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 언니가 왔다고?”오랜만에 들려온 소이연의 소식에 하지수는 흥분하며 답했다.“그럼 당연히 가야지, 오랫동안 못 봐서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육현경 씨랑 이연 언니가 나 엄청 많이 도와줘서 직접 만나서 감사 인사 하고 싶었어.”“계지원 씨 집에서 모이기로 했어. 예수진 씨 배도 점점 불러서 움직이기 힘드니까 그냥 거기서 보기로 했어.”“그래. 그럼 퇴근할 때 연락해. 나는 먼저 어머님이랑 아버님 생일파티 준비하고 있을게.”“응.”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은 각자 알아서 집을 나섰고 하지수는 바로 송 씨 가문별장에 시어머니를 모시러 갔다.하지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송승우가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게 보였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건 아직 어색했기에 하지수도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송승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엄마 모시러 온 거야?”“네.”“집에 계속 계시는 거예요?”“나갔으면 좋겠어?”헛웃음을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다급히 해명했다.“아뇨, 그냥 전에는 계속 일로 바쁘셨던 분이 계시니까 물어본 거예요.”“전에는 연구과제 때문에 바빴는데 이제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서 한가해.”“아, 네.”고개를 끄덕이는 하지수를 보며 그녀가 저를 불편해하는 걸 느낀 송승우는 올라오려는 화를 참으며 물었다.“문수는?”“출근했어요.”“주말에도 출근해?”“요즘이 회사한테 중요한 시기라서 일요일만 쉬기로 했대요. 내일은 안나가요.”사실 송문수에게는 거의 휴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처리해야 할 일이 매일 산더미여서 그는 시간만 나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송문수 많이 변했네.”“송문수가 변해서 너도 걔를 다시 보게 된 거야?”냉소를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감정이라는 게 원래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생기는 거잖아요.”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기척 없이 생겨서는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한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다.하지수의 말로부터 그녀가 이제는 정말로 송문수를
행실이 좋지 않아 평판이 나쁜 장안시(市) ‘왕년’ 최고 미녀의 약혼식.소식이 퍼지자, 상류 사회 전반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여자 화장실.이목구비가 또렷한 소이연은 프랑스식 웨딩드레스를 입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남자친구 문서인과의 3년 연애 끝에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모두가 뒤에서 그녀를 조롱하고 욕하지만 3년 동안 그녀 곁을 지친 남자친구 문서인은 여전히 소이연을 사랑한다.소이연은 기대 섞인 미소를 지으며, 눈가에 눈물을 머금은 채 턱을 살짝 치켜들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이내 문틈으로 가느다란 연기가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기가 끊임없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화재인가?’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바로 코를 막고 나갔다. 시끌벅적했던 연회장은 연기만 가득 찬 채 텅 비어 있었고, 불길은 모든 것을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기억을 더듬어 출구 쪽으로 다급히 달려갔다.불빛 속에서 짙은 연기가 몰아쳤다.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녀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바로 이때.한 남자가 갑자기 밖에서 뛰어 들어왔는데, 그녀의 약혼자 문서인이었다.그 순간, 그녀는 마치 구원자를 보는 것 같았다."문서인, 나 여기 있어...... 헉, 헉......"그러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초조한 얼굴로 사방을 뒤졌고, 마치 목표를 찾은 것처럼 주저하지 않고 소이연의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위급한 상황.문서인은 홀 중간에 주저 앉아있는 여자를 안고 신속하게 밖으로 나갔다."서인 오빠, 날 구하러 올 줄 알았어......"소이연은 그 여자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두려움에 가득 차 떨리는 목소리."너무 무서워......"그 순간.소이연은 눈앞이 캄캄해지며 바늘에 콕콕 찔리듯 마음이 쑤셔왔다.왜냐하면 그 목소리는… 그녀의 의붓여동생인 소나은의 목소리였다.문서인이 목숨을 걸고 구하고 싶은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다.심장이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것 같았다.그녀는 숨이 올라
소이연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보았다. 그녀와 같이 환자복을 입고 있는 아이는 대여섯 살 된 남자아이다. 정교한 이목구비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잘 생겼다.소이연은 가슴이 미어졌다.마치 몸속 어딘가가 얽혀 있는 것 같은......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남자아이는 재빨리 소이연의 병상 앞으로 달려가 이내 짧은 다리로 재빠르게 그녀의 병상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말랑한 몸으로 그녀를 덥석 안았다."엄마, 나쁜 사람이 괴롭힌 거야?"그러고는 서투른 작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눈물을 닦아주었다.소이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까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었다.아이의 행동은 정말 소이연의 마음을 녹여주었다......그녀는 눈앞의 아이를 전혀 모른다.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부드러운 곱슬머리를 만졌다."아가야, 사람 잘못 본 거 아니야?""아니야! 우리 엄마야, 나랑 아빠가 앞으로 엄마를 지켜줄게."아이는 그녀가 자기의 엄마라 확신했는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아빠는 성격이 더럽고 맨날 표정은 굳어있고 말도 잘 하지 않고…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고 항상 위가 아프다면서도 제때 밥도 먹지 않고 담배도 좋아하지만, 우리 아빠는 잘생겼고 돈도 많아. 그니까 엄마 이제 우리를 버리지 마.""......"소이연은 당황스러웠다."귀여운 꼬마야, 어떡하지? 난 네 엄마가 아니야.""아니! 우리 엄마 맞아. 난 다 알고 있어......""육민."병실 입구에서 갑자기 냉담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아이는 갑자기 몸을 덜덜 떨었다.그는 작은 머리로 뒤를 돌아보았다.소이연도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그녀 주변에는 아무리 잘생긴 남자가 많다 해도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확실히 달랐다.하얀 셔츠에 단추가 하나 풀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비치는 하얀색 살결. 섹시했다.미간에는 날카로움과 여유로움이 배어 있었고, 단정하고 곧은 자세에서는 자신감과 귀티가 흘러나왔다."아빠!"아이는 남자를 불렀다.소이연은 그제야
소이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문서인을 바라보았다.비록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삼 년 동안의 감정 때문에 그녀는 어제까지만 해도 문서인이 자기를 불길 속에 버리고 소나은을 구해준 이유가 듣고 싶었다. 물론 그렇다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문서인의 어떤 해명도 결국 그녀가 모욕을 자초하는 일이라 판단되었다.문서인은 소이연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상대의 정교한 비주얼에 문서인은 눈빛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이내 눈앞의 이 남자가 바로 어제 소이연를 구하기 위해 불 속을 뛰어들었던 소방관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당시 그 남자는 구조용 헬멧을 쓰고 있었기에 문서인은 그의 이목구비를 자세히 보지 못했으며 단지 키가 크다는 것만 보아낼 수 있었다."문서인, 우리 그만하자."소이연이 입을 열었다.삼 년의 감정은 이렇게 끝났다.문서인은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그는 놀란 눈빛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이연을 바라보았다.화가 절정에 달한 그는 남자에게 삿대질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소이연, 이 남자가 대체 뭔데? 이 남자는 그저 소방관일 뿐이야. 그런데 단지 소방관 때문에 나랑 헤어지겠다고?!"육현경의 동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의 눈빛에는 조소와 음산함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육현경은 침묵을 택했다.육현경은 무뚝뚝하게 외면하는 표정이지만 전혀 자리를 비켜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지는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소이연의 냉담한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어제 네가 소나은을 구하기로 한 순간, 모든 게 끝이라는 걸 생각 못했어?! 문서인, 더 이상 날 바보 취급하지 마!"문서인의 격앙된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는 할 말이 없다.문서인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복잡한 눈빛과 뒤죽박죽 한 머릿속, 그렇게 한참 뒤에야 문서인의 눈빛은 다시 석연해졌다."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문서인은 슬픈 눈으로 소이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문서인은 병원을 떠나 소씨 가문의 별장에 도착했다.소승영이 다급하게 물었다."이영이가 파혼에 찬성한대?"문서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얌전한 소나은을 향해 자상하게 말했다."이미 헤어진 이상 파혼은 문제없어요. 다만 한동안은 나은이가 힘들어도 기다려야 해요.""힘들지 않아."소나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윽한 눈빛으로 말했다."난 오빠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문서인은 소나은의 고분고분한 모습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소나은을 택한 게 정확한 선택이다!문서인은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병원에 갔는데 병실에 남자가 있었어요. 그날 그 소방관이었어요.""개가 똥 먹는 것을 어떻게 고치겠어. 진작에 헤어져야 했어. 그 아이는 자네에게 어울리지 않아!"소승영이 단호하게 말했다.문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더러운 소이연!’"그 아이 말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마음대로 하라고 해, 나도 그렇게 얼굴이 두꺼운 딸은 없는 거로 칠 테니!"소승영은 소이연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었다. 소승영은 이내 화제를 돌렸다."듣자 하니 며칠 전 육씨 그룹의 큰 도련님인 육현경이 귀국했다 하던데, 기회가 되면 나은이가 은하 그룹 대표 신분으로 한번 만나봐.""아빠, 나한테 은하 그룹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세요?"소나은이 감격에 겨워 물었다.은하 그룹은 소이연의 어머니가 생전에 설립한 회사이다. 그녀는 소이연이 가장 원하는 것을 마침내 손에 넣었다."아빠, 고마워요. 절대 실망하게 해 드리지 않아요."소나은은 황급히 자기의 결심을 밝혔다."아빠는 당연히 널 믿어."소승영은 소나은을 지극히 애지중지했다."근데 방금 아빠가 얘기한 육현경은 장안시 제일 재벌 맞죠? 해외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생모는 알려지지 않았다는?"소나은은 궁금한 듯 물었다.소승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듣자 하니, 육씨 가문 어르신이 편찮아서 육현경이 기업을 상속받았다지. 최근 몇 년 동안 육현경은 줄곧 해외에서 해외 시장 매출을 수직으로 상승시켰다고 하더라고. 기
"민이 오늘 소이연 씨 기다리느라 평소보다 한 시간 늦게 잤어요."육현경은 입을 열어 어색함을 풀려고 했다.소이연은 마음이 살짝 떨리더니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사실 대표님은 민이에게 내가 엄마가 아니라고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어요."육현경의 칠흑 같은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갑작스러운 침묵에, 소이연은 자기가 실수라도 한 줄 알았다.소이연은 별 고민 없이 말했다."화재는 사고일 뿐이에요. 대표님도 괜히 제 식사 신경 쓰실 필요 없고요, 간병인도 필요하지 않아요. 맞다, 휴대폰은 얼마죠? 계좌로 이체해 드릴게요.""난 소이연 씨가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그래서 난 대체 뭐가 바보 같다는 거지?!’"민이는 엄마가 필요해요."육현경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당연한 듯이 말했다."그래서요?"소이연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육현경은 그녀를 한참 동안 그윽하게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민이는 소이연 씨를 좋아해요. 이쯤 얘기하면 내가 소이연 씨를 원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셨겠죠?""......"그녀는 정말 눈치채지 못했다.육현경의 행동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소이연 씨, 바로 답해 주지 않아도 돼요. 아무래도 우리는......"육현경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마치 적당한 표현을 생각해 낸 듯 마지막에 몇 글자를 덧붙였다."아직 친하지 않으니까요."분명히 단지,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일 뿐이다.소이연은 깊은숨을 내쉬며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대표님, 사람 감정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요?"육현경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육현경은 쉽게 다가가기 힘든 비주얼이다. 하지만 이 순간 소이연은 그가 더 멀게 느껴졌다."대표님 아이가 절 좋아해서 대표님도 절 원한다고요? 그럼 저는 그저 꼭두각시라는 얘긴가요? 그럼 언젠가 민이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대표님은 또 다른 여자를 원할 건가요?"소이연은 다소 무거운 어조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미안하지만, 대표님의
"당연하지."일주일 동안 함께 지내면서 소이연은 육민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게 되었다."번호 찍어두었으니 보고 싶으면 전화해. 시간 나면 또 만나러 올게.""꼭 그래야 해. 거짓말하면 멍멍이야."소이연은 힘들게 몸을 낮추었다.옆에 있던 육현경은 눈살을 찌푸렸다.소이연은 자세를 낮추어 육민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며 말했다."거짓말하면 멍멍이."육민은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소이연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왠지 모르게 육현경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지는 것 같았다."먼저 갈게."소이연은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엄마, 넘어지지 않게 조심히 가."육민은 그녀를 향해 달콤하게 말했다.그런데, 아무리 호칭을 바꾸라고 해도 안 바꾼다.엄마가 아니라고 하니 육민은 그녀가 자기를 버린 줄 알고 이내 토끼 같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그녀도 집착하지 않았다.육민이 더 크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소이연은 혼자서 목발을 짚고 병실을 나왔다.육현경은 이렇게 계속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녀는 몇 번이나 거절하려다가 모른 척 넘어갔다.어느새 병원 앞까지 나오게 된 두 사람."대표님......"육현경은 그녀를 지나쳐 그들 앞에 주차된 검은색 마이바흐 문을 매너 있게 열었다.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차 있잖아요."육현경은 간결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이것도 어필인 거야?’"신경 쓰여요."육현경이 덧붙였다.소이연은 육현경을 바라보았다.그와는 정말 대화하기 어려웠다.소이연은 어쩔 수 없이 타협했다.육현경에게는 마치 그녀가 거절할 수 없게 하는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거절하는 것도 시간 낭비다. 아무 소용이 없다.럭셔리한 승용차에서."소이연 씨 어디 살아요?"육현경이 물었다."노스타운요."귀국 후, 그녀는 소씨 집안에 돌아간 적 없었다.소 씨 집안에서도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그래요."육현경은 가볍게 답하고 기사에게
널찍한 회의실에는 은하 그룹의 주요 임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소나은은 연단에 서서 취임 연설을 준비하고 있다.그녀가 입을 열자마자,문뜩 입구에 서 있는 소이연을 발견하고 온몸이 굳어져 버렸다.회의실 맨 앞줄 센터에 앉은 소승영은 소나은의 이상함을 감지하고, 뒤를 돌아봤다.소이연의 모습에 소승영도 얼굴이 시커멓게 굳어졌다.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은하의 모든 직원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소승영은 혐오에 가득한 표정으로 소이연에게 다가갔다."네가 어떻게 이곳에?!""우리 엄마가 세운 회사에 제가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소이연이 되물었다.소이연의 포스는 전혀 소승영에게 밀리지 않았다."너랑 다투고 싶지 않으니 당장 나가. 너한테 낭비할 시간 없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소승영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소이연은 소승영의 말을 뒤로하고 곧장 회의실로 들어갔다.소이연이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모습에 소나은의 눈빛은 악독하게 변했다. 그렇지만 이내 표정 관리를 하며 순진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언니, 어떻게 왔어? 날 축하해 주러 온 거야? 너무 기쁘다."소이연은 소나은이 배우가 되지 않는 것이 정말 아쉽다고 생각했다.소이연은 소나은의 가식적인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임원들 앞에서 서류를 꺼내 말했다."안녕하세요, 소이연이에요. 오늘 저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은하 그룹을 승계받으러 왔습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은하 그룹을 관리해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그녀의 말이 떨어지자.순식간에 장내가 술렁였다.“뭐라고?!”“은하 그룹이 소이연 거라고?!”“그럼, 회장님과 소나은은 어떻게 된 거야?!”소이연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놀라움을 개의치 않고 말했다."오늘부터 은하 그룹은 제가 책임집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말을 끝내고,소이연은 허리를 굽혀 직접 은하 그룹에 대한 소유권을 선포했다.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소나은의 손에는 그녀가 정성껏 준비한 인사말이 들려 있었다. 소이연의 말 한마디에 수많은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
“이연 언니가 왔다고?”오랜만에 들려온 소이연의 소식에 하지수는 흥분하며 답했다.“그럼 당연히 가야지, 오랫동안 못 봐서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육현경 씨랑 이연 언니가 나 엄청 많이 도와줘서 직접 만나서 감사 인사 하고 싶었어.”“계지원 씨 집에서 모이기로 했어. 예수진 씨 배도 점점 불러서 움직이기 힘드니까 그냥 거기서 보기로 했어.”“그래. 그럼 퇴근할 때 연락해. 나는 먼저 어머님이랑 아버님 생일파티 준비하고 있을게.”“응.”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은 각자 알아서 집을 나섰고 하지수는 바로 송 씨 가문별장에 시어머니를 모시러 갔다.하지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송승우가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게 보였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건 아직 어색했기에 하지수도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송승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엄마 모시러 온 거야?”“네.”“집에 계속 계시는 거예요?”“나갔으면 좋겠어?”헛웃음을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다급히 해명했다.“아뇨, 그냥 전에는 계속 일로 바쁘셨던 분이 계시니까 물어본 거예요.”“전에는 연구과제 때문에 바빴는데 이제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서 한가해.”“아, 네.”고개를 끄덕이는 하지수를 보며 그녀가 저를 불편해하는 걸 느낀 송승우는 올라오려는 화를 참으며 물었다.“문수는?”“출근했어요.”“주말에도 출근해?”“요즘이 회사한테 중요한 시기라서 일요일만 쉬기로 했대요. 내일은 안나가요.”사실 송문수에게는 거의 휴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처리해야 할 일이 매일 산더미여서 그는 시간만 나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송문수 많이 변했네.”“송문수가 변해서 너도 걔를 다시 보게 된 거야?”냉소를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감정이라는 게 원래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생기는 거잖아요.”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기척 없이 생겨서는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한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다.하지수의 말로부터 그녀가 이제는 정말로 송문수를
“하지수, 변호사 일할 때는 똑똑하더니 연애에는 영 소질이 없나 봐?”자는 척하고 자신을 놀려먹은 건 송문수인데 오히려 바보라고 핀잔을 듣자 화가 난 하지수가 얼굴을 붉혔다.“네가 나한테 뽀뽀하는 게 좋으니까 계속하라고 가만히 있은 거잖아!”송문수가 언성을 높여 말해서야 이유를 알게 된 하지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 표정에 어이가 없어진 송문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이렇게 바보 같아서 어떡해, 누가 너 팔아넘겨도 모르겠다.”“누가 누구한테 바보래. 내가 당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인 줄 어떻게 알고...”말을 채 끝맺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입을 맞춰오며 진득한 키스를 이어나가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눈을 크게 떴다.“아...”아까 자신이 한 건 그저 뽀뽀이지 이렇게 치열을 훑고 지나가는 키스는 아니었는데 입속 깊은 곳까지 뜨겁게 만드는 키스는 옆에서 핸드폰이 울리건 말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송문수도, 하지수도 그 벨 소리를 무시한 채 키스를 이어나가다 둘의 입술이 다 번들번들해질 때가 되어서야 송문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하지수를 놓아주었다.송문수의 키스에 정신이 혼미해진 하지수는 나른한 눈빛으로 송문수를 보고 있었는데 핸드폰을 보던 송문수는 갑자기 욕설을 내뱉더니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가 욕실로 달려들어 갔다.그의 샤워 소리가 들릴 때에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도 시간을 보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변호사 일을 시작하면서 누구보다 규칙적이고 자율적인 일상을 보내왔던 하지수였기에 그녀는 자신이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송문수를 만난 뒤부터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송문수가 만약 자신을 팔아넘겨도 그를 도와 돈을 세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고 있었다.생리대부터 바꾸러 제 방으로 돌아간 하지수가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송문수도 옷을 갈아입은 채로 거실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평소에는 7시에 일어나서 8시 정도면
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새 깨어난 지도 모르고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고 송문수는 다정한 눈을 한 채 떨리는 손으로 제 옆에 누운 하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이튿날 아침, 눈을 뜬 하지수는 방금 일어난 탓에 낯선 주위를 한참이나 둘러보고서야 여기가 송문수의 방임을 기억해냈다.관계 빼고는 별짓 다 한 어젯밤이 떠오른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혼자 자는 게 습관 되어있어 송문수의 품에 안긴 뒤 빨리 뛰는 심장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아마도 바쁜 일정 때문에 피곤했던 것 같다.완전히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송문수를 바라보았다.자고있는 그의 모습은 평소처럼 차갑지 않고 쫙 펴진 미간 덕분에 오히려 부드러워 보여 공격성이 다분하지도 않았다.왜 눈을 뜬 모습과 감은 모습이 이렇게 다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송문수의 얼굴을 찬찬히 보던 하지수는 날카로운 그의 눈빛을 떠올렸다.전에는 그 눈빛이 마음속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아 두려웠었는데 지금의 하지수는 더 이상 잠들어있는 송문수도, 깨어있는 송문수도 두렵지는 않았다.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깨어있는 송문수를 마주할 때는 하지수가 주동적으로 입을 맞출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잠들어있을 때는 그야말로 하지수 세상이었기에 그녀는 빠르게 송문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하지수는 그 뒤로도 여러 번 입을 맞추다가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릴 때가 돼서야 행동을 멈추었다.물론 자의로 멈춘 건 아니고 입맞춤을 하던 와중에 눈을 떠버린 송문수 때문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깜짝 놀라 잠시 멈칫한 것이었다.당황한 하지수는 빠르게 도망가려 했지만 자신을 눌러버린 송문수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분명 방금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송문수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몽롱한 느낌은 전혀 없는 눈으로 그는 하지수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의 진득한 눈빛을 당해내지 못한 하지수는 서둘러 눈을 피했
“미안해 문수 씨... 평소엔 이때가 아니라서 나도 몰랐어...”“응.”이 일은 애초에 하지수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그녀를 탓할 수도 없었던 송문수는 하늘이 불공평하다고 한탄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수를 만나는 날만 기다리며 3년 동안 아무와도 관계를 하지 않았던 그인지라 오늘에서야 비로소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겠다고 기뻐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에 또 일주일을 더 기다리게 된 이 상황에 송문수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한숨을 쉬는 송문수를 본 하지수는 그가 자신에게 실망한 줄로 알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다음에 다시 할까?”하지수의 말에 잠시 멈칫하던 송문수는 이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그걸 말이라고 해? 생리 끝나면 당장 해.”자신한테 자꾸 일이 생겨버려 송문수가 다른 사람을 찾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던 하지수는 확신에 찬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며 청심환을 하나 먹고는 말했다.“그럼 편히 자, 난 내 방 가서 잘게.”“어디 간다는 거야?”“내 방 가야지.”“하지수, 네 발로 직접 내 방 찾아와 놓고 이제 돌아가겠다는 거야?”갑자기 터진 생리 때문에 관계를 못 가진 것도 화가 나는데 사람까지 가버리겠다는 말을 들은 송문수는 언짢은 티를 팍팍 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나 생리 와서 어차피 못하잖아.”“그게 왜?”“아까 문수 씨도 생리 끝나면 하자고 했잖아. 지금 하는 건 나도 좀...”송문수가 되묻자 하지수는 아주 난감해하며 답했다.“하지수, 넌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아까 너 안 놔줬으면 여기 진작에 피바다 됐어.”“...”“관계까지 할 사이에 뭘 내외를 하고 그래. 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앞으로 쭉 같이 자자고? 나랑?”“왜, 싫어?”“아니.”당연히 싫진 않았지만 하지수는 그저 송문수가 관계도 없는 잠을 자신과 함께 자겠다는 게 신기했을 뿐이다.그렇게 순진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는데.“빨리 와서 자. 아까 너무 움직였더니 피곤해.”송문수가 먼저 침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눕자 하
송문수의 입술이 하지수의 입술을 지나 그녀의 귓가에 닿을 때, 이런 식의 스킨십은 처음 해보는 하지수는 온몸이 떨려왔다.태어나서 딱 한 번, 송문수와 차에서 해본 게 전부인 그녀는 송문수의 유혹을 당해내지 못하고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목에 자신의 고개를 비볐다.그렇게 하지수를 안달 나게 하던 송문수는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걸 확신하고는 점차 행동을 대범하게 하기 시작했다.자연의 섭리인 것마냥 물 흐르듯 움직임을 이어나가던 송문수가 갑자기 멈췄을 때 하지수는 온몸이 뜨거워 나고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온몸이 나른해진 그녀는 송문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참 지나 송문수가 더는 움직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가 그를 보며 물었다.“왜 그래?”제 아래에 누워있는 하지수를 보며 정말 이성을 잃을까 봐 걱정된 송문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문수 씨?”하지만 하지수는 아까는 그렇게 늑대처럼 달려들던 사람이 갑자기 말도 안 하고 거친 숨만 연신 내뱉는 게 이상했다.“문수 씨...”“지수야.”송문수가 한참 만에 입을 열자 그 숨결에 의해 뜨겁게 달궈진 피부에는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곧 자신이 상상했던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었던 아주 아름다운 순간이었는데 다른 여자들한테는 다 곁을 내주면서 왜 자기 앞에서는 갑자기 멈추는 건지 하지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본인이 여자로서의 매력이 떨어져서 송문수가 싫어하는 걸까 봐 자연스레 눈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송문수가 잔뜩 실망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너 생리 왔어.”“뭐?”송문수의 말에 깜짝 놀란 하지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송문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속옷에 피 묻어있어, 아마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수치스러움에 빨개진 얼굴로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이틀 뒤가 예정일인데 왜 갑자기 오늘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지수는 송문수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가 민망해 침대에서 뛰어내리다가 하마터면 넘
송문수는 자신의 떨림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하지수도 그의 몸 아래에서 떨리고 있었다.송문수는 이미 자신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예전의 그라면 이미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을 맡겼을 것이다.그는 조심스럽게 지수에게 다가갔다.지수는 온몸이 긴장돼 있었고 두 손은 이불을 꼭 쥐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송문수의 몸 아래에 있게 됐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단지 지금, 그의 숨결은 몹시 거칠고 심장 소리는 우뢰처럼 커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어쩔 바를 몰라 했고 곧 무언가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그때, 송문수의 입술이 서서히 하지수의 입술에 와닿았다.송문수의 심장은 더욱 격렬히 뛰고 있었고 이불을 꼭 쥐고 있던 지수의 두 손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두 입술이 맞닿은 그 순간, 두 사람은 머리가 하얘졌다.둘만의 공간, 둘만 나누는 부드러운 촉감, 온몸으로 느끼는 서로의 떨림……이것이 진짜 입맞춤이었다.하지수의 뇌리에는 갑자기 전에 송문수의 차에서 나눴던 관계가 스쳐 지나갔다. 단지 관계를 위한 관계였을 뿐, 사실 그녀는 아무런 떨림도 느끼지 못했고 심지어 굴욕적이라는 생각까지도 들었었다.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오히려 그녀가 리드하고 있었다.송문수가 조심스러워 망설이고 있을 때 그녀가 먼저 리드했다.그는 그녀의 유혹을 당해낼 수가 없었고 둘은 더더욱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온 세상이 조용해지고 두 사람의 심장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두 사람은 얼마 동안 키스를 나눴는지 가늠조차 못 하고 있었다. 아주 길게 또 아주 짧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입술을 뗀 두 사람의 얼굴은 너 나 할 것 없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이런 경험은 송문수도 처음이였다. 능수능란해야 마땅한 그는 지수와의 키스 후 고장 난 사람처럼 어쩔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방금 전의 달콤하고도 아름다웠던 키스에 사로잡혀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온 밤을 그녀와 보내고 싶었다.그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에 다가갔다.천천히
그는 너무 기뻐하다가 오히려 일을 망칠까 봐 조금 두려웠다.“그러면 오늘밤에 같이 자는 거 어때?”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며 물었다.“푸!” 송문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조금 전에 마시던 물을 내뿜었다.“싫으면 말고…” 송문수의 격한 반응에 지수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그런 거 아니야.” 송문수는 다급히 해명했다.지수는 어리둥절해졌다. 바로 전에 문수가 분명히 아주 격렬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송문수는 연신 입을 닦으며 말을 덧붙였다.“너랑 같이 자는 게 절대 싫어서 그런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그럼 나 먼저 씻을게.” 하지수는 웃으며 말했다.“그래.”“네 방에서 잘까? 아니면 내 방?”“난 다 좋아.”“그러면 네 방에서 자자. 네 방이 더 크니까.”“그러자.”“나 씻을게.”“응.”“너도 빨리 씻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수는 얼굴이 타오르듯 빨개졌다.무슨 의미인지 두 사람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송문수는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가 힘들었다.하지수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송문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방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그는 곧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너무 긴장되어 숨도 안 쉬어지고 물컵을 들고 있던 손도 떨릴 지경이였다.수도 없이 많은 여자를 만나봤던 그로서는 남녀관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고 이런 경험이 처음일 리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그 상대가 하지수라니, 송문수는 머리가 하얘졌다.그는 남아있던 물을 한 모금에 다 마시고 나서 바로 방으로 돌아가 샤워하기 시작했다.오늘 밤이 지나면 둘 사이는 전혀 다른 관계가 되어 있을 것 같았다.송문수는 샤워를 마쳤다.평소라면 몇분이면 끝낼 샤워를 오늘에는 한번 또 한 번 반복해서 씻었다. 행여나 깨끗이 못 씻었을지 몇 번이나 더 씻은 후 겨우 욕실을 나와 침대에서 하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지수가 이미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으나 지수는 더 오래 걸렸다.아마도 그와 똑
하지수는 민망함에 얼굴이 더 붉어졌다.그녀는 송문수와의 관계가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직 아이를 가질 정도까지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송문수도 민망해하며 말했다.“저희 둘 사이 일은 걱정하시지 마세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네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이러는 거야.” 송문수 어머니는 핀잔을 주었다.“네가 조금 더 잘했으면 지금쯤 애가 뛰어다니며 놀 나이가 됐을 거야.”“엄마! 그만 하세요.”문수는 더 이상 듣기 싫었다.“그래, 알았어. 근데 내가 다시 한번 강조하는 건데, 너 다시는 지수 같은 여자애 못만난다는거 기억해. 지수 놓치면 평생 후회하면서 혼자 살게 될 거라는걸.”“알겠어요, 알겠다고요.”송문수는 잔소리가 듣기 싫었지만, 어머니의 말에 반대는 하지 않았다.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송승우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자리를 박차 거실을 나갔다.모든 사람의 눈길이 그에게로 향했다.송문수는 송승우가 왜 화가 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가 고개를 돌려보니 하지수도 송승우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지수도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눈길이 가게 된 것이었다.송문수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송승우에 대한 마음은 일찌감치 접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송문수는 시선을 돌렸지만, 마음속으로는 내심 안도했다.하지수는 정말 송문수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송승우의 돌발행동에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이에 대해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가장 많은 논의가 있었던 것은 역시나 아버지의 생일파티와 그들에게 아이를 낳는 것을 권유하는 것이었다.저녁 아홉 시, 송문수와 하지수는 집으로 돌아갔다.야근을 자주 하는 탓에 이렇게 일찍 귀가한 적은 처음이었다.예전에는 집으로 돌아오면 너무 피곤해서 샤워만 하고 각자 잠에 들었었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일찍 돌아온 탓에 오히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언제부터인가 두 사람 사이의 기류는 점점 부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눈만 마주쳐도
송문수는 깍지를 끼고 있는 두 손을 바라보았다.심장은 더욱 빨리 뛰고 따뜻함은 배가 되고 있었다.그녀의 마음에 화답이라도 하듯 송문수 역시 더욱 세게 손을 잡았다.하지수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로, 로비로 들어갔다.그곳에는 문수의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셨다.문수의 형, 송승우도 앉아 있었다.둘이 손을 잡고 들어오는 모습을 본 승우의 눈에는 분노가 차올랐다.지금 도발하는 건가? 송문수와 하지수가 일부러 도발을?송문수의 부모님 역시 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고 흐뭇하게 웃고 계셨다.이 얼마나 바라왔던 일인가.문수의 어머님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시며 말씀하셨다.“얼른 들어와, 지금 바로 저녁 준비하라고 할게.”“네, 엄마.”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어머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도 그런 문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그녀는 누군가와 손을 잡는 게 이렇게도 설레는 일인지 처음 깨달은 듯싶었다.그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송문수와 하지수는 나란히 앉아 밥을 먹을 때에도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님은 흐뭇하기 그지없었다.유독 송승우만 얼굴이 굳은 채로 한 술도 먹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너무 고생 많았어. 오늘은 특별히 너희가 좋아하는 반찬들을 준비했으니까 많이 먹어.”송문수 어머님은 반찬을 덜어주며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송문수 아버님도 문수의 업무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질문도 하시곤 하셨지만, 문수를 지지해 주시는 마음은 느낄 수 있었다.저녁 식사는 시끌시끌하였다. 송승우만 빼고 말이다.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혼자만 쓸쓸한 저녁 식사였다.식사가 끝난 후, 수다는 계속되었다. “곧 너의 아버님 환갑인데 난 시끌벅적 크게 보내고 싶은데 어때?”“좋아.” 송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원하는 대로 해. 엄마랑 아빠가 기분 좋은 게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