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훈은 진원우가 통화하는 걸 알아채고 축축이 젖은 머리를 닦으며 물었다.“왜? 너 돌아오래?”그는 구애린인 줄 알았다.진원우는 전화를 끊고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대답했다.“아니, 애린 씨는 이미 잠들었을 거야. 오늘 종일 밖에만 돌아다녀서 지금쯤 곯아떨어졌어. 날 신경 쓸 겨를도 없을걸.”임지훈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내 방에 찾아오더라니. 마누라가 안 놀아줬구나. 그러게 내가 뭐랬어. 너희들같이 우정보다 사랑이 먼저인 녀석들이 무슨 시간이 나서 솔로인 날 관심하겠냐고.”“...”진원우은 분명 좋은 마음으로 찾아온 건데 왜 안 오기만 못 한 꼴이 된 걸까?“쯧쯧, 넌 이래서 솔로야.”진원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가자, 나랑 나가서 놀아.”임지훈은 침대에 누우며 단호하게 거절했다.“안 가.”“왜 안 가?”진원우가 물었다.“가기 싫어.”임지훈은 손을 내저었다.“얼른 네 방으로 돌아가, 나 쉬는 거 방해하지 말고.”“...”다 그를 위해주는 건데 왜 수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까?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냐고?“날 위해서라도 가주라, 응?”진원우가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진원우는 단호하게 머리를 내저었다.“돌아가서 와이프나 챙겨. 넌 유부남이고 난 미혼이야. 우리가 함께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진원우가 쓴웃음을 지었다.“왜 못 놀아? 내가 결혼했다고 바에 가서 술도 못 먹냐? 그게 네가 미혼인 거랑 뭔 상관인데?”임지훈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그를 빤히 쳐다봤다.“난 바에 가면 미녀를 안고 놀 수 있어. 넌 있냐?”“...”진원우는 어이가 없었다.“너 이 자식.”그는 하마터면 험한 말을 내뱉을 뻔했다.“차이가 있는 거 당연한 거잖아. 우린 함께 못 놀아. 얼른 네 방으로 돌아가. 여기서 귀찮게 굴지 말고.”“...”진원우는 침대 머리맡으로 걸어가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고집 그만 부리고 얼른 일어나. 너 안 가면 우리 절교야.”임지훈이 다리를 침대에 내려놓았다.“왜? 이젠 날 협박해?
진원우는 그가 이렇게 생각할 줄은 미처 몰랐다.다만 심재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저토록 은밀한 곳에서 여자와 함께 은근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오늘이 심재경의 결혼식 날인데 이런 곳에 나타난 것 자체가 그릇된 일이다!진원우는 일부러 놀란 척 연기했다.“그러게. 첫날밤에 바에 온 거야? 옆에 여자까지 있고. 저거 분명 바람이야.”임지훈이 말했다.“이슬 씨한테 전화해야겠어.”진원우가 얼른 그를 말렸다.“이슬 씨 알면 이혼하자고 난리일 텐데! 재경이도 어렵게 이슬 씨랑 결혼했어. 우리가 친구를 배신하면 안 되지.”“저러고도 친구야? 이 결혼이 힘든 걸 알면 더 소중히 여겼어야지. 이렇게 쉽게 바람피우는 게 어디 있어?”임지훈이 씩씩거렸다. 진원우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당장 뛰쳐나가 심재경을 때리고 싶었다.진원우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무슨 일이 있어도 남의 결혼은 무너뜨리지 말랬어. 재경이한테 그러면 안 돼.”그는 임지훈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한번 가볼까? 여기서 그만 추측하고. 단순히 업무 얘기하는 거일 수도 있잖아.”임지훈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재경 씨는 바람피울 사람이 아니야. 정말 바람피운다 해도 신혼 첫날밤엔 그럴 리 없어.”진원우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찬성했다.임지훈이 머리를 번쩍 들고 그에게 말했다.“얼른 가보자.”진원우는 그의 뒤에서 몰래 웃었다.‘그래, 어디 한번 가봐. 너만 모르는 속임수야 바보.’다만 겉으론 전혀 티 내지 않고 심재경의 앞으로 다가갔다. 임지훈이 그를 내려다보며 먼저 말했다.“뭐 하세요 재경 씨? 이렇게 한가해요? 오늘이 무슨 날인데 여기서 술이나 마시고 있어요?”그는 말하면서 옆에 있는 여자를 쳐다봤다.“이 사람 유부남인 건 알고 있어요?”심재경과 여자는 모두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 길고 늘씬한 다리가 훤히 보였다. 위에는 타이트한 검은색 상의를 입고 목에는 실버 목걸이를 끼고 있었다. 그녀는
임지훈은 어이가 없었다.“지금 그거 무슨 눈빛이에요?”그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심재경은 얼른 진원우를 소개했다.“여긴 또 다른 절친 진원우야.”방유정은 진원우를 보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안녕하세요.”진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반가워요.”“다들 앉아.”심재경이 말했다.진원우는 눈치가 빨라 심재경의 옆에 앉았다. 남은 자리가 없어 임지훈은 마지못해 방유정과 가까운 곳에 앉았다.방유정은 짜증 섞인 얼굴로 말했다.“내 옆에 앉지 마요.”“...”임지훈은 어이가 없었다.“나 꼭 여기 앉아야겠는데요.”그는 오기가 생겼다.“싫다고 하면 기어코 옆에 앉을 거예요. 뭐 어쩔 건데요?”원래 아까 술 세례를 당해서 기분이 언짢은데 지금 또 이렇게 사나운 여자를 마주하니 임지훈도 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지금 여자들은 대체 왜들 이런 거야?’술 한잔 따르며 마음을 추스르던 찰나 방유정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심재경과 진원우도 그를 바라봤다.임지훈은 그러려니 하고 계속 술을 마셨다.이에 진원우가 툭툭 치며 말했다.“왜 혼자 마셔? 다 함께 마셔야지. 우리도 따라줘.”임지훈이 말했다.“마시려면 혼자 따르든가.”진원우는 두 눈이 뒤집힐 뻔했다.수습해보려고 한 건데 이렇게 무안을 주다니.아무리 도와주려 해도 지금은 전혀 부질없는 노릇이다.오늘 임지훈은 분노 덩어리가 된 듯싶다.심재경이 눈빛으로 진원우에게 물었다.“왜 저래? 너무 예민하게 굴잖아.”진원우는 머리를 내저었다. 분명 서운한 일을 당해서 닥치는 대로 화풀이하는 듯싶다.심재경은 임지훈과 방유정을 번갈아 보며 맞선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다.그는 진원우에게 술 한 잔 따랐다.“우리도 마시자.”임지훈이 한마디 끼어들었다.“나는?”“혼자 마신다며? 술친구 찾고 싶으면 옆에서 찾아. 우릴 보지 말고.”진원우가 명확하게 말했다. 그와 함께 안 마신다고...임지훈은 말문이 막혔다.“그러든가 말든가. 혼자 마시지
방유정이 고개 돌려 그를 바라보더니 코웃음을 쳤다.“왜요? 나 꼬시게요?”“...”임지훈은 입이 쩍 벌어졌다.“뻔뻔스러운 사람을 많이 봐왔지만 또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요.”그는 비아냥대며 말했다.“이 세상에 여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쪽을 꼬실 일은 절대 없어요.”“그러게요. 여자가 있다면 뭣 하러 선보러 나왔겠어요. 딱 보니까 솔로로 찌든 사람 같네요.”방유정이 노는 걸 좋아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멍청이는 아니다. 심재경은 언제든 단기문을 만날 수 있는데 굳이 그녀를 통해 물건을 전달할 필요가 있을까?이걸 빌미 삼아 선 자리를 주선하는 거겠지!그녀는 빤히 알면서 까밝히지 않았을 뿐이다.심재경은 눈썹을 들썩거렸다.‘그냥 잘 노는 애인 줄 알았는데 꽤 섬세하네.’임지훈은 화나서 자리에 벌떡 일어섰다.평상시에 심재경과 진원우가 그를 솔로라고 놀려대도 다들 친한 사이라 농담인 걸 알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금방 알게 된 사람이 이토록 놀려대니 기분이 잡치고 울화가 치밀었다.“지금 누굴 능멸해요? 내가 왜 선을 봐? 선을 본다면 내 맞선 상대는 어디 있어요?”그는 말하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재빨리 되새겨보았다. 홀로 호텔에 남아있는데 진원우가 한사코 술 마시러 가자고 했고 또 우연히 심재경을 만났는데 그의 옆에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다.그렇다면 이 여자가 바로 그의 맞선 상대일까?...임지훈은 저 자신이 우스웠다.“설마 그쪽이 내 맞선 상대인 건 아니죠?”방유정은 그의 표정을 보며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도 더는 놀려대지 않고 심재경을 쳐다보며 두 눈을 깜빡거렸다.“내 말 맞죠?”임지훈은 심재경에게 시선을 돌렸다.심재경은 질의에 찬 임지훈의 눈빛을 보더니 난감하면서도 공손하게 미소 지었다.“저기, 그게 그러니까...”“맞아.”진원우가 대신 대답했다.“여자 소개해주고 싶으면 바로 말하면 되잖아!”“바로 말하면 네가 나올까?”진원우가 되물었고 심재경도 덩달아 머리를 끄덕였다.“그러게요
오늘은 그의 결혼식 날이었으니 당연히 집에 돌아가야 한다.이 타이밍에 그를 남기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이다.진원우가 임지훈의 어깨를 툭툭 쳤다.“살면서 처음 주선을 해보는데 제대로 망쳤어.”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애린 씨 홀로 호텔에 남아있어서 나도 이만 돌아가야겠어. 걱정돼서 안 되겠다. 여기 호텔이랑 가까우니 너 혼자 돌아와.”임지훈은 머리를 끄덕였다.“술을 다 시켜놓고 안 마시면 낭비잖아. 난 다 마시고 갈게.”“너무 많이 마시진 말고.”진원우가 분부했다.임지훈은 머리를 끄덕이며 그에게 대답했다.“알았어, 얼른 돌아가. 와이프 임신 중이잖아.”진원우는 자리에서 나와 방유정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제 친구 덕담을 해줬다.“우리 지훈이 괜찮은 애예요. 놓치지 마세요.”임지훈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한마디만 더 하면 밤에 못 자게 네 방문 두드릴 줄 알아!”임지훈은 너무 창피했다. 딴사람들도 있는 장소였으니.“그래, 알았어. 그만할게.”진원우가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방유정은 임지훈을 보다가 불쑥 자리에 앉았다.임지훈은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왜 안 가요? 나랑 선볼 생각이에요?”방유정이 답했다.“나쁘진 않죠.”임지훈이 독하게 말을 내뱉었다.“유정 씨는 내 스타일 아닌데.”“마찬가지거든요. 지훈 씨 혼자 술 먹는 거 지켜보려고요.”방유정이 말하면서 제 잔에도 술을 따랐다.임지훈은 그녀가 찬 팔찌를 보더니 입을 삐죽거렸다.“애들도 참 막무가내지. 어떻게 유정 씨 같은 재벌 집 따님을 내게 소개해줄 생각을 해요? 조건도 안 보나 봐.”방유정이 물었다.“왜 그렇게 말해요?”“지금 그 팔찌, 모 명품 브랜드의 이번 시즌 최신 모델인데 한정판으로 판매되니 가격이 어마어마하죠? 난 유정 씨 같은 분을 감당할 능력이 못 돼요.”방유정은 손목에 찬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다이아몬드가 가득 박혀 있어 눈부시게 빛나니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나 같은 여자는 어떤 여자인데요?”방유정이 시선을 올렸다.
임지훈은 오는 사람을 막지 않는 솔로 원칙을 따랐다.“혼자야.”미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살랑살랑 흔들었다. 임지훈도 가까이 들이대는 여자를 밀치지 않고 씩 웃었다.“여자친구 있어요?”미녀가 물었다.“있으면 이런 곳에 와서 시간 때우겠어?”미녀는 더 활짝 웃었다.“난 오빠처럼 솔직한 사람이 좋다니까.”방유정은 소파에 앉아 한 손에 잔을 들고 다른 손을 넌지시 내려놓은 채 술 한 모금 마시며 임지훈을 바라봤다.그는 훤칠한 체격에 역삼각형 몸매라 인파들 속에서 한눈에 띄었다.무대 위에서 미녀가 그에게 끊임없이 들이대며 귓속말로 속삭였다.“맞은 편에 호텔 있는데 함께 갈래요?”이 여자는 돈을 바라는 게 아니라 오롯이 임지훈에게 반했다.그냥 하룻밤을 보내자는 뜻이었다.임지훈은 눈썹을 치키고 썩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거절해도 돼?”미녀는 표정이 살짝 변했지만 금세 회복했다.“겁먹었어요?”임지훈이 대답하려 할 때 방유정이 어느샌가 옆으로 다가와 그 여자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이 남자 임자 있어.”그 여자는 방유정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에 기 눌리긴 했지만 무작정 뒷덜미를 잡히자 체면이 구겨지는 기분이었다.“거짓말하면 안 돼요.”그녀는 또다시 임지훈에게 물었다.“오빠, 이 여자 오빠 여자친구 맞아요?”임지훈은 방유정을 힐긋 바라보며 답했다.“응.”미녀도 더는 집착하기 무안하여 하이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허리를 씰룩거리면서 무대로 돌아갔다. 다음 타깃을 찾는 듯싶었다.그녀가 떠나간 후 임지훈이 곧바로 해명했다.“나도 방금 어떻게 거절할지 몰랐거든요.”“신나게 놀았잖아요? 뭣 하러 거절해요?”방유정이 거만한 자세로 쏘아붙였다.임지훈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대답했다.“그냥 한번 노는 거지 진짜 호텔에 가겠어요? 나 눈 높아요!”“그래요, 전혀 안 그래 보이네요.”방유정이 비꼬았다.“오는 사람 안 막는 거 아니에요? 난 그렇게 생각했는데.”임지
구애린은 편하게 욕조에 누워 진원우의 마사지를 받았다.“이따가 잠드는 거 아니에요?”구애린이 지그시 눈을 감고 말했다.“안 자도 원우 씨는 내 옆에 꼭 있어야 해.”진원우는 속절없이 웃으며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나만 괴롭혀.”“그럼 원우 씨가 임신할래? 나 날로 먹게.”구애린이 고개 돌려 그를 쳐다봤다.진원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피식 웃으며 젖은 손으로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내가 임신하면 애린 씨는 엄마가 못 돼. 아빠 할래요 그럼?”구애린이 웃었다.이때 밖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나가서 전화 받을게요.”진원우가 말했다.이 시간에 오는 전화는 급한 전화가 분명했다.진원우가 밖에 나가 발신자 번호를 보더니 눈썹을 치켜세웠다.“안 돼. 두 사람 상극이야.”“네가 어떻게 알아?”“첫 만남부터 티격태격 싸웠고 하마터면 크게 번질 뻔했다니까.”단기문은 그제야 알아챘다. 재벌가의 공주님께서 난폭한 성격을 고쳤을 리가? 임지훈의 번호를 물어보는 건 그에게 호감을 느낀 게 아니라 계속 싸우기 위해서겠지!남자 보는 눈이 머리 꼭대기에 달렸으니 임지훈과 절대 잘 지낼 리 없다.“그래, 잘 안 되면 말고. 나도 큰 기대는 없어. 알겠으니 이만 끊어.”“알았어.”진원우는 통화를 마치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임지훈에게 여자를 소개해주는 건 하늘의 별 따기일 듯싶다....오늘은 심재경과 안이슬의 신혼 첫날밤이다.안이슬의 몸 상태로 인해 둘은 서로 안고 잘 뿐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심재경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오늘 많이 힘들었지?”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근데 왜 아직도 안 자?”심재경이 다정하게 되물었다.안이슬은 눈을 멀뚱거렸다.“몰라, 너무 흥분했나 봐.”“결혼해서?”안이슬은 고개 돌려 그와 코를 맞대고 그윽한 눈길로 서로를 마주 봤다.심재경이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안이슬은 수줍은 듯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심재경은 다정하게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안이슬은 아직 완
안이슬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가볍게 그의 볼을 비볐다.심재경은 눈웃음을 지었다.“왜 웃어?”심재경도 자신이 뭘 웃는지 몰랐다. 그저 들뜬 마음이 저절로 얼굴에 나타났나 보다.둘은 서로를 지그시 바라봤다.아무 말 없이 묵묵히 서로를 바라봤지만 수천 마디 달콤한 말을 한 것보다 더 진한 여운을 남겼다.이렇게 바라보고만 있어도 심재경은 너무 행복했다.으앙...이때 샛별이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안이슬이 재빨리 일어나려 하자 심재경이 그녀를 붙잡았다.“자고 있어.”그는 안이슬의 이불을 여미어주며 말했다.“내가 가볼게.”“나도 이만 일어나야 해.”“일어나도 할 거 없어. 더 자.”심재경이 그녀에게 다시 이불을 덮어줬다.“착하지.”안이슬은 행복이 잔뜩 담긴 미소가 얼굴에 퍼졌다.심재경과 함께 이런 안일한 삶을 또 살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이건 마치 꿈 같은 일이다.그녀는 돌아누워 문밖을 나가는 심재경을 바라봤다.문이 닫히고 그녀는 제 얼굴을 어루만졌다.안 좋은 일이 생각나 기분이 확 가라앉았지만 곧바로 감정을 조절했다.이젠 꼭 잘 살아야지. 새 출발을 해야지!전에 있었던 모든 불쾌한 일들을 깨끗이 잊어야지!...방유정은 단기문의 침실에 뛰쳐 들어가 이불을 걷어냈다.단기문은 놀라서 잠이 확 깼다.“뭐야...”험한 말이 입 밖에 나오기도 전에 방유정을 보자 순순히 자리에 앉으며 시계를 쳐다봤다.“몇 신데 아침 댓바람부터 이 난리야?”“전화번호 좀 물어본 것뿐인데, 안 주면 말 것이지 내 전화는 왜 안 받아요? 대체 무슨 뜻이냐고요 오빠!”방유정은 오늘 검은색 샤넬 원피스를 입고 발렌티노 하이힐을 신었다. 정교한 목걸이와 부드러운 머릿결까지 완벽한 풀 세팅이었다.그녀는 거만한 자세로 두 팔을 껴안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전혀 반감을 일으키진 않았다.어릴 때부터 예쁨받고 자라다 보니 제멋대로인 성격에 성질머리가 조금 난폭할 뿐이다.단기문은 가볍게 눈썹을 치켰다.“일단 이불은 좀 주지.”그는 팔
결혼식을 마친 후 방유정 아버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떠나기 전에 임지훈에게 회사를 완벽하게 인계하려고 회사에 들어오라고 제안했다.임지훈은 송연아와 강세헌 일행과 같이 먼저 프랑스로 돌아가서 그쪽 일을 마무리했다. 비록 임지훈이 회사에 있으면 강세헌은 보다 한가하게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가 떠난다고 해도 그냥 조금 더 바쁠 뿐이다. 어느 회사든 누가 떠나면 절대 안 되는 건 없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임지훈은 프랑스에서의 일들을 모두 마치고 귀국해서 방씨 가문 회사에 들어갔다.임지훈도 국내에 집이 있었지만 방유정과 같이 방씨 가문에 들어갔다. 데릴사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유정 아버지의 병을 알고 방유정이 부모님과 많을 시간을 보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임지훈 역시 사위로서 그럴 의무가 있었다....반년 후, 방유정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방유정 어머니는 그 충격에 순식간에 많이 늙었다. 방유정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집안 분위기는 아주 저조했는데 방유정의 대부분 시간은 어머니와 함께 보냈다. 예전의 임 비서는 이제 임 대표가 되어 그의 능력으로 방씨 가문은 아주 관리가 잘 되었고 3개월 후 방유정 어머니의 상황도 많이 좋아졌다.방유정이 드디어 임신하게 되면서 방유정 아버지가 돌아간 일도 어느 정도 잊혀가고 있었다. 임지훈은 곧 아빠가 된다는 사실이 기뻤고 방유정도 곧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행복했고 방유정 어머니 역시 곧 외할머니가 된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정말로 모두 행복해할 만한 일이었다.방유정이 임신 6개월 때 그들은 프랑스로 갔는데 구애린은 남자아이를 낳았고 심재경의 딸은 이제 걸을 수 있게 되었는데 샛별이가 유일한 여자아이여서 모두가 예뻐했다. 샛별이는 아직 작고 어렸지만 찬이를 쫓아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찬이는 샛별이 다리가 짧다고 계속 놀려줬으며 그게 재밌다고 샛별이는 키득키득 웃었다. 찬이가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면 샛별이는 오빠라고 불렀는데 너무 귀여웠다.방유정이 말했다.“저도 딸을 낳고 싶어요.”구애린이 말했다.“그게
비록 손을 놓기 싫었지만, 방유정 아버지는 결국 방유정의 손을 임지훈에게 넘겨줬다.“앞으로 계속 사랑하며 살기를 바란다.”방유정도 아버지에게 말했다.“꼭 그렇게 할게요.”이어서 결혼식은 순서대로 일사천리로 피로연까지 모두 순리롭게 진행되었다.방유정 어머니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는데 딸이 그렇게도 바라던 결혼을 하니 너무 기뻤다. 그런데 결혼시키고 나니 또 잘 살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세상의 부모들은 다 그런가 보다.임지훈은 방유정을 데리고 강세헌이 있는 테이블로 가서는 비록 모두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소개했다. 모두 방유정을 다시 한번 소개받았는데 이번에는 심재경 친구의 사촌 동생이 아닌 임주훈의 아내로 말이다.구애린이 웃으며 말했다.“정말 너무너무 축하해요.”방유정도 웃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윤이도 어른들 따라 한마디 했다.“축하해요.”방유정은 윤이를 보며 말했다.“너무 귀여워요.”그녀가 손을 뻗어 윤이의 얼굴을 만지자, 윤이가 손을 내밀었다.“안아줘요.”송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윤이야, 안 돼.”방유정이 말했다.“괜찮아요.”그녀는 윤이를 안으며 말했다.“무겁지 않아요.”윤이는 그녀의 머리에 있는 금색 비녀를 보고 만지려고 했다. 방유정이 한복을 입고 있었기에 머리에 비녀를 하고 있었다. 방유정은 아주 시원하게 바로 비녀를 빼서 윤이에게 주었는데 송연아는 윤이를 제지하지 못해서 미안해했다.“이러면 안 돼요. 오늘 얼마나 중요한 날인데...”“괜찮아요. 그냥 액세서리일 뿐이에요. 윤이가 좋아하니 놀게 해요.”방유정은 정말 성격이 좋았다. 역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것만큼 성품이 좋았다. 가끔 조금 오만하긴 하지만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모두 그녀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송연아는 윤이를 안고 달래려고 했다.“윤이 착하지. 이건...”송연아는 윤이가 방유정을 어떻게 부르면 될지 생각했는데 방유정이 웃으며 말했다.“호칭일 뿐이니까 편
“지금 막 들었는데 유정 씨와 결혼한다면서요. 지금 방씨 가문에서 결혼식을 준비한다고 난리 났어요.”임지훈이 웃었다.“저 이래 봐도 능력 있는 남자예요. 여자들한테도 인기 많아요. 봐요, 결혼도 금방 하죠?”구애린이 말했다.“이제 우리 모두 짝이 있네요.”찬이도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지훈이 삼촌, 축하해요.”“고마워.”임지훈이 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심재경이 물었다.“그런데 데릴사위로 들어간다고 하던데요?”심재경의 말에 모두 놀라며 시선이 일제히 임지훈에게로 향했다. 확실히 놀랄만한 일이다. 임지훈의 조건에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돈도 있고 능력도 있어서 충분히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데 말이다.“하긴, 방씨 가문에 가장이 필요하긴 해요.”심재경이 그쪽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한마디 했다....임지훈의 결혼식으로 송연아와 강세헌도 프랑스로 돌아가는 일정을 늦췄다. 아무도 심재경의 결혼식을 보러 왔다가 임지의 결혼식까지 보게 될 줄을 생각을 못 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이건 임지훈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듯이 방유정과의 결혼은 정말로 찰나의 결정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그 역시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임지훈이 진원우에게 말했다.“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진원우가 말했다.“그런 배부른 소리 하지 마. 방씨 가문은 돈도 많고 유정 씨도 예쁘고 그 정도면 만족해야지.”“만족해. 다만 너무 빠른 것 같아서 그래.”귀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싱글이었는데 이제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결혼식은 방씨 가문에서 모두 준비했는데 방유정 딸 하나이고 또 사위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결혼식은 아주 성대하게 치렀다. 방씨 가문의 친척들도 꽤 많이 참석해서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비록 데릴사위라고 하지만, 임지훈 측은 심재경이 준비했는데 심재경 본인도 금방 결혼식을 치렀기 때문에 익숙한지라 아주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었다....방유정은 정교한 메이크업을 하고 값진 웨딩드레스를 입었는
“잠도 잤는데 왜요? 모른 척하려고요?”방유정이 옷을 입더니 침대에서 꼼짝 안 하는 임지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왜요? 계속 그렇게 누워 있을 거예요?”임지훈이 말했다.“내 옷을 가져오지 않았잖아요. 나 입을 옷 없어요.”방유정은 그제야 임지훈이 옷이 없다는 걸 생각했다.“가져다 줄게요.”그녀는 곧바로 차에 가서 캐리어를 가지고 다시 올라갔다.“뭐 입을지는 알아서 찾아서 입고 내려와요. 아래층에서 기다릴게요.”방유정은 말을 마치고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임지훈은 침대에서 내려 결혼 얘기이니만큼 격식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 정장을 찾아서 입었다. 그가 정리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방유정은 부모님 가운데 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의 부모는 그를 보자마자 더욱더 열정적이었다.임지훈이 건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저기...”“우리 딸 줄게요.”“아니에요. 지훈 씨가 저한테 시집 오는 거예요.”방유정이 정정했다.“...”“...”“...”방유정을 제외한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물었다.“유정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방유정은 자신이 여자이며 이 집안에 다른 후계자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아버지가 중병이고 자기는 회사를 관리할 능력도 없기에 어찌 보면 자기가 남편을 찾는다기보다는 방씨 가문의 회사를 경영할 사람을 찾는 거였다. 인제야 그녀는 부모가 조급해하는 의도를 이해했고 그녀 역시 가문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임지훈이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임지훈을 각별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그런 것들 때문이지 않겠는가.“유정 씨,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임지훈은 뼈대가 있는 남자로서 데릴사위 할 생각은 없었다.방유정이 말했다.“후회하면 안 돼요!”“왜 안 돼요? 유정 씨가 뭘 원하든지 저 모두 만족시켜 줄 수...”“제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예요.”방유정이 외치자, 임지훈은 오히려 우스웠다. 한 여자가 나한테 시집오라고 하다니!“우리 유정이가 시집가는 거 맞아요
지금 그녀가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물으면 부모님은 더 속상해할 것 같았다.‘나 이제 어떻게 해야지? 어떻게 하면 좀 더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지? 결혼, 그래 결혼해야 해.’그녀는 자기가 결혼해야만 부모님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 상대도 지금 바로 방에 있지 않겠는가?‘남자 친구인 척을 해줬으니 이제 남편인 척해달라고 해야지. 진짜가 아니고 가짜라도 되니까 결혼하자고 해야겠어.’방유정은 진료 기록부를 다시 원래 위치에 넣고 비틀거리며 부모님 방에서 나와 자기 방으로 돌아갔는데 임지훈이 아직 욕실에서 나오지 않아 침대 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한참 지나자, 임지훈은 가운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왔는데 침대에 자기의 옷이 보이지 않아 방유정의 옆에 서서 물었다.“내 옷은요?”그는 방유정이 잊은 것 같아서 다시 말했다.“내 옷은 지금 당신 차 트렁크에 있어요.”방유정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지훈 씨, 우리 결혼해요.”임지훈은 어이가 없었다.“약을 잘못 먹었어요? 아니면 정신이 어떻게 됐어요?”“다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요.”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거칠었는데 임지훈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울었어요? 누가 괴롭혔어요? 얘기해 봐요. 제가 가서 때려줄게...”임지훈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방유정이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임지훈은 갑작스러운 친밀감에 몸이 굳어버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그게... 유정 씨...”그가 말하려고 할 때 방유정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의 손이 아래로 드리는 순간 몸에 걸친 유일한 가운마저 벗겨져서 흘러내렸다.“...”방유정은 워낙 임지훈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지금 행동이 충격에 의한 도발적인 행동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웃옷의 단추를 벗겨 가슴을 드러내고는 그의 가슴에 가까이하며 말했다.“저를 좀 봐봐요.”임지훈은 참을 수 없었는지 목젖을 굴렸는데 이름 모를 불길이 아랫배에서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딱딱해졌다.“정말 후회하지 않겠어요?”임지훈도
방유정은 어머니가 자신의 어깨를 다독이자, 화가 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응원을 하시는 거였다.“화이팅!”방유정은 완전히 어이가 없었다.‘지금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건가?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지?’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만 좋다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최근에는 갑자기 선 자리를 만들어주고 남자를 유혹하라고까지 하시다니?그녀는 어머니의 이마를 만지며 물었다.“엄마,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방유정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우리 이제 나가야 해.”방유정의 아버지는 기사가 이미 대기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집을 나갔고 방유정은 문 앞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차가 떠나자, 그녀는 집으로 들어갔는데 어차피 임지훈이 자고 있었기에 지루할 것 같아서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았다.그녀는 가만히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는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심심했다. 그런데 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서 임지훈을 놀려주려고 그가 곤히 자는 방으로 올라가서는 화장대에서 화장품을 가져다가 침대 옆에 앉아 임지훈에게 예쁜 화장을 해주었다. 그러고 나서도 임지훈이 깨지 않자, 옆에서 핸드폰을 보다가 눈이 아파 오니 옆에 기대서 잠이 들었다. 그녀가 일어났을 때는 임지훈은 이미 깨어나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언, 언제 깼어요?”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방유정은 참을 수 없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훈의 얼굴은 정말로 오페라 가수 같았는데 어찌나 웃었는지 배가 아팠다. 임지훈은 그녀의 턱을 받쳐 들고 물었다.“다 웃었어요?”방유정은 곧바로 웃음을 거두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맘대로 제 몸에 손을 대지 말아요.”임지훈이 말했다.“유정 씨를 저에게 준다고 해도 거절이에요.”방유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뭐라고요? 저를 좋다고 하는 남자들이 줄을 서면 프랑스까지는 갈 거예요. 그런데 지훈 씨는 내가 싫다고요?”임지훈이 흠칫하자, 방유정이 그를 잡고 물었다.“지금 그
“방유정은 부모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알았어요. 하시고 싶은 대로 하세요.”“어서 지훈 씨 방으로 데려가.”방유정이 물었다.“어느 방에요?”방유정 어머니는 그제야 깨달은 듯 말했다.“어머, 어떡해. 게스트룸은 아직 준비가 안 돼있어. 우선 네 방으로 데려가서 휴식하게 해.”방유정은 어머니의 말에 놀라며 말했다.“아빠, 엄마, 이 정도로 오픈 마인드였어요? 어떻게 제 방에 술 취한 남자를 데려가라고 하세요?”“네 말대로 취했는데 뭐 어때?”“술김에 어떤 짓도 한다는 말 몰라요?”방유정이 묻자, 그녀의 부모님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몰라.”방유정은 철저히 말문이 막혔다. 부모님과 임지훈이 정말로 모르는 사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임지훈이 그들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엄마 아빠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아무리 나를 결혼시키고 싶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만약 진짜로 무슨 일이 있으면 책임지라고 하고 바로 결혼시킬 거야.”임지훈은 그 말을 들으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바탕 뿜었다. 방유정의 부모님이 너무 열정적이어서 본인이 천당에 있는 것 같았는데 정말로 귀여운 부모님들이라고 생각했다.‘방유정은 전생에 은하계를 구했나 봐. 이런 가정에서 태어나고 말이야.’방유정은 역겨워하며 말했다.“지훈 씨,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요. 화장실로 가야지.”“취했잖아.”방유정 어머니가 가정부를 불러 치우게 했다.“그만하고 불편해 보이는데 어서 방으로 데려다 쉬게 해.”방유정은 혼자서 임지훈을 옮길 수 없어서 가정부의 도움을 받아 함께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방에 도착하자, 그녀는 임지훈을 침대에 던졌는데 임지훈은 몸이 포근한 세계에 떨어진 듯 따뜻하고 향기로웠다.“무슨 향수를 써요?”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방유정이 말했다.“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얼른 잠이나 자요.”임지훈은 취한 건 사실이지만 정신만은 여전히 말짱했다. 그는 눈을 감고 또 말했다
임지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요. 해명하지 않아도 화는 나지 않았을 건데, 굳이 해명하니 용서해 줄게요.”방유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삐쭉거렸다.“그렇게 잘난 척하지 말아요. 그럼 좋은 말이 안 나가니까.”“...”임지훈이 할 말을 잃었다.그때 방유정의 어머니가 열정적으로 요리를 집어 그의 앞접시에 건넸다.“이건 우리 가족이 모두 좋아하는 요리인데 맛봐요.”임지훈이 집어서 입어 넣고 먹어보더니 말했다.“맛있습니다.”방유정 어머니는 미소를 지었고 방유정 아버지는 그에게 술을 따랐다.“평소 주량이 어떻게 돼요?”임지훈이 웃으며 대답했다.“못합니다.”방유정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었다.“잘 마실 것 같은데 너무 겸손하시네요.”임지훈이 말했다.“아니에요. 아니에요.”방유정은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아빠, 지훈 씨는 일이 바빠서 내일 프랑스로 돌아가야 해요. 일을 망치면 안 되니까 술을 많이 주지 마세요.”방유정 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그래.”“네. 그러니까 한 잔씩만 해요.”말하면서 방유정은 술을 가져갔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 정말 분위기를 깬다.”방유정이 말했다.“두 분의 건강을 생각해서예요.”방유정 어머니는 술병을 들고 임지훈에게 한 잔 따르고 또 남편에게도 한 잔 따랐다.“많이 마시게 되면 우리 집에 방이 많으니 그냥 휴식하면 돼요. 비행기는 내일 타면 되는데 급해 할 거 없잖아요.”방유정은 어머니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엄마, 이 사람을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집에서 잠을 자래요?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려고요?”“걱정하지 마. 조사해 봤는데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야.”“...”“...”방유정과 임지훈이 순간 놀랐다. 방유정은 평생 살면서 이렇게 굴욕적인 순간을 느낀 적이 없었다. 몇 년 동안 쌓아온 체면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부모님이었다.방유정 아버지는 아내를 힐끗 쳐다
“지훈 씨는 취미가 뭐예요?”방유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임지훈은 방유정의 물음에 잠시 당황하다가 자신의 생활을 떠올렸는데 일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휴가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번에 심재경의 결혼이 아니었다면 계속 일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취미는 더구나 없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본인의 생활이 정말로 단조롭고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옆에서 따뜻하게 말 한마디 건네주는 사람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순간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내를 맞이해서 함께 서로 보살펴주며 지내고 싶었는데 그런 사람만 있다면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고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방유정을 바라봤는데 본인과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방유정은 아직도 사람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을 보살필 줄은 모를 것 같았다.“왜 그런 이상한 눈빛으로 봐요?”방유정의 물음에 임지훈이 되물었다.“어디가 이상한데요?”방유정은 좀 더 가까이 가서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왜요? 설마 저를 사랑하게 된 건 아니죠?”임지훈은 어이가 없었다.“당신은 성격도 안 좋고 또 엄청 잘난체하는데 내가 왜요? 점심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제 들어가요.”시간을 보며 임지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굶었어요?”방유정이 그를 비웃었다.“식사 끝나면 저는 가도 되죠.”방유정은 순간 왠지 서운했다.“그렇게 가고 싶어요?”“여기는 제집이 아닌데 계속 있을 수는 없잖아요.”방유정은 그를 향해 입을 삐쭉거리자, 임지훈은 의아해했다.“왜 그래요?”“내가 뭐요?”방유정은 짜증을 냈다.“유정 씨는 정말 변덕이 많네요. 그걸 고쳐요. 남자들은 변덕이 많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요.”방유정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바로 집안으로 걸어들어갔다.임지훈은 고개를 돌려 못에 있는 물고기들을 한 번 더 보고는 뒤따라 들어갔다. 방유정이 집에 들어서자, 그녀의 어머니가 그들을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딸만 보였기에 그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