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우문호우문호는 반쯤 쪼그리고 앉아서 원경릉의 배에 귀를 대고 아이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말했다. “난 아이가 태어나는 걸 간절히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딸이라면 정말 더는 바랄 게 없을 거야.”아이가 뱃속에서 몇 번 꼼지락거렸는데 마치 우문호의 말에 대답하는 것 같아서 우문호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여자아이가 틀림없어, 딸이 그렇데.”“응, 나도 얘가 자기의 꼬마 행복이 같아.” 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우문호가 바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꼬마 행복이란 이름이 별로 안 좋은 거 같아. 공주님한테 안 어울려.”“어? 이제서?” 원경릉이 웃음을 터트리며 눈을 반짝였다.“아이가 태어난 후 이름 지을 때는 할머니께 맡기는 게 어때?” 우문호가 제안했다.원경릉도 마침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였는데 우문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니 정말 딱이였다.밤바람이 아직 좀 차서 두 사람은 잠시 얘기하다가 바로 소월각으로 돌아갔다.기라가 방에 붉은 초를 밝혀 두어 방안은 희끄무레했고,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우문호의 약이 탁자에 놓여 있었다. 이 약은 할머니가 제조하신 것으로 특별히 기라에게 달이도록 해 우문호에게 먹고 자라고 했다.이 약은 상처를 치료하는 약이 아닌 보약으로 숙면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할머니께서 고심해서 만들어 주신 약이지만 쓴 걸 못 먹는 우문호는 코를 막고 먹었다. 다 마신 후 흠칫 놀라며 원경릉에게 말했다. “좀 다네, 이거.”“자기가 쓴 걸 못 먹는 걸 아시고 처방에 신경 써 주신 거야.” 원경릉이 손수건으로 우문호의 입가를 닦아주었다.“할머니께서 날 예뻐 하시네.” 우문호가 으쓱했다.“자기를 안 예뻐 하면 누굴 예뻐 해? 손자 사위라고는 자기 하난데!” 원경릉이 웃으며 핀잔을 줬다.“그럼 나도 당신한테 더 잘하고 할머니께도 더 잘해야 이렇게 잘해 주신 것에 보답이 되겠는 걸.” 우문호가 원경릉을 마주봤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뒤로 원경릉과 같이 있는 매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아무 말
경호로출발하기 전에 아이들의 능력을 한번 살펴본 주진이 원경릉에게 말했다. “아이들의 이런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 이제 시시콜콜 따지지 마세요. 이 망망한 우주에 못 할 게 뭐가 있어요?”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뭘 우주까지 끌어다 붙여?”주진은 오히려 웃음기 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끌어다 붙이긴요. 그럼 제가 질문 하나 할게요. 우주에 대체 뭐가 있나요?”원경릉이 당황하며 답했다. “우주에? 행성, 물질, 그리고 에너지가 있지.”“맞아요, 에너지! 우주의 에너지도 사람에 의해 가져다 쓸 수 있다는 게 제 관점이에요. 소위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신학이란 건, 초능력을 가진 신선 같지만 사실 그들은 단지 우주의 에너지를 가져다 쓸 뿐이에요.”우문호는 옆에서 듣다가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가 출타 준비나 하러 나갔다.이번 출타는 경호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떡들과 쌍둥이를 데려가야 했다. 온가족이 여행을 떠나지만 관아 일이 바쁘고 진료도 가야 해서 하루라도 환자들을 떠날 수 없기에 할머니는 함께 하지 못한다. 보무는 함께 경호로 출발했다.요즘 눈부신 햇살과 잔잔한 바람이 불어 날씨가 꽤 좋아 그들의 기분은 덩달이 좋아졌다. 원경주도 가는 길에 고대의 생활을 체험해야 해 처음에는 마음에 근심으로 가득찼지만 지금은 모든 것에 호기심이 가득했다.“역사를 읽은 것이랑 역사 속으로 들어간느 것은 정말 천지 차이구나!” 원경주가 원경릉에게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원경릉처럼 이렇게 긍정적인 성격이나 이곳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지, 자기 같은 사람은 전자제품이 하나라도 없으면 바로 돌아버릴 게 틀림없었다.원경주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한 편이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게임을 하기 시작했고 게임과 원경주의 전공은 전혀 맞지 않는 듯 싶지만 오히려 사람은 이렇게 전혀 상반된 체험이 필요했다. “공기가 진짜 좋네!” 원경릉이 웃으며 외쳤다.“맞아, 정말 좋아.” 원경주는 왼손에 경단이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만두를 잡
경호 소용돌이의 비밀원경릉이 살짝 놀라며 물었다. “익숙하다고? 어디서 봤어? 현대에도 이런 호수가 있었던 거 아니야?”주진이 한참을 소용돌이가 있는 궤적을 들여다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호수가 아니예요. 자세히 보세요. 두개의 블랙홀이 마치 합쳐지는 것 같지 않아요? 소용돌이 주변에 있는 물질들은 계속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데 아무것도 다시 나오지는 않잖아요.”원경릉은 주진의 얘기를 듣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정말 아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호가 우주라면 두개의 블랙혹이 천천히 서로 다가가 합쳐지며 결국 어떤게 어떤 걸 삼킨 건지 모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합쳐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각자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떨어졌는데 이것은 두개의 소용돌이가 부딪혀서 합쳐지는 과정에서 질량이 전혀 손실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질량의 손실이 있다면 이렇게 다시 분열할 수 없기 때문이다.주진은 순간 전에 양여혜가 얘기했던 시공간의 왜곡을 떠올렸다. 시공간의 왜곡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양여혜는 알지 못했으나 만약 블랙홀이 합쳐지며 발생한 인력이 변화를 일으킨 거라면, 이런 인력이 지구에 영향을 미쳐 시공간의 왜곡을 가져올 가능성도 존재했다.주진은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지금 나타난 이상 현상은 일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당장은 심도 깊은 연구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원경릉의 지난 관찰 결과와 지금 진행된 변화에 근거해 추측하는 수밖에 없기에 법칙성을 찾아내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주진은 호숫가에 엎드려 소용돌이를 하나하나 살피며 모든 소용돌이가 전부 곁에 있는 소용돌이와 만났다가 분열됐다가 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 질량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으며 크기도 합쳐 지기 전과 다르지 않았다. 즉, 만유인력이 단기간의 왜곡을 야기해도 결과적으로는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마치 그들이 처음에 왔을 때 사소한 사고가 있었지만 결국엔 모두 돌아올 수 있었던 것과 같다.주진이 말했다. “전 돌아가서 천문데이터를 결부
만불산의 여유주진이 말했다. “편차가 클 리 없어요. 어떨 땐 며칠 차이, 길어 봤자 몇 개월 차이겠죠. 수정을 거듭해서 우리가 다음 번에 소용돌이에 인형을 던질 때 약간의 시간 편차를 둡시다. 예를 들어 선배가 자시에 물건을 던졌다면 편차를 계산해서 우리가 자시 15분으로 추정하는 거예요. 이렇게 편차가 줄어들게 하는 거죠!”“그래, 네가 돌아가면 함께 테스트 해보자!” 원경릉도 희망이 조금은 있다는 것을 느끼고 기쁨과 기대가 가득 차올랐다.“안타까운 건 인형이 처음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는 거지만요.” 주진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원경릉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오히려 방법이 있을 거 같은데? 너가 돌아가면, 나한테 소형카메라를 던지고, 그게 후에 네 손에 들어가면 열어서 보면 되잖아. 어쩌면 실마리를 찾아낼 지도 몰라.”주진이 아주 환호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할 일을 다 끝내기에 모두 산에서 반나절을 놀았다. 아이들은 이렇게 완전하게 나가 노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아주 좋아서 난리가 나 보였다. 온 산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눈늑대와 호랑이도 덩달아 흥분해서 함께 몰려다니니 그림자조차 안 보일 지경이었다.어른들은 산기슭을 걸으며 담소를 나누었고, 원경주는 휴가를 온 마음으로 수려한 만불산의 경치를 만끽했다. 이 중 가장 행복한 건 동생이 곁이 있다는 점이었다.속세를 벗어난 듯한 이곳은,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비쳐 드는 햇살에 세월의 고즈넉함이 담긴 듯 했다. 우문호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돌려 원경주와 얘기하는 원경릉을 바라봤다. 그녀의 아리따운 얼굴은 요 근래 정신없는 일정을 보내느라 다소 수척해졌지만 오히려 눈매가 더욱 선명해 보였는데, 특히 반짝이는 눈동자는 가늘어 마치 햇살과도 같았다. 가족과 함께 있다는 것이 원경릉을 이토록 기쁘게 했다. 한편, 우문호는 마음 속 깊이 행복함과 함께 서글픔이 밀려왔다. 전에는 먼 미래의 일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없었지만, 생사의 고비를 넘고 보니 이렇게 순탄하게 그녀와 손
오빠와의 이별만불산에서 돌아오자마자 원경주와 주진은 다시 가야 했다. 하지만 이번 이별은 그렇게 가슴 아프지 않은 게 주진과 원경주는 경호가 곧 열려서 원경릉과 아이들이 친정에 다녀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경주는 떠나기 전에 우문호에게 할머니와 원경릉을 잘 보살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자신의 처남이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게 이해가 가는 우문호도 절대로 두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확답을 주었다.원경주는 그제서야 안심하고는 원경릉의 어깨를 쓸어 내리고 그윽하게 바라보며 속삭였다. “우리 금방 다시 볼 수 있어. 내가 돌아가서 도와줄 사람을 무조건 찾을게. 이제 네가 가진 데이터와 주진이 발견한게 있으니 경호의 비밀은 금방 풀릴거야. 나는 네가 지금까지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포기하지 않아줘서 너무 고마워. 넌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이야. 인류에게 있어서 이건 기적과 같아.”원경릉이 눈물이 그렁그렁하더니 미련이 가득한 말투로 답했다. “집에 간다는 생각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는데 당연히 포기 못하죠..”“대단해!” 원경주가 동생을 안고 다음에 할머니를 안고나서야 손을 흔들며 모두와 작별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주진과 함께 갔다.할머니는 옆에서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여기서 당연히 잘 지내지만 그쪽 세계의 친구와 가족들이 가끔 그립기도 했다. 경호의 비밀이 풀리면 그 세계에 돌아가 볼 수 있으니, 그녀가 비밀이 당장이라도 풀리기를 얼마나 기대하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원경릉도 눈물을 흘리자 우문호가 원경릉을 품에 안고 작게 속삭였다. “괴로워 하지 마. 처남 말 대로 우리는 금방 만날 수 있게 될테니까.”원경릉이 코맹맹이 소리로 “네.”하고 답했다.우문호는 원경릉이 괜히 싱숭생숭해 하지 않도록 돌아가서 일을 하지 않고 초왕부에서 원경릉과 함께했다. 우문호는 시공간이란 개념에 대해 인식이 아직은 모호해서 원경릉 곁에 서 얘기를 듣고 있으면 아직도 멍해진다. 하지만 그는 줄곧 한가지
주명취를 떠올리고원경릉이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우문호가 원경릉에게 말했다. “오해는 하지 마. 지금 뭘 하려는 게 아니라 일깨워주고 싶을 뿐이니까. 절대로 속지 말라고, 주명취에게 조금의 호감도 가져서는 안된다고 말이야. 주명취와 어릴 때부터 죽마고우였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답답한 게 구역질이 나.”원경릉은 그럴 거라고 생각 못했는데 우문호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진짜 속속들이 싫은 기색이 역력해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그래? 그럴 필요 없어. 지금 알면 됐지. 사람은 어짜피 다 죽는 걸. 됐어.”“맞아, 사람은 다 죽어. 그러니 됐다고 치는 수밖에.” 우문호가 ‘치는 수밖에’ 라는 말을 강조하는 게 역시 분이 안 풀리는지 조금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주명취가 나랑 일곱째를 속였고, 그때 하마터면 일곱째가 그 손에 죽을 뻔 했다고. 심지어는 당신이랑 우리 아이를 죽이려고 까지 했어. 그런데도 난 그저 됐다고 치는 수밖에 없는 거야. 주명취는 이미 죽었으니까.”씩씩거리며 여전히 분이 안 풀리는 목소리였다.그는 어엿한 태자로 죽은 사람한테 뭘 어쩌자는 건 절대 아니였다.그리고 주명취는 이미 치를 수 있는 최고의 대가를 치렀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하지만 우문호는 계속 죽음이 가장 큰 대가가 아니라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정말로 그렇게 주명취가 미워?” 원경릉은 원래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게 연기처럼 사라진다고 생각하기에 우문호가 지금도 주명취를 뼈 속 깊이 증오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우문호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뗐다. “미워하냐 마냐는 정말 말할것도 없지만, 나는 단지 한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악행을 저지르며 여러 명의 목숨을 없애기 위해 기도하고 실행하려 했다는게 믿겨지지가 않아. 비록 성공은 못했지만 이런 극악무도한 마음을 품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했으니 말이야. 난 그 자식 손에 당한 사람의 목숨이 훨씬 크고 귀할 뿐이야.
대군이 조정으로 돌아오기 전에 다친 장수가 먼저 경성에 도착했다.이때 홍엽이 직접 안왕을 호위했다. 이 둘은 원래 각자 흉계를 품고 칼을 겨누던 사이였는데, 어느 날 둘이 북당을 지키기 위해 함께 전장에 설 거라고 감히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위왕과 순왕은 대오를 이끌고 삼대 거두의 귀환을 호위했다. 병사 10만명은 변경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전부 경성으로 돌아갔다.안왕이 경성으로 돌아올 무렵 안 왕비는 그가 한 쪽 팔을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홍엽이 안왕을 호송해 오는 일정을 안 왕비에게 알려주었기에 그가 경성에 도착했을 때, 안 왕비가 딸 안지군주를 데리고 성문으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떨어지는 석양빛이 안 왕비의 얼굴에서 흘리는 눈물에 어렸다. 그녀는 입술이 바르르 떠는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말 탄 일행이 성문에 도착하는 것을 주시했다.안 왕비는 안지를 품에 안고 마차에서 안왕이 오기만을 기다렸다.안왕은 이제 상처에 별 문제가 없었으며 왕비가 성문에 마중나와 있는 것을 보자 허겁지겁 얼굴에 난 수염을 문지르더니 먼 발치에서부터 미소를 머금고 말을 타고 왔다. 안왕은 왕비를 한참 바라보고는 비로소 말에서 내려 서둘러 달려갔다.그는 먼저 안지를 껴안았다. 안지는 잠에 들었다가 놀라서 깨더니 멍한 표정으로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이내 다시 잠에 들었다. 안왕이 고개를 숙여 안지의 볼에 뽀뽀하니 턱수염때문에 따끔거렸는지 부르르 떨고 그의 얼굴을 또 빤히 쳐다보고는 입을 삐죽 내밀고 다시 잠에 들었다.그러자 안왕이 웃으며 안지를 유모에게 안겨주고는 안 왕비를 바라보며 목멘 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돌아왔어!”안 왕비는 안왕의 텅 빈 소맷자락을 보지 않고 오로지 안왕의 얼굴에만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참아왔던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네, 잘 돌아오셨어요. 당신이 정말 자랑스럽사옵니다!”안왕이 한 손으로 안 왕비를 안자, 안 왕비는 코 끝이 찡해졌다. 안왕의 몸에는 전화와 노숙의 냄새가 베어 있었다. 두 손
우문호는 말을 마치고 모두를 데리고 나갔다.홍엽은 눈을 내리깔고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고작 이러고 가버린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을 술자리에 청할 때 성의를 보이려면 적어도 몇 번은 권해야 하는 거 아닌가?잠시 후 대문이 다시 열리고 냉정언이 문 앞에 서서 쓸쓸한 눈빛으로 홍엽을 보고 말했다. “진짜 안 올 겁니까?”홍엽이 구유를 걷어차며 말했다. “잠시만요. 지금 옷만 갈아입고 가겠사옵니다!”우문호가 항복 주루에 마련한 술자리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조정대신이 사람을 아예 부르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는 홍엽이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있는 걸 어색해하기 때문으로 술자리에 함께 한 사람은 전부 홍엽이 낯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가 이번에 직접 전장에 나간 것에 대한 답례기도 했다.홍엽은 늦게 달아오르는 타입이라 처음엔 어색하게 굴었지만 다들 전장에서 일들을 얘기하며 술이 몇 순배 돌자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냉정언은 아무 말도 안 하고 무표정으로 조용히 듣기만 하며 다른 사람들 잔을 채워주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을 들을 때는 냉정언도 긴장하고 마는 게 마지막엔 승리한다는 걸 알면서도 과정이 정말 무시무시하기 때문이다. 홍엽이 결국 마지막엔 말이 제일 많은 사람이 되어서 안왕에 대해 바삐 얘기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안왕을 경성까지 호송해 왔기 때문이었다.그때 홍엽이 우물쭈물하며 우문호에게 말했다. “이 말을 해도 되는지 잘 모르겠는데…”우문호는 이미 술이 세 순배정도 돈 이후라 얼큰하게 취해서 손을 휘휘 저었다. “계집애처럼 왜 그러느냐. 할 말 있으면 하거라.”그러자 홍엽이 우문호에게 말했다. “사실, 저와 진대장군이 같이 안왕 전하를 만난 적이 있는데, 당시 안왕 전하는 분명 외세의 힘을 빌려 태자의 지위를 빼앗으려 하셨사옵니다. 그런데 결국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사옵니다. 혹시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왜죠?” 홍엽이 갑자기 이런 심각한 문제를 거론하자 모두 자기도 모르게 조용히 홍엽을 쳐다봤다.홍엽이 잔을
우문호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확 어두워지며 깜짝 놀랐다.“청혼? 누가 청혼을 한 것이오? 미친 것이오? 겨우 여덟 살인데!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런 짓을……”그는 너무 충격을 받아 분노가 치밀었다. 겨우 여덟 살인 딸을 누군가 눈독을 들이고, 심지어 청혼까지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는 그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반드시 혼쭐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원경릉이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미 택란의 비밀을 다 털어놨으니, 이제 더 이상 나한테 화내면 안 되오.”“말하시오. 용서할 테니 더 말하시오!”우문호는 더 이상 원경릉에게 화를 낼 힘도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심하게 화가 난 것도 아니었고, 복잡한 감정만이 뒤섞여 답답할 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들도 모두 사라지고, 이 터무니없는 사건이 더 중요해졌다.원경릉은 택란이 금나라에 가서 10만 냥을 얻은 전말을 설명했다. 특히 금나라의 어린 황제가 그녀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털어놓았다. 단 한 글자도 숨기지 않고 진실만 말했다.우문호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그건 너무 대담하잖소! 금나라에서 10만 냥을 빼앗았다니? 어찌 이야기가 이렇게 익숙한 것이오? 그래, 기화요! 어찌 스승이 이런 짓을 가르친 것이오? 그리고 그 금나라의 어린 황제는 이제 몇 살이오? 듣자 하니 겨우 열 살이라고……”“열셋이오. 금나라의 진국왕이 그의 권력을 누르려, 일부러 열 살이라고 소문낸 것이오.”우문호는 벌떡 일어나 뒷짐을 지고 방을 빙빙 돌며 어쩔줄 몰라했다. “열다섯이라도 안 되네! 금나라가 북당의 경성에서 얼마나 먼지 알고 있소? 아이가 그곳에 시집가면 1년에 한 번도 못 돌아올 것이네. 북당의 진국 공주를 부인으로 삼겠다니? 허망 된 꿈이요! 꿈!”“아이들의 농일 뿐이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네.”원경릉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농담이라도 안 되네. 황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귀한 딸을 부인으로 삼겠다니? 이런 녀석은 앞
목여 태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문호에게 말했다.“폐하, 공주를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공주께서는 단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한 것 뿐입니다. 큰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안왕과 위왕도 그곳에 있었고,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잖습니까?”우문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택란이 자네에게는 과자 한 조각을 주었지만, 나한테는 안 주더군.”택란은 그 말을 듣고 재빨리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아버지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환심을 사려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드셔 보세요. 이건 그렇게 달지 않은 생강 과자인데, 정말 맛있습니다!”생강 과자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딸의 귀엽고 앙증맞은 얼굴을 보니 어떻게 밀쳐낼 수 있겠는가? 화가 난 상태였지만 결국 한입 물었고 생강과 설탕의 맛이 입안에 퍼졌고, 딸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니 얼굴에 굳었던 표정이 풀어졌다.“나도 먹고 싶은데.”원경릉이 가볍게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아 턱을 괴고 물었다.“다섯째야, 맛있느냐?”우문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무시했다. 그녀가 스스로 만든 규정을 어겼으니, 좋은 표정을 지을 마음이 없었다.원경릉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택란아, 나한테도 한 조각 줘 보거라!”택란은 다시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엄마의 입가에 가져다주며 더 큰 죄책감을 느꼈다. 이번엔 자신의 엄마까지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원경릉은 과자를 먹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정말 맛있구나. 다 먹었으니 나가서 좀 자거라. 돌아오는 길에 제대로 못 잤으니.”“예!”택란은 얌전히 대답하고 나머지 과자를 빨리 먹어 치운 뒤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를 한 번 안아주었다.“아바마마, 저 먼저 자러 가겠습니다. 깨고 나면 다리 주물러 드릴게요!”우문호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 어서 가거라.”택란은 목여 태감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를 한 번 돌아보며 아버지가 너무 오래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랐다.원경릉은 문을 닫고 탁자 옆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택란이 드디어 경성으로 돌아왔다. 우문호는 소월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목여 태감이 계속해서 설득했다. 그는 공주가 아직 어리니,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며, 그저 택란이 다른 어린아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목여 태감은 혹시라도 황제가 공주를 꾸짖을까 봐 걱정되어 공주를 감쌌다. 그의 약한 마음은 그런 걸 감당하지 못했다.마침내 택란과 원경릉이 도착했다.우문호는 작은딸이 원경릉의 뒤에 숨어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원경릉이 딸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가봐라,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택란은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우문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자기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바마마, 저 돌아왔습니다.”그러자 우문호는 딸의 손을 잡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는 눈빛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약도성에 얼마나 있었느냐?”택란은 거짓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솔직히 대답했다.“지난번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온 후 바로 약도성으로 갔어요.”우문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모두가 알고 있었으면서, 나만 속였단 말이냐?”택란은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를 껴안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우문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원경릉이 다가가 말했다.“아이가 자네 선물을 많이 샀소. 한번 보시게.”“필요 없소!”우문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딸을 뿌리칠 마음은 없지만, 그는 여전히 속았다는 사실에 너무 힘들었다.원경릉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 서로 비밀이 없기로 약속했건만, 그 약속이 깨진 것 같아 화가 났다.원경릉은 그의 표정을 보고 더 걱정해야 할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깨달았다.오는 길 내내 택란만 걱정하며 우문호에게 딸을 변호해 주려 했지만, 정작 자신이 그를 속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한 일을 이야기하며 원경릉을 기쁘게 했다.다섯째는 이전에 다섯 개의 성을 위해 적어도 30년이나 50년의 계획이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20년이 채 되지 않아 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나아가 국경 방어뿐만 아니라 조정에 세금을 납부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보였다. 아이들이 현대의 경험을 참고하며 지내는 것이 다섯째의 큰 걱정을 해결해 준 것이었다. 약도성은 이번 지진으로 국고의 돈과 주변 주현의 자원을 사용했다. 북당과 약도성의 백성들의 마음이 끈끈히 묶여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중증 환자들이 회복된 후, 원경릉은 택란과 함께 경성으로 돌아갔다.출발하기 전에 비둘기를 통해 다섯째에게 소식을 전하며 심리적 준비를 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이렇게 하면 다섯째가 택란을 보았을 때 마음을 가라앉혀 덜 화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택란은 아버지가 화를 내거나 슬퍼할까 봐 사실 마음속으로 몹시 두려웠다.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그녀또한 잘 알고 있었다.돌아가던 중 택란은 아버지에게 줄 선물을 사자고 제안했다. 원경릉은 딸의 강한 생존 본능에 웃음을 터뜨렸다. 딸이 아버지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으니, 다섯째가 딸을 그렇게 아끼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님을 느꼈다.“너희 아버지께서는 특별한 취미가 없으시고, 그저 술 한잔하는 걸 좋아하시니까 좋은 술 몇 병 사 가는건 어떠냐?”그러자 원경릉이 먼저 제안했다.“좋습니다! 사요! 많이 사서 마차에 싣고 가겠습니다!”택란이 급히 대답하자 원경릉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섯째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자상한데도 아이들이 그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물론 이는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이고 사랑이지만 말이다.경성에서 우문호는 원경릉의 서신을 받자마자 열어보았다. 편지를 읽는 순간 그는 멍해졌다.“계란이가 약도성에 갔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 그렇게 얌전하던 딸아이가 몰래 약도성에 갔을 리가 없어.”더구나, 셋째와 넷째는
약도성의 건물 대부분이 무너져 백성들은 임시로 지은 오두막과 초가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폐허로 변한 도성은 눈에 보이는 곳마다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원경릉은 마음속 깊이 안타까움을 느꼈다.택란의 뜻으로 중증 환자들은 모두 저택으로 옮겨졌다. 원경릉은 계란이의 결정이 매우 옳다고 생각했다. 중증 환자들은 그녀와 몇몇 의원이 책임지고 돌보았고, 나머지 의원은 경증 치료를 맡았다.택란은 엄마 곁에 머물며 환자를 돌보는 것을 도왔는데, 기본적인 의술을 알고 있어서 소독과 붕대 감는 일을 도왔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통증이 심해 참기 어려웠고, 진통제를 먹이거나 진통 주사를 놓았다. 택란도 주사를 놓을 수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쉬지 않고 바쁜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본 환자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그들은 궁에서 자신들의 생사를 진정으로 걱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황후마저 직접 왔으니, 예전의 대립과 적대감은 유치한 웃음거리로 느껴졌다.저녁 무렵,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왔지만,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없이 서로 포옹한 뒤 다시 각자 사람들을 구하러 나섰다.백성 중 자발적으로 음식을 만들고 약을 끓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저택 내 물자는 부족했으나 주변의 도움이 끊이질 않았다. 호명은 사람들을 조직해 식량과 의복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의 약도성엔 인간의 이기심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했다.황후가 직접 약도성에 온 덕분에 서북 지역의 신하들도 직접 의원과 물자를 이끌고 약도성에 와서 돕기 시작했다.약도성은 전례 없는 관심을 받았고, 이는 약도성 백성들이 다섯 도시 중 가장 빠르게 조정을 인정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구하고 재난 이전의 상태로 빠르게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다.재난이 발생한 지 반달이 지나면서 발견된 것은 모두 희생자뿐이었다. 인원을 파악한 후 한곳에 모아 장례를 치렀다.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5만여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이 숫자는 매우 끔찍했지만, 택란의 사전
북당의 황후가 의원을 이끌고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믿지 않았다. 약도성의 백성들조차 믿을 수 없었고, 감히 믿을 엄두도 없었다.우문택란이 이미 약도성에 왔지만,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에 불과했다. 다들 그저 그녀가 약도성에 놀러 왔고 수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이후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녀의 비범한 능력이 증명되었다. 그녀는 약도성의 성주로서 약도성에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초토화되었고, 재건하려면 조정이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북당의 조정이 약도성을 방치하고 자연적으로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어도 어쩔 수 없었다. 약도성 백성들은 줄곧 조정을 적대시하였기 때문에, 조정이 이들을 구할 이유가 없었다.그런데 황후가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약도성은 조정이 이렇게까지 신경 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지진 발생 열흘째 되던 날, 원경릉 황후가 이끄는 의원들이 약도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밤낮없이 말을 갈아타며 전력으로 달려왔다. 약도성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하며 황후께서 약도성에 오신다고 얘기를 전했다.사람들의 생각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지진 이전까지만 해도 조정을 적대시하고 북당을 적국으로 여겼던 약도성 백성들이, 이제는 원경릉을 환영하며 열광적으로 맞이했다. 이는 택란이 지진을 미리 알아차린 것과 구조 활동 덕분이었다.원경릉은 백성들의 뜨거운 환영을 예상하지 못했다. 말을 타고 앞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었고, 그녀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어머니!”군중 속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경릉은 단번에 딸을 찾아내고 말에서 내려 달려갔다. 택란은 엄마 품에 안기자마자 눈물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어머니,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너무 많아요!"택란이 흐느끼며 말했다.원경릉은 딸이 이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원경릉은 딸을 품에 꼭 안
택란은 어릴 적부터 화염을 다루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지만, 그녀는 내면의 감정을 철저히 억눌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염을 제어하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스승님을 따른 후, 스승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약점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정의 틈새가 생기면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항상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일을 담담히 대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진심 어린 감정을 흔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녀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꼬마 봉황이 날개를 펼쳐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었다.그들은 수년간 서로를 지지하며 함께 성장해 왔고,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잠시 후, 택란은 다시 구조 현장으로 나갔고, 여전히 평온하고 흔들림 없는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섰다.위왕과 안왕은 어린 조카의 침착함에 깜짝 놀랐다. 겨우 여덟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아이의 천성은 어디로 간 것인가?그들은 택란이 애초에 아이로서의 천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태어난 후, 조금이라도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는 빠르게 세상을 이해하며, 지혜롭고 노련한 어른처럼 모든 것을 맞서야 했다.사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그녀를 한두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사랑하고 아껴주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기대나 요구가 없었으며, 능력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머니처럼 그녀의 모든 행동을 걱정하고 감시하지 않았다.아버지 앞에서 그녀는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약도성의 일이 안정된 후, 그녀는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번 약도성 방문은 그녀에게 있어 단순한 놀이가 아닌 실습이었다. 이곳은 그녀의 의지와 감정을 단련할 수 있는 장소였고, 실제로 그녀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구조 작업은 계속되었고, 지진이 발
한 마을 주민이 눈물을 닦으며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지원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오. 조정은 우리를 모조리 죽이길 바라오. 우리가 죽어야 조정은, 이 약도성을 완전히 삼킬 수 있소.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소.”택란은 화가 나서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내가 여기에 왔잖냐! 빨리 계속 파시게!”주민이 그녀를 힐끔 보며 물었다.“웬 꼬마가, 넌 누구냐?”택란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어둠 속이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여기 있는 걸 보고 다들 의아해했다.“약도성의 성주, 우문택란이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뒤, 산사태가 난 지역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작은 몸집이 시선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작아 보였다.황실의 공주라는 말에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얼어붙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공주가 이런 곳에 직접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주는 저택 안에서 잘 보호받고 있어야 할 존재다.그녀는 알 수 없는 힘을 사용해 접근한 곳의 흙을 한 겹씩 옮겨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울부짖는 소리와 구조 요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가 급히 구조 작업에 참여했다.약도성의 지진은 강북부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낡은 집도 무너졌지만, 심각한 피해는 없었다. 약도성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위왕과 안왕은 신속히 구조 병사를 파견했다. 그들은 택란이 약도성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들 여태껏 택란이 스승과 함께 떠났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의 네 오빠들은 바로 병사를 데리고 약도성으로 향했다. 지진 발생 12 시진 후 약도성에는 8천 명 이상의 병사가 합류했다.약도성의 백성은 조정이 지원군을 보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정이 약도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든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과거에도 가뭄, 메뚜기 떼, 산사태 등의 재난이 일어났지만, 북막조정은 몇 포대의 쌀만 보내며 형식적인 구조를 했을 뿐이다.약도성
지진이 발생하기 전, 호명과 주 아가씨는 약도성 중심부에서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새벽녘은 사람들이 가장 피곤할 시간이다.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백성들은 분노했다. 그중 한 집안은 도축업을 하는 홀아비가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새벽 무렵에야 돼지를 잡고 고기를 나눠주고 돌아와 잠자리에 든 참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잠에서 깨어난 데다 아이까지 깨우니,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옆집 사람은 칼을 들고 나가 저들을 쫓아내면 다시 잘 수 있다고 부추겼다. 남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상황이라 아들을 방으로 데려다 놓고, 즉시 칼을 들고 나가 주 아가씨와 맞섰다.그가 칼을 휘두르며 집안 식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온 그 순간, 지진이 발생했다. 그들은 자기 집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먼지가 자욱했고, 곁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옆집 역시 무너졌고,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집 처마 아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깔려 있었다.“아들! 아들아!”홀아비는 그제야 안으로 데려다 놓았던 아들을 떠올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집은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 겨우 세 살밖에 안 되는 아들은,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했다.그는 미친 듯이 벽돌과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주 아가씨와 호명도 서둘러 도왔다.지진은 단 몇 초 만에 일어났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고, 그 결과 무너진 집에 깔린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약도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사방에서 울부짖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평소 조정과 맞서던 이들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해 보였다. 그들의 처절한 울음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다.홀아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다들 함께 벽돌을 치우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도구가 없어서 맨손으로 작업해야 했다. 주 아가씨의 손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흙벽을 밀어내고 벽돌을 옮겼다.반 시진 후, 주 아가씨가 마침내 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는 다리를 크게 다쳐 엉엉 울고 있었다. 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