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리 나리는 여전히 고통을 못 느끼는 사람처럼 고집스럽게 이리봉청을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고통은 오히려 이리 나리를 안심시켰다. 지금 이 순간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봉청이 아직 살아있다.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니…!하늘이 불쌍히 여겨 살려두신 것 같았다. 어쩌면 이리 나리 목에 흐르는 선혈을 보고 이리봉청은 조금 정신이 들었다. 미쳐 날뛰던 것이 조금씩 잦아들고 피비린내를 맡자 막연한 의문의 눈빛이 떠올랐다.이리 나라가 천천히 이리봉청을 놔주며 그녀의 얼굴을 한없이 바라봤다. 이리봉청의 눈빛에서 망연자실함을 느끼고 이리 나리는 가슴이 미어졌다. 허리를 숙여 베개를 집어 이리봉청의 품에 두자 이리봉청이 꽉 안고 얼른 달아나 의자에 가서 앉더니 아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 우리 아가!”이리 나리는 천천히 이리봉청 앞에 꿇어앉았다. 이리봉청이 손가락으로 베개를 쓰다듬는 것을 보자 눈물이 다시 앞을 가렸다. 가슴에 비통함을 간신히 누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불렀다. “엄마!”이리봉청이 멈칫했다. 잠깐 정지한 듯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보고 두 손으로 여전히 베개를 꽉 껴안고 놓지 않으면서도 이리 나리의 얼굴을 자꾸 쳐다보며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가 천천히 깨지고 있었다.이리봉청은 떨면서 손을 내밀어 이리 나리의 얼굴을 덮었다. 솟아나는 눈물이 차가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이리봉청의 손등을 타고 흘렀다. 그러자 이리봉청은 손을 거두고 손등의 눈물을 한없이 바라봤다.“아가?” 이리봉청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의구심이 든 탓에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앉은 자세를 바로 하고는 베개가 스르륵 무릎에서 떨어져도 신경 쓰지 않고 자세히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는 눈물을 머금으며 방긋 웃어 보였다. 이리봉청이 자기 얼굴을 매만지는 손을 잡고 목이 메어 거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저 입니다..!”이리봉청이 두 손바닥을 위로 하고 천천히 펼치더니 뭔가를 껴안는 동작을 취하
이리나리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안 아픕니다!”그제서야 이리봉청이 안도하며 부끄러운 듯 가볍게 웃었다.이리 나리는 이리봉청의 마음이 풀린듯 싶어 시험 삼아 이리봉청의 베개를 가져갔는데, 바로 적의가 가득해지며 이리 나리의 손을 뿌리치더니 얼굴빛이 다시금 냉정해졌다.이리 나리가 살짝 한숨을 쉬더니 일어나서 이리봉청을 깊이 들여다보고 우문호와 원경릉 쪽으로 갔다.세 사람은 산바람이 꽤 거센 쪽에 있어서 옷이 날리며 펄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리 나리는 여전히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원경릉에게 물었다. “광증에 걸렸는데 낫게 할 수 있습니까?”원경릉이 대답했다. “천천히 해도 돼요. 서두르지 말고.”“어찌 됐든 낫게 해주시오.” 이리 나리가 굳은 눈빛으로 원경릉을 바라봤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겁니다. 어떤 방법을 쓰든 낫게 해주세요.”원경릉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반드시 최선을 다할 겁니다.”이리 나리가 그제서야 조금 안도한 듯 했다. “예, 그럼 전 이제 그녀를 데리고 하산하겠습니다!”원경릉이 이리 나리 손을 붙들었다. “아니요, 우선 하산하지 마세요.”이리 나리가 미간을 찡그렸다. “산꼭대기에 남겨 둘 수 없어요. 반드시 데리고 내려갈 겁니다.”“사부님, 제 말 들으세요.” 원경릉이 우문호에게 눈짓했다. “자기는 먼저 늑대파 사람을 전부 철수 시켜줘. 적어도 여기 남아있으면 안 돼. 여기는 원래대로 보존해 주고.”우문호은 원경릉이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둘이 마저 얘기나눠.”우문호가 내려가며 멸지를 한쪽으로 끌고 가 몇 마디 상의했다.이리 나리는 의혹의 눈길로 원경릉을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원경릉은 손수건을 꺼내 이리 나리에게 건넸다. “목에 피부터 닦고 얘기 해요.”이리 나리가 손수건을 받아 대충 닦더니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원경릉을 바라봤다. “아시다시피 뭐라고 하시든 전 그녀를 여기 혼자 남겨 두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집이 있으니까요.”“알아요,
더 과거로 돌아가 상상해 보자 성루에 매달린 여동생의 시체를 보고 가슴이 얼마나 미어졌을까 싶었다. 이리 나리는 도망가는 길에 일가가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 무슨 힘으로 풍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지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전에 한때는 행복한 사람이라 믿었고, 자신을 깊이 사랑하며 깊이 사랑하는 부군 또한 곁에 있었다.그녀의 가녀린 어깨에 어째서 이 모든 짐이 지워진 것일까?이제와 복수를 한다 한들 이리 나리가 만족할 수 있을까?설령 이리봉청이 36년간 고통받는 게 운명이라고 쳐도, 어찌 연놈들이 36년의 값을 치르게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이전에 이리 나리 인생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상태였다면, 지금은 이리봉청이 곁에 있다. 이리봉청은 3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궂은 비와 찬바람에 자신을 내맡기며 혼자 견뎌왔다. 죄업이 하늘을 찌르는 인간들은 당연히 치러야 할 대가를 치러야 마땅했다.이리 나리가 원경릉에게 침착하게 말했다. “계획을 말해 보시지요.”원경릉은 배수의 진을 치고 굳은 각오로 말했다. “스승님 어머니와 배기가 저주를 옮기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걸 저와 주지 스님이 알게 되었어요. 그때 어머님이 주지 스님께 영석을 깨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주지 스님이 깨트리지 못했죠. 전 36년 전으로 돌아가서 직접 영석을 깰 거예요.”“36년 전으로 돌아간다고요? 만약 영석을 깬다고 해도 국면이 어떻게 바뀌죠?” 이리 나리가 경악했다.“영석의 힘의 일부가 소여쌍의 몸에 남아 있어요. 소여쌍의 몸에 남은 일부 능력은 영석이란 몸체가 없으므로 견디기 힘들어서 소여쌍은 살을 에고 뼈를 깎는 고통을 당하게 되죠.”이리 나리는 마치 물밑에서 공기가 새어 나오듯 원경릉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정말입니까?”“주지 스님의 말에 따르면 확실히 그렇다고 해요.”“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요?”“약간의 위험이 따르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아요.” 원경릉이 가볍게 말했다.하지만 사실 36년 전으로 돌아가는 건 리스크가 적지 않았다. 애초에 여기저기 이
원경릉과 우문호은 일단 산에서 내려왔다. 방안이 정해졌으니 원경릉은 최대한 빠른 해결을 위해 얼른 돌아가 안풍 친왕비와 상의하고 싶었다. 안풍 친왕비는 시간을 왕래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원경릉은 이번 일의 위험 정도에 대해 우문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반드시 자신이 대처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우문호는 뭐라고 입장을 표하기에 애매했다. 본인이 위험한 거면 두말하지 않고 갈 게 틀림없지겠만 이런 상황은 낯설었다. 게다가 본인이 돕지도 못하기에, 그저 두 눈 멀쩡히 뜨고 원 선생이 위험을 무릅쓰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원경릉이 우문호 손을 잡고 위로했다. “우리가 그동안 돌파해 온 난관이 어디 좀 컸어? 이건 사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냐. 그리고 안풍 친왕비께서도 도우신대. 안풍 친왕 부부께서 현대랑 여기를 얼마나 빈번하게 왔다 갔다 하셨는지 알지? 분명 요령을 파악하고 계실 테니까 안심해.”우문호 본인도 생각해 봤는데, 원 선생을 못 가게 하면 이 일로 괴로워할 게 분명했다. 비단 원 선생뿐 아니라 이 일을 아는 사람이면 모두 괴로워할 것으로, 그 또한 생각만 하면 화가 치밀어 오르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안지여를 잘근잘근 씹어먹어도 풀리지 않을 정도이다. “기왕 당신이 정한거니 가도록 해. 하지만, 이 모든 건 당신의 안전을 전제로 했을 때야. 정말 위험하면 안돼. 우겨도 소용없어!”원경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혹시라도 위험하다면 우기지 않을게. 절대 억지로 강행하지도 않기로!”우문호가 원경릉에게 속삭였다. “당신이 성공하고 돌아오길 기다릴게…!”시원한 바람이 두 사람의 옷자락을 날리며 눈늑대봉은 점점 뒤로 멀어져 갔다.원경릉은 바로 숙왕부로 안풍 친왕비를 찾아갔다. 이리봉청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주지 스님이 방법을 알려준 것을 얘기하며 협조를 구했다.안풍 친왕비는 이리봉청이 죽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상상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가슴 아픈 것보다 기쁨이 앞섰다. “이리율 인생에 있어 늘 한 가지 미
안풍 친왕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맞아 그들이 다 현대로 갔으니, 우리가 몸을 빼는 데 성공했던 거야. 그리고 일부 봉쇄가 풀려서 시공은 마음대로 오갈 수 있어. 36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고 50년 전 적성루로 그들을 보러 갈 수도, 심지어는 작년, 재작년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심지어 너랑 내가 얘기하는 지금 사방을 잘 살펴보면 미래의 내가 어딘 가에 숨어서 보고 있을지도 모르지.”원경릉은 그런 생각이 들자 오싹해졌다. “그건 마마께서….”왕비가 웃으며 원경릉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너 지금 내가 이미 그들의 죽음을 겪은 뒤에 시간을 넘어 그들이 아직 죽지 않은 지금으로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마마께서 전에 그렇게 오래 실종되셨다가 갑자기 다시 나타나셨으니….” 원경릉은 여기까지 상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안풍 친왕비는 차를 들고 그윽한 눈빛으로 원경릉을 바라봤다. “아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런 상황이 반드시 생기겠지. 난 그들을 떼놓지 못해. 평생 동안.”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실 자신을 속박하는 굴레가 있다. 아무리 안풍 친왕비일지라도 예외는 없었다.안풍 친왕비가 한마디 했다. “앞으로 네 황조부 일행이 다 가면 너도 그렇게 될 거야. 뻔질나게 경호를 통해 돌아가서 그들을 살필걸. 어딘가 숨어서 몰래 흘끔 보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정 떼는 게 말이 쉽지, 막상 다가오면 어렵단다.”원경릉의 눈시울이 금새 빨개졌다.원경릉은 이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언젠간 결국 생길 일이며 시간은 조금씩 앞으로 가고 모든 사람은 다 그날을 맞기 마련일 것이다. 안풍 친왕비 말이 맞다. 정 떼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거의 모든 사람은 이미 가버린 사람을 보러 돌아갈 수 없지만 넌 그런 능력이 있으니 감사해야해.” 안풍 친왕비가 일어나 원경릉의 어깨를 토닥였다. “돌아가 봐, 준비 잘하고 내일 경호로 가자. 36년 전으로 돌아가 그때의 이리봉청을 살펴봐야지!”원경릉은 마음이 상당이 무거워졌다.사실 원경릉은 앞으로
경호에 도착한 안풍 친왕은 전서구가 가져온 서신을 읽자마자 낫빛이 어두워졌다. 안풍 친왕비가 이것을 보고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서신을 건네는 안풍 친왕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봐 봐!”안풍 친왕비가 펼쳐 보니 아주 작은 글씨로 몇 줄만 적혀 있는 게 급하게 상황을 보고한 모양이었다. 안풍 친왕비는 다 읽고 크게 화를 냈다. “안지여, 이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옆에 있던 원경릉도 가슴이 철렁해져 얼른 봤다. 다 읽고 나자 그녀 역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서신에서는 어떤 대사가 안지여에게 서산의 천문 세가의 묘에 불을 질러 싹 없애면 올해 풍도성에 수해가 닥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과거에 천문 세가 사람이 전부 죽임을 당하던 때 안지여는 사람들의 책망을 받지 않기 위해 가주 신분으로 그들의 시체를 거둬 매장했었다. 자기가 떼죽음을 시켜놓은 것인데, 마치 선행을 베푸는 양 날조했다. 그들을 매장한 지 36년이 된 마당에 갑자기 지금 와서 유골을 몽땅 불태우겠다니..말 그대로 죽은 자의 뼈를 가루로 갈아버리겠다는 것인지, 화가 날 만했다. 이 쓰레기 같은 안지여는 18층 지옥 맨 밑바닥에 떨어뜨려도 분이 안 풀릴 것이다. 이때 안풍 친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섬전위가 그저께 보고했을 때 안지여가 사람을 불러 점을 쳤는데 36년 전 뿌린 죄업의 대가를 올해 받는다며, 안 씨 집안은 인과응보를 받을 거라고 했다는군. 안지여가 천문 세가의 무덤을 불태우는 건 아마 이 죄업을 피하고 싶어서겠지.”안풍 친왕비가 차갑게 말했다. “하늘이 아무리 무심해도 그렇지, 안지여 같이 털끝만치도 양심도 없는 놈을 가만둘 리가 없어요. 그 대사라는 인간이 점은 제대로 맞췄네요. 확실히 그때의 인과응보를 받을 겁니다.”안풍 친왕비가 원경릉을 돌아보는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네가 돌아오면 이리율이 직접 풍도성에 가서 그들을 결판낼 거야. 넌 반드시 성공해야 해. 네가 성공하지 못하면 안지여 놈을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아
안풍 친왕은 자지 않고 계속 경호를 주시했다. 소용돌이가 변화하는 규칙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는데, 바로 판별할 수 있는 소용돌이도 있었지만, 36년 전인지 확신할 수 없거나 36년 전인 건 알아도 이리봉청이 눈늑대봉에 올라간 시간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알 수 없었다. 이리봉청이 눈늑대봉에 가기 전이면 그나마 기다릴 수는 있지만, 늦었을 경우엔 도로 아미타불로 경호로 돌아와서 다시 시간 이동을 해야 했다.이건 미래로 가는 것과 달랐다. 미래 영상에는 가끔 시간을 볼 수 있으며, 이곳에서 미래를 보면 소용돌이의 변화가 그다지 빠르지 않고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소용돌이도 이렇게 인간 친화적이니 창조주께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원경릉은 도장에 머물면서 안풍 친왕비와 그다지 한담을 나누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어서 과거로 돌아가 영석을 깨트리고 싶을 뿐, 하루가 늦어지니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게 일이 잘못되는 건 아닌가 불안했다.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원경릉도 직접 경호 호숫가에 엎드려서 안풍 친왕과 같이 소용돌이를 봤다.안풍 친왕 눈이 충혈된 것이 밤새 못 잔 게 확연해 보였다. 검은 옷은 입은 사람들이 곁에 있는 데 수십 년을 따라다녀도 경호의 기현상을 볼 수 없으니 도울 수 없었다. 가끔 차나 가져다주고 물을 따라주기만 할 뿐이었다.그래도 누군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그들에게는 힘이 됐다. 이것이 안풍 친왕 부부가 지금까지 이들을 떼버리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이때 인풍 친왕이 자신은 보는 걸 책임지고 원경릉이 계산을 담당하자며 제안을 했다. 소용돌이가 변할 때 광경이 변하는데 속도가 하도 빠른 탓에 원경릉이 소용돌이 광경의 변화 속도 및 소용돌이의 각도를 계산하는 것이 더 나았다. 원경릉은 계산에 능통해, 이틀간 계속된 관찰 끝에 마침내 소용돌이의 루트를 집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며칠로 돌아가는지는 확정할 수 없어기에 그 부분은 운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소용돌이 변화는 1분에서 심하면 몇십 초 만에 일어나기 때문에 정확
원경릉은 해가 뜨기도 전에 눈늑대봉 득랑요에 도착할 것 같아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어쨌든 대낮이어야 정확하게 볼 수 있으므로 원경릉은 서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해가 뜬 뒤 비상식량과 두꺼운 옷을 좀 산 뒤 독랑요로 올라갔다. 시간을 앞당겨 왔으면 원경릉은 독랑요에서 며칠간 잠복하고 있어야 해서 비상식량이 필요했다.독랑요에 도착하니 날씨가 심하게 추웠다. 원경릉은 후각이 굉장히 민감한 상태라 피비린내가 날 경우 맡을 수 있었다.원경릉은 이리봉청이 출산한 곳에 앉았다. 하지만 이곳은 눈만 하얗게 덮여있었을 뿐, 피냄새는 나지 않았다. 확실하게 확인하고자 원경릉은 아래로 한 층을 파 보았는데, 혈액으로 오염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리봉청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원래 계획대로 원경릉은 이곳에서 잠복해야 한다. 며칠이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니 왔다갔다 할 수가 없었다. 만약 다시 온다고 해도 시간이 지금보다 더 정확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원경릉은 산 아래서 잠복하고 있을까도 생각했으나 산 아래는 보초병들이 있어 눈에 띄지 않으려면 이리봉청은 큰길로 올 리 없었다. 원경릉도 속도가 매우 빨라 보초병의 주의를 끌지 않았기에 몰래 올라올 수 있었다. 어차피 이리봉청이 어디로 올라올지 모르니 여기서 잠복하고 있는 게 만에 하나 실수하지 않는 길이었다.날씨는 정말 추웠다. 원경릉이 북당에 온 지 꽤 됐지만 이렇게 추운 겨울은 처음이었다. 산꼭대기는 기온이 더욱 낮아서 사 온 두꺼운 옷도 찬 기운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찬 바람을 막아주고 오는 사람을 숨어서 볼 수 있는 곳을 찾는게 시급했다.원경릉은 최대한 멀리까지 내다보았지만, 온통 흰 설원을 반나절이나 보고 있자니 마음이 더 초조해질 뿐이였다.원경릉이 이렇게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며칠 밤을 새우고 잠이 부족한 데다 비극이 일어난 바로 그해에 와 있다는 생각에 초조한 마음이 든 것 같았다. ‘오늘 풍도성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을까, 천문 세가가 다 죽임을 당한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