에 내가 그의 실험실로 찾아온 것으로 나왔다.그날 아침 여진수는 온라인으로 미팅하고 있었다. 미팅을 마치자 맹수지가 먼저 밥 먹자고 찾아왔다.이진성이 여진수에게 내가 찾아왔다고 말했지만 여진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맹수지와 웃고 떠들며 얘기를 나누었다.CCTV 영상에서 나는 삼계탕이 담긴 도시락을 든 채 맹수지와 여진수가 꽁냥대는 걸 지켜보다 도시락을 이진성에게 주고 자리를 떠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맹수지가 나를 뒤쫓아 나왔다.여진수는 영상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그날에 있었던 일을 한번 회상했다. 맹수지는 원래 여진수와 밥을 먹자고 찾아왔다가 갑자기 걸려 온 전화 한 통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영상에서는 맹수지가 나와 같은 방향으로 나간 게 보였다. 이에 여진수는 맹수지가 나의 행방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기 시작했다.여진수는 맹수지를 찾아가려 했지만 경찰이 한발 먼저 그의 앞을 막아섰다.두 경찰이 경찰증을 보여주며 말했다.“여진수 씨죠? 살인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데 여진수 씨가 관련되어 있어서요. 서로 같이 가시죠.”
경찰 단서도 여기서 끊겼다.여진수는 하루 종일 마음이 착잡했다. 그렇게 3일 후 여진수는 침대장에서 내가 남긴 이혼서류를 발견했다. 이혼서류에는 내 친필 사인이 보였다.그리고 이혼서류와 함께 메모장 하나도 발견되었다.[진수 씨, 이제 당신 놓아줄게요. 맹수지 씨와 잘 되길 바라요. 우리 이혼해요.]장미옥은 그 쪽지를 보자마자 여진수의 귀뺨을 후려치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네가 못 할 짓 했을 줄 알았어. 아니면 희연이가 왜 아이를 데리고 가출하고 우리가 찾지 못하게 행적까지 숨기겠어?”여진수가 부어오른 얼굴을 감싸 쥐며 말했다.“엄마, 내가 희연이 꼭 찾아낼게요. 내 아이를 가졌는데 멀리는 못 갔을 거예요.”여진수는 이혼 서류를 보고 내가 일부러 찾지 못하게 떠난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신고를 취하하려는데 뉴스 속보가 여진수의 시선을 앗아갔다.이튿날 아침.시체에서 벗겨낸 고깃덩어리를 넣은 비닐봉지가 공원을 청소하던 사람에게 발견되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바로 현장으로 향했다.경찰 감정을 통해 비닐봉지에 담긴 건 일반 돼지고기도 닭고기도 아닌 인육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이 사실이 보도되자 소식은 신속하게 퍼졌다. 뉴스를 보고 있는 여진수도 얼굴이 굳어졌고 바로 맹수지를 찾아갔다.“수지야, 비닐봉지 알아서 잘 처리한다며?”맹수지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어쩔 바를 몰라 했다.“미안해. 진수야. 사람이 잘 가지 않는 곳에 버리면 끝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경찰에게 알려질 줄은 몰랐어.”여진수의 안색이 너무 어두웠다.맹수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여진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진수야, 우리 이제 어떡해? 경찰이 찾아오지는 않겠지? 나 감옥 가기 싫어.”어찌 됐든 간에 여진수와 맹수지는 지금 한배를 타고 있었다.여진수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불안을 꾹꾹 눌러 담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 정말 경찰이 찾아온다 해도 다 내가 한 짓이라고, 너랑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할 거야…”여진수의
여진수는 당장 경찰서로 달려가 실종 신고했다. 경찰은 내가 실종된지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여진수는 화장대에 올려둔 작업복을 보며 말했다.“아마 일요일에 실종되었을 거예요.”“아마요? 일요일이요? 오늘이 수요일인데 그동안 뭐 하고 있다가 이제 신고한 거예요?”경찰의 말은 마치 총알처럼 여진수의 마음에 박혔다.“마지막으로 본 착장이 어떤 거예요? 어디로 갔는지 알아요?”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여진수는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고 말했다. 모르는 건 사실이었다.내가 문을 박차고 나선 순간부터 여진수는 나를 찾은 적이 없었다.엄마와 어머님이 내가 실종됐다는 사실을 알고 경찰서로 달려왔다.여진수보다 두 어머니가 나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있었다.“마지막으로 희연을 본 건 토요일이었어요. 그날 내가 일어나다 넘어지는 바람에 희연이 급하게 병원으로 데려다줬거든요.”장미옥의 말에 여진수가 얼른 장미옥의 몸을 살폈다.“엄마, 어쩌다 넘어진 거예요? 왜 말을 안 해요?”장미옥이 그런 여진수를 째려봤다.“희연이가 너 바쁘다고 말하지 말자고 했어. 나와 사돈이 조금만 아파도 다 희연이가 병원에 같이 가줬어. 몹쓸 놈. 희연이 못 찾으면 이제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친엄마인 장미옥이 이렇게 말하자 죄책감에 휩싸인 여진수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아마 여진수도 내가 그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엄마, 걱정하지 말아요. 희연이 꼭 찾아낼게요. 아참, 아직 모르고 있었죠? 희연이 임신했대요.”엄마와 어머님은 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두 손을 맞잡았다.경찰도 내가 임신했다는 단서에 근거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소식을 찾을 수가 없었다.경찰은 내가 버스를 탄 흔적을 찾지 못했기에 내가 아직 이곳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밤새 잠을 잘 자니 못한 여진수는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채로 직장으로 향했다.프런트를 지키던 여 인턴 김민지가 선물을 들고 여진수를 찾아왔다.여진수는 의아한 눈빛으로 핑크와 블루가 섞인 박스를 쳐다봤다.“박사님께 드리는 거 아니에요. 사모님께 드리는 거예요. 저번에 쇼핑몰에서 사모님이 이 젖병 사고 싶어 했는데 재고가 없어서 못 샀어요. 어제 쇼핑하다가 재고가 들어왔길래 산 거예요. 아이의 출생 선물로 드릴게요.”이 말에 나는 지난주에 유아용품 사러 쇼핑몰에 갔다가 김민지를 만났던 게 떠올랐다. 김민지는 갓 태어난 조카의 선물을 고르러 온 것이었다.내가 유아용품을 고르고 있자 김민지는 형수가 나열한 리스트를 내게 공유해줬다.나는 여지수가 사줄 거라는 희망을 걸지 않았기에 배가 커지기 전에 물건을 들 수 있을 때 필요한 용품을 미리 사둘 생각이었다.여진수는 선물을 받고 실험실로 들어가며 김민지가 한 말을 곱씹었다.‘젖병? 출생 선물?’핸드폰을 확인했지만 내가 보낸 문자는 없었다.여진수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물건을 김민지가 착각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주위에 아이를 출산하는 사람이 없었다.여진수가 내게 전화해 물어보려는데 택배 기사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집에 사람 있나요? 큰 택배가 도착했는데 문 앞에 놓으면 될까요?”“무슨 택배요?”여진수가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물었다.“유아용 침대와 유아용 세탁기, 아무튼 전부 유아용품이에요. 당신 와이프도 알고 있어요. 보름 전에 산 물건도 다 유아용품이었어요. 축하해요. 곧 아이가 태어나려나 봐요.”택배 기사의 말에 여진수는 머리가 윙 했다. 갑자기 아빠라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창가로 다가가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고는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으로 내게 전화하려다 눈길이 궤짝에 올려놓은 병사리로 향했다.여진수는 그날 시체에서 꺼낸 태아가 생각나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파르르 떨렸다. 불안한 예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아니야, 아닐 거야.”여진수가
여진수가 실험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저녁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여진수는 장미옥의 잔소리 폭탄을 맞았다.“진수야, 설마 또 희연과 싸운 거니?”여진수는 장미옥의 말에 내가 다 일러바친 줄 알고 언짢은 표정으로 아니라고 대답했다.장미옥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네가 희연이를 화나게 한 게 틀림없어. 아니면 왜 3일 내내 전화 한 통 없겠어? 매년 이맘때쯤 되면 사돈과 나를 데리고 건강 검진하러 가는데 오늘은 우리가 아무리 연락해도 답이 없어.”여진수는 그제야 내가 매년 두 어머니를 데리고 건강 검진하러 간다는 걸 알았다.“잘 들어. 희연이 왜 화났는지 모르지만 당장 달래서 데려와. 안 그러면 너랑 모자의 연을 확 끊어버릴 테니까.”장미옥의 말에 여진수가 대충 얼버무리고는 서재로 향했다. 여진수는 나를 차단 해제할지 잠깐 고민하는 것 같았다.맹수지 일로 싸우고 집을 나설 때 여진수가 으름장을 놨던 게 생각났다.“나가면 다시 들어올 생각하지 마. 내가 달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니까.”그러더니 바로 나를 차단해 버렸다.이제 여진수의 소원대로 나는 영영 돌아올 수 없었다. 여진수는 서재를 빙빙 돌며 한참 생각하다가 결국 나를 차단 해제하기로 마음먹었다.늘 오만하기만 한 여진수였기에 절대 내게 먼저 문자를 보낸 적이 없었다.차단 해제하고 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내게서 오는 연락은 없었다. 망설이던 여진수가 내게 이모티콘을 하나 보냈다.반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도 여진수가 기다리는 답장은 오지 않았다.약이 잔뜩 오른 여진수는 핸드폰을 끄고 자러 갔다.방문을 열자마자 여진수의 눈에 들어온 건 내가 가지런히 화장대에 올려둔 제복이었다.일종의 습관이었다. 일요일 저녁만 되면 나는 제복을 화장대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이를 본 여진수가 화장대로 걸어가 내 제복을 만지작거렸다.오늘은 화요일이었다. 며칠간 집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다.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여진수가 이내 정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