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아의 맹세를 들었을 때 권재민은 빙긋 웃었다. 그는 윤아가 승낙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함께 겪고, 이제야 결실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재민이 어떻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겠는가.무대 아래의 하객들은 무대 위의 한 쌍의 커플을 보면서 매우 뿌듯하고 기뻤다.하지만 그 속엔 권은우가 포함되지 않았다.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윤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윤아가 그럴 거라는 말을 꺼냈을 때 은우는 더욱 이상하다고 느꼈다.그녀는 해나와 만난 적이 있다. 비록 두 사람이 그다지 교집합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해나의 목소리 정도는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다.방금 그 사람의 목소리는 해나와 매우 비슷했지만, 그녀는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은우는 원래 그들을 폭로하려고 했지만, 충분한 확신이 없었기에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그럼 이제 신랑 신부가 반지를 교환해 주세요.”여러 사람이 각자 자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쯤, 사회자의 목소리가 때맞춰 울려 퍼졌다.사회자의 목소리를 들은 윤아는 몸이 걷잡을 수 없이 가볍게 떨렸다. 곧 그녀는 재민의 여자가 될 수 있다. 그녀의 아기는 마침내 온전한 가정을 꾸릴 수 있게 되었다.그런데 윤아는 왠지 모르게 마음속 한구석에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윤아의 이상함을 느낀 재민은 손을 내밀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반지를 꺼냈다.원래 재민과 해나의 반지는 화이트 큐빅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파우더 큐빅으로 바뀌어 있었다.내막을 모르는 무대 아래 하객들은 파우더 다이아몬드를 보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부러움과 질투만 난발했다.윤아는 앞에 내민 커다란 두 손을 보고 있자니 순간 두 눈이 촉촉해졌다. 이런 느낌은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재민의 신부가 된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그녀는 떨면서 자신의 손을 내밀었고, 문득 반지를 자신의 손가락을 끼우는 순간이 기다려졌다.재민은 앞에 내민 희고 가는 손을 보며
결혼식장은 이미 혼란스러웠고, 결혼식은 이제는 진행할 수 없었다. 멀쩡한 결혼식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며 하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이 결혼식은 분명히 이제는 진행할 수 없다. 어쨌든 두 가족의 체면이 걸린 일이니 집사가 황급히 나서서 경호원들을 동원해 하객들을 모두 내보내고, 오늘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충분한 공간을 남겨뒀다.결국 결혼식장에는 두 가족만 남게 됐고, 강윤아는 당황해 어쩔 줄 몰랐지만, 지금은 절대 떠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권재민과 함께 이 일을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재민은 지금 그녀의 옆에 있다.재민은 존재만으로도 가장 안정감 있는 의지였기에 잠시 허둥지둥하던 그녀는 재민의 존재를 느끼고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커다란 성당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지금은 두 가족 만남아 있어 좀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송씨 가문의 사람들은 재민이 오늘 이런 짓을 해서 그들의 체면을 구기고 모든 하객에게 비웃음을 당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래서 이 순간 모두가 어두운 얼굴로 주범인 재민을 비켜 보고 있다.하지만 재민은 하나도 겁먹지 않고 덤덤하게 그들을 쳐다보았는데 그 모습은 그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해서 송씨 가문을 더욱 화나게 했다.“오늘 우리 송씨 가문에 제대로 된 이유를 얘기해야 할 겁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진노하여 말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딸을 재민과 결혼시키기로 한 것을 정말 후회하고 있다. 그는 그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재민은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두운 눈빛으로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송씨 가문의 가주는 송해나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황급히 물었다.“해나는 지금 어디 있어?”그는 이 말은 재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재민만 해나가 이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기를 원하고 있으니 말이다.재민이 입을 열기도 전에 부하들이 한발 앞서 대답했다.“아가씨는 지금 분장실에서 자고 있어요.”이 말을 들은 송씨 집안의 사람들
송씨 집안 사람들은 식장을 떠난 뒤에도 이 일 때문에 화가 잔뜩 나 있었다. 멀쩡한 결혼식이 이지경이 되어버렸는데 화가 안 날 리가 만무했다. 분명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송해나가 권씨 집안 안주인이 되었을 텐데, 이렇게 한순간에 사람이 뒤바뀐다고? 하지만 식장 밖에 있는 권재민은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특히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어깨에 들러 멘 원인이 가장 컸다. 그때 강윤아가 밭은 숨을 몰아쉬며 재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저 먼저 내려 줘요.” 그 말에 재민은 고분고분 하윤을 바닥에 내려주었다. 아마 윤아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불편할까 봐 그랬을 거다. “우리 이렇게 가도 돼요? 재민 씨 가족은 어쩌고…… 송씨 집안 사람들은 또 어떡해요…….” 사실 윤아는 이 일로 인해 재민에게 안 좋은 영향이 미칠까 봐 그게 제일 걱정되었다. 하지만 재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머리를 돌렸다. “오늘 많이 놀랐죠?” 윤아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입을 오므렸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얼마나 놀랐다고. 그런데…… 재민 씨는 대체 언제부터 이 일을 설계하기 시작했지?’ 재민은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검은색 자가용을 힐끗 확인하더니 갑자기 피식 웃으며 위험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우선 차에 타요. 이 일은 제가 천천히 설명해 줄게요.” 윤아는 재민을 보며 침묵했다. ‘왜 갑자기 함정에 뛰어든 기분이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도 잠시, 차는 웬 고급호텔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재민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윤아의 표정은 무시한 채 자기의 신부를 번쩍 들어 안고는 곧장 호텔 방으로 향했다. 그 사이 윤아는 재민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궁금한 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져 심히 당황했기 때문이다. 방문이 열리자마자 윤아는 큰 숨을 들이쉬며 다급히 재민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재
말이 끝나자마자 강윤아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보호하는 새끼 동물처럼 굴었다. 그 모습에 권재민은 마음이 약해졌지만 할 말은 해야 했기에 말을 계속이었다. 어찌 됐든 다시는 그렇게 놀라운 상황에 직면하고 싶지 않으니까. “윤아 씨가 저를 피해 다닐 줄은 진짜 몰랐어요. 제가 그때 윤아 씨를 찾지 못할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기나 해요?” 잘못한 걸 알았는지 윤아는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재민이 피식 웃었다. “윤아 씨를 찾은 뒤에도 저 계속 화가 났어요. 저를 믿지 못하고 떠나겠다는 마음을 품었다니. 그래서 어디 있는지 알았는데도 일부러 안 찾아갔어요. 윤아 씨도 제 감정 느껴보라고. 앞으로 또 다시 그렇게 제멋대로 굴지 두고 볼 거예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윤아는 코끝이 찡해나 재민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녀도 이번에 자기가 재민을 놀라게 했다는 걸 어느정도 알고 있다. 게다가 이미 아까 같은 위험한 눈빛을 봐 버렸으니 앞으로 절대 재민의 한계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러다 재민이 그동안 이 일을 설계했다는 걸 생각하면 미안하고 괴로워 한숨이 나왔다. “저 앞으로 다시는 이러지 않을게요. 사실 그때 저도 그렇게 많은 걸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냥…….” “그냥 뭐요? 어떻게 할지 몰라 그랬다고요? 그래서 앞으로 저 어떻게 대할지 모르겠다고요?” 재민의 부드러운 말투와 눈빛에 윤아는 잠시 멍해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윤아는 재민한테 미안한 것 투성이다. 애초에 다시 국내로 끌려온 뒤 또 아무 말도 없이 재민을 떠나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거니 말이다. 하지만 윤아도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들기 바쁘게 윤아는 마음이 괴로워 입술을 꽉 깨물고 진지하게 말했다. “재민 씨, 정말 미안해요. 저 앞으로 이러지 않을게요.” ‘다시는 재민 씨 곁을 떠나지 않을게요…….’ 재민은 부드럽게 윤아의 눈꼬리를 만지더니 미간에 살짝 입을 맞췄다.
이튿날 권재민과 송해나의 결혼식에 대한 기사는 모두 막혀 하나도 볼 수 없었다. 원래는 대대적으로 결혼을 발표하고 식을 올리려 했지만 고작 하루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이미 났던 기사마저 사라진 거다. 물론 평범한 시민들은 어젯밤 성대한 결혼식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지만 경성 내 상류 사회 사람들은 어제의 황당한 일에 대해 수군대기 바빴다. 송씨 집안에서 금지옥엽으로 떠받들던 딸 송해나가 결혼 당일 새신랑한테 버림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체면을 단단히 구겼다. 한바탕 난리가 나야 할 일인데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여론에 사람들은 이게 폭풍전야라며 오늘이 지나면 경성은 다시 시끄러워질 거라고 했다. 그날 일을 목격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토록 성대한 결혼식이 끝났는데 왜 아무 기사도 없는지 의아해했고 더욱이 신랑 신부의 사진조차 없는지 궁금해했다. 이윽고 인터넷에는 각종 추측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배추도사: 대체 무슨 일이죠? 두 재벌가의 결혼식인데 왜 아무런 기사도 없죠?] [천하제일: 나도 궁금함. 설마 말 못할 비밀이라도 있나?] [얼굴천재: 말 못할 비밀이랄 게 뭐가 있지? 두 집안에서 혼인한 건 이미 사실인데. 결혼식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 기사를 막은 건 아닐까?] …… 인터넷에서 이와 같은 추측이 생겨나는 사이, 송씨 가문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게, 어제 결혼식장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체면이 완전히 구겨졌기 때문이다. 결혼식장에서 그것도 경성의 많고 많은 상류층 인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버림받은 건 송해나의 체면뿐만 아니라 송씨 가문 전체의 체면이 깎이는 일이다. 더욱이 소문이 점점 무성해지고 있는 데다 듣기 거북한 말들도 돌고 있는지라 송해나 부모님의 안색은 특히 안 좋았다. 이런 일을 어떻게 쉽게 넘어가란 말인가? 송씨 가문이 권씨 가문과 비교할 수는 없다지만 그래도 경성의 재벌가인데 이런 억울함을 삼킨 채 그대로 넘어갈 리 없었다. 하지만 식구들이 이 일로 원한을 품고 있을 때 송해나는 갑자
송해나가 강윤아와 은찬한테 그런 짓까지 저질렀으니 권재민은 이 기회에 송씨 가문의 모든 걸 빼앗을 생각이었다. 송씨 가문, 특히 송해나와 송승철을 재민은 처음부터 가만 둘 생각이 없었다. 더욱이 송씨 가문은 현재 권씨 가문에 복수할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실종된 송해나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특히 남윤정은 딸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생각에 잠도 자지 못하고 음식도 거르며 매일 사람을 동원해 송해나의 수색 작업을 해댔다. 그리고 그때, 송해나는 갑자기 제 발로 돌아왔다. “사모님, 아가씨께서 돌아왔습니다.” 가사도우미가 정문으로 들어오는 송해나를 보자 다급히 남윤정이 있는 거실로 달려가 식을 전했다. 그 소식에 남윤정은 온 몸을 떨더니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달려갔다. 문 앞에 선 낯익은 사람이 자기 딸 송해나가 맞다는 걸 확인하자 남윤정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딸에게 달려가 와락 껴안았다. “해나야, 대체 어디 갔었어?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때 2층 서재에 있던 송승철마저 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다급히 달려 내려왔다. 그렇게 곧장 정원까지 달려나간 송승철은 대문 앞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모녀를 보자 얼른 두 사람을 품에 껴안았다. “엄마, 저 괜찮아요.” 송해나는 어머니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그때 남윤정이 송해나를 찰싹 때리며 꾸짖었다. “너 이 계집애가! 어떻게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질 수 있어? 엄마랑 아빠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송해나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부모님을 보자마자 두 사람이 자기 때문에 마음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알아챘다. 그 순간 미안함이 몰려왔다. 그때 송승철도 입을 열었다. “해나야, 너 어디 갔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송해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너무 걱정할 거 없어요.” “그래. 얼른 들어가자.” 송승철은 송해나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해나야, 요 며칠 어디서 지냈
권재아는 당연히 강윤아와 은찬의 표정과 행동을 눈치챘다. 두 사람의 반응이 지극히 정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저도 모르게 서운해났다. 예전의 강윤아도 권재아를 믿지는 않았지만 이토록 경계하는 표정을 짓지는 않았는데. 어찌 보면 이것도 모두 업보다. 업보가 쌓이다 보면 갚아야 하고. “아무데나 앉아.” 재민이 자리를 권했지만 윤아와 은찬의 표정을 보고난 뒤라 권재아는 자리에 앉을 마음도 사라졌다. “재민아, 나 윤아 씨랑 잠깐 얘기하고 싶은데.” 권재아는 재민을 보며 의견을 물었다. 윤아한테 직접 물으면 동의하지 않을 테니까. 재민은 윤아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만약 예전 같았으면 재민도 당연히 거절했을 테지만 결혼식 덕분에 권재아가 자기와 송해나를 반대했다는 걸 알았기에 어찌 보면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 어느 정도 안심했다. 윤아는 재민이 동의하자 긴장한 듯 그의 손을 잡았다. 재민은 윤아의 손등을 두드리며 안심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은찬이 데리고 있을 테니까 여기서 누나랑 잠깐 얘기해요.” 윤아도 긴장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재민이 떠나자 거실은 순간 조용해졌다. 윤아는 옷자락을 꽉 잡은 채 잔뜩 긴장한 채로 굳어 있었다. 그때 한참 동안 할 말을 생각하던 권재아가 입을 열었다. “우선 먼저 사과할 게. 그때 그 일은 내가 잘못했어. 윤아 씨를 가두면 안 됐었는데. 나중의 일도 그 일 때문에 벌어진 것 같아 나도 마음이 안 좋아.” 윤아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말은 하지 않았다. 권재아는 윤아가 아무 대답이 없자 말을 이었다. “은찬이를 잃어버렸을 때도 나 죄책감에 시달렸어. 찾으러 다니기도 했는데 결과가 안 좋아 그때부터 후회도 했고.” 권재아는 잠깐 숨을 돌리더니 말을 계속했다. “솔직히 전에는 윤아 씨 별로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나중에 내가 윤아 씨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그랬구나 알게 됐어. 내가 송해나를 몰랐던 것처럼. 그날 권
“지금 돌아가는 거 정말 괜찮아요?” 강윤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권재민을 바라봤다. 어찌 됐든 재민은 사람들 앞에서 송씨 집안의 체면을 깎아내렸는데 지금 이렇게 돌아가면 무슨 일이 생길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재민은 오히려 걱정하기는커녕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요. 전 괜찮을 거니까. 제 여자가 돼서 저 믿어야죠.” 재민은 말을 마친 뒤 윤아에게 살짝 입을 맞추고는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권씨 집안 식구뿐만 아니라 송해나의 부모님도 있었다. 오늘 모든 사람이 한곳에 모였다. 재민은 사람들을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 분위기는 몹시 어색했다. 파혼 때문에 양가 식구들의 표정은 모두 어두웠다. “권재민!” 권건하는 아들이 오는 걸 보자 바로 호통쳤다. 권재민이 한 짓은 식구들의 신임까지 망쳤기 때문이다. 게다가 권건하는 피해를 만회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사과까지 해야 할 팜이다. 권건하는 재민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때 재민이 사람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말했었죠.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그런데 그 말을 믿지 않다가 이제 와서 저한테 책임을 묻는 건가요?” 재민은 말하면서 부모님을 바라봤다. 그 말에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재민이 씩 웃었다. 솔직히 그는 아버지를 매우 존경했었다. 하지만 전에 했던 일을 떠올리면 이젠 참아줄 수도 없는 정도다. 어찌 됐든 윤아를 다치게 했으니까. 송해나의 부모님도 있는 자리이기에 만약 자기가 굴복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일을 오히려 망칠 수 있었다. 때문에 재민은 송승철과 남윤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두 분 하실 말씀 있나요?” 두 사람은 권재민을 빤히 바라봤다. 이윽고 송승철이 콧방귀를 뀌며 권씨 집안 사람들을 둘러봤다.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애초에 혼담을 꺼낸 건 분명 권씨 집안이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강윤아라는 말에 권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윤아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힘든 일을 많이 겪었고 늘 다른 사람의 타깃이 되었어요. 재민이가 너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 그녀를 연루시킨 거죠.”“재아 씨가 지금 걱정해도 소용없어요, 재아 씨부터 잘 챙겨요.”윌은 재아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자, 재아 씨 기분 전환하러 갔다가 나중에 우리 집에 가요.”그 말을 들은 권재아는 얼굴이 빨개졌다.“얼굴이 왜 빨개지는 거예요? 내가 옆에 있었으면 재아 씨가 좀 더 편하게 잠들 거예요.”윌은 웃으며 농담했다.재아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 된 채 그를 한 대 때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날이 저물자 바다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이따금 파도가 아련하게 일기도 했다.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간간이 등불이 있는데, 등불은 그다지 밝지 않고 군데군데 있어서 밤하늘의 별과 서로 잘 어울렸다.재아는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한 걸음씩 폴짝폴짝 뛰어갔다. 귓가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득하고도 고요했다.윌은 재아의 뒤에서 몇 걸음 걷다가 재아가 전혀 알아채지 못하자 성큼성큼 몇 걸음 앞으로 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으로 감쌌다.재아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손잡고 싶은 거면 얘기하지 그랬어요.”재아의 표정이 너무 도도해서 윌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긁었다.“그러게 누가 재아 씨더러 아무것도 모르래요?”술도 밥도 배불리 먹었으나 그 뒤로 딴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재아는 윌 덕분에 배불리 먹었고 지금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윌의 손을 잡고 있자니 따뜻한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힘에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백사장을 따라 한참을 걸은 후에야 마침내 윌이 말한 그 ‘재미있는 곳’에 이르렀다.재아는 어두컴컴한 불빛 속 나무 밑에 숨어 있는 해먹에 하마터면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여기가 재밌는 곳이에요?”“재미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올 거잖아요?”윌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올라탄
회의가 끝난 후, 권재아는 권현우가 그녀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고 여전히 당당하게 걸어 나갔지만, 사무실로 돌아온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조하고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재아는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재아는 권재민에게 이 일을 알리려 문자를 보냈지만, 그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재아는 윤기태에게도 이 일을 말했다. 기태도 분노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아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며 화가 났지만 재아를 먼저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이런 결과는 대표님도 원하지 않겠지만, 정말 방법이 없잖아요. 자책하지 마세요, 권재민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분명히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태의 위로가 전혀 소용이 없었고 재아는 여전히 괴로웠다.재아의 이런 모습을 본 기태는 더는 방해하지 않고 그녀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늦은 시간, 재아는 여전히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권재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만 했다.갑자기 넓은 손이 재아 앞에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재아는 화를 내려다가 윌임을 발견했다. 순간 화가 난 얼굴이 미리 설정된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아, 윌,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귀국하지 않았어요? 돌아왔으면 나한테 말해주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내가 공항으로 데리러 갔을 텐데.”윌은 재아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풀고 책상을 돌아 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눈빛은 재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보고 싶어서 돌아왔어요. 알려줬으면 어떻게 서프라이즈를 해줬겠어요. 왜 이렇게 피곤한 얼굴이죠? 날 봤을 땐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어요.”윌이 그녀 앞에 서자 재아는 윌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살짝 윌의 몸에 기대며 풀이 죽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윌은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 보여 더는 강요하지 않고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주차장에서 오래 기다렸는데도 안 내려와서 야근하는 거 아닌가
권재민은 강윤아의 움직임을 추적한 뒤 곧바로 현진성과 합류해 구출 계획을 논의하고 애스릭이 숨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려 했다.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변장하고 다가갔다. 애스릭은 분명 그들을 경계할 것이고, 외딴 섬에서의 일을 겪었으니 애스릭의 경계와 의심이 더 강해지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만반의 계획을 세워야만 윤아를 구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같은 시간, 국내에 있던 김소혜와 서만옥은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날 기슭에 도착한 후 재민은 아이를 안배하고 나서 소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혜는 발신자가 실종된 지 오래된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재민아, 드디어 엄마한테 전화했구나. 그동안 네가 나한테 전화 안 해서 우리도 방해할 엄두가 안 났는데 너는 지금 어때? 윤아는 행방불명이야? 윤아를 구해낸 거 아니었어?”소혜는 재민의 전화가 희소식을 전하러 걸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재민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민의 전화를 받은 후 마음이 매우 흥분되고 기뻤기 때문이기도 했다.재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소혜의 이렇게 흥분한 말투를 들으며 차마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서 아이를 돌볼 가족이 있어야 했다. 비록 의사가 있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그는 이를 악물고 실정을 소혜에게 말했다.“엄마, 내 말 좀 들어봐요. 마음을 다잡고 들어요, 일이 이렇게 됐어요…… 엄마가얘기한 거랑 상황이 좀 달라요. 윤아가 처음에 구출되긴 했는데 다시 잡혀갔어요.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건 내가 계속 그 사람의 경계에 잠복해있었기 때문이에요.”재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혜가 말을 끊었다.“뭐? 구출되긴 했는데 또 잡혀갔다는 건 뭐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엄마, 내 말끝까지 들어봐요.”재민이 이마를 어루만졌다.“이 일은 당분간 자세히 말하기 어려워요. 제가 윤아를 데려가고 나서 자세히 말해줄게요.”
고승혁 교수가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애스릭은 더 심하게 때렸다. 거의 몇 시간마다 가서 괴롭혔는데 매번 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말로 욕했지만 고승혁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강윤아는 고승혁 교수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생기는 것을 보고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사실, 애스릭이 매번 고승혁 교수를 데려갈 때마다 그가 입을 열어 경험을 전수해주도록 했을 뿐 매번 그를 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승혁 교수는 돌아올 때마다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얻어맞았다.고승혁 교수는 베티를 치료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배신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원망스러웠다.“고승혁 교수님, 저 때문에 교수님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협조하고 절 그냥 내버려 둬요.”“괜찮아요,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요. 나는 견딜 수 있어요. 나는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까지인 보고 싶어요. 언젠가 내가 정말 견딜 수 없게 되면 자연히 그들에게 항복할 거예요. 그때 가서 윤아 씨가 나를 원망하지 말아주세요.”고승혁 교수는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는 듯 윤아를 향해 농담까지 했다.“교수님은 이미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내 아이를 지켜줬어요. 이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교수님에게 감사해요. 교수님이 앞으로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윤아는 고승혁 교수의 이런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정말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이건 내 인생 경험의 일부일 뿐이에요.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에요. 굴복해 연명할 수 있지만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고승혁 교수는 윤아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그녀를 안심시켰다.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우리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교수님의 연구원에 많이 투자할게요.”“그럼 먼저 윤아 씨에게 감사해야겠어요.”“고승혁 교수님, 우리는 함께 목숨 걸고 싸운 사이이니 그냥 저를 윤아라고 부르세요, 윤아 씨는 너무 서먹서먹해요.”윤아가 고승혁을
메리는 인큐베이터 옆에 있는 의사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를 한 번 쿡 찌르며 낮은 소리로 주의를 시키었다.“존, 사람들이 묻고 있잖아요.”“네?”존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권재민은 옆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내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어요.”“아기는 지금 상태가 안정돼 있고 아까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놀라지 않았어요. 달이 차지 않아 태어났기 때문에 면역력이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존은 마침내 반응을 보였고 무서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재민은 가볍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고개를 숙이고 인큐베이터 안의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생명이 정말 완강하다고 느꼈다.강윤아에게 그렇게 많은 위험이 닥쳤는데도 이 아이는 이렇게 안전하고 무사하게 태어났고, 게다가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앞으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눈앞의 작은 아이가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건강할 수 있다면, 아이의 엄마 윤아는 분명 더 완강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윤아는 아슬아슬하게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재민은 보면 볼수록 더 반가웠고 윤아가 출산할 때 옆에 없었지만 수술실 밖에 있었으니 좀 멀지만 어떻게 보면 윤아 옆에 있은 셈이다.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윤아 옆에 꼭 있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재민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현진성과 한기현도 옆으로 다가가서 아기를 바라보았다.“윤아 씨를 많이 닮아서 참 예뻐. 앞으로 윤아 씨처럼 예쁘게 자랄 거야.”기현은 한참을 쳐다보았다.옆에 있던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윤아 씨와 닮은 줄 알아요? 갓난아이는 이목구비도 다 비슷비슷하고 쭈글쭈글한 모습이 늙은이 같다는 생각만 들어요. 게다가 머리카락이나 눈썹도 다 나지 않았잖아요.”“진성 씨…… 왜 그래요? 분명 윤아 씨를 닮았잖아요?”핀잔을 들은 기현은 얼굴이 빨개졌다.“재민아. 진성 씨 봐, 너의 아이가
한기현은 다시 권재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숨은 곳을 알려줬지만 강윤아가 끌려갔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재민은 재빨리 이곳으로 달려와 둘러보았으나 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스러운 얼굴로 기현과 현진성을 힐끗 쳐다보았다.“기현아, 현진성 씨, 윤아 씨는요? 윤아 씨가 왜 여기에 없죠?”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재민 앞에서 감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기현은 슬며시 진성을 쳐다보고 몰래 진성을 쿡 찔렀다. 진성은 방심하다 밀려났고 뒤를 돌아보며 기현을 노려보았지만 기현은 고개를 숙이고 더는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묻고 있잖아요! 윤아 씨는요? 내 아내 어디 갔어요? 당신들 윤아 씨를 어디로 데려갔어요?”재민은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소리쳤다.진성은 미안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보며 재민에게 그가 떠난 후의 일을 대충 말했다.“권재민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윤아 씨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애스릭에게 빼앗겼어요. 제가 부주의했어요. 그 방에 숨으면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애스릭이 이렇게 교활하게 두 가지 계략을 쓸 줄은 몰랐어요.”“권재민 대표님, 지금 저를 때리고 욕해도 저 할 말이 없어요.”이 말을 들은 재민은 온몸에 살기가 피어올랐고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진성을 노려보며 허리에서 총을 꺼내려 했다. 기현이 황급히 그런 재민을 말렸다.“재민아, 일단 흥분하지 마, 방법이 있을 거야. 같은 편이니 우릴 도울 수 있어. 게다가 인터폴이야. 너 인터폴을 죽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윤아 씨부터 찾아야지. 지금 우리는 진성 씨가 필요해.”기현은 재민의 허리춤의 총을 쥔 손을 힘껏 눌렀다.진성도 황급히 위로했다.“권재민 대표님,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밖에 비도 오고 바람도 심해서 빨리 갈 수 없으니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예요.”“게다가, 우리 배에는 위치추적 장치가 있어요. 아주 은밀한 곳에 두었으니, 그들은 분명히 찾을 수 없
한기현은 사람과 함께 현진성의 사람들을 따라 수술실의 암도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길을 따라가다가 애스릭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기현은 그들 모두가 깨끗이 떠난 줄 알고 있었는데 애스릭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사람을 남겨 그들을 몰살시킬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기현의 눈에 갑자기 핏빛이 솟구쳐오르더니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맨주먹으로 몇 사랑을 해치웠다.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독살스러운 모습까지 보여 상대방을 놀라게 했다.그 사람들은 애스릭을 보낸 후 매우 내키지 않았다. 한바탕 뒤지고 나서 도망갈 계획이었는데, 결국 절반 정도 뒤지다가 기현 일행을 만났다. 특히 기현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듯 보였다.그들은 원래 기현 일당과 대충 싸우려고 일부러 그들을 놓아주려 했는데 기현이 달려들어 그들 몇 사람을 쓰러 눕히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기현 일행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기현이 상대방의 생각을 알면 지금쯤 후회해 죽을지도 모른다. 몇 분 동안 아무렇게나 싸우면 될 일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또 한 번 미뤘다.몇 분 동안 싸운 후, 쌍방은 모두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기현의 왼팔이 그 무리의 두목을 누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총을 쥐고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어 쌍방이 모두 시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현은 그들의 타협을 기다렸고, 그 사람은 반격의 기회를 기다렸다.이 팀장은 원래 타협하려 했지만, 지금 이 지경에 이르니 승리욕이 자극되었고 지금은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머리를 숙이면 부하들이 그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그는 승부를 내려고 했다.이때 폭발음이 드디어 또렷하게 들렸고 그 사람은 이때 갑자기 손을 썼다.기현은 그가 성급히 달려들 것을 예상한 듯 손을 빼 권총을 내던지고 날쌔게 상대방의 손을 잡아 그의 등 뒤로 돌렸다. 두 발은 날렵하게 그의 허리와 배를 걷어찼고 곧 사납게 그의 몸을 비틀어 앞을 가
현진성은 애스릭의 부하들이 베티를 데려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애스릭이 아직도 단념하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애스릭이 베티를 포기하거나 그들과 함께 죽으려고 이 보이지 않는 장치를 작동시켰다고 생각했다.애스릭이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베티를 데려가서 부활을 꿈꾸고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애스릭은 고승혁 교수와 강윤아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진성은 갑자기 눈꺼풀이 미친 듯이 뛰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윤아와 고승혁 교수가 숨어 있던 방에서 총소리가 났다.그는 급히 아까의 그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 보니 그가 배치한 사람 중 몇 명은 상처를 입었고, 또 몇 명은 이미 의식을 잃었으며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었는데 의사였다. 그 의사는 아기의 인큐베이터를 필사적으로 안고 있었다.진성은 그 의사의 시체를 땅에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손이 인큐베이터 가장자리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어서 아주 많은 힘을 써서야 그 손을 쪼갰다. 진성은 겨우 옆 깨끗한 곳으로 메고 가서 그를 살며시 내려놓았다.의사를 내려놓은 진성은 돌아서서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를 살펴보았다. 아기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매우 달콤하게 자고 있었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모두가 엎드려 있어서 진성은 한동안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하나 뒤집어 보았다. 애스릭의 사람들이 그냥 들어와서 그들을 다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고승혁 교수를 데려갔을 줄은 몰랐다.진성은 갑자기 윤아가 떠올랐다. 총소리가 그렇게 컸으니 윤아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 리 없다. 진성은 급히 모퉁이의 병상 옆으로 달려갔다.이불 속이 울퉁불퉁했다. 그는 처음에는 고승혁 교수 등이 윤아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고 생각했지만 열어보니 안에 베개가 있었다. 진성은 멍해졌다.“이 방은 밀폐되어 있는데 그들은 어디에 잡혀간 거지? 게다가 방금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으니 문으로 나갔을 리가 없어.”진성은 조급했다.갑자기
고승혁 교수는 숨을 헐떡이며 말하고는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에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애스릭이 그 배에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고승혁 교수는 깜짝 놀라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현진성은 그에게 대답할 방법이 없어서 그를 붙잡고 비밀 통로로 갔다.권재민도 급히 한기현에게 연락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그러나 신호를 받자마자 재민은 기현 쪽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기현아, 무슨 일이야?”재민은 노심초사하여 급히 물었다.“방금 그 사람들이 들이닥쳐 시스템을 파괴했어. 최선을 다해 구조했으니 지금은 30분 정도 지연될 수 있어.”“시스템 복구가 시급한데 지금 그들과 싸우는 중이라……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어.”기현은 시스템 감시실에서 애스릭의 부하들과 싸우며 관제탑에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권재민과 이쪽의 상태를 보고했다.보고하는 과정에서 재민은 기현의 끙끙거리는 소리까지 듣고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기아현, 너는 어때? 버틸 수 있겠어? 시스템 쪽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지금은 복구할 방법이 없어. 이젠 네가 나설 차례야.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시간은 안 남았어요, 재민아.”“상대편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우리 사람은 이 몇 명밖에 없어. 버티기 힘들 것 같아, 재민아, 빨리 와.”기현이 헐떡이며 소리쳤다.재민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지만 윤아가 이쪽에 있었기에 결정하기 어려웠다. 윤아가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매우 걱정했다.진성은 재민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내 부하들이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습격당했고, 그자들이 통제실의 시스템을 파괴했대요. 지금 우리 부하들이 그들과 싸우고 있는데 기현이도 그들에게 얽매여 시스템을 고칠 기회가 전혀 없어요…… 나는 윤아 씨가 마음에 걸려요.”재민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가요, 여기 내가 있을게요. 기지 안에 내 사람이 있어