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손은 이리봉청에게 큰 안도감을 주었다. 그리고 이리봉청은 조금씩 냉정을 되찾으며 머릿속 단편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너무도 불가사의했다. “세상에 늑대가 널 구했다고? 그럼, 네 사부는 지금 어디 계시니? 그분께 절 올려야겠다. 아들의 생명을 구해주신 은인이시구나!”“만나게 되실 거예요. 내일 오신다고 했거든요. 어서 일어나세요. 차가운 땅바닥에 앉지 마시고요.” 이리 나리가 우선 천행이를 안고 다시 손을 내밀어 이리봉청을 일으켰다. “어머니의 며느리가 앞에 있는데 궁금하신 건 없으신가요?”“며느리…?” 이리봉청은 아직 어리둥절한 모양으로 우문령과 미색의 얼굴을 보더니 다시 우문령을 되돌아봤다.우문령은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는데, 시어머니의 눈빛을 보고 앞으로 다가와 눈물이 아직 가시지 않은 얼굴로 꿇어앉으려 하자 이리 나리가 얼른 우문령을 일으켰다. “지금은 절할 필요 없어. 바닥이 찬데 아이를 낳은 몸으로 안 돼.”그러자 우문령이 예를 취하며 울먹였다. “며느리 우문령 드디어 시어머니를 뵙습니다…!”이리봉청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우문령의 손을 잡고, “내가 아들이 있고 며느리가 있고 손자가 있다니…. 이 모든 게 진짜라니. 어떻게 전부 다 있을 수가 있어? 난…. 도무지 믿을 수가 없네.”“엄마, 전부 진짜예요. 어머니는 눈늑대봉에서 36년을 계셨고 아들은 계속 어머니께서 거기 계신 줄 모르고 불효했어요….” 이리 나리가 말하다 목이 메었다. 이리 나리는 천하제일의 부호요 늑대파도 강호를 호령하는 패주였지만 정작 이리 나리의 어머니는 눈늑대봉에서 온갖 풍상과 비바람을 맞고 있었다.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고 하염없이 이리 나리를 바라보다가, 이제는 손을 뻗어 이리 나리 얼굴을 쓰다듬었다. “네가 살아 있는 것보다 엄마를 더 기쁘게 하는 게 또 있을까 싶네… 바보로 지낸 세월 동안 엄마는 세상을 몰랐지. 하지만 밤마다 네가 늑대에게 물려가는 꿈을 꿨어. 대부분 식은땀에 젖은 악몽이었지만 세상일을 몰랐어…. 그런데 네가 살아있다니
미색과 시녀가 이리봉청이 목욕하고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원경릉이 과거에서 돌아오는 시간 동안 이리 나리가 사람을 시켜 새 옷을 여러 벌 준비시켜 두었다.머리카락은 다 씻어낼 수 없어 미색이 직접 가위를 들고 잘랐다. 다행히 뜨거운 물에 한참 담그자 대부분 풀어진 덕분에 잘라낸 부분이 많지는 않았다.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미색이 약간 화장을 해 드리고 머리를 이쁘게 묶어 주었다. 그러자 동으로 된 거울에 비친 중년 여인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세월도 미녀를 아까워했는지 이리봉청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눈가에 잔주름이 있고 이마에도 주름이 약간 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엔 전혀 손색이 없었다.너무 말라서 그런지 얼굴이 심하게 창백해져 있었고, 수수한 색 비단옷을 깡마른 몸에 걸치자 약간 커 보이긴 했지만 보기 싫지 않고 오히려 선풍도골의 정취를 풍겼다. 어쩌면 그녀가 36년간 눈늑대봉에서 세상일과 관련없이 지낸 덕분일지도 모른다.이리봉청은 온통 기쁨과 희열로 가득했다. 모든 것이 꿈 같고 환상 같아서 더 이상을 상상할 수 없었다. 원한과 복수심만 마음에 가득 찬 게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미색이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나왔을 때 이리봉청 얼굴은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저녁 수라에 미색은 참석하지 않았다. 일부러 저녁 수라를 들 때 자리를 비켰다. 36년간의 이별 뒤 모자가 처음으로 같이 하는 식사였다. 미색은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미색은 달빛을 따라 걸으며 중앙 정원으로 나가며 돌아보았는데,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앉아서 이리 나리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봐도 봐도 모자란 듯 지난 36년 치를 채우려는 것 같이 느껴져 미색은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아 얼른 자리를 떠났다.잠시 후 네 식구는 한 곳에 앉아서 같이 밥을 먹었다. 이리 나리는 천행이를 안고 줄곧 내려놓지 않았다. 천행이도 아빠가 앉아 주는 걸 즐기고 있는지 울지도 않고 떼도 안 쓰고 포동포동한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저녁 수라는 담백하게 했다. 이
사방이 고요해졌고, 침실에서는 풀 벌레 우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모든 잡스러운 일들이 물 빠지듯 흘러가 이리 나리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고, 그제야 자신의 곁에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이 현실이라고 느껴졌다.그는 긴 세월 자신의 어머니를 그리워한 순간이 수도 없이 많았다. 언제나 뭔가가 자신의 머릿속을 억누르는 것 같았고, 가끔 느껴지던 그리움도 금방 사라져 버렸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주 강렬했다.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둘만의 시간이었다. 이리 나리는 지금 이 고요함을 홀로 즐기며, 또 마음속으로 억눌러왔던 가족에 대한 사랑을 마구 느끼며, 자신의 어머니를 아주 조용히, 또 천천히 바라봤다.이리 나리는 밤이 깊어지고 나서야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다.우문령은 이리 나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를 보자마자 얼른 일어나 손을 잡았는데, 한마디도 하기 전에 이리 나리가 바닥에 미끄러지듯 넘어졌다.우문령은 화들짝 놀라 재빨리 사람을 불렀고, 다들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리 나리를 침상으로 옮겼다.우문령이 의원을 청하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자 멸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부인 서두르지 마세요. 나리께서는 주무시는 겁니다. 그동안 거의 눈을 붙이신 적 없이 피곤하셨으니 그냥 주무시도록 놔두시지요.”우문령은 당황해서 이리 나리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봤는데, 정말 잠이 들었는지 얼굴에 긴장이 풀려있었다. 요 며칠 동안 얼마나 몸과 마음이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우문령은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고 침대에서 이리 나리를 지켰다.이리 나리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잔잔한 감정의 파도가 일었다.이전에 황실의 많은 사람들은 우문령이 공주 신분인데도 상인에게 시집간 것이 황제가 우문령을 홀대해 혼인을 통해 북당의 경제를 살리는 데 이용하는 거라고 떠들어 댔다.이 결혼은 애초부터 원만하지 않았다.하지만 어마마마가 돌아가시고 이리 나리가 풍경을 보내온 그 순간부터 우문령의 마음은 이미 그에게 기울어져 있었다.그 당시 주변 사람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해 문지방을 넘다가, 원경릉이 천행이를 안은 모습을 보자, 이리봉청의 안색이 확 변하며 원경릉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때 한 편의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뇌리에 깊이 박힌 아주 익숙한 장면이었다.“당신….”이리봉청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다가오더니 원경릉을 뜯어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당신 봤어. 당신을 본 적이 있어!”원경릉이 미소를 지었다.“어머님, 어머님께선 당연히 저를 본 적이 있으시겠지요. 며칠 전에 눈늑대봉에서 만났잖아요.”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며 눈을 부릅뜨고 원경릉을 쳐다봤다. “아니, 아니야.”이리 나리가 의혹의 눈빛으로 물었다. “어머니, 그럼 언제 보셨어요?”원경릉이 돌아온 뒤로, 이리봉청이 출산할 때 나타나서 도와준 사실을 이리 나리에게 얘기한 적이 없었다. 영석을 깨는 그 순간 상황이 너무 급박하고 위험해서, 아마도 이리봉청이 원경릉을 똑똑히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고, 제대로 봤다고 해도, 이리봉청에게 있어서는 36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한 번 스치고 지나간 인연까지 기억할 리 없을 거라 생각했다.이리봉청은 이리 나리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출산 때의 절망과 고통스럽던 기억이 엄습해 와서, 점점 숨을 헐떡거렸다. 물에 빠진 사람이 수면으로 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듯, 목을 길게 빼고 숨을 뱉더니 곧 오열을 터트렸다. 이리봉청의 몸이 허물어지며 급기야 무릎을 꿇고 울며 말했다. “아들아, 저 사람이 널 낳을 때 받아줬단다. 저 사람이 우리 모자의 은인이야.”이리 나리는 순간 복잡한 심경으로 원경릉을 바라봤다.이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원경릉은 천행이를 안고서 어쩔 줄 몰라했다. 정말 뭐라고 변명할 수가 없는 것이 원래는 이리봉청이 실성한 뒤로 그 일은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다. 정신이 돌아왔지만 많은 시간이 지났으며, 당시 맑은 정신이 아니었으므로 그녀는 한바탕 꿈을 꾼 것이라 생각할 줄 알았다.그런데 원경릉이 나타나자마자 이렇게
안풍 친왕비가 한참 있다가 마지못해 한마디 했다. “천문 세가 일을 조사하느라 집에 강호의 술사들이 잔뜩 왔었는데 그 사람들이 얘기한 거야.”이리 나리가 고개를 돌려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제자가 묻겠습니다. 사부님께서 언제부터 이렇게 박학다식해진 것입니까?”“이리율, 너 아주 살기 싫구나? 사부를 가지고 농담을 해?” 안풍 친왕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혼냈다.“아닙니다. 제자가 잘못했어요!” 이리 나리가 웃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어쨌든 방금까지 분위기가 어색했는데 그런 야릇한 화제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다. 원경릉도 안도했다. 당시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 무턱대고 달려 나갔었고, 물론 또 한번 선택한다 해도 원경릉은 뛰쳐나갈 것이었다.이제 다시 처음 화제로 돌아가 복수에 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안지여가 천문 세가 무덤에 불을 질러 유골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려는 것은, 일전에 대사가 말했던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이번에 대사가 안지여에게 36년의 기한이 끝났으므로 성주 부인이 저주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천문 세가의 무덤을 태워 영석의 사악한 기운을 불살라버려야 한다고 했다.최근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소여쌍은 이 36년 동안 매달 며칠씩을 뼈를 깎고 살을 애는 말도 못 할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바로 원래 소여쌍이 낳았던 안지여의 자녀들인데, 지금은 첩이 낳은 것으로 되었다. 본래 안지여는 첩을 들이지 않았으나 성주의 지위를 이을 후계자가 필요한 탓에 결국 두 사람의 첩을 들였다.안지여는 괴로움과 고통에 시달리지 않았지만,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매달 말 못 할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 몇 년뿐이었고, 나중에는 고통으로 일그러져 사람 같지도 않고 귀신도 아니게 변해가는 소여쌍에게 점점 신물이 나서, 두 명의 첩을 총애했다. 따라서 안지여의 지난 세월은 별로 힘들지 않았고, 후반 30년은 순풍에 돛 단 듯 아주 승승장구하며 손에는 대권을
원경릉 할머니가 진맥해 보니, 이리봉청의 몸은 비록 허약하나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어지럼증은 첫날 밤에 마신 안신탕 함량이 너무 높아서 허약해진 몸이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며, 좌우간 무공을 했던 사람이라 좀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다음날, 황제 우문호는 부마 이리율에게 성지를 내려, 사람들을 데리고 풍도성 성주 안지여의 생일을 축하하러 다녀오도록 했다.부마가 데려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면면은 만만치 않았다.늑대파와 홍매문이 총출동했으며, 흑영위와 섬전위도 총출동했다. 여기에 귀영위 1대대는 전원 출동하고, 2대대는 남아서 경성을 지키기로 했다. 이들을 이끄는 훌륭한 장수로는 박원과 소홍천 부부, 서일, 구사, 훼천, 전진, 사촌 소형 등이 있었다.안풍 친왕 부부는 호랑이와 눈 늑대 무리, 이리 나리가 훈련한 회색 늑대 무리를 이끌었고, 보무도 당당하게 풍도성을 향했다.대오의 후미에는 홍엽 공자가 원숭이를 데리고 따르고, 검마가 장검을 등에 지고 천천히 뒤를 따랐다.풍도성은 최근 조정에 바치는 조공이 갈수록 줄었으며, 다소 귀퉁이에 치우쳐 있다는 이유로 땅을 차지한 자가 임자라는 거만한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생일잔치를 앞두고 갑자기 조정에서 부마가 대오를 이끌고 생일을 축하하러 온다는 소식이 들렸으니, 안지여가 경계하는 것도 당연했다.하지만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대군이 움직이는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재야의 어중이떠중이들만 데리고 온다니 안심했다. 경성에서 오는 무리가 진짜 전쟁을 걸어와도 작은 싸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또 그들이 전쟁을 도발했을 경우엔 일단 풍도성에 들어오긴 쉬워도 나가긴 어렵게 되어 있기에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안지여도 안풍 친왕 부부에 대해서는 다소 꺼림칙한 마음이 들어, 곧바로 풍도성의 경계를 강화하고 대군에게 성을 지키며 무장들은 전부 대기 상태로 명을 기다리도록 했다.그리고 안지여는 수년간 강호에 적지 않은 인맥을 맺어 왔기 때문에, 생일잔치 자리에 오는 무림 고수 숫자도 적지
오 선생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늙은이가 가고 난 뒤에 성주님께선 조정에 더 이상 강경한 태도를 보이시면 안 됩니다. 성주님이 패권을 잡고자 하는 야심이 있다는 것을 늙은이도 압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북당은 황제가 바뀌었고 우문호는 무장 출신으로 용병에 능합니다. 그가 보위에 오른 뒤로 주변국이 모두 평정되어 세력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풍도성은 조정과 대적하기 역부족입니다.”오 선생은 이미 열 번도 넘게 이 얘기를 해서 안지여도 못 참을 지경이라 성질을 냈다. “선생, 너무 나약해졌어. 이건 전에 우리 공동의 목표였다고.”오 선생이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 이건 그의 목표였지만, 그건 젊을 때와 장년 오 선생의 얘기일 뿐이었다. 만년에 접어들면서 오 선생의 생각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야심은 아직 있다. 하지만 그럴 힘이 없는 것이, 연로하고 병들어 의지가 꺾이고 말았던 것이다.오 선생이 무겁게 말했다. “성주님, 시간은 저를 기다려 주지 않네요. 우린 이미 최상의 시기를 놓쳐버렸고 우리를 도울 수 있었던 사람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늘 묻고 싶었던 한 가지가 있는데, 만약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다면 성주님은 이리봉청과 천문 세가 사람들을 또 죽이실 겁니까? 천문 세가 사람들이 아직 있다면 우리 패업은 벌써 이루어졌을 겁니다.”안지여는 입술을 꾹 다물고 천천히 하얗게 센 귀밑머리를 쓸어내렸는데, 흰자위가 가득한 눈은 사람들에게 매정하고 포악한 인상을 줬다. 이 문제는 안지여 자신도 마음속으로 수천 수백 번 물은적이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다면 과연 이리봉청을 죽일 수 있을까?’이 문제에 그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고 대답하길 원하지도 않지만, 마음속에 이미 답이 있었다.소여쌍은 이리봉청의 머리카락 한 올에도 못 미쳤다.안지여는 지금 소여쌍의 얼굴을 보면 토하고 싶어졌다.매달 그녀가 고통으로 처절하게 울부짖는 것을 들을 때마다, 죽여 버려서 더 이상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설명해야 했
안지여의 생일잔치에 상인, 인근 주와 현의 관리, 무림 사람들, 강호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안지여는 그동안 사교의 폭이 넓고, 각계각층 인사들과 교분을 맺고 있어 이번에 생일잔치란 이름을 빌려 그들 모두 한자리에 모아 대사를 논의하고자 했다.안지여는 너무 오래 기다려왔다. 전에 시기를 놓치고 이제 우문호가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이때가 대사를 치를 적기였다.우문호가 몇 년 더 북당을 다스리고 나면 그에게 더는 기회가 없을 지도 몰랐다.그래서 조정이 사람을 파견한다는 소식에 그는 기뻤다. 이를 빌미로 조정에 본때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천문 세가의 무덤도 생일잔치 후 태워버릴 계획으로, 물론 완벽한 구실을 붙여 백성들에게 설명할 생각이었다.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온 건, 안지여에게 아주 완벽한 빌미를 제공해 주는 셈이었다. 모든 것을 이리 부마 탓으로 돌리고 백성들에게 조정이 저지른 일이라고 알리면 천문 세가를 그토록 떠받들던 풍도성 백성들은 조정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안지여는 부마 이리율을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그의 내력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거부이자 늑대파 문주라고 했으나 그건 전부 민간에 있을 때 신분에 불과했다. 결국 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되는 길을 택한 이 사람은 극도로 지위와 재산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이런 사람을 다루기 어렵지 않은 건, 안지여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부마 이리율의 마음 저 밑엔 상인이란 출신을 벗어던지고 상류 계층에 들어 후작 세가가 된 후 2~3세대가 지나면 철저하게 이전 상인의 신분을 벗어던질 수 있다는 목표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생일까지 아직 이틀 남았다.안지여는 두번 다시 소여쌍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한번은 가야 했다. 그의 생일잔치에 소여쌍이란 성주 부인이 자리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성주 부부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해서,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허상을 심어주려는 것뿐이었다.소여쌍은 풍도성 동쪽 무쌍거에 살고 있었다. 혼인하던 그해부터
경천은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택란이 말했다."어쩌면 5년 후에는 오늘 한 모든 일이 어리석고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게 될 때, 그 감정이 단순한 사모인지 은혜 때문인지 알게 되실 것이고, 오늘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경천은 단 한 마디만 응한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나 분명하니, 절대 그런 말로 그녀를 얽매여 부담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한 모든 일은 그의 결정이며 그의 태도였다. 그녀는 몰라도 되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를 기다릴 것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택란은 한숨 놓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해한다니 다행입니다.""알고 있다."경천의 얼굴은 약간 창백했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삼 태감이 책자를 가져왔다. 경천은 그것을 택란에게 건넸고, 택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매우 공정했으며, 심지어 약도성에 이익을 양보한 정도였다.책자를 접은 후,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약도성을 생각해 줘서 고맙습니다. 두 나라의 원한을 풀기 위해 애써줘서, 그리고 약도성의 백성과 조정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습니다.""알고 있었던 것이냐?"경천이 다소 놀라며 묻자, 택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알아봤습니다.""오해하지 마라. 그저 너를 위하여 한 일이 아니니,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그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해명했다.택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해하지 마시지요. 저는 정말 부담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오늘도 사실 많이 감동했습니다. 다만, 저는 아직 혼사에 대해 논할 나이가 아니고, 사적인 감정보다는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어리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아바마마
손에 쥐니,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 옥의 차가운 느낌이 서서히 스며들자,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을 때, 그는 미세하게 안도하며, 그녀가 좋아할 것이라 믿었다."직접 만든 것입니까?"택란은 마음에 든 듯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눈동자에는 존경이 가득했다."응!"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드냐?""예. 정말 마음에 듭니다!"택란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빛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그가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이걸 직접 나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느냐?""예?"택란이 잠시 멈칫하며, 놀라 물었다."저에게 준 선물이 아닙니까?"그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소매 주머니에서 또 다른 옥 조각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내가 네게 직접 주고 싶은 것이다."택란은 그가 손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옥질도 동일하게 맑고 투명했고, 손바닥의 선도 보일 정도였는데, 그 조각에는 경천의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옥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준수한 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색은 알 수 없었지만, 자수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기에,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그녀는 두 개의 옥을 손바닥에 놓았다. 그제야 그녀는 옥에 3년 전 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시간을 되돌려 3년 전 만남을 담은 것이었다!경천은 택란을 바라보며,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심장은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올 듯했다.택란이 두 개의 옥을 서둘러 상자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두 개 모두 오라버니께서 먼저 가지고 있으세요."경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건네받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애써 실망이 드리운 눈빛을 숨겼다.삼 태감이 정교한 음식을 올려놓았고, 모두 택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
한편, 안왕과 위왕은 이미 명월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왔기에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몸 전체가 먼지투성이였다.하지만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바로 궁에 들어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혼 연회가 예정보다 앞당겨 열리게 되었다고 했다.그들은 의아해하며 금나라가 막무가내라고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혼례라더니, 이제는 정혼식이라 하고, 심지어 약속했던 날도 지키지 않고 앞당겼으니 말이다.혼사라는 중대사가 이렇게 어린아이 장난처럼 진행될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신부가 북당 사람이니, 그들은 신부의 친정과도 마찬가지였기에 금나라의 일정을 따르며, 금나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것이 맞았다. 다른 나라 사절들이 함께 있었기에, 그들은 무관의 신분으로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친구를 사귀고 주변 무역 문제를 논의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다섯째가 특별히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다른 나라의 사신을 만나면 국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상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라고 말했었다. 장사는 대화로 시작되는 일이니,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면 결국 성사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비록 처음에 다섯째의 이런 태도가 약간 뻔뻔하다고 느꼈었지만, 지난 10여년간 나라 경제가 눈에 띄게 번영했다는 사실을 차마 부인할 수는 없었다.다섯째의 말처럼 경제를 앞서게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한 덕분에, 돈이 끊임없이 북당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들이 다른 나라 신하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황제가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안왕과 위왕은 금나라의 황제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 젊은 황제는 올해 열여덟도 되지 않는 어린 나이라 들었다. 어린 나이에 유명한 진국왕을 몰락시켰으니, 얼마나 대단한 결단력과 꾀를 가졌을까?내시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밝은 황금빛 용포를 입은 젊은 황제가 시위에게 둘러싸여 등장했다.혼례복이 아닌 용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나 혼례를 올리는 것은 아닌 듯했다
세 사람은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그 중, 택란은 베일을 쓴 채 궁에서 준비한 마차에 올랐다.때마침 불이 하나둘씩 밝혀질 시간이라, 거리는 무척 떠들썩했다. 금나라 수도의 번화함은 약도성이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통행금지가 없어, 백성들이 밤늦게까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택란은 마차의 가림막을 살짝 들어 올려 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장사에 열중하는 상인들, 주루나 주막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상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이런 활기 넘치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그러고는 순간 어린 황제를 본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3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은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해졌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3년 사이에 자신도 많은 변화를 겪었으니 말이다. 키도 훤칠해졌고 이제 얼굴도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닌 한층 성숙하고 침착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도성이 지난 몇 년간 겪어온 일들이 많았기에 당연히 성숙해질 수밖에 없었다.한편, 금나라 황궁에서는 이미 정혼 연회의 준비를 마쳤으나, 중요한 두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안왕과 위왕이었다.북당의 두 친왕이 도착해야만 연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한편, 경천 황제는 내내 택란을 만나고 싶어 했다.지난 3년 동안, 그는 그녀와 재회할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3년간 간절히 바랐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들떴지만, 첫 만남은 너무도 중요했다.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생생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그는 사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조정을 되찾아 그녀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물론 지금 그녀는 아직 어리기에, 혼담을 논하기엔 이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