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릉은 부인할 수 없었다. 명원제가 묻는데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 것 같았다. “부황의 물음에 답을 드리자면, 맞습니다.”“어디서 의술을 배운 것이냐?”명원제가 물었다. 원경릉은 명원제가 이 질문은 할 것이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궁에서 호출이 있었을 때부터 생각을 해둔 대답이 있었다. “부황의 말씀에 대답을 하자면, 소인이 어릴적 강호(江湖)여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여인이 소인을 매우 예뻐하여, 소인에게 의술을 알려주었습니다.”“얼마나 배웠느냐?”“일 년 정도 입니다..”“스승의 이름이 무엇이냐?” 명원제가 그녀에게 가까이 걸어와 캐물었다.“모르옵니다. 사부님께서 이름을 밝히신 적이 없습니다.”설득력이 전혀 없는 원경릉의 말에 황제는 화가 났다. “태상황의 병을 치료하라고 다섯째가 시킨게냐?”원경릉은 고개를 저었다. “왕야는 모르는 일입니다.”“아니란말야?” 명원제가 입술을 오므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태상황님에게 처음으로 약을 드린게 다섯째와 함께 장막 안으로 들어갔을 때인데, 그가 어찌 모를 수 있다는 말이냐?” 원경릉은 이 일에 우문호를 끌어드리고 싶지 않았다.“정말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소인이 태상황님께 드린 약은 크기도 작고 입안에 넣으면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약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왕야는 모를 수 밖에 없습니다.”사실 원경릉이 우문호가 시킨 일이라고 말을 했다면,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자식인 우문호를 그리 쉽게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원경릉은 우문호를 끌어드리고 싶지 않았다. 비록 우문호가 못된 사람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에게 공정한 처우가 아니라고 생각이 되었다. “이 약 맞지?” 명원제는 약 한 병을 꺼내놓고 원경릉에게 물었다. 원경릉이 고개를 들어 보니 설저환이었다.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했다. “이 약이 무엇에 쓰이는가? 누가 정제하고, 누가 너에게 준거냐?”“이 약은 빠른 효과를 내는 구심단(救心丹),
만약 이 일이 정후부까지 연루된다면, 그녀는 원경릉의 가족들이 비난의 대상이 될까봐 두려웠다. 별전에 도착한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구사는 바로 맞은편에 서서 두손을 모은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과연 사람을 감시하는데는 일가견이 있군.’그녀는 고개를 들어 구사에게 물었다. “태상황께서 무엇 때문에 중독 증세가 있는지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경릉 역시 그가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을 줄 알았다. 원경릉은 푸바오의 사건을 미루어보아 궁 안에 누군가가 태상황이 죽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다만 건곤전은 외부와 내부가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기에 누군가 음식이나 약에 독을 탔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만약 독을 탔다고 해도 모든 음식이나 약이 태상황 입에 들어가기 전, 희상궁이나 상선이 먼저 기미를 하고 태상황이 먹는다. 그렇다면 향로를 이용해 독을 살포 한 것인가……. 그러나 건곤전에는 태상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선도 줄곧 곁에 있기에 만약 태상황이 중독이 됐다면, 상선도 중독 증상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늘 태감이 드나들고, 태후와 명원제 그리고 예친왕까지 항상 문안을 가기에 향로에 독을 넣었다면 진작에 발각됐을 것이다.목여태감이 태상황이 혼수상태라고 했는데, 도대체 누가 원경릉이 태상황에게 약을 주었다고 말했을까?상선? 하지만 상선은 원경릉과 우문호가 함께 들어갔을 때 원경릉이 태상황에게 약을 주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이 일은 우문호를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없는데, 그는 이 일을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을 뿐더러, 그는 최근 며칠동안 궁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문호가 다른 사람에게 말했을까? 우문호가 멍청하다고 해도, 자신이 연루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발설할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우문호가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사람이라면 혹시 모를까. 만약 그가 말한것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추측을 했다는 건데, 도대체 누가 그녀의 행동을 주시했을까? 그녀의 머릿속에 두명이 스쳤다. 기왕과 주명취.기왕의
“가만히 지켜 본다고 판세가 뒤집히겠느냐?” 탕양의 말에 우문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하지만 적어도 판세를 읽고 대비를 할 수 있겠지요.”탕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왕야, 지금 이 풍랑을 맞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왕야께서 지금 몸이 안좋으니 굳이 황제께서도 양해 해주실겁니다. 지금 이 모양으로 입궐하신다면 오히려 일부러 왕야가 고육지책을 쓴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서일아, 가마를 마련하거라” 우문호는 직접 서일에게 분부했다. 서일은 난처한 표정으로 탕양을 바라보았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어떻게 궁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왕야, 심사숙고하십시오!”탕양이 말했다. 우문호가 어찌 심사숙고 하지 않았겠는가. 수천번을 생각해도 답은 같았다. 목여태감이 원경릉을 데려가는 순간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수천가지의 생각이 떠올랐다. 어떻게 하면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수천번을 생각해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우문호는 원경릉이 자기 혼자 살겠다고 초왕인 자신을 모함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했다. 원경릉은 그와 혼인 한 후, 궁 안에서 그녀의 뜻을 한번도 펼치지 못했고, 원경릉과 그의 사이는 늘 안좋았다. 이를 미루어보아 그녀가 그를 배신할 가능성이 충분했다. 우문호가 입궁을 하려고 하는데 문지기가 급하게 달려왔다. “왕야, 경조부 오대감(吴大人)이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탕양이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왕야를 해하려고 한 놈을 찾았을지도 몰라!” 서일은 기쁜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우문호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대감은 경조부의 포졸을 데리고 왔다. 여섯명의 포졸들이 문앞에 서자, 오대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탕양은 “오대감님, 왕야를 해하려고 한 자객들은 찾았습니까?” 라고 물었다. 오대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앞으로 한걸음 다가와 우문호를 보고 절을 했다. “하관(下官)이 왕야에게 인사드리옵니다.”“예의는 생략하게!” 우문호는 그를 보며 “범인이 자백을 한
소월각은 긴 정적 속에 잠겼다. 우문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어 탕양에게 말했다. “태상황님이 무슨 독에 중독 된건지. 가서 알아보거라”“왕야, 아마 어려울 것 같습니다.”“구사는 알고 있을 것이야!” “지금 구사는 어전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어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방금 구사도 함께 왔다 갔는데 만약 알고 있었다면 알려줬을겁니다.”우문호의 눈에 독기가 가득찼다. “본왕이 죄를 인정한다고 궁에 가서 알리거라.”“왕야!” 서일과 탕양이 동시에 그를 보았다. 왕이 미친 것일까? 죄를 인정한다니!“본왕이 죄를 인정한다. 원경릉이 저지른 일도 다 내가 지시한 일이다.” 우문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우문호가 자객을 사주했다는 것을 인정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서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왕이 왕비에게 태상황의 병을 치료하게 했다고 해도 그 방식이 옳지 않다.“안됩니다. 왕야. 지금 편치않은 몸을 이끌고 어찌 죄를 인정하시려고 합니까.”서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탕양이 고개를 들었다. “왕야께서는 왕비를 믿으십니까?”“다른 방도가 없다!” 우문호가 쏘아붙였다. “왕야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으니 왕비님과 한배를 탄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만약 왕비께서 판을 뒤집지 못한다면 왕야의 처지는 더 곤란해지실 겁니다. 이런 결과는 예상하셨습니까?” 탕양은 우문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 말고 다른 방법이 있느냐?” 우문호는 격분하여 소리쳤다. 그에 목구멍에서 피가 끓어 올랐다. 그는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기왕(纪王)은 비밀이 새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했을 것이다. 이미 자객도 자결한 마당에 달리 다른 증거도 없을 것이다. 이번 일로 인해 우문호만 죽어나게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원경릉이 황조부를 잘 치료하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다. 만약 황조부의 병세가 호전된다면 그 공(功)으로 죄를 덮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문호는 부황의 냉철하고 모진 성격인지 알고 있다. 서일은 도대체
가마는 어서방 문 앞에 멈췄다. 예친왕은 탕양에게 “본왕은 황제를 뵈러 갈테니. 너랑 왕야는 여기서 기다리거라.” 라고 말했다.예친왕은 두루마기를 펄럭이며 어서방 안으로 들어갔다. 탕양은 얼굴이 잿빛이 된 정후가 궁 앞에 벌벌 떨고있는 모습을 보았다. 탕양은 그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후작(侯爷)나리?”정후는 누군가 자신을 부른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쭉 뻗고 그를 보았다. “탕양!”“후작나리 여기서 무엇하십니까?” 탕양이 물었다. 정후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황제의 부름에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황제께서 사람을 시켜 저를 이리로 오라고 하셨는데 만나 뵙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오는 길에 황제께서 보낸 신하가 원경릉에 대해서 몇 마디 물어보고는……. 그냥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그가 말을 하는 도중에 목여태감이 나왔다. “초왕은 안으로 들어와 알현하라.”탕양과 서일이 우문호를 부축해 가마 밖으로 나왔다. 정후는 우문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의 모습이 마치 종잇장처럼 닿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았다.“황제께서는 초왕만 들라하셨다!” 목여태감이 서일과 탕양을 보며 말했다.서일과 탕양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우문호를 힐끗 보았고, 우문호는 천천히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 “태감님 안내해주시지오.”우문호가 말했다.궁으로 들어가 스무 걸음만 가면 어서방 정전에 이른다. 우문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에 피가 흘렀고, 다리의 상처가 모두 터져서 걸음마다 바닥에는 섬뜩하게 피가 묻었다. 목여태감은 이런 우문호를 보고 놀랐다. 눈썹뼈 부근과 귓가에만 상처가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심하게 다친 줄을 몰랐다. 명원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우문호가 걸어온 자리에 묻은 피를 보니 마음이 답답했다.다친지 이틀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상처에서 피가 나다니, 우문호가 나를 바보로 아는 것인가?아들 놈이 머리를 꽤나 썼구만. 우문호의 미간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걸어들어오는 길에
예친왕은 피투성이가 된 우문호를 도저히 볼 수 없어 자신의 소매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우문호의 입에 넣었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명원제에게 말했다.“황제, 신제(臣弟)는 다섯째가 스스로 자해한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이 상처는 어의들도 치유할 수 없을텐데, 한낱 눈속임이라고 하기엔 상처가 심각합니다.”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가슴이 철렁했다. 황제는 우문호가 스스로 자해한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고? 예친왕의 말이 끝나자 원경릉을 감시하던 구사도 황제에게 사정했다. “폐하. 소인이 보아도 자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의도 왕야가 중상을 입었다고 말했으며 후사(后事)를 준비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태상황께서 왕비를 출궁시켜 왕야를 치료하게 한 것입니다. 소인이 무예를 연마해 본 적이 있어 압니다만, 칼에 베인 상처들은 생명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명원제는 담담한 눈빛으로 “모두 일어나거라.” 라고 말했다. 구사의 눈빛이 어두웠고, 황제는 시종일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어의가 급히 달려왔다. 그는 그간 궁 안에서 태상황의 병을 돌볼 정도로 실력이 있는 어의였다. 그는 급하게 무릎을 꿇고 인사를 했다. 위급한 상황이니 어의는 명원제가 일어나라고 명령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어의는 우문호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는 약상자를 꺼냈다. 원경릉은 황제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어의가 가져온 약상자를 열고 가위를 꺼내 우문호의 옷을 자른 다음 가제로 우문호의 상처 위쪽을 강하게 감아 지혈했다. 그녀는 빠르게 그의 신발을 벗기고 바지를 잘랐다. 명원제는 우문호의 허벅지 안쪽에 난 상처를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직 지혈하지 못한것인가?” 그가 어의에게 물었다. 어의는 재빨리 일어나 원경릉을 거들었다. 예친왕이 자금단을 꺼내 우문호의 입에 넣은 덕에 피는 서서히 멎고 있었지만, 상처와 봉합한 곳을 잘 처리해야만 했다. 명원제는 자리에 앉아 원경릉이 능숙하게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조금도 망설
우문호를 다시 살려내다원경릉은 심장 맛사지를 계속 하며, 우문호가 그저 쇼크를 일으킨 것이길 바랬다.명원제는 줄곧 우문호를 생각하면 안타까움과 슬픔이 밀려왔다. 전에 가장 아꼈던 아들 우문호가 아닌가. 비록 마지막엔 실망시켰지만 부자의 정이란 것이 그렇게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명원제는 우문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예친왕이 즉시 그를 부축했다.“떨어뜨려 놓아라!” 명원제는 머리가 어질어질한 가운데 피맺힌 목소리를 뱉는다. 이때 “현비(賢妃) 마마가 초왕 전하를 보러 온다 합니다.” 구사는 앞으로 나가 원경릉을 왕야에게서 떼 놓으려 하는데 어의가 옆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왕야께서 숨을 쉬십니다. 왕야께서 숨을 쉬세요.”명원제는 홱 고개를 돌려 초왕의 가슴이 천천히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명원제가 직접 코에 호흡이 있는지 확인했다.원경릉은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쥐어짜낸 뒤라 침대에 쓰러져 후후 숨을 몰아쉬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며, 참았던 슬픔에 목 놓아 울고 싶었다. 사실 원경릉은 이미 울기 시작했다.원경릉도 자신이 예를 어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한쪽으로 무릎을 끓고 울면서 잘못을 빌었다. “아바마마, 소신이 예를 어긴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울고 싶었어요. 아바마마 잠깐만 우는 것을 허하여 주시옵소서.” 원경릉의 말은 예의에도 어긋나고, 우는 모습도 흉해서 눈물 콧물이 엉망진창이지만, 방금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명원제는 조금도 개의하지 않고, 오히려 전에는 예뻐 보이지 않던 며느리가 귀엽게 느껴졌다.어의는 진맥을 마치고 연신 탄성을 지르며, “신기해, 정말 신기한 일이야, 하늘이 도우셨어!”예친왕은 어의를 흘겨 보며, “초왕은 살아날 운명이었군.”어의가 황급히 말을 바꾸며, “맞습니다, 초왕 전하께서 살아나실 운명이셨나 봅니다.”“뭐라고?” 명원제가 어의에게 물었다.어의는 손을 모으고: “폐하께 아룁니다, 초왕 전하는 점점 안정되어 가고 있습
태상황에게 독을 쓴 자는 누구인가“이리 돌아봐!” 우문호가 조용히 말했다.원경릉은 턱을 침대에 걸치고 웃으며 눈물을 떨군다. “죽음에서 살아 온 걸 환영한다.”“넌 짐이 죽기를 간절히 바라는 거 아냐?” 우문호는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았다. 이마엔 멍이 들었고, 눈 밑은 울어서 복숭아처럼 퉁퉁 부은 데다, 눈물이 더러웠던 얼굴을 타고 내려 두 줄기 하얀 피부가 드러나 있다. 사실 상상조차 못한 것이, 요 며칠 둘은 물과 불처럼 서로 싸우지 않았던가.“그래, 네가 죽길 간절히 바란 게 사실이야.” 원경릉은 눈물을 훔치며 결국 유치하게, “하지만 내 눈 앞에서 죽는 거 말고, 난 의사이고 환자가 내 앞에서 죽으면, 내 직무상 과실이 되거든.”우문호는 원경릉을 보고 슬그머니 웃었다.구사가 옆에서 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웃었다. 웃고 나서 복잡한 심경으로 원경릉을 응시했다.이 왕비는 사실 그렇게 싫지 않다.우문호가 마음을 가라앉히자, 자금단이 몸 속에서 작용하며, 단전의 기운이 서서히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우문호는 구사를 향해, “태상황 폐하는 무슨 독에 중독 되셨느냐?”구사는 앞으로 한 걸음 나와 말하길,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제 밤 태상황 폐하께서 갑자기 피를 토하시고 혼수상태에 빠지셨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어의는 독에 당하셨다고 진단했습니다.”우문호는 원경릉을 보고, “네가 할바마마께 드린 약이 토혈과 혼수상태를 불러온 것은 아니냐?”원경릉은 “절대 그럴 리 없어.”“그럼 아바마마께서 조사하신 게 반드시 결과가 나와야 하겠구나.” “할바마마를 가서 뵙게 해달라고 아바마마께 말씀드리려고” 원경릉이 말했다.구사는 고개를 흔들며, “왕비 마마, 서두르지 말고 잠시 기다리시지요. 황제 폐하도 손을 쓰셨을 것이고, 분명 예친왕 전하도 말씀하실 겁니다.”밖에 서있던 정후는 마음속으론 딸 원경릉을 수백번도 더 혼을 냈다. 갖은 수단을 동원해 딸을 초왕부에 시집을 보냈더니, 좋은 일이 생기긴 커녕 안 좋은 일만 앞다투어 찾아올 줄 누가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
한편, 안왕과 위왕은 이미 명월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왔기에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몸 전체가 먼지투성이였다.하지만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바로 궁에 들어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혼 연회가 예정보다 앞당겨 열리게 되었다고 했다.그들은 의아해하며 금나라가 막무가내라고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혼례라더니, 이제는 정혼식이라 하고, 심지어 약속했던 날도 지키지 않고 앞당겼으니 말이다.혼사라는 중대사가 이렇게 어린아이 장난처럼 진행될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신부가 북당 사람이니, 그들은 신부의 친정과도 마찬가지였기에 금나라의 일정을 따르며, 금나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것이 맞았다. 다른 나라 사절들이 함께 있었기에, 그들은 무관의 신분으로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친구를 사귀고 주변 무역 문제를 논의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다섯째가 특별히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다른 나라의 사신을 만나면 국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상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라고 말했었다. 장사는 대화로 시작되는 일이니,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면 결국 성사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비록 처음에 다섯째의 이런 태도가 약간 뻔뻔하다고 느꼈었지만, 지난 10여년간 나라 경제가 눈에 띄게 번영했다는 사실을 차마 부인할 수는 없었다.다섯째의 말처럼 경제를 앞서게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한 덕분에, 돈이 끊임없이 북당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들이 다른 나라 신하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황제가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안왕과 위왕은 금나라의 황제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 젊은 황제는 올해 열여덟도 되지 않는 어린 나이라 들었다. 어린 나이에 유명한 진국왕을 몰락시켰으니, 얼마나 대단한 결단력과 꾀를 가졌을까?내시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밝은 황금빛 용포를 입은 젊은 황제가 시위에게 둘러싸여 등장했다.혼례복이 아닌 용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나 혼례를 올리는 것은 아닌 듯했다
세 사람은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그 중, 택란은 베일을 쓴 채 궁에서 준비한 마차에 올랐다.때마침 불이 하나둘씩 밝혀질 시간이라, 거리는 무척 떠들썩했다. 금나라 수도의 번화함은 약도성이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통행금지가 없어, 백성들이 밤늦게까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택란은 마차의 가림막을 살짝 들어 올려 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장사에 열중하는 상인들, 주루나 주막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상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이런 활기 넘치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그러고는 순간 어린 황제를 본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3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은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해졌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3년 사이에 자신도 많은 변화를 겪었으니 말이다. 키도 훤칠해졌고 이제 얼굴도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닌 한층 성숙하고 침착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도성이 지난 몇 년간 겪어온 일들이 많았기에 당연히 성숙해질 수밖에 없었다.한편, 금나라 황궁에서는 이미 정혼 연회의 준비를 마쳤으나, 중요한 두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안왕과 위왕이었다.북당의 두 친왕이 도착해야만 연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한편, 경천 황제는 내내 택란을 만나고 싶어 했다.지난 3년 동안, 그는 그녀와 재회할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3년간 간절히 바랐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들떴지만, 첫 만남은 너무도 중요했다.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생생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그는 사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조정을 되찾아 그녀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물론 지금 그녀는 아직 어리기에, 혼담을 논하기엔 이르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생각이 훨씬 개방적이었고,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장 큰 행복이라 여겼기에 의식 자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그래도 아버지의 아쉬움을 덜어주기 위해 현대에서 한 번, 즉위 후에 또 한 번 의식을 치렀다.주 아가씨는 객사로 돌아오자마자, 객사 일꾼에게 소식을 물었다.그러자 일꾼은 황제가 곧 혼례를 올린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멈칫했다.“혼례요? 정혼 아니었습니까?”“정혼? 정혼이라니? 그럼 이미 혼사를 올릴 나이가 되었는데, 어찌 바로 혼례를 하지 않다는 것이냐?”“그건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정혼한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미래의 황후가 북당 사람이 맞느냐?”일꾼이 말했다.“예. 북당 출신의 아가씨라고 합니다. 게다가 황제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들었습니다.“택란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경천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말 은인의 언니라는 말을 믿다니 말이다.설사 그렇다고 해도 굳이 그녀와 혼례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혼사를 어찌 장난처럼 다룰 수 있단 말인가?택란은 경천 황제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저 정치적인 판단에서만큼은 어리석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택란은 원래 이틀 정도만 량주를 둘러본 뒤 바로 궁으로 들어가 알현할 생각이었지만, 아직 혼례 날짜가 다가오지 않았으니 며칠 더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궁으로 들어가 정체를 드러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녀가 생명의 은인인 것을 알아차리면, 정혼식을 진행할지 말지 애매해질 것이기에, 택란은 며칠 동안 객사에 머물며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펴보는 한편, 참고할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그렇게 살펴보던 중, 주 아가씨가 정보를 알아보러 나갔다가 안왕과 위왕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칠 동안 다른 나라 사절들은 계속 장관에 묵고 있었는데, 택란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삼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 무렵 장관으로 갔다.그런데 도착하고 나서야 그들이 이미 황
량주는 금나라의 수도가 된 이후 지난 2년간 크게 발전했다. 또한,금나라와 북당이 우호적인 교류를 시작하면서, 북당 변방 도성의 백성들도 장사를 위해 많이 찾아왔다.이전에 택란도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 위해 금나라에 왔었다. 하지만 그때의 량주는 지금처럼 북당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택란은 객사에 머문 뒤 주 아가씨와 냉명여를 데리고 거리로 나가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폈다.여기도 어쨌든 금나라의 수도 아닌가!진국왕은 물러나기 전까지 나라를 잘 다스렸고, 특히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야망이 지나친 탓에 늘 약도성을 되찾겠다고 욕심을 부렸다.그리고 동시에 북막을 두려워하기도 했다.경천이 즉위한 후, 광산 자원 개발 외에도, 그는 농경지와 산지를 개간하려고 노력했다. 금나라의 서북부에는 농사에 적합한 땅이 있었지만, 사람이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북당의 다른 도성을 본받아 사람들을 개간지로 보내고 그들에게 이익을 나누어주었다.나라가 상승세일 때, 그 분위기는 눈에 띄기 마련이다. 백성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택란은 경천이 황제로서 매우 적합하다고 느꼈기에, 그가 이끄는 금나라는 분명 빠르게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발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기에,그가 광산을 함께 개발하자는 제안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았다.택란은 이내 자신감을 얻었다. 궁에 들어가 알현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량주 백성들이 북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과거, 약도성과 량주의 관계는 다소 안 좋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나라가 약도성에 사람을 침투시켜 많은 폭동을 일으켰기에, 약도성 백성들도 그들을 매우 싫어했다.그렇기에 지난 2년간의 교류를 통해, 택란은 그들의 원한이 천천히 사라지기만을 바란 것이었다.이제 북당 쪽은 문제가 없으니, 량주 백성들의 생각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택란은 물건을 사면서 점포 주인과 상인들에게 북당 약도성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곤 했다.그 중, 다
원경릉은 뒤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사식이가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서일이 비록 평범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마음과 눈에는 오직 사식이만 있었다.그야말로 진실한 남편이다.물건을 산 뒤, 서일은 계속 계산기를 두드리며, 여기서 쓴 금액을 북당으로 돌아가 황후에게 얼마만큼의 금으로 바꿔 드려야 할지 열심히 계산했다.계산을 마친 후, 지갑형편이 다소 여유롭다고 느껴지자, 그는 귀걸이와 금팔찌까지 더 구매했다. 이곳의 디자인은 북당보다 훨씬 아름다웠다.한편, 금나라에서는 완안경천이 혼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웃 나라 사신들도 연이어 축하해주기 위해 도착했다.택란은 냉명여와 주 아가씨를 데리고 량주로 갔는데, 그들이 량주성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가 경천 황제에게 보고했다."폐하, 초상화 속의 아가씨가 이미 도착하여 객사에 머물고 있습니다. 근처에서 감시 중이며, 가까이 다가가 방해하지는 않았습니다."경천 황제는 어서방에 앉아 이 보고를 들으며 눈매를 약간 올리고는, 온화하고 잘생긴 얼굴에 빛을 발했다. "그녀가 왔구나. 마침내 그녀가 왔다!""폐하, 바로 부를까요?""아니. 사람을 보내 그녀를 계속 감시하도록 하거라. 절대 그녀를 놓쳐서는 안 된다."경천 황제 또한 손끝이 떨릴 정도로 감격했다. 수많은 밤, 그는 초상화를 보며 멍하니 그녀가 살아있기를 바라고 또 바랬기 때문이다.그 초상화는 그가 직접 그린 것이었다. 원래 그는 서화에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화가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화가의 그림이 그녀와 닮지 않아, 직접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다.그렇게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녀를 자신의 그림으로 완성했다.그는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보내 북당에서 한 부녀를 데려왔다. 그 중 딸이 자신이 란이의 언니라고 주장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택란과 닮은 점이 조금도 없었다. 심지어 분위기도 전혀 닮지 않았다.친자매가 어찌 조금도 비슷한 부분이 없다는
원경릉은 병실로 돌아간 뒤, 서일을 따로 불러내서 물었다.당시에는 상황이 급박했던 탓에 서일이 어떻게 그 약을 가져왔는지, 약상자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두 번째 약은 어디서 꺼낸 것이냐?"원경릉이 약상자를 열며 묻자, 서일이 약상자 두 번째 칸을 가리켰다."이쪽이였습니다. 그 당시 약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주삿바늘에 뚜껑도 씌워져 있었습니다."원경릉은 약을 세 번째 칸에 넣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세 번째 칸은 자동으로 수축하는 구조여서, 사용하지 않는 약을 넣고 약상자를 닫는 순간 아래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반면 두 번째 칸은 평소 사용하는 약으로 꽉 차 있어, 추가로 주사를 넣을 공간조차 없었다.게다가 약상자를 10년 넘게 사용해 온 그녀였기에, 약을 어디에 두는지 몸이 기억할 정도로 익숙했다. 그녀가 약을 잘못 넣었을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다. 설령 잘못 넣었다 하더라도, 약상자는 위험성을 자동으로 감지하는 기능이 있어, 그 약이 서일 앞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서일은 원경릉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우문호의 병세가 다시 악화한 줄로 착각하며 구석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참고 또 참아왔지만, 이제는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다. 그가 울기 시작하자, 원경릉이 깜짝 놀라 물었다."왜 그래? 설마 또 무슨 약이라도 먹인 것이냐?""아닙니다..."서일은 빨개진 눈에 머리도 헝클어진 채로 원경릉을 바라보며 처량하게 말했다."마마, 폐하께서 아직 낫지 않은 것입니까? 혹시 제가 폐하를 죽게 만든 것입니까?"원경릉은 웃음을 터뜨리며, 서일의 반응 속도가 정말로 느리다고 생각했다."그런 소리 하지 말거라. 그런 일 없다. 그저 사실을 알아보는 것뿐이니, 괜히 걱정하지 말거라. 다섯째도 아주 좋아졌다. 단지 조금 더 검사가 필요할 뿐이다."서일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서일은 우문호에게 가서 울며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것이 뻔했다.
"다섯째가 예전에 물을 다스리는 술법을 아는 사람한테서 편지를 받은 적 있는데, 혹시 그 편지에 얼음 벌레가 묻어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 벌레가 다섯째 몸에 숨어있다가, 수영 후 뭔가에 물려서 생긴 미세한 상처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어요.""네,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에요!""그리고 요즘 다섯째가 일이 너무 바빠 밤낮없이 일한 탓에 몸 상태도 좋지 않았어요. 면역력이 떨어지고, 폐렴에 비까지 맞아 고열이 났던 데다가, LR까지 잘못 사용했으니..."원경릉은 멈칫하다 약상자를 꺼내고는, 겹겹이 쌓인 약상자 안의 디자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왜 그래요?"양여혜가 그녀가 멍하니 있는 걸 보고 물었다.원경릉은 폐 치료제를 꺼냈는데, 지금은 쓸 필요가 없는 약이라 다시 약을 넣고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다시 열어보니, 그 약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정말 이상하네요. 제 약상자는 제 통제 외에도 자율적으로 작동이 가능해요. 약을 꺼낸 후 사용하지 않거나, 약상자가 스스로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경우 맨 아래 칸으로 내려가요. 그리고 상자를 다시 열어서 직접 꺼내야만 나타나죠. 방금 그 약도 그랬는데, 예전에 제가 LR를 실험용 쥐에게 주사하려고 꺼냈다가 서일이 오는 바람에 약을 다시 넣었거든요? 그럼, 그 약은 원래대로라면 맨 아래 칸으로 내려갔어야 해요. 그런데 서일이 다섯째에게 주사할 때, LR를 바로 꺼냈는데, LR이 내려가지 않았어요."양여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상자는 확실히 프로그램으로 제어되고 위험성이 높은 약은 자동으로 내려가는 방식이니, 쉽게 꺼낼 수 없어요. 그래서 우문호 씨를 데려와, 시위가 약을 주사했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급한 상황이라 묻지 않았어요. 그런데 원경릉씨 말을 들으니, 더 신기하네요. 약상자가 이렇게 통제가 불가능하게 된 적이 있었나요?""아니요.""그렇다면 위험한 약은 직접 꺼내야 하거나 본인이 자리에 있어야만 보일 수 있는 거네요?"원경릉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밤늦게 연구소에 돌아오자마자 양여혜는 곧바로 원경릉을 사무실로 끌고 들어갔다.“오늘 저도 함께 바닷가에 갔었는데, 우문호 씨의 특별함을 알아차리셨나요?”“혹시… 파도를 통제할 수 있다는 걸 말하는 건가요?”원경릉은 단번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맞아요. 오늘 바람이 그렇게 세지 않아서 큰 파도가 일어날 리가 없어요. 게다가 파도가 일던 순간, 주변에 지나가는 배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 파도는 갑자기 생겨난 거예요!”원경릉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죠?”“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혹시 물을 다스리는 술법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원경릉은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들어본 적 있어요.”하지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이 힘은 유전자의 돌연변이에서 비롯된 겁니다. 이 능력은 물에 굉장히 민감해요. 마치 약이 병에 민감한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이 능력은 물과 독특한 자기장이 형성돼서, 이 힘을 쓸 때 공기가 진동하면서 물이 그 힘을 따라 움직이게 돼요. 우리 연구소에서도 한 전문가가 이것에 대해 연구한 적 있어요. 결과가 나왔는데, 한번 볼래요?”“좋아요, 보여주세요!”양여혜가 즉시 컴퓨터에서 관련 문서를 열어 보여주자, 원경릉은 자리에 앉아 마우스를 잡고 천천히 결론 보고서를 읽어나갔다. 잠시 후,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했다.“인간이 어떻게 이런 힘을 통제할 수 있는 거죠? 여기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네요. 단지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고요.”양여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관찰 사례가 아직 부족하니까요.”원경릉은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졌다.“그럼, 혹시 제 남편을 연구하려는 건가요?”“LR 연구에 문제가 있으니, 그건 일단 신경 쓰지 말고. 당신 남편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보는 게 어때요?”원경릉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안 된다고 할 수 없겠네요. 제가 항상 그를 지켜보니깐요.”“사실 물을 다스리는 기술을 아는 사람은 몇몇 더 있어요. 도교의 수행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