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미 심문헌이 몸을 날려 그 무기를 지키려는 걸 보았다.만약...아무리 두꺼운 소방복을 입었다 할지라도 총에 의해 다칠 수도 있다.하여 천우진은 재빨리 심문헌의 앞에 달려갔다.“심문헌 씨!”천우진이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자옥한 연기 때문에 천우진은 참지 못하고 기침이 나왔다.“일단 헬멧이나 다시 써요.”심문헌은 집사를 꼭 잡은 채 큰소리로 외쳤다.불길도 점점 거세지고 있는지라, 연기를 더 들이마시다간 죽지 않으면 절반은 병신이 될 것이다.천우진은 눈시울이 붉어졌다.하지만 거센 불길 속이라 그 누구도 그 모습을 발견하지는 못했다.그는 심문헌 자신도 거의 죽어가는 마당에, 자신을 생각해서 헬멧을 다시 쓰라는 한마디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천우진은 이를 악물고 조금 전 강요 때문에 벗은 헬멧을 다시 주었다.한편, 그의 옆에 있던 경호원 두 명도 심문헌을 돕고 있었다.심문헌은 경호원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중형 무기를 손에 넣고 집사도 제압할 수 있었다.그 시각, 임 씨 할머니는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채 일어나기 어려워 보였다.조금 전 넘어져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점점 거세지는 불길에 방호복도 없으니 점점 호흡하기도 힘들어질 것이다.“가요!”천우진이 헬멧을 쓰고 와서 급히 분부했다.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탈출하는 것이다.심문헌도 더는 지체하지 않고 천우진을 따라갔다.그들이 돌아섰을 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임 씨네 할머니가 갑자기 권총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그녀는 지금 눈앞이 어둡고 단지 몇 가닥의 빨리 지나가는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이다음 순간에는 자신이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그녀는 모질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녀는 죽기 전에 반드시 한 사람과 같이 죽어야 했다.임 씨네 할머니가 천우진을 정확히 찾아 방아쇠를 누르는 순간,“조심해요!”심문헌이 갑자기 천우진의 뒤를 덮쳤다.등 뒤에서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려왔다.천우진이 천천히 몸을 돌려보
소이연의 눈망울이 살짝 움직이며 육현경을 바라보았다.“널 다시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육현경이 말했다.“죽기 전에… 이거면 충분해.”“아직 마지막 순간까지 간 것도 아닌데 그런 말 하지 마. 그 누구도 죽지 않을 테니까.”소이연이 단호하게 말했다.“그냥 가.”육현경이 그녀를 향해 힘없이 속삭였고, 소이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육현경이 다시 한번 단호히 말했다.“더 이상 말하지 마. 곧 괜찮아질 테니까.”소이연이 대화 주제를 돌렸다.마지막 순간이 아닌 이상, 그녀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하지만,짙은 연기가 이제는 지하실까지 퍼지기 시작했다.육현경도 분명히 느껴질 것이다.“이연아, 나 때문에 이럴 필요 없어.”육현경이 그녀를 깊게 바라보았다.“당신 때문이 아니야.”소이연이 차갑게 답했다.“난 단지 우리 민이가 아빠 없는 아이로 크길 바라지 않을 뿐이야.”“너 혼자로도 충분히 민이 잘 보살피고 있어.”“그렇다고 해도 아빠의 자리는 내가 채워줄 수 없는 거잖아.”“그러면 엄마까지도 없어서는 더더욱 안 되지.”소이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이연아, 내가 이번 생에서 가장 운 좋은 일은 널 만났다는 거야.”육현경이 말했다.“그러니 나는 아쉬울 게 하나도 없어.”그 말에 소이연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그녀는 경호원이 열심히 쇠사슬을 내려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내가 이렇게 빌게. 그러니 얼른 가.”육현경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섞여 있었다.그는 자신이 죽는다 하더라도 소이연은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그녀가 끝까지 살아남는 게 그의 마지막 유일한 소원이라 할 수 있다.만약 소이연이 그를 위해서 죽는다면, 그는 죽어서까지 눈을 감지 못할듯했다.“5분.”소이연이 육현경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만약 5분이 지나도 당신 쇠사슬을 풀 수 없다면 그때 떠날게.”“그럴 필요 없어…”“그래야 당신이 죽는다고 해도 죄책감이 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어쨌든 그래도 할 만큼은 했으니 말이다
“그거면 충분해.”육현경이 말했다.“난 널 원망하지 않아. 오히려 네가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소이연, 이것 하나만 나랑 약속해. 너무 슬퍼하지 말고 심문헌 씨랑 잘살아야 해. 나 사실 몰래 그 사람 뒷조사해 봤는데 그동안 너를 위해 많이 변했더라고. 네가 나머지 생을 믿고 맡겨도 될 사람이야.”그 말에 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얼른 가.”육현경이 다시금 그녀를 재촉했다.더 지체했다가는 진짜로 나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소이연이 입술을 깨물며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잠시만요.”경호원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소이연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마음속으로는 작은 희망의 끈이 타오르는 것 같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려왔다.그녀는 심지어 이미 받아들일 수 없고 희망도 깨졌다고 느꼈었다.“쇠사슬이 부러질 듯 합니다.”경호원이 기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쇠사슬에 금이 간 것 같아요. 소이연 씨, 다시 시도해 볼까요?”“그래요.”소이연은 고민할 여지도 없이 그 말에 응했다.육현경은 그들을 제지하고 싶었지만 연기 때문에 사레에 들려 제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의 말에 경호원은 재빨리 망치로 쇠사슬을 여러 번 내리쳤다.그러자 쇠사슬이 진짜로 끊어진 것이다.소이연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최대한 그것을 숨기려고 노력했다.지금 그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탈출하는 것이고 죽지 않는 것이다.그녀는 얼른 달려가 육현경을 부축했다.쇠사슬의 지탱이 없어지자 육현경의 몸 전체가 그대로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다행히 소이연의 행동이 그보다는 빨랐다.“이 사람한테 소방복 좀 입혀줘요.”소이연이 경호원을 향해 말했다.소방복은 계속 경호원이 가지고 있었고, 조금 전 쇠사슬을 끊이기 위해 잠시 바닥에 버려두었었다.그녀의 명령대로 경호원은 재빨리 소방복을 주워 육현경에게 입혀주었다.그 시각, 육현경은 애써 고통을 참고 있었다.지금 그의 신체 상황으로 봤을 때 일어서기조차 힘든 상태였다.게다가 그는 소이연을
소이연은 고민도 하지 않고 경호원의 보살핌을 받으며 불에 타고 있는 임씨 가문에서 빠르게 나왔다.비록 소방복을 입었지만, 주위는 여전히 뜨거웠고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들었다.게다가 지금의 상태로 보았을 때, 조금 더 늦으면 아마, 아마 진짜로 그곳에서 나올 수 없을 것이다.특히 아무런 방어 조치도 취하지 않은 상황은 더할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본인이 걱정할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사람마다 본인의 선택이 있으니 말이다.그렇게 소이연과 경호원이 겨우 임씨 가문의 마당에서 탈출했다.그 시각,때마침 천우진도 밖으로 탈출해 오는 것이었다.하지만 그의 품속에는 한 사람이 안겨져 있었고, 소방복을 입은 탓에 누구인지 확신이 가지는 않았다.소이연이 그를 향해 재빨리 달려가자, 천우진이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병원으로 가! 빨리 병원으로 가!”이성을 잃을 정도로 초조해하는 천우진의 모습에 소이연은 깜짝 놀랐다.“무슨 일이에요? 혹시… 심문헌 씨?!”천우진이 안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신한 그녀는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심문헌 씨 총 맞았어. 구체적인 건 지금 당장 말하기 어려워. 일단 병원부터 데려가야 해.”천우진이 다급히 말했다.“그래요.”지금은 긴급한 상황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그렇지 않은 한 천우진도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소이연은 재빨리 천우진과 함께 옆에 차가 세워진 곳으로 갔다.차에 오르면서 그녀는 한번 고개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나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승용차 앞에 있는 경호원에게 분부했다.“차 한 대 더 남겨줘요. 또 누군가가 나올 수 있으니 나오면 병원에 데려다주고요.”“네.”소이연은 천우진과 같이 심문헌을 병원에 데려다주었다.차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심문헌은 너무 아픈 나머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천우진 또한 너무도 조용했고, 보는 사람이 무서울 지경이였다.한편, 소이연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그 시각의 그녀는
아니, 절대로 만약의 경우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시간은 그렇게 일분일초가 흘렀다.복도는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시계 시침이 움직이는 소리까지도 다 들릴 정도였다.30분 후,응급실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이때 복도 멀리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왔다.소이연과 천우진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많은 의료진이 두 개의 이동 병상을 밀며 빠르게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그 급한 발걸음으로부터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현재의 위험을 멀리서도 느낄 수 있었다.이때 소이연의 눈매가 살짝 움직였다.비록 병상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지만, 자신과 함께 임씨 가문에 갔던 경호원을 그 자리에서 마주친 것이다.그 경호원은 이동 병상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설마...소이연은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두 개의 이동 병상을 내려다보았다. 그 위에 누워있는 한 사람은 임아영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육현경?육현경은 아예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이런 자리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아마 이미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그렇게 소이연은 그들이 응급실로 들어가는 것까지 그대로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천우진 또한 분명히 그 모습을 본 듯했다.“임아영 씨랑... 육현경?”그도 확실치 않은 듯 보였다.그 순간의 육현경 모습은 누가 봐도 알아채기 어려웠으니 말이다.“그런 것 같아요.”소이연이 답했다.“욱현경 씨를 못 찾은 거야?”천우진은 그제야 다른 일들이 조금씩 생각나기 시작했다.“찾았어요.”만약 찾지 못했었다면, 지금쯤 육현경은 아마 유골만 남았을 것이다.“그러면 왜...”천우진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소이연은 나왔는데 천우진은 나오지 않았다라...‘이왕 찾은 거면 소방복도 입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저렇게까지 심하게 화상을 입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다시 임아영 씨를 구하러 들어갔거든요.”소이연이 담담하게 말했다.그 말에 천우진 또한 살짝 입술을 깨물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병원의 병실,소이연과 천우진은 심문헌의 옆에서 그를 간호했다.그들은 조용히 심문헌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심문헌의 눈꺼풀이 움직이는 듯 보였다.그 모습을 바로 캐치한 천우진은 몸을 살짝 움직여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소이연도 천우진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심문헌의 깨어날 기미가 보인다는 것을 알아챘다.그녀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심문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귀에 대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심문헌 씨, 깼어요?”심문헌은 현재 머리는 무겁고 발은 가볍게 떠 있는듯한 느낌이었다.그가 힘겹게 눈을 떴지만, 눈앞은 여전히 흐릿했다. 그렇게 한참을 있고 나서야 눈의 초점도 맞춰지며 소이연의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그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일어나려 해도 아무런 힘이 없었다.조금의 액션을 취함과 동시에, 심문헌은 “습”하는 소리와 함께 고통 섞인 소리를 내었다.“움직이지 마요!”이때 천우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의 말투에는 약간의 질책이 섞여 있었다.그 소리에 심문헌이 천우진쪽을 바라보았다.이윽고 소이연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심문헌 씨 이제야 깨어나고 심하게 다쳤어요. 그러니 이 사람한테 소리 지르지 마요.”천우진은 입술을 깨물며 그냥 침묵하기로 했다.한편, 심문헌은 어떤 일들이 발생했던지를 한번 돌이켜보았다.“저 안 죽은 거예요?”심문헌이 갈라진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요.”소이연이 부드러운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심문헌 씨는 장수할 거예요.”그 말에 심문헌은 참을 수 없는 듯 입꼬리를 씰룩이며 애정이 어린 눈빛으로 소이연을 바라보았다.이때 갑자기 천우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심문헌이 그의 뒷모습을 흘깃 보더니 이내 다시 소이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지금은 어때요?”소이연이 걱정되는 듯 그에게 물었다.“그냥 정신이 몽롱하고 몸에 아무런 힘이 없어요. 등 쪽도 조금 아픈 건 같은데 다른 데는 그
“힘들 거예요.”심문헌은 그녀의 말을 거절했다.“전혀 힘들지 않아요.”“아니에요, 그냥 지금처럼 같이 있어 주기만 하면 돼요. 소이연 씨만 있으면 저는 심심할 일이 없으니까요.”심문헌이 웃으며 답하자 소이연도 더는 그를 강요하지 않았다.“그래요, 그러면 같이 대화나 나누죠 뭐.”“그래요.”“어떤 이야기 나눌까요?”심문헌이 물었다.“그냥 하고 싶은 얘기 아무거나 하죠.”소이연이 미소 지어 보였다.심문헌은 그녀의 온화함에 녹아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그는 갑자기 총을 맞은 그 상황이 값지다고 생각했다.“그나저나 육현경 씨랑 같이 나온 건가요? 육현경 씨는 괜찮아요?”심문헌의 질문에 소이연이 잠시 침묵했다.“구하지 못한 건가요?”심문헌이 의아해하며 물었다.논리대로라면, 소이연과 육현경 모두 가장 빨리 임씨 가문 마당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에 천우진의 일 때문에 늦게 나가게 된 것이다.“미안해요, 제가 문헌 씨에게 거짓말했어요.”소이연이 진심으로 사과를 건넸다.“그때 시그널 줬을 때 육현경 씨를 아직 구하지 못한 건가요?”“저는 문헌 씨가 다치는 걸 바라지 않아요.”그 말에 심문헌은 살짝 화가 났다.“저 지금 멀쩡하잖아요!”소이연이 다급히 그를 진정시키며 말했다.“저는 만약 육현경 씨를 구해내지 못한다면, 제 안전을 위해서라도 포기를 할 거란 말이죠. 그러니 저는 아무 일이 생기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문헌 씨를 굳이 거기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어요.”“다음에는 그러지 마요!”심문헌이 심각한 태도로 그녀에게 말했다.“그래도 이번에 무사한 걸 봐서 더는 이 일에 대해 따지지 않을게요.”“네,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예요.”소이연이 그에게 맹세했다.심문헌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녀에게 진짜로 화를 낼 리가 없었다.이윽고 그가 이어서 물었다.“그럼 육현경 씨는 어떻게 됐어요?”육현경의 생사가 궁금한 건 아니지만, 일단 말이 나온 이상 결과까지는 들어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게다가 직접
“그래요?”소이연이 냉담하게 웃어 보였다.“확실히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에요. 그 때문에 만약 진짜 죽었더라면…”심문헌은 소이연을 바라보았다.그러다가 그녀의 아무렇지 않은 모습에 마지막 몇 글자도 마저 보충했다.“아깝죠.”“본인이나 잘 챙겨요.”소이연이 웃으며 그에게 진지하게 말했다.“본인은 갈비뼈가 3개나 부려졌으면서 다른 사람을 걱정해요? 지금 문헌 씨가 해야 할 일은 상처 회복이에요.”“제가 상처만 잘 회복되면 이연 씨와 결혼할 수 있는 건가요?”심문헌은 본인이 말을 내뱉고 본인 자신도 놀랐다.그는 소이연과의 결혼에 대해서 생각만 해왔었지, 항상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 또한 소이연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그 시각, 그는 자신이 어떻게 그 말을 밖으로 내뱉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말을 뱉고 난 뒤, 그는 소이연이 반응하기도 전에 스스로 당황해하며 해명했다.“저저저저, 저 농담이에요. 제가 이연 씨의 오빠를 구했다고 해서 이연 씨를 협박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좋아요.”소이연이 갑자기 그의 말에 답했다.심문헌은 그 상황이 믿어지지 않아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뭔가 지금 이 행복이 너무 갑자기 찾아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이윽고 그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이연 씨, 저는 굳이 이연 씨를 가스라이팅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꿈에서 까지 이연 씨와 결혼하고 싶었던 거 저도 인정해요. 하지만 강요하지는 않을게요. 이연 씨가 난처해지는 건 더더욱 싫고요...”“문헌 씨가 천우진 씨를 구해서 제가 결혼을 승낙한 건 절대 아니에요. 사실 저희가 같이 임씨 가문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저는 이미 정했거든요. 저희가 아무 일 없이 나올 수 있다면, 저는 문헌 씨와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소이연이 웃으며 말했다.“진짜예요?”심문헌은 그녀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 듯 했다.그동안 감정적으로 서로 잘 이어가고 있었지만, 그는 왠지 모르게 소이연이 멀게만 느껴졌었다.그랬던 그녀가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