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기 마련이다.누나들도 나한테 흥미를 잃을 거고 점점 잊을 거다.때문에 지금 이 상황을 즐기기만 할 수는 없다. 나는 반드시 강해져야 한다.예전에는 사실 한의관 직원으로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한 달에 200 정도씩 받는 것도 꽤 만족스러웠다.하지만 일련의 일을 겪고 나니 이 상황에 만족하면 발전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물론 어떻게 강해질지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다.한참 뒤 민우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아까 그 사람 강북시 부시장이라던데, 네 여자 친구 아버지야?”“응.”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그러자 민우가 내 옆에 아예 자리 잡고 앉았다.“이런 장인어른이 있는 거 압력 심하지? 임설아도 가정 형편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부시장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네. 난 임설아 가족 형편도 부담되는데. 지금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매달 그래도 만족스럽게 벌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해. 우리가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게 부자들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수호야. 넌 혹시 스타트업 시작해 볼 생각 없어? 우리 같이 한 건 제대로 해볼래?”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민우를 바라봤다. 민우가 이토록 야심가인 줄은 생가지도 못했다.전에는 분명 화인당에서 일하게 된 것만으로도 기뻐 날뛰었는데 말이다.내가 궁금한 걸 물어보자 민우는 담배 한 대를 태우더니 웃으며 말했다.“사람은 원래 이래. 어쩔 수 없어.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했을 때는 좋은 직장이 있다고 만족했는데, 이제 좋은 직장에서 일하니 남 밑에서 일하기보다 내가 사장이 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원래 좀 욕심이 많아. 그게 내 약점이기도 해. 그래서 한의원에서 오래 못 버텼잖아.”나는 민우의 말을 대충 이해했다. 그는 예전에 자기 야심을 펼치지 못한다고 아쉬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야심이 너무 커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했었다.그러다가 화인당에서 일하기 시작해서는 직원들과 잘 지냈지만 이 정도로 욕심이 차지 않는 눈치였다.민우는 자존심이
나한테 다른 선택지가 있기는 한 걸까?이태웅한테 1년 안에 성과를 내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성과를 이루지 못하면 애교 누나 곁을 떠나겠다고 했는데.나는 애교 누나와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쉽기도 하고 이대로 등신처럼 사는 게 싫었다.나도 자존심이 있고,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 나도 체면 있게 살고 싶다.“당연히 하고 싶지.”나는 한참 숨을 참고 있다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그러자 민우는 이내 흥분했다.“그럼 우리도 해보자고. 하지만 내 말에 화내지 마.”“뭔데? 말해.”“나 사실 의욕만 넘쳤지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몰라.”1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피가 끓은 것처럼 호기롭게 말하는 민우의 모습에 나는 그가 이미 방법을 생각해 두고 리드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저 생각만 있을 뿐 상세한 계획이 없다니.시실 나도 혼자 일해볼 생각을 했었다. 천수당이 화인당을 모함할 때부터 그런 마음이 들었다. 다만, 내가 워낙 현실에 타협하는 성격이라 그걸 실천에 옮기지 않았을 뿐이다.그런데 민우가 이 일을 먼저 꺼내니 나는 내 생각을 말했다.“우리 천수당을 빼앗아 오자.”민우는 나에게 방법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얼른 캐물었다.“어떻게 할 생각인데?”나는 상세하게 분석했다.“천수당이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어. 장사도 항상 안 되고. 지금은 오히려 적자가 나는 상황이야. 천수당은 지리적으로도 위치가 좋은 데다 단골이 있으니 빼앗아 올 수만 있다면 수고를 덜게 될 거야.”민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계속 물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해? 천수당은 김진호랑 관련 있잖아. 김진호가 극구 반대할걸. 게다가 지금은 김진호 형과 척을 졌으니 그쪽에서 절대 천수당을 순순히 내놓지 않을 거야.”이건 확실히 문제가 된다.하지만 천수당은 장사가 안돼 적자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언젠가는 가게를 내놓아야 할 판국이다.“우리 전 재산을 모아봤자 고작 2천만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게 문제야.”“천수당을 생각할 시간에 우선 돈부터 모으자.”민우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
겨우 며칠 못 본 사이에 사장님은 전보다 더 핼쑥해졌다. 그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그 누구도 우울한 티를 내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환자를 격려해야 한다. 주변에서 우울함을 드러내면 환자에게 안 좋다.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꼭 나을 수 있다며 사장님을 격려했다.다행히 정 사장님도 매우 낙관적이었다.“그동안 다들 수고 많았어. 내가 다 나으면 한텍 제대로 쏠게.”다들 그날을 기대했다.사람이 많다 보니 시끄러워져 오히려 정 사장님 휴식에 방해되었다. 때문에 우리는 병실에 잠깐만 있다가 떠날 준비를 했다.유미 사모님은 직접 문 앞까지 위를 배웅했다.그때 내가 넌지시 물었다.“B시 병원 쪽에는 연락했어요? 언제 가요?”사모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아직 남은 병실이 없대요. 부모님이 직접 병원에 찾아갔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어요.”이건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사모님의 초췌한 모습에 약간 마음이 아팠다.“사모님, 오늘 저녁은 제가 지킬 테니 사모님은 돌아가서 쉬세요.”“아니에요. 가게 돌보는 것도 바쁜데 이런 것까지 부탁할 순 없어요.”“사장님은 제 능력을 알아봐 준 분이에요. 정 사장님이 아니라면 지금의 저도 없었어요. 가게가 어려우면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오히려 사모님이 매일 여기서 지키고 있느라 제대로 주무시지도 못했죠?”“소여정과 윤지은이 있어 괜찮아요.”사모님은 말하다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사장님의 병세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마음이 괴로운 모양이었다.이때 사장님이 쾌차해서 일어나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 사장님이 나아야 사모님도 미소를 되찾을 텐데 말이다.그때 익숙한 그림자 두 구가 가까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소여정과 윤지은이었다.윤지은은 퇴근했는지 의사 가운을 입지 않고 있었다. 다만 두 사람 역시 사모님 못지않게 초췌해 보였다.절친한 친구의 남편이 갑자기 병을 앓으니 두 사람 역시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다.백연우도 가끔 병문안 하곤 하는
“사모님, 제가 모셔다드릴게요.”사모님은 정말 초췌했다. 그렇게 밝던 얼굴에 지금은 피곤함만 묻어 있었다.우리의 고집을 꺽지 못한 사모님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조수석에 앉은 뒤 유미 사모님은 기분이 다운되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니 너무 안타까웠다.가는 내내 사모님은 방향을 가리키는 외에 그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차 안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다행히 30분 뒤 목적지에 도착했다.유미 사모님이 사는 곳은 고급 주택단지였는데, 주위 시설과 환경이 매우 좋았다.사모님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바로 떠나려 했지만 소파에 앉아 멍 때리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게다가 이곳은 사장님과 사모님이 깨 볶으며 지내던 집이라 모든 물건에 추억이 깃들어 있다. 그걸 보면 아마 건강하던 사장님이 더 그리워질 거다.나는 결국 다시 돌아왔다.“사모님, 그러지 마세요. 사장님 아직 살릴 방법이 있을 거예요. 사모님이 먼저 무너지면 사장님은 어떡해요?”사모님은 끝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나도 알아요. 하지만 주체가 안 돼요.”‘하...’그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 닥치면 똑같을 거다.나는 결국 사모님을 혼자 집에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려 윤미화한테 전화했다.“윤 사장님, 혹시 유미 사모님 집에 와서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당연하지. 바로 갈게.]윤미화가 사는 곳은 이곳과 그리 멀지 않았기에 10분 내로 도착했다.“유미야. 내가 뭘 가져왔는지 봐 봐.”윤미화는 마술하는 듯 갑자기 예쁜 옷 한 벌을 꺼냈다.“그동안 남편 돌보느라 고생해서 옷 한 벌 사 봤어. 내일 병문안 갈 때 이 옷 입고 가. 그러면 네 남편도 분명 좋아할 거야. 병이 나을지도 모르지.”상대가 저를 위로한다는 걸 안 사모님은 자기의 우울한 기분 때문에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애써 미소를 짜냈다.“고마워.”“에이. 뭘 이런 걸 가지고.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에 뭘 그렇게 내외해? 요즘 남편이 곁에 있지 못할 테니 내가 자주 보러
‘장난하나? 주머니에 들어간 돈을 다시 토해내라니. 절대 안 돼.’나는 돈도 없는 주머니를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그건 안 돼요.”“그럼 얌전히 여기 있다가 내가 없을 때 유미 대신 좀 돌봐 줘.”난 여전히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윤 사장님, 제가 싫은 게 아니라, 유미 사모님 평판이 나빠질 거예요.”“수호 씨가 유미를 노리지 않는 이상 평판이 나빠질 일은 없잖아. 오래전부터 유미를 노리고 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나는 얼른 도리질했다.“그런 적 없어요. 전 사모님을 항상 존경해 왔어요.”“그럼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남아.”윤미화의 태도가 너무 강경한 바람에 나는 마지못해 동의했다.두 사람은 나에게 객실을 내주었다.유미 사모님의 집은 윤미화 집 못지않게 널찍하고 사치스러웠다. 방 4개에 거실 2개인 데다 인테리어가 화려했다.객실 침대에 누워 보니 평범한 침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보아하니 가격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하지만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잠이 오지 않았다.천수당, 이태웅, 왕정민이 하나하나 내 뇌리를 스치다가 결국에는 동성 형까지 떠올랐다.동성 형을 떠올리니 내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용천 호텔에서 돌아온 뒤로 동성 형과는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다.형수는 동성 형이 이제는 대놓고 밖으로 나돌고 있다고 했었다.형수도 지금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할 거다.나는 얼른 문자로 형수 동생은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수한테서 답장이 왔다.[아직도 싸우고 있어요. 이제는 아예 각자 변호사를 고용해서 소송을 진행 중이에요.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난 집에 돌아왔고요.][그럼 형은요? 형은 요즘도 집에 안 들어와요?][들어왔어요. 하지만 계속 각방 써요.]그 말에 나는 너무 놀라 되물었다.[왜요?][왜긴요, 요즘 일이 바쁘다면서 밤 늦게 들어오는데, 나를 방해하기 싫다면서 따로 자요.]그건 다 핑계일뿐이다. 사실 형수는 누구 보다도 그걸 잘 알고 있지만 티를 내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고용주가 까라면 까야지.”윤미화는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문을 나섰다.한순간 집에는 나와 사모님 둘만 남게 되었다.나는 사모님 방 쪽을 한번 확인했다. 문이 꼭 닫혀 있는 데다 아무 인기척도 안 들리는 걸 봐서는 이미 자는 모양이었다.나는 다시 객실로 가지 않고 아예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 방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바로 알 수 있으니까.소파에 누운 지 얼마되지 않아 사모님 방 쪽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얼른 사모님을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야심한 밤에 여자 방을 들락거리는 건 좀 아닌 듯했다.하지만 아무것도 못들은 척하자니 또 소리가 너무 또렷하게 들려 순간 모순이 됐다.결국 나는 결심을 내리고 노크했다.“사모님, 괜찮아요?”“괜, 괜찮아요. 상환 말고 얼른 자요.”사모님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더 이상 울지 마요. 더 울면 몸 상해요. 그러면 사장님은 어떡해요?”내 말에 큰 힘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모님을 위로하고 싶었다.그때 안에서 ‘네’라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리더니 더 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내 위로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때문에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소파 쪽으로 돌아갔다.이 상황에서 아무리 위로해 봤자 소용이 없다.하지만 그 순간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그분은 나와 한 동네에 살았던 어르신인데, 젊을 적에 내 할아버지와 어울려 지내며 의술을 익혔다.올해로 90살쯤 됐는데 이상하게 그분은 한 번도 앓은 적이 없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그 어르신이 스스로 몸조리해서 건강한 몸을 유지했다고 한다.그 어르신한테 사장님을 고칠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나 나는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그래도 시도해 보는 게 손 놓고 있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다음 날 아침, 나는 어머니한테 전화해 사장님 상황을 대충 말씀드리고 어머니더러 그 어르신한테 슬쩍 물어보라고 부탁했다.어머니도 우리 사장님이 좋은 분이라는 걸 알았기에 아침 일찍 식사도 하지 않고 어르신
어르신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네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너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너도 한의학을 배울 좋을 인재라고 하면서 나더러 나중에 많이 도와주라고 한 적도 있어.][요즘 젊은 사람들은 우리 같이 이리저리 떠돌며 의학을 배운 사람을 믿지 못하잖니. 대부분 학교에서 정식적인 교육을 받아서. 하지만 나한테 있는 방법이 민간요법이고 이상한데 받아들일 수 있겠어?]“우리 사장님 병만 고칠 수 있다면...”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르신이 끼어들었다.[고칠 수는 없어. 간병은 억제할 수 있을 뿐이지 완치는 어려워.]내가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나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억제해도 괜찮아요. 적어도 고통을 줄여 주시면 돼요.”[그래. 날 믿으면 됐어.]나는 순간 너무 감격스러워 다급히 말했다.“그럼 지금 어디 계세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어르신은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 주소는 유미 사모님 집과 그리 멀지 않았다.나는 이 소식을 서둘러 사모님께 알리지 않았다. 어르신이 정말 사장님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을지 아직은 몰랐으니까.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지금 말해봤자 오히려 실망만 할 거다. 게다가 사모님께 서프라이즈도 해주고 싶었다.때문에 나는 아침을 사러 가는 척 말하고 차를 몰고 어르신을 모시러 갔다.20분 뒤, 나는 어르신을 만났다.하지만 어르신을 보는 순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 90이 넘는 노인이었는데 놀랍도록 정정했다. 이러니까 이 어르신이 선단을 드셨다며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떠들어 댄 거였다.물론, 나는 사람을 장생불로 하는 선단 같은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어르신은 그저 보양할 줄 아는 거다. 게다가 자식들이 모두 효도하니 뭘 해도 기분이 좋을 거고, 그러니 자연스레 고민 없이 사는 거다.“봉섭 할아버지, 저 정수호예요.”나는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어르신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위라래로 살펴봤다.“네가 어릴 적에 네 할아버지가 너를 우리 집에 자주 데려왔었는데, 눈 깜짝
“그럼 왜 진작 데려오지 않았어?”소여정은 나를 나무라는 듯 노려봤다.“저도 어제저녁에 갑자기 생각난 거예요. 외지에서 학교 다니다 보면 고향에 내려갈 일이 적잖아요.”나는 얼른 설명했다.그때 소여정이 크게 하품했다.“하, 피곤해. 난 먼저 휴식하러 테니 여기 지키고 있어.”“네, 먼저 들어가 쉬세요.”소여정은 정말 피곤했는지 얼굴에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사실 소여정도 따지고 보면 참 좋은 사람이다. 친구 남편이 아프다고 이렇게 고생도 마다하고 밤새도록 환자 곁을 지켜줬으니 말이다. 그것도 임천호한테 그렇게나 예쁨 받는 사람이.이렇게 의리 있는 친구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소여정이 가니 정태곤도 따라 나갔다.정태곤은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없이 수문장처럼 꿋꿋이 소여정을 지키기만 한다.다행히 요즘 두 번이나 만났는데 정태곤은 나에게 싸움을 걸어오지 않아, 나도 정태곤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다.나는 얼른 병상 앞에 와서 진료 과정을 묵묵히 관찰했다.어르신이 진료할 때 우리 할아버지와 매우 닮았다. 모두 진지하고 엄격해 나는 감히 뭘 물어보지도, 방해하지도 못했다.나도 한의학을 전공한 사람이기에 한의사가 환자의 맥을 짚어보는 과정에 누군가 물어보면 짜증 난다는 걸 잘 안다.얼마 뒤 어르신이 맥을 짚던 손을 내리자 나는 얼른 물었다.“할아버지, 어때요?”어르신은 제 수염을 한번 쓸며 말했다.“상황이 좋지 않아. 만약 계속 서의학 방법으로 치료하면 상태가 더 나빠질 거야.”나도 사실 처음에 똑같은 의견이었다. 다만 이제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 한 말에 얼마나 힘이 있을까? 아마 말해도 믿는 사람이 없을 거다.그런데 어르신의 말이 내 추측을 증명한 셈이다.“침술과 한약 치료를 병행하는 게 더 좋은 거죠? 그래야 근본을 다지고 원기를 북돋울 수 있어 간의 손상을 줄일 수 있는 거죠?”나는 내 견해를 말했다. 무엇보다 어르신처럼 의술이 대단한 분이 앞에 계시는데, 이 기회에 잘 배워둘 작정이었다.그때 어르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애교 누나에게 이 문자를 보내고 싶었다.지금껏 애교 누나와 알게 된 이래 우리는 로맨틱한 기억이 없었다. 내가 한 번도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지 못했기에 그런 기억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내 유일한 추억이라고는 그저 애교 누나의 훌륭한 몸매와 다정한 모습뿐이다.이 모든 게 그저 욕망 때문이라면 내가 너무 나밖에 모르는 쓰레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문자를 보낸 뒤 나는 곧장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애교 누나가 보낸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좋은 아침이에요.]짤막한 한마디였지만 그걸 본 순간 내 기분은 유난히 좋았다.이게 바로 연애의 맛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 나왔던 것처럼 단순한 연애의 맛.나는 침대에 누워 애교 누나와 문자를 주고받았다.그때 민우가 들어와서 아침에 뭘 먹을 건지 물었고 나는 ‘아무거나’라고 대충 대답을 흐렸다.그러자 민우는 아예 내 쪽으로 다가와 침대에 털썩 앉았다. 나도 민우를 피하지 않았기에 그는 나와 애교 누나의 대화 내용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아침부터 연애질이야?”민우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무척 부러워했다.나는 헤실 웃으며 말했다.“네가 나더러 좀 배우라며? 그래서 실천 중이잖아. 그런데 기분은 진짜 좋네.”“수호야, 뭐 하나만 물어보자.”“뭔데?”“너 정말 애교 누나랑 결혼할 거야?”나는 되려 반문했다.“난 애교 누나랑 결혼하면 안 돼?”“어. 난 네가 그냥 누나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인 줄 알았지.”“왜 그렇게 생각하는데?”나는 민우가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알고 싶었다.지금껏 나는 내 감정에만 신경 쓰면서 다른 사람의 견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걸 알아내면 나도 이태웅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그때 민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너 여자 친구 많잖아. 그 누나들과 모두 결혼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아? 그래서 네가 결혼하겠다고 한 건 그냥 여자 달래는 수법인 줄 알았지.”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보아하니 다른 사
나는 그 문자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건 왜요?][내가 남자의 다릿심에 관한 특집 하나 만들 거거든.]‘그런 거였구나. 난 또 나랑 뭘 해보자는 줄 알았네.’나는 두말없이 영상을 찍어 전송했다.[됐어. 나 이제 영상 편집해야 해서 얘기는 나중에 해.]어렵게 대화할 상대를 찾았나 싶었는데 몇 마디 나눠보지도 못하고 또 가버렸다.‘됐어. 그냥 영상이나 찾아보자.’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영상을 보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그러다 비몽사몽 중에 누군가 내 방으로 들어와 내 몸을 더듬는 걸 발견했다.그 순간 나는 번쩍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누구야?”“수호야. 나야.”그건 다름 아닌 민우의 목소리였다.“젠장. 깜짝 놀랐잖아. 걷는데 왜 소리도 없어? 내 몸은 왜 더듬는 건데?”나는 말하면서 침실의 불을 켰다.그러자 민우가 헤실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난 현성인 줄 알았잖아. 너인 줄 몰랐어.”“왜? 너 현성이한테 관심 있어?”“아니거든. 전에 형성이 그 자식이 여자애랑 해본 경험이 없다고 기회가 되면 우리끼리 먼저 체험해 보자고 했거든.”그 말에 내 눈은 커다래졌다. “너희 변태야? 남자 둘이 어떻게 해?”“그냥 체험. 진짜로 하는 게 아니라. 수호야, 나 요즘 임설아랑 부쩍 가까워졌어. 이제 꼭 결혼할 거야. 사실 나도 설아랑 진도 더 빼고 싶은데 내가 이런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러는데, 네가 좀 가르쳐줄래?”‘이 자식 뭐라는 거야? 남자를 상대로 어떻게 가르쳐달라는 거지? 난 남자를 보고 아무 느낌도 없는 건 물론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고.’나는 두말없이 야동 하나를 공유했다.“네가 직접 봐.”“어. 이런 영상은 싫어. 너무 노골적이잖아. 좀 아름다운 영상은 없어?”“나도 섹스를 어떻게 아름답게 해야 하는지 몰라. 너 사람 잘못 찾아왔어.”나는 확실히 그런 방법 따위는 모른다. 나는 항상 하고 싶으면 바로 본론으로 직행하는 스타일이라.민우는 내 말에 투덜거렸다.“나 정말로 설아랑
곧이어 백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호 씨, 좋아요?”“당연하죠. 연우 씨처럼 농염한 여자를 싫어할 남자가 어디 있어요?”곧이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그 순간 내 뇌는 새하얗게 질렸고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버린 채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나는 다급히 그곳을 떠났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고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안 와서 다른 사람을 부른 건가?’‘우리는 처음부터 서로 즐길 목적으로 만난 건데 진지할 거 뭐 있어?’하지만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은 좋지 않았다.나는 차에 앉아 담배를 연거푸 몇 대를 태웠다. 하지만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그러다 결국 월세방으로 돌아갔다.그동안 조현성과 주현영이 월세방에서 함께 지냈다. 현성은 매일 가게에 나가보는 것 외에 온 신경을 주현영에게 쏟아부었다.그리고 현성의 끊임없는 노력 덕에 주현영은 확실히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내가 돌아왔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아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를 본 현성은 실망한 의아한 듯 말했다.“수호야, 네가 왜 왔어?”여긴 분명 내 집인데 현성은 오히려 내가 손님인 것처럼 굴었다.하지만 나는 말하기 귀찮아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소파에 주저앉았다.“너무 피곤해 운전하기 싫어서 여기로 왔어.”현성은 곧바로 내 옆으로 다가와 내 목을 끌어안았다.“그럼 너 혼자 여기서 지내. 난 선영이 데리고 영화 보러 갈 거야.”“그러던가.”현성은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고 기분 나빠하고 있었다. 다만 이 기회에 주선영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서 호텔 방 하나 잡아...현성은 생각할수록 기뻤다.원래는 이곳에 돌아와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현성 이 자식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친구를 바로 버렸다.현성이 주현영을 데리고 가는 바람에 집에는 또 나 혼자 남았다. 그 순간 기분 나쁜 일들이 물밀듯 밀려왔다.하지만 내가 질투할 자격이 있을까? 나와 백연우는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백연우가 누구를 만나든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사장님 말씀대로 할게요. 우리 화인당과 천수당이 힘을 합쳐 사업을 더 크게 발전시켜 봐요.”“하하. 나도 바라던 바야. 앞으로 화인당에 정형외과 환자가 있으면 천수당을 추천할게. 그쪽에도 마사지를 원하는 고객이 있으면 우리 화인당을 추천해.”마침 정 사장님과 뜻이 맞아 나는 무척 기뻤다.나는 얼른 사장님의 손을 잡고 말했다.“사장님. 우리가 힘을 합치면 분명 이 업계를 점점 더 잘 발전시킬 수 있을 거예요.”그때 유미 사모님이 옆에서 농담조로 끼어들었다.“두 사람 너무 친한 거 아니야? 보는 내가 다 부럽네.”나는 머쓱해서 사장님 손을 바로 놓아주었다.“사장님, 사모님. 일찍 쉬세요. 전 방해하지 않을게요.”“수호 씨, 내가 앞까지 마중해 줄게요.”사모님은 마치 나에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아니나 다를까 문을 나서자마자 사모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호 씨, 우리 그이 몸 완전히 회복된 거 맞죠?”사모님이 이 말을 할 때 얼굴부터 귀불까지 발그스름했다.그 순간 나는 사모님의 뜻을 이해했다.유미 사모님은 무척 함축적으로 물어보면서도 부끄러워했다. 사모님은 워낙 내성적이라 백연우처럼 남녀 간의 정사를 함부로 입에 쉽게 담지 못했다.나 역시 사모님이 이 순간을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알기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문제없을 거예요. 자제하면서 하면 돼요.”내 말에 유미 사모님의 얼굴은 확 달아올랐다.“내, 내 말은 그게 아니라.”“사모님, 저 다 알아요. 그러니까 얼른 들어가서 사장님 돌봐드려요.”“그래요.”사모님은 기분이 좋았는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너무 아름답고 눈부셨다.사실 나는 사모님의 마음을 진작 꿰뚫어 봤다. 오늘 특별히 한껏 치장하고 예쁘게 화장한 것도 모자라 섹시한 옷을 입은 걸 보면 사장님을 꼬시려는 게 분명했다.사모님과 사장님 대신 내가 다 기뻤다. 사장님이 건강을 되찾았으니 사모님도 이제 더 이상 성욕을 참을 필요가 없다. 그러면 두 부부의 관계도
윤지은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그 말은 설마 너랑 잔 여자들이 모두 너한테 먼저 들러붙었다는 거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아닌가?애교 누나 외에 내가 먼저 꼬신 사람은 아무도 없다.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면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내가 신들마저 공분하게 할 미모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이런 말 할 자격은 없다.그때 윤지은이 갑자기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왜? 내 말에 자신감을 잃었어? 솔직히 말하면 너 확실히 잘생겼어. 게다가 선천적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뭔가를 지니고 있어.”“그건 돈 주고 산 남자들한테서 찾을 수 없는 거야. 돈 주고 산 건 재미가 없어. 오히려 너처럼 약간 멍청한 게 사람을 더 끌리게 하지.”나는 윤지은이 오늘 밤 좀 달라 보였다. 왠지 자꾸만 나를 꼬시는 것 같았다. 물론 불장난에 휘말릴까 봐 윤지은의 뜻을 마음대로 추측할 수는 없었다.“뜬금없이 웬 칭찬이에요? 쑥스럽게.”나는 이 기회에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그때 윤지은이 내 어깨를 살짝 꼬집었다.“그러니까 잘생긴 게 다는 아니라고. 그냥 하느님이 너한테 운을 몰아준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마.”윤지은은 마지막 한마디를 하는 순간 살기를 내뿜었다. 그 눈빛과 마주친 순간 내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그 순간 나는 윤지은이 전에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윤지은은 나더러 자기 친구들을 눈독 들이지 말라고 했다. 가까운 접촉은 더더욱 하지 말고.그렇다면 나와 백연우의 일은 윤지은이 절데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윤지은이 내 가죽을 벗길지도 모르니까.나는 너무 놀라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묵묵히 운전했다.윤지은을 집에 데려다준 뒤 나는 다시 사모님 댁으로 향했다.방금 친구 세 명이 모여 대화를 하는 바람에 나는 옆에서 듣기만 하느라 사장님께 한약관 얘기를 하는 걸 깜빡했다.천수당은 모레면 개업식이라 나는 하루빨리 화인당 일을 사장님께 다시 인수해야 했다.그동안 휠체어만 타고 다녀
백연우는 말하면서 내 엉덩이를 힘껏 주물렀다.이런 여자가 요물이 아니라는 게 말이 안 됐다.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잘 홀리는지.나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이대로 백연우를 안고 싶었다.“그럼 이따 학교 갈 때 배웅해 줄게요.”백연우는 내 턱에 가볍게 입 맞췄다.“이따 봐.”나는 백연우를 놔주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하지만 하필이면 윤지은과 마주쳤다.나는 순간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어찌할 바를 몰랐다.원래는 다정하던 윤지은의 눈빛은 내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순간 살기를 띠었다.“이젠 내 눈앞에서 이러시겠다? 너 아주 발정 났구나?”“오해예요. 난 그저 잘 생각해 보라고 설득하려고 온 것뿐이에요. 다른 뜻은 없어요.”나는 다급히 해명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냉소를 흘렸다.“그래? 그럼 이따 나 집까지 바래다줘.”그건...“왜? 싫어? 백연우를 데려다주고 싶어?”윤지은은 우리의 대화를 들은 것 같았다. 현재로서 윤지은이 나와 백연우 사이를 아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나는 더 이상 윤지은과 관계가 악화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때문에 흔쾌히 동의했다.“그래요. 이따 바래다줄게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뒤돌아섰다.윤지은이 떠난 뒤 나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이따 윤지은 씨를 데려다줘야 해서 백 쌤은 데려다주지 못할 것 같아요.”“마음대로 하던가. 난 상관없어.”다행히 백연우와는 대화가 잘 통했다.나는 신속히 화장실에서 나왔다.윤지은과 백연우는 잠시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백연우는 직접 운전해서 떠났고 나는 윤지은을 데려다주기로 했다.윤지은이 조수석에 앉은 순간 늘씬한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뜬금없이 물어왔다.“백연우랑 잔 적 있어?”나는 윤지은이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막막했다.“대체 뭘 묻고 싶은 거예요?”나는 양심이 찔려 대뜸 물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차갑게 노려봤다.“내 질문에 대답해. 다른 쓸데없는 질문하지 말고
유미 사모님과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놀라움을 표했다.백연우는 네 명 중에서 자유를 가장 좋아하고 구속받는 걸 가장 싫어하는 사람인데, 갑자기 약혼하고 결혼까지 하겠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윤지은은 잠깐 침묵하다가 또다시 설득했다.“나는 네가 더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너 정말 자유를 완전히 포기할 수 있어?”“내가 언제 자유를 완전히 포기하겠다고 했어? 우리 이미 합의했어. 결혼하면 각자 놀고 싶은 대로 놀기로. 승진도 하고 내가 얻고 싶은 것도 얻고, 이거야말로 일거양득 아니야?”그 말에 유미 사모님이 미간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난 영 미덥지 못한 것 같은데? 설마 너한테 사기 치는 거 아니야? 연우야, 잘 생각해 봐.”백연우는 다리를 꼰 채 소파에 등을 기댔다.“생각할 것도 없어. 내가 평생 바라는 게 딱 두 가지야. 바로 사업과 남자. 총장 아들 잘생겼어. 피부도 하얗고 점잖은 게 딱 내 스타일이야. 게다가 그런 남자가 내 승진을 도와줄 수 있다는 데 내가 땡잡은 거지.”윤지은은 아주 냉정하게 분석했다.“너도 방금 말했잖아. 한 가지를 얻으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고. 세상에 그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어? 너 그 사람 제대로 알아봐. 두 사람 결혼하면 빠져나오기 힘들어.”“나도 알아. 내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우리 함께 모인 것도 오랜만인데 같이 한잔해.”백연우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유미 사모님과 윤지은은 더 설득하려는 모습이었지만 백연우는 두 사람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러다가 백연우가 화장실을 갈 때 나도 조용히 뒤따랐다.“정말 결혼해요?”“응.”백연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이에 나는 바로 경고했다.“나도 백 쌤 말리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은 씨와 사모님 말도 맞잖아요. 결혼은 작은 일이 아니에요. 신중하게 고려하세요.”백연우는 립스틱을 덧바르면서 아를 향해 눈웃음을 날렸다.“내가 결혼한다니까 아쉬워? 결혼하면 너랑 안 놀아줄까 봐?”“솔직히 아쉬운 것도 맞아요. 하지만 백
“두 분 모두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한번 시도해 볼게요.”“그럼 부탁드릴게요.”“우선 집에 바래다 드릴게요.”나는 대리를 불러 두 분을 집까지 모셔다드렸다.이다연은 어느새 집에 돌아왔는지 우리가 도착했을 때 거실 소파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고개를 홱 돌려 제 방으로 들어가 쾅, 하고 방문을 닫아버렸다.이 선생님은 그 순간 욱해서 욕지거리를 퍼부으려고 했지만 이 사모님이 제때 말렸다.이 사모님은 이다예의 연락처를 나한테 몰래 건네주면서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달라고 부탁했다.나는 그 연락처를 저장한 뒤 이 선생님을 위로하다가 이내 집을 나섰다.나는 사모님 댁에 들러 사잔님과 화인당 및 천수당에 관한 일을 얘기해 볼 생각이었다. 이다연에 관한 일은 나중에 시간 날 때 제대로 대화해 보면 되니까.내가 사모님 댁에 도착했을 때 집에 윤지은과 백연우도 와 있었다.두 사람은 일 때문에 식사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가 일이 끝난 뒤 바로 달려온 모양이었다.두 사람 모두 유미 사모님과 친한 사이라 고가의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다.“여정이 자리에 없는 게 아쉽네. 안 그러면 우리 넷이 또 모일 수 있을 텐데.”백연우는 소여정을 언급하며 아쉬워했다.임천호가 강북에 온 뒤로 소여정은 친구들과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때문에 그녀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때 윤지은은 여전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잘 지내고 있을 거야. 임천호가 걔를 얼마나 이뻐하는데. 이제는 임천호 아이까지 낳겠다고 나섰으니 임천호가 푸대접하지 않을 건 아니야.”그 말에 백연우가 혀를 끌끌 찼다.“이것 봐. 여정이 곁에 있을 때는 그렇게 투덕대더니, 없으니까 또 걱정하네.”“누가 걱정했다고 그래? 나는 단지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윤지은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인정하지 않았다.그때 백연우가 싱긋 웃으며 윤지은의 팔짱을 꼈다.“이제는 그만 인정해. 우리가 안 지 몇 년인데 누가 어
그날 임민수 내외는 모든 사람을 불러 식사를 대접했다. 그리고 식사 자리에서 나에게 술까지 권했다. 그 모습은 살짝 의외였다.“수호 군, 우리 호섭이가 이렇게 빨리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자네 공이 커. 자, 내가 한 잔 권하지.”임민수의 말에 나는 얼른 뚝딱거리며 술잔을 들어 올렸다.“어르신, 별말씀을요.”나는 솔직히 임민수가 나에게 술을 권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때 한영심도 잇따라 일어났다.“정 선생, 나도 한 잔 권하네.”“아닙니다, 어르신.”임민수 내외의 존경을 받게 되어 나는 정말 감개무량했다.심지어 유미 사모님마저 직접 나에게 술을 권했다.“수호 씨, 나도 한 잔 올려요.”“사모님, 저만 마실 테니 사모님은 마시지 마세요.”사모님은 아직 사장님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나는 살짝 걱정되었다.그런데 사모님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나도 딱 한 잔만 마실 거예요. 우리 호섭 씨가 이렇게 회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수호 씨 덕분이에요. 호섭 씨는 아직 술을 마실 수 없으니까 내가 대신 마실게요. 그러니 절대 사양하지 마요.”사모님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나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술잔을 들어 올려 사모님의 잔과 부딪혔다.식사 분위기는 매우 화목하고 화기애애했으며 전에 있던 안 좋은 일은 모두 털어버렸다.임민수는 어찌나 기뻤는지 취할 때까지 술잔을 놓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두 어르신을 집으로 모셔 드리겠다고 하니 기어코 필요 없다며 대리까지 불렀다.술을 마시지 않은 한지영은 봉섭 할아버지와 함께 떠났고, 이 선생님은 기분이 안 좋아 살짝 술을 들이켜더니 또 이다연을 꾸짖었다. 결국 이다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떠나버렸고, 그 때문에 이 선생님은 또 한바탕 화를 냈다.사장님은 나더러 저와 사모님을 상관하지 말라며 대리를 부르고는, 나더러 이 선생님 가족을 데려다주라고 부탁했다.차에 올라탄 순간, 이 선생님은 결국 슬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셨다.나이도 드신 분이 서럽게 펑펑 우는 모습을 보니 나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