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예수진의 침실로 들어갔다.“묻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봐.” 예수진은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았다. 사실 숨기는 게 꽤 힘들었으니까.그녀는 마침 언론에 공개된 지금이라면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계지원의 아이가 맞지?” 하지수는 직설적으로 자기 추측을 꺼냈다.예수진는 그 말에 꽤나 충격을 받았다.하지수와 이현은 분명 알아챌 수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어떻게 하연이 하도경의 아이일 것이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계지원의 아이를 낳아서 이렇게 숨어서 지내고 있었어?” 하지수의 눈을 가늘게 뜨며 질문했다.“아니야.” 예수진은 서둘러 부인했다. “난 임신이 확정되기 전에 이미 이곳을 떠나려고 했어. 그때 장안시가 나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줬다고 생각해서 무지무지 슬펐거든.”“계지원은 그 뭐야, 책임감이 없는 그런 사람인 거야?” 하지수가 연달아 질문했다.“그가 널 붙잡지 않았어?”“날 붙잡는다고?” 예수진은 콧방귀를 뀌며 되물었다.그녀는 계지원을 온 하루 기다렸지만 결국 전화 한 통조차 없었다.그래서 예수진은 철저히 체념했다.그때 그 일은 그냥 우연이었을 뿐이야.하연만 없었다면 그녀는 진작에 그때의 일을 깔끔히 잊어버렸을 것이다.“난 계지원이 그렇게 책임감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너희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는 건 아닐까?” “어떤 오해가 있을까? 네 말대로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 사이의 가장 큰 오해는 내가 일방적으로 그가 날 좋아할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계지원이 널 좋아하는 건 확실해.” 하지수는 확신에 차 있는 말투로 말했다.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엄연히 눈치챈 사실일 것이다.“계지원은 위장하는 데 능숙한 사람이야.” 예수진은 솔직한 생각을 털어놨다.“수진아, 이건 내 생각인데 네가 계지원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하지수는 진지하게 그녀의 주장을 부인했다.“아무런 오해도 없어.” 하지만 예수진도 입장이
예수진은 말문이 막혔다.모든 건 계지원이었다.계지원이 없으면 그녀가 살 수가 없단 말인가?계지원이 책임지고 싶었으면 벌써 책임졌을 것이다. 이렇게 모른 척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책임을 지지 않을 거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예수진은 더 이상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많이 말해도 시간 낭비다.하지수는 더 말하고 싶었으나 갑자기 울리는 방문 소리에 멈추었다.가연이 고개를 들이밀었다.“수진아, 계지원이 왔어.”“...”예수진은 당황스러웠다.하지수는 눈빛으로 말했다.‘거봐, 계지원이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뭐 하는 거야. 빨리 나가서 계지원과 너의 스캔들을 해결해.”하지수가 재촉했다.예수진은 입술을 깨물다가 결국 하지수와 함께 방을 나갔다.거실 밖에서 계지원이 이미 하연을 안아 들었다.하연은 얼굴을 계지원의 품에 묻고 말했다.“아빠, 오늘 나 데리고 놀러 가는 거야? 근데 엄마가 집에 있는데, 엄마가 알아채면 어떡해?”예수진은 미간을 찌푸렸다.‘하연이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하지수도 놀랬지만 금세 이해가 됐다.하연과 계지원 사이에 이미 연락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수진만이 계지원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계지원같이 총명한 사람이 어떻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오늘 스캔들이 터져 계지원이 반응을 하지 못했지만 일찍이 예수진이 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계지원의 성격으로 이 일을 어떻게 처리 할지 생각을 한 후에 예수진에게 알렸을 것이다.계지원은 예수진과 하지원을 보고 하연을 내려 놓았다.“아빠가 엄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거든? 잠시만 혼자 놀아도 돼?”“싫어.”하연은 계지원의 목을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아빠랑 놀 거야.”“하연이 착하지?”“나 아빠랑 놀고 싶어.”하연은 불쌍한 눈빛으로 계지원을 돌아 보았다.예수진과 하지수는 웃음을 띤 계지원을 그렇게 바라보았다.“조금 있다가 엄마랑 아빠가 얘기를 다 하면 아빠랑 놀자.”“그럼 아빠랑 같이 자도 돼? 오늘 아빠랑 같이 자고
전형적인 딸바보였다.계지원은 하연을 내려놓고 예수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원래 당신이랑 상의하려 했어. 어떻게 하연이 스캔들을 처리할지.”“언제부터 안 거예요?”예수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만약 지금도 하연과 계지원의 관계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녀는 정말 멍청한 것이다.“당신이 술에 취해서 데려다주던 그날 밤에요.”계지원은 대답했다.“친자 검사를 한 거예요?”예수진은 얼굴이 어두워졌다.“아니요.”“그럴 필요가 없었어요.”“그렇게 확신해요?”예수진은 조소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확신하진 않아요. 하지만... 누구의 아이든 상관없어요.”말하는 계지원을 예수진은 가만히 바라보았다.“일을 해결하죠.”계지원은 화제를 전환했다.예수진도 쓸데없는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다.그들은 쇼파에 앉았다.하연은 가연에게 안겨 방안으로 들어갔다.“지금 세 가지 방안이 있어요. 첫 번째는 하연이 당신의 친딸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친척의 아이라든지 친구의 아이라고 하는 거죠.”“부정은 안 할 거예요.”예수진은 이 방안을 거절했다.이건 하연에게 너무 불공평했다.하연이가 지금은 어려서 모르는 것뿐이다.시간이 지나서 크면 이 스캔들을 알게 되면 큰 상처로 남을 것이다.그리고 하연이가 밖에서 자신을 “아줌마”라고 부르는 건 더욱 하기 싫었다.“그래요, 그럼 두 번째는 하연이가 친 딸임을 인정하는 거예요. 를 촬영할 때 사생아가 없다고 했는데 지금 인정하면 허위적이라는 타이틀이 붙게 되어서 부정적인 영향이 갈게요.”예수진도 물론 알았다.“그렇다 해도 하연이를 선택할 거예요.”“그럼 세 번째 방안이 있어요.”계지원은 예수진을 바라보며 말을 한참이나 멈추다 다시 입을 열었다.“하연이가 우리 아이임을 인정하는...”“안 돼요!”예수진은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수진아, 계지원씨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들어나 봐.”보다 못한 하지수가 끼어들었다.“어떤 이유도 듣기 싫어.”예수진은 너무 싫어했다.
“스캔들을 덮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저번처럼 자신의 다른 스캔들로 덮으려는 건 아니죠?”예수진은 냉정하게 물었다.하지수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예수진이 너무 계지원에게 독한 것이 아닌가?이것이 예수진이 할 수 있는 일인가?너무 양심이 없었다.계지원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그녀가 너무 바라는 것이 많은 것 아닌가.하지수는 속으로 많은 욕을 했지만 예수진이 친구였기에 내뱉지는 않았다.그녀는 계지원의 침묵을 바라보았다.하지수는 솔직히 조금 긴장되었다.그녀는 그가 허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만약 허락하면 이후에 둘은 더욱 가까워질 수 없었다.이 기회를 빌어 둘을 가까이 묶어두면 헤어질 수 없다.예수진이 연예계에 얼마나 돌아가고 싶은지 모두 다 알고 있을 것이다.“아니요.”계지원이 입을 열었다.예수진은 냉정하게 웃었다.하지수도 한숨 돌렸다.계지원이 결국 거절을 한 것이다.이유는 모르지만 계지원과 예수진의 사이에서 예수진이 항상 수동적이지만 억울한 건 계지원이라고 생각되었다.“저는 스캔들 거리가 없어요. 스캔들이 터져도 연예계에서는 봐줄 거예요. 나이가 많은데 연애하는 건 당연한 거죠. 스캔들 거리도 아니죠...”“추근덕대던 여배우의 스캔들을 터뜨리면 되죠.”예수진이 입을 열었다.“...”계지원은 말문이 막혔다.하지수도 입을 굳게 닫았다.그녀의 친구가 아니면 언녕 따귀를 때렸을 것이다.“하연이가 우리의 아이이을 인정하는 게 가장 좋은 방안이에요. 저희 팀에게 해결하라고 지시했어요.”계지원은 화를 내지 않고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이미 다 생각을 했는데 나의 동의가 필요해요?”예수진이 조소했다.그렇다.계지원은 오기 전부터 세 번째 방안으로 유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그리고 그 역시도 세 번째로 준비하고 있었다.이기적이었다.이 방안을 핑계 삼아 예수진과 함께 하고 싶었다.미디어에 하연이를 노출되면 그가 좋아할 것이다.“그 전에 우리 모두 준비해야 해요.”계지원은 예수진의 말을 무수하고 상냥
예수진은 고집을 피웠다.그녀는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말해요.”계지원은 머리를 끄덕였다.“첫째, 결혼은 미디어에 보여주기 위한 가짜예요. 시간이 지나면 이혼하는 거죠.”계지원은 입술을 깨물며 승낙했다.승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가 승낙하지 않으면 예수진이 진행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자신에게 그녀와 함께 할 시간을 벌게 하는 것이다.“둘째, 혼인신고를 했어도 같이 살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은 당신 집에, 나는 내 집에...”“안 돼요.”계지원은 단박에 거절했다.예수진은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결혼을 알리면 미디어에서 따라붙을 텐데, 우리가 같이 살지 않으면 어떻게 생각할까요?”“당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요.”계지원은 진지하게 약속했다.“같이 살기는 하지만 잠은 따로 잘게요.”“당연하죠.”예수진은 흥분했다.계지원은 그녀의 모습에 얼굴이 굳었다.그는 예수진이 자신과 함께 한집에 사는 것을 이토록 싫어할 줄은 몰랐다.“셋째, 엄마가 우리를 승낙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직접 가서 설명해요. 나는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예수진은 냉정하게 말했다.그러나 그녀는 육은숙의 얘기를 꺼낼 때마다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래요.”계지원은 단번에 허락했다.거실은 순간 조용해졌다.모든 것이 정해지자 그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그러자 하지수가 분위기를 풀어 보려 입을 열었다.“그럼 지금... 혼인 신고를 하려고 가는 거야?”계지원은 예수진의 허락을 받으려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싫었지만 단지 가짜 결혼이었고 이 기간이 지나면 다시 재혼할거라 생각했다.“등기부등본과 신분증을 가지러 갈게요.”예수진이 소파에서 일어났다.떠날 때, 계지원과 하지수는 마치 큰일을 끝낸 듯 동시에 크게 심호흡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계지원은 입을 열었다.“감사합니다.”하지수가 자신을 위한 것을 그는 알아차렸다.“수진이에게 잘해주세요.”“네.”계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진은 등기부등본과 신분증을 가
혼인 신고를 마친 후 세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하지수는 표정이 가장 밝았다.“신혼부부 둘이 어디로 갈 거야?”예수진은 그런 하지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녀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흥분한 거지?“수진 씨 집에 먼저 갔다가 하연이한테 가죠. 그리고 짐도 가지고...”계지원의 목소리는 예수진이 화가 날까 봐 점차 낮아졌다.예수진은 화가 났다. 어리바리하게 그와 한배에 탄 듯한 느낌이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계지원이 그녀를 또 속일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그는 지금 그녀를 돕고 있다.차는 다시 예수진의 집으로 돌아갔다.하연은 화가 나 있었다.그들이 나갈 때 하연이에게 말을 하지도 않아 하연은 아빠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서 오랫동안 울었다.예수진과 계지원이 다시 돌아오자 하연은 볼멘소리로 말했다.“하연아, 이리 와.”예수진은 아직 눈물이 어린 하연의 얼굴을 보며 하연을 불렀다.“싫어.”하연은 거절했다.예수진은 하연의 심술에 조금 화가 났다.“하연아, 아빠한테 와. 아빠 집에 가서 자는 게 어때?”계지원은 자상한 목소리로 물었다.하연은 그의 목소리에 눈을 반짝였다.“진짜? 오늘 아빠랑 잘 수 있어? 원래 아빠는 내가 자면 떠나잖아?”하연은 세 살 밖에 되지 않았어도 논리정연하게 되물었다.“진짜야.”계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연은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계지원의 품으로 달려갔다.예수진은 그런 하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자신이 몇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느낌이었다.“빨리 옷을 갈아입고... 지원씨 집으로 가자.”예수진은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계지원씨 집으로?”가연은 깜짝 놀랐다.“네. 하연이가 미디어에 노출이 되어서 계지원 씨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쪽으로 가서 잠시 피해 있으려고요.”예수진은 이미 계지원과 혼인 신고를 올린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그래.”가연은 연예계의 일을 잘 알지 못했지만 예수진의 뜻을 따랐다.단지 몸을 돌려 짐을 쌀
그는 예수진이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것을 알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짐을 싸고 난 후 계지원은 차를 불러 떠났다.하지수도 눈치가 매우 빠르게 ‘한 가족’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핑계를 대며 떠났다.그들은 한 차량에 앉았다.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하연이가 매우 활발해 차에서 계속 말을 했다. 예수진은 그런 하연이 시끄럽다고 느껴질 정도였다.계지원의 대저택에 도착하자 하연은 흥분하여 안으로 달려갔다.“아빠, 집이 엄청 커. 너무 좋아. 여기 유리도 엄청 커서 멀리도 다 보여. 아빠 집 너무 좋아. 자주 놀러 와도 돼?”“하연이는 앞으로 여기서 살아도 돼.”계지원은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상하게 말했다.“진짜?”“가짜야.”예수진은 냉정하게 말했다.“조금 있다가 돌아갈 거야.”“엄마 미워.”하연은 코를 찡그렸다.계지원은 그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아빠가 엄마 도우러 갈게. 얌전히 있어.”“응.”계지원은 예수진을 보며 말했다.“어느 방이 좋아요? 내 방도 되고...”“무슨 생각하는 거예요?”“내 말은, 내 방이 좋으면 내가 나가 줄 수도 있어요. 제가 다른 방으로 갈게요.”계지원은 급하게 설명을 붙였다.“됐어요. 아무 방이나 괜찮아요.”계지원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예수진과 가연에게 객실을 준비했다.그의 집은 5개의 방이 있었다.하연에게 방 하나는 충분했다.그러나 하연은 아직 어렸기에 가연과 같이 잤다.예수진과 가연은 아무 방이나 골랐다.짐을 정리한 후 점심을 준비했다.“밥 먹어요.”계지원이 그들을 불렀다.“직접 하신 거예요?”가연은 매우 놀랐다. 그가 밥을 할 줄은 몰랐다.“아니요.”계지원은 급히 부정했다.“배달이에요. 뭘 좋아할지 몰라서 여러 가지 시켰어요.”“가리는 것 없이 다 잘 먹어요.”그렇게 그들은 같이 밥을 먹었다.하연은 계지원의 옆에 꼭 붙어 있었다.예수진이 아무리 눈치를 줘도 하연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계지원더러 밥을 먹여달라고까지 했다.“모두 수진이가 좋아
“뭘 좋아하세요?”가연이 물었다.음식을 차리기로 한 이상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가리는 것 없어요. 해주는 것 다 잘 먹어요. 바쁠 때는 거의 집에서 먹지 않아요.”“그럼 특별히 싫어하는 게 있나요? 조심하려고요.”“없어요.”“네.”가연은 머리를 끄덕이며 장난스레 웃었다.“그럼 조금은 쉽겠네요. 수진이와 하연이는 너무 음식을 가려요.”“수진 씨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죠.”계지원은 웃으며 가연과 대화를 나누었다.“하연은 수진이를 닮아서 가리는 게 많아요. 하루는 밥을 너무 먹지 않아서 살이 너무 빠졌죠.”“애가 너무 뚱뚱해도 좋지 않아요. 하연은 지금 정상 체중이에요.”예수진은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었다.“아니요, 조금 살이 쪄야 해. 너무 야위었어.”가연은 자신의 생각을 고집했다.그 모습에 예수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하연의 밥에 관해서 그녀는 가연을 이기지 못했다.계지원은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갔다.이런 분위기가 그는 너무 좋았다.점심을 먹은 후 하연의 낮잠을 자러 가는 습관 때문에 계지원은 하연을 데리고 자러 갔다.가연과 예수진은 거실에 있었다.그 거실은 자신의 집의 세 배 크기였다.둘은 소파에 앉아서 여러 얘기를 나누었다.“일이 마무리되면 돌아가요.”“여기 좋은데, 왜. 방이 크니까 하연이 마음껏 뛰어놀 수도 있고. 우리의 집은 너무 작아.”“빨리 큰 집으로 옮길 수 있게 할게요.”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이후는 잘 풀릴 것이다.“...”가연은 여기에서 사는 것이 좋으니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그러나 둘은 또 얘기가 통하지 않았다.계지원은 하연을 잠재운 후 나왔다.“하연이 잠들었어요?”가연이 물어왔다.“네, 자요.”“수고했어요.”“아니요, 괜찮아요. 예전에 너무 수고하셨어요.”“하연이는 얌전해서 돌보는게 쉬었어요.”계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과하게 부정하면 오히려 가짜 같았다.“조금 있다가 메이크업하시는 분이 오셔서 메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