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티는 원래 차에 시동을 걸려고 했는데 이 방해꾼이 차에 오르자 순간 다시 시동을 끄고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내려요!”하지만 이 말을 들은 범진호는 차에서 내리기는커녕 기분 좋게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매고 나서도 히죽 웃더니 고개를 돌리며 케이티를 놀렸다.“아무리 미녀라도 화내면 안 예쁘다니깐요.”그의 이런 말에 케이티는 순간 더욱 화가 났다.“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요?”진호는 정말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케이티를 쳐다보지 않고 앞을 바라보며 차에서 내릴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케이티는 이 남자의 뻔뻔함에 경탄했다. 지금 당장 경비원을 불러서 이 뻔뻔한 사람을 끌어내고싶었지만, 그가 권재민과 친구라고 했던 것이 떠올라 참으며 어쩔 수 없이 말했다.“어디로 가는지 말해 봐요. 데려다주죠, 뭐.”진호는 이 말을 듣고 순간 두 눈에 웃음기가 차오르더니 사양은커녕 망설임 없이 주소를 말했다.주소를 말하고 난 진호는 웃는 얼굴로 케이티에게 한마디 했다.“미녀가 운전해주신다니 영광이네요.”케이티는 진호를 차에서 내보내고 싶은 생각뿐이었기에 이제는 그의 뻔뻔한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난 케이티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세운 케이티는 뜻밖에도 놀이터에 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도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하지만 진호는 여전히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만 했다.“기분이 나쁜 것 같아서 놀이공원에 데리고 온 거예요.”진호가 재민의 좋은 친구가 아니었다면 케이티는 지금 상대방을 버리고 가버렸을 텐데, 하필이면 두 사람이 친구라 그것도 어려운 일이었다.케이티가 진호에 대해 강경한 수단을 써서는 안 된다는 뜻이니 말이다.케이티는 분노한 눈으로 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 놀이공원을 바라보던 중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진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래요, 같이 내리죠.”
케이티는 농담했을 뿐 마음에 두지 않았다.길 건너편에 있는 테이블을 찾아 앉은 케이티는 웨이터를 불러 커피를 주문하고 그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며 잡지를 들고 건성으로 보기 시작했다.남자 종업원은 케이티가 룸에 가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많이 놓였다.케이티는 그냥 이곳에서 기다리면서 우연히 만난 척하면 더욱 자연스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거의 30분 넘게 기다리자 권재민이 걸어 나왔다.케이티는 재민의 모습을 보자마자 시선을 거두었다가 재민이 거의 다가오자 손에 들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는 등 다른 사람의 눈에는 무심코 하는 행동인 듯 연기했다.고개를 들던 케이티는 마침 재민의 옆모습에 시선이 떨어졌다.“권재민 대표님.”케이티가 깜짝 놀라며 웃었다.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재민은 고개를 돌려 케이티임을 발견하고 얼굴을 찌푸렸다.케이티는 이때 이미 재민의 앞으로 다가왔다.“권재민 대표님,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권재민 대표님도 여기 커피 마시러 오셨어요?”케이티는 재민을 향해 살며시 웃었다.“비즈니스 얘기를 하러 왔어요.”재민은 차갑게 대답했다.케이티도 낙담하거나 실망하지도 않았다.“아, 그렇다면 우리도 비즈니스 얘기하는 게 어때요?”케이티는 자신이 그렇게 말하면 재민이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재민은 조금 짜증이 났다.“윤기태랑 얘기하면 돼요.”케이티는 마음속으로 기태를 저주했다. 왜 번마다 이 괘씸한 남자가 나타나는지 야속했다.“하지만 기태 씨가 한 말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요.”“하지만 나는 조금 있다가 다른 일이 있어서요.”재민은 공적인 일로 회피하려 했다.다른 여자였다면 상관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케이티는 자신과 아직 공적인 일이 있어서 지금 가면 사업이 망칠지도 모른다.“괜찮아요.”케이티는 아무 일도 없지만, 자신을 속이려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조금만 참자.’재민이 생각했다.“그럼 케이티 씨, 빨리 끝내주세요.”재민은 그렇게 말하며 방금 케이티가 앉아 있던 자리
케이티는 마음을 다잡고 이번 일은 이렇게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권재민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함께 말이다.“알았어요, 그럼 전 먼저 가 볼게요. 권 대표님, 또 봐요.”케이티는 ‘탁’하고 노트북을 닫더니 고개도 돌리지 않고 커피숍을 떠났다.재민은 케이티가 카페를 떠나 차에 오르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역시 진호 씨는 방법이 있군요.”진호는 웃으며 대답했다.“내 역할일 뿐이에요.”“좋아요. 나중에 보너스를 더 드릴게요.”재민은 자신이 고용한 이 사람에 대해 매우 만족했다.“그럼 고마워요.”“자, 가요, 오늘은 내가 저녁 살게요.”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카페를 떠났다.케이티는 집에 돌아온 후 화가 나서 저녁 식사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낙담할 케이티가 아니었다. 오늘 이 일은 틀림없이 자신이 재수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다음번에는 이런 방식으로 또 한 번의 만남을 계획할 생각이었다.어쨌든 진호가 오기 전까지 재민과 따로 있었던 시간은 매우 즐거웠다.이후 케이티는 다시 재민의 행방을 찾아 우연한 만남을 재현하려 했다.하지만 진호가 따라다닌다는 사실에 케이티는 절망감을 느꼈다.매번 자신이 재민의 눈앞에 나타나면 진호가 따라왔다.케이티는 재민이 진호에게 오라고 말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하지만, 문제는 그가 나타날 때마다 놀라는 모습을 보여 케이티가 가끔 진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아리송하다는 것이다.케이티는 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직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건드릴 수 없다면 설마 피할 수 없겠냐 생각했다.그래서 케이티는 잠깐 마음을 진정시키고 진호가 자신을 볼 수 없다면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 후 며칠 동안 케이티는 재민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재민에게 접근할 모든 기회를 소중히 여기는 그녀는 거의 매일 사람을 보내 재민의 외출 일정을 주의 깊게 조사했다.진호가 나타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던 케이티는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것
윤기태도 가끔 무심코 한마디 꺼내서 강윤아에게 자기 일이 도대체 얼마나 바쁜지 말해준다.윤아가 덕담해서 자기 일을 적당히 수월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어쨌든 권재민 앞에서 윤아는 절대 권력이 있는 사람이고 재민은 100% 들어줄 것이니 말이다.“괜찮아요. 기태는 몸이 좋아서 쉽게 무너지지 않아요.”재민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정말 쉽게 쓰러질 사람이었다면 기태를 비서로 채용하지 않았을 것이다.윤아는 아직도 사무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기태가 이 말을 들으면 피를 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하지만 주주들이 뭐라 하지 않겠어요?”재민의 주주들이 보통 말썽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는 걸 윤아는 알고 있었다.재민이 갖고 있는 권력자의 자리는 모든 사람이 눈독을 들이는 자리이니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오래도록 잔소리를 들을 수 있다.“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출장 간다고 했는데 무슨 말을 하겠어요? 출장 갈 때 부인을 데리고 있으면 안 돼요? 배불러 온 부인 혼자 집에 두고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데 누가 감히 뭐라 하겠어요?”재민은 횡포한 어투로 말했다.“그럼 그렇게 해요.”윤아는 자신이 재민을 못 이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가 결정한 일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윤아는 침실로 들어가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지금은 몸이 불편하니 재민은 일찍이 하인에게 큰 물건들을 모두 준비하라고 했고, 윤아는 사적인 작은 것들만 챙기면 됐다.윤아는 이것저것 신경 쓴다고 하지만 마음은 즐거웠다.재민이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주는데 세상에 이렇게 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되겠는가?그런 생각에 윤아의 가슴은 행복감으로 가득 찼다.재민이 윤아를 데리고 떠난 것에 대해 김소혜는 매우 불만스러워했다.“얘네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분명히 재민은 지금도 일을 하고 있는데 결국 윤아 하나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휴가를 떠난다는 거야? 남의 귀에 들어가면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소혜는 화가 나서 말했다.옆에
권재민이 떠나 있는 동안, 범진호는 케이티에게 관심을 덜 주었고 케이티도 마음이 뿌듯했다.다행히 자신이 현명해서 진호의 감정을 일찍부터 싹 잘라 버렸다고 생각했다.기분이 좋아진 케이티는 하인에게 떡을 준비하게 하고 집 마당에 앉아 애프터눈 티를 즐겼다.이때 집사가 재민의 행방을 은밀히 관찰하던 사람이 왔다고 했다.“응, 들어오라고 해.”케이티는 갓 끓인 밀크티를 들고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재민의 행방을 은밀히 지켜본 사람은 케이티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케이티 씨, 권재민 대표님이 경성을 떠났어요.”케이티는 찻잔을 내려놓았다.“어디로 갔어요?”“출장 갔다고 회사 사람들한테 들었어요.”“출장?”케이티는 이 단어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재민이 요즘 일이 바쁘다는 걸 다른 루트에서 알게 됐다. 외출 일정이 계속 뜸했는데 어떻게 갑자기 출장을 간단 말인가.“권재민 대표님께서 부인도 데려가셨다고 들었어요.”케이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만약 그냥 출장이라면 왜 윤아를 데려갔을까, 분명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윤아를 데리고 놀러 가려 이렇게 번듯한 이유를 찾은 거로 생각했다. “그래요, 알겠어요, 그럼 먼저 쉬고 있어요. 권재민 대표님이 돌아오면 바로 알려줘요.”케이티는 심호흡했다.이런 소식을 들으니 마음속으로 몹시 화가 났다.이때 케이티의 휴대폰이 울렸다.“여보세요.”케이티의 말투는 매우 좋지 않았다.“케이티, 나 재아야, 너랑 밥 먹으러 가려고 하는데 시간 있어?.”권재아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케이티의 말투에서 그녀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살짝 긴장했다.재아가 돌아가서 생각해 보니, 케이티는 자신에게 재민에 대해 그다지 깊은 감정이 없다고 말했고 순전히 호감이라고 했다.하지만 재아도 재민이 케이티에 대해 가끔 언급하는 걸 들었다. 케이티가 자주 자기 앞에 나타나는데 왜 매번 이런 우연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권재아는 이제야 케이티가 권재민을 싫어하
케이티의 행동은 권재아의 불만을 자아냈다.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얼굴을 찌푸린 채 케이티를 바라보며 물었다.“케이티, 그게 무슨 뜻이야?”재아는 계속 케이티를 설득하려 했지만 고집스러운 케이티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녀에게 강요한 적이 없었다. 다만 강윤아와 권재민의 감정이 너무 좋아서 케이티를 돕기 위해 나서기도 쉽지 않았을 뿐이다.게다가,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자라온 환경도 아주 달랐는데, 재아는 다른 사람의 결혼에 끼어들려는 케이티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이 식사는 둘 다 기분 나쁘게 헤어졌다. 결국, 케이티는 재아에게 좋은 표정을 짓지 못했고, 재아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그 후, 케이티는 화가 나서 돌아갔고 재아는 집에 돌아왔어도 여전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재아의 이런 모습을 보며 김소혜는 궁금한 듯 물었다.“재아야, 너 왜 그래? 케이티랑 외식하지 않았어?”“휴, 엄마, 그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요. 케이티는 오늘 무슨 일인지 화약을 먹은 것 같았어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요.”늘 차분하던 재아는 참지 못하고 불평하기 시작했다.소혜의 마음속은 분명 케이티에게 쏠렸다. 재아가 친딸이지만 말이다. 소혜는 줄곧 자신이 만족할 만한 며느리를 찾고 있었고 케이티는 현재 그녀를 가장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다.“재아야, 케이티랑 뭘 따져? 너희들은 좋은 친구 아니야? 케이티는 재민에 대해 생각이 좀 있는 것 같던데 너는 친구로서 왜 그녀를 도와주지 않는 거야?”소혜의 말을 듣고 재아는 마음속으로 더욱 괴로워했다.소혜의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재민과 윤아는 아직 이혼하지 않았는데 재아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엄마, 지금 재민과 윤아 씨가 잘 지내고 있는데 왜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재아는 소혜가 지금 이 일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소혜는 여전히 윤아의 존재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다.이런 일은 재아를 난처하게 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어떻게 설득해
그러자 권현우가 눈빛을 반짝였다.“엄마,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요!”조연아는 웃으며 말했다.“어려운 일이 생겼다는 말도 안 했잖아.”“네, 알았어요, 곧 처리할 거예요.”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서 일어나 케이티를 찾아갔다.연아는 자리에 앉아 떠나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은 기쁨으로 가득 찼고, 유능한 아들을 둔 것은 자신에게 좋은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현우는 급히 비서를 불러 케이티의 자료를 찾아보라고 했다.비서는 곧 자료를 현우에게 주었다.현우는 케이티의 사진을 보고 그녀가 외국인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얼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왜 재민은 주변에 이렇게 많은 미녀가 있는데 자기 주변에는 없는 건지 알 수 없었다.속으로 잠깐 생각해 보던 현우는 마음이 더욱 불편해졌다.“그래, 이 여자와 약속 좀 잡아줘, 꼭 빨리해야 해.”현우는 자료를 비서에게 돌려줬다.“알겠습니다.”비서는 나가서 케이티에게 전화했다.케이티는 전화를 받았을 때 조금 의아했다.‘지금 무슨 상황이지? 이젠 아무나 다 나랑 데이트하려 하는 거야?’비서가 케이티에게 현우의 신분을 말했을 때 케이티는 깜짝 놀랐다.‘권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라고?’케이티는 권승호의 둘째 아들 이름이 권은우라는 것을 권재아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권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아니었다.그렇다면 이 권현우는 설마 재민의 이복동생이란 말인가?이런 생각에 케이티는 눈살을 찌푸렸다.왜 그가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걸까?그래도 권 씨 가족이라면 한번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에 승낙했다.현우는 케이티가 동의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제대로 된 옷으로 갈아입고 깔끔해 보이도록 단장한 후 약속 장소로 향했다.현우는 약속 장소에 미리 왔다.현우에 비해 케이티는 별로 흥이 나지 않았고 느릿느릿 자신의 스포츠카를 몰고 왔다.현우 비서가 알려준 룸 문을 열자 케이티는 룸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20대 청년을 봤다.잘 재단된 암적색의 정장에 검정 구두를 신어 분위기를
권현우가 생각해 봤는데, 권재민의 세력이 너무 커서 짧은 시간 안에 재민을 밟을 수 없을 것 같았다.자신의 신분은 사생아이고, 권씨 가문의 인정을 받고 돌아가더라도 많은 권씨 가문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가 모든 권리를 빼앗는 것은 불가능했다.하지만 그도 권씨 가문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는 조금의 이익이라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신분에 부끄럽다.“동의할 수 없어요.”케이티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형편없는 조건은 아니었지만, 현우의 등장은 너무 갑작스럽다고 판단했다.케이티는 이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어떤 성격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통제할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케이티의 거절이 현우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신이 처음 만났으니 비즈니스 업계에 오래 있었던 케이티는 당연히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먼저 저울질하려 할 것이다.“괜찮아요, 잘 생각해 보고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찾아와도 돼요, 난 항상 환영이에요.”현우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조급해해도 소용없다.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려왔으니 이 정도 시간이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다.현우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섰다.“이 식사는 내가 케이티 씨에게 사는 거로 해요. 나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 케이티 씨 마음껏 드세요.”현우는 그렇게 말하고 룸을 떠났다.현우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케이티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한편 재민은 이미 윤아를 데리고 돌아왔다.원래는 더 오래 놀고 싶었지만, 회사 일은 정말 미룰 수 없었다. 비록 윤기태에게 전권을 맡겼지만, 여전히 많은 것을 자신이 직접 해야 했다.“윤아 씨 먼저 집에 가요. 난 회사에 갈 일이 있어서 같이 안 갈 거예요.”재민은 돌발 상황이 생겼다는 기태의 전화를 받았다.윤아는 재민의 다급함을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어서 가요, 나 혼자 가도 괜찮아요.”“그래요.”재민은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려 운전사에게 윤아를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분
강윤아라는 말에 권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윤아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힘든 일을 많이 겪었고 늘 다른 사람의 타깃이 되었어요. 재민이가 너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 그녀를 연루시킨 거죠.”“재아 씨가 지금 걱정해도 소용없어요, 재아 씨부터 잘 챙겨요.”윌은 재아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자, 재아 씨 기분 전환하러 갔다가 나중에 우리 집에 가요.”그 말을 들은 권재아는 얼굴이 빨개졌다.“얼굴이 왜 빨개지는 거예요? 내가 옆에 있었으면 재아 씨가 좀 더 편하게 잠들 거예요.”윌은 웃으며 농담했다.재아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 된 채 그를 한 대 때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날이 저물자 바다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이따금 파도가 아련하게 일기도 했다.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간간이 등불이 있는데, 등불은 그다지 밝지 않고 군데군데 있어서 밤하늘의 별과 서로 잘 어울렸다.재아는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한 걸음씩 폴짝폴짝 뛰어갔다. 귓가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득하고도 고요했다.윌은 재아의 뒤에서 몇 걸음 걷다가 재아가 전혀 알아채지 못하자 성큼성큼 몇 걸음 앞으로 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으로 감쌌다.재아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손잡고 싶은 거면 얘기하지 그랬어요.”재아의 표정이 너무 도도해서 윌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긁었다.“그러게 누가 재아 씨더러 아무것도 모르래요?”술도 밥도 배불리 먹었으나 그 뒤로 딴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재아는 윌 덕분에 배불리 먹었고 지금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윌의 손을 잡고 있자니 따뜻한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힘에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백사장을 따라 한참을 걸은 후에야 마침내 윌이 말한 그 ‘재미있는 곳’에 이르렀다.재아는 어두컴컴한 불빛 속 나무 밑에 숨어 있는 해먹에 하마터면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여기가 재밌는 곳이에요?”“재미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올 거잖아요?”윌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올라탄
회의가 끝난 후, 권재아는 권현우가 그녀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고 여전히 당당하게 걸어 나갔지만, 사무실로 돌아온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조하고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재아는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재아는 권재민에게 이 일을 알리려 문자를 보냈지만, 그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재아는 윤기태에게도 이 일을 말했다. 기태도 분노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아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며 화가 났지만 재아를 먼저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이런 결과는 대표님도 원하지 않겠지만, 정말 방법이 없잖아요. 자책하지 마세요, 권재민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분명히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태의 위로가 전혀 소용이 없었고 재아는 여전히 괴로웠다.재아의 이런 모습을 본 기태는 더는 방해하지 않고 그녀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늦은 시간, 재아는 여전히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권재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만 했다.갑자기 넓은 손이 재아 앞에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재아는 화를 내려다가 윌임을 발견했다. 순간 화가 난 얼굴이 미리 설정된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아, 윌,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귀국하지 않았어요? 돌아왔으면 나한테 말해주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내가 공항으로 데리러 갔을 텐데.”윌은 재아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풀고 책상을 돌아 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눈빛은 재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보고 싶어서 돌아왔어요. 알려줬으면 어떻게 서프라이즈를 해줬겠어요. 왜 이렇게 피곤한 얼굴이죠? 날 봤을 땐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어요.”윌이 그녀 앞에 서자 재아는 윌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살짝 윌의 몸에 기대며 풀이 죽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윌은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 보여 더는 강요하지 않고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주차장에서 오래 기다렸는데도 안 내려와서 야근하는 거 아닌가
권재민은 강윤아의 움직임을 추적한 뒤 곧바로 현진성과 합류해 구출 계획을 논의하고 애스릭이 숨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려 했다.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변장하고 다가갔다. 애스릭은 분명 그들을 경계할 것이고, 외딴 섬에서의 일을 겪었으니 애스릭의 경계와 의심이 더 강해지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만반의 계획을 세워야만 윤아를 구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같은 시간, 국내에 있던 김소혜와 서만옥은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날 기슭에 도착한 후 재민은 아이를 안배하고 나서 소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혜는 발신자가 실종된 지 오래된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재민아, 드디어 엄마한테 전화했구나. 그동안 네가 나한테 전화 안 해서 우리도 방해할 엄두가 안 났는데 너는 지금 어때? 윤아는 행방불명이야? 윤아를 구해낸 거 아니었어?”소혜는 재민의 전화가 희소식을 전하러 걸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재민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민의 전화를 받은 후 마음이 매우 흥분되고 기뻤기 때문이기도 했다.재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소혜의 이렇게 흥분한 말투를 들으며 차마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서 아이를 돌볼 가족이 있어야 했다. 비록 의사가 있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그는 이를 악물고 실정을 소혜에게 말했다.“엄마, 내 말 좀 들어봐요. 마음을 다잡고 들어요, 일이 이렇게 됐어요…… 엄마가얘기한 거랑 상황이 좀 달라요. 윤아가 처음에 구출되긴 했는데 다시 잡혀갔어요.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건 내가 계속 그 사람의 경계에 잠복해있었기 때문이에요.”재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혜가 말을 끊었다.“뭐? 구출되긴 했는데 또 잡혀갔다는 건 뭐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엄마, 내 말끝까지 들어봐요.”재민이 이마를 어루만졌다.“이 일은 당분간 자세히 말하기 어려워요. 제가 윤아를 데려가고 나서 자세히 말해줄게요.”
고승혁 교수가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애스릭은 더 심하게 때렸다. 거의 몇 시간마다 가서 괴롭혔는데 매번 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말로 욕했지만 고승혁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강윤아는 고승혁 교수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생기는 것을 보고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사실, 애스릭이 매번 고승혁 교수를 데려갈 때마다 그가 입을 열어 경험을 전수해주도록 했을 뿐 매번 그를 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승혁 교수는 돌아올 때마다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얻어맞았다.고승혁 교수는 베티를 치료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배신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원망스러웠다.“고승혁 교수님, 저 때문에 교수님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협조하고 절 그냥 내버려 둬요.”“괜찮아요,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요. 나는 견딜 수 있어요. 나는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까지인 보고 싶어요. 언젠가 내가 정말 견딜 수 없게 되면 자연히 그들에게 항복할 거예요. 그때 가서 윤아 씨가 나를 원망하지 말아주세요.”고승혁 교수는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는 듯 윤아를 향해 농담까지 했다.“교수님은 이미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내 아이를 지켜줬어요. 이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교수님에게 감사해요. 교수님이 앞으로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윤아는 고승혁 교수의 이런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정말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이건 내 인생 경험의 일부일 뿐이에요.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에요. 굴복해 연명할 수 있지만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고승혁 교수는 윤아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그녀를 안심시켰다.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우리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교수님의 연구원에 많이 투자할게요.”“그럼 먼저 윤아 씨에게 감사해야겠어요.”“고승혁 교수님, 우리는 함께 목숨 걸고 싸운 사이이니 그냥 저를 윤아라고 부르세요, 윤아 씨는 너무 서먹서먹해요.”윤아가 고승혁을
메리는 인큐베이터 옆에 있는 의사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를 한 번 쿡 찌르며 낮은 소리로 주의를 시키었다.“존, 사람들이 묻고 있잖아요.”“네?”존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권재민은 옆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내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어요.”“아기는 지금 상태가 안정돼 있고 아까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놀라지 않았어요. 달이 차지 않아 태어났기 때문에 면역력이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존은 마침내 반응을 보였고 무서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재민은 가볍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고개를 숙이고 인큐베이터 안의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생명이 정말 완강하다고 느꼈다.강윤아에게 그렇게 많은 위험이 닥쳤는데도 이 아이는 이렇게 안전하고 무사하게 태어났고, 게다가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앞으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눈앞의 작은 아이가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건강할 수 있다면, 아이의 엄마 윤아는 분명 더 완강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윤아는 아슬아슬하게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재민은 보면 볼수록 더 반가웠고 윤아가 출산할 때 옆에 없었지만 수술실 밖에 있었으니 좀 멀지만 어떻게 보면 윤아 옆에 있은 셈이다.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윤아 옆에 꼭 있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재민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현진성과 한기현도 옆으로 다가가서 아기를 바라보았다.“윤아 씨를 많이 닮아서 참 예뻐. 앞으로 윤아 씨처럼 예쁘게 자랄 거야.”기현은 한참을 쳐다보았다.옆에 있던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윤아 씨와 닮은 줄 알아요? 갓난아이는 이목구비도 다 비슷비슷하고 쭈글쭈글한 모습이 늙은이 같다는 생각만 들어요. 게다가 머리카락이나 눈썹도 다 나지 않았잖아요.”“진성 씨…… 왜 그래요? 분명 윤아 씨를 닮았잖아요?”핀잔을 들은 기현은 얼굴이 빨개졌다.“재민아. 진성 씨 봐, 너의 아이가
한기현은 다시 권재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숨은 곳을 알려줬지만 강윤아가 끌려갔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재민은 재빨리 이곳으로 달려와 둘러보았으나 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스러운 얼굴로 기현과 현진성을 힐끗 쳐다보았다.“기현아, 현진성 씨, 윤아 씨는요? 윤아 씨가 왜 여기에 없죠?”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재민 앞에서 감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기현은 슬며시 진성을 쳐다보고 몰래 진성을 쿡 찔렀다. 진성은 방심하다 밀려났고 뒤를 돌아보며 기현을 노려보았지만 기현은 고개를 숙이고 더는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묻고 있잖아요! 윤아 씨는요? 내 아내 어디 갔어요? 당신들 윤아 씨를 어디로 데려갔어요?”재민은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소리쳤다.진성은 미안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보며 재민에게 그가 떠난 후의 일을 대충 말했다.“권재민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윤아 씨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애스릭에게 빼앗겼어요. 제가 부주의했어요. 그 방에 숨으면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애스릭이 이렇게 교활하게 두 가지 계략을 쓸 줄은 몰랐어요.”“권재민 대표님, 지금 저를 때리고 욕해도 저 할 말이 없어요.”이 말을 들은 재민은 온몸에 살기가 피어올랐고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진성을 노려보며 허리에서 총을 꺼내려 했다. 기현이 황급히 그런 재민을 말렸다.“재민아, 일단 흥분하지 마, 방법이 있을 거야. 같은 편이니 우릴 도울 수 있어. 게다가 인터폴이야. 너 인터폴을 죽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윤아 씨부터 찾아야지. 지금 우리는 진성 씨가 필요해.”기현은 재민의 허리춤의 총을 쥔 손을 힘껏 눌렀다.진성도 황급히 위로했다.“권재민 대표님,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밖에 비도 오고 바람도 심해서 빨리 갈 수 없으니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예요.”“게다가, 우리 배에는 위치추적 장치가 있어요. 아주 은밀한 곳에 두었으니, 그들은 분명히 찾을 수 없
한기현은 사람과 함께 현진성의 사람들을 따라 수술실의 암도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길을 따라가다가 애스릭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기현은 그들 모두가 깨끗이 떠난 줄 알고 있었는데 애스릭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사람을 남겨 그들을 몰살시킬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기현의 눈에 갑자기 핏빛이 솟구쳐오르더니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맨주먹으로 몇 사랑을 해치웠다.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독살스러운 모습까지 보여 상대방을 놀라게 했다.그 사람들은 애스릭을 보낸 후 매우 내키지 않았다. 한바탕 뒤지고 나서 도망갈 계획이었는데, 결국 절반 정도 뒤지다가 기현 일행을 만났다. 특히 기현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듯 보였다.그들은 원래 기현 일당과 대충 싸우려고 일부러 그들을 놓아주려 했는데 기현이 달려들어 그들 몇 사람을 쓰러 눕히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기현 일행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기현이 상대방의 생각을 알면 지금쯤 후회해 죽을지도 모른다. 몇 분 동안 아무렇게나 싸우면 될 일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또 한 번 미뤘다.몇 분 동안 싸운 후, 쌍방은 모두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기현의 왼팔이 그 무리의 두목을 누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총을 쥐고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어 쌍방이 모두 시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현은 그들의 타협을 기다렸고, 그 사람은 반격의 기회를 기다렸다.이 팀장은 원래 타협하려 했지만, 지금 이 지경에 이르니 승리욕이 자극되었고 지금은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머리를 숙이면 부하들이 그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그는 승부를 내려고 했다.이때 폭발음이 드디어 또렷하게 들렸고 그 사람은 이때 갑자기 손을 썼다.기현은 그가 성급히 달려들 것을 예상한 듯 손을 빼 권총을 내던지고 날쌔게 상대방의 손을 잡아 그의 등 뒤로 돌렸다. 두 발은 날렵하게 그의 허리와 배를 걷어찼고 곧 사납게 그의 몸을 비틀어 앞을 가
현진성은 애스릭의 부하들이 베티를 데려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애스릭이 아직도 단념하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애스릭이 베티를 포기하거나 그들과 함께 죽으려고 이 보이지 않는 장치를 작동시켰다고 생각했다.애스릭이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베티를 데려가서 부활을 꿈꾸고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애스릭은 고승혁 교수와 강윤아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진성은 갑자기 눈꺼풀이 미친 듯이 뛰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윤아와 고승혁 교수가 숨어 있던 방에서 총소리가 났다.그는 급히 아까의 그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 보니 그가 배치한 사람 중 몇 명은 상처를 입었고, 또 몇 명은 이미 의식을 잃었으며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었는데 의사였다. 그 의사는 아기의 인큐베이터를 필사적으로 안고 있었다.진성은 그 의사의 시체를 땅에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손이 인큐베이터 가장자리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어서 아주 많은 힘을 써서야 그 손을 쪼갰다. 진성은 겨우 옆 깨끗한 곳으로 메고 가서 그를 살며시 내려놓았다.의사를 내려놓은 진성은 돌아서서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를 살펴보았다. 아기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매우 달콤하게 자고 있었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모두가 엎드려 있어서 진성은 한동안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하나 뒤집어 보았다. 애스릭의 사람들이 그냥 들어와서 그들을 다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고승혁 교수를 데려갔을 줄은 몰랐다.진성은 갑자기 윤아가 떠올랐다. 총소리가 그렇게 컸으니 윤아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 리 없다. 진성은 급히 모퉁이의 병상 옆으로 달려갔다.이불 속이 울퉁불퉁했다. 그는 처음에는 고승혁 교수 등이 윤아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고 생각했지만 열어보니 안에 베개가 있었다. 진성은 멍해졌다.“이 방은 밀폐되어 있는데 그들은 어디에 잡혀간 거지? 게다가 방금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으니 문으로 나갔을 리가 없어.”진성은 조급했다.갑자기
고승혁 교수는 숨을 헐떡이며 말하고는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에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애스릭이 그 배에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고승혁 교수는 깜짝 놀라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현진성은 그에게 대답할 방법이 없어서 그를 붙잡고 비밀 통로로 갔다.권재민도 급히 한기현에게 연락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그러나 신호를 받자마자 재민은 기현 쪽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기현아, 무슨 일이야?”재민은 노심초사하여 급히 물었다.“방금 그 사람들이 들이닥쳐 시스템을 파괴했어. 최선을 다해 구조했으니 지금은 30분 정도 지연될 수 있어.”“시스템 복구가 시급한데 지금 그들과 싸우는 중이라……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어.”기현은 시스템 감시실에서 애스릭의 부하들과 싸우며 관제탑에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권재민과 이쪽의 상태를 보고했다.보고하는 과정에서 재민은 기현의 끙끙거리는 소리까지 듣고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기아현, 너는 어때? 버틸 수 있겠어? 시스템 쪽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지금은 복구할 방법이 없어. 이젠 네가 나설 차례야.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시간은 안 남았어요, 재민아.”“상대편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우리 사람은 이 몇 명밖에 없어. 버티기 힘들 것 같아, 재민아, 빨리 와.”기현이 헐떡이며 소리쳤다.재민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지만 윤아가 이쪽에 있었기에 결정하기 어려웠다. 윤아가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매우 걱정했다.진성은 재민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내 부하들이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습격당했고, 그자들이 통제실의 시스템을 파괴했대요. 지금 우리 부하들이 그들과 싸우고 있는데 기현이도 그들에게 얽매여 시스템을 고칠 기회가 전혀 없어요…… 나는 윤아 씨가 마음에 걸려요.”재민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가요, 여기 내가 있을게요. 기지 안에 내 사람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