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스.”임아영은 나약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녀의 목소리는 기쁨이 가득했지만 육현경은 상대적으로 차가웠다.그의 휠체어가 그녀의 침대 옆에 도착했다.임아영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육현경이 말했다.“몇 마디만 하고 바로 갈 거예요.”그 말인즉 그녀가 뭘 해도 그는 신경 쓰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임아영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면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난 그냥 아영 씨한테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어요.”육현경은 직설적으로 말했다.“하지만 우리 결혼은 여기서 끝이에요. 루카스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거니까 앞으로 날 육현경이라고 불러요.”임아영의 눈물은 조용히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루카스와 소이연 씨는 다시 함께 할 수 있어요?”임아영이 물었다.지금 그녀는 이미 어떠한 조건도 육현경에게 걸 수 없었다.비록 그녀는 더 묻지 않았지만 임씨 가문의 누구도 그녀를 보러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임씨 가문은 이미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더 이상 임씨 가문의 권력을 이용해 그를 압박할 수 없었고 목숨을 걸어 협박할 수도 없었다.육현경이 목숨을 걸고 그녀를 구해줬기에 그녀는 육현경에게 목숨을 빚졌다.임아영이 지금 뭘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아니요.”육현경은 임아영에게 숨기지 않았다.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임아영은 그를 바라보았다.“이연이는 이미 좋은 사람을 만났어요.”육현경은 평온하게 말했다.“심문헌 씨요?”“그건 이연이의 일이에요. 난 앞으로 그냥 이연이의 행복을 빌어줄 거예요.”그 말은 소이연이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더 이상 그녀의 인생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그럼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없을까요?”임아영은 비굴하게 물었다.“소이연 씨도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데. 우리도 어쩌면...”“아니요.”육현경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이연이의 인생을 난 축복해 줄 거예요. 하지만 내 인생을 아무랑 보내고 싶진 않아요
육현경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간호사에게 병실로 데려다 달라고 말하려는 순간 다시 한번 소이연과 심문헌을 마주쳤다.그들은 이 복도를 계속 오가며 산책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마침 이 곳으로 걸어왔다.심문헌은 이 미라를 보고 인연이 있다고 생각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산책 중이에요?”육현경은 심문헌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소이연을 바라보았다.소이연은 침묵했다.“설마 말도 못 하는 건 아니죠? 입은 막지 않은 것 같은데?”심문헌은 장난을 치며 말했다.육현경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내가 입을 열면 그쪽이 듣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요.”“그럴 리가요? 목소리가 아주 좋네요.”“나 육현경이에요.”순간 심문헌은 말문이 막혔다.그는 확실히 육현경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저 육현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아 자식 꽤 많이 다치긴 했네. 몰골이 아주 말이 아니야.’“그럼 두 사람 방해하지 않을게요.”육현경은 정중하게 말했다.그런 다음 간호사에게 휠체어를 밀어달라고 말했다.심문헌은 육현경이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는 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소이연을 바라보았다.“육현경을 알아봤어요?”“네.”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중환자실에 누워있을 때 가서 봤었는데. 그 모습 그대로네요.”‘결국 바보는 나 하나였네.’“가요.”심문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어차피 심문헌 같은 장난꾸러기가 바보가 되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그런데 저기는 임아영 씨 병실 아니에요?”심문헌은 소이연이 이끄는 대로 가면서 대화를 나눴다.“네.”“두 사람 사이는.”“왜요? 관심 있어요?”소이연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아니요. 별로 관심 없어요.”심문헌이 고개를 저었다.“근데 왜 그렇게 많이 물어요?”“그냥.””어차피 난 관심 없어요.”소이연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심문헌은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가 완전히 육현경을 내려놓은 것 같아 입꼬리가 올라갔다.순간적으로 구름이 걷히고 달이 드러나는 것처
“불편해요?”천우진이 물었다.“아니요. 그냥 이렇게 계속 그쪽 집에 있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심문헌은 미안해하며 말했다.“언제부터 그렇게 쑥스러워했어요?”“그 말은 내가 원래 뻔뻔했다는 거예요?”심문헌은 순간적으로 천우진의 말에 폭발했다.“그만 싸워요. 내가 준비할게요.”소이연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들의 싸움을 말렸다.심문헌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감히 더 말하지 못했고 천우진도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지 않았다.소이연이 말했다.“문헌 씨 퇴원하더라도 의사 선생님이 아직 무리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최소한 3개월은 더 회복해야 해요. 난 지금 문헌 씨가 비행기를 타고 낙성으로 가는 게 걱정돼요. 그것도 혼자서. 지금 내가 서울과 장안을 오가며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으니까 문헌 씨 먼저 나랑 서울에 있어요.”“알겠어요.”심문헌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로 수긍했다.천우진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심문헌은 또 그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고 느꼈다.‘어휴 됐다. 듣기로는 천씨 가문 관계가 좋지 않다던데. 이런 즐거움도 모르겠지. 내가 똑같이 행동할 수 는 없잖아.’그들은 함께 병원을 나섰다.빠른 회복을 위해 심문헌은 여전히 휠체어를 탔다.방금 복도에 나왔을 때 갑자기 육현경의 모습이 보였다.그는 여전히 붕대를 감고 있었다.한 달이 지났으니 많이 좋아졌을 줄 알았는데 그의 얼굴은 여전히 미라 같았다.소이연은 육현경과 인사를 나눌 생각이 없었고 육현경도 그들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천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의사가 뭐라고 해요? 언제 퇴원할 수 있대요?”“아직 멀었다고 하던데요.”육현경은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심문헌을 한 번 바라보며 물었다.“퇴원해요?”“네.”“축하해요.”“고마워요.”심문헌은 정중하게 말했다.그 순간 모두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했다.“민이는요?”천우진이 정석을 깨며 물었다.“오늘 안 왔어요. 심문헌 씨가 오늘 퇴원한다는 말을 듣고 집에서 기다린다고 하던데요
“내 말은.”“됐어요.”천우진은 이미 심문헌을 차에 내려주었다.심문헌은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소이연은 두 사람의 케미를 쭉 지켜보았다.‘내 눈이 잘못된 건가? 뭔가 느낌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데?’“이연 씨.”심문헌이 그녀를 불렀다.“네.”그제야 소이연은 다급하게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자기 생각이 너무 순수하지 못하다가 자책했다.차는 진씨 가문에 도착했고 먼저 심문헌을 방에 데려다주었다.모든 규칙을 알려준 다음에 소이연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그동안 그녀는 대부분 자택 근무를 하고 있었다.좀 이따가 또 화상 회의가 있었다. 그녀는 먼저 오늘 회의 내용을 살펴본 뒤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게 정리해야 했다.마침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소이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육민이 조심스럽게 커피를 들고 방에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동안 그녀가 심문헌을 돌보느라 육민과 함께 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지금 이런 육민의 모습을 보니 소이연은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그녀가 육민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은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전에 그녀는 육현경에게 절대로 육민을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육민에게 소홀해지고 있었다.“엄마. 아직도 바빠요?’육민은 커피를 그녀의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물었다.“고마워.”소이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반 시간 뒤에 화상 회의가 있어.”“그럼 엄마 방해하지 않을게요.”육민은 다정하게 말했다.“민아. 엄마한테 할 얘기 있는 거 아니야?”소이연이 물었다.육민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회의까지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앉아 봐.”소이연은 다급하게 의자를 갖고 와 육민을 그녀의 옆에 앉혔다.“나 그동안 아빠하고 시간을 보냈어요.”육민이 말했다.“응 엄마도 알아. 아빠는 회복이 잘 되고 있어?”소이연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그녀는 육민이 부모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소이연은 육민을 말을 듣고 침묵했다.그러고 보니 그녀가 매번 심문헌을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면 열 번에 아홉은 육현경을 마주쳤다.그녀도 약간 의아했다.육현경은 원래 이렇게 자주 외출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그저 육현경이 병원에 있는 것이 답답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그도 그럴 것이 심문헌은 방금 침대에 누웠다가도 밖에 나가려고 온갖 방법을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빠 얼굴에 붕대도 계속 감고 있을 필요가 없었어요. 의사가 몇 번이나 아빠한테 붕대를 풀지 않으면 상처에 환기가 안 돼서 회복하는데 오히려 안 좋다고 했는데 아빠는 붕대를 꼭 감아야 한다고 고집했어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빠는 아마도 얼굴의 흉터가 너무 흉해서 엄마가 보면 노랄까 봐 그런 것 같아요.”육민은 진지하게 말했다.소이연은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말 몰랐다.육현경과 이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했지만 결국 그들 사이는 인연이 부족했다.그래서 그냥 이렇게 지나가자고 생각하며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이렇게 각자 살아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냥 앞으로 멀리 떨어져 각자 갈 길을 가면 된다고 다짐했다.“맞다. 아빠는 또.”“민이야.”소이연은 어쩔 수 없이 육민의 말을 끊었다.육민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네 아빠의 마음은 엄마도 알아. 하지만 감정은 상호적인 거야. 엄마가 사랑했을 때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고. 아빠가 엄마를 사랑했을 때는 또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 모든 것이 엄마와 아빠가 함께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걸 증명해 주고 있어.”“하지만.”“미안해 민아.”소이연은 사과했다.“너한테 완전한 가정을 줄 수 없어서 미안해. 하지만 엄마가 약속할게. 엄마가 누구와 결혼하든 엄마가 또 아이를 낳아도 민이는 엄마의 인생에서 영원히 대체할 수 없는 존재야.”육민은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이때 소이연의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보고 작은 입술을 깨물었다.“엄마 일 해야 해.”“그럼 엄마
그러나 정원으로 가는 길에 계단이 있었다.심문헌은 시도해 보려고 했지만 계단이 조금 높아서 휠체어로 바로 내려가면 휠체어가 넘어질 것 같았다.하지만 일어서자니 주변에 몸을 지지해 줄 만한 물건이 없었다.그렇다고 기어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만약 억지로 계단을 내려갔다가 갈비뼈를 다시 다치기라도 하면 큰 일이었다. 아픈 건 둘째 치고 그는 소이연과 빨리 결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심문헌이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귓가에서 한 목소리가 들렸다.“뭐 하고 있어요?”“악.”심문헌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깜짝 놀랐다.그의 비명과 동시에 휠체어가 계단 아래로 굴러갔다.곧 그는 자기 몸이 바닥에 나뒹굴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한 인영이 갑자기 그의 앞으로 오더니 신속하게 그를 품에 안았고 그의 몸에 떨어지려던 휠체어도 그 사람이 온몸으로 막아 내고 있었다.휠체어는 바로 그 사람이 몸 위로 떨어져 그대로 등에 맞았지만 그 사람은 그 무게를 이겨내며 심문헌의 몸에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심문헌은 깜짝 놀란 마음을 안정시키고 나서야 아파하고 있는 천우진을 발견했다.하지만 천우진은 이를 꽉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괜찮아요?”심문헌은 긴장하며 물었다.천우진은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문허 씨는요?”“난 괜찮아요.”심문헌은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냥 놀랐을 뿐이다.이 순간 그는 천우진의 품에 안겨 있으니 보호를 잘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마음이 복잡했지만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이때 천우진이 휠체어를 밀어내며 심문헌을 다시 들어 휠체어에 앉혔다.“어디로 가려고요?”천우진이 물었다.“정원에서 바람 좀 쐬려고요.”“다음에 나올 때는 도우미를 불러요.”“다들 바쁜 것 같아서요. 그리고 친하지도 않고.”심문헌은 조금 미안한 듯 말했다.“그럼 날 불러요.”천우진이 말했다.“그쪽이 더 바쁘잖아요.”심문헌은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천우진은 그를 자기 집에 불러놓고 결국 소이연과
심문헌은 그 말을 이해했지만 천우진의 입으로 들으니 조금 불쾌했다.‘아니 내가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지금 날 이렇게 대하는 거야? 설마 내가 천우진의 목숨을 구해줬는데 육현경이 임씨 가문을 무너뜨린 것보다 가치가 없다는 거야?’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지만 심문헌은 말하지 않았다.천우진은 심문헌의 기분을 눈치채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육현경은 내가 아주 존경하는 인재예요. 그때 심씨 가문과 싸울 때부터 나는 육현경을 내 곁으로 데려와 일하게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 후에 많은 일이 있었고 지금은 더욱 불가능해졌죠.”심문헌은 대꾸하지 않았다.‘아니 육현경이 대단한 건 나도 알아. 근데 지금 내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너무 생각 없는 거 아니야?’마침 이때 도우미가 점심 식사를 갖고 왔다.밖에 있는 테이블에 놓고 점심을 먹었다.“밖에서 먹으니까 어때요? 공기도 좋은데.”천우진은 심문헌의 의견을 물었다.“이미 다 준비해 놓고 나한테 묻는 건 뭐예요? 가식인가?”천우진은 웃으며 부인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젠장.”심문헌은 식사하다 말고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왜요?”천우진도 그 모습을 보고 놀랐다.“나 혼자 먹었어요. 이연이는 어떻게 해요? 그리고 민이는요?”심문헌은 많이 미안한 듯 말했다.천우진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그는 심문헌이 사레가 걸리기라도 한 줄 알았다.천우진은 담담하게 말했다.“누나는 아직 일하고 있으니까 다 끝나면 아래층에 내려와서 먹을 거예요. 내가 도우미한테 준비해 두라고 했어요. 그리고 민이는 점심에 병원에 갔으니까 육현경하고 먹을 거예요.”“아.”심문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자기가 방금 별일이 아닌 것에 아주 크게 반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천우진 씨.”심문헌은 갑자기 또 뭔가 생각난 듯싶었다.“왜요?”“내가 이연 씨한테 정식으로 프러포즈해야 할까요?”천우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담담
“그게 뭐가 같아요?”“일이 잘 끝나지 않으면 결국 손해 보는 건 우리 돈이에요.”소이연은 그를 설득했다.심문헌이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이연이 엄숙하게 말했다.“이제는 정말 우리 두 사람의 돈이에요. 예전에는 각자 조금 손해를 보면 끝이지만 이제 같이 손해를 보면 큰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심문헌은 소이연의 말에 조금 설득당했다.“연애 때문에 가문을 망하게 할 수는 없어요.”소이연이 덧붙였다.“그럼 나한테 매일 영상통화 한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당연하죠. 약속할게요.”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언제 가는 거예요?”“지금요.”“소이연 씨.”심문헌은 화가 났다.그와 조금도 함께 있지 않고 이렇게 그가 퇴원하자마자 가버리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회사에서 회의해야 하는데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몇 가지 세부 사항들은 온라인으로 설명하기가 힘들거든요.”“그래도 밥은 먹어야죠?”“알았어요. 그럼 밥만 먹고 갈게요.”소이연이 양보했다.점심을 다 먹은 뒤 소이연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다급하게 떠났다.천우진은 그녀를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민이하고 문헌 씨는 너한테 맡길게.”소이연은 정말 고마워하며 말했다.“나도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부담 갖지 말고 나한테 맡겨.”“그래. 그럼 나 갈게.”“장안에 도착하면 전화해.”“알겠어.”소이연은 바로 퍼스트 클래스 게이트로 들어갔다.체크인하고 의자에 앉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옆자리에 누군가 왔다.소이연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그 순간 서로 옆에 앉은 사람을 보고 조금 놀랐다.두 사람 다 침묵하며 마치 모르는 사이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이연은 진심으로 여기서 육현경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병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갑자기 퇴원했지? 그리고 왜 장안에 가는 거야? 민이는 어디 있지?’육민이를 떠올린 소이연은 또 오늘 육민이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육민이는 육현경이 일부러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