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한참을 콜록거리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죄송해요. 전 그냥 궁금해서… 어렸을때부터 몸이 안 좋아서 저는 친구가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그냥 남들은 어떻게 연애하는지 궁금했어요. 저는 계속 저랑 루카스가 보통 커플이랑 다른 느낌이 들었거든요.” 임아영이 급히 설명했다.“괜찮아요. 방금은 저도 사레가 들려서 그랬어요. 다른 뜻은 없고요.” 소이연도 설명했다.“그럼 남자친구랑 어떤 연애를 하고 있는지 물어봐도 돼요?” 임아영이 물었다.“뭐가 궁금한 거예요?”“그러니까, 잤었어요?” 임아영은 쑥스러운 듯했지만 집착했다.“저희는... 아직이요.”“왜요?” 임아영이 놀라며 말했다. “저는 저랑 루카스만 이러는 줄 알았어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다들 남녀 간에 확실한 연인 관계가 되면 거의 그러던데, 루카스는 저랑 잘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저희 연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언니도 그러실 줄은 몰랐어요.”“저...... 저는 예전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그리고 저희는 이제서야 서로에게 확신이 생겨서 아직 이른 것 같아요.”소이연이 핑계를 대며 얼버무렸다.“그럼 언니 생각에 저랑 루카스는 벌써 2년이나 사귀었는데, 진작에 그랬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임아영은 진지하게 물었다.이치대로라면 확실히 그렇긴 하다.지금처럼 개방적인 사회에서 감정이 깊어져서 몸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특히 루카스와 임아영은 더 개방적인 해외에서 나고 자랐기에 두 사람이 그렇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루카스에게 다른 문제가 있는 거 외에는 말이다. 이런 저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소이연은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순간 소이연은 갑자기 그날 아침이 생각났다.“이연 언니, 언니 얼굴 빨개진 거예요?” 임아영은 진지하게 그녀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음? 아.” 소이연은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른 것을 느끼고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며 말했다. “아니요. 열이 아직 안 내렸나 봐요.”“언니 루카스보다 감기가 심한 것 같아
임아영은 신나게 병실을 나섰다.그녀의 단순한 뒷모습을 보는 소이연의 낫빛은 훨씬 더 어두워졌다.아까 그녀가 임아영이 자신을 탐색하고자 한다고 의심만 했다면, 지금은 임아영이 자신을 탐색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녀와 루카스 사이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탐색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임아영은 고의로 그녀와 루카스가 자지 않았다는 말을 하며 그녀가 기뻐하는지 아닌지 반응을 보려 했다.그래서 임아영은 루카스와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이 그녀의 몸 상태 때문이며, 그녀와 루카스의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루카스가 그녀를 얼마나 생각해 주고 위해주는지 알려주어 소이연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역시나 임아영은 그리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하지만 소이연에게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그녀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는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다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만 알면 되었다.소이연은 몸을 움직였다.열이 많이 나서 그런지 갑자기 조금 졸렸다.그녀는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예전에는 졸려도 항상 잠에 깊게 들지 못했다.눈만 감으면 머리가 너무 빨리 돌아서 진정할 수 없었고, 곧 불면으로 이어졌다.사실 그녀는 이번에도 눈을 감으면 잠에 들지 못할 줄 알았다.그래서 혼자 병실에 있더라도 누군가 병실을 지키는 건 싫었기 때문에, VIP 병실에 배치되는 간호 인력을 거절했다.혼자 링거를 맞을 때 잠에 들면 무슨 일이 생기기 쉽다. 예를 들어 주사 알레르기라던가,링거를 다 맞고 간호사를 부르지 않아 바늘을 뺄 수 없어, 피가 돌아 나오기 때문에 잠에 들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녀는 정말 잠에 들 줄은 몰랐다. 깨어났을 때는 누군가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고, 기분이 살짝은 나빴다.힘겹게 눈을 뜨니, 긴장한 얼굴의 루카스가 보였다. 그는 급히 호출 벨에 대고 소리쳤다.“빨리 와주세요. 소이연 씨가 링거를 다 맞아서 피가 돌아왔어요!”소이연은 잠시 멍하니 호스에 있는 빨간 피를 보
소이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루카스에게 욕을 했다. “내가 너한테 봐 달랬어? 네가 남의 일에 신경 쓴 거면서! 나 여기서 잘 자고 있었는데, 내가 너한테 와서 깨워달랬어? 난 차라리 네가 손가락질하는게 더 좋겠어! 내 아들을 책임지고 말고는 내 일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욕해! 네가 내 아들 아빠도 아니잖아!”“소이연!” 루카스가 이를 악물었다. “마치 자기가 높은 사람인 양 사람들 내려다보면서 도덕적 유괴 같은 짓 하지 마.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신이야? 이 선생님, 제가 오늘 죽더라도 선생님이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네? 그리고 지금 네 행동은 내 사생활이랑 인권도 침해했고, 내가 너 고소할 수도 있다고!”루카스는 화가 나서 머리에서 긺이 펄펄 나는 것만 같았다.그는 화가 나 시뻘게진 눈으로 소이연을 노려보았다. 이번엔 정말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었다.심지어 그는 왜 이 여자에게 이렇게 크게 반응하는지 알 수 없었다.그녀의 병실을 지나가다가 피가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 왠지 모를 공포감이 휘몰아쳐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빠르게 병실로 들어와 간호사를 불러 바늘을 뺐다.소이연이 미적지근하게 깨어나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렇게 스스로를 돌볼 줄 모르나?!곧 서른인 사람이 알아서 잘 보살필 수는 없는 건가?!엄마라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잘 챙기지도 못하는 건가?!도대체 엄마라는 책임감은 있는 건가!루카스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소이연, 넌 정말 죽어도 싸!”“내가 죽어도 내 일이야. 너랑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네 그 정의는 집어치워, 난 싫으니까!”루카스의 얼굴은 굉장히 안 좋아졌다.그는 거세게 뒤를 돌아 병실을 나갔다.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보였다. 임아영은 루카스의 뒷모습과 화가 머리끝까지 난 소이연을 보며 발걸음을 멈추었다.이때 간호 인력이 도착했고, 호스 안에 있던 혈액을 처리해 주었다.“이언 언니, 죄송해요.” 임아영이 갑자기 사
아마 전생에 원수였을 거야!“근데 저는 왜 루카스가 언니를 엄청 신경 쓰는 것 같죠? 언니 링거 호스에 피가 돌아 나오는 걸 보고 당황해서 허둥거리고. 언니를 욕하는 것도 언니가 스스로 잘 돌보지 않았다고 하면서 관심을 가지면서 머리 아파하고...... 어떡하죠, 저 지금 좀 질투 나요.” 임아영은 순진한 눈빛으로 소이연을 보았다.“농담하지 마세요.” 소이연은 미적지근하게 말했다. “루카스가 저한테 한 행동은 정상인의 과격한 반응일 뿐이에요. 만약 제가 이런 상황을 발견했더라도 의사나 간호사를 바로 불렀을 거예요. 루카스가 저한테 성질을 부리는 건 그저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고의로 정당한 타이밍을 찾아서 욕을 하는 게 아닐까요?”“루카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한테도 이러지 않아요.”“그래서 제가 얘기했잖아요. 저희는 상극인게 틀림 없어요.” 소이연은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아까 루카스가 그녀에게 한 말을 떠올리니 속에서 화가 들끓어 참기 힘들었다.“이연 언니, 루카스 좋아하는 거 아니죠?” 임아영이 갑자기 긴장한 듯 물었다.“그럴 리가요.” 소이연은 아주 확신에 차서 말했다.“진짜 진심으로 언니가 루카스 좋아할까 봐 걱정돼요.” 임아영은 힘들어하며 말했다.“저 진짜 루카스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잃을까 봐 정말 무서워요......”“제가 루카스를 좋아할 리가 없어요.” 소이연은 임아영의 말을 끊었다.임아영은 여전히 굴하지 않고 말했다. “언니는 정말 너무 예쁘고, 할머니 집에서 언니랑 얘기해 보니까, 능력도, 돈도 있고,전 정말 루카스가 언니 좋아할까 봐 무서워요.”“그럴 일 없어요.”“근데 언니한테만 특별하게 대해요.”“특별히 나쁜거죠.”“이연 언니, 저한테 약속해 줄 수 있어요? 영원히 저한테서 루카스 뺐어 가지 않겠다고.” 임아영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불쌍해 보였다.소이연은 입술을 살짝 문질렀다. 방금 이미 아주 확실하게 설명을 했는데 말이다. “우연히 언니랑 육현경 씨 사진 봤어요. 루카스랑 육현경 씨, 진짜
“죄송해요, 이연 언니. 저 정말 이런 부탁하고 싶지 않은데, 루카스를 잃을까 봐 너무 무서워서 그래요.”임아영이 말했다. “최소한 두 사람이 거래하지 않는 이상은 거리를 유지해 주시면 안 될까요?”“거리를 유지하라고요? 전 한 번도 그한테 먼저 다가간 적 없었어요. 전 루카스한테 관심도 없고요.”소이연은 임아영의 기대하며 불쌍한 눈빛을 보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임아영은 순간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이연 언니, 감사해요. 언니가 좋은 사람이라는 거 알아요.” 임아영은 흥분해서 말했다.그녀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그녀는 임아영이 이렇게 비참하게 감정을 파는 것이 동정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다만 그들과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고, 그들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랐다.사실 동의하든 안 하든 이렇게 해야만 했다.그녀와 루카스는 애초에 비대칭적인 관계였고, 임아영이 믿지 않았다. 임아영은 그저 그녀의 입을 통해 확실한 답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그녀는 임아영의 요구사항을 만족시켰다.“그럼 저 먼저 갈게요.” 임아영은 기쁜 듯 말했다. “이연 언니, 언니도 몸 잘 챙기세요.”“네.”임아영이 나가자, 소이연은 휴대폰을 꺼내 그대로 루카스의 번호를 차단했다.임아영이 바라던 대로.앞으로 다시는 루카스와 아무런 교집합이 없을 것이다.병원 건물 앞.루카스는 서서 임아영을 기다리며 자신의 감정을 진정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루카스.” 임아영이 뒤에서 그를 안았다.루카스는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밀어냈다.그러자 임아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안는게 싫어?”“아니.” 루카스가 말했다. “안고 어떻게 가. 손 잡아 줄게.”그러고는 임아영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임아영은 크게 실망한 눈치였다.두 사람은 차에 나란히 앉아, 임아영이 조용히 말했다. “루카스. 너 돌아오고 나서 많이 변한 거 알아?”루카스는 침묵을 유지했다.“예전에 해외에 있을 때는 다른
“그럴 일 없어. 그런 생각 하지 마.” 루카스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나도 이런 생각 하기 싫어. 근데 너 진짜 많이 변했어. 예전에 네 눈엔 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네 시선이 계속 소이연을 쫓아.....”그러자 임아영은 루카스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 진짜 너무 무서워!”“아니야. 우리 곧 결혼하잖아. 우리 부모님 오시면 바로 결혼 얘기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루카스가 위로하며 말했다. “나 사실 방금 소이연씨랑 루카스에 대해서 얘기했어.” 임아영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를 보고 있었다.루카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내가 너한테서 떨어지라고, 앞으로 말도 하지 말라고 했어.”루카스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화났어?” 임아영은 루카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조금의 변화라도 그녀는 다 느낄 수 있었다.“아니.”“소이연도 알겠다고 했어. 앞으로 다시는 너랑 연락 안 할 거라고. 나도 내가 이런 짓 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방법이 없었어.나 네가 소이연한테 넘어갈까 봐 너무 무서워. 너무 예쁘고 매력 있잖아.” 임아영은 루카스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알겠다고 했으니까 됐어.” 루카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그럼 너도 다시는 소이연한테 다가가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 임아영은 갈망하는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난 내가 먼저 다가가지 않아.” 루카스가 확신했다.“만약 같이 얽혀도 말 안 하면 안 돼?”“아영아......”“루카스 미안해. 나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이기적이게 네 인생을 이래라저래라 하기 싫고,지금 너랑 소이연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아는데, 두 사람은 너무 멋있잖아.두 사람이 엮이면 서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난 이런 비참한 방법으로 시작하기 전에 끝내버릴 수밖에 없어.만약 내가 너무 예민하고, 너무 쪼잔해 보여도, 잃는 게 두려워서 모험은 하기 싫어.”루카스는 다시 침묵을 선택했다.“내 탓하지 않을 거지?” 임아영이 불쌍하게 물어보았다.“응, 안 해
모든 사람이 배역을 배정받고, 한 쪽에 앉아 연구를 시작했다.곧 바로 자신이 이해한 대로 계지원 앞에서 연기를 했다.예수진은 가장 벽과 가까운 자리를 선택했고, 열심히 그녀의 대본을 보았지만, 보면 볼수록 잠이 쏟아졌다.다음에는 죽어도 이렇게 술 먹고 괴롭지 않아야지라고 생각했다. 어젯밤에 소이연과 하지수를 데리고 무덤으로 갈 정도로 그녀는 술에 취하면 못하는 일이 없었다.예수진은 겨우 눈꺼풀을 치켜떴다.“수진아.” 유청하와 그녀는 모두 계지원의 팀이었고, 두 사람은 저번에 같이 했었기에 관계가 나름 좋았다.그녀가 먼저 예수진의 곁으로 왔다.사실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었다. 하는 척일지라도 이런 경쟁성 예능 프로그램은 두세 사람이 팀을 꾸려야 한다.예수진은 계속 팀을 만들지 않았다. 우선 사람들이랑 함께 지낸 시간이 길지 않고, 아무도 먼저 그녀와 같이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몇몇은 심지어 그녀를 따돌렸다. 어쨌든 갑자기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아무도 그녀가 무슨 일을 겪었고, 영향을 받을지 알 수 없었다.그녀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카메라 앞에서는 척이라도 해야만 한다.그래서 예수진은 스스로 혼자 벽 쪽에 기대어 앉았다.유청하가 먼저 다가온 것은 뭔가 기쁘면서도 불안했다.“우리 같이 배역 연구하자.” 유청하가 부탁했다.“좋아.”예수진도 거절하지 않았다.만약 정말 계속 혼자였다면 다른 사람들도 욕 먹을 수 있었다.연예계는 정말 숨만 쉬어도 욕을 먹는 곳이다. “오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 보이네.” 유청하는 알아챈 듯했다.“어젯밤에 친구랑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 지금 너무 후회돼.” 예수진도 숨기지 않았다.“축하하러 갔어?” 유청하가 웃었다.예수진은 멍해졌다.축하는 아니었다.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녀가 살아남기는 정말 하늘에게 달려있었다.언제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축하할 건 없었다.“아니, 그냥 친한 친구들 안 본지 오래돼서 모였었어.”유청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네 배역은 대사
모든 사람들이 계지원의 지시에 따라 리허설을 시작했다. 간단한 동선과 대사를 맞춰보고 자유연기를 했다.예수진은 정말 너무 피곤하고 마음이 떠있어서 계속 대사를 받아치지 못했다.애초에 대사도 많이 없는데 아주 엉망진창이었다.그녀는 계지원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았다.설마 그녀를 건져 올린 걸 후회하는 건 아닐까?그래서 장혜성이 검사를 하러 왔다.그녀는 옆의 연습실에 있었고, 방음이 아주 잘 됨에도 불구하고 간혹 장혜성이 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장혜성은 아주 엄격했다. 그녀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부합하지 않으면 그녀는 인정사정 없이 눈앞에서 욕을 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은그 팀에 가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다.오늘은 시작하기도 전에 장혜성이 욕을 해 한 배우가 울었다고 한다.장혜성은 계지원의 옆에 앉았다.두 사람은 어제 예수진의 일로 다투긴 했지만 사적으로는 그런 다툼 때문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다.그냥 관점이 다른 것뿐이다. 심사위원 간에는 경쟁 상대도 없으니 앙심을 품을 일도 없었다.장혜성은 계지원 팀은 어떻게 연습하는지 보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자기 팀의 그 배우 때문에 화가 너무 많이 나서 다른 팀도 똑같은지 궁금했다.그리고 예수진의 컨디션이 저조한 것을 보고 계지원도 침착한데, 장혜성이 그렇지 않았다.“예수진 씨, 지금 꿈속이에요?!” 갑자기 장혜성의 목소리가 울려 모든 사람이 연기를 멈추었다.몇몇 겁 많은 사람들은 놀라서 흠칫했다. 얼굴도 창백해졌다.이름이 불린 예수진은 당연히 더욱 놀랐다.졸음도 싹 달아날 정도였다. “내가 한참 동안 봤는데, 대체 몇 번째 틀리는 거예요?” 장혜성은 인정사정 없이 혹평을 퍼부었다.“왜요. 어제 경기에서 제가 한 말은 하나도 안 들렸나 봐요? 오늘 이런 태도인 걸 보니?!제가 예수진 씨였으면, 부끄러운 줄 알고 꼭 용감하게 나섰을 거예요.근데 수진 씨는 지금 그냥 다 놔 버렸네요? 이건 이 자리를 준 계 감독을 모욕하는 거예요.수진 씨 같은 태도로는 영원히 유명해질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
백일잔치가 시작되기 전 예수진은 소이연과 친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급히 다가왔다.“왜 혼자와?”“그럼 누구랑 와?”“우리 조카는?”“아, 엄마한테 맡겨놨어.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몰라서 재미없어.”“...”“그러는 너는 좀 어때?”“뭐가 어떠냐고?”“네 애 말이야.”예수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의 찻잔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이라 차만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었는데 송문수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미끄러지면서 안에 있던 차가 흘러나온 것이다.송문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집어 들더니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그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찻잔을 떨군 건 그저 우연이라는 듯 하도경, 육현경과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하지수도 입을 열었다.“잘 있지. 전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젠 잘 먹고 잘 자.”“너 살 좀 찐 것 같아.”“응, 2킬로 넘게 쪘어.”“그럼 됐어.”하지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진은 파티가 곧 시작한다는 말에 계지원과 함께 자리를 떴고 그녀가 떠나가 테이블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아마도 얘기를 다 나눈 남자들 때문인 것 같았다.가만히 있기도 뻘쭘했던 하지수가 주전자를 들려 하자 송문수가 빠르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고마워.”하지수의 인사에 송문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송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임신했어?”“응.”“빠르네.”송문수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감추려 했다.적어도 결혼한 다음에야 임신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송승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게 싫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너 혼자 온 거야? 송승우는?”“서울 갔어.”“몸은 괜찮아졌어?”“응, 의족 해서 이젠 잘 다녀.”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