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차가 어디 부딪치거나 긁히기라도 하면 나를 팔아도 배상할 수 없었다.나는 다리가 후들거려 전전긍긍하며 말했다.“저기요, 이 차는 정말 운전하지 못하겠어요. 다른 기사 찾아봐요.”소여정은 내 모습이 재밌었는지 박장대소했다.“뭐야? 고작 차 한 대 가지고 뭘 그렇게 겁을 먹고 그래?”“이건 보통 차가 아니라 자그마치 포르쉐 911이라고요. 여태껏 이렇게 비싼 차는 처음 보거든요. 그런데 이런 차를 저더러 운전하라니요?”소여정은 아예 차키를 내 손에 밀어 넣었다.“걱정하지 말고 운전해. 어디 부딪혀도 배상하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이건 실로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수억짜리 차를 이렇게 운전하게 한다고?’나는 마음속으로 별거 아니라고, 운전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며 즐긴다는 생각으로 운전석에 올랐다.하지만 의자에 앉으니 저도 모르게 다리가 후들거려 시동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소여정은 나를 재촉하지도 않고 적응할 시간을 주겠다며 기다렸다.나는 심호흡을 들이켜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무려 30분이나 지나서야 나는 간신히 진정을 되찾았다.“이제 됐지? 됐으면 출발하자고.”소여정은 임유미와 이야기꽃을 피웠다.순간 내가 너무 못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차 한 대로 이렇게 겁을 먹다니. 이러니까 내가 큰일을 못하지.’‘이런 나쁜 버릇은 고쳐야 해. 산이 무너져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나는 얼른 시동을 걸었다.엔진이 움직이는 굉음을 들으며 나는 부자들이 고급 차를 운전하는 걸 경험했다.이건 너무 대박이었다.차를 몰고 거리에 나서자 수많은 사람들이 부러운 눈빛을 보내왔다.내가 젊은 나이에 이런 고급 외제 차를 운전하는 것도 한몫했겠지만, 아마 주요 원인은 차에 앉은 두 명의 절세미인들 때문이었을 거다.나는 점차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다. 이렇게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기분은 꽤 좋았다.나는 내가 마치 차주가 된 것처럼 역할극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쇼핑몰에 도착한 뒤, 나는 더 이상 지난번 윤지은과 함께
하지만 몇 분을 기다려 봐도 소여정은 돌아오지 않았다.기다리다 지친 사모님은 귀찮은 듯 나를 향해 말했다.“여정이 아직이에요?”“아직 안 왔어요.”“그럼 수호 씨가 들어와서 올려줘요.”“네?”나는 사모님이 이런 요구를 제기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남자인 내가 들어가서 지퍼를 올려주는 건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았다.게다가 상대는 사장 사모님이라 나는 더욱더 그럴 수 없었다.“사모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소여정 씨 찾아올게요.”나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소여정을 찾으러 가려고 했다.사모님이 얼마나 귀한 분인데, 어떻게 그런 분한테 손을 댄단 말인가?하지만 화장실 입구에 도착했더니 화장실마저 VIP 전용이 따로 있었다. 소여정은 당연히 VIP 전용 화장실을 사용했고.VIP 전용 화장실은 쇼핑몰 VIP가 아니면 들어갈 수도 없다.‘대체 안에서 뭐 하는 거야? 변기에 빠졌나? 벌써 10분이 넘었는데 왜 안 나오는 거야?’나는 결국 안을 향해 소리쳤다.“소여정 씨, 안에 있어요?”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밖에서 지키고 있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VIP 전용 화장실은 고객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해 방음 장치를 설치했다고 했다.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밖에서 소리쳐 봤자 안에서 들을 수 없었다.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2분 정도 더 기다렸다. 하지만 소여정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결국 사모님이 기다릴까 봐 나는 다시 돌아갔다.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이대로 계속 기다리게 놔두는 것도 방법은 아닌지라 나는 결국 얼굴에 철판을 깔고 피팅룸에 다가갔다.“사모님, 여정 시가 어디 갔는지 못 찾았어요.”“그럼 됐어요. 수호 씨가 나 좀 도와줘요.”“그럼 들어갈게요. 절대 보지 않을게요.”사모님은 내 말이 웃겼는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들어와요.”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문을 열고 피팅룸에 들어갔다. 안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나는 눈을 완전히 뜨지 못하고 가늘게 실눈을 떴다.사모님은
나는 절대 사장 사모님을 탐낼 배짱이 없다. 하지만 사모님의 완벽한 몸매를 보니 자꾸만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나는 그렇다고 나쁜 생각은 하지 않았다.이건 사모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지퍼를 올린 뒤, 나는 사모님께 말했다.“사모님, 다 됐어요.”“네, 알았어요. 나가 봐요.”피팅룸을 나왔는데도 코끝에서 아직도 사모님의 향기가 느껴졌고, 머릿속에는 사모님의 볼록한 엉덩이가 떠올랐다.그토록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재벌 집 규수라고 할 수 있었다.심지어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여자가 어떤지 알았다.‘지위가 다를수록 사람은 이렇게 다르구나.’어떤 여자들은 신체적인 욕망만 줄 수 있지만, 어떤 여자들은 정신적인 만족감까지 줄 수 있다.때문에 나는 사장 사모님 같은 사람과 더 오래 어울리고 싶었다. 그러면 내 인지마저 높아질 것 같았으니까.사모님의 키는 약 165센티 정도였는데 몸매는 완벽하게 굴곡졌다.거기에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분위기를 더하니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 따로 없었다.종업원과 가게 사장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어머, 고객님. 이 옷은 딱 고객님 오이었네요. 너무 잘 어울려요... 마음에 드신다면 바로 포장해 드릴까요?”여종업원은 인센티브를 받으려고 얼른 아부했다. 어쨌든 사모님이 몸에 걸친 옷은 수백만 원의 가치가 있었으니까.판매가 성사되면 종업원에게도 분명 인센티브를 많이 받을 거다.그때, 사모님은 느긋하게 말했다.“잠깐만요, 일행이 오면 계산해 줘요.”“네.”여종업원은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최선을 다해 복무했다.나는 저도 모르게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만약 옷 갈아입은 사람이 여대생이거나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종업원은 절대 이렇게 살가운 태도로 말하지 않았겠지?’사람은 재산이나 지위를 무척 따진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만나거나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절대 바싹 엎드리지 않을 텐데, 신분이 귀하거나 권력 있는 사람을 만나면 절로 굽신거리니까.그러니 역시 권력과 세력이 최고다.권력과 세
사모님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사람들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네. 넌 부끄럽지도 않아?”사모님의 성격은 분위기와 흡사했다. 모두 비교적 단아한 편이었다. 소여정처럼 털털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라.소여정은 친구의 팔짱을 낀 채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뭘 부끄러워해? 우리 나이에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 어디 있다고. 남녀 사이는 기껏 해 봐야 고작 그 몇 가지잖아. 침구랑 가끔 대화 나누다 보면 경험을 얻을지 누가 알아?”소여정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직도 거침없이 말하고 있었다.그에 반해 사모님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피가 맺힐 지경이었다.“됐어, 나 들어가서 옷 갈아입고 올게.”“갈아입긴 뭘 갈아입어? 그 옷 예쁘다니까. 그냥 입고 있어.”소여정은 말하면서 종업원을 불렀다.“이 친구가 입은 옷 포장하고 이 카드로 계산해 줘요.”“내 옷을 사는데 어떻게 너를 계산하게 해? 내가 할게.”임유미는 다급히 말했다.하지만 소여정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는 모습이었다.“내가 우리 친구잖아. 옷 한 벌 정도 못 사줄까 봐?”나는 순간 사모님이 너무 부러웠다, 이렇게 예쁜 친구도 있고, 수억이 되는 옷을 고민 없이 살 수 있으니까.‘하, 역시 이런 친구가 있어야 좋은데.’‘너무 부러워.’소여정은 친구의 옷을 계산한 뒤 본인 옷도 두 벌 구매했다.나는 속으로 은근히 내 옷도 사주기를 기대했지만, 결구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나는 너무 서운했다.‘날 정말 일꾼으로 쓸 생각이었네.’나는 갑자기 윤지은이 떠올랐다. 지난번, 윤지은은 그래도 나한테 옷을 사줬다. 그렇게 비교해 보니 윤지은도 좋았다.쇼핑을 마친 뒤, 두 사람은 주얼리 매장으로 향했다.대중적인 주얼리는 당연히 소여정의 마음에 들리없다. 그녀는 늘 브랜드만 고집했으니까.뒤에 돈 많은 남자가 있으니, 이깟 돈쯤은 눈도 안 감고 써버릴 수 있었다.내가 두 사람과 함께 주얼리를 고르고 나니, 나는 어떤 게 진짜 돈 많은 사람인지 알았다.소여정은 다이아몬드
나는 피곤해 죽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제 곧 퇴근 시간이었다.원래는 이 여자들과 함께하는 쇼핑이 끝나면 바로 집에 가서 휴식할 수 있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또 온천에 가자고? 그것도 언제까지 몸 담글지 모르는 상태로?나는 사모님이 거절하기만을 바랐다.하지만 내 예상외로 사모님은 동의했다.왠지 모르게 사모님이 온천에 가자고 할 때, 나는 크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히 기대됐다.하지만 소여정이 갑자기 말했다.“정수호, 우리 물건 차에 올려 두고 그만 가봐.”“네?”나는 멍해졌다. 이미 두 사람과 온천에 갈 준비를 마친 상태인데, 먼저 돌아가라니?나는 썩 내키지 않았다.“아니, 제가 가면 누가 운전해요?”나는 포기하지 않고 남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려고 애썼다.소여정이 피식 웃음이 터졌다.“네가 없으면 내가 운전 못 한다고 생각하나 보네?”그 말인즉, 소여정이 직접 운전하겠다는 뜻이었다.나는 너무 어이없었다.“그, 그러면 저는 어떻게 돌아가요?”나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남으려고 애썼다.그때 소여정이 돈다발을 던져 주었다.“택시 타고 가. 콜택시 부르던가. 이 돈이면 되지? 이 돈이면 식사도 한 끼 거뜬히 할 수 있을 거야. 어때? 역시 누나밖에 없지?”나는 두툼한 지폐 뭉치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소여정 이 여자는 얼굴도, 몸매도, 인성도 모두 갖췄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다.‘나를 기어코 가게에서 빼내 같이 쇼핑까지 했으면서 다른 건 아무것도 안 하고, 쇼핑이 끝난 뒤 몇십만 원을 던져 주면서 알아서 택시 타고 가라고?’‘대체 뭘 노리는 거지?’물건이 많지 않아 충분히 스스로 들 수 있을 거면서. 왜 수십만 원이나 낭비하는지 모르겠다.물론 몇십만 원이 이 여자들한테는 아무것도 아닐 테지만, 이런 행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나는 여전히 남기 위해 노력했다.“아니면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이런 화려한 옷차림으로 운전하는 것도 불편하잖아요.”소여정은 갑자기 나를 뚫어져라 훑어봤다.“
나는 속으로 은근히 나를 붙잡아주기를 기대했다.하지만 소여정은 나를 붙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모님도 시종일관 빙그레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늘 저녁 온천 가기는 틀렸네.’나는 할 수 없이 택시를 잡아 돌아갔다.오후 내내 두 여자와 쇼핑하러 돌아다니고 몇십만 원이나 벌었다. 이건 나에게 하늘에서 떨어진 돈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나는 왠지 기쁘지 않았다.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 몇십만 원보다 두 미녀와 온천에 가고 싶었으니까.그건 돈 얼마를 들여도 살 수 없는 기회다. 하지만 나도 내 주제를 알고 있다.나는 평범하다 못해 흔한 일반인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미녀들을 옆에 끼고 온천에 갈 수 있단 말인가?내가 너무 자만감에 취해 있은 게 틀림없다.몇억짜리 고급 외제 차를 타봤다고 진짜 부자라도 된 줄 알았다니. 상상력도 풍부하지.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무척 괴로웠다.지금 돌아가더라도 집은 텅 비어 나 혼자뿐일 걸 생각하니 더 괴로웠다.나는 얼른 애교 누나한테 문자를 보냈다.[애교 누나, 오늘 저녁에 정말 돌아올 수 없어요?]애교 누나는 곧바로 답장했다.[못 돌아가요. 남주 곁에 있어줘야 해요. 걔가 아들 때문에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손찌검을 했어요.]내 마음은 순간 더 괴로웠다.애교 누나도 돌아오지 않고, 형수는 형과 다시 잘됐고, 나 혼자 버림받은 기분이었다.결국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동네에서 포장마차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음식을 먹고 술도 마시고 약간 기분 좋게 취해 돌아가면 바로 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내가 자리에 앉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그림자가 나타났다.동성 형이었다.형은 기분이 좋아 보였고, 얼굴에 홍조가 도는 게 기쁜 일이 생긴 듯했다.“수호야, 혼자야?”형도 나를 봤는지 먼저 인사했다.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응, 오늘 저녁 애교 누나가 일이 있다고 해서 혼자 먹으러 나왔거든. 형은? 형수는 돌아왔어?”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일부러 물었다.동성형
나는 어색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동성 형은 계속해서 주절주절 입을 털었다.“이번에 네 형수랑 사이가 많이 좋아졌어. 이제 네 도움 없이 내 힘으로 네 형수 임신 시킬 수 있을 것 같아.”왠지 이 말음 나 들으라고 일부러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나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왜 이런 얘기를 나한테 하나 궁금했다.‘설마 뭔가를 눈치챘나?’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뻔뻔하게 말했다.“그럼 축하해. 나도 얼른 조카 안고 싶으니까.”“하하하, 수호야, 이제 나와 네 형수는 결실을 보았으니 이젠 네 좋은 소식만 기다릴게.”‘결실은 무슨. 그냥 자랑하고 싶은 거잖아.’‘그리고 뭐? 내 좋은 소식을 기다린다고?’‘왕정민이 어떤 성격인지 몰라서 그러나?’나와 애교 누나의 결혼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나는 기분이 울적해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술을 마셨다.얼마 뒤, 형이 주문한 요리가 다 되자 형은 음식을 포장해 가면서 술 적게 마시라는 가식적인 말을 남겼다.나는 동성 형이 나를 겨냥하고 있다는 확신이 더 들었다.그 사실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이건 분명 형수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결국 나는 형수에게 문자를 보냈다.[형수, 이번에 돌아간 뒤로 형이 뭐 변한 거 있나요?]형수는 곧바로 답장했다.[유일한 변화라고는 다시 되는 것밖에 없었어.][그럼 다른 거는요? 성격이라든지, 아니면 우리 사이를 물어봤나요?]형수는 아예 나한테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형수가 너무 보고 싶어 나는 그냥 받아 버렸다.여상 속 형수는 이제 막 샤워하고 나왔는지 머리가 축축했다.게다가 새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목덜미 아래로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형수는 민낯도 너무 아름다웠다.[수호 씨, 혹시 지금 우리 동네에 있어요?]형수는 바로 내 위치를 알아맞혔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파트 단지 부근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뭐 좀 먹고 있어요. 아까 형을 만나서 얘기 좀 나눴는데 자꾸만 의미심장한 말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확인차 물
하지만 우리 둘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고통을 참고 손을 놓는 것뿐이다.[그래요. 뭐가 됐든, 우리는 각자 생활이 있잖아요. 행복하길 바랄게요. 나도 행복할 거예요.]형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도어락 소리가 들려왔다.형수는 황급히 작별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식탁 앞에 앉은 나는 밥 먹을 기분도 사라져 자리에서 일어섰다.애교 누나 집에 도착해 보니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누나가 돌아왔다는 생각에 나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설마 나한테 일부러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그랬나?’나는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갔지만 곧바로 이상함을 느꼈다.집 안에는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는데 모두 남자였다.‘남의 집에서 뭘 찾고 있지?’나는 얼른 화장실에 숨어 현재 상황을 판단했다.‘설마 도둑인가?’내가 경찰에 신고하려고 할 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젠장, 어떻게 된 거야? 왜 아무도 없어?”“김씨가 여기에 예쁜 여자가 산다고 하지 않았어? 왜 아무도 없는데?”‘김씨?’‘설마 김진호가 보낸 건가?’그렇다면 의미는 달라진다.게다가 두 남자가 여자를 언급했는데, 이곳이 애교 누나 집이니 그 여자는 당연히 애교 누나일 것이다.그렇다는 건 밖에 있는 두 놈 모두 애교 누나를 목표로 들어온 거였다. 애교 누나한테 몹쓸 짓을 하려고!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김진호 이 자식이 이렇게 비겁할 줄이야. 나한테 안 되니까 내 여자한테 손대겠다는 건가?’‘그것도 이런 비열한 수단으로?’나는 단단히 화가 났다.나는 조용히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두 사람의 모든 걸 녹화했다.나는 증거를 잡아 김진호가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생각이었다.두 남자는 뭔가를 한참 찾았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다.그러자 그중 한 놈이 버럭 화를 냈다.“젠장, 아직 사람이 안 돌아왔나 봐. 시간이 어느 때인데 대체 뭐 하러 돌아다니는 거야? 돌아오기만 해 봐, 내가 아주 제대로 괴롭혀 줄 거야.”다른 놈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나는 더 이상 이영미와 한 공간에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아 헐레벌떡 도망쳤다.그 와중에도 이영미는 나더러 자기 남편 꼭 데려오라고, 안 데려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윽박질렀다.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윤해철에게 전화했다.[수호 군, 나도 마침 자네한테 볼일 있었는데.]“무슨 일인데요?”[회사 일은 내가 이미 다 처리했으니 방법을 대서 우리 마누라한테 좀 전해줘. 내가 요즘 데리러 갈 거라고.]타이밍이 참 기가 막혔다.이영미가 하고 싶다고 할 때 윤해철이 마침 이영미를 데리러 올 생각이었다니.나는 다급히 윤해철에게 말했다.“방금 사모님을 뵀는데 사모님도 회장님을 무척 그리워하셨어요.”[마침 잘됐네. 그럼 지금 당장 데리러 가지.]“윤 회장님, 잠깐만요.”[왜 그러나?]“사모님은 지금 집에 안 계세요. 밖에 있어요...”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러다 문득 내가 집을 나올 때 이영미가 보냈던 주소가 떠올라 나는 그 주소를 윤해철에게 보내고 그곳에서 이영미를 찾으라고 했다.어떻게 설명할지는 부부가 만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었다.이영미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내 임무도 완수한 셈이었다.전화를 끊고 얼마 뒤, 나는 마침 장을 보고 온 애교 누나와 마주쳤다.“수호 씨, 왜 여기 있어요?”나는 대충 얼버무려 상황을 무마하면서 애교 누나의 짐을 들어주었다.“애교 누나, 저 마침 가게에 나가볼 참이었어요. 형수는 수고스러운 대로 누나가 좀 돌봐줘요. 제가 가능한 빨리 도우미를 구할게요. 그러면 누나도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애교 누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나도 어차피 할 일이 없으니 태연이 돌보는 건 나한테 맡겨요. 내가 어려울 때 태연이도 항상 나를 도왔는데 지금은 태연이가 어려운 시기이니 당연히 내가 도와야죠.”“그런데 일 구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일은 뭐 구한다고 바로 구해지는 건가요? 나 공무원 시험 준비하려고요. 나도 아버지 말고 나 스스로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요.”애교 누나
“그럼 얼른 누우세요. 빨리 끝낼게요.”이영미는 두말없이 소파 위에 엎드렸다.나는 먼저 이영미의 허리부터 주물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영미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어머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나는 흠칫 놀라 손을 뒤로 뺐다.그랬더니 이영미가 발긋한 얼굴로 말했다.“남자가 내 몸 만지는 게 오랜만이라 흥분했나 봐.”“계속 그러면 제가 어떻게 주물러 드려요?”“이거 다 정상적인 반응이잖아. 의사라는 사람이 침착해야지.”나는 이런 목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침착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사람 혼을 쏙 빼놓는 듯한 목소리는 아마 내시가 들어도 견디지 못할 거다.“안 돼요. 계속 그러면 마사지 안 해드릴 거예요.”나는 참지 못해 난처한 상황이 생길까 봐 먼저 물러섰다.하지만 이영미는 그것조차도 반대했다.“안돼. 계속 해. 안 그러면 안 갈 거니까. 나도 이것저것 다 겪어본 사람인데 뭔들 못 봤겠어? 그러니 어색하지 마. 내 눈에 수호 씨는 꼬맹이나 다름없으니까. 난 괜찮아.”이영미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나도 이제 성인이고 혈기 왕성한 나이인데, 어떻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여길 수 있냔 말이다.하지만 이영미는 한사코 내 팔을 꽉 잡고 어디 가지도 못하게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닿는 피붓결에 나는 마음이 더 콩닥거렸다.“알았어요. 그럼 잘 누워 있어요. 계속 마사지해 드릴게요. 하지만 소리 나지 않게 좀 참아주세요.”“그건 안 되지. 욕망을 억누르는 건 몸에 안 좋아.”이영미의 말은 예전에 남주 누나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영미는 내 마사지를 받으며 한편으론 감탄했다.“여자는 역시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니까. 혼자 하는 건 너무 재미없어. 남자도 마찬가지로 여자의 손길이 필요한 법이지. 안 그러면 조물주가 왜 남녀 성별을 따로 만들었겠어? 그것도 상호 보완할 수 있게. 안 그래?”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 여기 느
이영미는 제비집이며 인삼 등 다양한 보양식을 가져왔다.“어머님, 이거 다 너무 귀한 것들이에요.”“이건 다 수호 씨 형수 주려고 가져온 것들이야. 지금 의식이 없다고 해서 죽만 먹이면 안 돼. 영양소를 많이 공급해 줘야지.”나는 형수 대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혹시 윤지은 씨는 함께 오지 않았어요?”그때 애교 누나가 불쑥 물어봤다.“그 계집애는 또 무슨 일인지 함께 내려오자고 하니까 기어코 싫다고 하지 뭐야.”이영미는 말을 마친 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혹시 우리 지은이랑 싸웠어?”“아니요.”“못 믿겠는데? 지은이가 말은 독하게 해도 마음씨는 착한 애야. 네 형수 줄 거라니까 이렇게 바리바리 준비해 준 걸 보면 네 형수를 친구로 생각한다는 뜻이거든. 그런데도 기어코 직접 오지 않겠다는 걸 보면 이유는 하나야. 바로 너. 너희 둘 요즘 싸웠지?”나는 더 이상 그 일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어머님, 정말 아니에요.”하지만 이영미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아니긴 무슨. 두 사람 분명 문제 있는데.”그때 애교 누나는 내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얘기 나누세요. 저는 내려가서 뭐 좀 사 올게요.”역시 애교 누나는 내가 말하기 부끄러워할까 봐 배려해 주려고 자리를 피한 거였다.애교 누나가 떠난 뒤 이영미는 내 옆에 꼭 붙어 앉았다.“이제 다른 사람도 없으니 말할 수 있지? 대충 얼버무릴 생각하지 마.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나도 수호 씨 용서 안 할 거니까.”이영미가 계속 꼬치꼬치 캐묻자 나는 할 수 없이 그날 병원에서 싸웠던 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어머님도 제가 쓰레기 같아요?”“응. 조금. 내 딸과 사귀면서 다른 여자와도 사귄다니. 내 딸의 매력이 그렇게 부족해? 한 명으로는 만족하지 못 하는 거야?”이영미의 말에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어머님은 저와 지은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잖아요. 우리는 각자 원하는 걸 교환한 것뿐이지 마음을 주고받고 결혼 얘기까지
나는 내가 예전에 살던 방을 들여다보았다.이곳은 내 추억이 너무 많이 깃든 곳이다. 상황만 그렇게 되지 않았어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익숙한 물건들을 보니 나는 문득 형수와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고 형수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 모든 건 어제 벌어진 일처럼 생생했다.“저 잠깐 형수 좀 보고 올게요.”나는 형수 방으로 향했다.혼자 얌전히 누워 곤히 잠든 형수의 모습은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았다. 눈을 감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이불을 덮은 모습은 진짜 그냥 자는 것 같았다.나는 젖은 수건으로 형수의 몸을 닦아준 뒤 면봉에 물을 묻혀 형수의 입을 적셔주었다.형수의 현재 상태는 기껏해야 죽 같은 음식밖에 먹일 수 없고 또 매일 많은 량을 먹을 수도 없다. 나도 당연히 형수가 빨리 깨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날 밤 이후로 내가 무슨 짓을 해서 자극해도 형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애교 누나가 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내가 먹일게요. 수호 씨는 불편하면 가서 쉬어요.”“네. 애교 누나. 그럼 부탁할게요.”사실 나는 너무 아파 더 이상 형수를 돌볼 상황이 아니었기에 곧장 내 방으로 들어갔다.형수는 내 방을 예전 내가 떠나던 그날 그대로 남겨두었다.형수와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니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나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첫 번째는 나비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형수의 일 때문이었다.원래 나비 일은 이제 그냥 묻어두려고 했는데 결국 어젯밤 또 그렇게 되어버렸다.솔직히 나 스스로도 내가 헛것을 봤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용천 호텔에서의 그날 밤 나와 잔 사람이 세 명 중 한 명이라면 아무리 해도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다.결국 나는 환각이라고 스스로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나는 침대에 똑바로 누운 채 눈을 지그시 감고는 30분 동안 얕은 수면을 취했다.고작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잤다고 정신상태는 훨씬 나아졌다.침실에서 나와 보
그 순간 나는 머리가 띵했다. 나는 애써 눈을 뜨려고 했지만 머리가 너무 어지럽고 눈꺼풀이 무거워 도저히 뜰 수 없었다.다만 그 와중에 약간의 의식은 존재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용천 호텔에서 나와 몸을 섞은 사람이 사모님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사모님 댁에서 지내면서 사모님 다리에 있는 나비 문신을 보고 내 추측을 확신했고.하지만 지금껏 나는 그게 사모님이든 아니든 무조건 사모님과는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최면했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사장님께 미안한 행동은 할 수 없었으니까.하지만 오늘 저녁 나는 또 잠결에 그 나비를 보게 된 거다. 그 순간 나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뭐지?’오늘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날 용천 호텔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애교 누나뿐이다.하지만 애교 누나 몸에는 분명 나비 문신이 없다.게다가 나는 애교 누나 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애교 누나의 피부는 이 정도로 희지 않다.하지만 애교 누나가 아니면 또 누구란 말인가?고아연? 아니면 고수연?그날 밤 나는 이 두 여자를 본 적이 없다.나는 이 상황이 어리둥절했고 상대가 누구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무엇보다 오늘 너무 취해 머리가 어지러웠기에 눈을 뜰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나는 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로 애써 몸부림쳤지만 결국 의식이 점멸되어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그리고 나는 다음 날까지 푹 잠들었다.내가 바닥에서 일어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깨어났다. 내가 그중 맨 마지막에 깨어난 듯했다.나는 아픈 머리를 문지르다가 테이블을 치우는 애교 누나를 발견했다.“누나, 다른 사람들은요?”애교 누나는 테이블을 정리하면서 대답했다.“다들 일이 있다고 먼저 갔어요. 수호 씨를 방에서 자라고 하려 했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 아무리 깨워도 깨지 않더라고요.”“애교 누나, 어젯밤 혹시 안 잤어요?”나는 몸부림치며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그때 애교 누나가 입을 열었다.“늦게 잠들긴 했지만 안 잔 건 아니에요. 나
윤지은은 대체 진동성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 일이 있은 후 진동성은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다.때문에 우리는 형수를 집으로 모신 뒤 번갈아 가면서 돌보기로 했다. 그러는 게 서로서로 안심이 되기도 했으니까.그 일로 애교 누나는 아버지를 설득해 원래 살던 형수네 옆집으로 다시 이사 오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한테 다시 함께 살자고 초대했다.나는 잠시 고민 끝에 결국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당분간은 누나랑 같이 살 수 없어요.”“왜요?”애교 누나는 실망스러운 듯 나를 바라봤다.나는 애교 누나의 얼굴을 감싸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 사실을 누나 아버지가 알게 되면 저를 더 싫어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성공하기 전까지 같이 살면 안 돼요. 그래야 누나 아버지를 화나게 하거나 누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 거예요.”애교 누나는 이내 미소를 되찾았다.“바보. 수호 씨가 나를 이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요.”“당연하죠. 저는 정말 누나랑 결혼하고 싶어요. 때문에 누나 명성을 제가 망가뜨릴 수는 없어요.”“그래요. 수호 씨 말에도 일리가 있네요. 하지만 월세방에서 지내는 건 너무 머니까 태연이네 집에서 지내는 건 어때요?”애교 누나의 제안에 나는 살짝 어리둥절했다.“왜요?”“예전에도 태연이네 집에서 지냈잖아요. 지금 다시 거기서 지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동네 사람들도 태연이 교통사고로 의식이 없는 걸 알고, 진동성은 바빠서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도 아니까 동생이 대신 형수 돌보는 건 당연하잖아요.”애교 누나는 조리 정연하게 분석했다.사실 애교 누나는 내가 자기랑 같이 살든 아니면 형수 집에서 지내든 가까이에 있고 싶은 거였다. 하지만 나도 나름 걱정이 있었다.“진동성과 형수 사이에 이혼 얘기가 오가고 있다는 건 언젠가 소문이 퍼질 거예요. 그런데 제가 형수 집에 무슨 신분으로 있겠어요? 이건 형수의 평판에도 안 좋아요. 차라리 월세방에서 지내면서 매일 보러 갈게요.”애교 누나는 아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하지만
“괜찮아요.”“혹시 불편하지는 않아요? 아까 걸을 때 보니 허리를 짚고 걷던데요.”나는 걱정이 되어 물어봤다. 무엇보다 방금 사모님이 계속 허리를 짚고 걷는 걸 보니 허리가 분명 불편한 것 같아 보였다.아니나 다를까 사모님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제가 주물러 드릴까요?”“아, 아니에요.”사모님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어색하게 행동했다.‘대체 왜 이러지?’사모님이 싫다고 하니 나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하지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고 할 때 사모님이 갑자기 나를 불러 세웠다.“수호 씨, 그날 밤 일은...”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어느 날 밤을 말하는 거지?’그러다가 사모님이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본 후에야 나는 사모님이 치마가 젖었던 그날을 말한다는 걸 깨달았다.나는 다급히 설명했다.“사모님이 말씀하지 않으면 진작 잊어버렸어요.”“정말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제가 왜 거짓말하겠어요? 저 매일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일일이 기억할 수 없어요.”사모님의 미소는 살짝 이상했다. 그건 아무리 봐도 겉웃음이었다.“그럼 다행이네요. 일 봐요.”나는 뒤돌아 집을 나섰다.그 시각 임유미는 안절부절못하며 치맛자락을 잡은 채 나를 훔쳐보았다.임유미는 요즘 왠지 모르게 저녁만 되면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꺼내 몰래 야한 영상을 보곤 한다. 그것도 나이 많은 여자 주인공과 젊고 잘생긴 남자 주인공이 나오는 영상을.영상 속 어린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누나라고 부를 때면 임유미는 따라서 흥분하곤 했고 강렬한 오르가슴을 느끼곤 했다.임유미도 자기가 요즘 왜 이러는지 의문이었지만 그렇다고 남편한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방금 나를 붙잡은 것도 아무 이유 없이 단순히 내 목소리를 듣고 내 탄탄한 팔뚝을 한 번 더 보기 위해서였다. 가끔 임유미는 자기 마음속에 다른 자신이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게, 그동안 자기한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 심지어 가끔은 자기 친구들과 함께하
“사장님도 이미 최선을 다하셨어요.”나는 정 사장님을 매우 존경한다. 하지만 나더러 정 사장님처럼 하라고 하면 할 자신이 없다.내 생각도 사실은 만건희나 이규민과 다를 게 없다. 장사는 당연히 돈을 버는 게 목적이니까.하지만 이 일은 정 사장님이 나한테 부탁한 일이기에 나는 책임지고 정 사장님을 도와야 한다. 비록 모든 사람은 이미 마음이 변해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지만.나는 정 사장님이 자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찌 됐든 이건 정 사장님 책임이나 의무가 아니니까.나는 더 이상 정 사장님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방을 나왔다.사실 나는 정 사장님이 왜 이토록 박애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이 공무원이 되었다면 분명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사모님이 다가오자 나는 궁금했던 걸 물었다.“사모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뭔데요? 물어봐요.”나는 얼른 궁금한 걸 물었다.“사실 좀 궁금해서요. 정 사장님은 왜 상회를 설립하셨어요?”“그걸 설명하려면 우리 그이 어릴 때부터 이야기해야 해요.”사모님은 나와 함께 소파에 앉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사실 호섭 씨는 고아예요. 나도 들은 거지만 부모님 모두 병으로 돌아가셨대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의학을 파고들었고 커서도 계속 의학 분야에서 일했어요.”“화인당도 사실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오픈한 게 아니에요. 그냥 최선을 다해 병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병을 볼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서였어요.”그 말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정 사장님이 이토록 위대한 분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호섭 씨는 착한 사람이라 누군가 병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가장 싫어해요. 내가 이렇게 말하면 현실성 없다고 하겠지만 이게 사실인걸요. 호섭 씨는 누구한테나 친절해요. 선악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도 아니고요. 게다가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한테 잘해줘요. 내 눈에 호섭 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남자예요.”나는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깊이 동감하는 바니까.정 사장님은 모
“나는 이 사장을 따를 생각이 없지만, 정 사장 생각이 너무 허황한 건 사실이에요. 우리가 장사하는 목적이 돈 벌기 위해서인 건 맞잖아요. 그런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걸 왜 하지 않으려 하죠?”민건희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민건희는 겉으로는 정 사장님 뜻에 따르는 척했지만 사실 진작 마음이 변했다.테이블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몸을 앞으로 기울였던 나는 민건희의 말을 듣는 순간 몸을 뒤로 빼 의자에 기댔다.“민 사장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민건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솔직히 우리끼리 협력할 수 있어요. 강북 약재 시장 자원 대부분 정 사장이 쥐고 있으니 우리는 원가대로 다른 사장한테 팔면 그만이잖아요. 그러면 수호 씨도 정 사장한테 결과를 보여드릴 수 있고요.”“다만 서윤기한테만큼은 약재 가격을 좀 더 쳐줘서 그자가 우리를 도와 더 큰 이익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게 하면 돼요.”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어떻게 쳐줄 건데요? 진짜 약재를 사용하면 서윤기가 제공하는 가격이 이미 최저 가격이에요. 민 사장님 말대로 하려면 약재를 바꾸는 수밖에 없어요.”민건희은 얼른 자기 생각을 말했다.“약재를 바꾸는 게 안 될 것도 없죠. 그저 품질이 좀 떨어지는 거로 바꿀 생각이지 가짜 약재로 숫자를 채우자는 게 아니잖아요.”나는 속내를 꿰뚫어 볼 것처럼 민건희를 빤히 바라봤다.적어도 민건희는 이규민이나 전광진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민건희는 그저 다른 방식으로 제 욕심을 채우려 하는 것뿐이었다.나는 싱긋 웃으며 말을 아꼈다.“민 사장님, 오늘 만나지 않았던 거로 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내가 떠나려고 하자 민건희는 다급하게 일어섰다.“왜요? 싫어요? 내가 말한 방법은 우리 두 사람한테 모두 이로운 방법일 텐데 왜 싫다는 거죠?”“이건 정 사장님이 원하는 게 아니에요.”민건희는 대뜸 물었다.“정 사장 생각은 너무 현실성 없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백성들한테 좋은 일을 하자니, 그게 장사꾼이 할 수 있는 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