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길 내내 공기는 매우 고요했다. 정말 쥐 죽은 듯이 말이다.잠시 후 저택에 도착하자 소이연은 차에서 내렸다.내리자마자 차는 유유히 사라졌다.사실 소이연은 예의상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할 생각이었다.과정이 엉망진창이었어도 결국 루카스가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집까지 데려다준 것은 사실이었다.그녀가 뒤돌아 집에 들어가려 할 때, 그제서야 자신이 루카스의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됐다, 아무렴 어떠냐!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그녀의 숙면에 큰 도움이 된다.환자는 많은 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이튿날.예수진은 세 사람의 단톡방에서 “죽는 것만 못하다.”라는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일어난 사람?” 예수진이 물었다.“저 일어났어요.” 소이연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았기에 아침에 일어나서 구토까지 했다.이마를 짚으니 아마 열이 나는 것 같았다.이따가 일어나서 감기약을 먹어야 할 것 같다.“지수는?” @지수.답장이 없었다.“제일 잘 못 자는 사람이 제일 잘 자고 있네.” 예수진이 단톡방에서 농담을 했다.이때 그녀는 이미 지하철을 타고 방송국으로 가고 있었다.날이 밝으면 바로 리허설을 했다.그녀는 일어날 때 정말 죽을 것 같았다.“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소이연, “대표님인데도 늦게까지 자지도 못하고, 왜 저 같이 일하는 사람처럼 목숨을 걸어요.”“머리가 너무 아파서 잠이 안 와요.” 소이연은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됐지만, 확실히 몸이 좋지 않았다.그럴 정신도 없었다.“다음부터는 이렇게 많이 마시면 안 되겠어요.” 예수진이 말했다.“네, 다음엔 살살해야겠어요.” 소이연도 동의했다.“말이 나와서 그런데, 저 혹시 어젯밤에 꿈꾼 거 아니죠?” 예수진이 물었다. “육현경을 본 것 같은데......”“육현경 아니에요. 자료 보내줄게요.” 소이연은 예전에 천우진이 보내준 자료를 단톡방에 보냈다.예수진은 급히 자료를 열어 루카스의 모든 정보를 자세히 보았다.점점 이상한 느낌이었다.진짜 말도 안 돼.
“이연 언니!” 임아영은 소이연을 본 순간 정말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아마 병원에서 만날 거라곤 상상도 못한 것 같았다.소이연은 그대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그들에게 먼저 가라고 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다 물거품이 되었다.“우연이네요.” 그녀는 짧게 인사를 했다.“진짜 완전 우연이에요!” 임아영은 아주 흥분한 채 말했다. “이연 언니 병원에는 왜 오셨어요?”“감기 기운이 있어서요.”“언니도 감기 걸리셨어요?” 임아영이 놀라며 말했다. “루카스도 감기 걸렸어요. 열도 나고, 방금 쟤보니까 39.5도였어요.열이 이렇게 나는데 병원 안 오겠다고 해서 제가 억지로 데리고 왔어요. 얼굴 좀 봐요 원숭이 엉덩이처럼 새빨개졌어요.”소이연은 루카스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언제 어디서든 항상 자기 잘났다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얼굴은 정말 조금 많이 빨갰다.소이연은 그 모습을 보고 참지 못하고 웃었다.정말 너무나도 웃겼다!루카스도 소이연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녀를 보며 말했다. “네 얼굴은 뭐 괜찮은 줄 알아? 넌 원숭이 엉덩이보다 더 빨개!”소이연은 어이가 없었고, 이 사람의 복수심이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루카스, 너 이연 언니한테 왜 그렇게 나쁘게 대해?” 임아영이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아니야, 아주 정상적인 말투였어.” 루카스는 부인했다.“분명 나쁜 말투였어. 이연 언니는 우리 언니고, 네 누나이기도 해. 네가 이렇게 대하면 나 화낼 거야.”임아영의 목소리는 애초에 다정해서 이런 말을 해도 아무런 타격이 없었고, 오히려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알겠어.” 루카스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소이연이 먼저 내렸다.루카스와 임아영도 그 뒤를 따라 내렸다.소이연은 티 나지 않게 발걸음 속도를 올려 그들과 거리를 벌렸다.임아영은 소이연의 뒷모습을 보고 뒤돌아 루카스에게 화를 냈다. “거봐, 너 때문에 이연 언니 화나서 대답도 안 하잖아!”“그건 화난게 아니라 쪼잔한 거지.” 루카스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너
루카스를 마주친 뒤로 하루도 조용히 지나갈 날이 없었다.평생 아프지도 않던 사람이 감기도 두 번이나 걸리고, 한 번도 넘어진 적 없던 사람이 그의 앞에서 계속 넘어졌다.그야말로 그와 그녀는 천적이다.“이연 언니.”병실 입구에서 갑자기 임아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이연이 시선을 돌려 대답했다. “네, 아영 씨.”“여기 있을 줄 알았어요. 루카스도 옆방에서 링거 맞고 있거든요.” 임아영이 침대 옆으로 걸어왔다.“혼자 괜찮아요? 제가 같이 있어드릴까요?”“아니요, 가서 루카스랑 같이 있어줘요. 전 괜찮아요.”“근데 얼굴이 엄청 빨개요.” 임아영은 조금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열나서 그래요. 열 내리면 괜찮아질 거예요.”“아.” 임아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적극적으로 말했다. “이연 언니 제가 사과 깎아드릴게요.”“괜찮아요......”“저한테까지 이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요. 저희 그래도 친척이잖아요. 할머니가 계속 언니 잘 챙기라고 하세요.겨우 힘들게 찾았는데, 밖에서 고생했을 테니 꼭 잘 챙겨주라고.” 임아영은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루카스는요? 가서 같이 있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소이연은 정말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임아영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이러는 데 그냥 쫓아낼 수도 없었다.“다 큰 남자니까 괜찮아요. 근데 좀 이상해요. 평소에는 아프지도 않던 사람이 왜 갑자기 아픈 건지.”임아영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어젯밤에 대체 뭐 하고 온 건지 모르겠어요. 한밤중에 별장에서 나왔어요. 장안시에는 친구도 없을 텐데요...”임아영은 사과를 깎으며 소이연과 일상적인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저랑 루카스는 잘 모르는 사이에요.” 소이연이 화제를 돌렸다.“그것도 그래요. 제가 언니한테 이걸 묻는 것도 이상하죠.” 임아영은 마치 스스로가 웃긴 듯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소이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이렇게 적극적인 임아영을 색안경 없이 바라볼 수 없었다.비록 모든 게 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웠지만, 마치 그녀의 단순함은
소이연은 한참을 콜록거리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죄송해요. 전 그냥 궁금해서… 어렸을때부터 몸이 안 좋아서 저는 친구가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그냥 남들은 어떻게 연애하는지 궁금했어요. 저는 계속 저랑 루카스가 보통 커플이랑 다른 느낌이 들었거든요.” 임아영이 급히 설명했다.“괜찮아요. 방금은 저도 사레가 들려서 그랬어요. 다른 뜻은 없고요.” 소이연도 설명했다.“그럼 남자친구랑 어떤 연애를 하고 있는지 물어봐도 돼요?” 임아영이 물었다.“뭐가 궁금한 거예요?”“그러니까, 잤었어요?” 임아영은 쑥스러운 듯했지만 집착했다.“저희는... 아직이요.”“왜요?” 임아영이 놀라며 말했다. “저는 저랑 루카스만 이러는 줄 알았어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다들 남녀 간에 확실한 연인 관계가 되면 거의 그러던데, 루카스는 저랑 잘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저희 연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언니도 그러실 줄은 몰랐어요.”“저...... 저는 예전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그리고 저희는 이제서야 서로에게 확신이 생겨서 아직 이른 것 같아요.”소이연이 핑계를 대며 얼버무렸다.“그럼 언니 생각에 저랑 루카스는 벌써 2년이나 사귀었는데, 진작에 그랬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임아영은 진지하게 물었다.이치대로라면 확실히 그렇긴 하다.지금처럼 개방적인 사회에서 감정이 깊어져서 몸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특히 루카스와 임아영은 더 개방적인 해외에서 나고 자랐기에 두 사람이 그렇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루카스에게 다른 문제가 있는 거 외에는 말이다. 이런 저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소이연은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순간 소이연은 갑자기 그날 아침이 생각났다.“이연 언니, 언니 얼굴 빨개진 거예요?” 임아영은 진지하게 그녀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음? 아.” 소이연은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른 것을 느끼고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며 말했다. “아니요. 열이 아직 안 내렸나 봐요.”“언니 루카스보다 감기가 심한 것 같아
임아영은 신나게 병실을 나섰다.그녀의 단순한 뒷모습을 보는 소이연의 낫빛은 훨씬 더 어두워졌다.아까 그녀가 임아영이 자신을 탐색하고자 한다고 의심만 했다면, 지금은 임아영이 자신을 탐색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그녀와 루카스 사이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탐색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임아영은 고의로 그녀와 루카스가 자지 않았다는 말을 하며 그녀가 기뻐하는지 아닌지 반응을 보려 했다.그래서 임아영은 루카스와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이 그녀의 몸 상태 때문이며, 그녀와 루카스의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루카스가 그녀를 얼마나 생각해 주고 위해주는지 알려주어 소이연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역시나 임아영은 그리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하지만 소이연에게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그녀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는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다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만 알면 되었다.소이연은 몸을 움직였다.열이 많이 나서 그런지 갑자기 조금 졸렸다.그녀는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예전에는 졸려도 항상 잠에 깊게 들지 못했다.눈만 감으면 머리가 너무 빨리 돌아서 진정할 수 없었고, 곧 불면으로 이어졌다.사실 그녀는 이번에도 눈을 감으면 잠에 들지 못할 줄 알았다.그래서 혼자 병실에 있더라도 누군가 병실을 지키는 건 싫었기 때문에, VIP 병실에 배치되는 간호 인력을 거절했다.혼자 링거를 맞을 때 잠에 들면 무슨 일이 생기기 쉽다. 예를 들어 주사 알레르기라던가,링거를 다 맞고 간호사를 부르지 않아 바늘을 뺄 수 없어, 피가 돌아 나오기 때문에 잠에 들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녀는 정말 잠에 들 줄은 몰랐다. 깨어났을 때는 누군가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고, 기분이 살짝은 나빴다.힘겹게 눈을 뜨니, 긴장한 얼굴의 루카스가 보였다. 그는 급히 호출 벨에 대고 소리쳤다.“빨리 와주세요. 소이연 씨가 링거를 다 맞아서 피가 돌아왔어요!”소이연은 잠시 멍하니 호스에 있는 빨간 피를 보
소이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루카스에게 욕을 했다. “내가 너한테 봐 달랬어? 네가 남의 일에 신경 쓴 거면서! 나 여기서 잘 자고 있었는데, 내가 너한테 와서 깨워달랬어? 난 차라리 네가 손가락질하는게 더 좋겠어! 내 아들을 책임지고 말고는 내 일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욕해! 네가 내 아들 아빠도 아니잖아!”“소이연!” 루카스가 이를 악물었다. “마치 자기가 높은 사람인 양 사람들 내려다보면서 도덕적 유괴 같은 짓 하지 마.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신이야? 이 선생님, 제가 오늘 죽더라도 선생님이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네? 그리고 지금 네 행동은 내 사생활이랑 인권도 침해했고, 내가 너 고소할 수도 있다고!”루카스는 화가 나서 머리에서 긺이 펄펄 나는 것만 같았다.그는 화가 나 시뻘게진 눈으로 소이연을 노려보았다. 이번엔 정말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었다.심지어 그는 왜 이 여자에게 이렇게 크게 반응하는지 알 수 없었다.그녀의 병실을 지나가다가 피가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 왠지 모를 공포감이 휘몰아쳐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빠르게 병실로 들어와 간호사를 불러 바늘을 뺐다.소이연이 미적지근하게 깨어나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렇게 스스로를 돌볼 줄 모르나?!곧 서른인 사람이 알아서 잘 보살필 수는 없는 건가?!엄마라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잘 챙기지도 못하는 건가?!도대체 엄마라는 책임감은 있는 건가!루카스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소이연, 넌 정말 죽어도 싸!”“내가 죽어도 내 일이야. 너랑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네 그 정의는 집어치워, 난 싫으니까!”루카스의 얼굴은 굉장히 안 좋아졌다.그는 거세게 뒤를 돌아 병실을 나갔다.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보였다. 임아영은 루카스의 뒷모습과 화가 머리끝까지 난 소이연을 보며 발걸음을 멈추었다.이때 간호 인력이 도착했고, 호스 안에 있던 혈액을 처리해 주었다.“이언 언니, 죄송해요.” 임아영이 갑자기 사
아마 전생에 원수였을 거야!“근데 저는 왜 루카스가 언니를 엄청 신경 쓰는 것 같죠? 언니 링거 호스에 피가 돌아 나오는 걸 보고 당황해서 허둥거리고. 언니를 욕하는 것도 언니가 스스로 잘 돌보지 않았다고 하면서 관심을 가지면서 머리 아파하고...... 어떡하죠, 저 지금 좀 질투 나요.” 임아영은 순진한 눈빛으로 소이연을 보았다.“농담하지 마세요.” 소이연은 미적지근하게 말했다. “루카스가 저한테 한 행동은 정상인의 과격한 반응일 뿐이에요. 만약 제가 이런 상황을 발견했더라도 의사나 간호사를 바로 불렀을 거예요. 루카스가 저한테 성질을 부리는 건 그저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고의로 정당한 타이밍을 찾아서 욕을 하는 게 아닐까요?”“루카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한테도 이러지 않아요.”“그래서 제가 얘기했잖아요. 저희는 상극인게 틀림 없어요.” 소이연은 비웃음을 담아 말했다.아까 루카스가 그녀에게 한 말을 떠올리니 속에서 화가 들끓어 참기 힘들었다.“이연 언니, 루카스 좋아하는 거 아니죠?” 임아영이 갑자기 긴장한 듯 물었다.“그럴 리가요.” 소이연은 아주 확신에 차서 말했다.“진짜 진심으로 언니가 루카스 좋아할까 봐 걱정돼요.” 임아영은 힘들어하며 말했다.“저 진짜 루카스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잃을까 봐 정말 무서워요......”“제가 루카스를 좋아할 리가 없어요.” 소이연은 임아영의 말을 끊었다.임아영은 여전히 굴하지 않고 말했다. “언니는 정말 너무 예쁘고, 할머니 집에서 언니랑 얘기해 보니까, 능력도, 돈도 있고,전 정말 루카스가 언니 좋아할까 봐 무서워요.”“그럴 일 없어요.”“근데 언니한테만 특별하게 대해요.”“특별히 나쁜거죠.”“이연 언니, 저한테 약속해 줄 수 있어요? 영원히 저한테서 루카스 뺐어 가지 않겠다고.” 임아영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불쌍해 보였다.소이연은 입술을 살짝 문질렀다. 방금 이미 아주 확실하게 설명을 했는데 말이다. “우연히 언니랑 육현경 씨 사진 봤어요. 루카스랑 육현경 씨, 진짜
“죄송해요, 이연 언니. 저 정말 이런 부탁하고 싶지 않은데, 루카스를 잃을까 봐 너무 무서워서 그래요.”임아영이 말했다. “최소한 두 사람이 거래하지 않는 이상은 거리를 유지해 주시면 안 될까요?”“거리를 유지하라고요? 전 한 번도 그한테 먼저 다가간 적 없었어요. 전 루카스한테 관심도 없고요.”소이연은 임아영의 기대하며 불쌍한 눈빛을 보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임아영은 순간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이연 언니, 감사해요. 언니가 좋은 사람이라는 거 알아요.” 임아영은 흥분해서 말했다.그녀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그녀는 임아영이 이렇게 비참하게 감정을 파는 것이 동정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다만 그들과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그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고, 그들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랐다.사실 동의하든 안 하든 이렇게 해야만 했다.그녀와 루카스는 애초에 비대칭적인 관계였고, 임아영이 믿지 않았다. 임아영은 그저 그녀의 입을 통해 확실한 답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그녀는 임아영의 요구사항을 만족시켰다.“그럼 저 먼저 갈게요.” 임아영은 기쁜 듯 말했다. “이연 언니, 언니도 몸 잘 챙기세요.”“네.”임아영이 나가자, 소이연은 휴대폰을 꺼내 그대로 루카스의 번호를 차단했다.임아영이 바라던 대로.앞으로 다시는 루카스와 아무런 교집합이 없을 것이다.병원 건물 앞.루카스는 서서 임아영을 기다리며 자신의 감정을 진정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루카스.” 임아영이 뒤에서 그를 안았다.루카스는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밀어냈다.그러자 임아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안는게 싫어?”“아니.” 루카스가 말했다. “안고 어떻게 가. 손 잡아 줄게.”그러고는 임아영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임아영은 크게 실망한 눈치였다.두 사람은 차에 나란히 앉아, 임아영이 조용히 말했다. “루카스. 너 돌아오고 나서 많이 변한 거 알아?”루카스는 침묵을 유지했다.“예전에 해외에 있을 때는 다른
예수진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소이연은 얼굴을 붉혔다.“거봐요, 오빠는 내가 제일 잘 안다니까. 그냥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거예요.”소이연의 반응에 예수진은 득의양양해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주 대범해지는 사람이거든요. 언니는 이제 오빠의 넘치는 사랑을 받을 일만 남았네요, 물론 침대 위에서요.”“그만 해요 수진 씨.”신나서 얘기하는 예수진에 못 말린다는 듯 웃던 소이연이 그녀를 타박하듯 말했다.“태교하는 사람이 자꾸 그런 생각 하면 어떡해요?”“아직은 그냥 핏덩이라서 아무것도 몰라요.”“...”“지수야, 너는 요즘 뭐 하고 지내? 평소에 문자 보내도 답장 늦게 하던데.”말을 하던 예수진은 임신한 뒤로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계지원 때문에 요즘 부쩍 재미없어진 일상을 떠올리고는 서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그냥 회사일 처리하고 있었지. 얼마 전에 경영에 문제가 생겨서 회사 부도날 뻔했거든. 그래서 문수 씨랑 일 처리만 했어.”“송문수?”“걔가 회사 일을 한다고?”송문수가 일한다는 소리에 예수진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그래, 안 믿길 거 아는데 진짜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문수 씨 정말 많이 변했어, 더 이상은 맨날 놀러만 다니던 망나니 아니야. 이번에도 문수 씨 덕분에 송씨 집안이 다시 일어서게 된 거야. 그리고 이연 언니랑 현경 씨도 많이 도와줬고.”하지수는 곧바로 소이연을 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정말 고마워요 언니, 언니랑 형부 도움 아니었으면 저희 집안은 진작에 끝났을 거예요.”“아니에요,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는데요 뭘.”“현경이가 안 그래도 문수 씨 많이 변했다는 말 하더라고요. 밤에도 전화해서 기획서 어떻냐고 물어볼 정도로 열정적이래요.”“진짜 그렇게나 많이 변했다고요?”소이연까지 긍정하자 예수진은 눈을 크게 뜨며 하지수를 바라봤다.“네가 바꾼 거야?”“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나이가 점점 드니까 본인이 알아서 바뀐 거겠지.”“송문수가 바뀐 뒤
그래서 하지수는 이를 악문 채로 따져 물었다.“문수 씨, 당신 형이 올린 인스타 봤어?”자신이 송승우를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었는데 갑작스레 인스타를 언급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자연스레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안 그래도 거슬렸는데 하지수의 저 질문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그걸 봤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응, 괜찮아. 그냥 인스타일 뿐인데 뭘 신경 써.”자신이 송승우를 선택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자 하지수는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척 말했다.“신경 안 쓴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당신 아내로서 해명할게. 나랑 송승우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둘이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나눈 사이였는지 온 집안사람들이 다 아는데 저런 말을 하는 하지수가 어이없었지만 송문수 본인도 뭐 그다지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는 자신도 하지 못한 것을 하지수에게 요구할 자격은 없다 생각해서 입을 다물었다.하지수는 송승우를 진짜 사랑한 거였지만 자신은 그저 다른 여자들을 갖고 논 것이기에 더 따질 권리가 없는 것 같았다.“오늘 어머니랑 같이 쇼핑가기로 했는데 송승우 씨가 먼저 따라가겠다고 한 건 맞아. 나랑 어머니도 거절하기 힘들어서 같이 오긴 했는데 나는 송승우 씨랑은 말도 안 섞었어. 거리도 엄청 많이 뒀고 못 믿겠으면 어머니한테 물어봐도 돼.”하지수의 해명을 듣고 있던 송문수는 오로지 저를 위해 저렇게 자세히 상황설명을 해주는 건가 싶어 또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그녀의 작은 행동에 또 흥분한 송문수는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어 애써 심호흡을 하며 정면을 주시했다.“내가 선택한 사람은 당신이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한테 진심일 거야. 당신한테 미안한 짓은 절대 안 해.”하지수의 약속에도 송문수는 꿈쩍도 안 했지만 하지수는 둘 사이의 작은 오해가 큰 불화로 번지지 않게 하려고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상황설명을 마쳤다.제 할 일을 마친 하지수는 안광이 사라진 눈으로 차 시트에 기대 있었
송문수는 애초에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었기에 하지수가 조금만 잘해주면 한동안 기뻐했다.둘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허영지도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사이좋은 둘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지수 데리고 밥 먹으러 가려고 온 거라고 했지?”“네.”“옷도 다 입어봤으니까 얼른 가봐.”데이트하러 가라는 말만 안 했지 사실 허영지는 그 둘에게 오붓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기에 서둘러 둘의 등을 떠밀었다.“어머니는요, 저녁 어떻게 하시려고요?”“승우 집에 있잖니. 승우랑 같이 쇼핑 좀 더 하면서 네 시아버지 옷 좀 더 보려고. 내 걱정 말고 얼른 가봐.”송승우는 당연히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말도 다 뱉은 마당에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그럼 차 키는 두고 갈게요.”“저랑 문수 씨는 이만 옷 갈아입을게요.”옷을 갈아입은 둘은 손을 잡고 쇼핑몰 밖으로 나갔고 그 둘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송승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승우야.”송승우는 갑자기 들리는 어머니의 부름에 다급히 표정을 감추었지만 허영지는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그때 너랑 지수 사이 우리도 다 알아. 하지만 너희 둘은 이미 끝난 사이고 지수랑 문수가 저렇게 잘 지내니까 이제는 너도 형으로서 축복해줘야 하지 않겠니?”송승우도 물론 어머니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옛날 하지수가 좋아하던 건 분명 자신이었는데, 그때의 제삼자인 송문수가 하지수를 채가는 게 송승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말을 마친 허영지는 이만 옷을 갈아입으러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송승우도 성인이었기에 조언도 적당히 해야지 선을 넘으면 그냥 가족 사이의 불화만 생길 것이기에 허영지도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하지만 어릴 때부터 송문수에게 져본 적이 없던 송승우는 이번에도 제 여자를 그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아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송문수의 차에 앉은 하지수는 처음으로 저를 데리러 온 송문수에 못내 기분이 좋
하지만 원체 쇼핑을 싫어하는 송문수의 성격을 알고 있던 하지수는 그의 냉담함에 실망하지 않았다.이렇게 앉아서 옷을 갈아입는 저를 봐주는 것도 그의 노력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문수 왔구나.”허영지의 부름에 송문수가 짤막하게 답했다.“좀 있다 모임 있어서 지수 데리러 왔어요.”“그래, 젊은 사람들이야 그런 모임에 나가면 좋지.”전에는 송문수가 밖에 나가겠다고 하면 거절은 안 해도 표정은 굳어지던 허영지가 너그럽게 대꾸하는 것도 의외였다.“아직 이르니 너도 정장 한번 입어보고 가.”“바로 가야 되는데 갈아입기 귀찮아요.”“얼른 갈아입어.”“엄마, 나 온종일 일해서...”“지수가 너 준다고 한참 고른 건데 와이프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해줘?”남녀 사이에 있어서는 목석같기만 한 제 아들을 보며 허영지가 미간을 찌푸렸다.엄마의 말을 들은 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하지수는 다급히 말했다.“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고르긴 했는데 갈아입기 싫으면 그냥 보기만 해. 맘에 들면 당신 사이즈로 맞출게.”“입어볼게, 맘에 안 들 수도 있으니까.”송문수가 하도 담담하게 대답해서 떨리는 그의 손가락을 주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사실 그는 하지수가 자신을 위해 옷을 골라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놀라는 중이었다.기쁜 마음 반 당황스러움 반으로 옷을 갈아입은 송문수가 나오자 직원들은 일제히 그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너무 잘 어울리세요, 손님 더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진짜요?”송문수가 직원들의 말을 반신반의하자 하지수가 나서며 말했다.“진짜야. 진짜 너무 멋있다.”“그래?”하지수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송문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득의양양해 하며 대꾸했다.“다 내가 잘 생겨서 그런 거야. 옷이랑은 큰 상관 없지.”이렇게 가끔 자아도취 하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에게로 다가가 넥타이를 정리해주었다.그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던 주위 사람들은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송승우만은 아주 언짢아하
생일파티에 관한 일을 다 의논한 뒤 하지수는 허영지와 함께 그녀의 드레스를 맞추러 갔는데 하지수의 드레스도 같이 맞추자는 시어머니의 권유에 그녀도 옷을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그래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인데 하필 그때 송승우가 송문수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옷을 다 입어보고 나서도 시어머니와 쇼핑을 하느라 굳이 핸드폰을 보지 않았던 하지수는 송문수에게서 연락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다시 한번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을 때 송승우가 이번에도 자신이 받으려고 했는데 하지수가 그걸 보고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그녀의 행동에 표정이 굳어버렸던 송승우는 이내 송문수가 자신이 올린 인스타를 봤을 생각에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신문에 고정한 채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문수 씨.”송문수의 이름을 부르는 하지수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반가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잠시 떨어져 있던 연인이 재회할 때나 나올법한 목소리에 송승우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아직도 바빠?”“어머니 모시고 드레스 피팅해보고 있었어. 지금은 디자이너님이랑 디테일 얘기하고 있어. 나도 아까 하나 입어봤는데 사진 보내줄게.”“지금 데리러 갈 건데 어디야?”잔뜩 신나서 말하던 하지수는 이제 고작 4시밖에 안 됐는데 퇴근했다는 송문수가 의아하여 놀라며 물었다.“퇴근했어?”“주말이라서 일찍 퇴근했어.”“회사도 좀 안정돼서 직원들도 앞으로 주말은 다 쉬기로 했어.”“그래.”고개를 끄덕이며 주소를 불러준 하지수는 웃는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허영지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송문수와 하지수가 싸울 것이라 예상했던 송승우는 화도 내지 않는 송문수에 혹시 그가 하지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하지만 사실 송문수는 인스타를 보자마자 차오르는 화에 핸드폰을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다른 사람이 채갈까 봐 하지수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심정이 굴뚝같은데 그런 그녀가 옛날에 좋아하던 송승우와 함께 있는 걸 본 이상 그는
결국 송승우에게 차 키를 내어준 하지수가 허영지와 함께 밖으로 나간 뒤 자연스레 뒷좌석에 타려 하는데 송승우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지수야, 넌 앞에 타.”“어머니랑 같이 앉을게요.”“장안시에 길은 나도 잘 몰라서 알려줄 사람이 필요해.”단호한 그의 말을 하지수가 거절하기 어려워하자 허영지가 나서며 말했다.“그럼 내비게이션 켜. 바로 윌런 호텔로 갈 거야, 호텔 사장이랑 얘기 다 끝나서 아마 우리 기다리고 있을 거야.”말을 마친 허영지는 또 일부러 하지수를 보며 말했다.“지수는 나랑 같이 타자, 말동무해줘.”“네, 어머니.”제 옆에 앉지 않아도 된다고 저렇게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좋아하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표정을 굳힌 채로 운전석에 올라탔다.그렇게 내비게이션을 켜고 윌런 호텔로 출발하자 허영지가 하지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수야, 어제 내가 한 말 그냥 흘려듣지 말고 잘 생각해봐.”“무슨 말이요?”“너랑 문수 아이 얘기 말이야.”“아, 네.”“그냥 대답만 하지 말고 노력을 해야 애가 생기지.”허영지가 거리낌 없이 남사스러운 말을 하자 하지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대답했다.“어젯밤에 문수 씨랑도 얘기했어요.”“문수도 알겠대?”“네.”“그럼 난 그냥 기다리고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지?”하지수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허영지는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그럼 나는 할머니 될 날만 기다리고 있을게.”그런 허영지와 반대로 하지수가 송문수의 아이를 낳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송승우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를 갈고 있었다.윌런 호텔에 도착한 뒤 세 사람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사장 사무실로 향해 파티 당일의 규모와 배치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비즈니스적인 자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를 꺼리던 송승우는 얘기에는 참여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그렇게 심심해하던 송승우는 문득 무슨 생각에서인지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허영지와 하지수도 담긴 사진이었지만 그 둘은 파티 준비에 열과 성을 다하고
“이연 언니가 왔다고?”오랜만에 들려온 소이연의 소식에 하지수는 흥분하며 답했다.“그럼 당연히 가야지, 오랫동안 못 봐서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육현경 씨랑 이연 언니가 나 엄청 많이 도와줘서 직접 만나서 감사 인사 하고 싶었어.”“계지원 씨 집에서 모이기로 했어. 예수진 씨 배도 점점 불러서 움직이기 힘드니까 그냥 거기서 보기로 했어.”“그래. 그럼 퇴근할 때 연락해. 나는 먼저 어머님이랑 아버님 생일파티 준비하고 있을게.”“응.”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은 각자 알아서 집을 나섰고 하지수는 바로 송 씨 가문별장에 시어머니를 모시러 갔다.하지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송승우가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게 보였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건 아직 어색했기에 하지수도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송승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엄마 모시러 온 거야?”“네.”“집에 계속 계시는 거예요?”“나갔으면 좋겠어?”헛웃음을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다급히 해명했다.“아뇨, 그냥 전에는 계속 일로 바쁘셨던 분이 계시니까 물어본 거예요.”“전에는 연구과제 때문에 바빴는데 이제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서 한가해.”“아, 네.”고개를 끄덕이는 하지수를 보며 그녀가 저를 불편해하는 걸 느낀 송승우는 올라오려는 화를 참으며 물었다.“문수는?”“출근했어요.”“주말에도 출근해?”“요즘이 회사한테 중요한 시기라서 일요일만 쉬기로 했대요. 내일은 안나가요.”사실 송문수에게는 거의 휴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처리해야 할 일이 매일 산더미여서 그는 시간만 나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송문수 많이 변했네.”“송문수가 변해서 너도 걔를 다시 보게 된 거야?”냉소를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감정이라는 게 원래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생기는 거잖아요.”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기척 없이 생겨서는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한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다.하지수의 말로부터 그녀가 이제는 정말로 송문수를
“하지수, 변호사 일할 때는 똑똑하더니 연애에는 영 소질이 없나 봐?”자는 척하고 자신을 놀려먹은 건 송문수인데 오히려 바보라고 핀잔을 듣자 화가 난 하지수가 얼굴을 붉혔다.“네가 나한테 뽀뽀하는 게 좋으니까 계속하라고 가만히 있은 거잖아!”송문수가 언성을 높여 말해서야 이유를 알게 된 하지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 표정에 어이가 없어진 송문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이렇게 바보 같아서 어떡해, 누가 너 팔아넘겨도 모르겠다.”“누가 누구한테 바보래. 내가 당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인 줄 어떻게 알고...”말을 채 끝맺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입을 맞춰오며 진득한 키스를 이어나가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눈을 크게 떴다.“아...”아까 자신이 한 건 그저 뽀뽀이지 이렇게 치열을 훑고 지나가는 키스는 아니었는데 입속 깊은 곳까지 뜨겁게 만드는 키스는 옆에서 핸드폰이 울리건 말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송문수도, 하지수도 그 벨 소리를 무시한 채 키스를 이어나가다 둘의 입술이 다 번들번들해질 때가 되어서야 송문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하지수를 놓아주었다.송문수의 키스에 정신이 혼미해진 하지수는 나른한 눈빛으로 송문수를 보고 있었는데 핸드폰을 보던 송문수는 갑자기 욕설을 내뱉더니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가 욕실로 달려들어 갔다.그의 샤워 소리가 들릴 때에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도 시간을 보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변호사 일을 시작하면서 누구보다 규칙적이고 자율적인 일상을 보내왔던 하지수였기에 그녀는 자신이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송문수를 만난 뒤부터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송문수가 만약 자신을 팔아넘겨도 그를 도와 돈을 세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고 있었다.생리대부터 바꾸러 제 방으로 돌아간 하지수가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송문수도 옷을 갈아입은 채로 거실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평소에는 7시에 일어나서 8시 정도면
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새 깨어난 지도 모르고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고 송문수는 다정한 눈을 한 채 떨리는 손으로 제 옆에 누운 하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이튿날 아침, 눈을 뜬 하지수는 방금 일어난 탓에 낯선 주위를 한참이나 둘러보고서야 여기가 송문수의 방임을 기억해냈다.관계 빼고는 별짓 다 한 어젯밤이 떠오른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혼자 자는 게 습관 되어있어 송문수의 품에 안긴 뒤 빨리 뛰는 심장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아마도 바쁜 일정 때문에 피곤했던 것 같다.완전히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송문수를 바라보았다.자고있는 그의 모습은 평소처럼 차갑지 않고 쫙 펴진 미간 덕분에 오히려 부드러워 보여 공격성이 다분하지도 않았다.왜 눈을 뜬 모습과 감은 모습이 이렇게 다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송문수의 얼굴을 찬찬히 보던 하지수는 날카로운 그의 눈빛을 떠올렸다.전에는 그 눈빛이 마음속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아 두려웠었는데 지금의 하지수는 더 이상 잠들어있는 송문수도, 깨어있는 송문수도 두렵지는 않았다.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깨어있는 송문수를 마주할 때는 하지수가 주동적으로 입을 맞출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잠들어있을 때는 그야말로 하지수 세상이었기에 그녀는 빠르게 송문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하지수는 그 뒤로도 여러 번 입을 맞추다가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릴 때가 돼서야 행동을 멈추었다.물론 자의로 멈춘 건 아니고 입맞춤을 하던 와중에 눈을 떠버린 송문수 때문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깜짝 놀라 잠시 멈칫한 것이었다.당황한 하지수는 빠르게 도망가려 했지만 자신을 눌러버린 송문수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분명 방금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송문수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몽롱한 느낌은 전혀 없는 눈으로 그는 하지수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의 진득한 눈빛을 당해내지 못한 하지수는 서둘러 눈을 피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