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아의 대답에 셋은 거의 동시에 입꼬리를 씩 올렸다. 보아하니 강윤아의 사리 분별 있는 모습에 아주 만족한 모습이었다.하지만 그때, 그녀들 등 뒤에서 허스키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예리야.”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들 등 뒤에 세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세 사람의 남편이었다.강윤아도 그녀들의 시선을 따라 세 명의 남자를 바라봤다. 제일 왼쪽에 선 남자는 피둥피둥 살쪄 있는 데다 나이가 좀 많이 들어 보였고, 중간의 남자는 반듯한 양복 차림의 엘리트 같아 보였고 제일 왼쪽의 남자는 강현서의 그 젊고 잘생겼다는 남편인 듯했다. 하지만 번지르르하게 생기긴 했지만 사진에서 볼 때와는 차이가 선명했다.강윤아는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그들 때문에 또 어떤 귀찮은 일이 생길지 걱정했다.그때, 이예리가 먼저 달려가 자기 남편의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말했다.“자기야, 나 데리러 안 와도 된다고 했잖아. 우리 아직 식사도 안 했는데.”잇따라 강현서와 송인애까지 자기 남편들한테로 걸어갔다. 혼자 남은 강윤아는 그들이 자기 남편들과 꽁냥대는 꼴을 보다 못해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강윤아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각자 자기 남편을 끌고 그녀에게 다가왔다.“윤아야, 이 사람 우리 남편이야. 너한테 소개시켜 줄게. 지금은 회사 대표님인데 1년에 몇십억 정도 벌어들여. 휴…… 뭐 그냥 보통 수준이야.”이예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허허 웃으며 넉살 좋은 모습을 보였다.“이만하면 우리 자기 하나 먹여 살리기는 충분하지 않아? 하고 싶은 거 하고도 남는 돈일 텐데.”이예리는 살짝 삐진 듯 남편을 째려보더니 이내 그의 어깨에 기대며 애교를 부려댔다.“그냥 말만 그렇다는 거지 사실 엄청 만족해요. 당신이랑 있으면 어떤 생활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그렇다면 우리 자기를 위해 더 좋은 생활환경을 만들어 줘야겠는데.”그때 강현서도 뒤처지지 않으려는 듯 끼어들었다.“윤아야, 우리 남
그들은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흠칫 놀라더니 일제히 고개를 돌려 등 뒤를 확인했다. 말소리가 난 자리에는 잘생긴 데다 분위기마저 고급스러운 한 남자가 서 있었다.권재민을 본 순간 강윤아의 세 동창은 모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의 아우라와 외모는 확실히 놀랄 만했다. 심지어 잘생긴 남편을 두고 있는 강현서마저 그의 미모에 치이고 말았다.그녀들의 멍한 모습은 당연히 남편들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하지만 그들은 눈앞에 나타난 남자가 강윤아를 찾으러 왔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의 말투에 가시가 있긴 했지만 그저 자기들이 길목을 막고 있어 언짢았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윽고 이예리는 두 친구의 옷깃을 살짝 당겨 길을 내어주고면서 권재민에게 예의 있는 미소를 지었다.“저희가 길목을 막고 있었죠. 죄송합니다. 지나가세요.”이미 억울함과 서러움을 속으로 삼키던 강윤아는 권재민을 보는 순간 구세주라도 본 것처럼 달려갔다.“왜 인제야 왔어요?”권재민은 단번에 강윤아의 변화를 눈치챘다. 게다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보니 그녀가 괴롭힘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저도 모르게 표정이 어두워졌다.“저 사람들이 윤아 씨한테 뭔 짓 했어요?”권재민은 낮은 소리로 물었다.그 순간 강윤아는 왠지 모르게 권재민이 자기를 위해 나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끝내 고개를 저었다.그러던 그때, 강윤아가 눈앞의 남자와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송인애가 먼저 참지 못하고 물었다.“윤아야, 이분은 누구셔?”갑자기 그들이 자기 앞에서 남편 자랑을 해대던 모습이 생각나 강윤아는 뭐에 홀린 듯 권민재의 팔짱을 끼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소개할게. 이 사람이 내 남편이야.”강윤아가 자기를 남편이라고 소개하는 것에 권재민은 화가 나기는커녕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방금 전 광경을 회상하더니 이내 눈살을 찡그렸다. 강윤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를 괴롭힌 사람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방금 무슨 일 있었어요
권재민의 기세에 눌렸지만 세 명의 남자는 여전히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다들 현지에서 방귀꽤나 뀐다하는 사람들이기에 눈앞의 사람이 아무리 레스토랑 사장이어도 자기들한테는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러던 그때,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들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당신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이렇게 대하는 거야? 경고하는데 조심해, 안 그러면 당신도 후회하게 될 테니까.”권재민은 피식 웃으며 그들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보아하니 권재민에게 겁을 주려는 듯한 모양이었는데 그의 오만함을 꺾어버리기는커녕 역으로 무시당했다.그제야 세 남자는 속으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강하게 밀고 나가도 먹히지 않으니 살짝 움찔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그 모욕을 당하나? 그건 아니었다.“당신, 여기가 당신 구역이라고 우쭐하나 본데 여기에서 나가면 누가 울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야!”그중의 한 남자가 잔뜩 열이 나서 소리쳤지만 권재민은 그를 싸늘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심지어 그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윤 실장에게 전화했다.“레스토랑으로 와 봐.”세 남자는 일제히 고개를 들어 권재민을 바라봤다. 보아하니 그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릴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었다.하지만 전화를 끊은 권재민은 몸을 돌려 처참한 그들의 몰골을 바라보며 경호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경호원들은 세 남자를 레스토랑 구석으로 데려갔다.곧이어 커다란 레스토랑에 그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아!”“이거 놓지 못해?”“당신들 내가 가만둘 줄 알아?”세 남자는 맞으면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경호원들에게 협박을 해댔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경호원들의 더 잔인한 폭행이었다.처절한 비명에 세 여자는 소리가 나는 구석으로 달려갔지만 눈에 들어온 건 남편들이 구타당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도와주려니 우락부락한 경호원을 상대로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아 옆에서 비명만 질러댔다.“당장 그만둬! 그만두라고! 계속하면 경찰 부를 거야!”경호원들은 당연히 그녀들의
윤기태는 곧장 구석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걸어가 권재민이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대표님이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겠다고 하십니다.”“감사합니다! 윤 비서님, 권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단비 같은 한마디에 그들은 잔뜩 흥분한 눈빛으로 당장이라도 윤기태의 다리를 잡고 절할 기세로 연신 인사했다.그런데 그때.“하지만…….”때마침 말머리를 돌리는 윤기태의 행동에 그들은 따라서 숨을 죽였다. 다음에 뭔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잔뜩 긴장한 모습들이었다.그리고 역시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의 표정을 굳게 만들기에 충분했다.“하지만 대표님께서 7억 6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와인은 유럽에서 경매로 낙찰받은 거라 이 가격이 확실합니다. 다들 협조해 주리라 믿겠습니다.”심지어 세 남자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말까지 더듬었다.“저기…… 권 대표님께서 혹시 저희한테 시간을 좀 더 늘려줄 수는 없으신지?”“시간을 늘려달라고요?”윤기태는 눈살을 찌푸렸다.“가격대로만 배상하라고 한 것도 이미 많이 봐준 겁니다. 구하기 어려워 부르는 게 값인 술을 깼는데, 만약 진짜로 따지고 든다면 그 가격만 배상하라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 시간도 넉넉한데 바로 지불하시죠.”세 남자는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윤기태는 더 이상 좋은 태도로 말하지 않았다.“왜 아무 대답없죠?”한참 이어진 침묵 끝에 세 남자는 결국 낮은 소리로 자기들 아내를 불렀다.“아까 그 여자가 동창이라며? 권 대표님이 그 여자 남편이니 얼른 가서 사정해 봐.”세 여자는 그 말에 얼른 강윤아 쪽으로 달려가 그녀 앞에 “털썩” 무릎 꿇었다.강윤아는 그녀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솔직히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는 모습에 살짝 멍해졌다.하지만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송인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아야, 아까는 우리가 미안했어. 우리 한 번만 봐주라.”“그래, 윤아야. 우리도 그 와인이 그렇게 비싼 건 줄 몰랐어. 게다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니 제발 권 대표님께
레스토랑이 다시 고요해지자 강윤아는 그제야 눈길을 권재민에게로 돌렸다. 권재민의 눈길 역시 그녀를 향했다.갑자기 눈이 마주치자 강윤아는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얘져 뭔 말을 하려 했던지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왜 그래요?”권재민은 강윤아를 보며 덤덤하게 물었으나 강윤아는 오히려 그의 눈길을 피하며 쭈뼛쭈뼛 고개를 숙였다.“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까는 정말 고마웠어요.”“별것도 아닌데요 뭘.”권재민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앞으로 다시는 그렇게 바보처럼 괴롭힘당하지 마요.”그 말에 강윤아는 억지 미소를 지었지만 별로 즐겁지는 않았다.앞으로 권재민과 더 이상 엮이지 않을 텐데, 그녀의 신분과 지위로 다른 사람들이 걸어오는 시비를 무사히 넘기는 건…… 아무 불가능 할 거다.‘우선 제일 중요한 일자리부터 알아봐야겠네.’강윤아는 살짝 넋이 나간 상태로 미래를 계획하기 시작했다.“네, 알겠어요.”상대의 말에 대답은 했지만 말투에는 허탈함이 담겨있었다.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권재민은 눈살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친 뒤, 강윤아는 바로 돌아가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그때, 권재민이 갑자기 그녀를 막아섰다.“저랑 어디 좀 가요.”“네? 어디요?”강윤아는 의아한 듯 물었다.“가 보면 알아요.”잠시 멍해 있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거절했다.“아니에요, 저 돌아갈래요.”하지만 권재민은 그녀의 거절을 무시한 채 차에 올라타기 바쁘게 기사에게 명령했다.“출발해.”권재민의 강력한 태도에 강윤아는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리고 얼마 뒤, 차는 웬 생태공원 문 앞에 멈췄다. 강윤아는 놀란 듯 그곳을 바라봤다.‘나를 왜 이런 데로 데려왔지?’그녀 앞에 놓인 건 다름 아닌 작은 산이 놓여있었다. 깨끗한 환경, 적당한 높이, 천천히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적당한 높이의 돌계단. 심지어 돌계단 위에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만약 옆에 권재민만 없었다면 강윤아는 바로 이곳에 빠져 아름다운 경치
방문에 들어서는 순간, 강윤아는 그제야 오늘 너무 많은 일에 시달리다 보니 은찬을 유치원에서 데려오는 걸 깜빡했다는 걸 떠올렸다.‘어떻게 이렇게 무심할 수 있지? 잊어도 어떻게 아이 데리러 가는 걸 잊어?’속으로 자기를 원망하며 손을 들어 머리를 때리고 있던 그때, 갑자기 은찬의 앳된 목소리가 방에서 들려왔다.“엄마, 왔어요?”강윤아는 얼떨떨해서 한참을 서 있다가 얼른 아이에게 달려가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은찬아, 너…… 어떻게 돌아왔어?”“경비원 아저씨가 데려다줬어요. 엄마가 아빠…… 아저씨랑 식사하러 갔다면서요.”은찬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그 말에 강윤아는 일순 멍해졌고 마음마저 복잡했다.‘권재민 씨가…… 엄마인 나보다 낫네. 이런 것도 마음 써주고.’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은찬의 머리를 살살 문질렀다.“은찬아,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가서 자.”“네.”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엄마, 그런데 오늘 아저씨랑 식사하러 갔으면서 저는 왜 안 불렀어요?”강윤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억울한 것만은 확실했다. 그녀는 애초에 권재민에게 은찬을 데려오면 어떠냐고 건의했지만 권재민이 거절하는 바람에 그녀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음. 그건 엄마랑 아저씨가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랬어. 다음에는 꼭 너 데리고 갈게. 응?”조심스러운 강윤아의 말투에 은찬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더였다.“그래요.”다음날은 마침 주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은찬은 낮잠을 잤을 테지만 오늘에는 강윤아가 깨우기도 전에 스스로 깨어났다.거실에 있던 강윤아는 방에서 걸어 나온 은찬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은찬아, 너 오늘 왜 이렇게 빨리 깨어났어? 더 자지 않고?”“할 일 있어서요.”은찬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하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강윤아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응? 뭐라고?”“아무것도 아니에요!”다시 묻는 강윤아의 물음에 은찬은 도망치듯 거실에
“왜 그래요?”권재민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강윤아의 반응에 살짝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이에 그녀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자꾸만 그를 슬쩍슬쩍 훔쳐보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피식” 웃어버렸다.잇따라 권재민의 날카로운 눈빛이 날아오는 바람에 강윤아는 잔뜩 긴장해서 입을 꾹 다물었지만 다행히 권재민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그러나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바쁘게 은찬의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왜 웃어요?”“아, 아무 것도 아니야.”강윤아는 황급히 부인했다.하지만 은찬은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골적으로 바라봤다.“엄마 혹시 아빠 비웃은 거예요? 뭐가 그렇게 웃긴데요? 아빠 저 옷 입은 거 멋있지 않아요?”은찬의 말에 권재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낮게 대꾸했다.“음, 역시 보는 눈이 있네.”권재민의 우쭐대는 모습에 강윤아는 의외라는 듯 그를 힐끗거렸다. 솔직히 그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그때 은찬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에요.”“은찬아, 오늘 시합 화이팅해.”살짝 미소 지으며 보낸 권재민의 응원에 은찬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만만한 태도로 자기 가슴을 탁탁 쳤다.“당연하죠. 제가 언제 게임하면서 지는 거 봤어요? 걱정 마세요. 저 이번에 꼭 1등 할 거예요!”하지만 강윤아가 듣기에 은찬의 말은 너무나도 건방졌다. 이윽고 그녀는 얼른 은찬의 입을 막으며 경고했다.“은찬아, 말 함부로 하지 마!”“저…… 함부로 말한 거 아니에요.”은찬은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강윤아를 바라봤다.심지어 권재민마저 그녀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바람에 권재민은 은찬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스르르 풀었다.“은찬아, 아빠는 우리 은찬이 실력 있는 거 알아.”권재민의 긍정적인 응원에 은찬은 그제야 다시 미소를 지으며 그와 대화를 이어갔다.그 때문에 강윤아는 자기가 이방인이라도 된 것 같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하, 내가 은찬이 혼낼 때마다 재민 씨가 감싸다간 은찬
경기는 여전히 계속됐다. 8 라운드의 경기를 치른 뒤 은찬은 심지어 8강에까지 진출했다.희망도 품지 않은 경기에서 은찬이 이렇게까지 뛰어난 성적을 따냈다는 것에 강윤아는 오히려 더 긴장했다.“재민 씨, 저 게임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은찬이가 몇 위 할 것 같아요?”강윤아는 잔뜩 긴장해서 물었다.그녀도 당연히 은찬이가 우슨을 하길 바라지만 나이가 너무 어리다 보니 너무 큰 기대를 할 수 없었다. 더욱이 게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해설에 의존하며 겨우겨우 이해하고 있기에 은찬이의 실력이 가늠이 가지 않았다.그러던 그때.“우승.”권재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말투는 오히려 은찬 본인보다도 더 자신감 넘치는 듯했다.물론 경기가 시작하기 훨씬 전에도 똑같은 말을 하긴 했지만 그때는 그저 은찬을 격려하려고 한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은찬이도 없는 자리에서 그녀에게 이런 대답을 할 줄이야.“정말요?”강윤아는 약간 미심쩍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은찬이가…… 정말 그렇게 대단한가?’권재민은 그녀를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은찬이는 그럴만한 실력이 있어요. 청소년 조에 출전하더라도 아마 빛을 발했을걸요.”권재민이 성격상 이런 거로 자기를 속일 리 없다는 걸 강윤아는 누고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은찬이가 그렇게 대단하다니 놀랍네요…….”잠시 뒤, 하프타임이 다가와 선수들에게 휴식할 시간이 주어졌다. 은찬은 자기가 실력 발휘를 제대로 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무대 위에서 내려왔다. 이윽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씩씩하게 걸어오더니 강윤아 앞에 멈춰 서며 손을 쑥 내밀었다.“엄마, 나 손 아파. 안마해 줘.”강윤아는 은찬의 버릇 없는 말투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일부러 화를 내는 듯 엄숙한 표정을 연기했다.“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손은 자연스럽게 아들 쪽으로 뻗었다. 그런데 그때, 권재민이 그녀보다 빨리 은찬의 손을 잡으며 열심히
강윤아라는 말에 권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윤아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힘든 일을 많이 겪었고 늘 다른 사람의 타깃이 되었어요. 재민이가 너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 그녀를 연루시킨 거죠.”“재아 씨가 지금 걱정해도 소용없어요, 재아 씨부터 잘 챙겨요.”윌은 재아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자, 재아 씨 기분 전환하러 갔다가 나중에 우리 집에 가요.”그 말을 들은 권재아는 얼굴이 빨개졌다.“얼굴이 왜 빨개지는 거예요? 내가 옆에 있었으면 재아 씨가 좀 더 편하게 잠들 거예요.”윌은 웃으며 농담했다.재아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 된 채 그를 한 대 때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날이 저물자 바다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이따금 파도가 아련하게 일기도 했다.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간간이 등불이 있는데, 등불은 그다지 밝지 않고 군데군데 있어서 밤하늘의 별과 서로 잘 어울렸다.재아는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한 걸음씩 폴짝폴짝 뛰어갔다. 귓가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득하고도 고요했다.윌은 재아의 뒤에서 몇 걸음 걷다가 재아가 전혀 알아채지 못하자 성큼성큼 몇 걸음 앞으로 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으로 감쌌다.재아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손잡고 싶은 거면 얘기하지 그랬어요.”재아의 표정이 너무 도도해서 윌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긁었다.“그러게 누가 재아 씨더러 아무것도 모르래요?”술도 밥도 배불리 먹었으나 그 뒤로 딴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재아는 윌 덕분에 배불리 먹었고 지금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윌의 손을 잡고 있자니 따뜻한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힘에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백사장을 따라 한참을 걸은 후에야 마침내 윌이 말한 그 ‘재미있는 곳’에 이르렀다.재아는 어두컴컴한 불빛 속 나무 밑에 숨어 있는 해먹에 하마터면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여기가 재밌는 곳이에요?”“재미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올 거잖아요?”윌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올라탄
회의가 끝난 후, 권재아는 권현우가 그녀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고 여전히 당당하게 걸어 나갔지만, 사무실로 돌아온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조하고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재아는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재아는 권재민에게 이 일을 알리려 문자를 보냈지만, 그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재아는 윤기태에게도 이 일을 말했다. 기태도 분노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아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며 화가 났지만 재아를 먼저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이런 결과는 대표님도 원하지 않겠지만, 정말 방법이 없잖아요. 자책하지 마세요, 권재민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분명히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태의 위로가 전혀 소용이 없었고 재아는 여전히 괴로웠다.재아의 이런 모습을 본 기태는 더는 방해하지 않고 그녀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늦은 시간, 재아는 여전히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권재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만 했다.갑자기 넓은 손이 재아 앞에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재아는 화를 내려다가 윌임을 발견했다. 순간 화가 난 얼굴이 미리 설정된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아, 윌,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귀국하지 않았어요? 돌아왔으면 나한테 말해주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내가 공항으로 데리러 갔을 텐데.”윌은 재아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풀고 책상을 돌아 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눈빛은 재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보고 싶어서 돌아왔어요. 알려줬으면 어떻게 서프라이즈를 해줬겠어요. 왜 이렇게 피곤한 얼굴이죠? 날 봤을 땐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어요.”윌이 그녀 앞에 서자 재아는 윌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살짝 윌의 몸에 기대며 풀이 죽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윌은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 보여 더는 강요하지 않고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주차장에서 오래 기다렸는데도 안 내려와서 야근하는 거 아닌가
권재민은 강윤아의 움직임을 추적한 뒤 곧바로 현진성과 합류해 구출 계획을 논의하고 애스릭이 숨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려 했다.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변장하고 다가갔다. 애스릭은 분명 그들을 경계할 것이고, 외딴 섬에서의 일을 겪었으니 애스릭의 경계와 의심이 더 강해지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만반의 계획을 세워야만 윤아를 구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같은 시간, 국내에 있던 김소혜와 서만옥은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날 기슭에 도착한 후 재민은 아이를 안배하고 나서 소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혜는 발신자가 실종된 지 오래된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재민아, 드디어 엄마한테 전화했구나. 그동안 네가 나한테 전화 안 해서 우리도 방해할 엄두가 안 났는데 너는 지금 어때? 윤아는 행방불명이야? 윤아를 구해낸 거 아니었어?”소혜는 재민의 전화가 희소식을 전하러 걸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재민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민의 전화를 받은 후 마음이 매우 흥분되고 기뻤기 때문이기도 했다.재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소혜의 이렇게 흥분한 말투를 들으며 차마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서 아이를 돌볼 가족이 있어야 했다. 비록 의사가 있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그는 이를 악물고 실정을 소혜에게 말했다.“엄마, 내 말 좀 들어봐요. 마음을 다잡고 들어요, 일이 이렇게 됐어요…… 엄마가얘기한 거랑 상황이 좀 달라요. 윤아가 처음에 구출되긴 했는데 다시 잡혀갔어요.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건 내가 계속 그 사람의 경계에 잠복해있었기 때문이에요.”재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혜가 말을 끊었다.“뭐? 구출되긴 했는데 또 잡혀갔다는 건 뭐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엄마, 내 말끝까지 들어봐요.”재민이 이마를 어루만졌다.“이 일은 당분간 자세히 말하기 어려워요. 제가 윤아를 데려가고 나서 자세히 말해줄게요.”
고승혁 교수가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애스릭은 더 심하게 때렸다. 거의 몇 시간마다 가서 괴롭혔는데 매번 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말로 욕했지만 고승혁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강윤아는 고승혁 교수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생기는 것을 보고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사실, 애스릭이 매번 고승혁 교수를 데려갈 때마다 그가 입을 열어 경험을 전수해주도록 했을 뿐 매번 그를 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승혁 교수는 돌아올 때마다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얻어맞았다.고승혁 교수는 베티를 치료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배신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원망스러웠다.“고승혁 교수님, 저 때문에 교수님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협조하고 절 그냥 내버려 둬요.”“괜찮아요,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요. 나는 견딜 수 있어요. 나는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까지인 보고 싶어요. 언젠가 내가 정말 견딜 수 없게 되면 자연히 그들에게 항복할 거예요. 그때 가서 윤아 씨가 나를 원망하지 말아주세요.”고승혁 교수는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는 듯 윤아를 향해 농담까지 했다.“교수님은 이미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내 아이를 지켜줬어요. 이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교수님에게 감사해요. 교수님이 앞으로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윤아는 고승혁 교수의 이런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정말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이건 내 인생 경험의 일부일 뿐이에요.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에요. 굴복해 연명할 수 있지만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고승혁 교수는 윤아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그녀를 안심시켰다.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우리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교수님의 연구원에 많이 투자할게요.”“그럼 먼저 윤아 씨에게 감사해야겠어요.”“고승혁 교수님, 우리는 함께 목숨 걸고 싸운 사이이니 그냥 저를 윤아라고 부르세요, 윤아 씨는 너무 서먹서먹해요.”윤아가 고승혁을
메리는 인큐베이터 옆에 있는 의사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를 한 번 쿡 찌르며 낮은 소리로 주의를 시키었다.“존, 사람들이 묻고 있잖아요.”“네?”존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권재민은 옆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내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어요.”“아기는 지금 상태가 안정돼 있고 아까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놀라지 않았어요. 달이 차지 않아 태어났기 때문에 면역력이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존은 마침내 반응을 보였고 무서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재민은 가볍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고개를 숙이고 인큐베이터 안의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생명이 정말 완강하다고 느꼈다.강윤아에게 그렇게 많은 위험이 닥쳤는데도 이 아이는 이렇게 안전하고 무사하게 태어났고, 게다가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앞으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눈앞의 작은 아이가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건강할 수 있다면, 아이의 엄마 윤아는 분명 더 완강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윤아는 아슬아슬하게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재민은 보면 볼수록 더 반가웠고 윤아가 출산할 때 옆에 없었지만 수술실 밖에 있었으니 좀 멀지만 어떻게 보면 윤아 옆에 있은 셈이다.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윤아 옆에 꼭 있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재민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현진성과 한기현도 옆으로 다가가서 아기를 바라보았다.“윤아 씨를 많이 닮아서 참 예뻐. 앞으로 윤아 씨처럼 예쁘게 자랄 거야.”기현은 한참을 쳐다보았다.옆에 있던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윤아 씨와 닮은 줄 알아요? 갓난아이는 이목구비도 다 비슷비슷하고 쭈글쭈글한 모습이 늙은이 같다는 생각만 들어요. 게다가 머리카락이나 눈썹도 다 나지 않았잖아요.”“진성 씨…… 왜 그래요? 분명 윤아 씨를 닮았잖아요?”핀잔을 들은 기현은 얼굴이 빨개졌다.“재민아. 진성 씨 봐, 너의 아이가
한기현은 다시 권재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숨은 곳을 알려줬지만 강윤아가 끌려갔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재민은 재빨리 이곳으로 달려와 둘러보았으나 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스러운 얼굴로 기현과 현진성을 힐끗 쳐다보았다.“기현아, 현진성 씨, 윤아 씨는요? 윤아 씨가 왜 여기에 없죠?”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재민 앞에서 감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기현은 슬며시 진성을 쳐다보고 몰래 진성을 쿡 찔렀다. 진성은 방심하다 밀려났고 뒤를 돌아보며 기현을 노려보았지만 기현은 고개를 숙이고 더는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묻고 있잖아요! 윤아 씨는요? 내 아내 어디 갔어요? 당신들 윤아 씨를 어디로 데려갔어요?”재민은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소리쳤다.진성은 미안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보며 재민에게 그가 떠난 후의 일을 대충 말했다.“권재민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윤아 씨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애스릭에게 빼앗겼어요. 제가 부주의했어요. 그 방에 숨으면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애스릭이 이렇게 교활하게 두 가지 계략을 쓸 줄은 몰랐어요.”“권재민 대표님, 지금 저를 때리고 욕해도 저 할 말이 없어요.”이 말을 들은 재민은 온몸에 살기가 피어올랐고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진성을 노려보며 허리에서 총을 꺼내려 했다. 기현이 황급히 그런 재민을 말렸다.“재민아, 일단 흥분하지 마, 방법이 있을 거야. 같은 편이니 우릴 도울 수 있어. 게다가 인터폴이야. 너 인터폴을 죽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윤아 씨부터 찾아야지. 지금 우리는 진성 씨가 필요해.”기현은 재민의 허리춤의 총을 쥔 손을 힘껏 눌렀다.진성도 황급히 위로했다.“권재민 대표님,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밖에 비도 오고 바람도 심해서 빨리 갈 수 없으니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예요.”“게다가, 우리 배에는 위치추적 장치가 있어요. 아주 은밀한 곳에 두었으니, 그들은 분명히 찾을 수 없
한기현은 사람과 함께 현진성의 사람들을 따라 수술실의 암도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길을 따라가다가 애스릭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기현은 그들 모두가 깨끗이 떠난 줄 알고 있었는데 애스릭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사람을 남겨 그들을 몰살시킬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기현의 눈에 갑자기 핏빛이 솟구쳐오르더니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맨주먹으로 몇 사랑을 해치웠다.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독살스러운 모습까지 보여 상대방을 놀라게 했다.그 사람들은 애스릭을 보낸 후 매우 내키지 않았다. 한바탕 뒤지고 나서 도망갈 계획이었는데, 결국 절반 정도 뒤지다가 기현 일행을 만났다. 특히 기현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듯 보였다.그들은 원래 기현 일당과 대충 싸우려고 일부러 그들을 놓아주려 했는데 기현이 달려들어 그들 몇 사람을 쓰러 눕히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기현 일행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기현이 상대방의 생각을 알면 지금쯤 후회해 죽을지도 모른다. 몇 분 동안 아무렇게나 싸우면 될 일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또 한 번 미뤘다.몇 분 동안 싸운 후, 쌍방은 모두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기현의 왼팔이 그 무리의 두목을 누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총을 쥐고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어 쌍방이 모두 시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현은 그들의 타협을 기다렸고, 그 사람은 반격의 기회를 기다렸다.이 팀장은 원래 타협하려 했지만, 지금 이 지경에 이르니 승리욕이 자극되었고 지금은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머리를 숙이면 부하들이 그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그는 승부를 내려고 했다.이때 폭발음이 드디어 또렷하게 들렸고 그 사람은 이때 갑자기 손을 썼다.기현은 그가 성급히 달려들 것을 예상한 듯 손을 빼 권총을 내던지고 날쌔게 상대방의 손을 잡아 그의 등 뒤로 돌렸다. 두 발은 날렵하게 그의 허리와 배를 걷어찼고 곧 사납게 그의 몸을 비틀어 앞을 가
현진성은 애스릭의 부하들이 베티를 데려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애스릭이 아직도 단념하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애스릭이 베티를 포기하거나 그들과 함께 죽으려고 이 보이지 않는 장치를 작동시켰다고 생각했다.애스릭이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베티를 데려가서 부활을 꿈꾸고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애스릭은 고승혁 교수와 강윤아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진성은 갑자기 눈꺼풀이 미친 듯이 뛰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윤아와 고승혁 교수가 숨어 있던 방에서 총소리가 났다.그는 급히 아까의 그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 보니 그가 배치한 사람 중 몇 명은 상처를 입었고, 또 몇 명은 이미 의식을 잃었으며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었는데 의사였다. 그 의사는 아기의 인큐베이터를 필사적으로 안고 있었다.진성은 그 의사의 시체를 땅에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손이 인큐베이터 가장자리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어서 아주 많은 힘을 써서야 그 손을 쪼갰다. 진성은 겨우 옆 깨끗한 곳으로 메고 가서 그를 살며시 내려놓았다.의사를 내려놓은 진성은 돌아서서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를 살펴보았다. 아기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매우 달콤하게 자고 있었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모두가 엎드려 있어서 진성은 한동안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하나 뒤집어 보았다. 애스릭의 사람들이 그냥 들어와서 그들을 다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고승혁 교수를 데려갔을 줄은 몰랐다.진성은 갑자기 윤아가 떠올랐다. 총소리가 그렇게 컸으니 윤아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 리 없다. 진성은 급히 모퉁이의 병상 옆으로 달려갔다.이불 속이 울퉁불퉁했다. 그는 처음에는 고승혁 교수 등이 윤아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고 생각했지만 열어보니 안에 베개가 있었다. 진성은 멍해졌다.“이 방은 밀폐되어 있는데 그들은 어디에 잡혀간 거지? 게다가 방금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으니 문으로 나갔을 리가 없어.”진성은 조급했다.갑자기
고승혁 교수는 숨을 헐떡이며 말하고는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에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애스릭이 그 배에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고승혁 교수는 깜짝 놀라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현진성은 그에게 대답할 방법이 없어서 그를 붙잡고 비밀 통로로 갔다.권재민도 급히 한기현에게 연락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그러나 신호를 받자마자 재민은 기현 쪽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기현아, 무슨 일이야?”재민은 노심초사하여 급히 물었다.“방금 그 사람들이 들이닥쳐 시스템을 파괴했어. 최선을 다해 구조했으니 지금은 30분 정도 지연될 수 있어.”“시스템 복구가 시급한데 지금 그들과 싸우는 중이라……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어.”기현은 시스템 감시실에서 애스릭의 부하들과 싸우며 관제탑에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권재민과 이쪽의 상태를 보고했다.보고하는 과정에서 재민은 기현의 끙끙거리는 소리까지 듣고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기아현, 너는 어때? 버틸 수 있겠어? 시스템 쪽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지금은 복구할 방법이 없어. 이젠 네가 나설 차례야.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시간은 안 남았어요, 재민아.”“상대편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우리 사람은 이 몇 명밖에 없어. 버티기 힘들 것 같아, 재민아, 빨리 와.”기현이 헐떡이며 소리쳤다.재민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지만 윤아가 이쪽에 있었기에 결정하기 어려웠다. 윤아가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매우 걱정했다.진성은 재민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내 부하들이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습격당했고, 그자들이 통제실의 시스템을 파괴했대요. 지금 우리 부하들이 그들과 싸우고 있는데 기현이도 그들에게 얽매여 시스템을 고칠 기회가 전혀 없어요…… 나는 윤아 씨가 마음에 걸려요.”재민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가요, 여기 내가 있을게요. 기지 안에 내 사람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