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진은 몸을 비틀며 입을 열었다.“여보, 조카에게 용돈 좀 줘요.”그녀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갈 일은 없었다.“그래요.”계지원의 대답에 가희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하도경이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중간에서 애썼다.유람선은 한 무인도에 도착했다.제작진들은 출연자들에게 작은 게임을 준비했다.게임을 잘한 팀은 무인도의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각 커플들의 케미를 확인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예수진과 계지원의 차례가 되었다.예수진은 그들이 아무런 케미가 없다고 생각하여 점심에 흰 쌀밥만 먹을 준비를 다 했다.제작진이 물었다.“준비 됐나요?”“네.”“계지원 씨가 좋아하는 음식은?”둘의 손에는 카드가 쥐어져 있었는데 예수진은 감자 카드를 꺼내 들었다.계지원도 감자 카드를 꺼냈다.“계지원 씨가 좋아하는 색깔은?”예수진과 계지원은 그린 색을 골랐다.“계지원 씨의 키는?”예수진은 생각도 하지 않고 183.2cm를 골랐고 계지원 또한 같은 카드를 골랐다.“계지원 씨가 오늘 입은 속옷 색은?”예수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케미인가?그러나 그녀는 예능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하얀색을 골랐다.계지원은 하늘색을 골랐다.“그럴 리가요.”예수진이 입을 열었다.“속옷은 내가 골라줬잖아요. 하얀색이에요.”“그래요? 내가 잘못 기억했나?”“한번 봐봐요.”예수진은 계지원의 속옷을 보려 했다.“수진 씨,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계지원의 말에 예수진은 그제야 알아차렸다.제작진들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예수진도 조금 어색하여 제작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감독님이 한번 보세요.”감독은 낮게 기침을 했다.“그럼 제가 한 번 볼게요.”감독은 카메라를 등지고 계지원의 속옷 색을 확인하고는 말했다.“하얀색이요.”제작진들은 더욱 크게 웃으며 농담을 뱉었다.“계 감독님도 예상 못 한 것 같은데, 수진 씨가 감독님에 대해 더욱 잘 아네요.”“그러게요. 영광입니다.”계지원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햇볕 아래서 자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이
지금 상황에서 예수진은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향신료는 후추와 고수였다.예수진은 자신이 한 번도 거론한 적도 없는 것을 그가 알아챈 것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그냥 추측한 것인가?아니면 그녀가 예전에 미식 프로그램에서 넌지시 뱉은 후추를 싫어한다는 말을 그가 보고 기억하였단 말인가?그렇게 일이 바쁜 계지원이 그녀의 모든 스케줄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단 말인가?“두 번째 문제입니다. 예수진 씨는 몇 살때 데뷔를 했나요?”“18세 3개월 15일입니다.”계지원은 카드도 선택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말을 뱉었다.그의 모습에 감독은 멍해졌다.“정확히 알고 계시네요.”“네.”“잠시만요. 조금 더 찾아볼게요.”감독은 급히 그녀의 나이를 계산하러 떠났다.제작진들이 준비한 카드는 18세라고 쓰여 있었다.예수진의 출생일과 그녀의 데뷔 일로 계산하여 보니 계지원의 대답과 맞아떨어졌다.“계 감독님, 대답이 너무 빠르셔서 대중들이 문제가 미리 노출되었다고 생각할까 봐 두렵네요.”감독은 허허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그럼 조금 더 늦게 맞출게요.”“세 번째 입니다. 예수진 씨가 제일 좋아하는 연예인은?”두 사람은 같은 카드를 골랐다.“네 번째, 예수진 씨의 신체 사이즈는?”“지금이요, 아니면 예전이요?”계지원의 물음에 감독은 말문이 막혔다.“인터넷에 알려진 수치를 기준으로 하죠.”“그럼 81-60-90이요.”계지원의 흔들림 없는 대답에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정답입니다. 그럼 실제 사이즈는 어떻게 되죠?”“83-60-90이요.”계지원은 한치의 거짓 없이 대답했다.그런 모습에 예수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가 어떻게 알게 된 거지?’만져봤나? 만져봐도 이렇게 정확하게 알 수 있나?며칠 전에 예복을 맞추는 전화를 할 때 그녀의 신체 사이즈를 말한 적이 있었다.그러나 그는 옆에서 하연이와 놀아 주고 있지 않았던가?그가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단 말인가?“시청자 여러분도 들으셨네요, 그리고 포털
“계 감독님은요?”제작진은 계지원에게 물었다.예수진의 시선은 이미 하도경에게서 벗어났다.그녀도 그가 첫경험을 언제 했는지 궁금했다.18살? 23살? 아니면, 더 빨리?그도 언제인지 기억을 못 하면 어떡하지?들려오는 계지원의 대답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그녀와 같은 날이요.”제작진들도 그녀만큼이나 경악했다.3, 4년 전에 예수진은 25살이었다. 당시 그녀는 스캔들이 없었기에 믿을 수도 있었지만 그때 계지원은 이미 30살이나 되었다!이런 장면은 프로그램에서 무조건 내보낼 장면이었기에 계지원은 함부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어쩔 수 없죠. 누구를 기다리기 위해 오랫동안 참았어요.”계지원은 모든 이들이 경악하는 모습을 보며 담담하게 설명했다.“그럼 계 감독님은 수진 씨를 오래전부터 좋아하신 거네요? 수진 씨가 데뷔하자마자 좋아하신 건가요?”“정확히 말하자면 훨씬 전부터죠.”“그럼...”“아까 마지막 문제라고 하셨는데, 문제를 하나 더 추가하면 출연료를 다시 얘기해야겠는데요.”계지원은 제작진의 말을 끊었고 제작진들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끝났으니 점심 먹으러 가도 되는 거죠?”“그럼요.”계지원과 예수진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음식을 먹으러 갔다.“다른 사람들이 의심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요?”“네?”예수진을 위해 새우를 발라주던 계지원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나랑 같은 날이라고 했잖아요.”예수진은 말하면서 살짝 쑥스러웠다.“제작진들은 시청률을 위해 이 장면을 반드시 넣을 거예요. 당신의 거짓말을 폭로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지금 연예계는 거짓을 감추기 어렵다고요.”그녀는 계지원 때문에 자신의 연예계 생활이 타격을 받을까 봐 두려웠다.둘은 지금 염연히 얽혀 있기 때문이다.“무섭지 않아요.”계지원은 껍질을 벗겨낸 새우를 그녀의 접시 위에 올려두었다.“그렇게 자신 있어요?”예수진은 마음이 급해졌다.끝도 없이 스캔들을 만들어 내는 곳이 바로 연예계였다.“진
아무 문제가 없다면 왜 오랫동안 그녀와...그는 예수진을 좋아할 리 없었다. 적어도 예전에는.아니면 그렇게 거절할 리가 없었다.“알고 싶어요?”계지원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아니요.”하지만 그녀는 거절했다.그녀의 거절에 계지원은 입술을 깨물었다.“당신의 과거는 나랑 상관없어요.”예수진은 냉랭하게 대답했다.“네.”그가 예수진에게 줬던 상처는 지울 수도 없었고 그녀의 용서를 받을 수도 없었다.“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예수진은 그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하연이 덕분인가?...서울.소이연과 천우진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병원에서 그런 일을 벌이기 불편한 걸까요? 중환자실에 CCTV가 설치되어서 할 수 없을 것 같아요.”천우진의 말에 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뭔가를 깨달았다.“우리가 생각이 짧았어요.”“지금 어떻게 해요?”“할아버지가 깨신 것이 가짜이고 이 모든 걸 우리가 꾸민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다음부터는 기회가 없을 거예요.”“기회를 만들어 주죠.”소이연은 눈을 번쩍였다.“어떻게요?”“교통사고를 좋아하지 않았나요?”소이연의 말에 천우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러나 그를 어떻게 잡을 수 있죠? 저번처럼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잠시만요. 조금 더 고민해 보죠.”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들은 신분이 노출된 반면 상대방은 노출되지 않았다.애당초 그들은 불리한 위치에 처해 있는 것이다.“목표를 설정해 두고 지켜 보죠.”“어떻게 지켜보죠? 일을 그르치면 어떡하죠.”“신중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죠.”“당신 말처럼, 만약 이 사람이 우리의 테스트를 뚫는다면 천씨 가문은 그에게 맡기도록 하죠.”“당신의 생각을 말해봐요.”“천씨 가문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돼요. 천정엽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당신의 동생 천우빈이요.”소이연의 말에 천우진은 그녀를 쳐다보았다.“천우빈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의 부친도 생각해
천우진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그는 소이연의 계획대로 이튿날 천씨 가문의 사람들을 병실로 불렀다.“반 시간 후에 할아버지는 퇴원할 겁니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가시라고 오늘 부른 겁니다.”“빨리 알려주지 그랬느냐. 왜 이제야 알려주는 거야?”천정엽은 불쾌함을 드러냈다.“빨리 알리나 늦게 알리나 똑같지 않나요? 아니면 삼촌은 미리 무엇을 준비하려고 한 건가요?”“내가 무슨 준비를 한다고!”천우진의 말에 천정엽은 화가 치밀었다.“우진아, 너는 예전에 이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하지 않았어. 모든 일을 사전에 준비했었지. 소이연과 가까이한 뒤로 성격이 변한 거냐?”소이연은 천정엽을 바라보았다.천정엽은 그녀를 항상 아니꼽게 바라보았다. 천씨 가문에 돌아간 후로 어르신이 그녀에게 잘해주자 그는 불편했던 것이다.소이연은 처음에 할아버지에게 약을 먹인 사람이 천정엽이라고 의심했다.그러나 그런 일을 벌일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천정엽의 성격에 한 번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빠른 시간 내에 두 번째 함정을 꾀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사람은 원래 위장을 잘하는 동물이기에 소이연은 천정엽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 않았다. “삼촌, 농담이 지나치시네요.”천우진은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이연 씨는 항상 모든 일을 논리정연하게 처리하죠. 제가 나이가 많지만 그녀보다 많이 뒤처집니다. 오늘 병원에 와서야 알린 것은 모두 할아버지의 뜻입니다. 삼촌이 불만이 있으시다면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가신 후 직접 물어보시죠.”“내가 무슨 불만이 있다고?”천정엽은 냉소적으로 입을 열었다.“항상 노인네가 내 잘못을 따졌지!”“할아버지는 지금 마지막 검사를 받고 계세요. 문제가 없으시면 퇴원을 할 겁니다. 여러분들은 VIP룸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할아버지가 퇴원을 하신 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천우진은 그들을 VIP룸으로 모이게 한 후 차를 준비시켰다.차를 올리는 건 아주 관건적이었다.소이연은 천우진이 이때를 빌어 그자를 색출
“우빈이 아직 안 왔어? 뭐 하러 간 거야?”천정엽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제가 가볼까요?”천정엽의 아들인 천재림이 나섰다.“전화로 해. 들어갔다 나갔다 하지 말고.”천재림은 핸드폰을 꺼내 들어 전화를 걸었다.“우빈, 아버지가 얼마나 걸리냐고 물어보시는데? 왜 돌아오지 않는 거야?”“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있어. 금방 돌아갈게.”천우빈은 대답했다.“할아버지는 어떻대?”“형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대.”“알았어.”천재림은 전화를 끊고 천우빈과의 대화를 그들에게 알렸다.천정엽은 짜증이 난 얼굴로 일어섰다.“담배 피우러 갈게.”“같이 가요.”천재림은 천정엽과 흡연구역으로 걸어갔다.VIP룸은 흡연구역과 유리로 갈라져 있었기에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소이연은 천우진에게 메세지를 보냈다.[삼촌과 천재림이 흡연구역으로 갔어요. 아직 전화를 거는 사람은 없어요.][그래요.]그렇게 또 1시간이 흘러서 천우진이 돌아왔다.천정엽이 짜증스러운 말투로 물었다.“할아버지는 퇴원이 가능한 거야?”“네.”“내가 가서 퇴원을 도울게.”“아니요. 할아버지는 이미 차에 올랐어요. 천씨 저택으로 가시면 돼요.”“이미 차에 올랐다고?”천정엽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우리더러 데리러 오라 시지 않으셨어? 또 먼저 갔다고?”“할아버지의 뜻이에요.”“천우진, 또 우리를 가지고 논 거지?”천정엽이 그에게 따졌다.“모든 건 할아버지의 뜻이에요. 삼촌이 궁금하신 게 있다면 천씨 저택으로 간 후에 물어보시면 되겠네요.”그의 말에 천정엽은 눈을 날카롭게 떴다.“노인네가 떠났다니 우리도 가자.”그렇게 모든 사람들은 VIP룸을 떠났다.소이연과 천우진은 함께 “천씨 어르신”이 탄 차에 올랐다.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누군지 알아냈어요?”천우진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네??”소이연은 기겁했다.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인가?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그 사람을 감싸는 건 아니겠죠?”“날 의심하는 건
천우진은 소리를 끄며 말했다.“지금 누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 이자는 정말 머리가 좋아. 우리가 할 모든 일들을 예측는 거야. 아니면...”천우진은 말을 잠시 끊으며 소이연을 바라보았다.“우리의 추리는 다 틀렸어. 그자는 천씨 사람이 아니야.”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도 그들의 예측이 틀렸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어떤 것 같아?”천우진이 물었다.소이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천우진도 더 이상 그녀를 난처하게 굴지 않았다.차 안은 삽시에 조용해졌다.순간, 기사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자 천우진과 소이연은 깜짝 놀랐다.항상 얼음왕자라고 불리는 육민도 그 자리에 굳어졌다.“무슨 상황이에요?”“오토바이 한 대가 역주행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부디칠 뻔했어요.”“앞을 보세요!”천우진은 긴장어린 목소리로 소리를 쳤다.기사도 역시 역주행하여 그들을 향해 돌진해 오는 차를 발견했다.그들과 곧 부딪치려 할 때 기사는 빠르게 핸들을 돌리고 악셀을 밟아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천우진은 일찍이 위험한 순간을 피하기 위해 기사를 유명한 카 레이서로 바꾸었다.“빨리 천씨 저택으로 가 주세요.”천우진은 연신 부탁을 했다.“조심해 주세요.”“네.”기사도 긴장을 하고 엑셀을 밟으며 속도를 올렸다.갑작스러운 속도에 소이연은 몸이 굳어져 육민의 손을 꽉 잡았다.자신이 위험에 처해도 괜찮지만 육민은 안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엄마, 나 괜찮아요.”육민은 소이연의 긴장을 느꼈는지 그녀를 다독였다.소이연은 아무런 말 없이 육민의 손을 끌어당겨 더욱 꽉 쥐었다.가는 동안 여러 대의 차가 그들을 따라다녔고 여러 번 부딪칠 뻔했지만 다행히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그들이 안전하게 저택에 도착하자 뒤를 따르던 차량들은 그들의 시선에서 사라졌다.“괜찮아?”천우진이 고개를 돌려 소이연을 바라보았다.오는 동안 여러 번 위험한 순간을 지나왔기에 천우진은 장기가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괜찮아요.”소이연은 대답을 하며 육민을 보았다.“엄마,
말을 마치고 “어르신”은 차 문을 열며 모든 것을 바닥에 쏟아냈다.그때, 천씨의 다른 사람들을 태운 차도 저택에 도착했다.모든 차는 함께 떠났기에 다른 이들도 그들이 미행을 당한 것을 알아차렸다.그들은 긴장한 채로 차에서 내리며 “어르신”이 구역질을 하는 모습을 보며 그를 걱정했다.천정엽은 천우진을 질책했다.“할아버지가 이렇게 되었는데 부축하지도 않는 거냐...”“어르신”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명백히 어르신과 다른 모습에 천정엽은 큰 소리로 소리쳤다.“이건 누구야?”다른 이들도 눈앞의 그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천씨 어르신”은 고개를 돌려 천우진을 쳐다보았다.천우진은 모든 사실을 털어 놓았다.“제가 찾은 연기자에요.”“천우진, 지금 뭐라는 거야?”천정엽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우리를 놀려?”“지금까지 모든 건 할아버지를 해한 놈을 찾기 위한 것이었어요.”“그럼 찾아냈어?”천정엽은 냉정하게 물었다.“저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을 인정합니다.”“그럼 차지 못했단 거네.”천우진은 침묵했다.“천우진, 이 놈이!”천정엽은 천우진에게 순간 어떤 말을 할지 떠오르지 않아 욕설을 내뱉었다.“이 망니니 같은 놈이!”“그래서 포기했어요.”천우진은 천정엽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만약 천씨 가문에 할아버지를 해하려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나의 패배를 인정하죠. 천씨 가문을 삼촌에게 넘기죠.”“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천정엽은 천우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천씨 가문에는 그런 사람이 없어요.”소이연은 입을 열었다.좋은 사람인 척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그들의 예측이 틀렸다고 생각되었다. 그녀는 그자가 이 모든 상황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이뿐만이 아니라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천씨 가문을 오늘 계속 모니터링했지만 아무도 다른 일정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이런 일을 저지른 자는 메세지나 카카오톡으로 지시를 내려 범죄 증거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시간이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
백일잔치가 시작되기 전 예수진은 소이연과 친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급히 다가왔다.“왜 혼자와?”“그럼 누구랑 와?”“우리 조카는?”“아, 엄마한테 맡겨놨어.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몰라서 재미없어.”“...”“그러는 너는 좀 어때?”“뭐가 어떠냐고?”“네 애 말이야.”예수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의 찻잔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이라 차만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었는데 송문수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미끄러지면서 안에 있던 차가 흘러나온 것이다.송문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집어 들더니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그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찻잔을 떨군 건 그저 우연이라는 듯 하도경, 육현경과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하지수도 입을 열었다.“잘 있지. 전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젠 잘 먹고 잘 자.”“너 살 좀 찐 것 같아.”“응, 2킬로 넘게 쪘어.”“그럼 됐어.”하지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진은 파티가 곧 시작한다는 말에 계지원과 함께 자리를 떴고 그녀가 떠나가 테이블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아마도 얘기를 다 나눈 남자들 때문인 것 같았다.가만히 있기도 뻘쭘했던 하지수가 주전자를 들려 하자 송문수가 빠르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고마워.”하지수의 인사에 송문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송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임신했어?”“응.”“빠르네.”송문수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감추려 했다.적어도 결혼한 다음에야 임신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송승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게 싫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너 혼자 온 거야? 송승우는?”“서울 갔어.”“몸은 괜찮아졌어?”“응, 의족 해서 이젠 잘 다녀.”오랫동안
예수진은 빠르게 소이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이연 언니, 송문수 왔어요.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방금 안으로 들어갔어요!][내가 진짜 올 거라고 했잖아요.][내 매력이 그 정도일 줄 몰랐죠.]역시나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예수진에 어이없다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난 소이연은 송문수의 인영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하도 큰 키 덕분에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우뚝 솟아있는 송문수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문수야.”마찬가지로 그를 알아본 육현경이 인사를 건네자 송문수는 빠르게 그들에게로 다가갔다.“언제 왔어?”“어제 오후에.”“왔는데 왜 말도 안 해? 사업 잘된다고 이젠 우리도 모른 척하는 거야?”“아무리 잘 되봤자 내가 현경이만큼 돈이 많진 않아.”볼멘소리를 하는 하도경에 맞는 말로 반박하자 하도경도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언제 가?”“모레 비행기야, 내일 집 가서 부모님만 뵙고 가려고.”“그래서 우리 만날 시간은 없다 이거지?”“이번엔 시간이 좀 빠듯해, 거기 일도 많고. 오늘 보지 뭐, 술 제대로 마시자 한번.”“너 진짜 많이 변했어 송문수, 이렇게 진지하진 말아 줄래?”적응되지 않는 송문수의 말투에 하도경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그럼 어쩌라고.”“나는...”판을 깔아주니 말하기 어려웠는지 하도경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술 마셔 그냥.”“그래.”또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둘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파티의 주인공이 자리하기도 전에 술부터 마시기 시작했다.육현경이 그런 그들을 말리려 할 때 송문수의 옆에 문득 한 여자가 앉았다.그에 술잔을 들고 있던 송문수도 잠시 멈칫했다.굳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아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며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송문수를 한번 보던 소이연은 하지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지수 씨, 왔어요?”“네.”“혼자예요?”“네.”혼자라는 말에 송문수의 손은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려버렸다.“혼자니까 더 조심해요 다닐 때.”“그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서야 송문수는 마침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캐나다에 있는 회사도 이제 정상적으로 흘러가자 귀국한 거였지만 그도 그냥 예수진 아들의 백일을 축하하러 온 것뿐이었다.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송문수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배가 부른 채로 있던 예수진이 벌써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백일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오랜만에 온 장안시였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귀국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저 본인의 집으로 향했다.오랫동안 비워둔 집이라 그런지 온통 먼지투성이여서 일단 도우미부터 부른 송문수는 아주머니가 정리를 마친 다음에야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떠나기 전만 해도 이곳에서 사랑하던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는데.이제는 그 모든 게 다시는 들춰선 안 될 과거가 돼버린 것 같았다.해외에 있던 시간 동안 송문수는 부단히 하지수를 잊으려 애쓰고 있었다.물론 정말 잊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하지만 하지수와 송문수가 반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할 때도 같은 집에 살던 하지수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그저 우연히 한 번, 그녀의 뒷모습이 화면에 스친 게 전부였다.몸을 뒤척이던 송문수는 내일의 백일잔치에 대해 생각했다.내일 가면 친구들이 무조건 술을 권할 텐데,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않은 탓에 송문수는 지금 자신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그래도 푹 쉬면 조금은 낫겠지 싶어 그대로 잠을 청한 송문수는 이튿날 아침이 돼서야 눈을 떴다.언제부턴지 부모님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린 탓에 송문수는 이젠 밤을 새우는 게 오히려 힘겨웠다.그렇게 여유롭게 준비를 마친 그는 한 번 더 깔끔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집을 나섰다.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딱 적당한 시각에 집을 나선 그는 문득 옛날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어쩜 그리 특이하게 살아왔는지, 참으로 유치했던 것 같다.해외에서 반년 동안 혼자 살아서
“보름 넘게 준비한 건데 서두르는 건 아니지.”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을 떠나는 일인데도 송문수는 참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갔다가 언제 와?”“그건 몰라. 상황 봐서 잘 되면 빨리 오는 거고 잘 안되면 못 오는 거지.”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송문수에 그의 결심이 바뀔 리 없다는 걸 알아챈 송승우는 그만 입을 다물고 하지수의 손을 맞잡았다.무의식중에 눈물을 흘리던 하지수는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빠르게 표정을 감췄다.“가자.”그리고는 송승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그녀는 송문수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마지막 작별인사도 전하지 않은 채 그렇게 헤어졌다.하지수의 몸에 감히 시선을 두지 못하던 송문수도 그녀가 송승우와 함께 차에 타서야 차창 너머로 비치는 그 뒷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그는 한참 동안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사실 캐나다도 송문수가 직접 갈 필요는 없었다.회사에 유능한 사람은 널리고 널렸으니 아무에게나 CEO라는 직급을 쥐어 보내면 될 일이었지만 송문수는 본인이 가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여기서 다정하게 지내는 둘을 보고 있는 게 더 가슴 아플 것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싶어서.손 하나 잡았다고 이렇게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데 이런 모습을 계속 보는 건 정말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는 이곳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송문수는 캐나다에 도착해서야 육현경과 소이연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출국 소식을 알렸다.그리고 언제 돌아갈지는 모른다는 말까지 남기자 다들 깜짝 놀랐지만 별말은 하지 않고 몸 잘 챙기라는 소리들뿐이었다.그리고 시간 되면 놀러 오라는 얘기들로 대화가 마무리되었는데 역시나 예수진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그녀는 굳이 송문수에게 따로 문자까지 보내며 물었다.[너 진짜 어쩌려고 그래? 이렇게 가겠다고? 다 버리고? 송문수, 너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해졌니? 내가 너였으면 당장이라도 송승우랑 싸웠어!][어차피 못 이
둘의 이혼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고 두 사람은 각각 손에 이혼 증명서를 들고 법원에서 나왔다.“이제 끝난 거지?”“네.”하지수에게 건네받은 이혼 증명서를 들춰보던 송승우는 안에 적힌 내용을 다 확인한 후에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혹시라도 돌발상황이 생길까 봐 따라온 건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의 이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송문수는 하지수를 보고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절차대로 서류만 제출했다.아무 감정도 없는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송승우는 감정이란 게 저렇게 쉽게 사라질 수도 있나 싶었다.둘 사이에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혼만 하면 그만이었기에 송승우는 다른 건 묻지 않았다.이제 두 사람이 이혼했으니 송승우는 저와 하지수도 떳떳해진 것 같았다.그리고 그는 송문수만 연락을 끊는다면 하지수를 다시 자기 여자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그래서 법원에서 나오자마자 송승우가 먼저 송문수를 불러세웠다.“시간 되면 집에 와서 밥이라도 먹어. 엄마 아빠가 전화해도 안 오던데, 많이 바쁜 거야?”“응.”“바쁘다고 가족들도 다 내팽개치는 건 아니지. 워라벨도 신경 써야지.”어른스러운 말투로 나무라듯 말하는 송승우를 송문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서울에서 일할 때 1년이 넘도록 안 오던 게 누군데.부모님이 굳이 송승우를 부르지 않은 건 그의 일에 방해가 될까 봐서였다.무튼 송승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다른 사람들의 일은 언제든지 시간을 뺄 수 있는 여유 적적한 일이라 여기는 사람.“언제 시간 되는지 알려주면 도우미들 시켜서 너 좋아하는 거...”“나 해외에 잠깐 나가봐야 해.”“뭐라고?”송문수가 송승우의 지루한 말을 끊으며 대답하자 송승우는 당황하며 물었다.“엄마 아빠가 말 안 했어?”“무슨 말이야 그게?”금시초문이었던 송승우는 하지수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니 그녀 역시 처음 듣는 말인 것 같았다.“우리 회사 전기차 해외 매출이 자꾸 오르니까 전
그런데 그때, 협탁에 놓인 물과 알약 한 알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그 옆에 나란히 놓여있는 쪽지에는 “단기 피임약”이라는 말도 적혀있었다.그 약과 물을 번갈아 보던 하지수는 피가 차게 식는다는 게 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너무나도 명확한 송문수의 의사에 하지수는 가슴이 아려왔다.성인 남녀 둘이 충동적으로 서로를 원해서 가졌던 하룻밤이니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고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걸 이렇게 약으로 알려주다니.알약을 집어 든 하지수는 참으로 처량하게 웃어 보였다....그렇게 점심이 다돼서야 하지수는 별장으로 돌아갔다.핸드폰 배터리가 다 된 탓에 그녀는 송승우가 몇 통의 전화를 했는지도 모른 채 별장 안으로 들어섰는데 송승우는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얼굴로 이제야 들어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와 달리 허영지와 송기명은 살갑게 하지수를 걱정해주었다.“지수야, 어제 어디 갔었어? 전화는 왜 꺼놓고. 수진이한테 전화했는데 네가 문수랑 같이 갔다고 해서 문수한테 연락해보니까 문수는 또 너랑 같이 있는 거 아니라고 그러던데.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어디 다친 데는 없지?”“없어요.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셔서 문수 씨 집에서 잔 것뿐이에요.”송문수 집에서 잤다는 하지수의 말에 송승우는 더는 못 참겠는지 언성을 높였다.“하지수, 너 나랑 한 약속 잊었어? 네가 어떻게 거기서 잠을 자!”“내가 무슨 약속을 했는데요?”송승우는 아무리 화가 났어도 저 질문에만큼은 답을 할 수 없었다.가스라이팅으로 어렵게 얻어낸 기회라는 걸 다른 사람한테는 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나 문수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 그러니까 아직은 뭘 하든 합법적이란 소리죠.”“하지만...”“이혼하고 나서 얘기해요. 나 피곤해서 먼저 올라 가볼 게요.”몸도 마음도 다 힘들었던 하지수는 송승우를 화를 살필 겨를이 없었기에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그렇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목 끝까지 끌
“너 내일 후회할 거야.”이런 하지수를 앞에 두고 참는 건 송문수에게도 곤욕이었다.온몸이 떨릴 정도로 힘을 주고 있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는 게 더 힘들었다.“후회 안 해.”“딱 하나 후회되는 게 있다면 내가 이 나이 먹도록 한번 밖에 못 해봤다는 거야. 그리고 그 한 번도 진짜 별로였어.”“뭐?”아까부터 한번을 강조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그 한 번도 다 너한테 맞춘 거였잖아.”고작 한 번이라니, 그럴 리가.그런데 또 곱씹어 보니 둘이 함께 잔 건 한 번뿐인 것 같긴 했다.하지만 송승우와 그렇게 오래도록 사귀면서 송승우 방까지 들락날락하던 게 하지수인데 그런 그녀의 인생에서 저와 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이번엔 내가 움직일 거야.”하지수는 잔뜩 풀린 눈으로 당차게 말했지만 그녀의 말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나 또 밀어내면 그땐 진짜 물어버릴 거야.”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닥에 눕힌 뒤 그 위에 올라탔다.“반항하지 마.”곧바로 하지수의 입술이 자신에게 다가왔지만 송문수는 정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이 상황에 그녀를 밀어내면 하지수가 정말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가슴 아픈 일이었기에 송문수는 그냥 가만히 있는 걸 택했다.그렇게 내일 그녀의 원망도 다 받아낼 심산으로 송문수는 하지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이 밝아오자 하지수는 몸을 뒤척였다.온몸에 차에 깔리기라도 한 듯 무거웠고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던 그녀는 힘겹게 눈부터 떠보았다.익숙하고도 낯선 이곳은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송문수의 집이었다.그리고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어제의 기억 조각들이 하나하나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그것들이 마침내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본인도 몰랐던 자신의 대담한 모습을 그녀는 차마 깊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술이 깬 지금에 와서는 절대 못 할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