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록은 모든 사람들이 듣고 있는 현장에서 재생되었다.먼저 한 중년 남성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육 대표님의 명의로 증권을 조작한 걸 대표님이 아시게 되면 난 죽은 목숨이야.”“걱정 마, 절대 모를 거야.”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목소리는 훨씬 젊고 진중해 보였다.“나 진짜 못 하겠어.”“돈 필요 없어?” 남자가 협박했다.“육 대표님께서 주시는 연봉도 높은 편이고, 난 그런 야망도 없어.” 중년 남성은 거절했다.“그래? 그럼 이건?” 남자가 뭔가를 꺼낸 듯하더니 천천히 신음이 들렸다. 그게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중년 남성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으로 가득했다. “네가 이걸 어떻게?”“만약 당신이 여자랑 놀아나는 게 들통이 나면 육씨 그룹에서 계속 얼굴 들고 다닐 수 있겠어? 당신 어머니도 외국에서 암 때문에 한 달 병원비로만 몇백은 나간다면서......”“그만해.” 중년 남성은 타협한 것 같았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간단해. 우리한테 육현경의 가짜 카톡을 복제해서 육현경이랑 밀접한 협력 관계의 투자자한테 연락하는 거야. 육씨 그룹 협력사라면 당신이 어디가 가치가 있고 없는지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하지만 이 사람들은 돈으로 사기 치면 반드시 육 대표님을 찾아가서 난동을 부릴 텐데.” 중년 남성이 걱정하며 말했다.“그건 걱정 마. 돈만 빼낸다면 그들이 말 못 할 손해를 보게 할 방법은 나한테 다 있어.”“그렇지만......”“오늘 내가 당신한테 한 것처럼, 당신 거절할 수 있어?” 남자는 이미 다 방법이 있다는 듯 말했다.“...... 그래.” 중년 남성은 결국 대답했다.녹취록은 여기서 끝났다.법정은 또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이 녹취록이 도대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이 목소리로는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전체 내용에서 이름은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고, 두 사람 다 아주 신중한 것도 확실했다.양준식은 재판장의 앞으로 갔다. “이것으로 제 의뢰인은 명의를 도용
법정은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소이연은 주먹을 점점 세게 꽉 쥐었다.그녀는 천우진이 단순히 공소 측으로 이 소송에 왔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천우진이 혐의를 피하지 않고 온 것을 보면, 반드시 심씨 가문이랑 뭔가 엮여있는 것이 틀림없다.“당황하지 마세요.” 하지수는 소이연이 긴장한 것을 느꼈는지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지금 육현경 측에서 제출한 증거로는 확실히 결백을 주장하기는 어려워요. 천우진도 사실만을 거론하고 있고요. 저였어도 저렇게 말했을 거예요. 천우진 씨는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온 게 아니에요.”소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게다가 만약 육현경 씨가 정말 무죄라면 나중에 귀찮아지지 않게 법정에서 모든 혐의를 청산하는 게 좋아요.” 하지수가 이어서 말했다.소이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하지수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그녀가 이성적이지 못한 것은 육현경이 정말 위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게다가 그녀는 정말 스스로 안 좋은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가늠이 안 갔다계속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았다.정확히 말하면, 그가 구류되던 그 순간부터, 그녀 마음속의 방어선이 점차 무너져서,지금 그녀가 침착하고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다 꾸며낸 것이었다.그녀가 최근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육현경을 나오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다.나오고 난 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그동안 그녀의 부족함을 다시 채우고자 했다.매번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를 밀어냈던 그녀.법정은 한참 동안 고요했다.재판장이 입을 열려던 순간, 양준식이 말했다.천우진이 한 말에 놀라서 모두 숨을 죽이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어쨌든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이 순간 갑자기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저는 방금 공소 측 변호사의 질의에 대해 다시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제 의뢰인 한 사람의 계좌 명세서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았다
재판장의 말로 현장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법정에서는 재판장의 권력을 이길 사람은 없다.그가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다.이때 모든 사람은 지금 피고석이 제출한 증거야말로 마지막 진상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설레는 순간 갑자기 멈추라고 하니, 방청객들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었다.누군가 물었다. “합법적인 증거라면 왜 거절합니까? 재판장님, 재판석 여러분께서는 혹시 진상을 판별하는 것에 자신이 없으십니까?”“정숙하세요!” 재판장은 낯빛이 어두워져 말했다. “법정에서 방청객은 발언권이 없습니다!”말이 떨어지자마자 법원 경찰이 그 사람에게 나가달라고 “부탁”했다.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재판장은 몸을 일으켜 법정을 나가려 했다.“재판장님.” 천우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그는 입을 열었다.“저는 재판장님께서 피고 측이 제출한 증거를 허가해주십사 합니다. 공소 측으로서, 저도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본 안건을 계속 진행해 주십시오.”정중한 것처럼 보였지만, 말에는 강제성이 담겨있었다.천우진의 신분은 원래 높고, 천씨 가문은 전형적인 정치계 가문으로, 서울에서 아주 유명했다.어느 정도 이름있는 고위 간부들도 천씨 가문과 깊든, 얕든 관계가 있었고, 재판장도 그에게 죄를 덮어씌울 수 없었다.비록 그의 단호한 말을 듣고, 조금 고민이 되었지만...... 그래도 예전에 심씨 가문에서 특별히 와서 그에게 인사까지 했었다.우선 육현경 쪽에는 불리한 상황이니, 잠시 멈추고 나중에 다시 재판하면 된다.하지만 지금 천씨 가문과 비교하면 그는 당연히 심씨 가문에게 죄를 물을 수밖에 없다.게다가, 천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지금 밀접한 관계이니 재판을 계속하자는 것도 천우진이 제안한 것이고,만약 심씨 가문이 정말 바닥까지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도 천우진에게 덮어씌우면 그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재판장은 다시
모두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옆에 있던 관중도 숨을 참고 긴장한 얼굴이었다.소이연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이런 반전이 있으리라고는 그녀는 생각도 못 했다.그녀는 육현경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만 알고 있었고, 심씨 가문에서 저지른 일인 것은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갑자기 육현경을 만나러 갔던 그날이 떠올랐다.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단호하게 말했었다. 그때가 되면 심씨 가문은 그에게 복수할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그랬구나.육현경이 이렇게 오랫동안 심씨 가문에서 있었던 것도 심씨 가문에서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서가 아닐까?!하지만 그녀는 계속 그를 오해했다.소이연은 천우진을 보고 있었다.이 순간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그녀는 지금 정말 심씨 가문이 연루된 거라면, 천우진이 이번 재판을 계속하게 가만히 둘 것인지가 가장 걱정되었다.전에는 어떻게 되든, 심씨 가문에 직접적인 이익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이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소이연은 심지어 재판장이 천우진에게 눈빛을 몇 번 보내는 것을 보았다. 마치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계속 재판을 이어나갈 것인가?이렇게 조용한 상태로 최소 5분이 지났다.천우진은 마치 증거에 대한 마지막 확인을 하는 듯 양준식에게 말했다.“피고 측이 제출한 증거는 이 계좌들과 심씨 그룹이 관계가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저희의 손에 있는 자료에 의하면, 심씨 그룹이 지금까지 육현경 씨의 안건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갑자기 화살을 돌렸으니, 논리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비록 피고 측이 제출한 증거를 완벽히 인정하고 동의할 수는 없으나, 천우진은 이 소송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재판장도 당연히 이것을 깨닫고 갑자기 멈추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아까 제출했던 녹취록에는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양준식이 말했다.“제출하신 해당 녹취록은 논쟁점이 다수 존재하므로, 법정에서 유효한 증거가 될 수 없으니,
양준식은 유봉을 보며 말했다. "유봉 씨, 제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당신은 2020년 12월에 이미 피고에 의해 모든 가산을 탕진하도록 조작했다고 되어있는데, 왜 오늘에서야 피고의 죄를 고발합니까?” 유봉이 말 못 할 사정이 있는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유봉 씨는 성실히 답변해 주시길 바랍니다." 양준식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유봉은 심호흡을 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육현경이 내 아들의 앞길을 위협하고 있어,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 아들은 2020년에 미국에 있는 명문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제 아들은, 우리 가족의 자랑입니다. 내가 육현경을 고소하면 그는 제 아들이 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돈을 돌려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에게 손실을 따져 보라고 했습니다.” 유봉은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 "그럼 왜 이제 와서 나서려고 했습니까?" 양준식이 물었다. "육현경과 관계없이 아들이 학교를 중퇴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위협이 사라졌고, 생각해 보니 침묵을 지키고도 이렇게 큰 손실을 봤는데 더 이상 침묵을 지킬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법정에서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육현경은 매우 교활합니다. 우리를 속이고 감히 반항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약점을 잡혀 감히 나서서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현경 씨가 당신을 위협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그가 제게 보낸 카톡 음성메시지 들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유봉은 또 증거를 제시했다. 양준식은 휴대전화를 들고 카톡 음성메시지를 눌렀다. 카톡 음성메시지 내용은 조금 전 유봉의 증언과 일치했다.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양준식은 큰소리로 말했다. "방금 음성메시지를 들으며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유봉 씨와 대화하는 피고인의 목소리가 피고인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들립니다.” "물론 다른 목소리로 들리지요. 육현경처럼 신중한 사람이 증거를 남길 것 같습니까?” 유봉이 분통을 터뜨리며 말
양준식은 두 개의 동영상을 재생했다. 첫 번째 영상에는 심아윤과 소나은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심아윤은 소나은에게 말하며 서류를 건넸다. "오늘 밤 같이 자야 할 상대는 이 사람이에요. 취향을 파악해서 비위를 맞추면 돼요.” 심아윤은 이 상황이 익숙한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소나은은 마지못해 서류를 받아 들어 확인한 뒤 얼굴빛이 확 바뀌었다. "걱정 마요, 나은 씨가 다치지 않게 내가 몰래 지켜보고 있을게요. 그냥 그를 상대하기만 하면 돼요.” "보고 있겠다고요?" 소나은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내가 보지 않으면 어떻게 동영상을 건질 수 있겠어요?" 심아윤은 소나은과 쓸데없이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소나은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심아윤은 말했다. “소나은 씨, 지금의 영광을 누가 줬는지 잊지 마세요. 당신은 나에게 어떤 요구 조건도 말할 자격이 없어요.” 소나은은 숨을 참으며 감정을 억눌렀다. 두 번째 영상에는 심아윤과 심진우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심아윤은 말했다. "오빠, 이거. 오빠가 원하던 영상.” "너한테 뭘 맡겨 놓고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어."심진우는 그녀를 칭찬한 뒤 USB를 컴퓨터에 꽂아 영상을 보면서 말했다. "나쁘지 않아, 이제 약점을 쥐고 있으니 얌전해지겠네.” 그의 입에서 조롱이 쏟아져 나왔다. "허영심이 많은 여자는 통제하기가 쉬운 편이지." 심아윤은 비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오빠, 다음번엔 좀 정상적인 사람들과 사업 얘기하는 건 어때?” "제대로 된 사람한테 약점을 찾아서 협박할 수 있어?" 심진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심아윤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상이 종료되었다. 법정이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심씨 가문 사람들과 소나은처럼 비교적 유명한 사람들이 뒤에서 이렇게 추잡하고 어두운 일을 할 줄이야! 소나은이 스스로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는 짓을 하다니, 창피하지도 않은 것인가! 양준식은 재차 강조하며 말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 사건과
분명히 다음 증거는 폭탄과 같을 것이다! 양준식이 세 번째 영상을 재생하기 시작하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영상 안에 심진우 혼자 전화를 걸고 있었다. "누군가가 익명으로 육현경의 주식 불법조작과 돈세탁을 고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누군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분명히 알 수 있을 거예요.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헌트 스티븐슨에게도 확실히 전해요. 그때 당신과 헌트 스티븐슨은 직접 죄를 인정하고 육현경이 지시한 것이라고 증언해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증거는 육현경이 모든 일을 했다고 증명할 수 있고 그는 반박하기 어려울 거예요. 저도 법조계 쪽과 좋은 관계를 맺도록 노력할 테니, 당신들은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요.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만약 당신들이 5년에서 10년 형을 선고 받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빠른 시간 안에서 빨리 나오도록 방법을 찾을 거예요. 형을 살고 나오면 돈은 절대 부족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가족들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제가 잘 보살피도록 할게요." 분명 위협적인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와 제 가족의 어떤 이름도 절대 언급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거나, 확실하지 않은 질문에는 대답하지 마세요. 일을 잘 마치면 분명 좋은 결과가 따를 거예요.” 영상이 종료되었다. 증거가 확실했다. 고화질로 찍힌 영상에서 심진우가 통화하는 동안 가끔 휴대전화의 화면에 불이 들어오며 이름은 저장되지 않았지만 상대의 번호는 선명하게 보였다.전화번호의 주인은 장문규였다.양준식은 가장 유리한 증거를 제시하고도 곧바로 또 다른 증거를 제시했다.그는 해킹 기술을 이용하여 장문규의 통화를 내용을 녹음했다.장문규의 휴대전화에 담긴 녹취록과 심진우의 전화통화 내용이 일치해 심진우와 장문규가 공모한 사실임을 밝혔다. 모든 증거들을 제출한 양준식은 육현경을 보았다.그는 자신의 의뢰인인 피고인에 대해서는 표정으로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그의 목소리가 좀 가라앉았지만 허리를 곧게 펴고 있어 약해 보이지 않았다. "피고인이 연루된 이 사건과 관련하여,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총 3년 동안 장문규와 헌트 스티븐슨가 당신 몰래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면 피고인은 사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묵인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어쨌든 당신과 심씨 가문은 관계가 깊습니다." 천우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소이연은 순간적으로 또 긴장했다. 천우진은 육현경에게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이 아닌가?만약 육현경이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그는 묵인죄다! 분명 이렇게 함정을 파는 질문을 했는데, 양준식은 그의 말을 끊거나 항의하지 않고 그냥 담담하게 옆에 서있었다. 사실상 그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천우진에게 속아 넘어갈까 봐 걱정했지만 육현경은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육현경은 그에게 이렇게 많은 증거들을 제공했다. 심지어 그의 20년 변호사 생활 동안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증거들을 제공했다. 육현경의 생각과 사고는 이 정도로 치밀했으니, 누가 파 놓은 함정에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육현경이 천천히 대답했다."정확히 말하면 귀국 한 달 전쯤 뭔가를 눈치챘지만, 그 무렵에는 이런 사기 행각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줄기 시작했음이 분명합니다.” "올해 초 귀국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신고하지 않았습니까? 심씨 가문 때문에 눈감아 준 것입니까?" 천우진이 다시 육현경을 몰아세웠다. "아닙니다. 그 당시 저는 이 일이 심씨 가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고, 저도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그들을 감싸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익과 명성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저는 이 일을 절대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 직원인 장문규와 헌트 스티븐슨은 제가 아는 한, 이렇게 대담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많은 돈을 사기 친 후에도 이렇게 침착하게 대응할 능력과 권한이 없습니다. 아마
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새 깨어난 지도 모르고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고 송문수는 다정한 눈을 한 채 떨리는 손으로 제 옆에 누운 하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이튿날 아침, 눈을 뜬 하지수는 방금 일어난 탓에 낯선 주위를 한참이나 둘러보고서야 여기가 송문수의 방임을 기억해냈다.관계 빼고는 별짓 다 한 어젯밤이 떠오른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혼자 자는 게 습관 되어있어 송문수의 품에 안긴 뒤 빨리 뛰는 심장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아마도 바쁜 일정 때문에 피곤했던 것 같다.완전히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송문수를 바라보았다.자고있는 그의 모습은 평소처럼 차갑지 않고 쫙 펴진 미간 덕분에 오히려 부드러워 보여 공격성이 다분하지도 않았다.왜 눈을 뜬 모습과 감은 모습이 이렇게 다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송문수의 얼굴을 찬찬히 보던 하지수는 날카로운 그의 눈빛을 떠올렸다.전에는 그 눈빛이 마음속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아 두려웠었는데 지금의 하지수는 더 이상 잠들어있는 송문수도, 깨어있는 송문수도 두렵지는 않았다.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깨어있는 송문수를 마주할 때는 하지수가 주동적으로 입을 맞출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잠들어있을 때는 그야말로 하지수 세상이었기에 그녀는 빠르게 송문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하지수는 그 뒤로도 여러 번 입을 맞추다가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릴 때가 돼서야 행동을 멈추었다.물론 자의로 멈춘 건 아니고 입맞춤을 하던 와중에 눈을 떠버린 송문수 때문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깜짝 놀라 잠시 멈칫한 것이었다.당황한 하지수는 빠르게 도망가려 했지만 자신을 눌러버린 송문수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분명 방금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송문수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몽롱한 느낌은 전혀 없는 눈으로 그는 하지수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의 진득한 눈빛을 당해내지 못한 하지수는 서둘러 눈을 피했
“미안해 문수 씨... 평소엔 이때가 아니라서 나도 몰랐어...”“응.”이 일은 애초에 하지수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그녀를 탓할 수도 없었던 송문수는 하늘이 불공평하다고 한탄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수를 만나는 날만 기다리며 3년 동안 아무와도 관계를 하지 않았던 그인지라 오늘에서야 비로소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겠다고 기뻐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에 또 일주일을 더 기다리게 된 이 상황에 송문수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한숨을 쉬는 송문수를 본 하지수는 그가 자신에게 실망한 줄로 알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다음에 다시 할까?”하지수의 말에 잠시 멈칫하던 송문수는 이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그걸 말이라고 해? 생리 끝나면 당장 해.”자신한테 자꾸 일이 생겨버려 송문수가 다른 사람을 찾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던 하지수는 확신에 찬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며 청심환을 하나 먹고는 말했다.“그럼 편히 자, 난 내 방 가서 잘게.”“어디 간다는 거야?”“내 방 가야지.”“하지수, 네 발로 직접 내 방 찾아와 놓고 이제 돌아가겠다는 거야?”갑자기 터진 생리 때문에 관계를 못 가진 것도 화가 나는데 사람까지 가버리겠다는 말을 들은 송문수는 언짢은 티를 팍팍 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나 생리 와서 어차피 못하잖아.”“그게 왜?”“아까 문수 씨도 생리 끝나면 하자고 했잖아. 지금 하는 건 나도 좀...”송문수가 되묻자 하지수는 아주 난감해하며 답했다.“하지수, 넌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아까 너 안 놔줬으면 여기 진작에 피바다 됐어.”“...”“관계까지 할 사이에 뭘 내외를 하고 그래. 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앞으로 쭉 같이 자자고? 나랑?”“왜, 싫어?”“아니.”당연히 싫진 않았지만 하지수는 그저 송문수가 관계도 없는 잠을 자신과 함께 자겠다는 게 신기했을 뿐이다.그렇게 순진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는데.“빨리 와서 자. 아까 너무 움직였더니 피곤해.”송문수가 먼저 침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눕자 하
송문수의 입술이 하지수의 입술을 지나 그녀의 귓가에 닿을 때, 이런 식의 스킨십은 처음 해보는 하지수는 온몸이 떨려왔다.태어나서 딱 한 번, 송문수와 차에서 해본 게 전부인 그녀는 송문수의 유혹을 당해내지 못하고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목에 자신의 고개를 비볐다.그렇게 하지수를 안달 나게 하던 송문수는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걸 확신하고는 점차 행동을 대범하게 하기 시작했다.자연의 섭리인 것마냥 물 흐르듯 움직임을 이어나가던 송문수가 갑자기 멈췄을 때 하지수는 온몸이 뜨거워 나고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온몸이 나른해진 그녀는 송문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참 지나 송문수가 더는 움직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가 그를 보며 물었다.“왜 그래?”제 아래에 누워있는 하지수를 보며 정말 이성을 잃을까 봐 걱정된 송문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문수 씨?”하지만 하지수는 아까는 그렇게 늑대처럼 달려들던 사람이 갑자기 말도 안 하고 거친 숨만 연신 내뱉는 게 이상했다.“문수 씨...”“지수야.”송문수가 한참 만에 입을 열자 그 숨결에 의해 뜨겁게 달궈진 피부에는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곧 자신이 상상했던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었던 아주 아름다운 순간이었는데 다른 여자들한테는 다 곁을 내주면서 왜 자기 앞에서는 갑자기 멈추는 건지 하지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본인이 여자로서의 매력이 떨어져서 송문수가 싫어하는 걸까 봐 자연스레 눈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송문수가 잔뜩 실망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너 생리 왔어.”“뭐?”송문수의 말에 깜짝 놀란 하지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송문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속옷에 피 묻어있어, 아마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수치스러움에 빨개진 얼굴로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이틀 뒤가 예정일인데 왜 갑자기 오늘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지수는 송문수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가 민망해 침대에서 뛰어내리다가 하마터면 넘
송문수는 자신의 떨림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하지수도 그의 몸 아래에서 떨리고 있었다.송문수는 이미 자신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예전의 그라면 이미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을 맡겼을 것이다.그는 조심스럽게 지수에게 다가갔다.지수는 온몸이 긴장돼 있었고 두 손은 이불을 꼭 쥐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송문수의 몸 아래에 있게 됐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단지 지금, 그의 숨결은 몹시 거칠고 심장 소리는 우뢰처럼 커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어쩔 바를 몰라 했고 곧 무언가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그때, 송문수의 입술이 서서히 하지수의 입술에 와닿았다.송문수의 심장은 더욱 격렬히 뛰고 있었고 이불을 꼭 쥐고 있던 지수의 두 손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두 입술이 맞닿은 그 순간, 두 사람은 머리가 하얘졌다.둘만의 공간, 둘만 나누는 부드러운 촉감, 온몸으로 느끼는 서로의 떨림……이것이 진짜 입맞춤이었다.하지수의 뇌리에는 갑자기 전에 송문수의 차에서 나눴던 관계가 스쳐 지나갔다. 단지 관계를 위한 관계였을 뿐, 사실 그녀는 아무런 떨림도 느끼지 못했고 심지어 굴욕적이라는 생각까지도 들었었다.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오히려 그녀가 리드하고 있었다.송문수가 조심스러워 망설이고 있을 때 그녀가 먼저 리드했다.그는 그녀의 유혹을 당해낼 수가 없었고 둘은 더더욱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온 세상이 조용해지고 두 사람의 심장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두 사람은 얼마 동안 키스를 나눴는지 가늠조차 못 하고 있었다. 아주 길게 또 아주 짧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입술을 뗀 두 사람의 얼굴은 너 나 할 것 없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이런 경험은 송문수도 처음이였다. 능수능란해야 마땅한 그는 지수와의 키스 후 고장 난 사람처럼 어쩔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방금 전의 달콤하고도 아름다웠던 키스에 사로잡혀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온 밤을 그녀와 보내고 싶었다.그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에 다가갔다.천천히
그는 너무 기뻐하다가 오히려 일을 망칠까 봐 조금 두려웠다.“그러면 오늘밤에 같이 자는 거 어때?”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며 물었다.“푸!” 송문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조금 전에 마시던 물을 내뿜었다.“싫으면 말고…” 송문수의 격한 반응에 지수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그런 거 아니야.” 송문수는 다급히 해명했다.지수는 어리둥절해졌다. 바로 전에 문수가 분명히 아주 격렬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송문수는 연신 입을 닦으며 말을 덧붙였다.“너랑 같이 자는 게 절대 싫어서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그럼 나 먼저 씻을게.” 하지수는 웃으며 말했다.“그래.”“네 방에서 잘까? 아니면 내 방?”“난 다 좋아.”“그러면 네 방에서 자자. 네 방이 더 크니까.”“그러자.”“나 씻을게.”“응.”“너도 빨리 씻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수는 얼굴이 타오르듯 빨개졌다.무슨 의미인지 두 사람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송문수는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가 힘들었다.하지수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송문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방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그는 곧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너무 긴장되어 숨도 안 쉬어지고 물컵을 들고 있던 손도 떨릴 지경이였다.수도 없이 많은 여자를 만나봤던 그로서는 남녀관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고 이런 경험이 처음일 리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그 상대가 하지수라니, 송문수는 머리가 하얘졌다.그는 남아있던 물을 한 모금에 다 마시고 나서 바로 방으로 돌아가 샤워하기 시작했다.오늘 밤이 지나면 둘 사이는 전혀 다른 관계가 되어 있을 것 같았다.송문수는 샤워를 마쳤다.평소라면 몇분이면 끝낼 샤워를 오늘에는 한번 또 한 번 반복해서 씻었다. 행여나 깨끗이 못 씻었을지 몇 번이나 더 씻은 후 겨우 욕실을 나와 침대에서 하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지수가 이미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으나 지수는 더 오래 걸렸다.아마도 그와 똑
하지수는 민망함에 얼굴이 더 붉어졌다.그녀는 송문수와의 관계가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직 아이를 가질 정도까지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송문수도 민망해하며 말했다.“저희 둘 사이 일은 걱정하시지 마세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네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이러는 거야.” 송문수 어머니는 핀잔을 주었다.“네가 조금 더 잘했으면 지금쯤 애가 뛰어다니며 놀 나이가 됐을 거야.”“엄마! 그만 하세요.”문수는 더 이상 듣기 싫었다.“그래, 알았어. 근데 내가 다시 한번 강조하는 건데, 너 다시는 지수 같은 여자애 못만난다는거 기억해. 지수 놓치면 평생 후회하면서 혼자 살게 될 거라는걸.”“알겠어요, 알겠다고요.”송문수는 잔소리가 듣기 싫었지만, 어머니의 말에 반대는 하지 않았다.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송승우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자리를 박차 거실을 나갔다.모든 사람의 눈길이 그에게로 향했다.송문수는 송승우가 왜 화가 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가 고개를 돌려보니 하지수도 송승우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지수도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눈길이 가게 된 것이었다.송문수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송승우에 대한 마음은 일찌감치 접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송문수는 시선을 돌렸지만, 마음속으로는 내심 안도했다.하지수는 정말 송문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송승우의 돌발행동에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이에 대해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가장 많은 논의가 있었던 것은 역시나 아버지의 생일파티와 그들에게 아이를 낳는 것을 권유하는 것이었다.저녁 아홉 시, 송문수와 하지수는 집으로 돌아갔다.야근을 자주 하는 탓에 이렇게 일찍 귀가한 적은 처음이었다.예전에는 집으로 돌아오면 너무 피곤해서 샤워만 하고 각자 잠에 들었었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일찍 돌아온 탓에 오히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언제부터인가 두 사람 사이의 기류는 점점 부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눈만 마주쳐도
송문수는 깍지를 끼고 있는 두 손을 바라보았다.심장은 더욱 빨리 뛰고 따뜻함은 배가 되고 있었다.그녀의 마음에 화답이라도 하듯 송문수 역시 더욱 세게 손을 잡았다.하지수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로, 로비로 들어갔다.그곳에는 문수의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셨다.문수의 형, 송승우도 앉아 있었다.둘이 손을 잡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승우의 눈에는 분노가 차올랐다.지금 도발하는 건가? 송문수와 하지수가 일부러 도발을?송문수의 부모님 역시 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고 흐뭇하게 웃고 계셨다.이 얼마나 바라왔던 일인가.문수의 어머님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시며 말씀하셨다.“얼른 들어와, 지금 바로 저녁 준비하라고 할게.”“네, 엄마.”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어머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도 그런 문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그녀는 누군가와 손을 잡는 게 이렇게도 설레는 일인지 처음 깨달은 듯싶었다.그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송문수와 하지수는 나란히 앉아 밥을 먹을 때에도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님은 흐뭇하기 그지없었다.유독 송승우만 얼굴이 굳은 채로 한 술도 먹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너무 고생 많았어. 오늘은 특별히 너희가 좋아하는 반찬들을 준비했으니까 많이 먹어.”송문수 어머님은 반찬을 덜어주며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송문수 아버님도 문수의 업무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질문도 하시곤 하셨지만, 문수를 지지해 주시는 마음은 느낄 수 있었다.저녁 식사는 시끌시끌하였다. 송승우만 빼고 말이다.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혼자만 쓸쓸한 저녁 식사였다.식사가 끝난 후, 수다는 계속되었다. “곧 너의 아버님 환갑인데 난 시끌벅적 크게 보내고 싶은데 어때?”“좋아.” 송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원하는 대로 해. 엄마랑 아빠가 기분 좋은 게 최고
업무를 마친 송문수가 고개를 들자, 하지수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문수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지수?”지수는 화들짝 놀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송문수를 바라보다가 넋이 나간 것이었다.전에는 문수가 멋있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멋져 보였다.선명한 옆선, 뚜렷한 이목구비…문수의 얼굴에는 남성미가 흘러넘쳤다.눈에 콩깍지가 씌었나?지수는 마치 첫사랑을 만나기라도 한 듯 심쿵하고 말았다.그녀는 작심이라도 하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더 이상 문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그러고는 용기를 내어 돌아서서 송문수와 눈을 마주쳤다.송문수 역시 지수가, 그녀의 눈빛이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지고 있었다. 서로의 눈길이 오가는 순간, 송문수는 자신이 그녀를 원하고 있음을 느꼈고 그녀를 꽉 끌어안고 싶었다.사무실 분위기는 어느새 조금씩 달아오르고 있었다.그때, 송문수의 전화벨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타오르던 분위기가 천둥번개를 맞은 것처럼 부서지고 말았다.하지수는 고개를 숙이고 책상 위의 물건들을 정리하며 한편으론 자신의 일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송문수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는 전화를 받았다.“엄마.”“아직도 퇴근 안 했어?” 전화기 너머로 문수 어머님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퇴근하려고.”“기다리고 있을게.”“알겠어.”송문수는 통화를 마치고 하지수한테 말했다.“엄마가 빨리 오라고 하시네.”“그래.”하지수는 가방을 챙기고 송문수랑 같이 퇴근했다.차에 탄 두 사람은 서로 어색해하고 있었다.평소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업무를 논의하던 두 사람이 오늘은 서로의 눈은커녕 얼굴을 마주보기조차 부끄러운 상황이 되었다.하지수는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하려고 애썼다.송문수도 역시 창밖을 내다보았다.그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뛰기 시작했다.수도 없이 많은 여자를 만나봤던 그가 하지수한테 빠지다니!그녀 앞에만 서면 심장이 고장 날 것만
허영지는 송문수의 사무실에 들어가서 말했다.“문수, 지수, 수고했어.”송문수와 하지수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둘이 너무 일에 몰두한 나머지 허영지가 말하지 않았으면 사무실에 들어온 것조차 몰랐다.“엄마, 어떤 일로 오셨어요?”송문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네 아버지가 기어코 오겠다고 해서 같이 왔지.”“아버지도 오셨어요?”송문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기어코 오겠다고 해서 말리지도 못했어. 근데 두 시간 후에 네 아버지를 데리고 갈 거야.”허영지는 웃으면서 말했다.“아버님은 많이 좋아지셨어요?”하지수는 다정하게 물었다.“의사 선생님은 큰 문제가 없다고 하셨어. 하지만 다시 그럴까 봐 걱정돼.”“맞아요. 아버님은 확실히 주의하셔야 해요.”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하고 나서 물었다.“어머님, 뭐 좀 드시겠어요? 비서보고 준비하라고 할게요.”“됐어. 그냥 너희 얼굴을 잠깐 보러 온 거야. 일하는 걸 방해하지 않을게.”허영지가 상냥하게 말하고선 떠나려고 하자 하지수는 일어서서 배웅하려고 하였다.그러나 허영지는 나오지 말라고 했다.“나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해. 난 여기저기 구경하고 있을게. 참, 저녁에 집에 와서 먹어. 이제 곧 아버지 60세 생신이잖아. 얼마 전에 또 죽다가 살아났으니 축하할 겸 나쁜 기운도 제거하려고.”“알겠어요.”송문수가 대답하자 하지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오늘 문수 씨에게 일찍 퇴근하라고 할게요.”“내가 오씨 아줌마에게 반찬을 몇 개 더 준비하라고 할 테니 잊지 말고 와.”“네.”허영지는 기쁜 심정으로 떠났다. 얼마 전에 정말 너무 지쳤다.송기명의 일, 회사의 일, 송문수와 송승우의 일, 허영지는 하마터면 우울증에 걸릴 뻔했다. 지금 모두 순조롭게 풀려서 다행이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다시 송문수와 하지수를 바라보았다.두 사람도 이제 아이를 가질 때가 되겠지?이것은 지금 그녀의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다섯 시 반.하지수는 송문수에게 퇴근하자고 하였다. 요새는 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