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좀 진정해요.” 육가희도 육은숙의 화난 모습에 깜짝 놀랐다.육은숙은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불같이 화를 냈다. 화가 너무 나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그녀는 계지원과 예수진의 결혼 소식과 심지어 아이도 하나 있다는 뉴스를 보고 치밀어오르는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육은숙이 어떻게 계지원과 예수진이 결혼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녀는 예수진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예수진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수치와 오점이었다. 몇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예수진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파괴하고 싶었다.“계지원, 내 말 똑바로 들어. 지금 당장 예수진과 이혼해. 그리고 즉시 너와 예수진은 이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이라는 사실을 언론에 알려.” 육은숙은 큰 목소리로 계지원에게 호통쳤다.“그럴 순 없어요.” 계지원은 단호하게 그의 입장을 밝혔다.“계지원!”“대신에 내가 육씨 가문과 모든 관계를 끊는다는 사실은 외부에 공포할 수 있어요.”계지원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고 어떠한 양보의 여지도 없이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뭐라고?” 육은숙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육씨 가문과 관계를 끊겠다고? 계지원, 넌 양심이 있기나 해? 이 몇 년 동안 육씨 가문이 널 섭섭하게 대했어? 내가 널 섭섭하게 대했어? 내가 고작 그따위 신분을 가진 네 과거도 들춰내지 않고 진심으로 대해줬는데 그깟 예수진 하나 때문에 지금 육씨 가문과 관계를 끊으려 한다니 이게 말이 돼?” 그녀의 목소리는 고함을 넘어서 포효로 넘어갔다.계지원은 방금 예수진이 들어간 그 방을 흘낏 바라봤고 문이 잘 닫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계지원은 예수진에게 육은숙이 다시는 그녀의 트집을 잡으려 오지 못하게 약속했었기에 그녀가 불쾌한 일을 듣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다행히 집 안의 방음이 잘 되어 있어 문만 닫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계지원은 분노에 찬 육은숙을 돌아보며 확실하게 자기 입장을 반복했다. “난 육씨 가문과 관계를 끊을 거예요.”“계지원!
육가희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고 나니 가슴이 떨려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아니다.육가희는 육씨 가문이 계지원의 손에 들어가게 방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예수진이 그녀보다 더 잘 사는 꼴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육가희는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는 고통을 견뎌내 어렵게 오늘의 이 자리까지 왔는데 나중에 모든 것이 예수진에게로 넘겨지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나를 인정한다고요?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한 적 있나요?” 계지원은 조롱이 섞인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 사람이 나를 인정한다면 과연 나를 양아들의 신분으로 그 사람 곁에 남겨뒀을까요? 그가 나를 여기에 데려온 이유는 단지 나를 돌볼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 겁니다. 육씨 가문의 밥을 먹을 입이 하나 더 늘었다고 해서 뭐 달라질 게 있나요? 나 계지원이 하나 늘어난 사실은 육씨 가문에 개 한 마리 키운 것과 무슨 차이가 있나요?”“계지원, 그만해!” 육은숙은 더 이상 계지원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그녀는 계지원이 이렇게 자기 아버지를 비난하는 꼴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다.“나도 그만두고 싶거든요.” 계지원은 쌀쌀한 눈빛으로 육은숙을 쳐다봤다. “이미 오래전부터 난 이 지긋지긋한 관계를 그만두고 싶었어요. 지금 이 기회가 얼마나 좋아요. 우리 각자 삶을 살기로 하죠.”“넌 진짜 예수진을 위해 이렇게까지 나와 다퉈야 하겠어? 육씨 가문에겐 이제 우리 둘밖에 남지 않았는데 넌 우리가 죽든 살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을 거야?”“다투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내가 아니라 당신이죠.” 계지원은 추호의 동요도 없이 전혀 타협하지 않았다.“좋아, 계지원.” 육은숙은 더 이상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그 여자를 위해 나와 연을 완전히 끊으려고 한다면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나중에 네가 오늘에 내린 결정을 후회하지 않기를 바랄게.”“죽는 날까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계지원은 단호하게 자기 의사를 표시했다.육은숙은 이를 꽉 악물고 옆에 있는 육가희에게 말했다.
예수진은 항상 계지원의 뒤를 쫓아다니며 그를 “작은 삼촌”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는 그녀보다 고작 몇 살 더 많은 아이일 뿐이었다.처음에는 솔직히 말해서 계지원이 예수진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환경에 처음 와서 그는 누구에게나 다 차갑게 대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계지원은 그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했다.하지만 예수진만 유독 열정적이었다.어릴 때 그녀는 에너지가 끝없이 넘치는 사람처럼 계지원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 항상 그를 졸졸 따라다녔다.계지원이 숙제를 하면 그녀는 그의 발 주변에 엎드려 놀았고 그가 피아노를 연습하면 그녀는 곁에 앉아 집중해서 들으며 가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물론 가사는 그녀 마음대로 지었고 음정도 맞지 않았다.그리고 계지원이 잠을 자면 그녀는 가끔 그의 침대에 올라와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어쨌든 계지원이 무엇을 하든 항상 꼬마 한 명이 그의 곁에 있었다.그 꼬마는 계지원 옆에서 때로는 왁자지껄 떠들며 쉴 새없이 얘기를 했고 때로는 조용히 그를 기다리기도 했다.예수진이 있어 계지원은 그나마 육씨 가문에서 덜 억압적이고 조심스럽게 생활할 수 있었고 육씨 가문에 대한 애정도 싹트게 했다.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들 사이의 감정도 조용히 변화가 생겼다.언제부터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계지원은 예수진에게 연애 감정을 품게 되었다. 아마도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그에게 구애하기 시작한 순간부터였을 것이다.계지원이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여자들이 그를 짝사랑했고 고등학교에 다니자 여자들이 그에게 적극적으로 고백하기 시작했다.그렇게 많은 고백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그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언제나 예수진이었다.예수진도 그때는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소녀에 불과했다. 계지원은 왜 그녀가 아직도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았는지 답답하고 조급할 때도 많았다.하지만 놀랍
그러나 계지원은 예수진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그녀가 평생 자신을 원망하길 바랐다.그녀가 자신처럼 힘들기를 바라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꿈에도 예수진이 육씨 가문의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예수진도 그만큼 힘들었기에 이 사실에 기뻐해도 될지 몰랐다.사실 그는 정말로 기뻤다.예수진과 피가 섞이지 않았기에 함께 해도 되었다.육은숙이 예수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시간이 필요했다.예수진은 그녀의 남편이 바람피운 증거였기에 아마 평생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그리하여 예수진과 함께 하는 유일한 방법은 육씨 가문과 인연을 끊는 것이다.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육청호를 찾아가 모든 사실을 알렸다.육청호는 그의 말에 즉각 대답하지 않고 이후에 다시 얘기하자고 그를 돌려보냈다.그는 앞으로도 얘기할 날이 많다고 생각하며 육청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또한 몇 년간 자신을 길러준 육청호에 대한 효도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예수진은 이미 하도경과 함께 했다.그는 항상 이렇게 한발 늦었다. 항상 그녀를 놓쳤다.계지원은 다시 한번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예수진과 하도경에게 축하를 보내려 안간힘을 썼다.그녀가 행복하면 됐다. 그들이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걸로 됐다.계지원은 몇 년 동안 홀로 꿈속에서 예수진을 만나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미어지는 통증에 아파 깬 경험에 이미 익숙했다.그는 그렇게 한동안 하도경과 예수진의 달콤함을 바라보며 그녀가 이미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예수진이 하도경의 어머니에게 위협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는 예수진과 평생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예수진이 하도경의 어머니에게 위협을 받는 것을 알게 된 계지원은 예수진의 사랑을 지켜주려 노력했다. 결코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예수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계지원은 그녀가 하도경과의 이별 때문에 아파하길 원하지 않았다.예수진의 태도는 완강했다.그녀는 하도
방문이 열리자 계지원은 정신을 차리고 소파에 누운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예수진은 하연을 데리고 나왔다.“하연이가 나가 놀고 싶어 해요.”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아 하연의 장난감도 가지고 오지 않아 휴대폰을 쥐어 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가 떨어졌는지 내려가 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계지원이 내려가면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 수 있다고 한 말을 하연이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제가 데리고 갈게요.”계지원은 옆의 지팡이를 짚으며 일어섰다.“괜찮아요. 오늘 힘들었으니까 제가 갈게요. 하연이와 주위를 둘려보려고요.”가연의 말에 계지원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오늘 하루의 업무는 정말 많았다.그중 제일 힘들었던 건 역시 예수진에게 설명하는 것이었다.“괜찮아요. 하연아, 할머니랑 같이 나가자.”“앗싸, 드디어 나간다!”하연은 흥분하여 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아이들의 기쁨은 쉽게 감염되었다.그 모습에 계지원의 입꼬리도 올라갔다.하연이 가연과 나간 뒤 예수진이 물어왔다.“나갔어요?”“네.”계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미안해요.”예수진은 그의 말에 멍해졌다.“괜찮아요, 스스로 해결했으면 됐어요.”예수진은 이미 예상했었다. 그러나 육은숙의 반응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언제든지 직면해야 할 일이었기에 예수진은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그러나 이미 이 일은 그녀가 아닌 계지원이 해결할 것이라고 얘기가 끝났다.예수진이 몸을 돌리자 계지원이 그녀를 돌려세웠다.“수진 씨.”“아직 할 얘기가 있어요?”“육은숙이 우리를 겨냥할 거예요.”계지원은 사실 얘기할지 말지 주저했었다. 자신이 얘기한 후 예수진이 각자 갈 길을 가려고 할까 봐 무서웠다.그녀는 그와 함께 구덩이에 빠질 이유가 없었다.그러나 그도 계속 속일 수 없었다.육은숙은 계지원 뿐만 아니라 예수진도 겨냥했다.그래서 그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알리는 것이다.“당신을 지킬게요. 그런데 당신이 패해를 입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그녀는 소이현이 계지원과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가 생각하는 게 아니야.”“상황이 이렇게 됐어. 전화로 말하기 좀 그래. 아무튼 가짜 결혼이야, 좀 지나면 이혼할 거야.”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너도 황당하지? 나도 그래, 그런데... 나도 선택지가 없었어.”“황당해서가 아니야.”“그냥 너무 의외야.”“뭐가 의외야.”“간신히 결혼했는데 왜 이혼해?”“뭐가 간신히야...”“계지원한테는 간신히 결혼한 거지.”“너랑 지수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나랑 지원 씨는 서로 감정이 없어.”“감정이 있는지 없는지는 너희 부부 속사정이고, 우리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그냥 축하하는 거야.”“다 가짠데 뭘 축하하는 거야.”“수진아, 솔직히 말해도 돼.”“나 지금 엄청 솔직해.”예수진은 계속하여 고집을 부렸다.“모든 걸 내가 직접 너에게 말하고 싶지 않아. 너희 부부가 마음을 열고 해결했으면 좋겠어. 너랑 계지원씨 사이에서 네가 억울한 쪽은 아니야.”소이연은 육현경에게서 많은 얘기를 듣고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계지원이 얼마나 말없이 참고 있는 것도 알았다.둘 사이에서 예수진은 상처를 받은 뒤 마음대로 발설할 수 있었다.그러나 계지원이 받은 상처는 너무나 깊숙하여 말할 수도 없었다...지금 돌고 돌아 두 사람이 겨우 결혼을 했다. 그런 두 사람이 가짜 결혼을 했다니 소이연은 결코 속지 않았다.어찌 되었던 두 사람의 상처는 둘이 회복해야 했다.“맞다, 나 네 딸을 보고 싶어.”소시연은 갑자기 하연이 생각났다.“그래.”“수진아, 나랑 지수한테까지 애를 낳은 걸 속일 줄은 몰랐어.”“너희들이 그렇게 똑똑한데 말하면 애 아빠가 지원 씨인걸 알아챘을 거잖아. 그러면 지원 씨에게 나를 책임지라고 할거고.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이랑 함께 하고.”“지원 씨가 애 때문에 너랑 같이 있을까 봐 그러지.”소이연의 말에 예수진은 말문이 막혔다.“아니라고 했지. 나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어
“그래, 악연이야.”예수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나랑 계지원은 첫 만남부터 잘못됐어. 그와의 모든 건 다 우연이야, 결혼까지도.”“그렇지 않을 수도.”소이연은 계지원이 그녀와 어렵게 함께 해서 예수진이 그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녀를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쉽게 놓아주지는 못한다.“너와 얘기하고 싶지 않아.”예수진은 더 이상 그녀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래, 좋은 소식 기다릴게.”“그러던지.”예수진에게 이혼이 바로 좋은 소식이었다.소이연도 더 이상 이 주제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하연의 사진 좀 보내봐. 요 며칠 바빠서 가기는 어려워. 나 빨리 하연이 보고 싶어. 어떻게 보면 우리도 친척 사인데.”“친척? 잊을 뻔했네. 계지원이 육씨 가문 사람이라 하연이는 민이보다 어른이네.”예수진은 참 우스웠다.“응, 어른이지.”“친자식이 아니니 망정이지, 민이가 얼마나 억울하겠어. 이연아, 너 그거 알아? 하연이를 낳고 민이와 선을 볼가 생각했어. 민이는 정말 잘 생겼어. 현경 씨랑 너를 닮으면 정말 한 인물 할 거야.”“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우리 하연이가 부족해?”예수진은 발끈했다. 하연이도 어디 하나 빠지지 않았다.“보지도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그럼 나이 차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연이가 세 살이고 민이가 열 살이잖아. 나는 괜찮아. 남자가 나이 많으면 더 자상해서 나는 더 좋아.”소이연은 예수진에게 근친은 결혼이 불가함을 어떻게 말할지 고민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수진아, 계지원씨한테도 물어봐야지. 어떻게 생각하는지.”“왜 물어봐야 하는 거야? 하연은 내 딸인데.”“내 말 들어.”“...”“됐어, 나 일 있어. 너희 신혼 방해하지 않을게.”“신혼 아니라니까.”“끊을게.”예수진이 반박했으나 소이연은 듣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어이가 없어진 예수진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뭘 해야 할지 몰랐다.지금 너무 엉망이 되어 냉정하고 싶었지만 뭘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가연은 좋은 일을 위한 액땜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예수진은 아래로 내려가 한바퀴 크게 돌아서야 놀이터를 찾았다.고급 아파트라서 안에는 모든 것이 구비되었다.그녀는 작은 놀이터라고 생각했으나 예상외로 세 층이나 되는 큰 놀이터였다.그제서야 가연의 걱정이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큰 곳에서 하연이가 뛰면 계지원은 아마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그녀는 하연이 대신 한 곳을 바라보며 놀이터 근처에 서있는 계지원을 발견했다.예수진은 다가가 계지원의 눈빛을 따라 원숭이처럼 노는 하연을 보았다.“먼저 들어가요. 내가 하연을 돌볼게요.”갑자기 들리는 예수진의 목소리에 계지원은 깜짝 놀랐다.계지원은 하연이 돌보기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그리고 예수진이 올 거라고 예상도 못했기에 이렇게 놀란 것이다.“괜찮아요, 힘들지도 않아요.”계지원은 평온을 되찾으며 말했다.“그럼 저기 가서 앉아요.”저기 의자가 있는데 지팡이를 짚고 힘들지도 않단 말인가.“괜찮... 그럼 같이 가서 앉아요.”거절하려던 그는 다시 말을 바꾸었다.예수진은 하연이가 안에서 잘 놀고 있고 안전시설도 잘 구비되었기에 안심하고 계지원과 함께 가서 앉았다.둘은 한 벤치에 앉아 조금 거리를 두며 앉았다.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다.“아까 이연이가 전화했어요.”예수진은 왜인지 모르지만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그와 아무 말 없이 함께하는 게 익숙한데도 말이다. 이미 입을 열었으니 그냥 말을 계속 이었다.“민이가 잘 생기고 철도 들었고 똑똑해서 좋다고 생각해요.”“네.”계지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좋은 남자는 적으니 빨리 우리 하연이의 짝이 되었으면 좋겠어요...”“켁켁켁.”계지원은 그녀의 말에 사래들렸다.“왜 그렇게 흥분해요?”문제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전에도 그들은 친척이란 이유로 헤어졌었다.민이와 하연도 엄연한 친척관계였다. 만약 하연이가 그의 자식이 아니라면 예수진은 그와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원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