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현경은 결국 임아영의 병실에서 나왔다.떠날 때 임아영은 잠결에도 그의 손을 놓지 않아 육현경은 큰 힘을 써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임아영이 깨든 말든 크게 상관하지 않고 그는 몸을 돌려 떠났다.그의 걸음은 천근처럼 무거웠다.3년이란 시간이 그에게는 한 차례 꿈만 같았다. 꿈에서 깨면 일어났던 모든 일에서 그는 도망갈 수 없었다.그는 한 병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춰섰고 소이연이 침대에서 일어나 휠체어에 앉는 모습을 지그시 쳐다보았다.육민은 옆의 컴퓨터에 코딩을 치다가 소이연의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엄마?”“난 괜찮아, 할 거 해.”소이연은 아직 문 앞의 사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육민에게 말했다.소이연은 침대에서 잠깐 눈을 붙였지만 사실 잠에 들 수가 없었다.마음속에 일들이 너무 많아 그녀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래서 잠시 휴식이 필요했다.그러나 휴식을 하면 할수록 잡념이 많았다.그래서 결국 견디지 못하고 육현경을 보러 간 것이었다.그녀는 지금 매 순간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휠체어를 밀고 나가려던 때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잠이 든 심문헌을 발견했다.그의 얼굴은 피로감이 가득했다.그는 정말 소이연이 마음이 약해 질만큼 그녀에게 진심으로 잘 대해줬다.그녀가 자신의 침대에서 큰 힘을 들여 이불을 가져 와 심문헌에게 덮어주었다.심문헌은 움직임을 느끼고 중얼거렸다.“이연 씨, 무서워 하지 말아요. 내가 지켜줄게요... 이연...”소이연은 마음이 아팠다.이승에서 그녀가 빚을 진 사람은 아마 심문헌일 것이다.그래서 더욱 그의 진심에 답할 수 없었다.그에게 이불을 덮어 준 후 소이연은 문 앞으로 다가가려 몸을 돌린 순간 육현경을 마주쳤다.그녀는 자신이 환각을 본 거라고 생각해 한 발자국도 다가가지 못했다.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그때 육민이 그들의 적막을 깨뜨렸다.“루카스, 일어났어요?”육민은 흥분하여 육현경에게 달려 나갔다.그런 육민을 육현경은 바라보았다.3년의 시간이 흘러 육민은 많이 자랐다.“그래, 깼
“의사가 최대한 걷지 말라고 해서 병실로 돌아갈게. 괜찮다고 말하려고 온 거야.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육현경이 돌아서려하자 소이연이 그를 불렀다.“루카스.”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몸이 떨렸다.사실 그는 그녀가 누군지 생각이 났다. 침대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기에 이렇게 빨리 깰 수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는 것을 인정하기 두려웠다.“데려다줄게요.”육현경이 거절하기도 전에 그녀는 휠체어를 밀어 밖으로 나갔다.둘은 침묵을 지키며 병원 복도에서 천천히 걸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아 분위기가 너무 침울했다. 둘은 육현경의 병실 문 앞에서 멈췄다.그가 뒤돌아 소이연의 창백한 얼굴과 몸의 곳곳을 뒤덮은 붕대를 쳐다보았다.그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힘껏 안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나한테 정확한 답을 줘요.”소이연의 직설적인 말에 육현경은 가슴이 아팠다.그는 그녀가 남을 강요하는 성격이 아님을 너무 잘 알았다. 그녀는 이 관계가 깨지면 이성적으로 물러남을 선택할 것이다.그래서 그는 자신이 임아영과의 결혼을 선택하자 소이연이 자신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 그녀는 뒤돌아 떠날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지금 이렇듯 잔인한 방식을 선택했다.육현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와 소이연은 너무 많은 것을 놓쳤다.그가 그녀를 사랑할 때 그녀는 도망가고, 그녀가 그를 받아들일 때 그는 “죽었다”. 그리고 소이연이 적극적일 때 그에게 또 다른 여자가 생겼다...그들은 정말 인연이 아니란 말인가?“날 좋아하는 거 맞죠?”소이연은 그가 답하기도 전에 또 물었다.그녀는 자신의 행복을 쟁취하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모든 것을 참고 받아들일 수 있을 줄 알았다. 육현경과 다른 여자의 결혼은 사랑이 있어야 했다.그녀는 노력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의미 없는 고집과 거짓보다는 육현경을 잃는 것이 더욱 무서웠다.그래서 모든 존엄과 원칙을 던져버리고 그를 적극적으로 쟁취하려 했다
“괜찮아요.”소이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래도 눈물은 결국 흘리지 않았다.“괜찮아요, 다시 생각해 봐요. 급하지 않아요.”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이미 여러 해 동안 기다렸으니 조금 더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그녀는 육현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 주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임아영은 결코 기다려줄 사람이 아니었다. 심아윤과 소나은보다 꾀가 많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그녀는 남자를 조정할 줄 알았다.소이연이 말을 마치고 떠나려고 할 때 육현경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소이연.”그의 말에 소이연은 가슴이 떨렸다.그 순간 그녀는 육현경의 말을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아까 그녀가 한 급하지 않다는 말은 그에게 시간을 주기보다는 자신이 도망가기 위한 것이다.그녀는 육현경이 자신을 선택할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아마 당신을 실망하게 할 거예요.”육현경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소이연은 가슴이 찢어 질듯 아팠다.그가 그녀를 거절하고 임아영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슬퍼할 것도 없었다. 그의 태도는 이미 명확했다.그녀도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직접 그의 말로 들으니 슬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러나 그녀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우리 같이 맞서요. 함부로 다른 사람의 사랑에 관여해서 파괴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당신을 사랑하니까 이런 원칙을 깨고 싶어요.”육현경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그녀에게 마음을 읽히고 싶지 않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루카스.”소이연은 적극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과 그의 손가락이 맞닺자 그녀는 그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자신의 강렬한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다.그녀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익숙한 촉감에 그녀는 가슴이 아려왔다.“우리 같이 맞서요, 네? 나를 이렇게 버리지 말아요.”소이연은 글썽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육현경은 마주할 수가 없었다.계속하다간 그도 마음이 무너질
소이연은 본능적으로 육현경의 손을 꽉 잡았다.그가 자신을 떠나 임아영에게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육현경도 소이연의 행동을 알아채고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그는 소이연을 밀어낼 수 없었다.“루카스, 우리는 결혼할 사이예요.”임아영은 낮게 말했다.그녀는 담담하게 사실을 말해주었다.“나한테 와 줄 수 있어요?”묻는 임아영의 눈에는 기대로 가득했다.육현경은 가고 싶지 않았다. 계속 소이연의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그는 한평생 그녀만 사랑했다.기억을 잃기 전이나 그 후, 기억을 회복할 때도 그는 소이연만 사랑했다.임아영에게는 강한 책임감 때문에 함께 있는 것이다.육현경은 소이연을 밀어낼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들의 손은 여전히 마주 잡았다. 임아영은 육현경이 다가오지 않는 모습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은 단순했고 무력감도 포함했다.그녀는 천천히 육현경에게 걸어갔다.“괜찮아요, 당신이 오지 않으면 내가 가면 되죠.”그녀는 육현경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소이연과 맞잡은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그러나 소이연은 고집스레 손을 더욱 꽉 잡아 아무리 밀어내도 떨어지지 않았다.임아영은 현재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힘도 없었기에 포기했다.“이연 언니, 나랑 루카스는 이미 약혼했어요.”“그건 당신이 강요한 거죠.”소이연은 흔들림없이 임아영의 눈을 바라보았다.“이연 언니, 아니예요...”“현경 씨가 누굴 좋아하는지 잘 알잖아요. 임아영 씨, 감정은 요구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강요한다고 행복하지도 않고요.”“행복은 우리의 일이에요. 이연 언니가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지금 내 약혼자랑 손을 잡고 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임아영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약혼자?”“당신의 약혼자가 되기 전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어요?”“알 필요가 없어요. 나에게 그는 그일 뿐이에요. 그리고 그도 나랑 평생을 함께할 거예요.”소이연의 말에 임아영이 강하게 맞받아쳤다.“내가 그를 데려간다면?”“그럴 수 없어요.”임아영은 손을
소이연은 누구를 위해서도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이건 그녀의 인생에 책임지는 것이었기에 이런 치졸한 수단으로 위협하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루카스에 대한 사랑은 나한테 비할 수가 없어요.”임아영은 비웃으며 말했다.“이건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집착이에요. 임아영 씨, 당신은 사랑을 몰라요.”“아니요, 전 누구보다 루카스를 사랑해요. 그를 놓치면 살아갈 수 없어요.”“이연 언니, 루카스가 없어도 당신은 행복하게 살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나랑 뺏지 말아요. 날 살려줘요.”“당신의 생명은 당신 거예요. 그 누구와도 상관이 없어요. 이런 걸로 협박하지 마요.”“당신을 협박하는 건 아니에요.”소이연의 말에 임아영은 냉정하게 웃었다.“우리가 설령 친척이라 해도 남이예요. 나는 당신이 아니라 루카스를 협박하는 거예요.”임아영의 눈빛은 그에게로 향했다.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루카스, 만약 소이연 씨를 놓지 못한다면 나는 곧 시체가 될 거예요.”육현경은 차갑게 임아영을 바라보았다.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다.임아영은 그의 분노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더욱 크게 웃었다.“3초 줄게요. 3초 후에 내가 가면 돌아보지 않을 거예요.”“하나, 둘...”육현경은 소이연의 손을 놓았다. 그렇게 그녀를 포기했다.그 순간 소이연의 마음은 찢어졌다.육현경은 임아영을 놓을 수 없었다. 비록 사랑하지 않아도 그녀가 계속 미친 사람처럼 자신의 목숨으로 그를 협박하고 있었기에 때문이다.“루카스, 우리 돌아가요.”임아영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그녀는 더 이상 꾸밀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가장 치졸한 방식으로 루카스를 얻었다.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루카스를 가지는 것만 중요했다.임아영은 손을 루카스에게 내밀어 그의 손을 기다렸다.육현경은 그녀의 핏기 없이 창백한 손을 바라보았다.임아영은 독촉하지 않고 가만히 루카스를 바라보았다.한참이나 지나서야 그는 손을 뻗었다.“육현경.”소이연은 그의 본명을 말해버렸다.그녀의 말
소이연은 말하려 했지만 뱉지 못했다. 어떻게 그를 되돌릴지 몰랐다.그녀도 죽음으로 육현경을 협박할 수는 없었다.그런 치졸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그렇게 육현경과 임아영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이연 씨.”귓가에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이연은 심문헌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병실로 데려다줄게요.”휠체어를 돌리는 순간 그녀는 천우진을 보았다.아마도 심문헌과 함께 나와 모든 걸 보고 있었을 것이다.그때도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참 우스웠다.소이연은 자신의 병실로 돌아갔다.심문헌은 티슈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그녀는 티슈를 가지고 와 천천히 기분을 가라앉혔다.쉽게 밖에서 자신의 기분을 노출하지 않는 그녀였다.육민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항상 강한 모습만 보였다.그러나 그녀는 한참이나 흐느꼈다.울음을 멈추자 그녀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냉정한 모습이었다.“루카스를 포기하라고 했잖아요.”소이연이 감정이 잦아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천우진은 입을 열었다.아무런 말도 없는 그녀를 대신해 심문헌이 입을 열었다.“언제부터예요?”그는 소이연이 언제부터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그녀를 3년이나 따라다녔는데 3개월 안 남자를 이기지 못하다니?그는 육현경에게 졌다는 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죽었다 해도 자신은 육현경을 대체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그러나 루카스는 무슨 자격이란 말인가?순서로 따지면 자신이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심문헌이었다.“끼어들지 마세요.”천우진은 짜증난다는 말투로 말을 뱉었다.“왜 내가 끼어들면 안 돼요? 이건 나의 남은 인생의 행복과도 관련이 되는 거예요. 이연 씨, 육현경외의 다른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데, 왜 난 안 되는 거냐고요?”흥분한 심문헌을 바라보는 천우진의 얼굴이 구겨졌다.“한마디 더 하면 병원에서 나가세요.”“당신!”“두 번 말하지 않
병실은 적막만 가득했다.공기는 그렇게 얼어붙었다.천우진과 심문헌은 넋이 빠진 채로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루카스는 육현경이에요.”소이연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어떻게 알았어요?”천우진은 금세 침착을 되찾으며 물었다.“친자 검사했어요.”육민이 갑자기 말했다. 아마도 엄마의 기분이 별로인 것을 알았을 것이다.“루카스가 아빠랑 다르게 생겼지만 느낌이 똑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아빠랑 같이 자라서 한눈에 알 수 있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가 몰래 친자 검사했어요. 그후에 엄마도 알아채고 다시 한번 친자 검사했더니 우리 아빠였어요.”육민은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천우진은 침묵하다가 물었다.“당신이랑 육민이 아닌 루카스와 육민을 검사한 거예요?”“네.”소이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우진은 여전히 놀랐다.“육현경은 죽은 거 아닌가요? 그가 살아날 확률이 거의 없다고 들었어요.”“살아 있었어요.”“그럼 왜 다른 사람의 신분을 쓰는 거죠? 살아 있는데 왜 찾아오지 않은 거예요?”“어쩌면 기억을 잃었을 수도.”그녀의 대답에 천우진은 다시 한번 침묵했다.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그자가 육현경이라서 포기 못 하는 건가요?”소이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만약 육현경이 아니면 이렇게 하지 않을 그녀였다.천우진은 그녀를 어떻게 설득할지 몰라 심문헌만 바라보았다.그는 누구보다도 힘들어 보였다. 지금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아마 심문헌일 것이다.“혼자 있고 싶어요.”소이연은 그들의 생각은 관심도 없는다는 듯이 말했다.누구도 그녀를 대신해 결정할 수 없었다.사랑은 당사자만 알 수 있었다.“그럼 돌아갈게요. 무슨 일 있으면 불러요.”“그래요.”천우진은 떠나면서 심문헌을 돌아보았다.“아직도 안 가요?”심문헌은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리다가 천우진을 따라 그의 병실로 갔다.심문헌은 소파에 오랫동안 앉아 망부석처럼 움직이지 않았다.말이 많던 사람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냥 소파에 걸쳐 멍을 때리고 있었다.천우진도 그를
“인생은 원래 그런 거예요. 죽든 살든 별의별 일들이 다 있는 거예요.”“누가 죽는다고 했어요!”천우진의 말에 심문헌은 반박하며 덧붙였다.“그래도 당신도 나이가 적지 않은데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죠.”“...”천우진은 심문헌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단지 한 사람은 30대, 다른 사람은 40대일 뿐이었다.심문헌은 천우진의 손에서 맥주를 빼앗아 들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당신이 죽던 말던 상관은 없는데, 나를 같이 있다가 죽으면 안 되죠. 천씨 가문도 나를 찾아올 텐데, 저는 감당이 안 돼요.”심문헌은 천우진이 마시지 못하게 그의 잔의 술을 마셔 버렸다.천우진도 자신이 술을 마실 상황이 아님을 알았기에 그런 그를 말리지 않았다.그래도 적당양은 괜찮다고 생각되었다.그러나 그는 더 이상 심문헌과 언쟁하기 싫었다.천우진은 심문헌이 그의 잔으로 술을 꿀꺽꿀꺽 다 마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술을 빌리는 것은 좋은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아니였지만 다른 방법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그냥 그를 내버려두었다.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취한 심문헌은 책상에 엎드려 천우진을 향해 웅얼거렸다.“내가 소이연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요?”“몰라요.”“내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걸 알잖아요.”“네.”심문헌의 웅걸거림에 천우진이 답했다.“그런 내가 소이연을 좋아해요.”심문헌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이연 씨가 남자든 여자든 좋아했을 거예요.”“알겠어요.”“나는 내가 기회가 있을 줄 알았어요.”심문헌은 눈이 더욱 빨개져 억울함이 가득한 불쌍한 소년 같았다.“그런데 육현경이 아직 살아 있었다니. 폭탄이 터졌는데 어떻게 살아난 거죠?”심문헌은 말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천우진도 몰랐다. 이건 정말 운명일 것이다.“나는 평생 행복할 수 없어요.”심문헌은 마치 이번 생은 끝나는 듯 침통하게 말했다.“그건 모르죠.”“당신은 잘 모르겠죠. 아내와 아이,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가졌으니 나 같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겠죠. 게다가 나는
송문수가 사 온 물을 건네도 부모님은 고개만 저으며 손을 모으셨다.그래서 하지수에게 건네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물을 받아들었다.서울에 온 뒤 송씨 일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줄곧 자리를 지키며 송승우의 수술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송승우가 눈을 뜨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는 받아든 물이라 몇 모금 마시기는 했지만 물을 마시면서도 신경은 온통 송승우에게 쏠려있었다.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송승우의 몸을 보게 되었다.너무 아파서인지 아니면 힘이 없어서인지 몸은 미세한 떨림 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송승우의 눈이 서서히 떠지고 있어 하지수는 잔뜩 흥분한 채 외쳤다.“승우 오빠 일어났어요!”“문수, 문수야! 얼른 의사 불러와!”하지수의 말에 정신을 차린 부모님이 송문수에게 의사를 데려오라 했고 송문수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의사는 중환자실에서 각종 검사를 진행했다.방음효과가 워낙 좋은 중환자실이라 의사와 송승우의 대화를 듣지 못했던 가족들은 또다시 초조해 났다.한참이나 지나서 중환자실 빠져나오는 의사에 허영지가 다급히 달려가 물었다.“선생님, 저희 아들은 좀 어떤가요?”“방금 검사 진행했는데 생명엔 아무 지장 없습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돼요.”“하지만 아직 회복이 덜 돼서 여기서 며칠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일반병실로 옮겼다가 세균감염이라도 되면 큰일이거든요.”“알겠습니다, 입원은 며칠 하든 상관없으니까 저희 애 잘만 치료해주세요. 그런데 저희가 들어가서 같이 있어 주는 건 괜찮을까요?”“아직은 들어가지 마세요. 환자분도 방금 깨어나셔서 머리가 어지러울 겁니다. 오늘은 그냥 쉬게 놔두시고 내일 상태 좀 나아지면 그때 들어가 보시게 도와드릴게요.”“감사합니다 선생님!”“아닙니다.”감격 어린 허영지의 말에 의사가 한마디 더 보탰다.“환자가 아직은 본인 몸 상태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일 면회하실 때도 다리 절단한 사실은 일단 말하지 마세요. 환자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그 말에 허영지는 대성통곡을 했고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끄떡없던 송기명마저 아들 일에 눈물을 보였다.평소에 사이는 안 좋았지만 그래도 친형이었기에 송문수도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했고 하지수 역시 송승우가 다리를 잃는다는 말에 눈물을 떨어뜨렸다.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는데.어릴 때부터 본인 잘난 멋에 살던 사람이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되려 죽겠다고 난리를 칠 것 같아 하지수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목숨이 다리 한쪽보다는 더 중요했기에 결국 사인을 한 송기명은 온몸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기분 좋게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인 줄로만 알았는데 갑작스레 닥친 비극에 송문수도 아버지를 부축하며 착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어지는 수술에 다들 정신을 반쯤 놓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고요한 복도에 갑자기 인기척이 들리더니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걸어 나왔다.가족들 못지않게 속을 태우던 장지석은 피곤한 듯 마스크를 벗는 의사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가 물었다.“승우는 좀 어떻습니까?”그제야 가족들도 정신을 차리고 하지수와 송문수가 어머니 아버지를 부축한 채 의사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다른 말보다 먼저 나온 게 의사의 한숨이라 허영지는 쓰러질뻔한 걸 간신히 버텨내며 물었다.“왜 그래요 선생님, 우리 아들 잘못된 거 아니죠?!”“생명엔 지장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런데...”“그런 데라뇨!”“환자분이 다리를 잃었으니 깨어나시고 나서도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정할 겁니다. 가족분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습니다. 오른쪽 다리 외에도 몸 각 부위가 다 강한 충격을 받아서 일단은 중환자실에서 회복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의식 돌아오고 모든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오면 그때 일반병실로 옮길 겁니다.”의사의 말에 허영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송기명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지금 그들은 전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있었다.그들도 송승우가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
만약 하지수가 송승우의 교통사고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제가 그런 하지수를 제대로 바라볼 수나 있을지 송문수는 지금 모든 게 미지수였다.송승우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그를 정말 친오빠처럼 생각했던 하지수는 역시나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서울 가장 좋은 병원에 입원해 있대.”“나 서울 가야겠어.”“그래요 여보.”마침내 정신을 차린 허영지가 입을 열자 송기명도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갈 거면 다 같이 가야죠. 오늘 파티는 일다 취소하죠.”부모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송문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파티장 취소할 테니까 지수 너는 서울 가는 티켓이랑 차량 좀 준비해줘.”“알겠어.”이미 혼이 반쯤 나간 부모님을 모시려면 본인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기에 하지수는 바로 기사에게 연락하며 공항까지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다.그리고는 한 시간 뒤에 출발인 항공편까지 끊어놓았다.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송문수는 서둘러 파티를 취소하고 있었는데 직원을 시켜 손님들께 나중에 아버지와 직접 찾아뵙고 취소이유를 말씀드리고 사과까지 드린다는 말도 전하게 했다.공항에 도착한 뒤에도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송문수는 여러 가지 일을 지시하느라 바삐 돌아치고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침착하고 차분했다.하지만 다들 송승우를 걱정하고 있어서 확 달라진 송문수에게 주의를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1시간이 넘는 비행을 마치고 서울공항에 내린 송씨 일가는 바로 대기 중이던 차를 타고 서울 대학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하자 이미 나와 있던 송승우의 동료가 그들을 맞아주었다.“아주머니, 아저씨 오셨어요? 저는 승우 형 직장 동료 이찬혁이라고 합니다. 형은 안에서 수술 중이에요.”“우리 아들 많이 심한가요 지금?”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걱정을 멈출 수 없었던 송기명이 이찬혁을 붙잡고 묻자 그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저도 좀 전에 연락받고 온 거라 상태가 어떤지는 정확히 몰라요. 형이 실려 올 때는 의식이 있었다고 하니까 아마도...”
문자를 본 허영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지자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사모님, 무슨 일이라도 난 겁니까? 왜 그러십니까?”특종을 잡은 것마냥 달려드는 기자들에 송씨 일가 사람들도 다 같이 허영지를 주목했다.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진 그를 보며 송기명이 물었다.“여보, 왜 그래요?”아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시울만 붉히고 있자 조급해 난 송기명이 다시 한번 물었다.“무슨 일인데 그래요?”“엄마, 무슨 일 있어요?”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긴장한 채로 물어왔지만 허영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리기 시작했다.그에 미간을 찌푸린 송문수는 아직 켜져 있는 엄마의 핸드폰을 가져와 문자를 확인했는데 그 역시 문자를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송 대표님, 무슨 일입니까? 핸드폰으로 뭘 봤길래 사모님이 저러시는 겁니까?”기자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그는 바로 허영지의 핸드폰을 들고 기자회견장을 벗어났다.“대표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무슨 일인지 한 말씀 해주세요!”하지만 그런 무시에도 굴하지 않는 기자들이 송문수를 따라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경호원들이 몸을 던져 그들을 막기 시작했다.송문수의 표정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일임을 알아챈 하지수도 입술을 말아 물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가 복도로 나오자 송문수는 이미 통화 중이었는데 통화가 거듭될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송문수의 표정이 저 정도로 굳어있다는 건 무언가 큰일이 났다는 뜻이었다.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본 적 없던 표정이라 하지수는 자연스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음주운전으로 잡혀갈 때도 침착하기만 하던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지 하지수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한참 동안 통화를 하다 전화를 끊은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문 채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하지수에게로 다가갔다.밖으로 나온 허영지와 송기명도 그저 장난 전화이길 바라며 송문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는 가족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
“오해 아닙니다, 전에는 저 그런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변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송 회장님의 입원 때문입니까?”“제 우상이시던 아버지가 쓰러지신 것도 하나의 이유죠. 제 눈에 아버지는 늘 이 집안을 지키는 영웅이셨고 절대 늙지도 않을 것 같던 분이셨는데 갑자기 아프다고 하시니까 그때 이 집안을 책임질 사람은 저뿐이더라고요.”이젠 다 커서 자신의 고초도 이해해주는 어엿한 아들을 보며 송기명은 아주 감동스러워했다.“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제 아내인 하지수 씨입니다.”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모든 카메라도 그녀에게 집중되었다.갑작스러운 이목에 놀랄 새도 없이 송문수는 말을 이어나갔다.“제 아내가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회사를 지키기 위해 같이 밤을 새우면서도 불평불만 한마디 없었던 사람입니다. 성격 안 좋은 저를 보듬어주고 격려해주면서 제가 일에 집중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줬어요. 그래서 저는 제 아내한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저를 언급하며 고맙다고 하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심장은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소문에 의하면 두 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이혼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하던데, 진짭니까?”“당연히 사실이 아닙니다.”“저희 사이좋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철이 없어서 아내한테 상처 주는 일도 많이 해서 사이가 위태로웠겠지만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지금 혹시 사모님한테 고백하시는 겁니까?”기자의 능청스러운 질문에 반박하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을 붉히는 송문수를 보며 다들 제 눈을 의심했다.파파라치한테 찍힐 때도 이미지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까지 휘두르던 사람이 언제 이렇게 쑥스러움이 많아졌나 싶어 다들 당황해하고 있는데 하지수는 그의 모습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으면 그간의 이상하던 태도와 관계를 피했던 이유도 더 이상은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송승우 씨는 왜 오지 않으신 겁니까, 오늘은 불참하시나요?”“두 분은
화장을 마치고 머메이드 드레스로 갈아입은 하지수는 불빛 아래에서 더 반짝이는 드레스를 보며 아무래도 자신이 허영지를 가리는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시 한번 송문수를 불러보았다.“문수 씨, 이게 진짜 괜찮다고?”정말 아닌 것 같아서 한 질문이었지만 송문수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 마, 이거 네 거 맞다니까.”“진짜 어머님이 준비하신 거 맞지?”“너 나 안 믿을 거야?”송문수가 목소리를 깔며 말하자 하지수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입을게.”정말 허영지의 뜻이라면 하지수도 걱정할 게 없었다.사실 평소 하지수에게 검소하다는 말을 자주 하던 허영지였기에 그녀가 이런 드레스를 준비했다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이번 기회에 저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시어머니의 마음인가보다 하며 하지수는 나갈 준비를 마쳤다.“가자 이제.”“엄마가 인터뷰 있다고 빨리 오래. 사진도 찍어야 한대.”“그래.”차에 탄 뒤에도 송문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리를 덜덜 떨며 자꾸만 핸드폰을 확인했다.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하지수가 그를 부르자 송문수는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문수 씨.”“어?”“더워?”에어컨을 틀어 시원한 차 안에서도 땀을 흘리는 게 이상해서 한 질문인데 송문수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아니.”“땀 나는데?”“그래?”제 이마에 묻은 땀을 훔치던 송문수가 또 말을 바꾸자 하지수는 그를 수상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좀 더운 것 같기도 해.”“오늘 왜 이래? 당신 좀 이상한 것 같아.”“아무것도 아니야.”송문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쉽게 넘어갈 하지수가 아니었다.“어디 아파?”“그럴 리가, 나 소처럼 건강한 남자야, 병도 잘 안 걸린다고.”“...”누가 봐도 오바하는 것 같았지만 사정이 있겠지 싶어 하지수도 더는 묻지 않았다.그들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도 이른 시간이었지만 매체들에서는 더 빨리 와 있었기에 기자들과 송기명, 허영지 모두 그들 부
아침 일찍 디자이너를 불러 단장을 마친 송기명과 허영지는 나이 들면 가만히 잊지 못한다는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른 시간부터 호텔로 향했다.그리고는 아들이 아닌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차피 송문수는 전화를 잘 받지 않으니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하지수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 이미 습관처럼 몸에 배 있었다.좀 전에 일어나서 스타일링을 받고 있던 하지수는 시부모님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다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네, 저희 일어났어요. 문수 씨는 씻고 있고 저는 화장하고 있어요.”“네, 먼저가 계시면 저희도 금방 갈게요. 8시 전엔 도착할 거에요.”통화를 마친 하지수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었다.본인이 주인공도 아닌데 화장이 너무 화려한 것 같았다.게다가 원래는 송문수와 커플룩으로 어머니께서 맞춰주신 복고풍 드레스를 입기로 했으니 어찌저찌 의상을 수정하다 보니 오늘 입어야 할 건 민소매인 머메이드 드레스가 되어버렸다.예쁘긴 예쁘지만 꾸민 티가 너무 많이 나서 고민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불렀다.“문수 씨, 나 진짜 이거 입어? 이거 어머니가 골라주신 것도 아닌데...”오늘 아침은 하지수보다도 더 빨리 일어난 송문수는 아까부터 소파에 앉아있었다.그가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라 알람 소리에 눈을 뜬 하지수는 제 옆에 없는 송문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었다.출근할 때도 알람이 몇 번이나 울려서야 화를 내며 일어내던 사람이 오늘은 웬일인가 싶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60세 생일파티라 신경을 쓰는 건가 싶어 하지수도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었다.“뭐라고?”그런데 제가 한참 불러서야 모습을 드러낸 송문수가 혼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덜덜 떨고 있자 하지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오늘 뭐 발언이라도 할 거야?”“아니, 왜?”“그런데 왜 이렇게 긴장해?”“내, 내가? 아, 아니야! 그럴 리가!”“아직 잠이 덜 깨서 그래!”송문수는 말까지 더듬으며 손사래를 쳤고 하지수는 또
아내밖에 모르는 바보들이 괜히 사람을 붙였다가 제 프러포즈를 망칠까 봐 겁났던 송문수는 결국 자신이 소이연, 예수진과 함께 꾸미는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러자 친구들의 놀림은 당연했고 육현경과 계지원은 임신한 사람을 부려먹는다고 구박까지 했지만 프로젝트가 이미 막바지에 돌입했기에 송문수는 온갖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이면서 도와달라고 읍소를 했다.그렇게 가장 성가신 친구들한테까지 알리고 나니 모든 준비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기다리고 기다리던 송기명의 생일파티 당일이 되자 세상은 아주 시끄러워졌는데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계속 기사를 내대는 기자들 때문에 언론도 시끌벅적했다.그런데 기사의 대부분은 송기명이 아니라 송문수에 대한 것이었다.그에게 송승우라는 훌륭한 형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던 사람들은 송 씨 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게 망나니 같은 송문수라는 기사에 다들 놀라고 있었다.그러면서 그에 대한 찬양기사가 일파만파 퍼져나가자 송승우도 그걸 보게 되었다.아버지의 생일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야근을 몰아 한 덕에 오늘 시간을 뺄 수 있어 기분이 좋았던 송승우는 송문수를 추앙하는 기사들이 늘어나자 점점 언짢아졌다.몇 년 전만 해도 송문수는 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망나니였는데 이제는 제가 그의 배경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사람들이 제가 아닌 송문수에게 관심을 쏟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웠다.운전을 하면서도 방송을 듣고 있던 송승우는 생일파티의 주인공인 송기명보다 송문수에 대한 말이 더 많이 나오자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도 미간을 펴지 못했다.지금 시간은 6시지만 비행기는 7시 출발이라 호텔에 도착하면 10시는 넘을 것 같아 송승우는 부모님께 먼저 연락을 드려 양해를 구했다.송승우에게 너그러웠던 부모님은 역시나 안 좋은 소리 한마디도 없이 오히려 서두르지 말라며 그를 걱정해주었다.어릴 때부터 받아왔던 편애였지만 오늘의 송승우는 왠지 그게 저에 대한 방치 같았다.이젠 부모님에게도 송문수라는 대단한 아들이 하나 더 생겼으니 저에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지수 씨의 의심을 풀어주는 거예요.]허를 찌르는 소이연의 말에 송문수는 조심스레 하지수를 바라보았다.하지수도 송문수에게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던 터라 제게 보내지는 시선을 느끼자마자 고개를 들어버려 둘은 의도치 않게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하지만 찔리는 게 있었던 송문수가 먼저 눈을 피하자 하지수는 입술을 말아 물며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송문수 역시 잘못한 것도 없는 제가 왜 하지수를 피하는지 몰랐지만 몸이 먼저 한 반응이라 어쩔 수 없었다.[그건 저도 모르겠어요.][아니면 오전에 어디 갔었다고 대충 둘러대기라도 해봐.][안돼요, 그럼 더 수상하잖아요. 우리가 방금 지수 씨 달래주자마자 문수 씨가 해명하면 지수 씨도 우리가 알려줬다는 거 눈치챌 거에요. 지수 씨가 우릴 탓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 방법은 별로 인 것 같아요.][그럼 어떡해요?]예수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소이연이 말했다.[그냥 이대로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 ?][? ? ?][서프라이즈는 원래 이런 거에요. 실망을 하면 할수록 감동이 큰 법이죠. 어차피 다음 주가 디데이인데 며칠만 더 버티다가 프러포즈 잘하면 되죠.]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왠지 불안했던 송문수가 물었다.[그게 서프라이즈가 될까요? 괜히 놀래키는 거면 어떡해요? 그리고 지수가 나 안 받아줄 수도 있는데...][너 진짜 바보냐? 아니다, 너한테는 바보라는 말도 아까워. 진짜 지수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거야?][걱정 마요, 절대 거절은 안 할 거예요.]예수진의 핀잔과 소이연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송문수는 그들을 믿으며 대화방을 나왔다.[알겠어요 그럼.]여자들과의 대화를 마치자 남자들의 단톡방에서 또 송문수를 찾아댔다.[문수야, 지수 씨는 요즘 괜찮아?][뭐가?][이연이랑 수진 씨 요즘 지수 씨 자주 불러내진 않아?][아니? 왜 그러는데.][수진이랑 이연 씨 요즘 이상한 것 같아서, 둘이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물어봐도 대답도 잘 안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